[서울=동북아신문]영국의 대표적인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폰태너 박사는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가장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상징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미술은 상징의 보고다. 상징이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 따위를 어떤 유사성에 의하여 비유하는 것이다.

며 칠 전에 중국 수묵화의 거장 두자령(杜滋齡)작가의 그림 한 점을 감상한 적이 있다. 2013.11.9~11.14 . 예술의 전당에서 서화전시회를 개최한적 있는 두자령(1941년생)은 중국화 영역에서 독특한 스타일과 우수한 실력을 갖춘 중국 천진시 10대 화가중의 한사람이다. 아래의 그림은 그 때 전시한 그림중의 한 폭이다. 이 그림에는 2 천 여 년 전의 역사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  두자령(杜滋齡)작가의 그림 전시 포스터  
전국시대의 혼란이후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인 진(秦)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한 한나라는 끊임없이 북방 흉노(몽고)의 침략에 시달렸다. 한나라는 화친정책을 펼치는 등 흉노족에 많은 양보를 했는데 한무제에 이르러서야 흉노족에 버금가는 군사력으로 흉노족의 침입을 견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전쟁에 큰 영향력을 끼친 꽃나이 여성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한나라 제왕의 외동딸 왕소군(昭君)이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 <흉노전>, <후한서> 등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 종 문화양식을 통해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흉노족이 한나라를 쳐들어와 함략 직전에 협상이 이루어진다. 흉노족의 황제는 한나라황제의 외동딸 왕소군(昭君)을 첩으로 보내주면 더는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협상조건을 제안한다. 

한나라 황제는 많은 양보를 했었어도 그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장군들을 모아 놓고 작전방안을 검토해봤지만  한나라의 군사력으론 당해낼 수 없었다. 그 사연을 알게 된 왕소군은 황제인 아버지에게 그것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흉노족제왕의 첩으로 가겠다고 청을 들었다. 그렇게 왕소군은 18세의 꽃나이로 흉노제왕의 첩으로 가게 된다. 

말을 타고 시집 가는 날, 함박눈이 많이 내렸다고 하는데 한나라 황제인 아버지도 울고, 백성들도 모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그 후 그 때 그 장면을 묘사한 시 한수도 전해오고 있다.

 (昭君怨)소군원

昭君拂玉鞍 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
上馬涕紅頰 말을 타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今日漢宮人 오늘날 한나라 궁녀가
明朝胡地妾 내일 아침 오랑캐의 첩이 되는도다

역사적 이야기가 담긴 이 그림을 보노라니 마음이 짠해나면서도, 자기 한 몸을 던져 한 나라를 구한 어린 여인의 담대하고 위대한 모습에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는 역사를 낳고 역사는 또 대대손손 전설과 스토리로 전해진다. 위대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지는 않는 그런 이야기와 역사를 후세들에게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한번 깊은 마음으로 그림속의 여인을 바라본다.

소군묘(昭君墓)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훅호트(呼和浩特)시의 남쪽시교 9키로 떨어진 대흑하변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서한시기에 건축된 소군묘는 2천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소군묘는 중국 최대의 한묘(漢墓)중 하나이다.

▲ 천숙 약력: 중국 벌리현 교사 출신. 집안 심양 등지에서 사업체 운영,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 시 수십 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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