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조연현, 홍기삼, 김시태, 조미숙, 임무정]신상성 작가론
상태바
[평론/조연현, 홍기삼, 김시태, 조미숙, 임무정]신상성 작가론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8.12.30 10: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상상 작가론>

1. 신상성의 세 가지 문학가의 길
    조연현 (趙演鉉 한양대교수. 한국문인협회이사장)


2. 습관의 잠과 예외적 미학
    홍기삼 (洪起三 문학평론가. 전 동국대 총장)
 
3. 지식인의 수난사
    김시태 (金時泰 문학평론가. 한양대 명예교수)
 
4. 방 안’을 나서 ‘길거리’를 탐색하는 문학
    조 미 숙 (趙美淑 숭의대 교수)
 
5. 무무명과 공공명의 끝은 어디인가
   임 무 정 (문학평론가)

1. 신상성의 세 가지 문학가의 길
조 연 현(趙演鉉 전 한양대교수.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내가 동국대학교에 재직한 연수는 25.6년이 된다. 나중에 문단에 등장한 많은 학생들이 이 기간 동안에 동대東大를 거쳐 나갔다. 신상성申相星군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군이 동아일보의 신춘현상 문예의 소설에 당선된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였다. 작가로서 문단에 등장한 신군은 곧 동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박사과정에 있다.

신군의 석사碩士학위 논문이 ‘우리나라 중편소설의 구조적 연구’였는데 학위를 받은 다음 여기에 관한 평론을 다시 나에게 가져왔다. 새롭고 독창적인 이론이어서   내가 [현대문학]에 발표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신군은 작가에의 길과, 평론가에의 길과, 학자에의 길, 세가지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이 세가지 길을 그는 시험하고 있지만 그의 주력은 역시 작가에 있고 나머지 두 가지는 보완적인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문단에 얼굴을 내놓은지 아직 일천한데 벌써 이러한 처녀 창작집을 내놓을 수 있었던 그의 창작에의 열의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신군의 작가로서의 역량과 가치, 그리고 그 특성 같은 것이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지 아직은 미지수 이지만 그가 이 나라의 한 작가로서 자기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는 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이 창작집으로서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을 수 있는 일이다. 동대 지도교수로서 오랫동안 그를 지켜 보아온 나로서 그의 이러한 오늘이 내 자신의 일처럼 기쁘기 한이 없다. 그의 자랑스러운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이 출발에 박수를 보낸다.
1981년 12월 [처용의 웃음소리] 조 연 현
 
 2.  신상성의 문학세계,
   습관의 잠과 예외적 미학
홍 기 삼 (洪起三 문학평론가. 전 동국대 총장)         
         
소설이 일상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일상성의 세계를 벗어나 습관의 잠을 깨워준다는 바로 그 점에 소설이 인간사회에 존재할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소설의 내용에만 적용되는 논리가 아니라 소설형식까지도 미묘하게 작용하는, 대단히 복잡한 논리의 확장으로 확산된다. 그 중의 몇 가지로 가령 스타일, 언어, 플롯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시詩 문학에서 특히, 그러한 현상을 빈번하게 목격하는 일이지만 스타일, 언어 등 일련의 시적詩的 형식미학에서 한 시인이 성과를 거두면 그 성과에 매달려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거세시키고 그것을 추종하는 무수한 인류들의 무참한 행위 역시 일종의 ‘문학의 관습의 잠’에 가담하는 어리석은 것이라 규정할 수 밖에 없고 관습의 잠을 거부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신선하고 풍부하게 이끌어 가려는 독자들의 진지한 기대와 크게 위배되는 행위이다.

신상성의 소설은 그 내용보다도 형식에 있어서 종종 예외적 미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대체 그의 소설 분위기와 크게 일치하거나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냥그 대로 다만 ‘신상성의 소설’이라는 그런 느낌만을 남긴다. 어떤 작가의 영향권에 있다거나 유행성 감각이 강하다거나 하는 종류의 무수한 소설들과 그런 점에서 단연 구별된다.

그가 누구의 영향 아래서 작품을 쓰지 않았다거나 어떤 작가의 아류가 아니라는 것, 또는 유행성 감각이 강하지 않다는 것은 때때로 그것이 극복되어 마땅한 약점일 수도 있고 꾸준히 취할 만한 강점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소설 한편 한편의 차원에서보다 작가적 기질의 총체적 문제에서 검토해 본다면 누구도 그것을 강약의 문제로 제한하기만 한다면 실로 난처한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한 작가의 문학적 특질, 또는 타고난 기질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기는커녕 실로 타당하고 너무도 분명한 일임에 틀림 없으리라. 그의 언어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눈과 그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목소리는 실로 거칠고 무례하고 섬찍한 것이어서 우리는 자칫 그런 것 속에 슬며시 감추어져 있는 강렬한 사랑, 눈물 따위를 간과하기 쉽다. 그런 모든 근거는 그의 문학적 기질에서 연유하는 게 확실하다.

그는 소설창작 뿐만 아니라 소설의 이론에 있어서 적극적이다. 문학의 여러 가지  형식에 대한 정의가 포기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불투명한 문학형식의 미학적 탐구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1960년대 이후 뜻밖에도 중편소설이 양산되었으나 그 형식이론은 최재서崔載
瑞 이후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중편소설의 이론과 실제를 처음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표된 것을 독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문예이론으로 볼 때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것이지만, 중편소설이 발표되고 있는 외국의 여러 나라에도 중편소설의 이론적 연구는 특별한 성과가 없는 실정임에 비추어 그 연구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우리는 간과 할 수 없다. 그의 소설이나 이론의 탐구는 그러나 이제 그 성과를 놓고 평가할 단계가 아니라 앞으로의 가능성의 문제를 놓고 평가할 단계에 있다. 그 가능성의 거대한 전개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에서 몇 줄의 글을 적어 첫 창작집의 간행을 축하하는 바이다.     * 1983년 독일 하이델메르크 대학에서 홍 기 삼

3. 지식인의 수난사
김 시 태(金時泰 문학평론가. 한양대 명예교수)
 
신상성申相星은 주로 지식인의 삶과 관련되는 문제들을 다루어 왔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에서는 몇몇 특수한 유형의 지식인들이 주요 인물로 선택되고 있으며, 그때마다 그들 지식인들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지식인의 본질과 존재방식 및 그 기능에 관한 문제들이 집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신상성의 소설 작품들 가운데는 이러한 플롯의 형식들이 거듭 선택되고 있다. <목숨의 끝>에 등장하는 ‘해나’의 이야기도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그녀는 더 없이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갓난아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해야 할 처지이지만, 그것이 그녀의 진실을 왜곡시키는 것이라면 스스로 ‘자아’自我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와 같은 갈등심리가 이 작품의 핵심부분을 이루고 있다.  
 
지금 나의 생존방식은 무엇인가. 남편과는 정반대의 거역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남편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그 목표와 반역되는 현실적 타협을 하고 있다. 그것도 똥구명을 닦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핥아주는 일을 하고 있잖은가. 역사를 미화한다는 것, 더구나 날조한다는 것은 사마귀 같은 소름이 돋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명청이를 살리고 싶다. 목숨은 붙이고 볼 일이다. 명청이를 살리기 위해선 그들의 피고름이라도 핥아줄 용의가 있다. 해나는 몸부림치듯 눈 위를 딩굴다가 골짜기 아래로 처박혔다. 
  <목숨의 끝>
 
  ‘김재박’과 그의 부친은 부당한 방법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고 금력을 획득한 사람들이다. ‘해나’는 그들에 대해 늘 증오의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들의 불의를 커버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날조해야 될 처지에 놓여 있다. 김재박의 요구대로 그의 부친 자서전을 대필代筆한다는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다가 투옥된 남편의 가치관이나 그 이념에 배치되는 것이다. 위의 인용 부분은 현실과 타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기 대항해 맞설 수도 없는 비극적 체험을 담고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이와 같은 갈등심리가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흥미의 복선을 되풀이하여 명백히 그어감으로써 그 사건들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임을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참고 삼아, 그러한 실례들을 한두 가지만 예시 해 보이기로 한다.
 
 ① 해나는 며칠 전부터 주억거리던 생각을 실행하기로 했다. (...중략...) 그런데로 순간순간 해나의 발길을 제지시키곤 한 것은 순전히 감옥에 있는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자기의 주관, 자기의 이념을 위해선 자기의 생명까지도 호탕하게 내던질 사람이다. 그러한 남편의 확고한 신념과 양심으로 인해 현재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민주화 투사이다. 그런데 해나는 남편과 반대될지도 모르는 ‘타협’을 해야 한다. 남편의 이상과 해나의 현실이 직접적으로 대립되어 나타난 것이다.
 
 ②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안다면, 해나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중략...) 모가지 위는 전혀 감각이 되어지지 않는 허탈감이다. 엘리베이터가 1층을 지나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빈혈과 헛구역질 속에서 내려야겠다면서도 발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13층까지 올라갔다. 헤나는 주저앉아 성냥불 같이 사위어가는 의식을 뺀찌로 물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타고 내리는 손님들의 눈초리가 떨떠름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번 오르내리는 동안, 신고를 받은 정문 수위에게 떠밀려 원형 출입문 밖으로 밀려났다.
 
① 은 역사적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한 비열한 책략으로 자기 아버지의 자서전을 작성해 달라는 김재박의 요청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을 때 해나의 갈등심리를 묘사한 것이고, ②는 김재박을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만나고 자서전을 써 주기로 결정한 다음 계약금을 받고 나올 때의 그녀의 갈등심리를 묘사한 것이다. ① 과②를 대비시켜보면, 이 인물의 정신적 갈등이 점차 고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해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동안 신체적 변화 ‘빈혈과 헛구역질’을 일으키고 의식불명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②의 경우는 특히 인상적이다. 엘리베이터의 상승과 하강 이미지는 그러한 심리상태를 형상화하는데 비교적 적절하게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지하에서 13층까지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고 있는 이 화려한 건물은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련한 지식인의 삶을 대조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 여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현실의 중압감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대 변절자의 자서전을 작성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신적 자살행위를 강요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아기의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김재박의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어이없게도 퇴짜를 맞았다. 기다리던 수표 대신, 더욱 위대하게 보이도록 고쳐달라는 붉은 줄만 보이는 원고 보따리를 들고 돌아서는 이 전직 여기자의 모습은 우리 시대의 한 표상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재채기>가 대체로 부조리한 사회현상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자세와 그 강인한 의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한 작품이라면, <목숨의 끝>은 그렇듯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지식인이 겪는 고뇌와 갈등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들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해나의 일거일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자기 자신의 그것처럼 속으로 간직하면서 저울질하게 된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이러한 긴장감을 사건의 전개과정과 함께 시종일관 계속해서 고조시켜 나가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작품은 지금까지 이 작가가 구축해 온 어떤 독특한 문학적 분위기랄까 그 특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 것으로 주목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작가는 다분히 사회문학적 비판의식이 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전 창작집 『늑대를 기다립니다』 에서의 <재채기>의 경우를 보면, 정치교수로 몰려 강단에서 추방된 ‘천 교수’나 문제학생으로 퇴학당한 ‘나’(오선생)는 모두 한 시대의 몰락한 지식계급을 대변한다.

이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한 시대의 내부에 감추어진 정신적 상흔들을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자아내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들이 놓인 사회상황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여주고 있다.
‘천 교수’의 플롯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원래 성실한 학자였다. 전통적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오직 책과 함께 씨름해 왔으며, 학생들에게도 ‘사학계의 야심만만한 소장학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반골기질은 타락한 현실에 대해 반기를 들게 하고, 마침내 강단으로부터 쫓겨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천 교수는 그래도 서재 속에 파묻혀 사색하고 연구했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코피 터져가며 쓴 논문은 발표할 지면이 없었고, 어디 가서 강연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무당같이 신들리는 그의 강의는 이제 그물 속에 갇힌 독수리의 외침이 되었다. 그렇게 들끓던 제자들과 동료들의 발걸음 소리도 멀어져 갔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까지 내몰림을 당한 천 교수는 자신의 존재이유와 가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것이 정신분열 증세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내의 잦은 외박은 그의 열등감을 더욱 부추겼다.
 
  이것은 ‘천 교수’의 과거를 간단히 요약해 놓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명백히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천 교수의 정신분열증은 외적 압력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인물이 어떠한 외적 압력 앞에서도 자기의 고집을 굽히거나 신념을 포기함이 없이 그에 대해 무한한 동정과 신뢰의 염을 가지게 된다. 만일 외적압력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직장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정에서 버림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은 대가로 크나큰 물질적 손실을 입은 대신, 독자로부터 정신적, 도덕적 보상을 받게 된 셈이다.

 ‘나’는 나레이터이자 행위 참여자이기도 하다. 이 인물의 이야기도 비슷한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문제 학생으로 제적당한 이 인물은 이렇다 할만한 직장을 얻지 못한 채 세탁소를 경영하며 근근이 살아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으로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기의 고집이나 신념을 끝까지 고수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점에서 천 교수와 유사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①“오선생, 그 와이셔츠 깃에 묻은 땟국 마냥 양심이니, 진실이니 뇌까려봐야 똥물밖에 더 나오겠나? 인생은 결코 긴 게 아냐, 한 세상 기똥차게 디스코 추다 가는 게야 뭘, 남자가 통 크게 굴려봐, 이 수표 쪽에 똥그라미는 마음대로 그리라구. 공이 8개면 억이야, 억! 제에기, 맘대로 쳐봐, 자네 같은 물 다리미 인생이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아?

②면회가 허용되는 주말이 앞으로 사흘. 고모는 정릉에서의 사건이 틀어지자 곧 바로 내 아내에게 수쪽을 쥐어주고 사라졌다. 아내는 독사의 이빨로 나를 벼르고 있다. 농약병에 수쪽을 말아서 젖가슴 속에 넣고 다닌다. 공판이 끝나는 즉시, 아내는 농약이냐, 수쪽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는 결의이다. 고모의 농간에 그대로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그것이 협박만은 아닌 게, 여름 날 뙤약볕 아래에서 다림질하거나, 남자바지 가랑이를 재봉틀질 해주는 이 지긋지긋한 세탁소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 어찌 어제 오늘만이겠는가. 이 절호의 기회는 어쩌면 아내에게 숙명일지도 모른다. 내가 고모를 위해 ‘거짓증언’을 해 주면 그대로 떨어지는 수쪽으로 아파트라도 마련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까짓 사이다 마시듯 농약을 거꾸로 들겠다는 결의는 독사의 시퍼런 눈빛 바로 그것이다. 자칫하면 시체를 또 하나 치우게 생겼다. 금년 토정비결이 살벌하게 나오더니. 어떻게 이달 들어 직접 간접 살인을 하나씩 하게 되었는가.
 
①은 아들에 의해 고발당한 천 교수 부인이 ‘나’를 정릉 숲 속의 호화판 비밀 요정으로 끌어들인 다음,  재판에서 ‘거짓증언’을 해 주도록 거액의 수표로 유혹하는 장면이고, ②는 천 교수 부인으로부터 거액의 수표를 받은 아내가 황금의 노예가 된 나머지 ‘거짓증언’을 하도록 나에게 강요하자 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나’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상 두 보기에서만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나’는 현실의 세계로부터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러한 도전을 물리치고 참된 삶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 인물의 성격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으로 보아 ‘천 교수’의 플롯과 ‘나’의 플롯의 유사점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지식인의 본질과 그 기능에 관한 것이다. 즉, 지식인은 현실적으로 무력한 존재이긴 하지만, 아무리 큰 고통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서운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봐! 오군, 오늘은 내가 또 하나 멋있는 장면을 실천해 보이겠네. 결코, 내가 무기력한 지식인이 아니란 걸 오늘 오후에 보여주겠네.” 이것은 천 교수가 프로판가스 폭발 사건으로 청평기도원에 감금되기 직전에 그의 제자인 ‘나’에게 한 말이다. 청평기도원에 끌려가 동물적인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자결해 버린 이 가련한 지식인의 결의가 잘 나타나 있다.

“역시 그랬구나, 교수님은 죽어간 게 아니라, 스스로 죽은 거야. 결국, 최후의 자기의지를 확보한 거야. 누구도 천 교수를 죽일 수는 없어.” 기도원에 감금되어 동물 취급을 당하는 천 교수의 불행한 삶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천 교수의 간청에 의한 ‘의리적 살인계획’을 세웠으나 두 차례나 실패한 ‘나’가 결국 그의 자살현장을 발견한 다음에 지껄이는 이 절망적은 독백 또한 어떠한 현실적 구속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살기를 염원하는 지식인의 생존방식을 재확인하고 있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신상성의 소설 가운데는 불교적 상상력을 부여한 작품들이 더러 있다. 예컨대, <사이공의 니르바나> <목불>木佛 등이 그것이다. <목숨의 끝>에도 그러한 부분들이 조금씩 엿보인다. 틈만 나면 절간으로 내닫는 ‘어머니’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일면을 살필 수 있겠지만, 심리적 갈등으로 몸부림치는 ‘해나’의 귀에 문득 들려오는 어느 스님의 목탁 소리라든가, 고독한 시간 속에서 회상해 보는 해인사의 옛추억들이 특히 그러하다.

“남편의 시(詩)들은 조실스님의 독경(讀經)은 창(唱) 같기도 하고 조화이기도 했다. 우린 우리 안의 종기만 어루만지고 있어. 자기 안의 더럽고 추악한 것을 안고 있으면서 남을 욕하고 있는 거야. 남편의 꾸짖음 같기도 하고, 스님의 대죽비   소리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의 논리를 보면, ‘남편’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 그는 보다 높은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자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는 길은 너무나 험하고 고달픈 것이다. 가치 있는 세계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철저한 자기 멸각(滅却)의 과정을 밟아 나가야만 하는 것인가. 작가는 이와 같은 삶의 근본원리를 불교철학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사이공의 니르바나>와 <목불>은 이러한 작가의 신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풀이된다. 구조상에서 보더라도, <사이공의 니르바나>는 더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연쇄관계로 구성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생존자체를 인연의 사실로 보는 불교적 상념과 일맥 상통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교적 사유방식을 소설이라
는 하나의 문학적 틀 속에 어떻게 수용하느냐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종교적 신념과 문학적 신념을 어떤 점에서 일치될 수 있겠지만, 또 어떤 점에서도 명백히 구분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신상성은 풍부한 잠재력을 지닌 작가다. 얼핏 보면 성긴 그물과도 같이 허전해 보이지만, 그의 소설은 자잘한 고기들까지도 다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을 내포하
고 있다. 이것은 한 작가의 성실성과 그 타고난 재능의 결집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문체와 서정적 분위기에 의한 전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이 작가의 깊은 통찰 등이 특히 주목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요소들은 앞으로 한국의 문학공간을 더욱 풍요하게 가꾸어나갈 유일한 자양분이 되리라고 믿는다.
-1987.4.30. <늑대를 기다립니다> 작품론. 김시태 한양대 교수

4. 신상성 소설론
‘방 안’을 나서 ‘길거리’를 탐색하는

  ㅡ 한국소설의 세계문학성 확보문제
 조 미 숙 (趙美淑 숭의여대 교수)1
 
1. 한국소설과 세계문학성
문학은 분명히 초국가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때 초국가적 성격, 문학의 ‘세계성’이란 무엇인가. 다카하시 도시오(와세다대 교수)는 재일작가 양석일의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사회적 편견과 차별, 힘든 삶과 빈곤, 그리고 분쟁과 전쟁을 주시하며 현재 존재하는 세계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공생적 질서를 염원하는 것이 세계문학”이라고 하면서 “차별과 분단과 분쟁”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주체의 발견”이 현대사상에도 맞는 주목할 만한 ‘세계문학’이라 하였다(「세계문학으로서의 아시아문학-‘아시아’에 거는 큰 기대」, 아시아, 통권 제6호).

그에 의하면 세계문학이란 보편적 정서만을 그려서도 안 되며 소외 등 인간의 제반 문제에 냉철한 시각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한 나라의 작가로서 개성과 특성을 가지되 범세계적, 보편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소외된 인간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작품이라야 국경과 시간을 넘어 오래 애독되는 참다운 세계문학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범박하게 말하여, 소설은 세계를 반영하며 세계를 주도하기도 한다.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는 현실의 세계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초과하기도 한다. 초과한다는 말은 소설의 광범위함을 암시한다. 소설은 국경도 넘을 수 있으며 어떤 주제도 소화할 수 있는 대단히 광범위한 문학 장르이다. 그렇다면 소설이 추구하는 것은 한 민족에게만 이해가능한 협소함이 아니라 보다 너른, 보편성과 맞닿는 그 무엇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소설과 세계문학의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캐나다의 사회 커뮤니케이션 학자 피에르 레비는 현대를 ‘누 스페어’(‘noo정신’와 ‘sphere시공간’의 결합개념)의 세계라 명명했다. 이는 오늘날 더 이상 동서양의 구분이나 국가, 인종의 구분이 무의미해졌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오늘날은 말 그대로 격변의 시기이다. 인간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하고 있다. 교통수단이 획기적으로 발달하여 인간 삶의 영역은 과거에 생각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우주인을 배출한다는 기사가 신문을 온통 장식했었다. 그만큼 우주공간 개발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지구 이외의 곳에서도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은 신념과 종교를 기초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한 현상으로 인해 문화 역시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기존에 분명했던 것이 희미해지고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도전 받게 되었다.

인간의 삶의 영역은 이제 실재 세계뿐 아니라 가상공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변화하고 있다. 구술(입), 인쇄물(책과 신문), TV나 영화 등에 이어 넷net이라는 새로운 소통수단의 등장 때문이다. 이 새로운 소통수단은 간접경험과 직접경험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인간에게 가상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가상공간은 상상 속에서 존재해 왔다.

이를테면 니체나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게 되는 경우, 독자는 니체의 사상과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움직이는 가상의 공간으로 몰입해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은 가상공간 속에서 사고하고 느끼며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가상공간이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제공되었다. 그것이 인터넷이다. 가상의 독자를 만나고 가상의 인물을 만나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인간은 더욱 쉽게 외국 사람들과 외국의 문화와 교류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이고 보니 오늘날 문학은 세계인의 공유 자산이 될 수밖에 없다. 지구의 이쪽에서 사이버 공간에 올린 문학작품은 실시간으로 세계인들이 볼 수 있다. 소통수단의 변화는 오늘날 세계문학의 지평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문학적 지평의 변화에 재빨리 대응하는 길이 한국문학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 판단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한국문학은 갈 길이 바쁘다. 여기에 대한 한국문학 대안의 하나가 신상성의 작품이다. 그의 문학에 잠재되어 있는 세계성은 이제까지 자칫 간과되지 않았나 싶다.
 
2. 신상성의 끝없는 탐색과 도전정신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작품을 쓰게 된다. 이때 자신의 경험영역을 더욱 넓히며 도전한다면 작가의 작품세계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게 될 것이다. 신상성은 자신의 경험영역 확대를 위하여 끊임없이 도전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한 작품도 비슷한 것이 없으며 스타일을 차치하고 본다면 같은 작가가 쓰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잘 들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특정 경향에, 특정 문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모색에 부지런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자기복제가 유난했던 수년간의 문단에 좋은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그의 작품의 난해함의 또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어떤 문제나 성향을 천착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글쓰기’를 보여준 신상성이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읽히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주제의식 면에서, 어떤 실존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하고 있다고 할까, 기법이나 소재, 배경 등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도저히 맥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것이 그의 문학적 특성이 된다.
 
1) 관용과 화해
신상성이 가장 힘 주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이 지점에서 발화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상성은 초기 작품부터 인간본연의 문제를 다루면서 ‘관용’이며 ‘화해’와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처용의 웃음소리」에서 그는 한국 문학의 원형 가운데 하나랄 수 있는 ‘처용’ 모티프를 끌어와 아내에 대한 의처증, 그리고 그 극복과 해소라는 문제를 그려낸다. 이러한 모티프가 「인도향」에서도 계속 추구된다. 이해의 원활함을 위하여 두 작품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처용의 웃음소리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정신병원에서 ‘싯달타 예수’와 장번쾌 박사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장번쾌는 세계적인 원자력 연구자인데 연구 중 돌연 정신이상이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 그를 걱정하는 듯한 산자부 장관 노들비와 정신병원 원장 한마태오 등 셋은 고교시절부터 삼총사로 친한 친구 사이였다.

노들비는 장번쾌를 걱정하는 듯하면서도 정치적인 정책적일 뿐이고, 한마태오는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번쾌는 비록 예하와 결혼한 것은 자기이지만, 자신의 아내인 예하와 노들비가 같은 어린 소꿉친구였고, 둘이 매우 친하다는 이유에서 들비와 예하 사이를 늘 의심한다. 한마태오의 정신병원에서는 1주일에 한 두 번 사이코 드라마를 만들어 카타르시스를 도모한다.

특별히 가을운동회를 즈음하여 장번쾌와 싯달타 예수가 연출, 기획을 맡아 ‘처용의 웃음소리’라는 드라마를 공연하게 된다. 공연이 시작되고 연극에 서투른 환자들이 자꾸 실수를 하지만 처용역인 변다이나마이트의 멋진 춤사위에 보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한다. 특히 아내와 들비의 불륜에 대한 의심으로 병이 깊어진 번쾌마저 처용의 ‘아사 엇디하릿고’의 높고 깊은 정신적 경지에 무릎을 치며 “그런 짓거리를 하지도 않았지만 또, 설사 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큰일날 일인가”하고 자각한다. 는 내용이다.
 
  (2) 인도향印度香
조선족 아주머니와 딸, 주인공 ‘나’가 살고 있는 집에서 어느 날 기르던 새가 죽고 딸 다향은 슬퍼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체하며 신문을 읽던 나는 ‘돌함의 비밀’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흥미를 느끼게 된다. 우연히 구입했던 ‘인도향’을 피워 죽은 친구 명복을 빌다가 갑자기 아메리칸 드림으로 ‘나’를 배신한 아내를 떠올린다. ‘나’는 돌함을 조사하다가 중국인들이 사적私的 사랑에 눈을 떠가고 있음을 알았으며 사적 사랑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그 무렵, 나타난 아내,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아내를 받아줄 생각이 없던 ‘나’이지만 그녀를 결국 거부하지 않는다. 아니 어린 달 다향을 위해서라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시태 교수는 신상성의 초기문학을 “지식인의 본질과 존재방식 및 그 기능”을 탐구한 결과이며 “현실과 타협과 대항 사이의 번민, 부조리한 상황 속 지식인의 갈등”(목숨의 끝-해나), “부조리한 사회현상에 대응하는 지식인 자세의 그 강인한 의지 부각”(재채기) 등을 다루고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상성이 추구하는 바는 “지식인은 현실적으로 무력한 존재이긴 하지만 아무리 큰 고통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서운 정신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부정한 아내를 용납하고 춤을 추면서 그 상황을 현실초월의 경지로 끌어올린다는 ‘처용의 신화’를 탐구하는 「처용의 웃음소리」 그리고 「인도향」의 주인공도 지식인이며 두 작품 모두 지식인의 정신력을 다루고 있음은 마찬가지이다. 아내에 대한 극심한 의처증으로 정신병이 깊어지는 상황이 되었던 장번쾌가 스스로 연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또 실수 연발인 연극을 보는 과정에서 마음의 미망迷妄을 떨치고 초월적 달관을 하게 되는 것은 실로 무서운 정신력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문학심리치료 부분을 보이는 것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성과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인도향」에서 사랑을 찾아 ‘나’를 버렸던 ‘아내’조차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는 얼핏 이해되기 어려운 요소이다. 기자인 ‘나’는 그 특유의 호기심으로 중국이라는 해외지역 공원에서 발견되는 ‘돌함 이야기-사적 사랑’을 흥미롭게 조사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점차 사랑의 정체, 의미에 대하여 사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번쾌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어떤 사건과 사실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서사구조이다.

‘깨닫는다’는 것 역시 지식인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이 친구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통과하면서 달관의 경지로 승화된다. 친구를 위해 향을 피우다가 문득 아내를 떠올리는 행위는 그러한 것을 암시한다. 아내의 부정을 냄새가 강한 ‘인도향’ 향불을 통해 지워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해탈’로 이어진다. 이것이 ‘나’가 가출했다가 돌아온 아내 앞에 도덕률을 들이대지 않는 이유가 된다. 작가는 자신이 마음을 넓히는 데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관용과 화해’는 인간 모두에게 어제나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지만 이 덕목을 갖추기는 매우 어렵다.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인간 개개인이 아집과 독선 가득한 자신의 소자아小自我에만 갇혀 산다면 세계는 늘 전쟁터가 될 것이고 정글의 법칙만 작동하는 동물의 왕국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간인 이상 배워가야 한다. 관용과 화해가 그 중요한 배움의 미덕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두를 인식하고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인간은 관용과 화해를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 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문학심리치료이며 작가가 해야 할 문학적 의무감은 이 지점에서 보다 선명해지는 것이다.  
 
2) 반전-반이데올로기 의식, 혹은 실존에 대한 고뇌
신상성은 여러 작품에서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한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베트남 역사에 대한 해박함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들 작품을 통해 작가는 반전, 반이데올로기 의식을 초지일관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불교적 상상력으로 쓰인 「사이공의 니르바나」와 신의 문제를 탐구하는 「회귀선」 등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반전의식과 함께 실존의 문제가 탐구되지만 보다 무게가 실리는 것은 대량살상의 전쟁 자체에 대한 작가의 강한 혐오감이다.
 
(1) 사이공의 니르바나 
주인공 ‘나’(지은나)는 서찬을 따라 베트남에 온 전직 무용수이다. 애인인 서찬은 사법고시를 패쓰하는 등 사회적 업적을 쌓은 뒤, 뿌리를 찾기 위해, 전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지원했다. 그와 약혼까지 한 ‘나’는 그런 그를 무작정 따라온 것이다. 시 아이 디CID 요원이 된 서찬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위험지역
도 서슴지 않고 뛰어든다. 국제마약과 무기밀매가 이루어지는 나트랑 암시장을 열심히 수색하다가 그만 살해 당하고 만다.

‘나’를 도와준 혜명스님은 스님들의 정치적 시위와는 다른 목적으로 사이공 대통령궁 앞 광장에서 분신공양焚身供養을 한다. 그 직접적 이유를 전혀 몰랐던  ‘나’는 혜명이 남긴 노트와 그를 찾아온 다낭의 수도승과 또 그와 함께 찾아간 혜명의 속가에서 그 중첩된 비밀과 진실을 알게 된다. ‘나’가 모시던 혜명이 바로 서찬의 어머니였으며 그녀 또한 일본군에 의해 남양군도 군의관으로 파병된 서찬의 아버지를 따라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베트남에서 스님이 되어 정착하였던 것이다.

혜명은 나중에는 정신대로 쫓기기도 한다. 혜명은 자기를 찾아 목숨을 걸고 찾아온 아들의 죽음을 이미 알았다. 그래서 끊임없는 업보業報에 치를 떨며 자신의 분신공양을 통해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회귀선回歸船 
주인공 ‘나’는 세라와 챠오 생각으로 번민한다. 한국에서의 애인인 세라와는 세라 어머니의 반대에 막혀 거의 헤어진 상태.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월남전을 자원한 ‘나’는 다시 월남 여대생 챠오를 만나게 된다. 챠오는 이념의 잔혹함 앞에 애인을 죽게 한 상처를 가진 여인. ‘나’는 챠오에게 세라를 통해 못 다한 ‘진실한 사랑’의 위안을 찾는다. 전장에서 많은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안고 돌아가는 ‘나’에게 챠오는 처음으로 임신사실을 알린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져가는 잿더미 속에서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 다시 소리높이 울고 있는” 것으로 감동하게 한다.
 
열반涅槃의 문제가 담겨 있는 「사이공의 니르바나」의 주제의식은 허무이다. “만년전쟁, 만성전쟁”이 되어 버린 베트남이라는 사회에 대한 혐오를 넘어서 이 작품은 허무의식을 짙게 풍기고 있다. 서찬은 그토록 찾던 친어머니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았으며, 후에 어머니인 것을 알고서도 찾아가 만나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언젠가 혜명스님이 말했던가? 보인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안 보인다고 해서 부재하는 것이 아니다. 낮에는 달이 보이지 않지만, 달은 분명히 하늘에 있고, 밤에는 해가 보이지 않지만, 해 또한 분명히 하늘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찬이가 내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는 영원히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찬이가 살아 있다고 해도 내 마음에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또한 죽어 있다고 해도 내 마음 안에 살아 있으면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다.

혜명이 남편의 뒤를 좇아왔고, 자신을 찾는 아들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그 아들이 죽고 난 후 분신焚身함으로 불교에 본격적인 귀의歸依를 시도하였다면 ‘나’는 애인 서찬이 죽고 시어머니가 될 뻔한 혜명스님 열반 후 불교에 또한 입문入門할 것을 결심한다. 김동리 「등신불」의 주인공처럼 지은나도 살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선택했다가 수단 이상의 종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버렸다는 점에서 혜명스님과 지은나는 공통이 된다.

그러나 도道를 깨닫는 순간 그들은 또 하나의 열반을 경험한다. 도를 깨닫는 순간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러나 그 허무에서 정지하면 인간의 역사는 무의미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깨달음에 있다. 정치적, 사회적 어떠한 이슈보다 우선인 인간의 존재문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진리를 깨달으면서 ‘나’는 귀국하면 진정한 스님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베트남은 인간성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장에서 실존을 확인하는 방식은 편지와 소포 이외에는 없다. 그렇듯 인간의 실존이 하찮게만 느껴지는 것이 「회귀선」의 세계이다. 여기에서 ‘나’는 잔인한 이론보다 인간다운 울음과 웃음을 추구한다는 챠오를 통해 참다운 인간성을 본다.
 
“전장의 20개월! 나는 얼굴의 흉터를 아니 심장의 흉터를 안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 다음의 원점을 어디일까. 아니 영원한 귀착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모른다. 월남도, 월맹도, 미군도, 나도 모른다. 제사를 지내는 원숭이는 알까?”
 
“치약을 다 쓰면 갖다 버리듯 누가 죽어 나가면 화장터에 갖다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보충병을 지급받는” 전장에서 중요한 것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고 “당장의 현실”, “한줌의 쌀, 한 켤레의 신발”이다. “인정”은  “걸레쪽”이 되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존이다. 실존의 문제를 탐구하는 이 소설의 중요한 화두話頭 중 하나는 ‘신’神의 문제이다. 챠오의 입을 통해 ‘신’은 “원숭이를 보여주다”로 조롱된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며 본질을 좌우하는 신은 없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주제경향은 작품 내내 계속된다. 이를테면, 아무도 모르는 나의 귀착점에 대한 의문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원숭이는 알까?”라고 허튼소리를 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인간도 허무하고 전쟁은 더욱 허무하고 잔인하
다.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언어유희나 깨달음 너머에는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에 대한 무의미와 대량학살에 대한 혐오감이 강하게 설파된다.
 
3) 진실의 소리, 혹은 모성
신상성 이 작가는 여러 작품들을 통해 이러한 진실성을 집요하게 추구한다. 「내 마음의 들쥐」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작품의 주제성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내 마음 속의 들쥐
자동차 정비공인 ‘나’는 폭력조직과 연계된 정비소 사장에게 이용당해 영국으로 쫓겨와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늘 마음 속에 들쥐들 이빨 가는 소리를 느끼고 있다. 한편, 뒤를 봐 준다던 사장은 얼마 후 수감되고 만다. 자객을 보내 ‘나’를 죽이려 하고 사장을 구속한 이는 사장과 같이 폭력조직에 가담하고 마약을 밀수하던 현직 수원검찰청 지검장이었다.

그들의 악질적이고 반사회적인 전모는 그들에게 이용 당하고 마침내 개죽음 당한 오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래 동안 극비로 취재해온 한 여기자에 의해 세상에 밝혀진다. 그녀 역시 피살되었으나 ‘나’에게 보낸 자객을 수사하면서 국제형사 폴이 가동되고 ‘나’의 아내가 여기자의 유품을 민원담당 변호사에게 보냄으로써 사실은 실마리가 드러나고 만다. ‘나’를 평소에 괴롭히던 이명耳鳴 즉, 들쥐들 이빨 가는 소리가 ‘마약두목 수원지검장’이 구속되었다는 고국의 뉴스를 영국 BBC방송을 통해 알게 되면서 어느 날 뜬금없이 뚝 끊어졌다. 내가 갈구하던 진실한 소리를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듣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늘 ‘진실한 소리’를 추구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그래서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다. 그리하여 “바다에 누우면 바다 속 물고기들의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참치가 첫날밤을 치르는 소리, 돌고래의 장례식 울음소리도 닿는다”라고 한다. 그런 ‘나’가 찾고 있는 게 있었으니 “진실한 소리”이다. “내가 지상에서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아니 저절로 들리는 그 소리는 다름아닌 '어머니의 가래 끓는 소리' 바로 그 소리였다.”
‘나’는 자신의 안에서 “자발없이 끓고 있던 들쥐들의 이빨 가는 소리 소리들”을 들으면서 살았는데 그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불치병의 가래를 끓으면서도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어시장에 나가 오징어 젖을 팔던 어머니”, “모성의 소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 속의 들쥐’는 결국 ‘나’를 엇나가지 않게 이끌어주려는 모성의 소리였던 것이다. 온갖 범죄와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순수한 모성의 소리를, 인간본연의 소리를 작가는 강조하려는 듯하다.

순수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잡음이 없어야 가능하다. 잡음이 없으려면 잡념이 없어야 하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정신을 집중하고 본연의 소리, 모성의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는 얼마나 순수한 성정性情으로 스스로를 가다듬어야 할까.
 
3. 남는 문제
신상성의 문학이 추구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놓여있다. 민족의 문제, 인종의 문제를 넘어서서 ‘인류보편의 존재론과 진정한 가치성 문제’를 끝없이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꾸준히 탐구하고 있는 바, 가족이라는 문제에 입각한 의처증의 문제, 모성애의 문제, 그리고 실존이라는 문제가 그러하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작품을 통하여 작가 신상성은 계속하여 문학의 영역을 넓히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는 심리학적인 묘사, 「처용의 웃음소리」에서는 장번쾌를 통하여 원자력이라든가 과학 기술의 전문적인 지식, 「사이공의 니르바나」와 「회귀선」에서는 베트남의 역사나 사회에 대한 역사철학적 인식, 「인도향」에서는 기자들의 통신망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중국역사와 내부적 특수성, 「내 마음의 들쥐」에서는 영국에 대한 새로운 탐색 등,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상성이 치밀한 연구와 조사, 탐색을 거쳐야만 작품을 쓴다는 사실이다.

한편 신상성의 작품은 말하자면, ‘세계’ 혹은 ‘세계 부조리’에 관한 탐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탐색의 과정이 ‘한국적인 것+보편적인 것(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용의 웃음소리」에서는 ‘처용’處容이라는 우리고유의 설화에서 ‘의처증 극복’이라는 문제를 초월적으로 부각해내었고, 「인도향」에서는 역시 처용설화를 모티프로 하면서 ‘사랑과 용서’의 주제를 그림으로써 ‘용서와 화해’를 모색한다.

김동리의 「등신불」과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떠오르게 하는 「사이공의 니르바나」에서는 한국적인 불교적 상상력과 함께 인류공통의 평화와 삶의 존재방식에 대한 문제의식, 전쟁의 잔인성과 무의미함을 강조함으로써 반전-반이데 올로기 의식을 고취한다. 또한 ‘불교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고뇌를 그린다. 「회귀선」에서도 그러한 반전의식, 실존주의적 정신은 반복된다. 「내 마음 속의 들쥐」는 한국사회의 풍자와 함께 결국 모성애의 회귀를 그린다.

신상성의 문학은 인류 보편의 문제를 한국적 프리즘을 넘어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한국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보편적인 세계의 문제로 나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거부하고 세계 속에서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한국인의 인간탐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 판단된다.

재일문학, 재미문학 등의 작가의 공간적 위치에 따라 나누어지는 한국문학도 아우르면서 한국작가 역시 다양한 도전을 통해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상성의 문학은 선구적인 작업이며 앞으로의 한국문학이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 된다. (끝)
- [한국펜문학] (2007년 11월) 국제학술대회 주제발표 논문.

          5. ‘신상성 소설론’
         무무명과 공공명의 끝은 어디인가
              <목불>을 중심으로    
        
                임 무 정 (문학평론가)
           
 신상성의 최근 소설집 <목불>(2018년 제55회 한국문학상 수상작)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흔히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 끝만 좇아다니게 되는 우리의 생각을 책장을 덮어놓고 생각하게 한다. 불교철학적 고뇌와 존재론적 주제의 심층에서 과연 삶이란, 종교란, 불교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을 다시 찾게 한다.

맨 끝장을 덮고 나면 아니, 작가 자신이 산에서 내려온 승려가 아닌가 할 정도로 주인공이 실제 모델 같은 리얼리티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리는 소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과 같은 또 하나의 논픽션적 픽션 느낌이다. 나 자신 지금도 달 자체를 보지 못하고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기는 달만 쳐다보지 않았던가? 자문하면서 나는 다시 <목불>을 펴들었다. 한번 보고 던지기가 아까운 무엇인가, 동굴 속 빨간 루비 같이 숨겨져 있는 내 마음 속 보물을 다시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종교적 관념은 문학의 위대성과는 관계가 있지만, 문학과는 관계가 없다”는 T, S 엘리엇의 확언(確言)에 부합하는 ‘목불(木佛)’이 그 비근한 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상을,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충고한 공자의 말씀도 생각난다.

 “아는 것은 좋아함만 못하고, 좋아함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데(논어), 작가는 불교철학의 진리를 퍼올리면서 좋아하고, 즐기는 경지에 까지 이른 것 같다. 그러므로, 그 종교사상의 깊이는 불교라는 절벽에 타 종교 진리의 빛도 같이 빔으로 쏘아 비교해 볼 수 있는 비교철학적 절벽이다. 독자들은 그 불꽃놀이 같은 불빛 속에서 깜작깜작 ‘나는 누구인가’ 자기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게 되는 유쾌한 깨우침 같은 게 아닐까 한다.
 
  1. 무무명과 공공명
 부처는 누구인가? 하늘인가, 땅인가, 싯달타인가, 거울에 비친 바로 나가 아닌가... 혜운은 다시 걸망을 둘러메고 사바세계로 내려온다. 그는 법주사 법당 지붕 위에 핀 풀꽃들 노란 꽃 87개, 하얀 꽃 21개, 잡색 15개 모두 123개를 세면서 올려다본다.

잡초도 풀이고, 꽃도 꽃이다. 길가의 돌멩이도 하나의 생명이 있다. 세상 만물이 놓여진 그곳에 그 자체의 존재론적 생명감이 있다.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무명! 빛이 없다는 곳, 그 자제가 없다. 공(空)이다. 아니 공공명(空空明)이다. 주인공 혜운(彗雲)은 이 세상에서 ‘생짜 얼굴’을 찾아 고행길에 나선다. 같은 탁발 도반(道伴) 법매는 ‘생짜 자연음’(생명음)을 찾아 각자 떠난다.

젊은 승려 두 스님은 목숨을 걸고 간절하게 발원하는 대상은 각기 다르지만 생짜(진짜)를 만나고 싶다는 화두는 같다. 가짜 천지 세상에서 진짜를 찾는다는 것은 발상부터 허무맹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구 위에 진짜는 자연 이외는 없다. 더구나 사기로 시작해서 사기로 끝나는 인간사회에는 치매 걸린 자연인 이외는 사실 없을 것이다. 성직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 예수, 석가, 공자 등 성인들도 거짓말을 했으며 실수도 했다. 다만 세속인과 다른 점은 진실한 참회를 했다는 점이 아닐까. <목불>의 첫 장면은 영화 같이 시작된다. 방금 끝난 법주사 하안거(夏安居)에서 바랑을 흔들며 내려오다가 산 아래 사하촌 입구에서 두 스님은 다시 만났다. 혜운은 시각적 ‘얼굴’을 찾으러, 법매는 청각적 ‘소리’를 체포하러 떠나는 순간이다.

어쩌면, 마음의 얼굴, 심미안(心美眼) 또는 마음의 소리 심각음(心覺音) 같은 허망한 그림자를 찾으려는 탁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자기가 존재하게 되는 절박한 이유를 찾아야 하는 부처의 엄명인지도 모른다. 

 “인자, 임자는 어디로 간당가?”혜운이 물으니,
 “그래애, 탁발승이 갈 데가 따로 있는감?”

 잠시 앉아 있던 바위 위에서 선뜻 일어섰다. 법매는 포충망으로 자연음을 잡으러 일어서고, 혜운은 잠자리체로 목불을 체포하러 일어서며 헤어진다. 방금 떠나간 절친한 법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산에 같이 들어와 머리를 깎은 땡초 동기이다. 속세에서도 절친한 소꿉친구이다. 서로 합장하면서 떨어진 손바닥에 잡힌 것은 손금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뿐이었다.

서로 간절하게 발원하는 대상은 ‘진리의 구체적 발견’이다. 구체적으로 발견한 물건을 돌아와 법주사 조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아니, 그 수수께끼 보물찾기는 조실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이 장담하며 조실에게 스스로 요청한 것이다. 즉, 혜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눈동자’ 목각 괴불(怪佛)을 발견해서 가져오는 것이고, 법매는 ‘진실한 목소리, 진정한 자연음’을 녹음해서라도 가져오는 것이다
 
단 한번이라도 손으로 만져보자는 것과 단 한번이라도 달팽이관으로 울림을 들어보자는 것이다. 우주적인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확인해 보자는 무무명... 공공명! 또 하나의 만행(萬行)이다. 혜운은 금강경을 공부할 때 “인생은 결국 허망한 것이다.”고 절망한다. 그러다가 화엄경에 들어가서 “그래서 결국 인생은 살아 볼 만하다.”고 마지막 장을 넘길 때 무릎을 친다.

수 없는 하안거, 동안거를 반복하며 무릎 꿇었다. 등허리 살가죽이 벗겨지는 대나무 죽비를 맞아가며, 정수리가 피 터져 기절하는 1천일 면벽수도 속에서 안개 같은 무무명(無無明)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부처(佛)란 또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구나 ‘돈오돈수’(頓悟頓修) 깨달았으면 또 더 높은 경지의 수행을 계속해야 되지 않겠는가.
 
 혜운은 법주사 해제 때 갈공(喝恐) 스님의 법어를 되살린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더라도 따뜻함을 생각하지 말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 생각을 하지 말라, 암굴에 조응하는 메아리를 염불 삼고, 슬피 우는 뭇 새들의 울음소리로 마음의 벗을 삼을지어다....,아제 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시바하”
 혜운이 불문(佛門)에 들기 전, 대학입시를 앞두고 어머니와 함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구경갔었다. 거기에 전시된 국전(國展) 조각전에서 만난 목불(괴불)에서 어떤 충격을 받는다. 도깨비 같은 괴불의 눈이 미칠 것 같은 진실한 눈동자였다. 그 순간 맞부딪친 눈이 운명적인 만남이었을까. 바로 그 진실한 ‘눈빛’ 이미지를 다시 찾아보고자 세상을 헤매는 것이다.

 “이 머꼬?”하는 막연한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왜 숨 쉬고 있는가? 폭격 같은 의문으로 사춘기를 헤매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의문 더욱 거칠어졌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다는 인도 네팔 스리랑카 등 또는 그의 탄생지를 찾아 보아도 생짜 얼굴을 못 만났다. 한국에서 못 만난 목불 이미지를 외국이라고 더욱 존재할 턱이 없다.
혜운은 세상의 조각품들이 반복적이고 일정한 색(色), 선(線), 형(形) 등에 짜증이 났다. 추상, 반추상의 목각들...허상들,
 
 6,25 전쟁 때 의정부 미군 후송병원에서 한쪽 팔을 갈구리로 대신하고 나온 아버지 그리고 월남전에서 한쪽 귀가 잘려나간 혜운 자신의 얼굴, 부자가 다 전쟁으로 인한 병신, 걸레쪽 신체가 되었다. 그러나 걸레쪽이 되기 이전에는 온전한 몸이었다. 아니 온전하거나 아니거나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처음부터 내 몸은 없었다.
‘부모생전미생전’(父母生前未生前)’ 부모와의 만남 이전에 나는 없었고, 부모도 조부모 이전에 부모조차 없었다. 더구나 그 이전 이전으로 올라가면 애초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일시적인 몸을 가지고 병신이다 아니다 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것 아닌가. 곧 죽게 되면 몸의 실체도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세상을 후비고 다니다가 어느 시골 버스 속에서 우연히 ‘새미’를 만나게 된다. 5년 전인가 만났던 소녀 새미를 따라서 그녀 아버지 ‘달 노인’의 토굴에 가게 된다. 오랜만에 그 토굴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무조각을 하는 달 노인은 또 오로지 평생 ‘목불’만을 고집스럽게 깎고 깎는다.
그때 맨 안쪽 구석에 얼굴이 반쯤 잘려나간 목불을 발견한다. 아, 덕수궁 국전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목불이다. 그 목불을 갖고 토굴 밖으로 나가려 하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제 자리로 갖다 놓았다. 5년 전, 이곳에 왔을 때도 토굴을 여러번 나들명거렸지만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던 목불이다. 이상하다. 왜 이제서야 물건이 나타났을까.

마침내, 덕수궁 국전에서 충격 받았던 바로 그 목불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곳 달 노인 토굴 작업장에서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아아, 십여년전 덕수궁에서 충격을 받았던  목불! 한쪽 귀가 잘려나간 괴물! ‘신라의 미소’와 같은 나무조각 불상이다. 반팔 크기 입상(立像), 정치(情致)하거나 예민하지 못하여 구름 같은 이미지의 불상이다. 괴불, 목불을 재발견한 것이다.
 
 2. 목불은 바로‘달 노인’
오로지 이 목불만을 찾고자 10여년간의 젊은 시간을 온통 낭비했던 절망 그리고 그 갈증을 태우던 혜운은 자기 가슴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화엄경’ 싯달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때 뒤에서 목쉰 소리가 들렸다.
“내 얼굴을, 내 눈을 피하지 말고 보십시오! 대관절 당신은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세상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 목불도 한낱 이미지이지요. 돌아서면 인생 그 자체가 그림자 아닌가요?”

내가 목숨을 걸고 찾았던 목불은 바로 ‘달 노인’의 얼굴이었어! 아아, 이 눈동자이었어! 아니야, 바로 내 마음이었어, 혜운은 무릎을 쳤다. 모든 게 공(空)이 아닌가, 그리고 공도 색(色)이므로, ‘空卽是色 色卽是空’ 아, 목불이란 허상도, 달 노인이라는 실상도 뒤돌아서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 흰 눈 위에 붉게 핏물을 튀긴 혜가(慧可)의 잘려나간 한쪽팔이 뒹굴었다.

하얀색 위에 빨간색이냐, 빨간색 위에 하얀색이냐, 아니 그 반대의 반대라고 해서 우주가 뒤집어 지지는 않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로 만나 하나는 하늘을, 또 다른 하나는 땅을 각기 가리키는 철학적 그림이 지금도 유럽 논쟁가들의 혓바닥에 오르내린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두 철인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이 도 반대라고 해서 지구가 달랑 뒤집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 목불이 덕수궁 국전에서 금상에 입상했더라면 그것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자만하여 모든 것을 끝내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지위에 오르게 되면  교만하게 된다. 그것으로 끝난다. 요즘 같이 혼탁한 한국 불교계 조계종의 총무원장 멱살잡이를 보면 새삼 <불교유신론>의 한용운 스님이 생각난다. 고려시대 목숨을 건 9명 스님들의 보우결사(普愚結社)도 생각난다.

그때의 불교 인문학적 정신사의 논쟁이 ‘돈오돈수’였다. 깨달았다고 해서 그냥 앉아서 목탁만 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깨달았으면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가 쟁점이었다. 창녀를 세워놓고 돌 폭탄을 일제히 던져서 죽이려던 무리를 향해 그리스도가  소리쳤다. “여러분들 가운데 전혀 죄가 없이 깨끗한 사람만이 돌을 던지시오!”
일촉즉발 위기에서 예수의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창녀, 한 사람의 인간을 살렸다. 예수가 성인(聖人)이 되었다고 바위에 엎드려 기도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지속적으로 선행을 행해야 한다.
불탄일(佛誕日)에 어느 가난한 여인이 부처님에게 발원을 하고 싶은데, 부자들 같이 금화 등을 간절하게 불공하고 싶은데, 가진 게 없어서 울고만 있었다. 그때 부처가 다가와 그 여인에게 값싼 향(香)나무 작은가지 하나를 주며 이것을 피우면 금화보다 더 값진 발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역시 얼마 만에 불치병에 걸린 그녀의 외아들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나 부처나 누구인가, 다 훗날 제자 또는 후손들이 그런 감격적인 스토리 텔링을 입힌 것이다. 그런 기적들이 팩트(fact)냐 아니냐는 또한 무의미하다. 사실이면 어떻고, 또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지구가 뒤집어 지지는 않는다. 다만 성인들은 성인답게 기적을 일으키고 더 감동적인 옷을 입혀서 선한 세상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목불의 주인공 혜운도 결국 이 깊은 존재와 비존재의 존재론 화두를 잡은 것이다.즉, 자기가 목숨을 걸고 찾았던 목불도 막상 만나보니 결국 하나의 나무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의 예술적, 미학적 가치는 자기가 보는 심미안에 그친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 목불에서와 똑같은 감동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 눈의 안경이랄까. 똑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생각은 다르다.

‘달 노인’은 기름통을 머리끝에서 부터 거꾸로 붓고 스스로 관솔불을 당겨 등신불(等身佛)로 이승을 떠난다. 그는 자기가 마지막으로 꿈 꾸던 ‘목불’ 조각을 완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목불이 된 것이다. 아니 그냥 한 세상 살다 간 것이다. 이 세상 무엇이든 완전한 것은 없다. 누구에게나 완성된 사람은 없다. 예수, 싯달타, 공자 등 신(神)까지도 실수를 했다. 인간도 누구나 속죄를 하면 신과 비슷한 일말의 양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혜운은 결국 출가(出家)를 포기하고 아니 파계를 하고 달 노인의 뒤를 좇겠다고 다시 토굴로 들어간다. ‘목불’ 승계자가 되겠다는 생각이다. 법주사 법당 지붕 위에 핀 풀꽃들이 누가 봐주지도 않는데 땡볕에 졸고 있음을 깨달은 혜운은 고마타 싯달타가 목청껏 소리친 그 설법 주제란 ‘잿더미 속의 똥막대기’라는 헐!의 의미를 재발견하게된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다. 금강경의 키워드 “인생은 결국 허망한 것이다.”라며 이마에 면도날을 긋고, 화엄경에선 “그래서 인생은 살만하다.”고 정수리를 도끼로 내리친 조실 스승의 죽비를 깨닫는다. 목불을 체포하려 했던 혜운과 자연음을 포충망으로 잡으려 했던 법매에게 끝내 돌아온 것은 ‘그냥 한낱 바람이다. 아니 마음이다.’ 한 순간의 마음이 더 큰 세상을 잡을 수도 있다.
 
이 <목불> 뿐이 아니고 작가 신상성의 약50여편 중.단편들을 일관해서 보면 여타 다른 작가들과는 좀 다르다. 그의 소설은 매 편마다 다른 배경, 주제, 소재로 날아다닌다. 어느 것 하나 일정하게 잡히는 유형이 없다. 중구난방이면서 다양해서 늘 새롭게 다가온다. 이런 공통된 지적들은 <목불>에서 후기에서 조연현(전 한국문협 이사장), 홍기삼(전 동국대 총장), 고노에이찌(일본 아사히신문 한국특파원)등 교수들의 일치된 시각과 지적들이기도 하다. 홍기삼 교수의 신상성 서평(처용의 웃음소리/ 습관(習慣)의 잠과 예외적 미학(美學)을 인용해 보겠다.
 
신상성申相星의 문학세계는 소설이 일상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일상성의 세계를 벗어나 습관의 잠을 깨워준다는 바로 그 점에 소설이 인간사회에 존재할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소설의 내용에만 적용되는 논리가 아니라 소설형식까지도 미묘하게 작용하는, 대단히 복잡한 논리의 확장으로 확산된다. 그 중의 몇 가지로 가령 스타일, 언어, 플롯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시詩 문학에서 특히, 그러한 현상을 빈번하게 목격하는 일이지만 스타일, 언어 등 일련의 시적詩的 형식미학에서 한 시인이 성과를 거두면 그 성과에 매달려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거세시키고 그것을 추종하는 무수한 인류들의 무참한 행위 역시 일종의 ‘문학의 관습의 잠’에 가담하는 어리석은 것이라 규정할 수 밖에 없고 관습의 잠을 거부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신선하고 풍부하게 이끌어 가려는 독자들의 진지한 기대와 크게 위배되는 행위이다.

신상성의 소설은 그 내용보다도 형식에 있어서 종종 예외적 미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대체 그의 소설 분위기와 크게 일치하거나 유사하다
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냥그 대로 다만 ‘신상성의 소설’이라는 그런 느낌만을 남긴다. 어떤 작가의 영향권에 있다거나 유행성 감각이 강하다거나 하는 종류의 무수한 소설들과 그런 점에서 단연 구별된다.
그가 누구의 영향 아래서 작품을 쓰지 않았다거나 어떤 작가의 아류가 아니라는 것, 또는 유행성 감각이 강하지 않다는 것은 때때로 그것이 극복되어 마땅한 약점일 수도 있고 꾸준히 취할 만한 강점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소설 한편 한편의 차원에서 보다 작가적作家的 기질의 총체적 문제에서 검토해 본다면 누구도 그것을 강약의 문제로 제한하기만 한다면 실로 난처한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한 작가作家의 문학적 특질, 또는 타고난 기질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기는커녕 실로 타당하고 너무도 분명한 일임에 틀림 없으리라. 그의 언어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눈과 그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목소리는 실로 거칠고 무례하고 섬찍한 것이어서 우리는 자칫 그런 것 속에 슬며시 감추어져 있는 강렬한 사랑, 눈물 따위를 간과하기 쉽다. 그런 모든 근거는 그의 문학적 기질에서 연유하는 게 확실하다.

그는 소설창작 뿐만 아니라 소설의 이론에 있어서 적극적이다. 문학의 여러 가지  형식에 대한 정의가 포기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불투명한 문학형식의 미학적 탐구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1960년대 이후 뜻밖에도 중편소설이 양산되었으나 그 형식이론은 최재서崔載瑞 이후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중편소설의 이론과 실제를 처음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표된 것을 독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문예이론으로 볼 때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것이지만, 중편소설이 발표되고 있는 외국의 여러 나라에도 중편소설의 이론적 연구는 특별한 성과가 없는 실정임에 비추어 그 연구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우리는 간과 할 수 없다. 그의 소설이나 이론의 탐구는 그러나 이제 그 성과를 놓고 평가할 단계가 아니라 앞으로의 가능성의 문제를 놓고 평가할 단계에 있다. 그 가능성의 거대한 전개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에서 몇 줄의 글을 적어 첫 창작집의 간행을 축하하는 바이다.  (* 홍기삼.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그는 또한 까뮤나 노신(魯迅) 같이 장편이 별로 없이 단편위주로 발표해 왔다. 한국문단에서 불교문학쪽 심층적 문제제기에는 드물게 탁월한 작가이다. 과작이지만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양극단 쓰레기 같은 혹평 아니면 특별한 걸작이라는 낱말이 춤을 춘다.

특히, 이들 비평가들은 작가의 동국대 국문학과 학부시절과 대학원 때 지도교수이어서 작품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평론도 더욱 날카로우며 진솔하다.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회귀선’이 당선(1979년)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에 몰입해지만 소설쓰기 이전에도 [풀과 별]에 시 ‘청춘열차’ 등으로 등단했다(1975년).
거의 평생 용인대 교수로 있으면서 약50여권의 시집, 소설집, 평론집 등 전문서적을 내었다. 소설집으로는 <처용의 웃음소리> <인도향> <목불(木佛)> 등, 평론집 <한국소설사의 재인식> <한국통일문학사> 등, 수필집 <시간도 머물다 넘는 고갯길> 시집으로 <당신의 눈을 들여다 보면>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엉뚱하게 외도도 했는데 서울문예디지털대학 및 남태평양 피지(FiJi)섬에 ‘수바외국어대학’ 설립자겸 초대총장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중국 낙양외대, 천진외대의 석좌교수로서 중국에서 더 유명한 소설가로서 소설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어 사족을 붙인다면 이 <목불>에 나타난 순 우리말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 주목할 바는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고유어를 되살린 점을 높게 펑가하지 않을 수 없다.
 
1, 논산 훈련소 내무반 반장같이 *거쿨지다.
2, *데억진 연꽃 속의 황금빛 금붕어
3, 깨죽이나 밤죽도 *날캉하게 물리치고,
4, 가곡에서 부터 팝송까지 *가살스럽게 불어준다.
5, 밤나무 몽둥이로 *늑사하게 얻어터진 늑골이
6, 어디선가 폭포수 소리가 가슴 속을 *냉갈령하게 씻어 내린다.
7, ‘달 노인’의 모습이 *거통스럽다.
8, 그 소녀가 *울가망하게 말하며 아버지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 1,언행이 씩씩하다. 2, 정도에 지나치게 크거나 많다. 3, 너무 물러서  저절로 늘어져 처지게 되다. 4, 가량스럽게 야살스럽다(조촐하지 못하여 격에 맞지 않음) 5, 목을 졸라 죽이다. 6, 몹시 인정머리 없고 매정스러운 태도 7, 당당한 태도나 생김새, 보통보다 크기가 큰 통. 8,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늘 근심으로 지내다. (끝)
      -- 2018.. 12. 1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