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줄 왼쪽 세 번째 이옥희 선생님, 다섯 번째 이육원 원장 일곱 번째 박홍영 회장, 전춘화 부장, 필자 김태권 순이다.
[서울=동북아신문] 얼마 전에 나는 즐겁고 의미 있는 여행을 했다.   한국공자문화센터 박홍영 총재와 전춘화 홍보부장, 한국공맹연구원 이육원 원장과 함께 아침 7시에 여행길에 올랐다. 우리를 태운 소형버스는 잠실역에 잠깐 머물렀다. 함께 할 일행이 한 명 더 있다고 한다. 반갑게도 버스에 오른 이는 연변의 유명한 소품배우 이옥희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서서는 아침의 찬 공기를 가르면서 제법 기분 좋게 질주했다. 350km 장거리 여행은 이옥희 선생님의 합류로 내내 재미있는 대화와 웃음소리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오전 11시 30분쯤 우리 일행은 목적지인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향교(靈巖鄕校)에 도착했다. 한국공자문화센터와 영암향교 서로의 교류를 위한 상호방문차 오늘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 박홍영 총재(왼쪽)에게 꽃다발을 드리는 영남 향교 담당자  
영암향교 김치성 전교와 20여 명의 유생들이 우리 일행을 따뜻이 맞이하고 곧 환영행사를 시작하였다. 박홍영 총재는 김치성 전교의 환영인사에 답하여 "한중 유교문화 교류에 서로 협력하고 많은 가르침을 주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방문단은 영암향교의 역사와 발전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쌍방은 유교문화에 대하여 분위기 좋게 환담하였다. 향교란 성현(聖賢)을 제사 지내는 행사기능과 유생(儒生)을 가르치는 교육기능을 갖고 있으며, 지방민의 유풍 진작, 미풍양속 고취, 도의생활 앙양 및 교화, 향촌사회 상부상조, 지방의 공론과 문화를 생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인 영암향교는 조선조 건국이념인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영향으로 1420년 세종2년에 건립되어 유지하다가 1950년 6.25 전란에 전소 되었다. 1957년에 복원하여 지금까지 유지 관리하면서 지금은 경서학원을 운영, 서예와 관내 각 초등학교, 중학교 방문예절,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경전보존회도 운영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다움의 본성 다섯 가지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말하고 있다.
인(仁)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불쌍한 것을 보면 가엾게 여겨 정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고, 의(義)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는 마음이다. 예(禮)의 사양지심(辭讓之心)이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며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고, 지(智)의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신(信)의 광명지심(光名之心)은 중심을 잡고 항상 가운데에 바르게 위치해 밝은 빛을 냄으로써 믿음을 주는 마음이다. 
 

  이것만 해도 오늘 향교방문 여행길에 정말 큰 공부를 한 셈인데 이 분들의 덕담에서 나는 더 재미있는 지식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동대문, 남대문은 익숙히 들어온 터지만 그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었다. 공자의 유교 철학을 건국의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은 유교의 5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넣어서 한양의 4대문을 만들었단다.
동대문은 인(仁 )을 일으키는 문이라 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했고, 서대문은 의(義)를 두텁게 갈고 닦는 문이라 해서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하는 문이라 해서 숭례문(崇禮門), 북문은 지혜(知慧)를 넓히는 문이라 해서 홍지문(弘智門)으로 부른다고 한다. 참으로 재미있다. 그냥 지나치던 4대문에  대해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기회가 되면 4대문 현장에 가 공부를 더 하고 싶어진다. 환영식과 환담이 끝난 후 영함향교의 김치성 전교의 초대로 식당에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중에 전춘화 부장의 추천으로 이옥희 선생님이 '어머니' 노래를 불러 자리를 함께 한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고 나는 유치환의 시 '행복'을 낭송하여 기분을 돋우었다. 
 
 
 
맛있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영암향교 측에서는 오후 일정으로 우리 일행을 영암군 소재 <왕인박사유적지>로 안내하였다.
유적지에 도착하여 우리가 처음 구경한 것은 <천인천자문(千人千字文)>이었다. 그냥 천자문은 많이 들어봤는데 천인천자문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오늘 관광 해설사로 자처해 나선, 박식한 한 유생(이름 미상)의 설명으로 <천인천자문>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천인천자문>은 왕인박사의 업적을 기리고 박사께서 남긴 ‘소통과 상생’의 정신을 널리 세계평화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한중일 명사 1,000명이 육필(肉筆)로 천자문 한자씩을 지극정성으로 쓰고, 이를 영암의 석공이 돌에 새겨 만든 뜻 깊은 조형물이란다. 이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육필로 쓴 땅 지(地)자도 들어있다. 그럼 왕인박사란 누구인가?  왕인박사는 일본 응신천황(膺神天皇)의 초빙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5세기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 해박한 경서(經書)의 지식으로 응신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그의 후손은 대대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는 화이길사(和邇吉師),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왕인(王仁)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왕인박사는 논어, 천자문은 물론 기술공예의 전수, 일본문화사상(日本文化史上)의 성인(聖人)으로 일본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의 원조가 되었다.

나는 지금으로 부터 일찍 1600년 전에 우리 민족의 성인이 일본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는 사실로 더없는 긍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며 자랑할 만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왕인사당, 영월관, 왕인박사 탄생지, 왕인박사 유허비 등 여러 곳을 두루 둘러보고 서산에 해가 기울어서야 아쉬움을 달래면서 영암향교 인사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귀로에 올랐다. 아침부터 별도의 휴식 없이 쭉 이어져 온 일정이라 귀경길에는 다들 피로할 법도 했지만 어쩐지 아침에 영암으로 갈 때보다 다들 기분에 들떴고 아기자기한 덕담과 유머로 내내 즐겁기만 했다. 더욱이 이옥희 선생님은 앳된 소녀 목소리로 동요를 여러 곡 불러 즐거움을 선물 하였고 연예인 생애에서의 재밌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었으며 앞으로 사업구상과 계획도 스스럼없이 담론하였다. 그렇게 지칠 줄 모르고 웃고 떠들던 그가 갑자기 허공을 쳐다보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전춘화 교수 
여러 해 전에 연변에서 지병으로 고생하면서 외롭고 슬프던 일이 생각난단다.  심각한 허리디스크 질환으로 전혀 걷지를 못 하는 병신이 되어, 치료차 북경 큰 병원으로 오가면서 경제상에서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해도 해결되지 않고 집에 홀로 있으면서 통증과 고독이 밀려 올 때는 모질게도 끔직한 생각까지 해 보았다. 그렇게 어둠의 방황 속에서 헤맬 때, 잃은 양을 찾는 부름 소리가 들려오고 어느 한 목사가 자진해서 치료비를 해결해 주어서 지금은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단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종교신앙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내려놓고 비우는 삶'과 '나누면서 베푸는 삶'을 살게 되어 요즘은 산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서울에서 무보수로 민들레사랑예술단을 창설하고 운영하면서 자신들의 다채로운 문예공연프로로 한국에서 고된 노동으로 고생하는 우리 동포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보듬고 달래주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밤 10시쯤 해서 우리 일행은  송파구 송파동 공자학당 이화빌딩에 도착하여 아쉬움이 묻어나는 작별인사를 고하고 헤어졌다.
 
영암 여행은 정말로 의미 있고 소중하며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한국 땅에서 살면서 서로를 원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미풍양속을 이어 받아 오상품덕-인의예지신으로 자신의 품격을 부단히 승화하고 '내려놓고 비우고', '나누면서 베푸는 삶'으로 한국 사회에서 안정을 찾고 세간의 인정을 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소원이 간절하다. (사진 공자학당 제공) 
2018년 12월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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