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꽃무릇/ 걸어다니는 나무/ 턱관절/ 신발을 넣어줘'

[서울=동북아신문]소설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조은경 약력: 중국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한국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수필, 소설 수십편 발표, 수상 다수.

제1편

꽃무릇  


내가 11살 되던 해의 여름이었다. 33살의 엄마는 보라색 원피스에 까만 구두를 신고 핸드백 하나만 든 채 집을 떠났다.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들고 다닌다는, 그 흔한 캐리어도 없이. 떠나기 전, 엄마는 나를 껴안고 ‘나중에 꼭 같이 살자’는 말을 남겼다.
부모자식인데 같이 사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그 아리송한 말은 오래도록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엄마는 내가 33살이 될 때까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결혼까지 했으니 ‘나중에 꼭 같이 살자’던 엄마의 말은 거짓임이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는 돌아올 수 없었고, 돌아올 자리도 없었다. 나는 어느새 그리움인지 분노인지 정체 모를 감정 때문에 책을 보다가도 목욕을 하다가도 TV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을 쏟아내는 감성적인 아이로 자랐다. 

엄마가 집을 떠나자 할머니는 “돈만 들이면 초청장을 받아서 가는 방법도 있다던데 굳이 가짜결혼을 하면서까지 한국으로 가야 했냐!” 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
당신은 애지중지하던 외동아들이 35살 젊은 나이에, 유씨네 가문에서 유일하게 이혼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듯했다. 할머니의 잔소리에 아버지는 결혼비자를 받아서 출국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한국 땅을 밟는 방법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놈아! 가짜이혼이 어디 있고 가짜결혼이 어디 있냐? 이혼은 이혼이고 결혼은 결혼이지…”
할머니는 신경질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는 나를 끌어당겼다. 아버지는 연화 엄마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 한국남자랑 곧바로 이혼하고 돈을 벌어 보낼 것이라며 확신에 차 말했다.
“여자를 이렇게도 모르다니…”
할머니가 언성을 높이며 아버지의 등짝을 때렸다. 아버지는 그래도 초기비용은 결혼비자를 받는 쪽이 좀 더 적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안전하기까지 하다며, 가짜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한국 가는 것을 결정한 것은 전적으로 연화 엄마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고 한사코 우겼다.
물론 이는 아버지의 버전 일뿐 나는 엄마의 버전을 직접 들은 적이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들 부부의 가짜이혼과 며느리의 가짜결혼이 한심하게 여겨지는 할머니나 졸지에 엄마 없는 아이가 된 나는 그저 눈앞의 사실이 갑작스럽고 떨떠름할 뿐이었다.

한국으로 간 엄마는 아주 드물게 돈을 보내왔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돈을 보내오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가짜이혼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믿기라도 한다는 듯이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할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사건은 아버지한테서 먼저 터졌다. 3년도 못 지나 아버지가 가짜이혼을 진짜이혼으로 만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 중 누가 먼저 가짜를 진짜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같은 동네에 사는, 남편이 한국으로 간 아줌마랑 바람이 났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의 외도(?) 사실을 맨 나중에야 알게 된 셈이었다. 나는 그동안 쉬쉬거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꼈다.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줌마에 이어 나까지 ‘바람난 남정네의 딸’이라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 머리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나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그 아줌마네 아들과 내가 같은 반에 편성되는 충격적인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체육시간에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그 아이의 팔을 물어버리는 기행을 저질렀다. 선생님이나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물어봤을 때 나는 이유 따위 없다고,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를 봤을 때 갑자기 솟구친 적의를 나는 지금도 명확하게 표현할 길이 없다.
아버지는 사람을 물어버린 나를 ‘똥개 같은 미친년’이라고 욕을 했고, 할머니는 애고 애고 하며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에게 왜 그 애를 물어버렸는지 묻지 않았는데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속상했다. 모름지기 내 편이어야 할 할머니가 왠지 그 애의 편을 드는 것 같은 이상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한 집에서 같이 살기 싫어 가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충동적인 가출은 금방 들통이 났고 나는 이틀도 버티지 못하고 엄마의 언니인 이모에게 잡혀왔다. 그러니까 엄마가 출국한지 3년 만에 나도 유씨 집안을 떠나 이모네 집에서 살게 되었다.

석찬에게 더 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도끼눈을 뜨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넌 잘못한 게 없어. 너는 너의 가치관에 충실했을 뿐이니까. 늦게까지 술 마시고 돌아다니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이나 하고 다니는 게 너의 방식이지…”
“그럼 이혼을 당해야 하는 거니? 고작 이런 사유로?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문제는 나에게 있으니까.”
“그 삐뚤어진 네 마음은 정말…”
화가 난 석찬은 애지중지하던 충전식 스탠드를 박살내버렸고 나는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막상 집을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모네 집에서 얹혀사는 것이 싫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벼락치기로 결혼했지만 남편 몰래 아지트를 마련해놓을 만큼의 경제력은 없었다. 아버지와는 오랫동안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고 팔순이 넘은 할머니는 당신이 너무 오래 살아서 아들에 이어 손녀까지 이혼하는 꼴을 본다며 넋두리를 할 것이 뻔했다. 부모 팔자를 닮아서 안타깝다거나 아이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친자식처럼 키웠지만 늘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살았던 이모네 집에는 창피해서 가기 싫었다.

그러고 보니 애초부터 나에게 집이라는 것이 없었다. 총각귀신이 따라붙기 전에 어서 빨리 결혼하라는 이모의 폭풍 같은 잔소리에 그만 독립을 해버린 오빠밖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십년 남짓 한 집에서 산 외사촌오빠에게는 민낯을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빠는 운동복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불쑥 나타난 나를 보더니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고 했다. 내 굳어진 표정을 보던 오빠는 뜻밖의 말을 던졌다.
“무조건 너를 이해해.”
오빠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끌어당겨 안았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네가 뭔데 날 이해해?’
속으로는 삐딱하게 되물었지만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야 눈앞의 사람이 정말로 내 편이라는 확신이 들 것 같았다.
‘그래, 이해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그러나 눈물을 거둔 다음에도 외로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고, 그런 나 자신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나 이혼할까봐.”
“이유를 물어봐도 돼?”
오빠는 늘 사람을 조심스럽게 대했고 나는 오빠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살고 싶지 않아. 내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물어보는 순간 그 사람은 대답하기 싫다며 짜증을 내. 더 깊이 추궁하면 화를 못 이겨. 그럴 때마다 가전제품이 부서져 나가. 그러면서도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대. 이런 무시는 정말이지 너무나 치욕적이야…”
“이 자식을!…”
“내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비꼬는 것도 있어. 내가 쿨(잘난척)해서, 그 사람은 내가 좋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나는 그냥 시크하고 시원하고 도도한척했을 뿐이야. 쿨한 모습의 가면을 쓰고 산거지. 그런데 나는 그 가면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너는 지나치게 쿨해서 무섭지. 나도 가끔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더라.”
“내가 쿨하지 않게 나오는 순간 그 사람은 폭발하는 거야. 나는 의심하고 질투하고 집착하는 나를 견딜 수가 없어. 끝없이 초라해져. 존중받는다는 감정을 느낄 수가 없어. 나는 영원히 이렇게 질질 끌려가면서 살아야만 돼?” 
“… 네가 처음 우리 집에 오던 날이 생각나니? 가출해서 엄마한테 잡혀왔을 때.”
“…”
“이모, 심심해서 가출했어요, 하고 말했지. 너는.”
“내가? 말도 안 돼! 그렇게 쿨하게 말했어?”
“안 믿어지지?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돋더라. 우리는 네가 가출했을법한 이유를 대충 아는데 네가 그렇게 말해서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그때 난 네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다.”
‘오빠,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한테서 개 같은 년이고 미친년이라는 말을 듣고도 멀쩡할 자식이 어디 있어. 정말 그렇다면 그건 사람도 아니야…’
아직도 아버지가 던졌던 말이 귀가에 생생했지만 나는 오빠 앞에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후훗! 내가 그렇게 모자란 인간이야.” 
내가 애써 웃으면서 변명하자 오빠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갑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어딘가에 소속된 듯한 느낌에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오빠는 석찬에게 전화를 한 후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단 한 달이라도 좋으니 이혼생각은 미뤄두고 한국에 가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야 석찬에게도 시댁에도 명분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모랑 자주 통화하는 편인데, 부쩍 외로운가보더라. 이참에 너 엄마랑 가까이 살아보는 게 어때?”
엄마와 함께 살아갈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접은 지는 오래 됐다. 어렸을 땐 일말의 기대를 품은 적도 있었지만 내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은 엄마를 두고 나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배신당했다는 소외감에 엄마 목소리마저 외면했다.
“나에게 엄마가 어디 있어? 그런 여자도 엄마야? 딸이 결혼한다는데 얼굴도 들이밀지 않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양육비만 던져주면 끝이야?”
“내게는 자주 연락한다. 이모도 이제 오십대 중반이다. 너에게 미안해서 감히 이것저것 물어보지 못하는 것이지 궁금한 것 천지다, 이모는. 내가 다 귀찮을 지경이다.” 
오빠는 집요하다싶을 정도로 설득했고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오빠에겐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응어리를 이젠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오빠가 나를 위해 오랜 시간동안 생각해둔 말일지도 몰랐다. 곧 개학이니 운영하는 서예학원은 한 학기 정도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다. 딱히 친정이라고 할 곳이 없는 나로서는 별거를 하더라도 당장 갈 데가 없었다. 그리고 이혼은, 홧김에 던진 말이기도 했다. 뜻하지 않았던 나의 초라함에 모멸감을 느껴 공격적이고 자학적인 모습을 드러냈을 뿐, 나는 여전히 석찬을 사랑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엄마는 많이 늙어 있었다. 매끄럽지 않은 손과 눈가의 주름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화가 치밀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아직도 보라색 원피스와 까만 구두가 떠오르고, 아직도 파릇파릇한 삼십대여야 할 것만 같았다. 내 마음속 엄마의 모습은 ‘나중에 꼭 같이 살자’던 그 촉촉한 목소리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엄마와 함께 나날을 보낼 생각에 나는 어지간히 들떠 있었다. 원망한 나날들이 많았지만 정작 얼굴을 마주보니 몰래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원룸이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겨우 세 사람이 누울 만한 공간의 크기에 경악하는 나를 보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환영한다. 연화야, 전세로 잡아놨으니까 언제까지고 있어도 좋아. 이렇게라도 자주 볼 수 있게 돼서 정말 좋다!”
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당신과 같이 살지 않는다는 말을 무심하게 뱉어냈다. 그 한마디에 나는 설움이 북받쳐 괜히 왔다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중에 꼭 같이 살자고 했는데… 많이 생각해봤는데 이게 최선인 것 같아. 그래야 우리 관계가 더 돈독해질 것 같기도 하고.”
앞뒤가 안 맞는 엄마의 궤변에 어이가 없어 쳐다보았더니 어느새 붉어진 엄마의 눈가가 보였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엄마를 만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같이 살면 되지, 이게 뭐야. 여기까지 와서 따로 살면서 어떻게 관계가 좋아져!’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도로 삼켰다. 여태 부모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 이제 와서 그걸 기대한 내가 맹랑하게 느껴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리하고, 심심할 때 엄마 가게로 나와. 조그만 밥집인데 먹고는 살아. 저녁은 엄마네 집에서 먹자.”
엄마 집.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에 혼자 나동그라진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아저씨는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방이 두 칸뿐이라 함께 살지 못하게 됐다며 미안해했다.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도 나를 대하는 모습도 따뜻해보여서 시름이 놓였다. 집에는 나보다 네 살 어린 아저씨의 아들도 있었다. 대학원에 다닌다는, 희준이라는 아이는 처음 보는 내게 가만히 웃어보였다. 상대가 조선족이라고 멸시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아이가 누나라고 부르며 말을 걸어올 때 나는 익숙하지 않은 부름에 움찔했다. 엄마와 그 아이의 친밀해 보이는 대화에서는 거부감을 넘어 야릇한 질투심마저 생겼다.
불편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를 따로 살게 한 엄마의 입장도 이해됐다. 가짜결혼을 한 줄 알았던 엄마가 진짜로 결혼을 해버린 건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엄마나 아버지나 누구 하나 억울한 사람이 없었고 누구도 나에게 당당하지 않았다. 내가 이혼한다고 해도 말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찬에게 잘 도착했음을 알리고 자리에 누웠지만 간혹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차 소리와 술 취한 사람들의 말소리 때문에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희준이 학교 가는 길에 들렸다며 먹을 것과 책을 한가득 안고 내 원룸을 찾아왔다. 취직하는 것보다 엄마 가게에 나가 일을 돕는 것이 어떻겠냐는 희준의 제안에 나는 알았다고 했다. 희준은,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희준이 나를 찾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그러고 보니 희준은 처음부터 나에게 엉겨 붙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생 처음 보는 나를 스스럼없이 누나라고 불렀고 친엄마도 아닌 엄마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엄마라고 부르고 내 원룸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우리 술 한 잔 해요, 누나. 이름처럼 유연한 느낌이 들어서 난 누나가 좋아요.”
썰렁한 유머나 던지는, 반갑지 않은 희준과 술 한 잔 기울이는 날이면 느닷없이 스며드는 친밀감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나에게 감겨드는 희준이 못마땅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럴 때마다 이 아이도 어지간히 외로운가보다 하는 생각과 함께 우울한 느낌으로 가득 찼던 내 과거를 보상받는 듯한 낯선 위로를 받곤 했다.
희준은 아버지를 닮아 담배도 피지 않고 주량도 약하다고 했다. 내가 받았던 첫인상과 희준의 말을 섞어보면, 아저씨는 내 아버지와는 정 반대의 기질을 지닌 사람인 듯했다. 희준은 겨우 맥주 두 캔에 어느새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희준이 꽤 괜찮게 생긴 얼굴로 나를 은근하게 쳐다보며 하는 말이 있었다.
“누나, 내가 엄마랑 살아서 미안해요.”
“다 자기 복이지 뭐…”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대충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지만 가끔 대화를 길게 이어갈 때도 있었다.
“누나, 나는요. 처음 엄마라는 이름을 불러본 사람이 누나 엄마예요. 그래서 누나한테 늘 미안해요… 친엄마는 나를 낳다 돌아가셨고, 어린 나이에 병에 걸려 아버지에게는 돈만 쓰는 짐짝이 됐고.”
‘그래? 안됐네.’
희준이 친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아프기까지 했었다는 말에 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희준에게 그렇게 쉽게 공감해버린 것을 들키면 왠지 억울할 것 같았다.
“엄마를 만났을 때, 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엄마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으니. 그러나 엄마는 우울해보였어요. 아마도 누나 때문이 아니었나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넌 7살이었겠네?”
“그렇지, 그런데 겨우 그 나이에 난 벌써 삼 년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었어요. 난 아버지가 내 치료비에 보태려고 가짜로 재혼까지 한 걸 몰랐어요. 천성적인 질병이었고, 내 병원치료 때문에 월세방을 전전하며 공사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사고로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잃었고. 얼마나 절망스러웠으면 가짜결혼이라도 해서 돈을 마련하려 했겠어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건 내가 보장해.”
갑자기 희준의 말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실없긴. 나는 희준의 말에 속으로 웃었다. 처음 보는 내게 왼손을 내밀었던 아저씨를 무식하다고 평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끔 밥도 해주고 내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늘 거리감이 느껴졌어. 매일 일을 했고 월급을 받으면 내 치료비에 보태라고 돈을 주기도 했고.”
‘그래서 집에는 돈을 많이 보내지 못했군.’
엄마의 오지랖에 나는 저도 몰래 중얼거렸다. 
“한 2년쯤 지났나? 그 사이 엄마는 집을 나갔고 내 병도 어느 정도 호전돼 더 이상 병원신세를 길게 지지 않아도 됐어. 정말 징글징글한 투병생활이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어.”
“뭐야? 재발한 거야?”
“아니. 엄마를 알아버린 나는 엄마의 부재를 견딜 수가 없었어. 친엄마도 아닌데. 아버지가 진짜로 결혼했던 게 아니라고, 이혼해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된다고 설득했지만 난 엄마가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아버지를 졸랐어.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서 더 막무가내였던 것 같아.”
“음. 졸라서 해결되는 일이긴 했나보네?”
“천만에!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좀 뻔뻔스럽고 치사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엄마를 납치라도 해서 데려오고 싶었거든. 그러나 집도 없고 변변한 직업도 없고 애 딸린 홀아비에 손가락까지 잃은 남자에게 재혼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어.”
“이혼을 안 해주면 되지 않아?”
“흠… 누난 대체 누구 편이야?”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지. 네 아버지가 이혼을 안 해주면 엄마는 어쩔 수 없이 계속 눌러 살 수밖에 없잖아.”
“말했잖아, 아버지는 치사한 인간이 못 된다고. 아버지는 약속을 정확하게 지켰어. 가짜로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치료비에 쓰라고 돈도 보태주었고 가끔 내 병간호까지 해줬으니 아버지가 더 이상 뭘 바랐겠어. 게다가 엄마는 젊고 예쁘기까지 했으니.”
“우리 엄마가 좀 바보스러운 면은 있지.”
말하고 보니 고작 젊었을 때의 엄마를 기억할 뿐인 내가 언제부터 엄마를 바보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엄마는 희준 부자의 성실한 구애(?)에 드디어 그 집에 눌러앉은 눈치였다. 엄마가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자 희준은 신기할 정도로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크지는 않지만 집도 장만하게 됐고 엄마도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자신도 작게 병원신세는 졌지만 병이 재발하지는 않았고.
“엄마는 쓸데없이 물러서 문제야.”
내가 비아냥조로 말하자 희준은 아니라고 했다.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매정할 때가 있다고. 친딸을 두고 온 엄마가 남의 자식을 키울 결심을 어떻게 그렇게 선뜻 했겠냐고 했다. 게다가 가짜결혼으로 한국에 왔으니 엄마에게 자신을 키울 의무 따윈 전혀 없었다고.
“내 기억에 그날은 따가운 가을햇살이 쏟아지는 9월이었어. 그날도 나는 학교가 끝난 후 엄마가 일하는 데로 찾아갔지. 병원에 다니면서 학교를 잘 다니지 못하는 바람에 친구가 없는 까닭이기도 했어. 그 식당 사람들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았고… 그런데 벽에 걸린 TV를 보던 엄마가 갑자기 ‘세상에, 곱기도 해라’ 하며 새된 소리를 질렀어. 꽃무릇이 피었다는 뉴스였는데 그 꽃이 너무 아름다웠던 거야.”
“꽃무릇? 석산?”
“응. 나는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졸라 그 꽃을 구경하러 가자고 했어. 멀리 지방에까지 가서 석산을 보고 오는 길에 엄마는 울었어. 있잖아, 석산은 꽃과 잎이 같이 있는 경우가 없다? 가을에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난 다음에야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이듬해 봄이 되면 그 잎마저 져버리지. 그리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또 꽃이 피기 시작해. 그러니까 석산은 꽃과 잎이 만난 적이 전혀 없는 거야. 하여튼 엄마는 그 꽃을 보고 오는 길에 그렇게 슬프게 울어서 나도 따라 울었던 기억이 나.”
“그동안 사는 게 힘들고 억울해서 울고 싶었나보지.”
나는 엄마의 설움을 이해할 것 같기도 했지만 짐짓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그날 봇물이 터진 듯 한바탕 울고 난 이후 엄마는 다시 희준이네 집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꽃무릇, 또는 석산.
꽃이 진 다음에야 잎이 돋아난다는 그 꽃은 선물가게를 하는 친구에게서 많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데이, ‘3.8’부녀절 등 특별한 날에 주로 장미꽃을 파는 친구는 어찌된 일인지 해마다 추석 즈음이면 그 꽃을 언급하곤 했다. 세상에 그렇게 외롭게 피는 꽃도 있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그 꽃을 직접 보면 현기증이 일 지경’라고 하면서 일부러 인터넷에서 다운받아놓고 본다고도 했다. 내가 꽃말이 청승맞아서 싫다고 했더니 친구는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했다. 꽃과 잎이 반드시 같이 있어야 되는 법이 어디 있냐며 자신은 오히려 꽃과 잎이 각자의 사명을 다 하는 것 같아 부럽다고 했다. 꽃은 잎에, 잎은 꽃에 연연하지 않아 닮고 싶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하필이면 꽃무릇에 반해 닮고 싶다고까지 하는 친구를 두고 말도 안 되는, 재수 없는 소릴 하지 말라며 면박을 주곤 했다. 그런데 희준에게서 엄마가 꽃무릇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실물을 보고 싶어졌다.
“그 후로 아버지와 난 석산이 피는 시기를 놓친 적이 없어. 괜찮으면 이번 주말에 넷이서 꽃구경 갈까?”
희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길상사에 핀 꽃무릇을 보면서 ‘정말 아름답지 않니?’ 하며 연신 감탄했다. 올해는 딸까지 있어서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했다.
“이 꽃이 엄마를 희준의 엄마로 살게 했다며?”
내가 웃으면서 묻자 엄마는 꼭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엄마는 이 꽃 때문에 네 아버지와의 인연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혼은 했지만 가짜라는 약속을 했고 연화 너 때문에라도 꼭 중국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꽃을 알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연화야, 이혼이나 결혼에 가짜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에는 가짜를 가장한 진실이 숨겨져 있을 뿐이야. 네 할머니도 그랬잖아. 그래서 내가 가짜로 이혼하고 결혼비자를 받아 한국에 온 것을 두고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거고.”
“그러게. 할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홀아비가 될까봐 어지간히 가슴을 졸였지.”
“지금 네 아버지랑 같이 사는 그 여자 있지? 내가 결혼비자를 받으려고 한 데에는 그 여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
“엄마, 그럼 그때 이미 그 여자의 존재를 알았어요?”
“여자의 육감이라는 게 있잖아…”
“설마!”
이제야 내가 왜 걔를 그렇게 강아지가 뼈다귀에 붙은 고기를 핥듯이 달려들어 물어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모진 소리를 들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그 이유를.
엄마는 오빠에게서 연화 네 얘기를 들었다며 그동안 함께 살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팔짱을 끼면서 이젠 엄마랑 살기 싫다고 했다. 

 

제2편 

걸어 다니는 나무
 


“오빠, 할 얘기가 있어.”
“도서관인데, 급해?”
세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귀찮아졌다. 서른을 넘어가면서 진지함을 동반한 만남은 피로도만 높여준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됐다. 나는 불필요한 감정소모보다는 평화를 지향하는 편이다.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어.”
“여섯시면 끝나니까 저녁 같이 먹자.”
세영의 전화를 받은 시각에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빌려갔던 도서를 반납하면 청구번호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책을 다시 꽂아 넣는 일이었다. 혹여 도서관을 드나드는 낯익은 사람들에게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교수님께서 일거리를 소개해 주셨을 땐 망설였다. 그러나 캠퍼스 안이라 시간이 많이 절약될 것이라는 자기합리화를 거치고 나서는 담담하게 일할 수 있었다.
사실 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또 서른세 살이나 먹은 청년이 겨우 도서관에서 도서 정리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웃을 사람도 없다. 이제 상대적 우월감을 갖는 청춘 따위는 없다. 이는 순전히 서른이 넘도록 취직은커녕 아직도 학교를 다닌다는 내 자격지심이 발동된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내 이십대를 바쳤던 아르바이트 생활에 대한 지겨움 때문이리라.
순례를 거치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온 책들을 자리에 꽂아 넣노라면 여러 모습들이 떠오른다. 사라져가는 정의를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 잘 죽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 이기적인 마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 최면을 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있어 이 사회의 도덕과 범죄는 그나마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1Q84󰡕나 󰡔호밀밭의 파수꾼󰡕, 󰡔대성당󰡕같은 책들을 읽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 때문에 이 사회의 더러운 구석구석들이 언젠가는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총, 균, 쇠󰡕나 󰡔사피엔스󰡕 같은 책들이 늘 대출중인 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내쉴 때가 있다.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를 궁금해 한다.
세영 역시 핸드백에 책 하나는 넣고 다녔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 나왔을 때 이따위(왜 나는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하는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철학을 꼭 읽어야 되냐고 물었다. 세영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오빠도 보면 좋을 텐데, 했다. 그러나 독서와 거리가 먼 나에게 그것은 담배를 끊으라는 말만큼이나 힘든 일이었고, 직장인인 세영이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을 넣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했다.
가끔 세영을 보면 어릴 때 저녁노을을 쳐다보면서 느꼈던 정체모를 감정을 느끼곤 한다. 나는 엄마가 저녁을 다 해놓고 부르기를 기다리면서 자주 동네 놀이터의 그네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려면 한창 있어야 되는데 하늘은 저녁노을에 의해 벌겋게 빛나고 있었다. 노을이 붉게 물든 이튿날은 날씨가 좋다고 했는데. 그러나 나는 내 얼굴마저 벌겋게 물들었다는 것을 모른 채 하늘을 쳐다보며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왜 내가 눈물을 흘리는지 몰라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려고 엄마 지갑에 손을 댔던 때처럼 당황했다. 뭔가가 내게서 멀어져가 혼자 남은 느낌이었다. 서쪽하늘을 보며 눈가를 훔쳤던 그 느낌은 세영을 만나면서부터 다시 차올랐다.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 남겨진 듯한, 지구의 끝자락에 있는 듯한 그 감정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몰랐다.
무슨 말이기에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할까. 집히는 게 없었다. 가끔씩 애슐리나 아웃백 같은 데도 다녔고 쇼핑이나 영화 관람도 빼놓지 않았다. 의견충돌도 없었다. 그러나 세영의 말은 여태 들어본 적 없는 음색을 통해 전해졌기에 신경 쓰였다.
“저기요, 책을 이렇게 꽂아놓으면 어떻게 찾아요?”
한 학생이 잠자코 서 있다가 자리를 옮기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제야 나는 수레위의 책들을 같은 곳에만 꽂아 넣는 것을 발견했다.
 
간단하게 커피 한잔이 좋겠다며 들어간 카페에서 세영은 빨대로 녹차라떼의 거품을 이리저리 휘젓기만 했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밥은 잘 먹고 다녀? 오늘은 뭐 했어? 지도교수와는 여전히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 하며 이것저것 궁금해 하던 세영이 아니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오빠, 병원에 같이 가줘야겠어.”
세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도끼눈을 뜨고 안경을 추스르자 세영은 심드렁하게 유산됐대, 하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태풍이 분다는 일기예보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미니스커트를 입고 집을 나서는 대학생의 결연한 표정과 닮아 있었다. 세영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등줄기에 뭔가 지나갔다.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인가 하며 언제 실수를 했는지 되새겨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얬다. 내가 입을 열기도전에 세영은 쉽게 말하면 자연유산인데 찌꺼기가 남아있대, 했다.
세영과 사귀는 이 년 동안 이처럼 건조한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애꿎은 침부터 삼켰다. 아이를 낳아야 된다는 것도 아닌데 나는 벌써 임신, 졸업, 취직 따위가 걱정되었다. 갑자기라기보다는 이 시각에 그런 걱정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싫어? 나 혼자 산부인과 가서 사인하고, 수술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찔러도 피가 안날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세영이 말을 내뱉고 나서는 내 표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순간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아직 비루함이나 모멸감, 당황스러움 같은 감정은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익히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
세영은 갑자기 숨을 가쁘게 몰아쉬더니 나중에 전화할게,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몰라 멍하니 있기만 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세영을 쫓아가지도 불러 세우지도 못했다. 나는 아무래도 여자 친구의 임신과 유산이라는 사건 앞에서 미적거린 소극적이고 비겁한 놈이 된 듯싶었다.
친구에게 아르바이트자리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페를 나왔다.
서른셋, 아직 나보다 나이 많은 후배도 많은데 괜히 주눅이 든다. 내 또래의 잘 나가는 사람들이 주는 우월감 때문에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당당한 자식이었던 적이 없었다. 이론적인 평등과 현실적인 불평등이 낳는 질투와 자괴감에 이어 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변명까지 함께 키워왔는지 모르겠다. 

 

*


한 시간 남짓 책장을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되넘기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책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후 다시 보면 아까 그 페이지였다. 갈까 말까 생각하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국에서의 학력을 따지자면 중졸인 나로서는 처음 있게 되는 중학교 동창모임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전학 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온전한 졸업생이 아니면서도 나는 전학가기 전의 중학교 시절을 내 사춘기라 믿고 있었다.
이년 전에 위챗으로 만들어진 중학교 동창 단체채팅방은 그럭저럭 굴러갔다. 처음에는 매일 아침마다 각종 이모티콘과 행복한 하루 되세요, 하는 문구와 지구상의 미세한 점에 불과한 사진들이 올라오곤 했다. 그러나 채팅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도 기웃거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바꾸기라도 하는 날엔 한동안 그 그룹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 이 그룹 이러다 망하겠다, 하고 한마디 던졌다. 다들 그건 안 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지 열성을 냈다.
아직도 아이돌을 좋아하는데 내 나이를 생각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해. 연변의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서 어제는 배추김치를 해봤어. 연변의 사과배가 먹고 싶다. 이번 음력설에는 고향에 갈까 말까 생각중이야, 누구 고향 오는 애 없니? 우리는 한족 곳에서 살아서 그런지 애가 조선말을 하나도 몰라서 걱정이야. 어머! 애들은 꼭 조선말을 가르쳐줘야 돼, 그래야 나중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도 말이 통하지. 손주가 당신들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서운하시겠어. 연변에서 살아도 애들이 대부분 중국어를 더 많이 해, 우리야 중국어를 그냥 외국어 수준으로 배웠으니 조선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요즘 애들은 안 그래. 어디서 살면 그곳 언어를 가르치면 되지, 굳이 애한테 두 가지 언어를 강요할 필요는 없어, 다 적응하면서 살게 돼있어. 아니야, 그래도 조선족인데 조선말은 알아야지. 고향에 홀로 계신 부모님께 어떻게 해드려야 되는지 모르겠어, 연변을 떠나면 적응을 잘 못하더라, 재혼이라도 시켜야 되나 고민이야……
타인에게서 그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는 수다가 한바탕 이어졌다. 나 홀로 잘난 척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이 대화에 가담하지 않을게 뻔했다. 그리고 허세부리는 사람이 나타나도 동창들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누군가 졸업한지 십오 년이 되는데 얼굴 한번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가사노동과 육아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는 일탈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장의 무거운 책임을 공유하고 싶다고도 했다. 중국, 한국, 일본, 미국 등 각지에 널려 있는데 그게 가능할까? 누군가 선코를 떼자 채팅방은 또 시끄럽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새에 몇 백 개의 글들이 올라왔다. 또 한참을 떠들어야 끝날 것 같아 나는 알림사운드를 꺼버렸다.
한국에 사는 동창들의 모임이 제일 먼저 성사되는 듯 했다. 열 명도 넘는 동창들이 한국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선 잘 몰랐다. 실명(實名)과 현재 사는 곳 정도는 밝히기로 했지만 그것을 이행하는가 안하는가는 본인 마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집단적인 약속을 무시하는 이탈자는 있기 마련이다.  
약간 늦게 도착한 나는 약속장소를 잘못 찾은 줄 알았다. 생소한 모습들을 보고는 문을 도로 닫으려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야, 지욱아, 여기 맞아… 난 네가 말이 없어서 바쁜 줄 알았다.” 반장 창수였다.
창수를 비롯한 남자 셋이 일제히 일어서며 악수를 청했다.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데에는 여기서 대학원을 다닌 창수의 도움이 컸다.
남자들은 맥주와 씨름한 탓인지 한결같이 임산부처럼 배가 나와 있었고, 여자들은 화장의 힘인지 성형의 힘인지 옛날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예뻤다. 위챗에 올린 사진은 다 뭐야, 하는 억울함에 프로필을 훔쳐봤던 오지랖을 후회했다. 다들 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머, 너 지욱이니? 너 원래 이렇게 멋있었니? 안경 쓴 모습은 딱 선생이잖아.”
“맞아, 그런데 지욱이 마지막 학기에 전학을 갔잖아. 너 일본 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난 그전에 이미 학교를 그만둬서 몰랐지. 하나도 안 변했다.”
“너도 한국에 있었구나? 옛날에도 밝았는데 여전히 잘 웃네? 얘들아, 얘 신승훈 닮지 않았어?”
나의 등장에 여자 동창들은 뜻밖이라는 듯 꽤 호들갑을 떨었다.
“다들 잘 지내지?”
민망함에 눈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잘 왔다며 맞장구를 쳤다.
자기소개는 도착한 순서대로 이어졌다. 창수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회사에 출근했고, 다른 남자동창들은 '노가다'를 뛰거나 핸드폰 부품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여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거나 중국 쪽에 화장품을 넘겨 팔거나 식당에서 서빙을 한다고도 했다. 전업주부도 있었고 가족들이 뭉쳐 가게를 차린 동창도 있었다.
모두들 애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물가는 또 얼마나 올랐는지, 고향에 한번 다녀오려면 돈을 얼마동안 모아야 되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연길의 집값은 밤을 자고나면 튀어 오르는 바람에 살 엄두를 못 내겠다고 했다.
야, 고향 떠났는데 왜 또 고향에 집을 사니? 안 그럼 나중에 어디 가서 살아? 그래도 죽을 땐 고향 가야지. 쳇, 난 이제 여기가 더 고향 같아. 난 남들의 은근한 멸시와 기시가 싫어, 돈 때문이 아니라면 살기도 싫어. 난 처자식이 다 고향에 있는데 나이 들면 뭐 먹고 살지 걱정이다. 우린 이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지. 여기서 온전한 직업도 없이 어떻게 살아? 고향엔 뭐 철밥통이 기다리고 있냐. 어딜 가나 사는 건 똑같아, 그냥 뿌리박고 살아야 돼.
화제의 중심은 돈이었고, 그것은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이 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말을 이어가기엔 뭔가 허전했다.
분분해지는 의견을 뒤로 한 채 나는 어떻게 자기소개를 해야 되나 잠시 고민했다. 눈치를 보니 다들 결혼도 하고 돈도 버는 것 같았다. 혼자만 학생이라고 말하면 아직도 학교 다니는 거냐, 배울게 뭐가 남아있냐, 졸업하면 일자리는 있냐 하고 물어볼 것 같아 아직 백수라고 말해버렸다. 뭐어? 다들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보자 저도 모르게 아직 학생이라… 하고 말끝을 흐렸다.
“니들 잘 모르지? 지욱이 얘 연구생이야. 박사가 될 지도 몰라.” 창수가 보탰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지욱이 너는 옛날부터 공부를 잘했잖아.” 한 여자 동창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지욱인 공부를 잘했지. 옛날부터 안경 쓴 얼굴에 교수라고 씌어있었어.”
“그렇게 공부를 잘하더니… 그럼 나중에 진짜 박사 되겠네? 나는 학교를 오래 안다녀서 가늠이 안 돼.”
“아직도 학생이라니, 부럽다…”
나는 얼떨결에 변명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우리 동창 중에 박사도 있네! 미리 축하해주자.”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했다. 살면서 서른세 살이나 먹은 학생이 부럽다는 말도 낯설었고 공부를 잘했다는 소리도 처음이었고 박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었다. 다들 내가 중학교 마지막 학기에 전학을 갔다든가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됐다든가 성적표에서 늘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든가 하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이상하게 연결시키는 마법을 부리고 있었다. 
중학교 때 A가 참 예뻤어, 여자애들이 다들 질투했잖아. 맞아, 걔는 집도 잘 살았지. 그런데 모멘트에 사진은 별로 없더라. C는 너무 잘 생겨서 여자애들이 모두 걔를 좋아했잖아. 근데 걔가 공부를 못했어. 후훗! 참, D가 달리기 하나는 끝내줬는데 이젠 아저씨가 됐겠지? P는 싸움을 잘했잖아, 그래서 선생님이 사고만 터지면 맨날 걔만 잡았지. 후훗! 근데 걔 좀 억울했을 거야, 걔 사실 학교 안에서는 완전 순둥이거든… 오죽하면 난 처음에 걔가 왕따 당하는 줄 알았잖아. 야, 그땐 왕따라는 단어가 없었어! S는 결혼했는데 벌써 이혼했다더라. 아, 우리 나이에 벌써 이혼이라니.  이혼이 뭐 대수야, 바람피우는 애도 있는데, 우리 나이엔 재혼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참, 니들은 다 결혼했니?
여자애들의 물음에 나와 창수만 조용했다. 갑자기 여자들이 화제를 이쪽으로 돌렸다. 오호, 그럼 니들은 아직 총각이야? 내가 여자 친구 소개해 줄까? 이상형이 뭐야?…
십대의 중간 자락을 공유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그저 그런 대화였고 일상에서 벗어난 수다들로 얼굴이 불과해졌다. 모두가 아는 그 누군가를 질투하면서도 부러워하고, 모종의 사건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그리워하고.
“참, 니들 지은이 이혼한 거 알아?” 미향이 뜬금없이 한마디 던졌다.
“지은이? 예쁘고 공부 잘하던 지은이?”
“엉? 왜, 이혼했대? 근데 결혼은 언제 했어?”
“그러게, 지은이 결혼했었어?”
다들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지은의 말이 나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감아쥐었다 폈다. 반응만으로 보아 다들 지은의 소식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 들리는 말로는 지은이 지금 한국에 있대. 걔 신랑이 우리 신랑 친구의  친척이래.”
“지은이 걔 콧대가 하늘을 찌르더니 그럴 줄 알았어. 애는 있고?”
미향의 맞은편에 앉은 향화가 물었다.
“없지,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안 돼서 이혼했는데. 언제 애까지 낳아.”
“근데 걔 콧대가 높았었나? 공부를 잘하는, 예쁜 순둥이 아니었어?”
“……”
잠자코 있던 은희가 뭘 좀 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은이랑 친했던 옆 반 해란이 있잖아, 걔한테서 듣기론 지은의 시댁이 제법 부자라고 했어. 신랑 아버지는 연길에서 잘나가는 공무원이고 엄마는 외국에서 돈을 꽤 벌었다고. 보통 학교를 오래 다닌 애들은 지들끼리만 연락하고 중학교 때 애들과는 거의 연락을 안 하잖아. 그래서 결혼할 때 연락을 안했나보지. 그런데 이혼은 언제 했나?”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도 지은의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은 듯 했다.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불행을 알고 있는 누군가는 그 진실을 터뜨리고 싶지 않은지도.
“그래서 지은이 단톡방에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구나. 어쩐지… 옛날엔 그렇게 똑 부러졌는데 어떡하다 이혼까지 하고. 근데 이혼은 한 걸까, 당한 걸까? 그렇게 잘난  애도 이혼을 하는구나.”
“그러게. 대학도 좋은데 다닌 것 같던데. 사람 사는 건 정말 모를 일이야.”
“똑똑한 년도 자기 문제에 부딪치면 쩔쩔 매게 돼있어. 학교 때 공부를 잘했다고 시집까지 잘 가면 우리 같이 가방끈 짧은 애들은 어떡하니.”
“그러게다. 그건 모든 걸 성적으로만 판단하는 교육제도에서 오는 편견이야, 내가 애를 키워보니 알겠더라. 학교 다닐 땐 잘나고 못나고를 평가하는 기준이 오로지 공부였으니. 난 지금도 그때 성적표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숫자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그것 때문에 집에서 얼마나 구박을 많이 받았는데. 성적이 낮다고 아예 대학에 못가는 것도 아니고. 근데 지은이 어떡하니…”
여자 동창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지은의 과거에 대한 질투와 현재에 대한 연민을 쏟아냈다. 거기서는 은근한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타인의 불행을 확인했을 때 느끼는 우월감은 자신의 행복지수의 향상에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3차까지 달리고 나서야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오는 길에 단체채팅방에서 지은을 찾았다. 오랫동안 위챗에 추가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알콜의 힘은 생각보다 추진력이 강했다.
창수가 담배를 피다가 둘만 남게 되자 지은이 힘들 거야, 우리 예전에 같은 동네서 살았잖아. 대학졸업 후 결혼을 했는데 얼마 안 돼 이혼했어. 잘은 모르지만 예전에 살던 동네사람들 말로는 남편이 바람 폈다나봐. 그런데 지은이 남경에 있는 대학까지 다니고 왜 고향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은의 소식은 궁금했지만 전혀 예상 밖의 정보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의외로 지은이는 빨리 수락했다. 모멘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 지욱아, 잘 지내지?
문자를 보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일본에 있을 때 아르바이트를 끝낸 자정이면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지은에게 전화를 걸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루를 끝내고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공중전화가 보이면 시간을 보지도 않고 무작정 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지은의 목소리는, 내 말을 듣고 있는 지은은, 그 시절 이국생활을 견뎌내는 나에게 신앙이었다. 그때 왜 매달릴 사람이 가족이 아닌 지은이었는지 모르겠다.
- 응, 지은아. 잘 살고 있지?
- 그럼. 일본이야?
- 한국, 엄마가 여기 있어서. 온지 좀 됐다.
내가 사는 동네를 말하자 지은은 멀지 않네, 혹시 이쪽으로 올 일 있으면 연락 줘, 했다. 지은은 늦깎이 대학원생이 됐으며 만족스럽다고 했다.
막막했던 일본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지은이 때문이었다. 중학교의 마지막 한 학기를 두고 아버지의 이직 때문에 전학을 가야 했다. 낯선 환경과 낯선 애들 사이에서 조금 다른 교과과정(내가 다닌 학교는 4년제 중학교였다)을 공부해야 되는 나를 버티게 해준 건, 고중입시가 끝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놀러가게 해주겠다는 엄마의 약속 때문이었다. 추억이랍시고 꺼내놓고 둘러볼 정도로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내 인생은 전학시점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을 전학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눈, 그 이상한 구분법은 아무래도 지은이 때문이 아닌가싶다. 수학 과대표였던 지은은 수학 시간이 있었던 그 다음날 아침 자습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숙제 책을 거두곤 했다. 남자애들은 숙제 책을 내놓으라며 다그치는 지은에게 조금만 기다리라 하고는 지은이 안고 있는 숙제 책 중에서 하나를 뽑아 부랴부랴 베끼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부는 늘 나와는 거리가 멀었고, 일본유학을 거쳐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닌다는 걸 떠올릴 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지은은 가끔 에이, 너넨 집에 가서 책가방은 열지도 않지? 하며 꿀밤을 때렸다. 다른 애들은 웃으면서도 버릇이 없다며 약이 올라했지만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지은의 자리는 내 앞자리였다. 지은은 자습시간에 가끔씩 반쯤 돌아앉아 내게 말을 걸거나 내가 부르는 노래를 나직이 따라 부르거나 내가 물어보는 문제를 진지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런 지은이 때문에 아는 문제도 모른 척 물어봤고 노래도 자주 불렀으며 숙제도 일부러 하지 않았다. 나는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전학은 말도 안 된다며 고중에 진학하지 못하는 건 다 아버지 탓이라고 소심한 변명을 했다.
몇 달만 견디면 곧 만날 것 같은 지은에게 편지를 보냈다. 집주소가 필요 없었다. 원래 다니던 학교와 반을 쓰고 이름만 밝히면 됐다. 사실 편지를 보낼 정도로까지 가깝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답장을 바라고 편지를 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은에게서 답장이 왔고 우리는 오륙년의 시간을 공유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할 때에도,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에도, 신기하게 지은이와는 연락이 닿았다.
아버지에 각본에 따라 일본 땅을 밟았을 때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도 이 징글징글한 정글에서 꼭 살아나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오기만으로 버티기엔 세상은 너무나도 거칠었다. 비자발적인 선택은 시간이 갈수록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지은에게 이국에서의 낯섦과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일상들, 자취생활의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향수병에 필요한 것들을 지은에게 부탁했으며 지은의 대학생활을 동경했다. 캠퍼스를 함께 거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버지를 보러 고향에 왔다고 했지만 사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은을 만나려고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더 뛰었다. 지은의 대학생활에 대해 시시콜콜 듣고 싶었지만 시간은 많지 않았다. 카페에서 지은에게 줄 선물이 있으니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그때, 지은은 뭘 기대하고 순순히 눈을 감았을까. 내 입술이 닿는 순간 지은은 숨을 들이쉬며 순간적으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지은은 어쩔 바를 몰라 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선물이 이거야? 하고 물었다. 나는 전혀 계획에 없었던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지은의 반응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했다. 지은의 어정쩡한 웃음이 아니었다면 난 그때 아마 때려죽일 놈이라며 지은에게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지은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는 일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단호하지만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후 지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지은은 언제 그랬냐싶게 일상에서 스르르 빠져나갔고 난 그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만으로 꽉 찼던 생활은 내게 일본에서의 삶을 정리할 때 고향에 아파트 한 채를 일시불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고향에 내 이름으로 된 집을 마련하는 건, 아버지나 어머니의 숙원이기도 했다. 비어있는 그 집에 ‘언젠가’는 사람이 살겠지, 하는 마음으로 인테리어도 안한 채 내버려두었다.
나의 일본유학생활은 미지근하게 막을 내렸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꿈은 헝클어졌다. 나는 아직 내 꿈이 무엇인지 몰랐고 늘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


“오빠, 내일 병원 예약한 날이야.”
“응, 같이 가자. 몇 시 예약이야?”
친구의 결혼식 뒤풀이에서 세영을 만났을 때 도도함의 끝자락에 내비치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나는 그것을 강한 자의식의 표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영은  웃는 것을 조율할 줄 아는 여자였다. 부드러움과 냉정함을 소유한 세영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으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세영에게 충동적으로 고백하고 말았다.
“오빠는 좋게 말하면 집중력이 강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아주 이기적이고 눈치가 없어. 그런데 그 단점이 따뜻함에 눌려버리지. 적어도 나한테는. 나는 밝은 사람과 가족을 만드는 게 소원이야.”
살면서 그렇게 나를 잘 이해하고 내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맞히고 내가 발설하지 않은 것까지 눈치 채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이해받는 느낌이 좋지만 생소했다.
존재조차 알리지 못하고 가버린 아이가 가여웠고 그런 식으로 생명을 떠나보낸 세영이 어떤 마음일지 헤아리기가 싫었다. 솔직하게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채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 갈 거야. 수술동의서에는 내가 사인을 할 테니 오빠는 수술 끝나고 링거 맞을 때 와줘.”
“알았어. 미리 가있을게.”
눈물이 차있을지도 모르는 세영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다른 남자 앞에선 절대 울지 말라는 말에 눈물로 서운함을 뱉어내던 그녀였다. 마지막엔 언제나 오빠 때문에 나는 살아, 하면서 눈웃음을 짓는 세영을 보면서 가끔 그녀의 우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울고 싶을 때 울었더라면 내 이십대는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 꼬리를 쳐들기도 했다.
 
- 오늘 잠깐 만날까?
이틀 전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터라 오늘은 꼭 지은을 만나고 싶었다.
하필이면 세영이 병원 가는 날이었다.
잠깐 만나고 가면 시간이 되겠지, 하며 나는 약속장소로 향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지은은 울긋불긋 단풍이 진 계절과 잘 어울렸다. 투샷을 넣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지은은 이집 커피는 물을 너무 많이 타는 것 같다고 했다. 연한 라떼류를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진한 커피를 마시는 지은이 낯설었다.
우리는 가끔씩 눈을 맞추면서 아직도 싱글인 동창, 외국에서 사는 동창, 벌써 학부모가 된 동창의 아이 등에 대해 아는 대로 주고받았다.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소식 들었어, 며칠 전 동창모임에 나갔다가.”
“나 이혼한 거?”
지은은 단번에 알아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동창들이 던졌던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같이 살아봐야 알아. 결혼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함께 살아봤으면 알았을 걸 나 같은 맹꽁이는 그 흔한 동거도 못해보고 결국 이혼했지. 너도 결혼 전에 동거 먼저 해봐… 그런데 늘 같이 살아도 감추는 건 있을 거야,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거든.”
조신하면서도 당당하고 따뜻하면서도 결단력이 강해 더 매력 있다고 생각했던 지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후회도 분노도 아닌 체념으로 느껴졌다.
○○네 딸은 남자랑 일 년이나 살았는데 그 남자랑 갈라섰다더라, ○○네 집에는 일 년 전에 온 여자가 지금도 자기 집에 안가고 있더라, ○○네 아들 여자 친구는 처녀인 줄 알았는데 글쎄 그 나이에 애까지 있다더라, 하며 전화를 해서는 일방적으로 내게 보고하듯 말하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언제든 가방 싸들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는 동거가 제도적으로 묶여있는 결혼에 비해 그렇게 생산적이고 경제적이었던가.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입 꼬리만 올렸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것 같은 친근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걱정과 간섭 비슷한 것으로 튀어나왔다.
“이혼은 왜 했는지 물어봐도 돼?”
“일 년도 채 살지 못했는데, 난 살면서 그렇게 비싼 학비를 내보긴 처음이야.”
“외도?”
나는 창수가 던져주었던 정보만은 회피하고 싶었다. 지은에게 그건 가혹한 것이라 생각했다.
“바람을 피우면 좋기나 하지.”
“……”
“엄마나 아버지는 의사 사위를 마음에 들어 했어. 자랑하기에 제격인 사돈집의 배경에 으쓱했고 무엇보다 시골태생인 당신들의 딸을 나무라지 않는 게 감사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좀 이상한 조합이었어. 도시의 잘 사는 공무원과 의사 아들, 시골 농사꾼 백수 딸내미의 결합 말이야. 그런데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
“이상할 것까지는 없는데?”
“나는 당직을 서야 한다는 신랑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시어머니가 옷을 사 입으라고 주시는 돈을 넙죽 받았어. 엄마 아버지는 딸의 일자리까지 해결해준 사돈댁에 감지덕지했지… 어느 날 갑자기 친정에 들리면 왜 왔니 하고, 딸이 어떤 날 팔에 멍이 들어 집에 들려도 눈치를 못 채더라. 뜯긴 머리를 감추기 위해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면 돈도 많다며 나무라더라. 나는 정말이지 의사는 도박 따윈 할 줄도 모른다며 바락바락 우기던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부끄러웠어. 엄마나 아버지는 나를 까탈스럽다며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내가 그냥 참고 살아주길 바랐어. 다들 그렇게 산다면서.”
“……”
지은이 마음속의 울분을 털어놓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뒤에 약속이 있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과 함께 이 시간이 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혼하면서 약간의 돈과 집을 가졌어. 그 집에서 살기 싫으면서도 친정엔 가기 싫었고, 딱히 갈 데도 없었어. 어느 날 친구가 그랬지. 예전에 너랑 가까이 지내던 지욱이란 애는 지금 어디 있냐고. 걔는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외국에 갔던 거니, 걔랑은 왜 연락이 끊긴 거니.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나도 외국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잘했네.”
“웃기지? 집 팔아 나왔다는 곳이 고작 한국이야. 난 여태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 뭘 잘하는지 모르고 살았어. 그냥 아버지가 딸이 공부하길 원하니 수리화 같은 걸 열심히 했고, 대학엘 갔고. 아버지가 원하는 사윗감도 데려갔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떠밀리듯 결혼 하는 게 아니지 싶다. 그런데 난 그때 그렇게라도 안하면 죽을 것 같았어.”
“취직이 안돼서?”
“나는 어린 나이에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할 줄 몰랐어. 대학에서 일 년 남짓 만났던 남자 친구의 자살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그 시간들을 홀로 이겨낼 자신이 없었어.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해서 집으로 왔지만 엄마나 아버지는 외지대학을 다니고도 고향에 돌아온 나를 한심하게 생각했고 취직도 못하는 나를 무능하다며 창피해했지. 그러고 보면 가족처럼 징글징글한 존재가 없어…”
“여기선 무슨 공부를 해?”
“생각해보니 내가 책을 보는 걸 꽤 좋아했더라고.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서 국문과에 입학했어. 작가가 된다기보다는 그냥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가족이 없어서 좋아. 딸에게 늘 지나친 기대를 거는 부모가 곁에 없어서 홀가분해. 그런데 또 둘 다 한국에 온다고 난리네. 그렇게 철밥통을 입에 달고 살던 양반들이 내가 여기서 아직도 학교 다니는 걸 보면 아마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몰라.”
“나이가 드니까 부모는 작아지더라.”
“응, 한국 오기 전에 엄마가 나한테 그러더라, 미안하다고. 그때는 자식한테 사과하는 엄마가 궁상맞다고 짜증냈어. 그런데 엄마의 그 말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포용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야.”
“요즘엔 엄마의 그 말이 내게 용기를 낼 수 있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체면만 중시하는 아버지와 살면서 기 한번 제대로 편 적 없지만 이혼을 안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엄마가 그러더라, ‘네 딸은 시집갈 때 부모석에 친엄마 친아버지가 앉아있어서 좋겠다’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는 그냥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이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 같지 않니? 완전 구시대적 발상이야. 후훗.”
“그러게… 다들 그게 정상인줄 알고 살지.”

아버지는 십년 가까이 당뇨로 고생하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애잔함보다는 오랜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고작 이런 마음가짐을 보이는 내가 낯설었고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이제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곧 성공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합의한 사회체제에 자연스럽게 편입하여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욕망했던 것처럼.
장례식이 끝나고 공항에서 여동생에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동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신 보지 말자, 했다. 홧김에 한 말인 줄 알았지만 나는 그래, 했다. 누구나 편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사람도 떠난 사람도.
예술단에서 단원들에게 춤을 가르쳤던 아버지는 뚱뚱한 몸매와는 달리 가뿐한 춤사위를 보여줘 늘 사람들의 찬탄을 받았었다. 아버지는 남자로 태어나 춤을 추는 것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당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런 재주를 타고난 당신 스스로를 경멸했고 알콜의 힘을 자주 빌리곤 했다. 술을 마신 후의 아버지는 맑은 정신일 때와는 달리 거칠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나약해보였다.
양복을 빼입고 사무실에서 펜을 놀리는 것이야말로 꿈꿨던 삶이라고 딱 한번 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요된 삶과 자발적인 삶은 다르지 않은가. 아버지는 내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너 군대 가라.”
고중입학시험에서 낙방한 후 집에서 빈둥거리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군인이 되었다. 별의별 민족이 다 있었고, 중국어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나는 조선어를 쓸 기회가 없었다. 외로움과 소외감, 당혹감에 시달리면서 이 년을 견지했다. 버티는 길만이 아버지가 나를 군대에 보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한 부탁이 가치 있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감히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뭘 해야 될지 몰랐다. 군에서 하던 일은 사회에서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전학가기 전의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군대에서의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화가 적어졌다. 그들은 이미 대학 문턱을 밟고 있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내 또래들의 대학입학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입을 꾹 다물었다. 친구들이 전국 각지에 있는 대학으로 떠난 후 나는 정확히 이십육일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너 일본어를 배웠으니 일본에 가는 게 어떻겠니? 내 친구도 대학 못간 아들을 일본에 보냈더라.”
“외국에? 난 고중도 안다녔는데?”
유학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우리 집은 나를 일본으로 보낼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았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아버지의 결심은 확고했다. 때마침 일본유학 바람이 불던 때라 아버지는 일사천리로 수속을 마쳤고, 나는 열아홉의 나이에 낯선 땅에 던져졌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던 날, 나는 낯선 땅에서 아버지를 원망했고 더 이상 고향 쪽으로는 발길도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가끔 팔십 점 대 시험지를 들고 와 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의 주사를 견디던 여동생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이게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적이 낮아도, 내 모습이 초라해도, 게으름을 부려도 아버지는 모를 터였다. 그만큼 아버지의 교육체제에 대한 신봉은 열렬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비자연장을 위해서는 안하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물가를 보니 아버지가 주머니에 넣어준 돈은 금방 바닥을 보일 것 같았다. 어학원에는 처음 나올 때 대출받은 유학비용을 집에 보내야 하는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첫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에 대한 부담을 던 나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 재산을 탈탈 털어내고도 모자랐을 가족의 생계에 대한 미안함이 꾸역꾸역 생기기 시작했다.
외국생활이 군대생활에 비해 갑절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혼자인 것은 여전하지만 나에게는 스스로 살아나가야 된다는 생애 최대의 과제가 추가됐다. 빨리 말을 익혀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나를 일본으로 보내게 만든 장본인인 아버지 친구의 아들이 있어 적응하는데 예상보다 큰(?)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시체를 닦고 들어 내가는 일이 돈이 되더라.”
어느 날 그 형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스무 살에 죽은 사람을 보는 기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그 나이에 죽음 앞에서 그렇게까지 태연할 줄 몰랐다.
너희들 뒷바라지를 위해서는 가야겠다, 하면서 엄마는 한국수속을 넣었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돈을 안 벌어도 된다고 호기롭게 큰소리를 칠 힘도, 엄마가 돈 벌어서 나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용기도 없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출세한 유학생이 나온다는 건 애초에 하늘의 별 따기였다. 자식이라고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개천에서도 용이 나던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는 분명히 달랐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똑같은 세상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남들이 다 다니는 정규적인 학교교육을 받으면 모름지기 성공한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는 당신과 당신 아들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십오 년을 살면서 기차 한번 못타본 엄마는 어떻게 한국생활에 적응했을까.
엄마가 한국으로 간 후 아버지는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어느 방학에 잠깐 시간을 내 집으로 갔을 때, 아버지는 그 옛날 패기 넘치던 눈길은 어디로 감췄는지 나 좀 봐줘, 하는 표정으로 내 뒤만 쫓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라져간 것을 아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이 세상 천변에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싶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식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따로 사시는 부모님에게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아버지 건강 잘 챙기세요, 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날들이 지옥 같다고, 다 오빠 탓이라며 원망했지만 엄마가 넉넉하게 보내주는 생활비엔 만족하는 듯했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야망을 실행하고 있었다. 늘 괜찮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저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 한 시절을 같이 보냈던,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마음 맞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나중’이 언제인지에 대한 대답은 매번 달랐다. 아마도 자식들 시집장가 보낸 후 노후 준비를 하다가 엄마의 그 ‘나중’이 무색하게 지나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십년 남짓한 일본생활을 정리하겠다고 하자 엄마는 내가 한국으로 오기를 바랐다. 전화통화라도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했다. 간절해 보이는 엄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사실 나는 뚜렷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본에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더 이상 비자연장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계신 고향으로는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국으로 오기 전, 나는 내 선택이 가치 있는 결정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살다보니 일본생활보다 더 나을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율성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다만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을 뿐.
여동생은 자신만 남겨두고 외국으로 튄(?) 오빠와 엄마를 원망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엄마와 오빠의 전화를 기다리며 딸 앞에서 밥그릇을 엎었을 때 동생은 죽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 죽었어야 했어, 엄마가 한국 갔을 때. 어떻게 중학생인 나에게 아버지를 떠맡기고… 동생은 고중에 입학하면서부터 학교 부근에서 자취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연길에 집을 샀지만 동생은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족은 기대와 원망과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만만한 상대였다.
제각기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제대로 된 위로를 받지 못했으며,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원래부터 혼자였다. 아버지는 왜 다른 아버지들처럼 살지 못했을까. 좋아하시던 무용도 그만두고 앓음 자랑을 해야 될 정도로 아버지는 나약한 남자였던가. 나는 사람들이 혀를 찰 정도로 카리스마 넘쳤던 아버지가 사실은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썼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의구심을 품을 때도 있었다. 그 의구심은 가끔 나에게까지 옮아왔다.

지은의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든 위로가 됐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더라.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했는데 그 방식이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를 뿐이었다고. 당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자식은 꼭 누리길 바랐지만 자식으로부터 독립하는 데에는 서툴더라.”
“맞아,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나는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어. 그런데 살다보니 내가 그런 아버지를 닮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어, 난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아들인거지. 그래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지욱아, 널 한번은 꼭 만나보고 싶었어. 나는… 내 말을 들어줄 상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그 상대가 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어.”
그해 여름, 지은이와 입맞춤을 할 때 과연 지은이를 사랑했던 것일까.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금연구역임을 알고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왜 갑자기 연락을 끊었어? 아마도 지은이 영원히 물어보지 않을 것 같은 말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답하고 싶었다. 웃음을 거둔 뒤의 그 딱딱한 표정이 아버지를 닮아서였다고. 그땐 이중적이라 느꼈던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의존적인 나를 비웃을까 두려웠다고.
 
산부인과에 도착했을 땐 세영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영의 말에 의하면 간호사가 두세 시간은 걸린다고 했는데, 벌써 가버린 건가 하는 생각에 나는 갑자기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전화로 어디냐고 물었더니 세영은 건물 아래 약국이라고 했다.
“왜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왔어?”
“기다려도 오빠가 나타나지 않을까봐 먼저 나왔어.”
세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같은 날에 기어이 지은이를 만났던 것을 탓하며 고생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짜장면.”
겨우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세영에게 화가 났지만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정확하게는 세영이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근처에서 유명 연예인 남편이 운영한다는 중국집을 찾았다. 이른 저녁인데도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려야 되는 것이 당연한데, 처음 기다려보는 것도 아닌데 나는 짜증이 밀려왔다. 사람들은 왜 평일에도, 이 시간에도 다들 밖에 나와 짜장면이나 사먹고 지랄이야, 하고 속으로 욕을 해댔다.
세영의 요구대로 짜장면과 짬뽕과 탕수육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 정적을 깨보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한테 실망했지? 내가 눈을 내리 깐 채 속으로 이런 질문들을 던지자 응,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쳐다봤더니 세영은 젓가락으로 양파와 단무지를 이리저리 섞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나는 면을 가위로 자른 후 짜장 양념을 버무려 세영의 앞으로 밀어놓고는 짬뽕 그릇을 앞으로 당겨왔다. 테이블이 스무 개도 넘는 공간에서 나는 오로지 우리만 식사하는 듯한 적막에 몸서리를 쳤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뭘 말을 해야 되는지 몰라서 숟가락으로 칼칼한 짬뽕 국물만 퍼먹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지들만 먹나, 하는 생각에 그들의 테이블이라도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아직도 햇살이 쨍쨍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될 것 같은데 나는 끝내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입에 자물쇠를 건 세영의 눈치만 살폈다. 재잘거리며 애교를 부리다가도 가끔씩 입을 닫아버릴 때면 세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갑갑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았다. 나는 세영이 입 밖으로 뱉어내지 않은 말들의 의미를 하나도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세영이 입을 다물었을 땐 그 기분을 알아서 헤아려야 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몰랐다.
“아직은, 오빠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침내 입 밖으로 던져진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세영을 껴안았다. 나는 세영의 목덜미로 떨어지려는 눈물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쓱 닦아버렸다.
‘아직’, ‘그냥’, ‘매우’ 이런 단어들을 싫어했다. 그런 언어들과 내가 동일한 유형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세영이 그런 단어들을 내뱉기만 해도 나는 세상에 그렇게 무책임한 표현이 어디 있냐며 불같이 화를 내곤 했었다. 그런데 아직은, 이라는 말이 그렇게 예쁜 단어인지를 처음 알았다. 어쩌면 내가 무책임하다고 느꼈던 단어들은 아예 존재한 적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


“컨디션은 어때?”
“응, 괜찮아지려고 노력중이야. 그런데 자꾸 잠만 자.”
“지금 그쪽으로 갈게.”
전화를 끊고 나니 그 어느 때보다 세영의 체취가 그리웠다.
거듭되는 실연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된 창수가 전화했다.
“야, 나 오늘 창업관련포럼에 참석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 광고를 전공하는 애들은 그런데 관심을 가지면 좋지 않아?”
“그런 곳엘 왜 가? 창업하려고?”
녀석은 세상 여자들은 다 처녀귀신이 돼야 된다며 언제 악담을 퍼부었던가싶게 능청을 떨었다.
“마녀사냥, 장가는 노력을 해야 갈 수 있어. 그건 그렇고 언제 우리 커플끼리 야구 보러 가지 않을래? 요즘 야구경기 있잖아.”
그새 또 여자 친구가 생긴 모양이었다.
“꺼져, 이 자식아. 난 도서정리를 해서 장가나 갈란다.”
녀석은 화끈함이 실종된 진지함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가끔 녀석의 여유를 동반한 해맑은 웃음을 질투한다. 넌 왜 결혼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니, 하던 녀석의 활력 있는 투지력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미적지근한 나 자신을 싫어한다.

세영은 따뜻한 전에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근처의 유명한 전집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김치전이나 감자전, 육전 같은 것을 놓고 잔을 기울이는 것에 비해 목소리가 더 큰 사람들 때문에 나는 좀 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세영은 복작거리는 그곳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오늘은 어떻게든 세영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가게 잘 되네, 그런데 너무 복잡하다.”
“응, 오빠, 사는 게 이렇지 뭐.”
“괜찮겠어?”
“응, 좋아. 나는.”
뭔가 자꾸 끊기는 것 같아 세영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같이 살까?”
내 입에서 갑자기 같이 살자는 말이 튀어나오자 스스로도 놀랐다. 아직 내가 사는 오평짜리 원룸이 동거에 적합한 장소인지 가늠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세영의 오피스텔이 더 나은가?
“난 결혼 같은 건 안 하고 살 거야. 그러니까 동거도 안 해. 오빠도 연애만 할 거면 나 계속 만나도 좋아.”
순간 나는 등 뒤에 앉은 여자가 하는 말로 착각했다. 놀라서 뒤를 돌아봤더니 거기엔 여자가 아닌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세영은 젓가락으로 김치전을 찢으며 말을 이었다.
“따뜻함 뒤의 우유부단함과 낮은 자존감을 오빠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니, 인정을 안 하는 건가? 그런 남자랑 어떻게 살아.”
“……”
“가끔 오빠는 나의 어떤 면을 좋아할까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더라. 확실한건 지금의 오빠에겐 결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내게 결혼이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왜 네가 판단해?”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자존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은 그저 두 사람이 사귀다가 때가 되면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군대 갈 때부터 형성된 수동적인 습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밝은 남자를 찾고 싶었어.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오빠 등 뒤의 그림자가 커져. 난 이제 그 그림자의 덩치를 감당할 수가 없어. 오빠는 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가면?”
“응, 양의 탈과 같은 가면. 문제는 그것이 정말 가면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난 그 가면 뒤의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어.”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막걸리를 거푸 들이켰다. 그 사이 세영이도 감자전에 막걸리를 홀짝이고 있었다.
“오빠, 내가 얘기했던가? 나 낭종 수술을 적이 있어.”
“뭐?”
“걱정하지 마. 가족력은 없고 진즉에 끝난 일이니까.”
“나한텐 안한 것 같아. 그게 언제 적이야?”
“오빠를 만나고 얼마 안돼서. 잘 보이고 싶은 때라 말을 안했나보지.”
그제야 세영이 왜 비싼 브랜드의 옷만 고집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세영의 세련된 모습을 좋아했지만 속으로 허영심과 사치, 낭비 같은 언어로 평가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제 와서 오빠 놀라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때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러다가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내 명의로 된 통장은 어떻게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계약은 어떻게 처리하고 그 보증금은 누가 가지게 되며 또 내 소식은 누구한테 가장 먼저 가게 될까. 가만, 내 핸드폰 단축번호 일번은 누구로 설정해놨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데 나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나더라. 여태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왜 하필 그 순간에 생각났는지 몰라. 그때 알았어. 죽음은 늘 내 곁에 있었구나, 하는 걸. 다만 나는 외면하고 살았던 거지.”
“원래 사람은 아프면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잖아…”
“그 순간에 정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어. 떠올릴 사람이 없어서 울고 싶었어. 나를 낳았지만 키우지 않은 엄마, 나를 키우려 했지만 결국엔 버렸던 엄마, 그런 나를 끝까지 외면했던 아버지 중 누구도 나를 위해 달려올 것 같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만약 돈이라도 남긴다면 또 달라지겠지?”
“자식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하면 되지.”
“자식이 뭔데? 친엄마는 자기가 키운 자식을 더 예뻐하고 키워준 엄마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더 예뻐하고 아버지 역시 재혼해서 자기가 직접 키운 자식을 더 예뻐하는데 그 사람들한테 내 자리가 어디 있어? 그래서 난 내 자식은 꼭 내 손으로 보란 듯이 키우고 싶었어.”
세영의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시간 이후, 고백이라는 뻔뻔하고 의도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세영의 모든 것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영이 아이에게 느꼈을 애정과 배신감, 나에게 느끼는 분노를 알 것 같았다. 어떤 말도 세영에게 위로가 안 될 것이라는 걸 늘어나는 막걸리 병에서 인지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지은의 말이 떠올랐다. 난 이제 걸어 다니는 나무가 되고 싶어!
“내가 한국을 왜 좋아했는데! 나를 버렸던 사람들이나 자랐던 곳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내 삶 자체를 리셋하고 싶었어. 그런데 내가 돈을 좀 버는 눈치가 보이자 나를 버렸던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오는 거 있지. 몇 번째 새엄마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 보는 새엄마는 언제 나를 봤냐싶게 친딸마냥 살갑게 대하고, 그 엄마 자식의 결혼식에 내게 은근히 부조를 강요하던 아버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그러나 나는 알아, 그 새엄마는 한국에서 발붙이기 위해 그냥 내 집에서 며칠 묵어갈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을 뿐이고 아버지에게는 체면이 중요했을 뿐이라는 걸. 내가 너무 삐딱한가? 후훗!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일걸. 나는 내가 초라해지는 게 싫거든…”
세영은 자신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배려할 줄 아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섹스 할 때면 늘 아득한 사막에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해가 넘어간 뒤 땅거미가 질 무렵의 그 막막한 느낌을 감당할 수 없었어. 왠지 혼자 버려진 듯한 그 외로움이 하필이면 누군가와 가장 가까이 있을 때마다 강렬하게 밀려오는지 몰라 당황스럽고 낯설었어…”
어느새 세영의 말투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사전에, 미리, 재빨리 모면해야 한다는 예방심리가 생긴 지 오래 됐다. 아버지로부터 취한 사람의 주사를 견디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일은 없다는 것을 일찍 체득했기 때문이다.
“세영아, 이제 그만 갈까? 취한 것 같아.”
“응, 하긴 오빠는 늘 이런 식이지.”
세영은 말짱한 모습으로 일어나 팔자걸음을 하며 문께로 걸어갔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세영은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엄마와 세영, 셋이서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세영을 쫓아갔다.
 

"이 나무는 언제 여기까지 걸어와서 헐떡거리고 있을까?..."

 
제3편

턱관절

 

자정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두커피를 내렸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커피의 쓴 맛으로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한밤중에 바깥을 활보할 것 같은 불안이 괴어오르고 있었다. 필터가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커피가 조금 혼탁했지만 그대로 입가에 가져갔다. 커피를 매일 내려도 가끔 이렇게 실수할 때가 있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까지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여유가 필요했다. 창밖으로는 신산하게 불어오는 늦가을의 바람에 앙상한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고모는 늦은 저녁에 전화해서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다. 위챗으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고모가 직접 전화를 한 것은 아버지가 더 이상 돈을 보내오지 않은 후 처음이었다. 요즘은 굳이 통화를 하지 않아도 소통이 단절됐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각종 통신수단이나 SNS를 통해 문자나 음성으로 안부를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일상이 담긴 사진도 확인하여 상대방의 근황을 알 수 있다. 또 공유해놓은 콘텐츠로부터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고모와 나는 중간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직접적인 연락 같은 건 일부러 서로 피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육성으로 전해진 소식이 아버지의 부고라니.
슬퍼해야 되는 타이밍인가,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장례식은 언제예요?”
“모레. 그래도 딸인데 와봐야 되지 않겠니?”
고모는 지금 모레 한국에서 치르게 될 장례식에 연길에 있는 나를 부른 것이다.
이미 죽었다며? 그런데 뭘 봐요? 이제 와서 딸이 무슨 소용인데? 바락바락 악을 쓰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스물일곱이 될 때까지 십육 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나는 슬퍼해야 될지 모르쇠를 놓아야 할지, 긍정도 부정도 못한 채 애매하게 대답했다.
“고모. 비자가 없어서 갑자기 갈 수가 없어요.”
“… 난 공부를 오래 한 네가 이리 매정할 줄 몰랐다. 한번은 꼭 왔으면 좋겠구나.”
고모의 말에는 매끄럽지 못한 어떤 사건을 일정한 기간 함께 겪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비난과 서운함이 실려 있었다. 나에게 그건 꼭 네가 그러고도 자식이야? 아예 올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 아버지가 보낸 돈을 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오리발이야! 하는 원망처럼 들렸다. 사실 준이 유학수속을 할 때 같이 재외동포비자를 받아놓은 나는 괜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말을 잇지 못했다.
한국유학을 떠난 준은 삼년 가까이 되도록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다.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논문이 잘 안된다며 간헐적으로 신경질을 부리다가 연락이 뜸해질 때까지 우린 영상채팅만 했다. 요즘 말로 개나 소나 다 한국에 가기 때문에 나도 남자친구 만나러 한번쯤 갈 줄 알았는데 아직 여권에 도장을 못 찍었다.
“……”
“정하야, 그래도 부모잖니?”
“… 고모. 노력해볼게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모의 기세를 봐서는 내가 안가면 두고두고 나쁜 년이라고 욕할게 뻔했다. 준을 만나고 싶기도 했다. 만나서 이 몇 달 동안 끝내 뱉어내지 못한 말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와 준을 놓고 저울질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그러나 선뜻 가겠다고 나서기엔 영악한 자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본심을 들킨 아이처럼 수치심이 앞섰다.
오늘따라 커피는 유난히 썼다. 커피 맛은 때론 달콤하게도 때론 한약처럼 쓰게도 느껴진다. 아버지를 생각하려 했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열한 살 이전의 기억보다는 늘 엄마와만 지지고 볶던 일들이 먼저 떠올랐다. 연락을 끊었으면 잘 살아야지 시집도 안간 딸에게 이런 모습으로 다가오다니. 나는 억울함과 때 아닌 짜증에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에게는 아버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게 뻔했다. 인과응보야, 아마 엄마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는 돌아서서 눈가를 훔칠지 모른다. 외강내유. 엄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독수공방하며 기다렸던 남편에게서 영영 버림받았으니. 아직 법적으로 부부지간인 엄마는 곧 호구부에서 남편의 부재를 인지하게 될 것이다. 엄마에게 애도의 시간 따위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오로지 내 이기적인 배려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영원히 가실 것 같지 않은 내 적의 때문이기도 했다.

며칠 후, 나는 준에게도 고모에게도 말하지 않고 항공권을 3박 4일 일정으로 예매했다. 잘 곳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고모나 삼촌 집에 비비기는 싫었다. 말로만 들어온, 오평짜리 한국의 원룸은 다른 사람이 비비기엔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준은 기숙사에 살았고 친구나 선배 언니도 있지만 신세를 지기 싫었다. 씨트립에서 교통과 주변시설이 편한 곳으로 타임스퀘어 건물에 있는 호텔을 찾았다. 뉴욕. 타임스퀘어. 한국.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준에게 한국으로 간다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사년 넘게 만났으니 이제 우리 관계를 좀 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헤어지는 것을 현실적인 방안이라 생각했고, 영상통화를 하면서 여러 번 망설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대학입학 후 첫 겨울방학, 기대에 부푼 채 남자친구를 만났지만 낯설었다. 고중 때부터 만난 남자친구는 반년 사이에 대도시의 물을 먹은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나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시니컬함을 내비쳤다.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남자친구에게 양꼬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문 앞에 이르러서는 사실 샤브샤브가 먹고 싶다고 변덕을 부렸다. 그것으로 내 마음이 편치 않고 관심을 끌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남자친구가 알아주기를 기대했다. 남자친구는 아무 말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샤브샤브는 맛이 없었다. 남자친구는 소침해진 나를 의아하게 쳐다볼 뿐 네 눈에서 빛이 나, 하는 말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개학이 되자 나는 이별을 고했고 남자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내 결정을 따랐다. 나는 가끔 남자친구의 기숙사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서는 한참동안 말도 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끊어버리곤 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실연의 열병은 점점 식어갔다. 그때, 또 다시 이별 같은 걸 한다면 얼굴을 마주 보고 지내온 시간을 매듭지으리라 다짐했다.
엄마에게 준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하자 반색하면서 면세점에서 사올 리스트를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옷 가게를 하는 엄마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력서를 넣은 후 기다려야 되는 답답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시작했지만 나는 점차 이 ‘무미건조한 일’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는 아예 직원이 되어버린 나를 욕하기도 하고 구슬리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손을 놔버린 지 한참 됐다. 그러나 딸이 당신처럼 외롭게 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여자들끼리만 오래 살다보니 감정이 다닫는 온도를 느끼는 데에 도가 텄다.


고모는 내 연락을 받고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쩜 연락도 없이 벌써 왔니? 좀 걸릴 줄 알았는데.”
“… 시간될 때 모여서 식사라도 할까요?”
“그래야지. 작은 오빠한텐 내가 연락할게. 그리고… 아니다, 됐다.”
고모는 내가 연락도 없이 와서 숙소까지 잡아버린 것을 두고 아쉬워했다. 고모나 삼촌이 어릴 때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철모를 땐 할머니 집에 가서 고모를 졸졸 따라다니다 혼나기도 했고 고모의 물건이 신기해서 함부로 손을 댔다가 뒤통수를 맞은 적도 있었으며 고모가 친구 만나러 갈 때 미리 나가서 숨어 있다가 막무가내로 따라나서기도 했다. 삼촌 친구에게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졸라서 삼촌을 난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때로 할머니의 강요로 애장품을 뺏긴 고모나 삼촌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했다. 나는 어른들의 세계가 궁금했고 부러웠으며 거기에 끼고 싶었다. 이젠 그런 것들이 과연 추억이었나 싶을 정도로 가물가물해졌다. 그 사이 나는 살가운 조카가 되지 못했다. 
다들 바쁠 것 같아 따로 연락을 안 한 것이지 별다른 뜻은 없다고 선을 그었더니 고모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 이년아! 예전에 고모가 기분 좋을 때면 가끔씩 나에게 내뱉곤 하던 소리였다. 고모는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나의 등장에 어지간히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준에게 내일 저녁에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준은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내가 찍어 보낸 사진을 보고서는 알았다고 했다.   

고모는 점심에 ‘화룡냉면’에서 만나자고 했다. 택시를 타고 대림 쪽으로 가는데 가면 갈수록 연길의 어느 한 거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판에 한자와 한글이 모두 적혀있었고 내용 역시 낯익었다. 이 동네가 풍문으로만 듣던 ‘만남의 장소’라는 게 실감이 났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중국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질감이 없어 향수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로하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보였다. 
먼저 와있던 고모는 나를 보자 호들갑을 떨었다. 위챗에서 사진만 봐오다가 실물을 맞는 건 육년 만이었다. 내년이면 사십인 고모는 여전히 예쁘고 우아했으며 나는 예전처럼 달라붙고 싶었다. 아버지네 삼형제 중 막내인 고모는 나에게 친구이고 언니이자 어른이었다. 외동이라 유달리 고모를 따랐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진 후로 원망한 적도 있었다. 나는 꽤 애틋했다고 여기는 옛날이 떠올라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잘 모이는 곳이다. 옆에 있는 전가복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야. 여길 오는 건 별게 없어, 우리 모두 화룡사람이라는 것밖에는.”
화룡사람이라 ‘화룡냉면’을 찾는다는 고모의 말이 진지해보였지만 나는 그런 발상이 촌스럽다는 생각에 가만히 웃었다. 고모는 변한 게 없었다.
“여기는 한국 같지 않아요. 가게도 그렇고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연변 같아.”
“아마 식당에 먹으러 다니는 사람은 주로 연변에서 온 조선족들이고 장사꾼은 한족들일거야. 아, 요즘은 연변에서 온 조선족들 중에서도 가게를 차려 성공한 사람들이 제법 많아.”
“그렇겠죠. 조선족들이라고 계속 돈만 벌겠어요? 일도 하겠지.”
고모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얘는, 일을 하니까 돈을 버는 거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그러니까…”
고모의 핸드폰이 울렸고, 조금 지나 삼촌이 우리가 자리 잡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삼촌은 혼자가 아니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닥스 핸드백을 들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뒤에 따라붙었다. 엄마 가게에서 일하면서 웬만한 브랜드는 다 익히려 노력한 탓도 있었지만 오래 전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내준 가방과 같은 브랜드여서 금방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는 뜻으로 고모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고모는 아는지 모르는지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삼촌은 십년 만에 보는 조카는 안중에도 없는지 인사부터 시키기에 급급했다.
“인사해라. 형이랑 같이 살았던 아주머니야. 형수, 얘가 정하요.”
형수라는 삼촌의 부름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고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맸다. 같이 살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줌마의 나이를 가늠해봤다. 중후한 차림새와는 달리 얼굴에 주름이 적었고 목주름도 깊지 않아 고모보다 어려보이기도 했다.
테이블 아래로 맞잡은 손의 떨림이 느껴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순간 이 자리에 있어야 할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지 망설였다. 내가 이도저도 아닌 모양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머뭇거리자 삼촌이 고모를 부르며 구원을 요청하는 듯 했다. 삼촌은 늘 그렇듯이 이기적이고 눈치가 없었다. 곧 중학생이 될 사촌동생이 떠올랐고 한국에 온지 십년이 되도록 집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삼촌을 향한 반발심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보다 아버지가 없는 몇 년 동안 삼촌이 차남이라는 이유로 아들 역할을 엄마에게 완전히 미뤄버린 날들이 떠올라 웃고 싶지 않았다. 
고모는 잠시 숨을 들이쉬더니 결심한 듯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가를 실룩거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고모를 째려보았다. 고모가 어제 말끝을 흐린 것이 이 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속도 없이 웃는 삼촌은 조카의 상한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듯했다.
묻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모름지기 여자가 있을 거라고, 그것도 눈치 채지 못했냐고 엄마에게 행악질을 해댔던 나는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놀라움과 함께 뒤통수로 뭔가 딱딱한 게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의 식사자리를 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일면식도 없는 아줌마를 대동한 채 형수라고 소개하며 조카에게 헤벌쭉 웃어 보이는 삼촌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채로 아버지의 동생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며 난생 처음으로 주문이라는 것을 걸어보았다.
아줌마가 나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반가워요. 꼭 만나고 싶어서 삼촌에게 부탁했어요.”
반갑다니, 아버지의 딸인 내가 반가운 존재인가. 형수 호칭에 이어 삼촌이라는 호칭은 또 뭔가. 이들은 벌써부터 가족인가.
갑자기 밀려드는 소외감과 괜히 여기까지 왔다는 억울함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제 아무리 스물일곱을 먹었어도 한때 아버지와 살았던 여자 앞에서 느낀 당황스러움을 숨긴다는 건 쉽지 않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꼭 왔으면 좋겠다던 고모의 말에 마음이 약해 넘어간 것을 후회했고 천연덕스럽게 이 식사자리를 만든 고모가 야속했다.  
삼촌과 고모가 메뉴판을 보며 이것저것 주문하자 테이블엔 정적이 흘렀다.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묻지 않은 탓인지 고모나 삼촌은 아버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엄마의 안부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에 온 후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온 적이 없다. 이년 전 할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셨을 때에도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 아직 명색이 며느리인 엄마가 상주노릇을 했고 숙모는 시집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몇 살이나 더 먹은 것 같았다. 뜻하지 않은  침묵은 나름대로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뜩 이 자리가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줌마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 시각, 이 공간에서의 이방인은 누구인가. 어느 쪽이 진짜 가족인가.
음식이 들어오자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고모가 선코를 뗐다. 고모는 돈이 모이면 장차 미용실을 차릴 거라고 했고 삼촌은 경기도에 있는 공장에서 기계를 봐준다고 했다. 둘 다 하는 일도 재밌고 돈 버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했지만 나에겐 오로지 돈독이 오른 사람들이 뱉어내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을 떠난 고모와 삼촌은 한국에서의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지만 난 이제 갓 사춘기에 들어선 사촌동생과 그동안 자식의 뒷바라지를 한답시고 시댁엔 얼굴도 내밀지 않는 숙모를 생각하며 넌더리를 쳤다. 아줌마도 뭐라고 말을 했는데 내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줌마는 우리들의 대화에는 별로 끼지 않은 채 자꾸 반찬만 짚어주었다. 나는 그게 부담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살았던 여자도 포용해야 한다는 식의, 속 깊은 지성인의 가면을 벗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넌 왜 아직도 시집을 안가니?”
삼촌이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나와 고모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결혼적령기가 다 된 타인에게 왜 결혼을 안 하냐고 묻는 것은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우월감을 나타내기에 안성맞춤한 대화거리가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고모도 안 갔는데 뭘.”
“오빠도 참, 요즘 애들은 다들 결혼을 늦게 하오. 결혼은 멋모를 때 후딱 해버려야 되는데, 나이가 들면 눈이 높아져서 조건만 따지다 말지. 고르다 고르다 쥐를 고를 바엔 차라리 안 가는 게 낫지 뭐.”
설화 속에 등장하는 그 쥐는 여자 본인이 고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골라준 건데. 나는 속으로 고모의 말에 대답질을 하며 맥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삼촌이 남자친구는 있냐고 물어보자 나는 대답하기 싫어 머리만 까딱했다.
“오빠. 걔가, 어디가 모자라서 아직도 남자친구가 없긴! 정하야 시집가든 말든 오빠 노릇이나 제대로 하지? 요즘 세상에 애인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고모는 이성 친구가 없거나 결혼 못한 사람은 하자가 있다는 식의 취급을 하는 세간의 인식에 품고 있던 불만을 터뜨리듯이 삼촌에게 못마땅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고모의 말끝에는 왠지 모를, 도발적인 적의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갑자기 드러난 고모의 뾰족한 감정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삼촌, 언젠간 가겠죠. 뭐 결혼해야 사람구실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결혼해도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하야, 어른들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길지 않은 대화 중 어느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삼촌이 발끈했다. 이 어긋난 대화는 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말 그대로 하나밖에 없는, 갓 아버지를 잃은 조카의 결혼에 대한 걱정 때문인가.
시비를 거는 투의 말에 고모가 급히 삼촌을 나무라며 중재하려 했고 난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속으로 주절댔다. 쳇, 여기 어른이 어디 있다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삼촌이 이상했고 분위기가 날카로워지는 상황을 피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지 않는 고모가 낯설었다. 이러는 우리를 지켜보는 아줌마의 존재도 껄끄러웠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몇 년 만의 식사는 멋쩍게 끝나고 말았다. 열정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은 감정은 우리들의 관계를 더 이상 좁히지 못했다. 그렇다고 간극이 벌어질 이유도 없었다.
고모는 나에게 내일도 모레도 만나야지 하면서 억지로 내 호주머니에 제법 두꺼운 봉투를 넣어주었다. 잠시 궁싯대던 삼촌도 미안하다며 봉투를 건네주었다. 삼촌의 그 행동은 마지못해 돈을 주는 것처럼 보였고 순간 나는 거지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고모와 삼촌은 어쩌다 놀러온 어린 조카에게 한곳이라도 더 가보고 먹고 싶은 것을 다 사먹고 욕심나는 것은 원 없이 사갖고 가라는 듯이 돈을 건네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지워버리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는 고모와 삼촌을 보면서 나는 어떤 장벽 같은 게 느껴져 이제 한동안은 이들을 만나기 힘들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한동안이 정말 한동안으로 끝날지 평생 걸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가족이라는 것이 고작 이런 관계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게 웃었다. 
아줌마는 삼촌의 차 트렁크에서 쇼핑백을 꺼내 나에게 건네며 만나서 반가웠다고 했다. 고모는 삼촌을 흘겨보더니 이내 머리를 돌렸다. 반복적으로 던진, 반갑다는 말이 어이없었지만 그건 어쩌면 아줌마의 진심이 담긴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없는 마당에 아줌마가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겠는가. 쇼핑백에는 제법 큰 핑크색 케이스가 들어있었다. 내용물이 궁금했지만 그 자리에서 헤쳐보거나 물어볼 용의는 없었다.
삼촌이 호텔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그 차에 아줌마랑 같이 탄다는 게 불편할 것 같았고 교양인의 포용으로 옹졸함을 포장했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고모는 그냥 알아서 가라고 손짓했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고모가 꼭 한번 왔으면 좋겠다고 했던 의도가 궁금했다. 특별한 후사도 없으면서 뭘 바라고 나를 여기까지 오라고 했을까. 고모는 아버지와 관련된 일은 삼촌과 둘이 다 처리할 테니 너는 몸만 와라, 하고 말했다. 와서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고작 식사나 하자고 외국으로 부른 것인가. 싱겁고 시시한 걸음이라는 생각에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후 얼마 안 돼 출국바람은 우리가 사는 시골바닥에까지 불어왔다. 우리 마을에서도 돈을 꿔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난 집이 있었고, 얼마 안지나 당사자가 돈을 보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도시로 이사 가는 집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출국바람은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뒤숭숭함, 그리고 무기력까지 동시에 안겨주어 엉덩이를 붙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삼남매 중 맏이인 아버지는 장남과 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인식하고선 더 이상 농사짓는 것으로 살아나가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남들보다 잘 사는 것은 둘째 치고 남들만큼이라도 살려면 출국하는 길밖에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고 막대한 빚을 짊어진 채 한국으로 건너갔다.
엄마는 농촌 집과 땅을 팔아버리고 내가 다니는 학교 부근으로 옮겨와 내 뒷바라지를 했다. 엄마는 갑자기 ‘가장’이 된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지만 며느리 노릇을 착실하게 했고 삼촌과 고모에게도 아버지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공간에서는 삼촌이 대들보 노릇을 하길 바랐다. 그러나 삼촌은 허구한 날 빈둥댔고 외국으로 돈 벌러 간 아버지는 졸지에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이어 삼촌과 고모까지 먹여 살리는 ‘기계’가 되어버렸다. 삼촌은 장가를 가서도 여전히 자립하지 못했고 할머니를 조종하여 엄마에게서 돈을 가져갔다. 나는 아버지의 출국이 제 노릇을 못하는 삼촌과 관련되기라도 한 듯 오래도록 삼촌에 대한 원망으로 뭉친 응어리를 풀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먼저 핸드폰을 사용한 여자였다.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밤마다 언제 울릴지도 모르는, 우리 형편에 거금을 들여 장만한 전화기를 끼고 잤다. 내가 일등짜리 성적표를 받아왔을 때, 중학교나 고중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내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을 알았을 때… 엄마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 엄마는 나의 성장을 아버지와 함께 지켜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으며 나의 훌륭함이 남편의 고생에 대한 보답이라도 되듯 내 학습 성적에 집착했다. 어릴 때부터 고모나 삼촌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인지한 나는 벼락치기 공부를 해 눈에 보이는 성적으로 엄마의 책임감과 허영심에 보답했다. 나는 표면적으로는 인정받았지만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고 자꾸만 겉돌았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아직 죽지 못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는 엄마 때문이라며 속으로 수없이 변명했다.
한주에 한번 꼴로 전화하던 아버지는 점차 들쑥날쑥하게 연락했다. 언제 전화가 올지는 엄마도 나도 짐작할 수 없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댁 아주머니가 한국에서 일하다 병이 나 돌아온 후 바로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나 ○○네 남편은 공사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다리를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국 간 사람들은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중국에서 갖고 간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로 치료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엄마가 그럴 땐 좀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장한 엄마의 표정 뒤에 숨겨진 우울을 훔쳐본 어느 날, 중학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술맛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말을 하지 않아도 힘들게 일한다는 것을 아는 엄마는 종래로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할머니나 고모, 삼촌에 대해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기운 찬 목소리로 아버지와 통화했다. 엄마는 늘 아버지에게 할 말을 산더미 같이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궁금해 하는 것들만 벼락치기로 말하고 난 엄마는 전화를 끊고 나서는 서운한 표정으로 내게 아버지 소식을 되풀이하는 동시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반복했다.
엄마의 씀씀이로 봤을 때 아버지가 출국하면서 빌렸던 돈을 갚는 데에 팔년 정도 걸린 것으로 안다. 돈을 버는 사람에 비해 쓰는 사람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오는 것은 엄마로 하여금 누구네 남편은 한국 가서 바람이 났다더라, 누구네 아내는 가짜 이혼을 하고 한국 갔는데 돈을 한 푼도 보내오지 않는다더라 따위의 소문을 무심하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중을 거쳐 대학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어느덧 아버지가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세상물정을 알게 된 후로는 아버지의 부정을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내 생활비를 끊는다고 협박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엄마는 연길에 집을 샀다. 이제 헛헛한 셋방살이를 끝내고 드디어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엄마는 집을 인테리어 할 때 될수록 아버지 취향에 맞추려 신경을 썼다. 안방만 특별히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톤으로 도배를 했고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냉장고도 아버지와 상의한 후 구매했으며 그릇 하나하나를 구매하는 것도 모두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에게 물어서 결정한 후 구매하는 과정은 한주가 걸릴 때도 있었고 한 달이 너머 걸릴 때도 있었지만 엄마는 그 기꺼이 과정을 감내했다. 엄마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으며 아버지가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간 후 엄마가 가장 행복하게 보낸 시간을 꼽으라면 아마 그때가 아닌가싶다. 온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갈 풍경을 그리면서 지낸 그 시간들.
집만 있으면 금방 올 것 같았던, 집이 없어서 오지 못하는 줄 알았던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와 나의 고요한 생활에 폭탄을 터트렸다. 엄마는 언젠가는 돌아올 아버지에게 게으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고 꿀 팩을 했다. 아버지는 불법체류자들이 자진 귀국할 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십여 년 동안 기다림에 지친 나는 어릴 때와 달리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학창시절에 만났던 남자친구들과도 깊거나 오랜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다.
준은 자신의 삐딱함을 알아봐주고 이해해준 여자는 처음이라며 나를 향해 웃었다. 그는 내가 무슨 대단한 지인지감 능력이 있어 자신의 속내를 알아본 게 아니라 그냥 직감으로 말과 행동을 예측했을 뿐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준이네 집안의 공기를 더 좋아한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아버지 없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눈치는 때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으로 가끔 지성의 가면을 쓰고 그 뒤에 숨기도 했다.
집이 생기자 엄마는 친구의 소개로 옷가게를 시작했고 한류와 함께 들어오기 시작한 한국 옷들은 제법 잘 팔렸다. 공식적으로는 오래 공부하게 될지도 모를 내 뒷바라지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엄마는 이미 어렴풋이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게 아닌가 싶다. 엄마는 경제적 독립이야말로 더 당당하게 남편을 기다릴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엄마는 돈을 벌지 않는다는 시집 식구들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할머니나 삼촌, 고모는 가끔 아버지가 우리 세 가족의 가장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피붙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엄마의 경제력은 어이없게도 고모가 아버지의 ‘외도’를 통보했을 때 엄마로 하여금 울분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게 만든 정신적 지주로 활용되었다. 고모의 전화를 받은 그날,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다운받아두었던 영화 다섯 편을 내리 봤고 눈도 붙이지 않은 채 예전과 같이 가게에 출근했다. 고모의 말은 이제 아버지가 더 이상 돈을 보내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했고 엄마는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거봐, 그 기간이면 애가 있어도 열 살은 넘었을 거야, 그리고 십몇 년 동안 집 한 채밖에 못 건졌다는 게 말이 돼? 다른 사람들은 진즉에 집 몇 채씩 사고 그러던데. 내가 그렇게 이상하다고 말해도 아버지 편만 들더니, 이제 어떻게 살 거야?”
그즈음의 나는 이미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휩싸여 있었으며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리려 위악을 부렸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만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하는 생각들은 입을 거치면서 엉뚱하게 엄마를 비난하는 쪽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엄마가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는 게 싫었다. 그 상황에서도 엄마가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후로는 더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공시법이라는 게 있으니 이혼은 얼마든지 가능해, 하고 엄마를 다그쳤다. 당장 가족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내 삐뚤어진 마음을 다잡고 싶었으며 아버지를 향해 복수의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 엄마는 날뛰는 나를 두고 딸년이 너무 야박하게 나온다며 욕했고 이혼만은 절대 안 된다며 못을 박았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변함없이 우리 가족이고 가장이라고 했다. 여태 ‘남편 없이’ 살았으니 아버지가 오든 안 오든 이제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는 의견이 갈린 채 며칠 동안 말도 섞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외국에서 집도 없이 오래 생활한 아버지를 세대주의 자격마저 박탈당한 신세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았기에 애꿎은 엄마에게 미친 듯이 분풀이를 해대는 것으로 엄마 속을 긁어놓았다. 


호텔로 돌아와 쇼핑백에 담긴 케이스부터 꺼냈다.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과 내용물에 대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밀려와 잠깐 망설였다. 안의 것을 확인하는 순간 정체 모를 그 무엇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것 같았고 확인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삶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한참을 미루적거리던 나는 점심 식사자리를 떠올리는 순간 혐오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정시해야 하며 유일한 딸로서 자식노릇을 해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에! 케이스 안에는 핸드백 하나와 얼핏 봐도 서른 개는 됨직한 핑크색 일색의 머리핀이 들어있었다. 어디선가 본적 있는 푸시아 색상의 루이까또즈 핸드백은 심플하고 마음에 들었다. 반면 머리핀은 요즘 열 살짜리들도 거부할 정도의 싸구려들이었다. 머리핀들을 다 꺼내자 봉투가 나왔다. 그 안에는 접힌 사망증명서와 오만원권이 스무 장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유골 같은 건 없었다.
이게 뭐야, 아버지 유품인가? 이 따위가? 고모는 이걸 가지러 한국으로 오라고 그 난리를 친 거야?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고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입을 앙다물었지만 눈물은 도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오래 전부터 울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모가 아버지의 외도를 통보했던 그날에도 울고 싶었고 며칠 전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날에도 울고 싶었으며 아까 고모와 삼촌을 만났을 때에도 눈물을 참았다는 것을 알았다. 삼촌도 있고 고모도 있고 아버지와 살았다는 아줌마도 있는데 아버지만 없었다. 나는 그것을 인지했지만 울지 않는 것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었고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으로 아버지 없이도 잘 살아왔음을 그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물건들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임자가 누구인지 이대로 중국으로 가지고 가야 될지 난감함도 잠시, 나는 아버지가 남긴 것이 이게 전부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엄마와 나에게 돈을 보내오지 않은지도 오년이 돼 가는데 이게 전부라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고모로부터 아버지는 사고사였고 얼마간의 보상금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느닷없이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심장이 쿵쿵 급격하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타임스퀘어 이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준을 만나 함께 저녁 먹으러 이동할 예정이었다. 카페는 홀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밀폐된 공간이 아니어서 더 혼잡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줄을 서서 주문해야 될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나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한참 서성이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 모두 수다나 떨려고 밖으로 돌아다니나 싶었다. 한국 땅을 밟지 않는 것이야말로 엄마에 대한 의리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함께 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곳에 앉아있다는 게 떨떠름하기도 했다.
카페에는 끼리끼리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 혼자 커피를 앞에 놓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 열심히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 핸드폰 하나로 게임을 즐기는 커플,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원두가 갈리면서 나는 구수한 향과 이 공간을 찾은 사람들의 행동패턴이 낯설지 않았다.
- 좀 늦을 것 같아.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준이 문자를 보내왔다. 이유도 밝히지 않으면서 얼마 동안 늦는다는 말도 없는 준이 못마땅했지만 응, 하고 문자를 보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준은 내 앞에 나타나는 대신 또 다시 문자를 보냈다.
-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어. 어떡하지?
- 응, 일 봐.
삼년 만에 같은 도시에 나타난 여자 친구를 이렇게까지 홀대한다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났다. 내가 말도 없이 나타난 게 죄인가? 도저히 떠서는 안 되는 자리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고 볼일을 보라고만 했다. 예전 같으면 누굴 무시하는 거냐며 난리치고도 남았겠지만 나는 얌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옆 테이블엔 대학교 점퍼를 입은 여학생이 이어폰을 꽂고 책을 펼쳐놓은 채 머리를 틀어박고 있었다. 머리 뒤로 보이는 종이컵에는 ‘피곤한학생’이라는 닉네임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저 맞은편에 교보문고가 보여 잠깐 둘러볼까 생각했지만 어렵게 선점한 자리를 뺏기기 싫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더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준에게 바람 맞은 게 틀림없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오지 못한다고 말하거나 아예 다음날 만나자는 말 따위로 변명을 늘어놓는 게 좋지 않았냐고 중얼거렸다. 다행인건 이 상황에서도 화가 나지 않았고, 준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모에게 아줌마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고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유도 묻지 않고 번호를 불러주었다.
가기 전에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아줌마는 두 번 만나면 좋은 감정이 사라질 것 같다며 거절했다. 쇼핑백 속의 가방은 언젠가 아버지가 친구 딸의 결혼식에 다녀오다가 산 것이고 머리핀은 한두 개씩 사 모은 것이라고 했다. 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문득 뭔가 잘못돼간다는 불길함이 슬밋슬밋 기어 올라왔고 배고픔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는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는 갈 데가 있다고 했다. 말하지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고모가 나를 한국으로 오라고 했고, 여태 뜸을 들인 이유라는 직감이 들었다. 고모의 표정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나는 말없이 따라나섰다.
우리는 한손에 하나씩 커피를 쥔 채 신림동의 어느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는 집이 육십 도로 경사진 오르막에까지 있나싶을 정도로 아찔한 곳이었다. 고모가 건대입구 쪽에 산다는 것을 들었기에 삼촌네 집에 가냐고 물었지만 고모는 딴청을 부렸다. 이번에 와서 준은 만날 건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계속 엄마 가게에서 일할 건지에 대해 물었다. 내가 준은 아직 만나지 못했고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으며 취직도 아직 모르겠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고모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난 한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아, 하고 제법 비장하게 말했다. 그 말은, 고모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떠한 회한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와 함께 너도 그렇게 살길 바란다는 소망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딱 하나, 나는 작은 오빠가 한국에 온 게 싫어, 그건 두고두고 네 아버지를 원망할 것 같다. 그냥 버러지처럼 살게 내버려두지 뭣 하러 한국까지 데려와서는…”
고모는 아리송한 말을 던지고는 계속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여태 올라왔던 길과 수직으로 된, 편평한 길이 나타났다. 슬쩍 올라온 길을 뒤돌아다봤더니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대굴대굴 굴러 내려갈 것 같았다. 우리는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 더 걸어갔다.
아담한 삼 층짜리 빌라 앞에서 멈춰 섰다. 고모가 이층 왼쪽 집의 벨을 누르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지 않자 고모는 문을 쾅쾅 두드리며 영지야,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하고 소리쳤다. 나는 잠자코 있으면서 영지가 누굴까 생각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내 기억으로 고모 친구 중엔 영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고 고모는 나를 모르는 친구에게 데리고 올 정도로 낯이 두껍지도 못했다.
이윽고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조금 놀랐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영지라는 이름을 가진, 고모보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아줌마였다. 대충 가디건을 걸친 아줌마는 고모 뒤에 서있는 나를 보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로 왼쪽에 주방이 보였으며, 그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방문이 하나씩 있었다. 집안은 제법 밝고 깔끔했다.
어느 순간, 나는 남쪽을 향한 방에서 달려 나오는 남자아이를 보고 말았다. 열린 문 사이로 옷걸이에 걸려있는 프라다 가방이 보였다. 아버지, 아줌마, 아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섬뜩해났다. 이 아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버지와 살았다는 아줌마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아이를 보자 표정이 굳어지는 나를 지켜보던 고모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하야, 네가 싸워서 이겨야 될 사람은 이 다섯 살짜리 꼬마다. 큰 오빠 사망보상금으로 나올 돈이 모두 정하 네 것이어야 마땅하지만…”
고모는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이 격해져서는 말끝을 흐렸다.
“고모 지금 정신 나갔어요? 이 아이가 누군데?”
나는 고모와 아이를 번갈아보며 인상을 썼다.
“몰라, 나도. 네 친동생인지 사촌동생인지…” 고모가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쳤다.
“언니, 지금 애 앞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고모와 내 대화를 듣고 있던 영지 아줌마가 별안간 고모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어제 만났던, 반갑다며 내게 반찬을 짚어주던 유순한 모습과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 형제들은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가. 아니,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인가.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이를 쏘듯이 내려다보았다. 처음 나타난, 불청객인 내 눈치를 보던 아이 역시 갑작스레 언성이 높아진 상황이 무서운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가 울면서 아줌마에게 다가갔다. 영지 아줌마는 다 부족한 엄마 탓이라고, 울면서 아이를 껴안았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처음으로 그 집을 방문한 내가 다 죄스러웠고 말도 없이 나를 데리고 와버린 고모가 원망스러웠다. 
“작은 오빠 부를까? 영지 넌 어쩜 이렇게 이기적이니? 큰 오빠가 그렇게 만만했니? 정하 몫은 가로채지 말아야지. 너 그러다 벌 받아… 미친년이나 미친놈이나 다 거기서 거기야.”
삼촌은 또 뭔가. 년이나 놈은 누굴 가리키는가. 고모의 분노는 도대체 누구를 향한 것인가.
결국 고모는 영지 아줌마와 한바탕 싸우고 나서는 아직도 경악한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를 끌고 그 집을 나왔다. 나에겐 고모랑 영지 아줌마 중 아줌마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고모는 자신보다 어린 영지라는 여자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고모에게 이끌려 순식간에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큰 길 옆에 곱창가게가 보여 무작정 들어갔다.
“대낮에 너랑 술을 마시긴 처음이네.”
“그러게.”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술부터 들이마셨다.  
“정하야, 그 아이 네 동생 맞다.”
“……”
나보다 스무 살 어린 아이라면 친동생보다는 차라리 사촌이나 조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 어린 아이가 내 혈육이라니… 엄마의 뜨악할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한국에 오고 얼마 안 돼서 태어난 아이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러니까 큰 오빠, 작은 오빠, 영지 모두 그 아이가 큰 오빠 아이라고 했지. 난 홧김에 네 엄마한테 네 아버지가 바람 폈다고 말해버렸고.”
“……”
“그런데 난 안 믿어.”
“뭘 말인가요?”
“그 아이. 요 몇 년 동안 쭉 관찰해봤는데 걘 네 사촌이야.”
고모의 말에 등줄기로 뭔가 지나갔다. 조카랍시고 고모는 어떤 심정으로 그 아이를 안아봤을까 싶었다. 고모도 의구심을 품은 것에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면이 있다는 데에 새삼 놀랐다.
“사촌이라면 어떤?…” 나는 설마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맞아. 정하 네가 의심하는 그거. 그동안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난 알아. 그 아인 하는 짓이 꼭 작은 오빨 닮았어.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고 짜증나…”
헉! 나는 기가 막힌 나머지 눈코입이 마비된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버진 누굴 위해 살았단 말인가. 아버진 도대체 엄마에게,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삼촌은, 삼촌은 어쩌면 이다지도 뻔뻔하단 말인가.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나는 삼촌을 향한 오래된 적개심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 인간은 말해도 몰라. 문제는 이번에 생겼다. 아마 큰 오빠 사고보상금으로 돈이 적어도 일억은 나올 거야. 그 돈을 작은 오빠랑 영지가 가로채려는 것 같아. 난 그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어. 네 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나와 작은 오빠 한국에 데려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 엄마 몰래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얼마나 피땀 흘렸는데. 오빠가 그렇게 그리워하던 엄마 죽었을 때에도 가보지 못하고. 이러다 벌 받을까  두려워…”
나를 주저앉힌 고모가 주절거렸다. 그제야 나는 고모가 삼촌네 ‘가족’들과 싸울 지원군으로 나를 불렀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없어진 세상에서 친자식인 나에게 일 억짜리 권리를 주려고. 돈 말이 나오자 나는 어제 아줌마가 건네준 쇼핑백속의 봉투가 생각났다.
“그런데도 고작 백만을 넣은 건가? 그렇게 많은 돈이 생길 거라면서?”
“돈을 넣었든? 지랄하고는! 작은 오빠 차, 큰 오빠가 중고로 사줬을걸. 그리고 영지가 사는 집 보증금도… 그런데 그 집엔 작은 오빠가 더 드나들었지. 큰 오빤 일하는 데서 먹고 자고 했으니. 개새끼.”
어느새 혀가 꼬부라진 고모는 육두문자를 뱉어냈고 나는 급하게 고모 입을 틀어막았다.
이 형제들은 낯선 땅에서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인가. 이것이 사람들이 그렇게도 말하던 코리안 드림인가. TV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상황에 나는 곱창을 씹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그 타이밍에는 하하하, 하고 크게 웃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때 아닌 웃음소리에 놀란 고모가 토끼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오른쪽 귀 밑의 턱관절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그냥 한번 소리가 난 것이겠거니 하고 지나쳤지만 그 뒤에 곱창을 씹을 때도 입을 벌릴 때도 턱관절에서 계속 소리가 났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신이 불편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데요?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버지가 안 죽었음 그냥 숨기려고 그랬어요?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마당에 이제 고향 같은 덴 올 일도 없었나보지? 아버지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고모네 식구들은 도대체 왜 이래?”
“미안하다, 정하야. 너에게도 네 엄마에게도 할 말이 없다. 네 엄마가 우리 가족에겐 정말 잘했는데…”
“그걸 알면 이렇게 살진 말았어야지. 다들 기생충이야? 왜 이러고 살아? 이제 와서 그 돈을 챙겨서 어쩌라고? 오년 전에 이미 우리랑 인연 끊을 생각 아니었어요?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고모라도 그러지 말았어야지!”
입을 벌릴 때마다 턱관절에서 딱딱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어떤 형체가 기어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불러대는 모종의 구호처럼 들려 나는 더 짜증이 났다. 나를 쳐다보던 고모가 갑자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어? 야! 그거 턱관절인데? 먹을 때 조심했어야지!”
“먹을 때? 아까 웃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고?”
“뭐 어쨌든! 너 그거 오래 간다. 내 친구도 턱관절인데 별 짓을 다 해도 그대로야. 수술할 정도는 아닌데 물리치료를 받아도 낫지를 않아. 웃기는 건 의사도 치료법을 잘 모른다는 거야. 수술하면 낫냐는 말에 의사가, 자기도 장담할 수 없대. 의사가! 말이 되냐? 병이 생겼는데 의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니. 후훗…”
고모의 말은 일부러 부풀려서 나에게 겁을 주려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고모, 그만해요!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릴…”
“심지어 턱관절을 계속 감당하며 사는 사람도 있더라. 잘못하면 턱이 빠지기도 해. 말도 못해. 그럴 땐 어딜 가면 되는 줄 알아? 치과가 아니라 정형외과야. 그런데 그것도 임시방편이다? 정하야, 어떻게 하냐? 그게 안 고쳐지면 너 시집 어떻게 가냐? 흑흑… 키스는 또 어떻게 하고…”
고모는 갑자기 키스타령을 하며 훌쩍거렸다. 고모가 그렇게 말하자 별안간 어금니 부근에 통증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뜻밖의 재앙에 나는 그만 목이 컥 막혔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대로, 앞으로도 입을 벌릴 때마다 턱관절에서 딱, 딱 소리가 나면 어떻게 사나, 턱이 떨어지고 말을 못 할 수도 있는데… 시집도 못 간다는데…
어느새 나는 엄마를 부르며 쿨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우는지도 몰랐다.
 

제4편

신발을 넣어줘


진희의 마음속에서는 안도감과 불안함이 수시로 줄다리기를 했다. 가끔 아래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눈을 감은 채 삼사초씩 가만히 숨을 참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라도 인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으로 위세를 표출하고 싶었다. 인호는 진희의 삐딱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벌쭉 웃기만 했다. 밤늦게 들어와서도 꼭 진희의 방문에 대고 잘 자라는 말을 던진 후 선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진희는 인호가 생각보다 붙임성이 좋고 성실한 아이라는 생각에 신경질적으로 감시의 끈을 풀 때가 있었다.

선희가 임신했다고 말했을 땐 등줄기로 차가운 것이 지나가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스물한 살 된 딸이 임신했다고 하면 어머니나 아버지는 뭐라고 할까… 진희는 일단 그 아이부터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호는 선희네와 얘기가 잘 끝나면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손주가 생길 것 같다고 말할 예정이었다. 엄마의 반응과 표정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결혼하라고 할지, 아이부터 낳으라고 할지, 헤어지라고 할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엄마 말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생겼던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니, 얘가 인호. 우리 언니, 이름은 진희야.”
진희는 뒤늦게 카페에 들어선 인호를 올려다보고는 머리만 까딱했다. 약속시간보다는 이르지만 인호가 한발 늦은 셈이었다. 진희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빼버렸다. 인호는 진희가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나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아니면 몸에 배인 습관 탓인지 꾸벅 하고 구십도 경례를 했다.
“앉아. 내가 선희보다 아홉 살 많으니 말 놓을게.”
“예!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인호가 멋쩍게 웃으면서 물었다.
호칭을 빨리 정하는 게 대화에 유리할 것이라 판단한 것 같은 수가 눈에 보여, 진희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응, 했다. 인호 앞에서 눈에 힘을 주는 것으로 ‘내 자식 잘못 건드렸다간 어디 두고 보자’는 식의 견결함을 드러냈다. 부모님이 출국하면서 함께 살던 할머니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후로는 선희랑 둘만 살았으니 그동안 유일한 보호자를 자처해온 탓이다.
‘나에게도 이런 누나가 있었다면 좀 더 사람같이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인호는 부러운 눈길로 선희를 흘깃 쳐다보았다.
“언니, 그러니까 우리…”
“누나! 죄송해요. 선희랑 저 사고 쳤습니다.”
인호는 박력 있게 나와야 된다는 생각에 선희의 말을 잘라버렸다. 진희는 알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순간 인호는 선희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고중을 중퇴하고 방황하던 인호에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선희라면 이번엔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선희나 진희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결혼으로 결론지어진다면… 인호는 결혼이 낯설었다. 부모에게서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매일 술에 취해 자식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인호에게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아이에게 책임감을 느끼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마치 자신이 살아갈 이유가 아이 때문인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정체 모를 집착의 끈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니?”
진희가 뭔가 말할 듯 말 듯 머뭇거리는 인호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언니, 좀 부드럽게 말해. 인호가 난 줄 알아?”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결혼? 아이는 낳을 거니? 너희 둘 아이 키울 준비는 돼있고? 동창이라지만 정식으로 사귄 것도 아니라며?”
아이를 어떻게, 누가 키울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언뜻 선희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회피했다.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진희 앞에서 좀 더 근사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남자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인호는 진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묻는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결혼한다. 아이를 낳는다. 헤어진다. 유산한다. 인호는 진희가 원하는 대답을 몰라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옆에서 간간이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선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아라.”
인호는 흠칫 놀랐다. 누구도 그에게 한 적 없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차사고로 돌아가시고 혼자 남았을 때 친척들은 ‘이 어린 것을 두고 어떻게…’ 하고 걱정하면서도 누구 하나 같이 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인호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남의집식구를 떠안아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는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때 인호는 열일곱 살이었고 고중입시를 앞두고 있었다. 엄마는 남편이 죽었는데도 한국에서 돈만 보내왔다. 친척들은 가끔씩 들려서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주거나 집 청소를 해주는 것으로 책임감과 죄책감을 한꺼번에 해결하려는듯 했다.
인호는 들어와서 살라는 진희의 말이 좋았다. 같이 살면서 이놈이 동생이랑 결혼해도 될지 지켜보겠다는 의도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언니! 들어와서 살라고? 내가 얘네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같이 살 거면 그렇게 해야지!”
“왜? 사귄 것도 아니라면서 시집은 가고 싶어? 일단 연애부터 해봐.”
선희와 진희가 눈싸움을 하며 자그맣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언니 성격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몰라서 그래? 날 자식처럼 굴면서… 얘한테까지 그러면 나 창피해서 못살아.”
“부모가 옆에 없으니 내가 네 보호자야. 아홉 살이면 강산이 서너 번은 변했을 나이차이야. 어머니나 아버지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인호 너는 일단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걸로 해. 언제 올 수 있어?”
진희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인호를 다그쳤다. 부모님이 이 소식을 안다면 당장 결혼부터 시키려 들겠지만 진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동생이 아이 때문에 결혼에 매이는게 싫었고 제대로 된 인연을 맺어주는 것이 이십대를 바쳐 보호자 노릇을 해온 언니로서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선희가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진희 너 때문에 한국에서 시름 놓고 일한다’고 하던 부모님의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언니! 내가 나갈 거야!”
진희가 도끼눈을 뜨고 목소리에 힘을 주는 선희를 노려보았다. 선희는 인호를 곁눈질하며 여전히 집을 나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면서도 결혼이란 단어는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진희는 그것으로 언니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어 내심 흐뭇했다.
선희와 진희를 번갈아보던 인호는 아웅다웅하는 모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이상하게 울컥했다. 외동인 자신으로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선희야, 내가 들어갈게.”
인호의 말에 진희가 그럼 그렇지 하는 식으로 선희를 째려보았다.
“지금 하는 일은 계속 할 거니?”
인호는 진희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형의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음식을 만드는 직업이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좀 더 근사한 직업을 구하기를 원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하고 있는 일이 즐겁기 때문에 인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주방보조요? 재밌어요. 이제 손에도 익었고.”
진희가 갑자기 인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인호는 진희의 눈빛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져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폈다.
“… 됐어. 선희는 당분간 미용실 일을 쉬게 할 거야. 네가 이런저런 역할을 잘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요.”
인호는 당연하다는 듯 선희에게 웃어보였다. 태어나지 말았을 걸 그랬다고 자책할 때가 있었는데,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듯한 설렘으로 묘한 자신감까지 생겼다. 부모가 없이도 가족을 만들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엄마에게는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늘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는 인호를 가슴 아프게 했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구체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짐작만 했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 이제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는 글렀으니 다정한 아들이라도 되고 싶었다. 고중 이학년 때, 담배 피다가 퇴학당한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엄마가 했던 절망적인 말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선생님이 부모를 모셔오라고 했지만 인호는 친척 중 그 누구에게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는 아이들만 다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학교가 지겨웠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을 만나거나 전화기를 통해 주눅이 든 엄마의 목소리가 건너올 때면 가끔 그 선택을 두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 사람을 만나는 날은 수요일이 적당했다. 가족 때문에 주말은 제외하고, 한 주가 시작되거나 끝날 때 즈음이면 다른 약속을 미루기가 난감했다. 진희는 일주일에 한번밖에 오지 않는 이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오로지 그 몇 시간을 위해 새로운 옷을 준비하고 조용한 음식점을 예약하기를 반복했다.
집을 나서는데 파랑 바탕에 흰 줄이 간 아디다스운동화가 눈에 띄었다. 선희가 가끔 신고 다니던 것과 같은 신발이었다. 현관에 슬리퍼 외엔 아무것도 두지 않는 진희는 요 며칠 인호의 신발을 발견할 때마다 집에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했다. 진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운동화를 신발장에 집어넣고 문을 나섰다.
오늘은 교외에 있는 한식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정갈하면서도 룸이 있는 가게에 대해 물었을 때 선배는 이년도 넘는 식당을 아직도 모르냐며 알려주었다. 진희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물증을 잡지 못해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는 언니였다.
수요일이면 늘 블루나 민트색 셔츠를 입고 다니는 그 사람이 좋았다. 입고 다니는 정장은 세련돼 보여서 멋있었고 들고 다니는 서류가방은 교양인의 표상인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타인을 배려하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 뿌듯했다. 그러나 때로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투정부리고 싶어져서 미안했다. 사랑한다고 고백한 순간 그 사람은 한 마리의 백조가 되어 진희에게로 날아왔다. 그 사람을 대놓고 자랑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감추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선희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걜 집에 들어와 살라고 했지.”
“뭐야? 결혼부터 시키는게 아니고?”
“고작 그런 사유로 결혼한다면 민정국이 폭발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한 짓이 있는데 동거로 해결이 되겠어? 부모님은 뭐래?”
“그 말은, 혹시 책임감? 책임질 일을 했다고 다들 결혼해요?”
진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발끈하자 남자는 금세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책임감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러게. 무슨 자격이 있어 그런 말을 할까? 바람이나 피는 주제에…”
“너 그따위로 말을 할래? 오늘 좀 재미없다?”
인호를 집에 들이고 나서 내내 찜찜했던 기분을 그 사람에게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진희는 입을 실룩거리다 말았다. 한주에 한번 겨우 가지는 만남을 다툼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보다 이년 넘게 만나온 사람을 자신의 입으로 불륜남 취급을 했다는 것에 충격 받았다. 사랑을 의심해본 적 없는 진희는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소스라쳤다. 그동안 교양 있는 척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척 냉소의 가면을 쓰고 산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나싶었다. 별 볼일 없는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인호가 음식 만드는 일이 재미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순간 마음속에 툭 하고 널빤지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 그때 인호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 전에 인호에게 집에 들어와 살라고 말해버렸기에 속물처럼 보이진 않을 것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도 기억났다.
식사가 끝나고 먼저 방문을 나서는데 가지런히 놓인 신발 두 쌍이 보였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진희는 오늘따라 브라운 색상의 구두 옆에 붙어있는 자신의 신발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신상이라며 갓 보내온 구두인데도 인터넷에서 파는 몇십원짜리처럼 보였다. 진희는 황망히 신발을 신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이따가 그 사람이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먼저 차 있는 데에 가 있기로 했다.
주차장 옆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진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잠시 남자를 지켜보았다. 제발 인호가 아니길 바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던지 남자가 누나라고 부르면서 다가왔고 선희에겐 비밀이라는 식으로 오른쪽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그 사람이 뒤따라 나오다가 진희와 인호를 보았지만 말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진희는 인호에게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애써 침착하며 차에 탔다. 인호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맑게 웃는 인호 앞에서 진희는 별안간 수치심을 느꼈다. 스물한 살 주제에 콘돔도 없이 섹스를 했다고 경멸의 눈빛을 보내면서 도도한척 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선희에 대한 책임감을 그런 방식으로 포장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현관에 들어서자 나갈 때 집어넣었던 인호의 신발이 다시 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똑같이 생긴 선희의 신발까지 옆에 놓여있었다. 방에서 나오던 선희가 신발을 집어넣으려는 진희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언닌 왜 남의 신발을 자꾸 집어넣는데?”
“너 그거 몰라?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야 진정한 가족이 된다?”
“뭔 난데없는 소릴…”
부럽고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는 말이 진희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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