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리문호 약력: 70년대 <연변문학>으로 시단데뷔,2007년 8월 26일 11회 연변 지용제 정지용 문학상 수상, 동포문학 최우수상,KBS성립 45주년과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망향시 우수상 2회 수상.연변작가협회 회원, 료녕성 작가협회 회원,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시집 <달밤의 기타소리>, <징검다리>, <자야의 골목길>,<팔공산 단풍잎(한국 학술정보(주)에서 출판)>, <다구지길의 란>, <료녕성조선족 시선집(리문호편찬)>가 있음이메일 lwh0312@hanmail.net

 

가리봉 시장 일경              
 

무거운 몸을 지탱한 무거운 발걸음들이다
어둑한 저 녘, 네온 등 불빛 눈부시게 감긴
만두 김, 어물전 비린내, 왕족 발 구수한 향이
허기진 콧구멍으로 밀물처럼 파동쳐 들어 온다

하루 땀 값이다, 피 값이다, 돈을 쪼개
동태 한 마리, 무우 한 개, 소주 한 병 산다
먹고 남는 것은 꿈이다, 웃음이다,보람이다
차곡차곡 모으고 쌓는 것은 희망을 쌓는 것이다

좁은 골목의 쪽방에서 찌개를 끓인다,
콤콤히 애락의 맛이 나는
보골 보골 군침에 서려오는 그리움
부모님의 허연 백발이 타래 쳐 오르고
아내의 눈빛, 아가의 웃음이 풍긴다

곰팡이 꽃 까맣게 핀 천장은 그들의 꿈나라
생긋거리는 뭇 별, 동경(銅鏡)같은 달 아래
고향천리로 질주하는 내연기의 코고는 소리
그리고 어느 역에서 부둥켜 안고 부대끼는 잠꼬대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면
하루 같은 하루를 잇는 하루 같은 고달픈 나날에
매일 지나가는 무거운 발걸음, 무거운 꿈들
가리봉 시장에 수척한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지나간다

 (동북아신문 안민문학상 최우수상 수상 시)

 


진달래꽃 가지

 

또 봄이 오나 봅니다. 시장에서
진달래 가지를 사다가 꽃병에 꽂고 봄을 불러 봅니다
사랑을 지니지 못해 꽃가게에 팔리지 못하고
내 방에 향사(鄕思)만 가득 채워줍니다

아직 변치 않은 풋향 이군요
옆집 소꿉친구 순이의 수줍은 웃음 같은,
아직 새파랗게 돋는 청순한 기억이군요
나물 캐는 강반에 빨간 댕기 같은 노래가 날리네요

부풀어 몽 알 지는 추억이
물 올라 터지네요, 봉그시
발가스럼한 속잎이 나를 눈 빨며
보조개 애교로 터지네요

타향에서 내가 너무 무정했나요
고향이 창문에서 나를 간절히 부르고 있습니다

 

무덤으로 가는 날
- 천고에 남기고 가야 할 노래

 

내가 무덤으로 가는 날
그대를 그대가 모르게
연모했다는 것도
무덤에 가져 가야 할 비밀이다

혼자서 조용히 달 아래 앉아
쓰디 쓴 풀잎을 잘근잘근 씹으며
부어 터진 입술에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보는 것도 비밀이다

눈물 젖은 눈빛 아련하게
그리워서 기리는 얼굴
이 세상에 와서 기억해
그대로 가져가려는 것도 비밀이다

죽어서도 저 하늘의 별로 남아
그대의 뒷그림자를 미행하며
이슬처럼 하롱하롱
옷깃에 스며 들려는 심사도 비밀이다

한(恨) 하나 더 가지고 가야 할
이승의 무거운 길
놓고는 못 가는 비원(悲願)도
무덤에 가져 가야 할 비밀이다

2018,12,20 서울에서

 


시계 태압

 

1호선에서 전철이 한강을 지나간다
한강 기적의 시계 바늘을 돌린 태압은
좌석 없는 미약한 숨결에서 심장의 박동처럼
아직 초침소리로 가늘게 들린다

탱탱한 신세대 태압들은 좌석을 독차지하고
스마트폰 속에 빨려 들었다     
가상 속의 울긋불긋한 사치스런  조각들이
전철에 목각처럼 모여 초침을 돌린다

한숨 섞인 백발의 다 풀어져가는 태압은
속으로 애원하듯 약속한다
얘들아, 전철의 좌석을 너희들이 다 차지하거라
이제 이 나라의 모든 자리를 다 내여 주마

너희들이 이 나라 시계 바늘을 돌리거라
너희들의 앞길은 우리가 걸어 온 길보다 더욱 험난하리니
어깨에 짊어진 짐도 우리보다 무거우리니
전철 좌석을 차지하고 쉬어가거라

다 맏긴다, 이 나라도, 미래도

 

고사 목
- 옛 시정의 선비들을 그려


                 
꺾지도 말아요 뽑지도 말아요
바람에 계절에 세월에
영원으로 간 그들을 건드리지 말아요

한 때 지고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죽어 굽히지 않는 강인한 골격
무한이란 곳에 깃대로 남아 있어요

청산에 남은 넋의 천년 고독
메마른 갈망 하나 하늘을 바라
외로움도 잊은 채 입명(立命)해 있어요

안타깝게 봄이 불러도 비가 흔들어도
다시는 일깨우지 못하는 도고한 그이들은
아, 이 땅의 강천에 높이 우르러 있어요

 


경포대에서


아, 오천 년을 담구어 익힌 술 !
푸른 정색(情色)이 가득한
청주(淸酒) 한 사발과 마주 앉아
한껏
정취에 빠져 드노라
이 나라가 흘린
눈물과 땀과 선혈에
영용(英勇)이란 누룩을 섞어 빚은 술
별 빛,달 빛, 햇빛을 받아
장장 반만년 유구한 혼령으로 익은 술
저토록
주향이 쪽빛으로 푸르러
오늘에도 옛 시정이 넘실거리누나
그 위에 일렁이는 눈빛들
반짝이는 계시의 섬광
헤아리자, 우리에께 주는
간곡한 부탁은 무었이더냐
저 멀리
호만이 활등 같은 동해 바다
태양이 오고 가는 길에
겨레의 념원이 용용 넘실거리고 있어라

2017,8,18 서울에서

 

고독을 굽다
  

일상의 영양소로 응결된 고독
하얀 석새에 올려 놓고 굽다
혼자 구어야 제 맛이다, 깊은 야밤
꼬챙이를 들고 조용히 뒤적거린다

자극자글 희노(喜怒)의 기름이 끓고
노릿노릿 애락(哀樂)이 불길에 익는
바라지도 못 할, 오지도 않을 그리움을
한 폭의 그림으로 훈향에 떠 올린다

시인만이 향수할 수 있는 이 맛
고독을 굽다, 설 익지도 태우지도 않은
짜릿한 한 자락 마음
한 꼬치의 고소한 시다 !

     2015 ,4, 26 서울에서

 

하늘의 천사, 비둘기

비둘기에 맘을 실어
                 

언젠가 굶주린 비둘기들이 모여와 흙 바닥 쫓는다
모이를 뿌려준 애기들은 좋아라 동동
동골동골한 웃음이 퐁퐁 풍선처럼  터진다
어머니들은 함박꽃 미소를 연처럼 띄운다

비둘기야, 네가 찾아와 얼마나 좋니
대포구멍 제집 삼아 들락날락 노래도 즐겁고
탱크 뚜껑 열고 들어가 조정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깨우며 깃엔 동요도 한 아름

하늘의 쌕쌕기에 네 나래 바꿔 달고
삼천리에 무궁화 꽃 바구니 물어다 뿌리려마
남과 북 가로 놓인 훤칠한 무지개 다리에
환희와 감격의 물결이 밀려와 사품치게 하려마

비둘기야, 네가 비상하는 푸른 하늘엔
태평성세 비낀 흰구름이 한가하게 흐르고
이 나라 오렌지 빛 꿈이 햇살처럼 쏟아지게 하려마
비둘기야, 날아라, 영원히 날아라, 이 나라 하늘을 !
               
2015, 4, 25 서울에서

 

무명화

 

숲길을 가다가
야, 한심하게
요렇게 조그마한 너도 꽃이라 피였니

실오리 가느다란 허리도 추스리지 못하면서
티끌 같은 빨간 꽃 피여 가지고
꿀벌이라도 와 앉으라고 부를 수 있겠니

가만이 다가가 귀속 말처럼 묻는다
-네 이름이 뭐니 ?

고것이 제법 눈살을 살짝 깔며 대답한다
-이름하나 가지기가 얼마나 무거워요
나는 백과사전에도 이름이 없어 다행이에요

요 것, 대답하는 거 좀 보래
꽤나 당돌하고 깜찍하네

그래, 맞아 이름이 없다고
살지 말라는 법은 없지
너는 영욕을 모르기에
수풀 속에 치여 살아도 청순하구나

나는 이름 하나가
십자가처럼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겠다
네 앞에서 덜컹 부려 놓으니
날 듯이 거뿐해 지누나

고 좁쌀 같은 꽃이 웃을 입도 없으면서
나를 보고 눈을 깜박 웃고 있네

이제부터 우리 친해 지자꾸나
너나 나나 무명화란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 살자꾸나

2019,1,5일 서울에서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 중국 동포 시인이
거룩하신 그대 동상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히 서 있습니다
- 이국에서 오느라 수고 했소
  한글을 잊지 않고
  한글로 시를 쓴 다고요, 참으로  고맙소 
세종 대왕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기는 듯
가슴엔 뜨거운 난류가 굽이칩니다

예서 나는 이 나라 푸른 하늘에
그대의 환한 얼굴이 비껴 있음을 보았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같은 눈빛이
이 강산을 예지로 비추고
흰구름 같이 날리는 수염아래
화사한 미소가 쏟아져 내림을 보았습니다

자음으로 펼쳐진
웅위로운 백두 대간과 푸른 들과 3천 개 섬,
모음으로 펼쳐진
천 만 갈래 계곡과 줄기찬 강하와 3면 바다에
얼과 정기와 기백과
백절불굴의 투지로 응집된
양과 음의 태극으로 조화로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보았습니다

자음과 모음이
금강석 같은 결정체를 이룬 565년은
낭자한 피와
민족의 얼이 하나로 되는 
처렬한 여정이 아니였습니까 ?
한 치의 땅도 지켜
항전에서 영용히 쓰러진
해골과 뼈로
금자탑을 축조한
장렬한 여정이 아니였습니까 ?
자음과 모음의 문화와 불굴의 넋으로
침략자, 약탈자, 열강과 싸운
천추에 빛날
어혈로 쓴 역사가 아니였습니까 ?

자음과 모음이 갈라질 수 없듯
자음과 모음이 영원히 갈라지지 않듯
자음과 모음에 응집된 민족의 혼은 하나로
남과 북도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은 아직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이 참아야 합니까 ?
이 나라는 아직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
가끔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은
세종 대왕님께서 분단을
비통해 하시는 울음일 것입니다
가끔 번개치고 우뢰가 울리는 것도
세종 대왕님께서 갈라진 혈육을
대성통곡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또 565년
알지 못 할 예언들이 이 나라를 기다려도
자음과 모음로 결집된 얼이 있어
모든 고난을 이겨 가며
의젓한 자태로 세계화에 나갈 것입니다
어느 날은
이 나라 통일의 서광을 맞아
환호로 들끓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한 중국의 동포 시인도
자음과 모음의 이름으로
모두가 지닌 자음과 모음의 이름으로
자음과 모음의 이름을 지닌
자손만대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이 나라가  번영 창성하기를
이 하늘
이 땅에 우뚝 서서
세종 대왕님의 미소가
평화로 깃 펴
영원하기를 영원하기를 !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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