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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한중작가포럼/2019 작품특집22] 최미성 시 '길' 외 9수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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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30  19: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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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최미성 약력: 중국 길림성 룡정시 출생. 중국 연변대 조선언어문학 학사, 석사 졸업. 한국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박사 수료. 윤동주문학상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동포문학>시부문 우수상 수상.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1.
 
 
삶의 어느 구간쯤일까
뭉텅 잘려
차에
배에
비행기에
실린다
 
상행선에서
하행선에서
임의로 잘려온 토막들
 
길이와 두께가 다른 인생
토막들이 모여
각을 잡는다
변을 이룬다
다각형 문화공간을 연출한다
 
좀 더 높이 서있어도
좀 더 많이 가졌어도
흩어지고 고립되면
한낱 토막일 뿐
 
풍파 많은 삶의 교차로는
두껍게 뭉쳐 흔들림에 버티고
구석 깊숙이 마음들이 이어져
허우적거리는 손들을 잡는다
 
경사진 곳에서 굴러 내리려는
내 삶의 한 단면 받쳐주고 당겨준
어깨 너머 무심한 듯
다정한 누군가의 인생 토막들
푸르른 나무여
반짝이는 불빛이여
토막들이 뭉쳐 나가는 걸음
길이길이 축복해다오.
 
(<동포문학>8)
 
 
 
2. 사과배를 모르는 당신에게
 
 
 
사과배가 궁금한 당신은
사과배가 궁금한가요
사과배를 노래하는 내가 궁금한가요
사과배를 궁금해하는 것과
사과배를 노래하는 나를 궁금해하는 것은
얼핏 달라보여도
참으로 닮아있어서
사과배 본 적 없다는 당신에게
사과배 닮은 나를 보여주기로 하지요
 
알 만한 사람들만 안다는 룡정
나의 고향이구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조선
나의 고국이래요
룡정 출신 윤동주할아버지는
사과배가 사과 아닌 배였음을 잘 아실터인데
룡정 사람 나는
사과배가 사과도 배도 아닌 줄 알았지요
사과배가 사과보다 배보다 맛있기만 했지요
 
윤동주할아버지와 나 사이 간극이지요
고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이유겠지요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가끔 중국어도 조선어도 서툴러요
가끔 중국어도 조선어도 참 잘해요
중국어를 익히느라 힘들었대요
조선어를 지키느라 애썼대요
나는 이곳 고국 땅에서
한국어를 익히느라 힘들었구요
중국어를 지키느라 애쓰지요
 
핑궈리(蘋果梨)라 말하고 사과배라 쓰는 사연이지요
고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이유겠지요
 
익숙해졌다 자부하는 한국어로
사과배도 배였음을 설명해보려는데
맛과 향기는 고향땅에 배어있고
사과 닮은 듯 배 닮은 듯
사과와 배라는 단어로밖에
사과배 모양이 형용이 안돼
침만 삼키다 우울해져요
 
사과 배 말고 사과배 먹고 싶은 시간이지요
모르는 당신과 나눠먹고 싶은 시간이지요.
 
(<동포문학>8)
 
 
 
3. 막히는 도로 정보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시간들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듯 휘청-합니다
 
편도 5차선이 생선마냥
도마 위에 놓입니다 뭉텅. 뭉텅.
1단지 2단지 3단지……
충혈된 눈빛들이
단지들을 훑고 지납니다
 
어깨 나란히 댄 승용차에서 각기 내려
담배를 맞대는 투기세력이
도로분양 호황기를 이끌어냅니다
 
택시 뒷좌석에서 생애 첫 보금자리 꿈이 깊던 아저씨는
미터기에서 수시로 치솟는 땅값을 통보 받으며
엉덩이를 자꾸만 들썩거립니다
 
비좁은 골목길을 뻥튀기 들고
첨벙첨벙 뛰어드는 아저씨의 목구멍은
도심의 소용돌이만큼 분주합니다
 
늦가을 찬바람같이 문 틈새를 비집는 불청객 앞에서
주택내부구조만큼 다양한 얼굴들 너머
훌쭉해진 부엌이 전화를 걸어옵니다
 
-밖에서 먹을까
-그래, 밖에서 먹자, 밖에 나가서,
먹자.
 
(<동포문학>6)
 
 
 
4. 어쩌다
 
 
 
어쩌다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검은 가닥 듬성한 백발머리 속에서
맑은 선율 한줄기 더듬어내는 할아버지
 
악기가게에서 다하지 못한 흥정의 아쉬움을
활에 얹어 어깨에서 끌어내리는 아주머니
 
삶의 밑층에 깊숙이 가라앉은 자신감을
펌프질하여 목구멍으로 끌어올리는 아저씨
 
매끈하게 조여지지 못한 활의 언어로
비비고 파고 거침없이 들어오는 이국 새댁
 
이들은 어쩌다 이 자리에 와있는가
나는 어쩌다 멍하니 이들을 마주보고 있는가
 
어쩔까 어쩐다 어쩌지
묶여있던 망설임들이 빠져나가는 길목에
꽃숲이 너울거린다
 
나라는 나무에도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동포문학>6)
 
 
 
5. 멜랑콜리
 
 
 
너비의 확장은 질주를 강요한다
뒤꽁무니 바짝 쫓는 무리를
이리저리 피해보아도 도로 위에는
그저 파도처럼 몰려오는 속도뿐
덜컹거리는 바퀴와 벗겨지는 신발 뒤꿈치가
한 눈 파는 마음을 철썩 후려친다
 
로켓마냥 엔진을 가동하는 고층빌딩
달로 별로 솟아오르는 창문들 클래식한
여백 사이로 은하수처럼 한강이 비껴 흐르고
허리 휘도록 거리의 리듬을 따는
나는 재즌지 록인지 팝인지의 멜로디
한 소절이 되어 밀물 썰물에 떠밀리고 휘말린다
 
빛처럼 지칠 줄 모르는 나의 무게를 짊어지고
짐꾼처럼 따라와 주던 헌신적인 그림자가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불빛들의 현란한 각도는
그림자의 감정을 바꾸어 놓았고
가라앉는 무게를 부둥켜안고 나는
그늘만 우거진 섬이 되어간다.
 
(<동포문학>6)
 
   
▲ "바다가 좋은 것은, 그냥 바다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6. 어떤 울음
 
 
 
문틈으로 새나오는 무지개 빛깔
 
누군가 그 문을 열었나보다
또 어떤 절실한 울음이 그 문을 열었나보다
 
제대로 울어본 자만 열수 있다는 문
제대로 울 줄 아는 자들만 모여 산다는 동네
 
나는 몇 년째 울고 있다
목놓아 엉엉 울어도 보고
입 틀어막고 오열하기도 했다
 
눈물이 그 문 열쇠란 것은 아는데
열쇠는 어떤 모양일까
길이나 굵기는 어느 정도며
톱날형일까 구멍형일까
그렇게 몇 년째 나는 울려고 했다
눈물의 모양새를 궁금해했다
 
싱거워, 문득 내 눈물을 핥아주던
누군가 말했다
장마철 내리는 비 같다 했다
절실한 울음은 모양새가 아니라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
맛이 필요했던 걸까
 
오감을 비틀며 울어보지만
열쇠가 되지 못한 눈물이
처량한 모습으로 돌아오군 한다
 
문 너머 동네 무지개동네
얼마나 더 울어봐야 그 문이 열릴까
 
언어를 몰라 더 절실했던
어릴 적 울음이 그립다.
 
(<연변일보>2017.8.4.)
 
 
 
7. 캠핑카
 
 
 
언제부턴가 집도
길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끝도 없이 길은 뻗어나가고
집 떠난 나그네 발걸음 정처 없어
허구한 날 가슴 시렸던 집이
따라나섰다 간단한 식솔만 거느린 채
 
갈 길 아득한 나그네 등 뒤에서
끼니를 재촉한다
쉬어가자 졸라댄다
귀여운 식솔들 짤랑거리며
 
유랑이면 어떻고
여행이면 어떠랴
 
나그네를 품어 안고
풍류를 울리는 집이 있다
그려둔 풍경 찾아 자연과 나란히
흔들리며 가는 식솔들이 있다.
 
(<연변문학>201711월호)
 
 
 
8. 빗방울
 
 
 
우산 같던 사람
우의 같던 사람
그들이 비워버린 자리에
구멍들이 뚫린다
 
바람 불면
더 시려오는 구멍들
발걸음은 길을 잃고
시선은 방향을 잃는다
 
엉겨붙는 구멍들은
하늘이 뚫어놓은 은빛함정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며
두 팔이 허우적거린다
삿대질도
목마른 부름도
자욱한 은빛에 묻힌다
 
속살을 삼켜버릴 구멍들
짙은 얼룩으로 메워질 구멍들
 
구멍들이 뚫린다.
 
(<연변문학>201711월호)
 
 
 
9. 기다림
 
 
 
어머니 손끝에서 반짝반짝 광내는
재떨이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어요
 
마음을 초조하게 흐트러놓는 것들
바깥으로 새나가면 시끄러워지는 것들
아버지가 간간이 털어낸 숱한 비밀들을
보드랍게 가루 내어 울타리 속에 모아두지요
 
구석 찾아 씩씩거리던 시뻘건 울화
허리 쉼 하는 틈에 튀어 나온 A, 그 불씨
불길로 번질까봐 서둘러 비벼 끄고
누렇게 색 바랜 몸 인파속에 묻히지요
 
협착증 앓는 허리 걱정하는
등받이의자 침대마음이 움푹 파여요
누런 냄새는 싫어도 아버지 인기척 나면
재떨이보다 먼저
재떨이보다 반짝이며
마중하고 싶어요
 
재떨이의 문은 오늘도 활짝 열려있어요
어디쯤에서
시커먼 땀방울 뚝뚝
흘리고 계신가요
아버지
아버지.
 
 
 
10. 강 너머 마을
 
 
 
처마 밑 둥지에
별들이 기어든다
겁 없이 산길에 뛰어들 것 같은
시골집 누룽지 누렁 빛
차는 저만치 강기슭 더듬어간다
강 너머 마을 사람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길들이 모두 닫혀있다
통금시간 놓치고
저편 하늘 머뭇거리는 별떼 한 무리
강은 한편으로 계속 꺾어든다
집집이 가마목엔
어떤 냄새 배어있을까
어느 집 아기 깨어
쉰 울음 울고 있지 않을까
 
노란 솥뚜껑
머리 위에 얹힌다
한 솥 가득 허기진 숨소리
바퀴를 지지누른다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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