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평, 북방문단의 작은 '거인' 강효삼 시인

[서울=동북아신문] 본지는 강효삼 시인의 시 3수와 그에 대한 '인물평'을 싣는다. 동포문학8호에 실린 시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에서는 장차 차별을 견뎌내며 성장할 손자의 장래를 걱정하는 시인의 깊은 염려가 담겨져 있고, 이번 동포문학 8호 특별상을 받은 '나무와 아버지의 눈물'이란 시는 아버지를 "나무"로, "나무의 강이었다"는 것을 비유하며, "객지살이 나그네로 누비면서/ 디아스포라로 평생을 살 때/ 영락없이 가슴 한복판 샘처럼 눈물이 고였으련만/겉에 드러내지 않았음은…"라고 나무와의 아버지의 심적 상사점을 찾아 시적 날개를 펼쳐 모진 세월을 견뎌온 "아버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중국조선족 호미문학상을 받은 시 '진눈까비'는 "늦게 찾아온 기억"에서 "어젯날의 못다한 사랑" "다시 즐겁게 향수하지만" "슬프게도 까만 망각의 원점으로 희귀"하는 어슴푸렷한 기억과 같은 "4월의 진눈까비"에 대한 인생의 하염없는 애상을 드러내고 있어 독자들의 가슴을 애잔하게 해준다. <편집자 주> 

▲ 강효삼(姜孝三) 약력 : 필명 효문. 1963년 처녀작 발표. 지금까지 시, 수필 아동문학 작품 등 500여 편 발표. 한국 '중국조선족 호미문학상' 등 문학상 10여 차 수상. 아동시집 ‘봄비’와 시집 ‘먼 훗날 저 하늘 너머’ 출간.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작가협회 회원, 전국소수민족작가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
태어나 처음 고 작은 이마를 어루만져준 것은
대한민국 서울의 부드러운 바람이었고
백일 맞이 축복으로 입은 옷도 서울에서 만든
죄꼬만 한복이었는데
한날한시 태어난 대한민국 아이들과 달리
출생보조비도 산후 혜택도 없는
외국인 중국 동포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
 
차별은 서러운 것 어찌 보면 가난보다 더 서러운 것
그러나 어찌하랴,
그냥 그 땅에 눌러있어야 하는 것
상금도 뿌리치지 못한 그 얄미운 가난 때문일까
우린 왜 이토록 못살기에……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
 
하지만 아이는 아이로다
어디에 살든 더는
디아스포라로 평생을 사는
그런 삶 제발 되풀이 되지 말기 갈구하는
이 할아버지 걱정이사 내 알 바 무어랴
배고프면 대한민국 아이들과
같은 목소리로 운다
같은 본새로 밥투정도 하고 발버둥도 치고……
그게 오히려 더 눈물겹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
 
그때문일까
때로 햇빛조차 인색한 사글셋방에서
걸음발타다 넘어져 터트리는 울음이
나에겐 예사롭지 않아
아무도 일깨워주지 않았건만
아무리 같으려 해도 같을 수가 없는
이방인의 처지를 저 어린것이
벌써부터 감지한 것일까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
 
태어난 곳이 조국이라 하지만
고향은 될지언정 조국은 못 되는 너
아이들이 천국이고
태어난 아이들이 희망이라 하지만
희망도 천국도 못 되는 너
 
그래도 그냥 그 땅에 남아있다면 몰라도
어느 날 문득 풍운이 돌변하여
천방지축 제 호적의 나라로 돌아와야 한다면
이제는 낯선 땅이 되어버린 제 땅에서
와도 가도 다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차별보다 더 두렵고 무서울 것만 같은
 
아,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한 내 손자
 
 
나무와 아버지의 눈물 

 
나무도 하나의 강이라는 것을
흐르는 물소리 들리지 않아도
밑동만 덩그렇게 남은
고목의 그루터기에서 보았다
홀림 체로 누워있는 돌기돌기 나이테들이
나에겐 마치 나무의 강줄기 같았다.
그곳에 흐르는 것 물일까 눈물일까
 
나의 아버지도 한 그루 나무였다
오래된 나무
세상은 넓어도 한번 발 묻은 곳에서
나무처럼 떠나지 않은
아버지의 내면에도 강이 있었다
그 강에 아버지의 눈물이 흘렀다
 
인생의 절반은 눈물이라 했거니
사나이라고 왜 눈물이 없으랴
더더구나 생의 그 많은 날을
객지살이 나그네로 누비면서
디아스포라로 평생을 살 때
영락없이 가슴 한복판 샘처럼 눈물이 고였으련만
겉에 드러내지 않았음은
아버지도 한 그루 나무처럼
흐르는 눈물을 감출 줄 알아설까
 
대신 아버지는 눈물을 땀으로 쏟아
거친 살갗 찢고 내밴 땀 동이는
고달픈 아버지를 미역 감기며
흐르고 흐르다가 홍수가 범람한 뒤 남은 강바닥처럼
깊은 흔적으로 패이었으니 주름이 저리 무성토록
아버지는 속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 흘리셨을까
 

진눈까비 치매에 걸려 아리숭한 계절이
기억을 아주 상실해버릴가봐
증발해버린 추억을 되살리려
흘러간 세월을 뽀야니 몰고온다이윽고 상처만 남기고
까맣게 지워버린 망각우에
목메이게 살아온 지난 날의
하얀 기억들이 질편하게 눕는다
그리하여 이제 돌아버린 과거가
또다시 반가웁게 회복된것인가잊어버리고 살기엔 너무 아쉬운
어제날의 못다한 그 사랑
다시 즐겁게 향수하지만
늦어 찾은 기억이라선가
얄궂은 해살과  바람이 야금애금 걷어가서
슬프게도 까만 망각의 원점으로 희귀한다
그래도 잠시나마 잃었던 기억 되찾은 고마움에
감격의 눈물 주루르 쏟는 4월 진눈까비 
북방문단의 작은 “거인”  강효삼 시인 
강효삼시인(1944년 3월생)은 체구가 작다. 하지만 그는 시로 시대의 량심과 겨레의 정신을 표현하면서 애면글면 중국조선족 북방문단을 지켜온 작은 거인으로 중국조선족시단에서 위망이 높다. 어린시절, 고향 연수현 평안향 성광촌에서 멀리 떨어진 마가점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삼촌의 집으로 오가며 책을 읽는데 재미를 붙여왔던 그가 습작을 시작하기는 1961년부터다. 이해 5월부터 고향의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지만 그가 한 문우와 함께 결성한 “북방송화강문학청년습작회”라는 문학동아리가 공안국의 뒤조사를 받았고 동아리가 해산당하면서 시련도 맛보게 된다. 이 시기 강효삼은 신문에 시 “봄이 나간 날”을 발표하면서 창작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하지만 “10년 동란”과 함께 이 첫걸음마저 좌절당하고 그는 하루아침에 “현행반혁명”, “사상반동분자”라는 감투를 쓰게 되였고 28차 비판투쟁에 교직에서 해고당했다. 시인은 심신을 억압하는 정치감투를 쓰고 혹심한 로동개조를 하면서도 책과 필만은 놓지 않았고 쉬는 틈을 타 논이나 밭두렁에서 남몰래 글을 끄적거렸다. 결국 “10년 동란”이 결속되면서 시인은 억울한 루명을 벗고 다시 교단에 섰고 평소 부지런히 글농사를 한 덕분에 1978년에는 흑룡강작가협회 회원으로, 얼마후에는 향정부 문화소로 전근해 마음 놓고 시를 창작할수 있게 되였다. 1963년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지금까지 강효삼시인은 시, 가사, 수필, 아동문학 등 천여편의 문학작품을 발표하고 아동시집 《봄비》, 성인시집 《먼 후날 저 하늘너머》 등 두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등 여러가지 문학상 30여차 수상했다. 강효삼시인의 성인시집 《먼 후날 저 하늘너머》를 두고 “민족현황에 누구보다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고있다”, “인도주의적 시심이 주류를 이루고있다”(한춘), “농민의 아들로서 전원목가적인 넉두리”(최삼룡), “우리 시단의 제1푸닥거리군으로서의 대표작품”(김룡운)이라고 평론가들은 높이 평가하고있다. 최근 강효삼시인은 몇십년을 살아온 북방 우리 민족의 삶을 조명한 련작시 “북방의 강(외 4수)”을 썼는데 이 시에 대해 평론가 리태복은 “개체적생명보다는 조선족이라는 단체적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있는 이 작품은 디아스포로라적 집단으로서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현실을 상기시키며 이를 토대로 이 집단의 운명과 정체성에 대한 시적탐구를 보여주었으며…시 전편에는 이 집단에 대한 서정적주인공의 깊은 애착, 파국적현실에 대한 절망과 애달픔이 충일되여있다”고 평가했다. 강효삼시인에게 있어서 문학은 열번을 넘어지면 스무번을 일어나게 한 신념의 쌍지팽이였고 수십길 얼음의 봉쇄를 뚫고 솟아난 마음의 젖줄기였다. 그래서 강효삼시인은 돈도 명예도 아귀다툼도 다 잊고 오로지 시를 낳는 그 뙈기밭만을 홍수가 쓸어가지 말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안고 열심히 시심의 그 작은 뙈기밭을 가꿔가고 있다. (글·사진 김인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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