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편집/방예금 기자=수필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박연희 약력 : 수필가, 전동포모니터링단장,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 수필/수기 백여편 발표. 수상 다수.

 

1.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다독이며 
 
우연하게 집안 청소를 하다 보니 크고 작은 거울이 비좁은 옥탑 방에 여섯 개나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장실, 복도, 거실 등 거울이 없는 곳이 없었다. 몇 개를 골라 밖에 내다 버렸다. 얼마 후 거울가게 앞을 지나다가 큰 거울이 버려진 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 또 집으로 들여왔다. 거울이 너무 커서 집안이 꽉 차는 느낌이 들어 다시 버리려고 거울을 들었더니 도저히 가파른 계단을 내려갈 수 없이 무거웠다. 별수 없이 나머지 작은 거울들을 버리고 큰 창문과 맞먹는 거울로 벽 한쪽을 채웠다.
 
거울 속에는 화내는 내 모습도 있다.
때로는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거울 앞에서 풀어낸다. 파출을 나갔다가 만났던 기분 나쁜 상대를 그려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네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나한테 훈계하는 거야. 만약 내가 너처럼 3년을 그곳에서 일했으면 너보다는 훨씬 나았을 거야’
때로는 가정부로 일하는 주인집 마누라를 빗대고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주는 밥 한 끼를 그렇게 아까워하는데 더러워서 내일부터는 맛있는 도시락을 사 가지고 다닐게’
 
방송인으로 일했던 내 과거를 깊숙이 묻어버리고 생소하고 힘든 3D업종에 적응하기 까지 나는 거울과 많이도 씨름을 했다. 거울 속에 웃는 모습과는 달리 화내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무섭고 싫었다. 애써 마음을 눅잦히며 심호흡을 한 후 거울을 행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본다. 쓴 웃음이라 그런지 썩소에 가까웠다. 다시 시도해본다. 여러 번 반복했더니 드디어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가며 어색했지만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울 속 화내는 모습에서 나는 자신을 반성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거울 속에는 슬픈 내 모습도 있다.
쉰이 넘은 중년여자의 몸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갑상선, 빈혈, 갱년기, 골다공증 등 병마들이 내 몸을 번갈아 파고들어 아픔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표정을 거울에서 볼 때면 이런 독백을 한다. ‘아직은 쓰러지면 안 되지. 좀 더 힘내자. 파이팅’
 
거울 속에서 힘 빠진 내 얼굴을 보는 것이 왠지 슬프다. 약보다 더 좋은 방법은 매일 걷기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의사가 권했다. 하루 한 시간 아침 일찍 일어나 걷기운동을 시작한지 일 년이 지났다. 건강용품과 화장품도 사들이고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옷도 신경을 쓴다. 비로소 거울 속 내 얼굴은 다른 사람한테 너무 미안한 얼굴은 아닌 듯싶어 안도의 숨이 나온다. 거울 속에서 내 모습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음에 나는 늘 감사한 마음이다.
 
거울 속에는 웃는 내 모습이 있다.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출근길에 오르기 전에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옷매무시를 점검한다. 퇴근하면 바로 컴퓨터에 앉아 메일을 체크하고 인터넷에서 시사를 보기도 하며 신문지상에 보낼 고민상담 이야기와 수필, 수기, 칼럼들을 마무리 하고 새 글들을 구상하기도 한다.
 
여행은 삶의 활력소이자 글의 소재를 얻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제주도, 남이섬, 파주, 강릉 등 여행준비를 위해 거울 앞에서 옷을 벗었다 입기를 반복한다. 협회행사를 위해 전화기를 부지런히 돌리기도 하고 여성단체모임에 중국음식을 만들어 가기 위해 바닥에 밀가루를 흩날리며 반죽을 한다. 중국연변의 38여성축제의 기억이란 주제발표와 재한동포여성단체의 역할과 과제라는 주제발표를 하기 위해, 한민족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TV대담프로에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자신이 작성한 문서들을  읽어 보면서 억양을 조절하고 얼굴표정도 다듬어 본다. 거울 옆 작은 흑판에는 매달 일정이 빼곡히 적혀있다. 거울 속에 비춰진 이런 내 모습에서 나는 늘 자신심을 얻는다.
 
남북문화행사에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옥탑방에서 워킹 연습을 했는데 세발을 걸었는데 바로 거울 앞이었고 되돌아서서 워킹하려니 옥탑 방이 경사도가 너무 심해서 한쪽으로 쏠려서 워킹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연습하여 행사 마지막에는 제법 그럴 듯한 모델모습이 나왔다. ‘거울아 이게 다 네 덕분이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혼자 낄낄 웃었다.  
     
거울에 집착하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남성의 힘을 과시하는 하드파워의 무기가 칼이라면 거울은 여성을 행복으로 빛나게 만드는 소프트파워(매력으로 얻는 능력)의 무기이다.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열심히 한결 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거울은 언제나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내가 살아온 생애의 궤적과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을 거울은 고스란히 그대로 보여준다. 거울에 비친 활기찬 모습에서는 힘을 얻게 하고 주눅이나 화난 얼굴에서도 훌훌 털고 일어나게 하는 마력의 힘을 거울은 가지고 있었다.     
 
내가 힘들어 할 때도 거울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면서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변함없이 응원을 보내주는 든든한 벗이 되어 주었다. 거울은 자신에게 비친 모습을 상대방에게 여과 없이 되돌려 준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 늘 힘을 내며 밝고 건강하게 웃는 모습, 타인을 아끼고 배려하는 모습을 거울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다시 내어준다. 이를 통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언제까지고 힘을 북돋아 준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내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행복이 내 것이 될 수도 있고 남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길을 걷다보면 비를 흠뻑 맞는 날도 있고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흔들려 쓰러질 때도 있다. 사람은 고난을 맞이하면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비관해 좌절해버리거나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켜 강해지거나. 많은 사람이 그런 경험을 통해 난관에 직면하고 실패를 이겨내는 지혜를 터득해간다.
 
한국이라는 낯 설은 땅에서 고단하게 펼쳐지는 인생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거울, 그리고 아침마다 보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부디 주위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만드는 얼굴이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스스로 다독여 본다.

 

2. 인생의 하프타임-갱년기 


 
갱년기를 질풍노도라고 하며 갱년기가 사춘기와 싸우면 이긴다고도 한다. 나의 갱년기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심이 넘쳐나는 성격인지라 갱년기도 쉽게 넘길 수 있는 벽 인줄 알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갱년기는 진행형이다.
 
갱년기가 시작된 것은 2014년 여름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이 나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땀이 줄줄 흐르고 이유 없이 우울하고 기억력이 상실되는 등 갱년기 증세가 빠짐없이 찾아왔다. 마침 tv에서 갱년기에 좋은 약이 있다고 해서 구매하여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반년도 되지 않아 가짜라고 밝혀져서 더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2015년 봄부터 한쪽 팔이 심하게 아팠다. 병원에서는 회전근개파열이라고 병명을 알려주었다. 200여 만 원을 들여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이 없었다. 밤중에 통증이 찾아와서 잠을 설쳤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제대로 닦을 수조차 없었다. 육체적인 아픔보다 더 힘든 것은 그렇게 초라하게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피신처를 찾아 중국고향으로 갔다.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가서 인민폐를 두툼하게 들이밀고 두 달 동안 열심히 치료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갱년기 증세였다는 것을 그 이듬해에야 알게 되었다.
 
2016년 초순경에 또다시 몸에 이상이 생겼다. 때로는 고기를 먹어도 위가 아무 이상이 없는데 때로는 약조차 넘어가지 않아 몇 달 동안 소화제를 가방에 챙기고 다녔다. 위암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내시경을 했더니 염증이 약간 있을 뿐이었다. 간염과 당뇨, 갑상선 등 여러 가지 검사를 모조리 해보았지만 문제가 없었다. 최종적으로 산부인과에서 갱년기라는 결론이 나왔다. 갱년기가 지난 줄로만 알았던 나는 허탈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의사의 분부대로 호르몬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생리가 다시 시작되는 바람에 귀찮고 힘들어서 약을 끊었더니 갱년기 증세가 복제되듯 다시 되살아났다. 육체적 고통을 참지 못한 나머지 다시 호르몬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호르몬제를 복용한다고 해서 갱년기증세가 다 없어진 건 아니었다. 화끈화끈 얼굴홍조는 보너스이고 몇 초도 되지 않아 눈물을 질질 흘리고 괜히 욱하기도 하고 천당에서 지옥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감정기복이 생기고 누군가의 전화나 문자도 곧잘 씹었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아침부터 노래가 흥얼흥얼 나오다가도 또 어떤 날은 괜히 슬퍼지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예고 없이 머릿속으로 훅 들어온다.
 
갱년기를 겪으면서 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갱년기를 극복하려면 약 복용과 함께 가벼운 산소운동도 필요하다고 의사가 당부를 했다. 그 덕에 운동을 하지 않던 내가 하루 한 시간 정도 무조건 걷기를 이어가고 있다. 음식을 편식하던 습관을 버리고 갱년기에 좋은 음식도 찾는다. 누군가 살찐 나의 몸매를 보고 몸에 이상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갱년기 때문이라고 구실을 대기도 한다. 상대방한테 화를 낸 후이면 호르몬분비 때문이니 이해해 달라고 밀어버리기도 한다. 일하기 싫을 때면 갱년기가 왔으니 좀 쉬어도 괜찮다고 자기를 위안한다.
 
“갱년기(更年期)란 한자로 풀이하면 ‘해’를 바꾸는 시기로써 평생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성 호르몬의 지배를 받으며 늙어가는 보통 여자와 남자에게 인생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이제껏 살아온 삶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치 축구경기처럼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잠간 휴식과 같은 하프타임인지도 모른다. 전반전을 열심히 뛴 피로감이 몰려들기도 하고 후반전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하는 시기이다. 전반전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성과를 거둔 이들은 좀 느긋하게 하프타임을 통해 여유롭게 후반전을 맞을 수 있고 전반전에서 부진한 기록이 있던 이들은 하프타임으로 다시 계획을 짜거나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삶을 새로 정비하는 것이 꼭 지난 세월보다 더 분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위로를 해주고 좀 나태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열정의 불을 붙여주고 늘 타인을 향해 있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비추는 시기가 바로 갱년기이다.
 
초경, 임신, 출산, 폐경, 갱년기가 바로 여성인생의 필수코스이다. 물론 어떤 여성은 아무 감각도 없이 지나가지만 나처럼 성질 더러운 여성은 요란하게 홍보하면서 갱년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것을 거슬러 보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자 허사이고 아예 갱년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하늘땅이 맞붙는 출산도 했는데 그깟 갱년기가 뭐 그리 대수일까. 고통스럽고 힘든 증상들을 피해가기보다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담담하게 그 변화된 몸을 사랑하고 단련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갱년기는 혼자만 겪는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평생 가는 것도 아니다. 터널을 지나듯 인생에서 어차피 거쳐야만 하는 길이라면 터널 속에서 잠깐 눈감고 졸다보면 다시 밝은 빛이 보이듯 그렇게 갱년기를 버텨보련다.

 

▲ 꽃과 함께, 햇빛과 함께...

 3. 죽음 너머 떠나는 여행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그곳에 가서 생길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좀 더 실속 있게 여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대상 지역에 대해 먼저 공부를 하게 된다. 그렇다면 죽음 너머 떠나는 여행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사람의 운명은 자기의 뜻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의 반환점이 될 때쯤이면 스스로 깨닫게 된다. 죽음에도 순차적으로 오는 죽음이 있고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도 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얼마 전 53세의 친구가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다음날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트렁크에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정작 여행의 주인공인 자신을 위한 준비는 마치지 못했다. 그녀가 준비했을 여행 트렁크를 상상하면서 죽음 역시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밝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맛 나는 음식과 옷가지들을 챙겨주던 그녀를 만났던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녀의 웃고 있는 영정사진을 보면서 그녀의 죽음보다 더 슬펐던 것은 나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실망감이었다. 
 
작년 추석쯤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낼 때 추도식도 못하고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간소한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때 나의 죽음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20년 넘게 가까웠던 친구가 4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공항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했었다. 내가 한국에 입국하던 그해 남자 동창생이 조선소에서 몇 해 동안 일을 하다가 간경화로 돌아갔다.
 
요즘 들어 너무 자주 접하게 되는 죽음이다. 이제는 내가 죽음에 대해 익숙해질 나이가 되었나 싶다. 나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텐데 내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고민도 해보았다.
 

죽음을 위해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장기기증 희망등록서이다. 중국에서 방송을 할 때 한 시각장애인을 취재했는데 그 사람이 장기기증서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도 죽기 전에 장기기증서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장기기증에는 사후 각막기증과 뇌사 시 장기기증, 인체조직기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죽은 후에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장기를 꺼져가는 생명을 위해 대가없이 준다면 나의 생명이 이식인의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행복한 일이 분명하다.
 
만약 몹쓸 병에 걸린다면 쿨하게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질질 눈물을 흘리고 몇날 며칠 신세타령도 할 것이며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이 세상 종말을 맞은 듯 죽느냐 사느냐를 웨치면서 난리부르스를 칠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글을 쓰면서 자신을 달래기도 하고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걸 내려놓고 남은 인생에 대한 정리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바라듯이 내 자신이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었으면 한다. 부모님이 거의 20여년을 병마에 시달리다가 돌아갔고 양로원에 다니면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만 있다면 가망이 없는 삶에 매달리지 않고 편하게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 
 
유골을 강물에 띄워 보냈으면 좋겠다. 강을 따라 끊임없이 산책하는 죽음의 여행이 색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죽은 후에 산에 묻힌다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땅속에 묻혀 갑갑하기보다 물 따라 쉼 없이 흘러가면서 강물에서 살고 있는 미생물들과 강기슭에 풀과 저 강 너머 보이는 나무들과 더불어 내가 생전에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아니한 것 같다.
 
분신이나 다름없는 나의 글이 실린 책을 유골과 함께 강물에 한 장 한 장 띄워 보냈으면 좋겠다. 아직 내 글로 발행된 책이 한권도 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죽기 전에 한 권은 나오겠지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베스트셀러가 될 만은 작품은 아니지만 내 인생이 매 자국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한 줌의 재가 되어서도 또 다른 세상에 대해 관찰하고 그 느낌을 글로 마음에 새기고 싶다. 
 
여러 가지 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인생도 서로 다른 색깔로 이루어진다. 장례식장이 흰 꽃만 있다면 너무 싫을 것 같다. 장미와 백일홍, 선인장 꽃도 좋지만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패랭이꽃, 호박꽃, 나팔꽃 그 중에서도 제일 내가 좋아하는 안개꽃이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  
 
장례식장에서 울어줄 사람이 없을까 근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것이 10명이 되지 않더라고 좋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지인들이 너무 슬퍼하지 말고 기쁘게 즐겁게 나를 저 세상으로 보내주었으면 싶다.
 
그날 친구의 장례식에서 슬프다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앞에 놓여있는 음식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있었다. 나의 장례식장을 찾아온 지인들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과 안주를 곁들이면서 지나온 나와의 추억을 되새겨 주었으면 좋겠다.
 
죽는다고 해서 하루 새에 갑자기 죽어버리면 억울할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오래 앓다가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병원비용을 넉넉히 마련해야 추하게 죽지 않을 것이다. 더욱 큰 바람이 있다면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사전에 알았으면 좋겠다. 그 남은 몇 달을 열심히 자신을 정리하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무리하고 싶다.
 
친구의 빈소에는 집사 모모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의 장례식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았다. 작가라고 하기에는 아직 한국문단에 등단이 되어있지 않다. 상담사라고 하면 그럴듯하긴 한데 그렇다고 전문 상담사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았으니 조금 더 멋진 삶이 아니라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것 같다.
 
장례식에 활짝 웃는 모습의 영정사진이 걸려있었으면 좋겠다. 늘 웃어서 바보 같기도 했지만 우울한 모습은 죽어도 싫다. 슬픈 모습을 한다고 죽은 사람이 되돌아 올 것도 아닌데 나의 지인들에게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을 선사하고 싶다. 누군가 그런 내 영정사진을 보면서 ‘네가 긍정적이며 뭐해? 너도 어차피  가는 인생인데.’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여행은 삶의 축소판이다. 모든 여행은 끝나지만 여행이 끝날 것을 미리 걱정하며 여행에서의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과 만남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여행 중에 ‘아 여행이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근심만 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부질없는 일인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삶 자체가 여행이라면 끝이 없는 여정으로 떠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지금 이순간의 여행에서 힘 다해 살면서 준비하다보면 돌아 올 수 없는 긴 여행인 죽음으로 떠난다 하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죽음 너머 떠나는 여행에 익숙할 수는 없지만 굳이 준비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욕심을 부린다면 인생여정의 끝자락인 죽음이 너무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으면 싶다. 
 
    
 4. 책 속에서 찾은 풍경


우리 집은 연길시 서시장 부근에 있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둘과 우리 형제 다섯 명과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열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아랫목에는 중풍에 걸린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요강을 놓고 11년을 우리 집에서 살았다. 신문사에서 편집으로 일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비록 쌍직공(부부가 출근족)이여서 노임도 적지 않았지만 식구가 많은 탓에 생활에 쪼들렸다. 거기에다 넷째 딸로 태어난 여동생은 간질병으로 7살 아이의 지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집을 뛰쳐 나갔다. 

아들만을 학수고대하는 박씨가문의 셋째 딸로 태어난 나에게 누구 하나 관심을 주지 않았고 사랑은 더구나 기대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나는 열심히 공부만 했다. 그 덕에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나는 줄곧 반급에서 학습반장이었다. 소학교 4학년 때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용정시 동성 촌에 있는 모주석 학습모범인 황 순옥을 찾아가 그의 선진사적을 듣게 되었다. 농촌여성이고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모택동 선집을 술술 외우면서 몇 페지에 어떤 어록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황 순옥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마침 우리 집에는 북경에 가서 모택동 선집을 번역했던 아버지 덕에 새롭게 출시된 모택동 선집이 1~4권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책장에서 모택동 선집을 새것으로 골라 읽기 시작했다. 모르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글자를 빼놓을세라 열심히 읽어가면서 심득필기를 매일같이 써내려 갔다. 소학교 졸업할 시즌에 학교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나의 심득 필기를 돌려가면서 보기 시작했고 나는 한 학교에서 2명만 추천되는 공청단에 추천까지 받았다. 비록 나이의 제한으로 공청단에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책과의 첫 인연이었다.
20대 초반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규모가 비교적 큰 한 신문사 도서실에서 2년간 도서관리를 맡게 되었다. 그 무렵 한국어로 번역된 세계명작소설 100선을 연변에서 제일 먼저 들여온 것이 바로 내가 다니던 신문사였다. 톨스토이, 헤밍웨이, 세르반테스, 빅토르 위고, 스탕달, 셰익스피어, 괴테, 모파쌍 등 세계의 유명한 작가와 작품들은 나를 물 만난 고기로 만들었다. 그때는 문학보다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그중에서도 중국에서 독초로 찍힌 <금병매>을 제일 먼저 읽었다. 사랑에 대한 호기심이 불탔던 그 시절 감히 상상도 못했던 남녀사이의 애정묘사에 혼이 나간 나는 삼일 동안 밤새워 책을 다 읽어버렸다. <홍루몽>, <안나 카레니나>, <레미제라블>, <전쟁과 평화>, <주홍 글씨>,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을 읽느라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거르기가 일수였고 휴식에도 구실을 대서 도서실에 틀어박혀 책에 젖어있었다. 공기가 희박하고 난방도 되지 않는 도서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은 적도 있다. 대부분 외국작품이라 내용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글의 구상이나 묘사 그리고 시작과 결말 주제 등은 나에게 문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책을 읽을수록 가슴은 널뛰듯 뛰었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고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 시절 그 책들이 나에게 문학의 싹을 키워 주었다. 

드디어 1994년 5월에 <애모쁜 추억>이란 나의 어설픈 첫 작품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고 그 후로 30여 편의 수필을 써냄으로서 연변작가협회의 회원으로 되었다. 방송국에서 편집기자일을 하면서 문학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에는 20대 초반의 열정만큼 책을 읽지는 못했다. 가정일과 직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책은 가끔씩 재미로 읽는데 불과했다.

50대 중년의 나이에 한국에 나와서 이주민으로 살게 되면서 나에게 유일한 위로는 글쓰기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북한사전이 기준이었고 틀에 박힌 연변식 조선어로 작품을 썼던 나에게 표준화된 한국어로 글을 쓰려니 애로가 많았다.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 한국작품을 읽어야 했고 띄어쓰기, 맞춤법을 수정해야 했고 단어사용이 맞는지 늘 체크해야 했다. 이렇게 우연찮게 한국에서 책과의 인연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지금도 여유가 생기면 나는 가까운 알라딘 서점을 찾아간다. 사고 싶은 책을 싼 가격에 살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곳의 분위기이다. 서점에 들어서면 흰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유명한 작가들의 초상화를 볼 수 있는데 그곳에 한참을 서 있으면 가슴이 설레인다. 읽고 싶은 책을 들고 하루 종일 뒤적거려도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아서 좋다. 책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서 맴돌던 글의 소재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마무리 하지 못한 글의 제목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책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를 선물하기도 하며 삶의 용기를 얻게 한다. 책 속에서 헤매다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쌓여있던 고민도 저만치 날아간다. 책 읽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행복을 혼자 만끽한 듯싶다.

비록 작은 방에서 생활하는 셋방살이지만 책장 속에 즐겨보는 책들이 즐비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평화롭고 뿌듯해지기도 한다. 십대에 만났던 모택동 선집과 이십대에 만났던 세계명작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의 문학작품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덕에 글쓰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어느덧 200여 편이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았다. 작품을 쓰면서 나의 인생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고 글쓰기는 내 삶의 원초적인 동력이 되었다. 이제 내 삶의 한 페지로 엮어진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삶의 지혜와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나의 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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