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두워이(杜玮)

 [중국신문=동북아신문]최초로 진융의 무협 소설을 중국 대륙에 소개한 것은 ‘무림’ 잡지였다.이 잡지는 1980년대에 창간된 무술 잡지로 일찍 10여 년간 꾸준한 인기를 끌었으며 무협소설과 무술이 중국에서 빛났던 세월을 입증해 주었다.  <두워이(杜玮)의 글 중에> 
▲ 무협소설가 진융(金庸)
지난 해 10 30, 94세의 진융이 세상을 떠났다. 이날 저녁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기념하는 여러 글들이 SNS에 올라왔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진융을 알게 된 것은 ‘무림’ 잡지에 연재된사조영웅전, (射雕英雄传)’을 읽어보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1980년대, ‘무림’은 개혁개방을 선도했던 광저우(广州)에서 창간되었으며 이 잡지는 중국 대륙에서 창간된 최초의 무술 잡지이다. 창간 때부터 ‘무림’은 ‘사조영웅전’을 연재하였고,, 일시에 대륙은 이 무협소설에 빠지게 되었으며 많은 팬덤을 거느리게 되었고, 중국 내에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무협소설 붐이 일어났다. 절정기에 잡지는 월 350만 권의 발행 부수를 올렸다.2006년, 발행된 지 25년 만에 ‘무림’은 폐간을 선언하고, 강호무대를 떠났다. ‘무림’ 잡지의 흥망사는 중국 무협소설과 무술의 빛나는 세월을 증명하였다. 때를 만나다‘무림’의 데뷔는 그야말로 적합한 때를 만났다. 1979 1월 국가체육위원회는 무술유산 발굴정리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고,, 그 후로 체육위원회 관련 부서는 무술조사팀을 조직하여 산시(山西), 산시(陕西), 쓰촨(四川) 13개 성시와 지역을 시찰하였다.이는 정부 측의 노력으로 20년 넘게 침체됐던 중국 무술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는 앞으로 ‘무림’의 탄생에 복선을 깔아주었다.건국 초기, 중국 무술은 일정한 시간 동안 반짝하는 시기가 있었다. 1950년 중화전국체육총회는 베이징에서 좌담회를 열어 무술 발전을 주창하였다. 1952년에는 체육운동을 발전시켜 인민들의 체질을 높이자는 슬로건에 맞춰 국가체육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53년 텐진(天津)에서 열린 전국민족형식 체육공연과 경연대회에서 100여 명이 넘는 선수들이 참가해 권술과 무술기구, 산타(散打) 등을 포함해 300여 개의 종목을 선보였으며 그 후 민간에서 무술운동이 빠르게 전개되었다.그러나 1955년에 이르러 무술이 회복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섞여있어 좋은 취지에 위배되는 나쁜 동기가 섞여있다는 이유로 정부는잠정적으로 무술 회복에 대한 규모를 축소하고, 조정기에 들어선다는 방침을 세웠다. ‘문화대혁명’10년 동안 좌경 사상이 범람하여 적지 않은 원로 무술인들과 전문가, 학자들이 상당한 타격과 박해를 받았고, 대량의 권보(拳谱) 자료들은 봉건, 자본, 수정주의의 독초로 분류되어 소멸되었으며 무술훈련, 시합도 중단되었다.개혁 개방 후까지 무술은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금지 대상이었다.1979년 전국무술정비사업회의에서 일부 베테랑 무술인들은 정식으로 무술 출판물을 만들면 많은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 속에서 무술을 배우고자 하는 동경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또 일부 권위 있는 무술가들도 공개적으로 나와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당시 이미 퇴직한 광둥(广东)성 체육학교 황젠헝(黄鉴衡) 교무 주임은 회의에 참석해 이 소식을 듣고, 행동에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친구의 소개로 그는 당시 과학보급출판사의 장저량(张泽亮) 광저우 지사 편집실장을 찾았고, 장저량은 출판사 사장인 저우스리(邹斯礼)에게 상황을 보고했고, 출판총국으로부터 잡지 개설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다음 단계는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힘을 확충해 준비하는 단계였다.시간은 1980년에 들어섰다. 광저우 의약공업연구소에 근무 중인 량웨이밍(梁伟明)프로젝트를 마무리하던 시기였고, 마침 직장을 옮기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마침, 모교인 광저우미술학원의 한 교사가과학연구를 해봤고, 과학보급출판사에서 출판 관련 일을 할 수 있다. 미술공부도 했으니 미술편집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하여 당세 27세였던 량웨이밍은 잡지 준비팀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이와 함께 장저량은 편집실의 궈아오성(郭粤生)을 데려왔고, 황젠헝(黄鉴蘅)은 중학교 교사를 지내다 퇴직한 정수룽(郑树荣)을 데려왔다. 이외에 후이양(惠阳)농장에서 전출된 뤼제윈(吕阶云)까지 합하면 ‘무림’ 편집부 초창기 맴버는 6인이었다. 잡지는 광둥성 체육위원회(현 광둥성체육국)와 과학보급출판사 광저우 지사(현 광둥경제출판사)가 공동 주관하여 발행하였다.1980년 9월부터 10여 평방미터 남짓한 사무실에서 ‘무림’ 잡지출판에 대한 준비가 시작되었다.“잡지는 반드시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무술 전문지식 외에 무림의 일부 일화도 싣고, 이 내용을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고, 연결된 화폭으로 그릴지도 고민이었다. 또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어떤 방법으로 넣을까 하는 고민도 했다.” 올해로 65세가 된 량웨이밍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후 연재돼 큰 화제를 모았던 진융의 무협 소설 역시볼거리를 고민했기 때문에 연재하게 된 소설이었다.초기에는 원고가 부족하여 ‘무림’은 준비기간만 반년이 걸렸고, 사전에 이미 3기 원고를 앞당겨 준비했다. 1981년 7, ‘무림’ 잡지가 세상에 나왔는데 30만 권의 창간호가 발행되자마자 품절되었다. 이후 ‘무림’ 제2기의 인쇄 부수는 70만 권에 달하였으며, 3, 4기 이후에는 100만 권이 발행되었다. 이듬해부터 팬덤'의 인기에 힘입어, ‘무림’은 최초의 격월간에서 월간으로 전환하였고, 판매량이 수직 상승하였다.  ‘사조, (射雕)’를 연재하다‘무림’의 붐은 ‘사조영웅전’을 대륙에 처음 연재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당시 무협소설은 아직 대륙지역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진융의 글은 민간 채널을 통해서만 흘러들어왔고, 대부분 지인들 사이에서 돌려보는 정도였기 때문에 진융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혁명문학이 정통이었고, 진융 무협소설과 같은 통속문학은 비주류로 취급돼 비판을 받아 거의 사라졌다.개혁의 선봉에 선 ‘무림’ 편집부는 이 ‘금지구역에 대한 금기를 깨고 싶었다. 편집장 정수룽은 광동의 오랜 문인인 류이성(刘逸生)을 찾아갔다. 류이성은 홍콩 문화계와 깊은 교류가 있어 큰 힘을 쓰지 않고 진융, 량위성(梁羽生) 소설을 전재(转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량웨이밍은 진융의 작품을 우선 게재한 것은 소설의 내용을 고려했을 때 서사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과학보급출판사 광저우 지사장 저우스리는 진융의 무협소설 연재에 동의했다.잡지가 나오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품절이라는 결과가 나갔다. 량워이밍은 몇 달이 지나서도 다시 창간호를 찍어 출판하자 우체국에서큰일났다. 소설 연재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너무 많다고 피드백을 전해왔다고 웃으면서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무림’ 출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당시 덩샤오핑(邓小平) 중국 공산당 중앙부주석은 홍콩밍바오 (明报)’ 사장을 지내고 있던 진융을 베이징에서 접견했다. 그날 저녁,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이 소식을 방송하였다. 이후 진융의 작품은 대륙에서 점차 금지가 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선행자의 매력은 독특했고, 진융 무협소설의 마력도 놀라울 정도였다. 물질과 정신문화 생활이 빈곤했던 그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무림’을 보고 진융의 팬이 되었으며 무협소설에 대한 미련에서 통쾌한 복수를 하는 강호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잡지 한 권에 눈을 뜨고 매달 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행동이 빠른 사람이 성공한다. ‘무림’ 창간 직후 학교를 졸업하고 막 과학보급출판사 광주지사에서 일을 시작한 바오후이링(包慧玲)은 무림편집부 출납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진융 원고 사본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일가족 4명이 공유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부모는 그녀보다 먼저 소설을 읽었고 오빠와 그녀는 밤을 새우며 읽었다. 그는 10일도 안 되어 소설을 전부 다 읽었다.안후이(安徽)성 판창(繁昌)현에 있던 왕윈즈(王云直) 1983년에야 친구 집에서 ‘사조영웅전’ 연재를 보게 되었고, 가흥취선루(嘉兴醉仙楼)에서 구처기(丘处机)가 강남칠괴를 물리치던 장면을 읽으면서 느꼈던 전율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진융 소설 때문에 ‘무림’ 잡지는 주변인의 손을 거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시간이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잡지 창간 1년을 전후로 랴오닝(辽宁) 잉커우(营口)에서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다이(阿骀)는 ‘무림’ 잡지의 열혈 팬인 사촌형의 집에서 우연히 ‘사조영웅전’을 읽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먼저 본 것은 창간호가 아니라 제3대막풍사(大漠风沙)’였지만 그는 완전히 소설에 푹 빠졌으며세상에 또 이런 신기한 이야기가 있구나하는 사실에 감탄했다. 이전에 그는칠협오의(七侠五义)’ 등 전통무협소설을 읽었다. 진융 소설을 R급 판타지액션 영화인 ‘반지의 제왕에 비유한다면 예전에 그가 접했던 소설은 애니메이션도라에몽수준에 불과했다.1년 후 1983버전의 ‘사조영웅전’이 대륙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아다이는 이미 소설 내용에 대한 예습을 마친 상태라 친구들에게 이야기 전개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 믿지 않던 친구들이 드라마 회수가 거듭할수록 내용 전개가 아다이가 알려준 대로 흘러가자 놀랐고, 결국 그의 말이 사실임이 증명됐다. 이 일로 아다이는 성취감을 느꼈다.그러나 독자들이 실망했던 부분은 ‘무림’에 ‘사조영웅전’이 겨우 4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창간 후 8개월 만에 연재를 멈췄다는 것이다. 연재를 멈춘 이유와 관련해 저작권 문제라는 말도 있고, 관련 부처로부터 전재 금지 통보를 받은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무림’에 등장한 진융 소설은 사람들에게 마치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 주는 창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이후 신화서점은 단행본으로 된 ‘사조영웅전’ 상하 두 권을 한 세트로 묶어 40위안에 판매했다. 왕윈은 마음속에서 들끓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채 거금을 들여 이 책을 구매했다. 그때 그는 한달에 30위안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틀 동안 밤을 세워가며 책을 다 읽었다. 아다이는 아버지를 졸라 하이샤(海峡)출판사에서 편찬한 ‘사조영웅전’ 합본을 구매하였는데 마치 보물을 얻은 것같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이때 홍콩 무술영화를 방영하는 비디오방이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도서 대여점이 우후죽순처럼 왕성하게 발전하여 정판, 해적판 무협소설이 파생되어 나왔다. 학생들은 책을 대여하거나 구매하거나 서로 빌려 읽는 등 방법으로 무협에 빠져있었던 추억을 공유했다.무협소설 붐은 10년동안 지속되었다 
진융(金庸)의 무협소설 '천룡팔부'
무술을 배우는 붐이 일다1980년대에 불었던 ‘무협소설붐과 더불어 무술을 배우는 붐이 일어났다.1982년 영화 ‘소림사’의 개봉과 함께 주연을 맡았던 이연걸(李连杰)은 스타덤에 올랐고, 곧 전국적으로 한바탕 무술을 배우는 열풍이 일어났다. 왕윈즈는 ‘소림사’, ‘호원갑(霍元甲)’과 같은 무술영화가 국내에 들어오자 영화를 보기 위해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무술이나 운동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모여 영화를 보았고, 집집마다 무술 연습 기구들을 들여놓았다고 회상했다.당시 전국적으로 무술관과 무술훈련장 수가 지나치게 많았으며, 각종 형식의 학원, 수련원이 수없이 많았다. 어떤 무술학원은 원래 수강생 120명을 모집하려고 했다가 신청자가 1200여 명이나 되는가 하면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80, 가장 어린 신청자가 6세였다. 각지에서 무술을 배우고, 연마하는 사람들이 6000만 명에 달했다 국내 최초의 무술 잡지인 ‘무림’은 당연히 이 붐을 놓칠 수 없었으며 무술 배우기의 열풍에 힘입어 그 발전이 탄력을 받았다.난카이(南开)대 문과대학 저우즈치앙(周志强) 교수는 ‘무림’잡지에 대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1983무림지(武林志)’ 무협영화의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던 베이징 무술팀 지도를 맡았던 리쥔펑(李俊峰)에 대한 소개였다. 그는 ‘무림’잡지는 영화와 무술 경기, 무술 스타를 결합시켜 소개한 잡지로 기억되며 중국 최초의 무술 스타를 배출해낸 잡지라고 말했다.당대의 열풍에 발맞추어 ‘무림’은 창간부터 각종 권술의 특징과 방법, 실전 응용 등의 무술 엑기스를 게재했으며, 언젠가 무술 스승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무림’은 반드시 읽고, 연구해야 할 잡지였다.“구매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안 본 잡지가 없을 정도였다.” 아다이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웃집에 놀러 갔을 때 이웃주민이 이 잡지를 보고동작을 따라 해보며 나를 불러 무술을 가르치던 기억이 난다. 이웃은 다른 사람이 어깨를 붙잡았을 때 손을 이 위치에 두고, 준비하라고 했다. 모든 동작은 ‘무림’잡지에서 배워온 내용이었다고 말했다.1980년대 중반, 광저우 외국어학원(현 광둥 외국어무역대학)광마오웬(广袤园)’ 무술협회라는 학생 동아리를 설립하였다. 량웨이밍은 무술협회 초기 골간 구성원들과의 교류에서그들도 따로 스승이 없이 ‘무림’에 실린 내용으로 배웠다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중 속에서 무술을 배우는 열기가 일자 ‘무림’잡지에서 출간한 권보(拳谱) 관련 교재의 판매량이 몇 십 만부에 달했으며 많을 때는 몇 백 만부가 팔렸다. 잡지에는 권투장갑, 보호복, , , , 창 무술 기구와 관련된 다양한 광고가 실렸다.1983년 ‘무림’은 월 350만부의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무림’ 창간 2주년 특집에는 1983 6월 현재 총인쇄부수 3,300만 권이 넘는다는 기록이 있다.‘무술붐’이 밀려오는 시대에 ‘무림’은 추동자이자 수혜자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국가정책의 뒷받침을 받는 사회적 배경 아래 전개되었다. 국가체육위원회는 1982년 말 제1차 전국무술회의를 열고, ‘민간 무술 활동을 지지하고 민간무술관에서 무술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였다. 1983년부터 전국적으로 무술을 재발굴하고, 정리하는 프로젝트가 전개되었으며 3년간 651만 자의 권법과 병기와 관련된 기록이 작성되었고, 400시간 가까이 되는 영상이 촬영되었다. 80년대전국무술 산수(散手)규칙의 제정으로 전국적인 무술 산수 시연 대회가 열렸다.무술이 왕성하게 발전하던 시대에 ‘무림’지는 두 가지 행사를 열었다. 1985년 전통태극권의 중요한 부분이 실전(失传)될 위기에 처하자 량워이밍과 양씨 태극권 명가 천룽시앙(陈龙骧)은 함께 전국 태극권 명가 심포지엄을 열고, 태극권 권리권법(拳理拳法)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기회를 마련하기로 상의했다. 1986년 말 제1회 태극권 명가 심포지엄이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열렸는데 태극권의 대표적인 5개파의 대표 인물들을 포함한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심포지엄처럼 한 세기 이래 전국 태극권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88년 제2회 세미나가 광저우에서 열렸고, 이론적 토론 외에도 태극권 추수(推手)와 산수(散手) 시연이 추가되어 무술의 본래 모습을 재현하였으며 큰 영향을 끼쳤다. 강호에서 물러나다1980년대 내내 ‘무림’은 황금기를 맞이했고, 80년대 중후반까지 잡지는 여전히 월 200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방대한 독자층을 보유했다.1990년대 초에 이르러, ‘무림’의 판매량이 백만 부로 떨어졌는데 이후에는 그 하락속도가 더욱 분명해졌고, 50만 부도 보장하기 어려웠으며 2000년 이후 그 실적이 더 하강하였다. 2006년 ‘무림’잡지가 폐간되었다.폐간 원인에 대해 량워이밍은 잡지에 두 개의 주관 부서가 있었기 때문에 간행물 이념, 관리 체제, 이익 분배에서 줄곧 충돌과 갈등이 있었고, 발간 과정, 편집부 소속, 부서 인원, 주관자 등도 여러 번 변동이 생기면서 일치점을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한편 90년대에 들어 사람들의 여가생활과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무술이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무술 전문지로서 생존 공간이 좁아진 것은 불가피했다. ‘무림’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시대 발전의 물결에 순응하여 시대의 발전과 장단을 정확히 맞추었는데 결국에는 이 변화가 너무 빠른 시대의 흐름에 미치지 못하여 종점에 다다랐다.절정기에 ‘무림’은 광저우, 상하이, 난징(南京)에 세 개의 인쇄기지를 두었다. 잡지의 독자는 일반 민중과 무술명인 외에도 양청우(杨成武), 청즈화(程子华) 등 몇 명의 은퇴한 장군들도 있었다. 량웨이밍은 그때는 매달 몇몇 은퇴한 장군들에게 잡지를 보냈고, 덩난(邓楠) 당시 중국과학협회 주임에게도 보내주었으며 덩난이 또 다른 독자인 덩샤오핑(邓小平)에게 한 부 부쳐주곤 했다고 말했다.량웨이밍은 “덩난은 나중에 우리가 보낸 간행물을 덩샤오핑이 매회마다 읽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는데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바오후이링은 당시 ‘무림’ 잡지가 가장 휘황찬란한 시기를 맞이했을 때 잡지 계좌에 있는 현금이 백여만 위안에 달했다고, 회상하면서 그때 월급 수준도 월 100여 위안에 불과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두 가지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취재하러 나간 기자가 기차표 구하기가 힘들 경우 ‘무림’ 편집부 증명서를 제시하면 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선전(深圳)에서 제6회 전국체전 무술 종목 인터뷰를 하던 시기에 차가 막혀 취재에 차질이 생길 경우 차에취재용 자동차라는 글을 붙여두면 바로 먼저 빠져나갈 수 있었다.1995년, 과학보급출판사 광저우 지사가 폐지됨에 따라 무림편집부는 광둥경제출판사로 귀속되었다. 2000년 바오후이링은 부서를 옮기게 되면서 ‘무림’을 떠나 출판사의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가 퇴직했다. 량워이밍은‘무림’잡지 폐간 후, ‘중국 쿵푸라는 격월간 잡지의 편집을 맡았으며 사방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무림’의 초창기 창립 멤버 중 어떤 이는 다른 직장으로 옮겼고, 어떤 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량워이밍은 당초 ‘무림’의 성공 요인을 정리하면서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의 좋은 시기를 만났고, 마침 무술에 대한 규제가 풀렸으며, 첫 무술 전문 잡지라는 혜택도 보았기에 당시 무술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독자들의 욕구에 부합되었다고 분석했다.‘무림’이 폐간된 후 잡지에 대한 반향이 인터넷 카페나 중고 책 사이트에 많이 올라왔다. 최근 들어서도 ‘무림’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진융이 세상을 떠난 날인 지난해 10 30일 밤 ‘무림’잡지에 연재되었던 ‘사조영웅전’이 다시 화제로 떠오르면서 무협 전기에 대한 향수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날, 아다이는 밤새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는 진융 선생이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작별의 대상은 그의 필 아래에서 묘사되었던 인물들이다.다음날 이 그림은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이 그림에는 ‘무림’지가 가져다 준 무협의 꿈’, ‘무술의 열풍이 담겨 있으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빛나는 세월들이 담겨 있었다.(글에 등장하는 아다이는 필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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