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안나 시인의 시집 '양파의 눈물'을 읽고서

▲ 허경수 약력: 연변대학 조문학부(통신 학부) 졸업. 前화룡시 제약공장 선전과 과장. 현재 정년 퇴직. 1972년 연변일보에 시 '림해의 아침에'를 발표로 선후하여 시, 소설, 실화를 문학지에 여러 편 발표. '내 이야기' 2편이 한국 KBS방송국 우수상 수상.

[서울=동북아신문]햇빛과 공기는 무상으로 동식물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 그저 주기만 하고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의 참뜻인 것이다. 만약 인간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공기 속에 산소가 없는 것과 같다. 

고안나 시인은 뜨거운 인간애가 있기에 무생물체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발견 할 수 있었고 그들과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표제 시 '양파'에서 역력히 표현되고 있다.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조리 다 보여 줄 수 없는/ 간직해 두고 싶은 꿈/ 고통 없이 끝나고 싶었던 나는/이미 죽고 말았는지 몰라/ 꽃봉오리 하나/ 밀어 올리지 못한 나 위해/ 당신, 울어 줄 수 있는가" 

식물학적 견지에서 볼 때 이미 밭을 떠난 양파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일인칭 수법으로 양파를 의인화하여 인간의 대변인으로 내세우고 있다. 양파를 깔 때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시인은 이를 역비유법으로 양파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양파는 간직해 두고 싶은 꿈이 있었다. 여기서 시인은 사람은 사랑이 있어야 아름다운 꿈이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한생을 살면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가는 사람, 즉 친구나 동료를 위해 동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울어 줄 수 있는가? 사람의 눈물은 희로애락의 표달 방식이다. 사랑이 고갈되어사막과 같은 사람은 친구의 속상한 마음을 위로해 줄줄 모르고 눈물은 더욱 흘릴 줄 모르는 것이다.

 '술병'의 후반부를 보아도 사랑이 없으니 버림을 받은한 인간의 처지를 알 수 있다. "한 번쯤 어느 심장에 강하게  박혔을/ 그러다가 헐렁해진 마음에서 뽑혔을/ 생각은 깊고 가슴은 뜨거운/ 노숙자처럼,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달빛처럼/ 알 수 없는 당신의 행방/ 빈껍데기의 설음 아는가 / 제 갈길 찾지 못 하고/ 중얼 거리는 소리, 알듯 말듯" 한 때는 속에 내용물 '사랑'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손에 받들려 다녔다. 그러나 사랑의 내용물이 사라지니 버림을 받게 된 빈 술병, 이것이 바로 인간애가 메말라서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된 일부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인 것이다. 상표가 아무리 현란하고 아무리 비싸도 술이 없으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빈 술병마냥 고급 지식 분자나 세상의 최고 갑부라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세상은 그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사람은 뜨거운 인간애를 품고 살면 희망찬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파도'에서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꽃이 되고 싶은 순간/ 열 번 스무 번/ 순간, 피었다 지고 마는/ 꽃잎들/ 얼마큼 애간장 태우면/ 허연 소금꽃 피겠는가/ 보란 듯, 달려오는 저것은" 무정하고 차가운 파도, 일반인들이 보기엔  한낱 범상한 물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의 눈길로, 여성의 섬세한 혜안으로 차가운 파도에서 희망을 품은 아름다운 꿈을 발견해 낸 것이다. 파도는 솟구쳐 올랐다가 쓰러졌다가 다시 솟구치는 칠전팔기의 정신이 있는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뜨거운 인간애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꿈을 품고 살면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요절되지 않고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랑이 사라지고 마음이 폐허가 되면 후회막급인 폐인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빈 깡통 몸으로 울었다'에서의 전반부를 보아도 이를 감지 할 수 있다. "바람의 악다구니 견디다 못해/ 빈 깡통 하나 몸으로 운다./ 길 떠난 낙엽들 덩달아 운다. 여기서 시 '술병'에서의 뜻을 강조 심화시키고 있다. 버림받은 빈 깡통이 몸으로 우니 동병상련인 낙엽들도 덩달아 우는 의인화 은유법으로 같은 처지에 처한 사람들끼리 동정 위로하며 살아감을 보여주었다. 

사랑이 고갈되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입으로 울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울게 되는 것이다. '몸으로 운다.' 시인은 일망무제한 모래밭에서 사금을 캐어 내듯이 평범한 언어에서 별 마냥 반짝이는 시어를  다듬어 내였다. '꿈꾸는 돌'과  고추'에서도 사랑이 안받침 된 참신한 시어들이 창출 되었다. 무생명체 돌이 꿈을 꿀 수 있으니 하물며 살아 숨 쉬고 사유가 있는 사람임에랴?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고 도전을 받게 하는 좋은 시구다. 고추는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살려는 대변인으로 되어 자연스럽게 사랑의 화신으로 다가온다.     

'이슬'의 후반부에서 순간을 살아도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함의 의미를 승화시키고 있다. "당신 꿈 깨어날 때/ 어차피 이별이지/ 마음 붙잡지 못하는 풀잎에/ 맺힌 투명한 씨앗/ 몸 뒤척이는 유리구슬"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이슬의 한 생은 너무나도 짧다. 그러나 이슬은 순간을 살아도 희망을 품은 씨앗처럼, 순결을 상징하는 유리구슬처럼 깨끗하게 살았다. 사람은 언제까지 사는 것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랑이 안받침댄 꿈이 없이 천년을 산들 일반 동물과 무슨 구별점이 있으랴? 사랑의 가슴으로 시를 앓고 사랑의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는 고안나 시인의 마음의 꽃밭에서 수많은 꿀벌들이 모여들 아름다운 꽃들이 다시 피어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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