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수필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 부국장. 동북아신문 편집위원. 수필/수기 등 수 십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제1편

하 얀 눈 위에 써보는 그 이름 어머니

 

  내가 태어난 고향은 지금도 길림시에서 버스로 서너 시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서란의 한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교통이 안 좋다 보니 도시에서 거의 하루 정도 걸리는 산골 동네다. 

  어릴 적 기억에 따르면 그때는 해마다 겨울이 오면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렸다. 내 추억 속의 고향 풍경은 차가운 눈보라에 마을길은 인적이 드문데 소 나 돼지들이 길 한복판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었다. 

  농한기엔 남정네들은 낮이면 소 썰매를 끌고 한해의 땔감을 장만하러 산에 들어가고 집에는 아낙네와 어린이들만이 남아있어 마을은 한적하기만 했다. 밤새 도적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이튿날 아낙네들은 마당의 눈을 치기에 여념 없다. 

  그때 나는 특별히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무척 좋아했다. 설이 다가올 때면 그 떡가루 같은 하얀 눈이 나의 눈앞을 부시게 했다. 

 우리 집 바로 옆은 논이라 문만 나서면 눈이 하얗게 뒤덮인 황야다. 그래서인지 눈보라 칠 때면 허허벌판을 끼고 있는 우리 집은 유달리 추웠다. 그러 나 나는 앞마당의 눈 위에서 외발썰매를 타며 신나게 놀았다. 반반한 옷 한 벌 없지만 두꺼운 솜바지에 헐렁한 솜신을 신고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말이다. 울 엄마는 연신 소리를 박박 지르신다. “이놈의 새끼, 너 때문에 못살 아, 감기 걸리면 또 돈 많이 팔겠다.” 

  엄마는 신발을 살 때마다 돈을 아껴 내년까지 신으라고 항상 한사이즈 큰 걸로 사곤 했다. 그래서 내가 신고 다니는 신발은 발보다 컸다. 그 헐렁한 솜신도 집안에 가만히 박혀있으라고 자꾸 감추어두는 바람에 자주 못 신었다.  

  그때 나는 개구쟁이였다. 하얀 눈이 내리면 나는 강아지처럼 반갑기만 했지만 울 엄마는 눈 치울 걱정부터 하시며 푸념이다. 아버지는 공사(지금의 향 정부) 마을이 있는 상점에 출근하느라 아침 일찍 낡아빠진 자전거를 끌고는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십여 리 눈길을 달리시곤 했다. 아버지가 출근하면 엄마는 바로 부엌으로 내려가 설거지를 하시는데 나는 이때라 싶어 다시 밖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북풍이 불고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에 나의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은 빨갛게 얼어들었지만 나는 그냥 눈 장난에 빠져버린다. 그럴 때면 울 엄마는 다시 나를 집에 몰아넣으려고 나와 입씨름한다. 

  끝까지 마당의 눈을 다 치운 다음 나는 엄마 손에 끌려 무작정 집안으로 끌려 들어온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엄마가 구워놓은 따끈따끈한 호떡이 나를 기다리곤 했다. 엄마는 요술쟁이 같았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쩌면 그땐 그렇게도 많은 눈이 내려 쌓였던지 그 영문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울 엄마는 하얀 한 줌의 재가 되어 이국 타향인 한국 인천 연안 해안가에 뿌려진 지도 3년이 된다. 눈같이 하얀 엄마의 골회가 눈앞에 안겨 오는 듯하다. 3년 전 어느 날 문득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 못난 아들놈을 보고 싶다며 오셨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나는 이 급작스러운 시련으로 소진되는 삶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이 무엇인지를 실감했다. 엄마는 고향이고 또 하얀 눈같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한량없는 일편단심의 분이시다. 아버지가 휴식하는 날이면 매서운 찬바람을 헤치고 남정네들과 함께 땔감을 하러 썰매를 끌고 산으로 향하던 울 엄마의 빨갛게 언 얼굴이 아직도 아련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자식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천신만고를 다 하셨고 자식들이 다 큰 어른이 되었어도 엄마는 여전히 우리들을 철부지 새끼사슴같이 가슴 깊이에 품고 계셨다. 

  그런데 이 불효자식은 돈 좀 더 벌어야겠다는, 좀 더 잘살아봐야겠다는 끝이 없는 욕심 때문에 돈만 쫓아다니고 있었고 나 스스로 뒤엉켜놓은 삶의 매듭만 풀어보려고 바둥대고 있었다. 다문 얼마라도 고향에서 밤낮 자식 걱정을 하며 가슴을 조이시는 엄마에 대해 따뜻한 사랑표현 한마디 제대로 못 한 나였다.  

  여기 한국의 하늘은 설이 되어도 추억속의 내 고향처럼 눈은 내리지 않는다. 이제라도 어머님이 잠들고 계시는 인천 바닷가에 술 한 잔을 뿌려보고 싶다. 쉬지 않는 파도의 춤과 갈매기의 소리가 희망과 용기를 주는 울 엄마의 목소리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부정적인 사고를 망망 바다에 던져버리고 항상 웃으며 인생을 맞이하라는 울 엄마의 부탁처럼.

지금도 설만 돌아오면 나는 은근히 하얀 눈이 내려주기만을 기다린다. 눈 안 내리는 이국 타향의 설날은 설 같은 기분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오늘은 설날 새벽, 울 엄마가 오랜만에 꿈에 나와서 아주 환하게 웃어주고는 사라진다. 나는 혹시 눈이 오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는 늘 시골 고향이 그립고 눈이 그립다. 아니 울 엄마가 더 그립다.

 

제2편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자
                                                              

  서둘러서 잘되는 일이 어디 있을까? 바쁘게 설치지 않아도 되는데, 예민하고 조급한 성격 때문에 나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잘 안 한다. 어지간히 아프지 않고는 병원에도 가지 않는 성격이다. 그동안 소소한 질환은 아내가 알아서 처치해주고 치료해줘서 건강관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중국에 가서 없는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각 종 행사와 친구들의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허리도 뻐근하고 피곤해지며 건강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출근 시간이 늦어서 급하게 설쳐대다가 허리가 삐끗하면서 펴지지 않았다. 신경이 질겁할 정도로 아파 나며 비명이 절로 나왔다.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허리 통증으로 움직일 수 없어 직장에 전화로 하루 휴가를 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좀 나은가 싶어서 병원에 가보려고 양손을 방바닥을 집고 엉덩이부터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다른 한 손은 벽을 짚으며 허리힘의 중심을 분산시켰다. 천천히 펴봤다. 다리가 저려나면서 허리가 물러 않는 것만 같았다. 나는 포기하고 다시 누웠다. 겨우겨우 벌벌 기며 진통제를 찾아먹고 다시 휴식을 취했다. 간신히 옷을 입고 가까운 척추 전문 병원으로 갔다.

  의사 선생님은 허리는 활과 같다고 했다. 활을 순간적으로 너무 세게 당기면 시위가 터지거나 활대가 부러진다는 것이었다. 몸을 너무 혹사해서 시술한 척추의 핵이 다시 흘러나와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정상으로 회복되는데 한 달 정도 걸리고, 재발도 잦은 부위이므로 될 수 있으면 푹 쉬라고 했다.

 척추 디스크는 허리 쪽에 있는 추간판이 돌출되거나 터져 나와 추간판 안의 수핵이라는 조직이 척추신경을 압박해 허리, 다리 등에 나타나는 질환이다. 추간판 탈출로 인한 척추신경 압박만으로 통증을 유발하지는 않으며 신경압박, 염증반응, 생화학적 영향, 혈관 관계의 이상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유발된다. 허리디스크의 주원인 중 하나는 오래 비틀어진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리 양쪽으로 쥐어짜는 듯한 통증, 일정 거리를 걸어가면 다리가 저리고 아파지며 쪼그리고 앉으면 증상이 완화되거나 없어지는 특징 등이 척추관 협착증의 주요 증상이다. 

 아내가 빨리 와서 밥이라도 좀 챙겨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국제 전화를 했다. 깜짝 놀란 아내는 비행기 표를 사는 대로 한국으로 오겠다고 했다. 귀찮을 정도로 건강을 챙기라는 아내에게 괜히 짜증도 내고 신경질을 부리곤 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평소에는 아내가 없어서 내 자유라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자랑하고 다녔지만, 움직일 수 없을 때야 아내의 소중함을 느꼈다. 

  움직일 수 없으니 화장실도 더욱 자주 가고 싶은 것 같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휴양하고 있으니, 가야 할 곳도 많이 생기고 할 일도 많이 떠오른다. 하루라도 빨리 나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약 상자를 옆에 끼고 뜨거운 찜질을 해가며 파스도 덕지덕지 붙였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 다쳤다고 자책하던 생각은 벌써 버려지고, 어느새 빨리 나아야 한다는 조급증을 내는 것을 보니 타고난 성격은 어쩔 수 없나보다. 피식 웃음이 나오며 허리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껴졌다.

 

▲ 한옥, 그 느낌, 자연을 말하다

 

 허리 통증이 완화된 것 같아서 두 다리에 의지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하지만 허리가 시큼해 오면서 한쪽 다리가 저려왔다. 급히 아픈 허리의 힘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이니 수월했다. 매일 걷고 움직이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는데 물 한 잔 마시러 가는 것도 고통스러울 줄이야. 당장 가고 싶은 곳 못 가고, 해야 할 일을 모두 다 못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인한 금전적, 시간적 손해와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끼치는 폐해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건강이든 인간관계든 간에 깨어지고 파열되기 전에 조심하고 배려할 일이다.

  사람 사이도 사소한 오해나 순간적인 감정에 치우쳐 관계가 순식간에 금이 가거나 깨어진다. 아무리 좋았던 사이라도 한번 깨어진 관계는 점점 골이 깊어지기 일쑤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나중에 그 골을 메우기 위해서는 열 배, 스무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분은 암 수술을 받고 "살아있는 자체가 행운이다"라고 말했다. "건강은 건강 할 때 지켜야 한다."는 철학이 생각났다. 나는 건강을 관리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돈만 보고 앞만 내달리다 보니 쌓이는 스트레스 때문, 또 끊지 못하는 술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자고 말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아픔을 시술로 봉합하고 좀 나아지니 이 몸뚱이가 또 그 주문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치매도 국가에서 지원해준다는 뉴스를 방송에서 본 기억이 있다. 의료보장이 너무 잘 되어 있어 나도 직장에서 4대 보험을 들어 의료보험 혜택을 보았지만 미리 아픔을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 때문에 병을 더 키운 게 안타까웠다. 

 인생길은 언제나 나 자신을 고달프게 한다. 일자리가 없어 전전긍긍할 때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겠다는 심정이다. 그런데 막상 취직하고 일을 하다 보면 각종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생각이 달라져 또 다른 일자리를 생각해본다. 사람의 마음 왜 이리 간사할까? 나는 이제 움직일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휴양하는 동안 소홀했던 나 자신의 건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아프면 참는 게 미덕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100세 시대에 최우선 사항이 건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고 병원에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제3편

  열쇠는 나의 행복
                                                          

 

  2015년, 늦겨울이었다. 장춘발 인천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나는 새벽 4시경에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탔다. 어젯밤부터 내리는 함박눈은 가로등이 내뿜는 주황불빛에 꽃잎처럼 흩어지며 수북이 쌓여만 갔다. 미끄러운 눈길에 택시는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어서야 공항에 도착 했다. 행여 비행기가 연기되지 않을 가하는 불안감에 마음을 졸이며 부랴부랴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아침 8시 50분쯤, 폭설로 인해 장춘 공항 활주로가 폐쇄되고 비행기가 이륙하기 힘들다는 방송 안내를 듣고 나는 속절없는 기다림에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밖에는 매서운 폭풍과 함께 눈보라는 점점 더 많이 쌓여갔고 결국 오늘 비행은 결항 된다는 방송에 나는 멘붕이 왔다. 

 십여 년의 한국 생활에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일을 하면서 정말 부지런하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으로 나에게 꿀맛 같은 휴식을 주고자 중국에서 설 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답답함에 나는 여행 가방을 다시 풀었다. 정연하게 정리된 선물꾸러미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옷가지들 사이에 눈에 익은 열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국의 집 열쇠가 보기 좋게 여행 가방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한국의 집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부랴부랴 호주머니를 뒤졌고 여행 가방 안에도 낱낱이 뒤져봤다. 그렇게 실종된 열쇠는 조기 치매 환자의 기억처럼 열쇠의 정체가 희미해지다 뚜렷해지기를 반복하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제는 몸도 성하지 않고 기억력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건망증 같기도 하다. 을씨년스러운 날씨같이 나의 마음도 좌절의 빛으로 막막하게 채색되었다. 집게손가락만 하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나의 손때가 묻은 열쇠다. 어쩌면 여태까지 중국의 집과 한국의 집, 이 두 열쇠가 나에게는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마법이라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는 소식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집에 갔다 오려고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겨우 콜택시를 불렀다. 많이 내린 눈으로 택시는 3시간이면 갈 거리를 5시간 넘게 지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는 넓은 녹지로 답답함이 없고 조망권은 물론 쾌적한 환경으로 조성된 보금자리다. 남은여생을 아무 탈 없이 여유자적하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집이다. 

  ‘딸각’자물쇠와 열쇠가 맞물리며 열리는 순간, 답답함이 사르르 녹으며 마음의 자유로움을 느껴졌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인생 문제가 모든 열쇠 소리처럼 명쾌하게 풀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랴?

  왕복으로 평소의 두 배가 넘는 택시비가 나왔으나 열쇠를 챙겼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편했다. 그때까지도 공항에는 직원들과 싸우는 사람, 항의하는 사람, 자는 사람, 먹는 사람들로 공항은 북적거리고 아수라장이다. 나는 그 와중에도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오후가 돼서야 눈은 완전히 멈췄고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었다.

  이방인이라는 편견 속에 벽돌로 쌓아 막은 마음의 집을 빗장으로 잠그고 살아오다가 겨우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세집에 들면서 마음을 열었다. 가까운 친구 하나도 없는 외국에서 일상의 외로움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라는 공포와 두려움에 매일 출퇴근을 해가면서 살았던 몇 해 동안 한국사회 살아가면서 많은 깨달음을 느꼈다. 내가 불안과 당황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이면서도 오직 소통만이 유일한 출구였다. 표현의 방식 때문에 오해로 상호간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지금은 순수와 열정으로 일하고 돌아와서는 따뜻한 샤워로 심신이 피곤한 몸을 풀어주는 아늑한 보금자리이고 바쁜 일상 속에 숨을 고를 수 있는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공간이다. 내가 바라는 뭔가를 상징적으로 열어줄 의지를 갖춰있고 주머니에서 떠나지 않는 열쇠였다.  

  1997년 한국이 IMF 터지던 해, 나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의 생활은 나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흔드는 혁명의 시작이었고, 생활방식부터 시작해 처음 접하는 외래어와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생소했다. 언어가 통하고 얼굴빛만 같은 것이 다행이라 할까? 한국에 와서 유일하게 느끼는 동질감이었다. 나는 많은 고민과 모순 속에서 살아오며 하나하나씩 한국의 정서에 맞춰 나가며 적응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정서와 생활 습관이 배어있던 것을 하나 둘 지워지며 나는 완전한 한국인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폭풍우와도 같은 IMF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사고방식도 많이 개선되었다. 2003년 한국 정부의 배려 정책으로 나는 불법체류자 꼬리를 지울 수 있었고 지금까지 취업 비자로 일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잘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낯익은 한국에서 가끔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 때가 있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가미되어 나도 모르게 불분명한 소속이 되어 있었다.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 매운 고추에 버무린 춘장처럼 고유의 한국의 맛도 아니고 중국의 맛도 아닌 그 무엇이 된 것이다.

  표현하기조차 힘든 복합적인 기형아로 되어가는 나를 보면서, 괴상한 내가 거울 앞에 서 있을 때가 있다. 달라진 나의 습관, 착각으로 구성된 이상야릇한 그림이 그려지게 진다. 나는 누구일까. 긴 세월 속에서 기형아가 되어버린 나의 실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내 영혼의 국적은 어디일까. 

  어쩌면 제 둥지를 지키지 못하고 오랫동안 사라졌던 집시였는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눈 너머로 배운 주방 기술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내 것 인양 휘두르고 있다. 나야말로 고향을 두고 방랑하는 집시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세월 속에서 나 자신의 실종은 내 삶에 대단한 사건이다. 격한 정체성의 혼돈을 거치며 오늘도 또 다른 나는 실종된‘나’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

  낙엽귀근(落葉歸根) 나의 종착역, 중국에 갈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열정을 쏟아내고 기분 좋은 인생을 여는 열쇠와 함께 열심히 뛰어 다닌다. 계획한 일이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에 또 다른 열쇠가 놓여 져 있다. ‘딸깍’열쇠는 명랑하고 명쾌하게 강한 울림으로 현관문이 나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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