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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계란을 위해 말하고 싶다-허란설헌 국제문화대상 수상자 김설작가를 찾아서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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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24  09: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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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설 작가, 허란설헌 국제문화대상 상패를 걸고
[서울=동북아신문]“김작가님은 천성적으로 행복한 사람 같아요. 얼굴에 행복이 활짝 피어있는걸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덕분에 행복을 가꿨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김설(원명 김순금)작가의 미소뒤에 조용히 따르는 미묘한 그림자, 오늘 필자는 그 그림자를 찾아 조명해 보기로 한다. 

반전(反战)의 인류성적 주제로 한때 한글문단의 각광을 받았던 장편소설 “굴러가는 태양”은 그후 중문으로 번역 출판되여 수차 재판에 해적판까지 합세해 중문 도서시장을 휩쓴 뒤, 그 여세로 영화 개작의 가치를 인정받아 첫 중국 조선족 한글 작품 중문개작 영화로 시나리오가 완성돼 현재 제작중에 있다고 한다.

“시나리오 각색도 제가 친히 맡았습니다. 너무나도 눈물겨운 우리 민족사의 피와 살이 얽혀있어 남에게 맡기기에는 어딘가 심장이 허용치 않았습니다.”

조선족 마을에서 태여나 조선족 소학교,중학교,대학교 모두 한글로 마치고 조선민족 출판사에서 17년간 한글 편집만 해왔던 그녀가 중문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니,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으나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중 하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녀에게 과연 불가능은 어떻게 길을 내주었을까. 

한에 얼룩진 가족사를 새기고

“머나먼 흑룡강의 배꼽 같은 마을에서 귀뚜라미와 합창하며 자라던 어린 시절, 설명절이 돌아오면 홀로 술을 마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님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고국땅으로 돌아가실 수 없는 향수(乡愁)도 짙었겠지만, 그보다도 오직 둘밖에 없는 남동생을 한사람은 이남의 국군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이북의 인민군으로 전장에 나가 서로 피흘리며 싸우게 하지 안으면 안되였던 그 운명이 너무나도 한스러웠던 것입니다. 끝내는 민족의 허리를 동강낸 그번 싸움에서 전사하고야만 막내 동생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 놈이 제 형의 총에 맞아 죽었는지도 몰라!’하고 가슴을 치시며 통탄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바로 이러한 아버님의 ‘한’과 가족의 ‘한’이 저의 어린 가슴속에 창작의 불씨를 심어주었습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 충동, 외치고 싶은 충동, 몸속에서 이름 모를 용암이 무시로 꿈틀거리는둣한 느낌, 이런 원시적 충동이 문화적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차츰 그것은 가족의 ‘한’뿐만이 아니라, 우리 200만 조선족의 ‘한’이요, 나아가서는 7천만 백의동포의 ‘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편소설 《굴러가는 태양》은 바로 이런 시점에서 그 ‘한’을 적고자 애썼던 모지름일 뿐입니다. ”

2010년, 김설작가가 허란설헌 국제문화 대상을 수여받고 시상식에서 한 수상소감의 한단락이다. 늘 행복해보이는 귀여운 얼굴에 자그마한 몸매와는 달리 오래동안 마음속에 간직했던 깊은 뜻과 장장 반세기동안 가족에 얼룩진 한을 절절히 담은 김설작가의 수상소감은 시상식장 전 장내를 감동의 눈물과 짜릿한 동감의 전률에 휩싸이게 했다. 

   
▲ 시상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시상소감을 말하는 김설작가
“지금도 형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눈도 감지 못한채 구중천을 떠돌며 동강난 겨례땅을 맴돌것 같은 막내 삼촌의 영혼이 무시로 내 창작에 자명종이 되여준다”는 김설작가의 창작담 또한 짙은 감동이 없이는 들을수 없는 것이였다.

여기서 잠시 김씨 일가를 거슬러 보면, 아버지 (고)김갑규씨는 일제에 반항해 혈혈단신 중국땅을 밟은 열혈 1세로, 중국에 집을 마련해 놓고 한반도에 돌아가 부모님과 두 동생을 모셔오던중 큰동생이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국군이 되고, 몇년후 작은 동생이 인민군으로 편성되여 남북전쟁때 골육상잔의 기막힌 아픔을 몸소 겪은 “상처가족”이었다. 이런 연유로 어려서부터 문과뿐만 아니라 리과성적(수학,물리 등) 또한 남달리 뛰여나 리과선생님들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김설은 대학입학시험때 결연히 리과아닌 문과를 선택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내 길에는 늘 불행이 친구처럼 따라다녔다 할가요, 그래서인지 행여 불행이 없는 기간에는 오히려 뭔가 잘못된듯한 비정상적인 느낌이 들어 조금 불안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며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김설작가의 얼굴에서는 말그대로 불행이란 그림자마저 찾아볼수 없었다.

불행의 터전에 행복을 가꿔

“지지리도 가난한 년대에 태여나 지지리도 광란적인 시대를 겪고 지지리도 편벽한 마을에서 지지리도 오래동안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어린시절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는 김설작가의 서술속에 숨겨진 그림들을 하나하나 찾아 맞추어보면.

일여덟살까지도 기차를 구경하지 못한 아이들이 한데 모여 “황소하구 기차가 싸우면 누가 이기지?” 하고 승부를 걸며 놀았다. 이처럼 편벽한 “배꼽마을”에까지 광란의 시대는 빼놓지 않고 기어이 찾아와 우매를 첨가제로 미친듯이 난무했다.

학교 “모택동사상선전대”중 나이가 가장 어린 꼬마 김설은 “선전대”를 따라 순회공연을 다니는 동안 너무도 지치고 힘들어 어느날 대합창을 할 때 무대우에서 “모주석초상”을 든채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 바람에  “모주석초상”이 삐뚤어져 하루 아침에 그만 “반동파”로 되고말았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반동파”를 투쟁했다. 높다란 걸상우에 아스라니 세워놓고 “반동죄증”을 대라며 고함치고 윽박질렀다. 누군가 무섭게 소리치며 발아래의 걸상을 힘껏 걷어차자 “반동파”아이는 땅에 폴싹 꼬꾸라져 코피를 쏟았다. “그때 땅에 엎드려 코피를 쏟으면서도 나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제 커서 기자가 되겠다고, 기자가 되여 이 모든것을 써내고야 말겠다고.”

고열이 찾아왔다. 40도 이상의 고열이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동안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떠나갔고 대신 저승사자가 어슬러어슬렁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날 어둠이 가고 태양이 떠오르는 시각, 해의 정기를 받았는지 기적마냥 죽음의 길을 멈추고 간신이 눈을 떴을때 페엽의 반 이상이 이미 저승사자에게 먹혀 없어지고 나머지로는 숨쉬기조차 괴로운데 해골같은 몰골은 더우기 어딜가도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저 아이는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니 같이 놀면 안된다”는 부모들의 충고에 아이들은 귀신을 피하듯 저만큼 달아났고 그렇게 시작된 휴학은 연속 2년이나 계속되였다.

   
 
아이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아버지가 천신만고 밀방을 얻어왔으나 독약이 든 약이여서 마시기도 어렵거니와 마셨다해도 삭이지 못해 결국 모두 토해버리고 만단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맹세했어요. ‘난 죽지 않겠다, 난 살겠다. 살아서 말할것이다. 살아서 써낼것이다 하고.”

살기 위해 독약을 마시고, 마신 다음 삭이기 위해 코를 막고 입을 다물고 가능한 숨을 쉬지 않으려 애쓰는 어린 소녀, 여덟시간에 한번씩 2년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맞는 주사바늘에 엉뎅이가 모두 곪아 간호사의 눈물까지 자아내는 그 불행한 나날에도, 아무도 놀아주는 이 없는 고독한 개똥벌레 신세에,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극심한 절망속에서도 소녀는 거짓말같이 행복을 찾아낼줄 알았다. 바로 글을 읽고 있을 때면 행복했다. 행복해서 침식도 잊고 온갖 불행도 모두 잊었다. 교과서든 신문이든 잡지든, 그림책이든 장편소설이든 시집이든 문건이든, 언니들의 숙제책이든 아버지의 장부책이든… 벽을 도배한 종이든 이미 만들어진 딱지든 심지어 변소에 놓고 쓰는 휴지에까지 글만 들어있으면 무조건 집어들고 벌레가 옥수수를 갉아먹듯 모두 읽어치웠다.

“글을 읽을 때만큼 행복한 적은 없었습니다. 기운이 없어 책을 받쳐들지 못해 벽에 세워놓고 모로 누워서 읽었는데 그래서 시력이 나빠지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때 읽었던 책들이 가장 기억에 생생하고 그만큼 통째로 훗날 내 창작의 밑거름이 되여주었습니다. ”

이렇듯 김설작가는 어려서부터 극심한 불행속에서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을줄 알았고 그런 행복은 또한 그녀를 도와 불행을 이겨내는데 일조를 했다. 2년 남짓한 동안 병마와 싸운 끝에 초보적으로 몸을 추스린 소녀는 그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니 류급(留级)하라는 학교의 권고와 부모님의 뜻을 마다하고 오히려 월반(跳级)을 신청해 사람을 놀라게 했다. 결국 시험 월반 첫학기에 평균학점1등을 따내여 월반자격을 당당히 인정받고야 말았다.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

 “이 자리를 빌어 우선 저를 키워주고 품어주신 흑룡강의 비옥한 땅에 감사를 드립니다”하고 김설작가는 수상감사의 앞자리에 고향땅을 언급했다. 그 땅에서 유년과 청춘을 보냈고 그 땅에서 가정을 꾸려 엄마가 되였으며 또한 그 땅에서 짙은 희로애락의 극치도 맛보았다.

13살 나는 해 겨울 초중을 졸업한 김설은 가정의 생활난(부모가 장기환자거나 반장기환자였음)으로 공부를 계속할수가 없었다. 서북풍이 살을 에이는듯한 엄동설한, 생산대의 탈곡장에 나타난 애숭이 소녀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 연유를 묻자 그만 북받치는 설음을 금할수가 없어 소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어버렸다. 헌데 하루의 로동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며 집에 돌아와보니 부녀주임이 찾아와 부모님을 설득하고 있을줄이야.  “한창 공부할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다니요. 더우기 이애는 공부도 특별히 잘한다면서요. 여기 집집에서 모은 식량과 푼돈이 있으니 애를 학교에 보내세요. ”

   
▲ 기층어민 생활을 체험하면서
더덕더덕 기운 바지에 우산같은 아버지의 옷을 줄여입은 아담한 체구의 여학생이 늦게나마 고중 1학년에 입학하였다. 허나 간거한 생활과는 달리 김설의 학습성적은 비단 문과뿐만 아니라 리과에서도 뛰여난 성적을 보여 학급 수학경색에서  1등을 하는가 하면 글재주와 말솜씨가 남달라 혼자서 학교 방송을 전담당해 나갔다. 이같이 우수한 성적으로 고중을 졸업했으나 광란의 년대가 아직 끝나지 않은 당시 농촌호구의 그녀가 갈길은 오로지 귀향뿐이었다. “당시 내손을 꼭 잡고 ‘너같은 인재가 대학에 갈수 있는 날이 꼭 올것이니 급해말고 기다리라’던 교도주임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듯 합니다.”

4년후 과연 광란의 시대가 끝나고 정상적인 시험제도가 회복되였다. 허나 김설의 애타는 바램과는 달리, 싞구중 유일한 로력인 김설이 떠나면 장기환자인 어머니의 치료비와 전 싞구의 식량을 담당해야 하는 생산대에서 진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죽고싶도록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에 매일 하늘을 쳐다보며 구원을 청하던 중, 흑룡강신문에서 “각급 기관과 생산대는 지식청년들이 대학시험을 치도록 적극 지지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부모님과 상논해 결연히 대학시험 치러 모교로 떠났다.

허나 이때는 이미 시험준비 기한이 단 20여일밖에 남지 않았고 복습자료들도 모두 나간뒤라 김설은 남의 자료를 빌어 내용을 베끼는 일에 낮시간의 전부를 허비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누워(아버지 친구의 아홉싞구 단칸방 집에 얹혀 있다보니 저녁 9시 전에 반드시 불을 꺼야 했다) 어둠속에서 눈을 뜨고 낮에 베낀 자료의 내용을 되새기군 했다. 이렇게 치른 대학시험에서 김설은 놀랍게도 전 성 어문성적 장원을 하고 높은 총점으로 중앙민족대학에 진학하였다.

한심한 벽지로부터 갑자기 북경이라는 대도시에 와 공부하게 되자 처음엔 모든것이 서툴었으나 대학교 3학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주견이 바르고 목표가 명확해져 문학 창작과는 거리가 먼 일부 선택과문은 수강하지 않고 북경대학에 가서 문예리론, 소설미학 등 특강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그때 북경대학에서 들은 특강이 저의 창작의 길에 시종 밑거름이 되여주고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후 농민의 딸인 김설은 국가에서 배치한 성 정부의 사업강위를 억울하게도 권세가의 자식에게 빼앗기고 원하지 않는 벽지로 밀려났다. 운명은 또 다시 그녀를 조롱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는 김설은 1년도 채 안되여 성 민족출판사 편집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하였다.

거의 매년 우수편집상, 우수번역상, 우수작품상 등을 받으면서 업무실력과 창작수준이 비약하는 한편, 생활상에서는 엄청난 불행이 악귀마냥 덮쳐들었다. 결혼한지 5년만에 남편이 중풍을 맞아 쓰러졌다. 시댁에서 개인경영을 하다가 업청난 빚을 져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그 엄청난 빚을 감당해야 했다. 설명절이면 빚쟁이들이 모여들어 온갖 모욕과 자극으로 빚재촉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마구 달려들어 물건을 빼앗거나 문을 부수어버리는 등 폭행까지 저질러 4살짜리 어린 딸애(현재 청화대학 졸업)가 식칼을 들고 병석에 있는 아버지를 보호하는 등 기막힌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보다못해 출판사 지도부(당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의 로일대 지도자들이였던 허영섭,허광일,안병균 등)에서 상의하여 김설가족의 일부 절박한 빚을 출판사가 대신 물어주고 후에 김설의 월급과 원고료에서 조금씩 떼내어 갚도록 배려하였다. 고맙고 미안하고 감격한 마음에 김설은 더 열심히 일을 하고 결사적으로 돈을 벌었다. “하루 24시간동안 단 두세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원고를 쓰고 번역을 하고 책을 편찬하는데 썼습니다. 밥을 먹고 배설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혹 쓰다가 막히면 다음 문구를 생각하는 동안 부랴부랴 밥을 먹고 가능한 물을 적게 마시는 것으로 배설을 줄였습니다. 오죽하면 어린 딸애가 선생님이 어머니에 대해 작문을 쓰라고 하니 ‘우리 어머니는 너무 바빠서 내가 말을 하려면 예약을 해야 합니다’라고 썼겠습니까.”

   
▲허란설헌 국제문화대상 메달, 상패,우승컵과 영예증서를 가족과 나눠 들고
그렇게 빚을 갚은 마지막 원고인《작문5용사전》의 편찬을 마치고 탈고한 뒤, 병원에 가 검사를 했더니 백혈병이라는 무서운 진단이 내려졌다. 당시 장기환자인 남편은 외지로 료양을 떠나고 없고, 집에는 어린 딸애와 장기간 빚에 시달린 스트레스로 유방암에 걸려 대수술을 받고난 시어머니만 계실뿐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할수가 없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수가 없었으나 또한 이렇게는 도저히 떠나갈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혈병을 치료해 살려면 반드시 필요한 그 엄청난 돈은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헌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옹군 하루밤 동안 평소에 듣고싶던 음악을 나지막이 틀어놓고 와인을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며 눈을 감고 조용히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뿌듯했어요. 그리고 후회스럽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내게 다시 생명을 준다고 해도 나는 또다시 이렇게 걸을것 같고, 그래서 내게 패배한 모든 불행들이 오히려 불쌍하게까지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문뜩 행복이란 남의 인정보다 자기자신의 만족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후 약 반달동안 김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그저 세상을 즐기기만 했다. 우선 밥을 천천히 감칠맛나게 씹어서 천천히 삼켰다. 평소에 먹고싶었던 과일들을 모두 사서 하나하나씩 음미하며 먹어보았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한껏 부르고 무도장에 가서 춤을 실컷 추었다. 강변에 서서 애독하던 시를 목청껏 읊조리고 뒤산에 올라가 산꼭대기에 버티고서서 “기억하라, 내가 세상에 왔었다”고 소리쳤다. 물론 사랑하는 딸애를 데리고 갈수 있는 곳은 모두 다니며 즐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두주일을 보내고나서 15일째 되던날 아침, 김설은 새벽 일찍 일어나 사진첩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동생과 남편사진, 딸애사진을 모두 예쁘게 갈라서 정리한 다음,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문을 나서며 속으로 웨쳤다: “아버지, 이제 셋째딸은 아버지께 효도하러 가렵니다.”

헌데 기적이 일어났다. 김설은 결코 죽어지지 않았다.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도 유쾌해졌으며 식욕도 훨씬 좋아진듯 싶었다. 병원에 가 다시 검사를 해봤더니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단다. 사실은 그동안 너무도 지치고 피로하고 영양이 따라가지 못해 극도로 일그러진 몸이 이상한 수치를 나타내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오진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김설의 업무 및 창작의 성과는 나날이 상승되여 소설《라이락크 향기》, 수필《생명이 씹히는 소리》, 평론《부족점의 매력》등 다수 작품이 발표되였고 그중 평론《부족점의 매력》은 동삼성 문학평론 유일 우수상을 받았다. 따라서 사회적위치도 나날이 상승되여 한국 문화공보부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해 해외동포 언론인 연수 및 상관 세미나에 참가, 더우기 노태우대통령 부부의 초대까지 받는 등 영광을 지녔으며, 서울대학교에서 특허 장기 연수를 받음과 아울러 객원교수로 일부 대학교들에 출강도 하였다. 또한 종합잡지 《은하수》의 주필로 부임하자마자 발행부수를 곱배로 끌어올리는 등 업무상의 뛰여난 실적도 올렸다. 바로 이시기 김설작가는 그의 대표작인 《굴러가는 태양》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중국현대인물사전《东方之子》에 수록된 입선증서

계란을 위해 말하고 싶다

 “이제 저는, 단순히 아우성을 치거나 민족의 ‘한’에만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비내리는 오솔길을 조용히 거닐며 생명을 사색하고 인류를 사색하고 싶습니다. 가령 계란으로 바위를 쳐야 한다면 저는 계란을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묵묵히 비바람속에 있는 풀과 벌레들 사이에서 그들의 희로애락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글로 화면으로 그려내고 싶습니다.”

말그대로 김설작가의 대다수 작품은 기층 백성의 립장이나 마음을 대변한 것으로, 그녀가 완성한 시나리오 중에 이미 영화로 제작되여 전국 영화관들에 공개 상영된 《헤이뎬(嘿店)》을 말하자면, 직장에서 한심하게 짓밟히고 소외당하고 온갖 궂은 일은 다 하지만 결국 상응한 대우를 받지 못해 돌아버릴 지경에 이른 한 불쌍한 백성의 이야기를 유머로 엮었다. 이 영화는 비록 그 제작 과중에 제작대오 주요 인원(감독, 프로듀서 등)들의 불성숙으로 예기 목표와는 거리가 있지만, 현시기 중국 블랙 유머 대표작으로 자신의 독특성과 지위를 가지고 전국 대소 영화관에서 3주간 공개 상영, CCTV 영화 채널에 수차 상영, 여러 대소 지방채널에 수시로 상영되며 블랙 유머 관중과 평론가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김설작가는 겸손하게 웃으며 “비결이란 없습니다. 그저 자신심을 가지고 노력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중문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몇곱의 중문을 읽어야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을 잘 익혀야 한다면서 자습으로 중문을 한족과 겨룰만큼의 수준으로 연마하기까지는 아이큐보다 중요한것이 시간 활용이였다고 강조했다.

“천재라느니 미인작가라느니 앞으로 더 큰 국제상 후선인이라느니 하고 떠드는 말들에 저는 조금도 동감하지 않습니다. 성취는 노력한만큼 얻어지는 것이고 기대는 가능한만큼 해보는 것이며 자세는 낮추는만큼 여유로와지고 생활은 즐기는만큼 다채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허위나 허상 따위에 질색인 저는 종래로 팬이나 독자들에게 싸인 같은걸 해준적이 없고 공식장소에도 될수있는한 얼굴을 내밀지 않으며 그냥 조용히 나름대로의 일에만 집착할 뿐입니다. 생활상에서도 명브랜드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갈끔하고 미감에 손상없으면 그만입니다. ”

   
▲ 베이징의 김설 작가는 다년간 중국 및 동남아 나라들에 비 서명으로 시나리오 등 여러 작품을 창작해준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봄, 일본문화진흥회로부터 "국제문학공로대상"을 수여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김설작가의 겸손한 자세와 지성인의 정신적 여유로움 및 생활애 대한 진실한 태도를 보아낼수 있다.

지방으로부터 북경에 들어온 사람들중 대부분은 돈을 버는 직업에 종사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김설작가는 물론 돈이 매사에 유용하고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모든것을 돈으로 가늠할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저도 처음엔 회사를 차려 친히 경영도 해보고 객원교수로 대학교들에 강의도 나갔었습니다만 어떤 일을 해봐도 창작을 할때만큼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북경의 왕부정신화서점 (王府井新华书店), 서단도서빌딩(西单图书大厦) 등 대형서점들에서 팔리고 있는 내 소설을 두고 저자가 아닌 고객의 신분으로 독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의 그 흥분, 크고작은 영화관에서 내가 쓴 영화의 표를 사서 관중들과 함께 입장해 관람하며 내가 쓴 영화에 웃고 열광하는 팬들을 바라보는 그 짜릿한 즐거움이야말로 억만원을 주어도 바꿀수 없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북경 모 영화회사 예술 총감독 겸 자유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하고있는 김설작가는 최근에 조선족 주인공이 40년대 할빈에서 여러 민족을 단합해 항쟁한 또 한편의 참신한 시나리오를 내놓아 북경대학 유백(刘勃教授)교수 등 유지인사들이 영화로 제작하려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돈이 일어서 말할 때 모든 진리는 침묵하고, 권리가 일어서 말할 때 모든 존엄은 죽어 있으나, 자유만이 한켠에서 방뇨하노라! (当金钱站起来说话时,所有的真理沉默;当权力站起来说话时,所有的尊严装死;唯独自由在一边尿尿) ”

자유작가 김설은 오늘도 이렇게 말하며 이 혼탁하고 리기적인 세상에서 여전히 자기의 땅을 깨끗하게 사수하며 새로운 작품창작에 심혈을 모으고 있다.

   
▲ 김설작가, 이동렬 동북아신문 대표 및 류재순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장의 취재를 받다

김설 약력:

주요작품 
장편소설: 《굴러가는 태양》(한글), 《慢慢醒来(천천히 깨어나다)》(중문)
수필:《생명이 씹히는 소리》
평론:《부족점의 매력》
영화 시나리오:《헤이뎬(嘿店)》,《神秘九号(신비한 9호)》등
드라마 시나리오:《最后的证据(마지막 증거)》,《雪花静飘飘(눈꽃이 고요히 날리고 있다)》등
번역 저서:《비천무》,《나의 부자꿈》등 3천여 만자
편찬 공구서:《라이브 한자어 사전》(한국 출판),《작문 5용사전》(중국 출판),《韩汉大辞典》(홍콩 출판) 등 2천여 만자.
수차 해내외 대상 수상.

사회직함
중국 시나리오 협회 회원,  중국 작가협회 회원,  
세계문화 연구회 아시아 회원

지명도
작품이 한국 “예술세계”, “현대문학”등 주요간물에 소개, 연재
작품 단행본이 “中国图书馆(중국도서관)”, “首都图书馆(수도도서관)” , “北京图书馆(북경도서관)” 등 대도서관들에 수장
개인 업적이 1998년 중국현대인물사전 《东方之子(동방지자)》에 수록
인물소개가 중국 대표사이트《百度百科(바이두백과)》《搜狗百科(써우거우백과)》등에 수록
소설《굴러가는 태양》이 인류 반전(反战)주제로 유엔 도서관에 수장
인물사진이 미국 세계여성 전람관에《동방 지성 여성》대표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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