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성해동 약력: 중국 흑룡강성 수화시 출생. 2018년 <현대시선>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시선 회원, 시와이야기 회원, 한반도문학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시분과장. 동포문학 시 우수상 수상.  

 

1.바람의 흔적

 

무에서 무로 가는 
바람에는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서북풍이 불어와
손을 뻗고 오므리는 튤립입니다 

잡을 수도 안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데
모양도 빛도 냄새도 없는데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건강하냐고 
멈추지 말라고
행복해야 한다고

엄마의 잔소리입니다 
아빠의 거친 숨결입니다 

흔적 없이 지나치는 저 헛것에
드디어 향기를 풍기는 튤립입니다

 

2.가족

 

브레이크 없는 세월
끝까지 밟아보는 액셀러레이터
차량 트렁크
기쁨과 슬픔 덜컹거리며
마음의 로터리 에돌다 
힐끔 쳐다보는 백미러

들녘은 그대로인데 
아스라이 멀어지는 계절
잘 안다 자부했는데
실은 모르는 쪽에 더 가까운 
나의 정서가 태어난 
내게는 가장 익숙한 타인이여!

벚꽃으로 흩날리다
뙤약볕으로 불타다 
가을빛으로 물들다 
눈송이로 녹아들어 

바람에 꽃이 지고
빗물에 잎이 울고
마침내 나는 허수아비 되고

 

3.옷 수선

 

허기진 향수에
수척한 몸뚱이
찌든 땀방울에
해지고 구겨진 옷

마음의 바늘눈으로
꿰뚫어보는
시간의 실타래

봄, 여름, 가을, 겨울 실표 뜨고
희로애락 겹침 많아도
한뜸한뜸 시침하네

가봉한 운명
실밥 터진 욕심
오버로크 촘촘히 하네

드디어 맞춤하게 마친 수선
쫙쫙 다리미로 주름을 펴니
한결 정갈한 넋

 

4. 새벽 두시 


 
목청껏 부르짖건만 울먹이는 목소리
화들짝 깨어나 보니 새벽 두시
 
설정한 온도를 한사코 유지하려고
방에서 보일러는 드렁드렁 코를 골고
밖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예고도 없이 찾아오면
한마디 말도 없이 바라만 보면
또 그렇게 입김처럼 사라지면
 
어이하여 덧나게 합니까
겨우겨우 아문
간질간질 여린 속앓이
또 이렇게 붓고 짓무르는 고름
 
역시나 개꿈인가요
또렷이 비치다가
습기가 차오른 거울처럼
허겁지겁 뽀드득 닦아도
 
새벽 두시 창유리에
실루엣만 남긴 당신이여
이제 난 어떡합니까

 

가는 길을 물어보다...

5.그대에게 가는 길

 

하늘에는 새의 길이 있고
바다에는 배의 길이 있고
땅에는 사람의 길이 있는데
마음에는 길이 없나 봅니다

한갓지고 비어있는 오솔길에
코스모스 아리아리 손짓하고
가슴에 차오르는 나무 냄새
허공에 일렁이는 그대 모습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과거를 잊으려는 마음이
여위어 오솔길이 되었고
낙엽의 결이 삭아 내린다

이별 있는 사랑만이 정녕 사랑이라고
조약돌처럼 눈물을 흘리며 왔는데
정작 그대 마음의 길목에
아, 통행금지 팻말이 놓여있네

 

6.단추를 달면서

 

툭,
일탈하는 넋

아, 너무 오래 입었나
아무리 빨고 다림질하여도
잘 채워지지 않는 세상
옷 한 벌 입는 것이 힘들다

지퍼 이라면
차갑게 꽁꽁 닫힌 가슴팍
거침없이 질주하며 보여주련만

숭 숭 숭 숭
뚫린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땀 한 땀
시간의 숨결로 꿰매어

쑥쑥 해와 달로 채워서
흰 와이셔츠 벌어진 욕심을
정갈히 매무시한다

어제가 아닌
내일도 아닌
지금 오늘을

 

7.오미자

 

나의 계절이라고 믿었던
그 사람은 스러져 가고
나는 꿈속에서도 울었다
그 사람을 잊어주기까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달라
덩굴이 되는 그리움
환절기를 맞는 사랑

이제
새로운 계절을 기다려
가슴속 고즈넉한 산기슭에

톱니에 긁힌 상처가 흘린 핏방울은
여태껏 휘영청 덩굴 끝에서 영글어
방울방울 그 맛이

맵고
쓰고
달고
시고
짜다

 

8.상춘객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그 속도만큼이나
멀어지는 그 거리만큼이나
이 내 그리움이
산책할 수 있는 딱 그만 큼에
당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가다 앉아 한가득
추억을 캐서
보퉁이에 싸서
당신께 다가가면
소소리바람에 밀리는 봄 햇살을
허둥지둥 뒤쫓다 벗겨졌나
당신의 고무신이 지천이다

당신의
그 연분홍 미련만 아니라면
나도 이른 봄 꽃샘추위에
여의도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당신이라는 벚꽃길을 걷노라니
계절이 아니라 내게 있었군요
꽃이지는 것과 떨어지는 그 차이

봄 봄 봄은
정녕
마음에서 먼저 시작하나요

 

"100년의 탐욕은 하루 아침의 티끌이로다", 그 앞에서...

9.추억

 

이기대 해파랑길
바다를 동행하는
곡선 길을 걷노라면

참으로 신기하다
더 먼 데가 보이지만
더 가까운 데가 안 보인다

가깝지만 숨어 있던 풍경이 드러나고
저쪽으로 계속 드러나 있던 풍경은
어느새 또 모습을 감춘다

직선 길이 주지 못하는
걸음마다 풍경이 바뀌는 곡선 길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 많은 과정이
더 예쁜 낭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파도치는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
돌고 돌아가는 삶도 괜찮지
직진만 해서는 무슨 재미있으랴

이기대에 저녁노을 앉혀놓고
부서진 퍼즐 아직 못다 맞췄는데
낡은 배가 저기 예인선에 이끌려 온다

지나기 전엔 직선 길
지나고 나면 곡선 길

 

10.SNS 속에서

 

진실과 거짓
허공과 공허
얽히고설킨 네트워크

별명으로 애칭
사진은 포토샵
이모티콘은 감정의 아바타

무엇으로 속을 채웠는지 보여주지만
속이 얼마나 쓰린지는 숨긴다
이름은 알은체
마음은 모른 체

너를 좋아한다며 늘 하트를 날려도
감춰진 네 모습은 지나친다
행복은 표출하고
슬픔은 억누르고

소통인 듯 소통 아닌 메신저
존재인 듯 존재 아닌 상태로
서로를 잊은 채
함께 살아가는 스마트폰 좀비

로그인했지만
로그아웃 돼버린 자아

 

11.나는야 양치기 소년

 

어릴 때부터 만들어
하나의 집착이 되어
이번엔 진짜 튼튼히 만들어
평생 함께 하리라 믿었는데

이유도 시기도 가물가물한 어느 날
당황하며 찾은 망치와 나무판자로
눈물을 훔치며 하는 망치질

처음으로 부서진
울타리 안에서
나는야
너를 부르는
양치기 소년

바람에 목적지가 없듯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함께 가야만 하는
양치기 소년
나는 너희가 되고
너희는 나 되는가

부서진 울타리 안에
홀로 남은 이 몸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을
간단히 부정할 수 있었던 오늘도
튼튼한 판자와 못을 찾아다니는
나는야 양치기 소년

 

12.눈꽃

 

눈여겨보니
피 멎은 네 심장에는 여전히
육욕의 여섯 화살이 꽂혀 있는데

허상이었니
오간데 없고 사연들은 덩그러니
맴도는 온기 잃은 방석뿐인데

그 누가 꽃이라 이름했나
뿌리도 가지도 꽃대궁도 잎도
열매도 꽃술 향기마저도 없는
피었는지 졌는지 아리송한 너에게

너는 우표야, 내 보기에
오돌오돌 여태 떨고 있는 저 미련들
엽서로 보내려면 네가 필요해

 

13.입춘

 

가슴속에
겹겹이 닫힌 장지문
찢어진 창호지가
바람에 팔랑인다

칼칼한 목에서
가르랑거리는 미련에
아직도 기침은 멎지 않고
욕망으로 뒤틀린 창자는
살얼음판이겠다

방울방울
녹아내리는 고드름에
처마에 매달린 낡은 풍경이
한숨도 쉴 수가 없다

한파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가슴이 콩닥거려
부랴부랴 붙이는 입춘방이겠다

어둠이 있어 빛나는 저 별
겨울이 있어 반가운 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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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동 약력:
중국 흑룡강성 수화시 출생, 현재 수원에 거주, 2018년 현대시선 신인상 등단, 현대시선 회원, 시와이야기 회원, 한반도문학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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