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현재 울산 거주
새벽

낯익은 고독의 소리는 새벽에 온다
베개머리 송사하듯 사뿐히 들어온다
이불을 거둬내고
속벌까지 벗겨내고
살속으로 들어온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고독의 소리는 새벽에 온다
미움도 원망도 퍼내고
아픔도 덜어낸다

이 새벽에 고독은 바쁘다
푸른 머리카락을 올올히 쓰다듬으며
뜨거운 입김을 불어
가슴을 탱탱하게 다진다

이 새벽에 고독은 흐른다
차가운 달을 담고 흐른다
마른 입술에 이슬을 떨구며
생동한 아침을 연다

2018.9.29

 

복조리

책 하고 아무런 촌수도 없는 복조리가 서재에 걸려 있다
고상한 책들의 기품에 주눅 들어 먼지처럼 매달려 있다

3년전 그믐날 밤
조리장수 할아버지가 어느 가게에 들렀는데
한바퀴나 돌았는데
누구도 거들떠 보지를 않는데
촌스런 푸시시한 여자가
꼬깃한 오천원으로 복조리를 받았다

그믐날에 태여나 그믐날에 팔려야 하는 복조리
그 생을 지키려 그믐날을 새야 하는 조리장수 할아버지
당신은 따뜻한 사람입니다
하며 허리를 꺾었다

촌스럽고 푸시시한 여자
한번도 써보지 못한 근육을 어색하게 풀어 본다
그렇게 서재에서 꼬박 3년을
딱 하고 멍 하고 퀭 한 근육들로 수음 한 여자의 밤을
서재의 쪼각을 잡고 지킨다
여자의 고독을 먹고 지킨다
복조리는

2018.9.29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퇴근하고 티비를 켠다
허리 끊긴 《박하사탕》* 이 흐르고
경찰이 물고문을 들이 댄다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대학생의 일기책에 삶이 아름답다고 씌여있다

고픈 배를 냉장고의 캔맥주로 위로한다
종일 요리한 손이 밥을 챙기지 않고
《나는 문학이다》** 를 요리하기 시작한다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111명의 처절한 삶들이 굴레굴레 접시에 담긴다

음식물 쓰레기 차가 새벽2시를 두드리고
아저씨의 거친 숨소리가 나의 잠을 배웅한다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고달픈 하루가 길게 간다

털커덩 철문이 열리고
"어메~ 아침 햇살 참 곱다~"
시한부선고를 받은 옆집 아줌마가 아침을 시작한다
정원의 설악초도
반짝이는 드레스를 걸치고 사뿐히 들어선다

삶은 또 시작된다


*이창동 감독, 설경구 주연의 영화
**장석주의 "나는 문학이다"

2018.10.3


기(氣)
 

무분별하게 움직인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들어가고 나가고
빠르다가 늦었다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오르는 반항을 포근하게 감싸고
학춤을 추는 클래식
우주의 차거운 블랙홀을 두드리며
유리와 같은 냉정으로
발톱까지 감전시키는
시(詩)다
모래삼킨 가슴에
꽃을 피운다

 2018.10.2

 
동천강에 주름 하나 만들며
 

새벽에 동천강변을 걷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오

골목사거리 대추나무 있는 집 왼쪽으로 꺾어들어
조글주름 한풀 덮힌 할매슈퍼까지 가면
들어서자 쫓냐며 툴툴대던 잠은 저만치에 떨어지고
탈탈대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오
둑방의 난간을 가랭이 찢어지게 타고 넘으면
그새 동천강변이 성큼 다가오고
왈왈대며 흐르는 동천강 돌담길을 건널 때는
무겁게 누르던 오만가지 잡생각이 짝짜그르 소리도 없이 도망가오
일망무제 코스모스 밭길을 나비처럼 돌다가
메타세콰이어길에서 발걸음이 늘어진다오
김소월 한용운 서정주
유치환 윤동주 박목월
김춘수 천상병 신경림
아아아 많고 많은 시인들의 시들이 그루그루 마다에 열렸다오
시인들의 마을쯤
서천(西川)에서 오는 친구 만나 숨막히게 포옹하면
작은 젖송이가 아프다고 클클대고
그도 잼있다고 소리지르며
손을 쥐고
방어진 바다로 나가는 거지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자색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


2018.10.11

*노래 "시인의 마을"중에서

 

숙향이
 

재가하는 엄마 따라 애비 바꾸는 나를
놀리기만 하고 누구도 놀아주지 않는데
입꼬리 올리고 다가 오던 숙향이
공부는 싫어 해도 자기 세계에 취해
입꼬리 하늘거리는 비밀스런 아이

변덕 많은 내가 싫어할땐
저 쯤에서 혼자 놀다가
부르면 인츰 달려오는 아이
입꼬리는 저만치에 걸고…

들놀이 갔다가 어른들의 꽃놀이에 놀란 나는
숙향이의 깊은 눈에서 비밀을 찾았고
밤 새며 엄마와 새 아빠의 꽃 심는 소리를 들었다

또래에서 달맞이 꽃을 먼저 본 숙향이
14살에 가출하더니 유괴범의 새끼를 낳았다
빨간 범새끼에 겁먹은 나보고 입꼬리 올리던 숙향이
언니 같고 엄마 같고 선생님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가야 했고
들판에서 놀면 안되었고
그래서 숙향이를 담장너머에 홀로 두었다

그렇게 오래 떠돌다가
담장을 넘으려는데
그새 너무 높아진 담장은 올라 갈 수가 없었고
나는 담장안에 갇혀버렸다

바람이 날리고 먼지가 쌓이고
간혹 비도 찔끔대더니
파란 생각들이 올라온다

저 담장우로 하느작이는 풀은 숙향이의 입꼬리었다

2018.10.9

 

수선화는 위험해

수선화는 위험해
봄에 피였다가 지고
이 가을 웅크리고 힘 모으는

한 잎의 송엽국,
쏟아진 물 같이 퍼지더니
수선화의 마당을 덮어버렸다
싸우지마라
네 땅, 내 땅이 어디 있냐
다육이 동네로
치자꽃 동네로 발을 붙이고
함께 사는 글로벌 세상
송엽국이네
다육이네
치자꽃들이 응원한다

수선화가 싹텄다!

차거운 가을밤의 방황도
터진 발가락의 진물도
따뜻한 거름으로 덮어준다
얘들아 이제 나와도 괜찮단다
수선화의 기사들이 우후죽순 나붓기고
온 정원이 수선화의 이야기로 끓어 넘친다

수선화는 위험해
봄에 피였다가 지고
이 가을 웅크리고 힘 모으는

 2018.11.13

 

하루살이
 

처음에는 애비의 무덤을 팠다
팔아먹을만 한 것을 찾았다
어미의 늙은 가죽도 팔고
남편의 심장도 팔았다
그러다가 팔아먹는데 아주 이골이 나
얼굴도 팔고 젖통도 팔고 엉치와 성기까지 팔며 돌아다니다가 그만에
완전히 돌아버려
해도 팔고 달도 팔고 별들마저 팔아먹었다
산도 강도 바다도
꽃도 풀도 나무도
눈에 띄기만 하면 다 팔았다

그래도 시줄 하나 제대로 못 쓰고
하루를 팔아 하루를 살려고
오늘도 세상에 나섰다
거지같이

20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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