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최미성 약력: 중국 길림성 룡정시 출생. 중국 연변대 조선언어문학 학사, 석사 졸업. 한국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박사 수료. 윤동주문학상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동포문학>시부문 우수상 수상.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1. 길  삶의 어느 구간쯤일까뭉텅 잘려차에배에비행기에실린다 상행선에서하행선에서임의로 잘려온 토막들 길이와 두께가 다른 인생토막들이 모여각을 잡는다변을 이룬다다각형 문화공간을 연출한다 좀 더 높이 서있어도좀 더 많이 가졌어도흩어지고 고립되면한낱 토막일 뿐 풍파 많은 삶의 교차로는두껍게 뭉쳐 흔들림에 버티고구석 깊숙이 마음들이 이어져허우적거리는 손들을 잡는다 경사진 곳에서 굴러 내리려는내 삶의 한 단면 받쳐주고 당겨준어깨 너머 무심한 듯다정한 누군가의 인생 토막들푸르른 나무여반짝이는 불빛이여토막들이 뭉쳐 나가는 걸음길이길이 축복해다오. (<동포문학>8호)   2. 사과배를 모르는 당신에게   사과배가 궁금한 당신은사과배가 궁금한가요사과배를 노래하는 내가 궁금한가요사과배를 궁금해하는 것과사과배를 노래하는 나를 궁금해하는 것은얼핏 달라보여도참으로 닮아있어서사과배 본 적 없다는 당신에게사과배 닮은 나를 보여주기로 하지요 알 만한 사람들만 안다는 룡정나의 고향이구요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조선나의 고국이래요룡정 출신 윤동주할아버지는사과배가 사과 아닌 배였음을 잘 아실터인데룡정 사람 나는사과배가 사과도 배도 아닌 줄 알았지요사과배가 사과보다 배보다 맛있기만 했지요 윤동주할아버지와 나 사이 간극이지요고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이유겠지요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가끔 중국어도 조선어도 서툴러요가끔 중국어도 조선어도 참 잘해요중국어를 익히느라 힘들었대요조선어를 지키느라 애썼대요나는 이곳 고국 땅에서한국어를 익히느라 힘들었구요중국어를 지키느라 애쓰지요 핑궈리(蘋果梨)라 말하고 사과배라 쓰는 사연이지요고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이유겠지요 익숙해졌다 자부하는 한국어로사과배도 배였음을 설명해보려는데맛과 향기는 고향땅에 배어있고사과 닮은 듯 배 닮은 듯사과와 배라는 단어로밖에사과배 모양이 형용이 안돼침만 삼키다 우울해져요 사과 배 말고 사과배 먹고 싶은 시간이지요모르는 당신과 나눠먹고 싶은 시간이지요. (<동포문학>8호)   3. 막히는 도로 정보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시간들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듯 휘청-합니다 편도 5차선이 생선마냥 도마 위에 놓입니다 뭉텅. 뭉텅.1단지 2단지 3단지……충혈된 눈빛들이단지들을 훑고 지납니다 어깨 나란히 댄 승용차에서 각기 내려 담배를 맞대는 투기세력이 도로분양 호황기를 이끌어냅니다 택시 뒷좌석에서 생애 첫 보금자리 꿈이 깊던 아저씨는 미터기에서 수시로 치솟는 땅값을 통보 받으며 엉덩이를 자꾸만 들썩거립니다 비좁은 골목길을 뻥튀기 들고 첨벙첨벙 뛰어드는 아저씨의 목구멍은 도심의 소용돌이만큼 분주합니다 늦가을 찬바람같이 문 틈새를 비집는 불청객 앞에서 주택내부구조만큼 다양한 얼굴들 너머훌쭉해진 부엌이 전화를 걸어옵니다 -밖에서 먹을까-그래, 밖에서 먹자, 밖에 나가서,먹자. (<동포문학>6호)   4. 어쩌다   어쩌다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검은 가닥 듬성한 백발머리 속에서맑은 선율 한줄기 더듬어내는 할아버지 악기가게에서 다하지 못한 흥정의 아쉬움을활에 얹어 어깨에서 끌어내리는 아주머니 삶의 밑층에 깊숙이 가라앉은 자신감을펌프질하여 목구멍으로 끌어올리는 아저씨 매끈하게 조여지지 못한 활의 언어로비비고 파고 거침없이 들어오는 이국 새댁 이들은 어쩌다 이 자리에 와있는가나는 어쩌다 멍하니 이들을 마주보고 있는가 어쩔까 어쩐다 어쩌지묶여있던 망설임들이 빠져나가는 길목에꽃숲이 너울거린다 나라는 나무에도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동포문학>6호)   5. 멜랑콜리   너비의 확장은 질주를 강요한다뒤꽁무니 바짝 쫓는 무리를이리저리 피해보아도 도로 위에는그저 파도처럼 몰려오는 속도뿐덜컹거리는 바퀴와 벗겨지는 신발 뒤꿈치가한 눈 파는 마음을 철썩 후려친다 로켓마냥 엔진을 가동하는 고층빌딩달로 별로 솟아오르는 창문들 클래식한여백 사이로 은하수처럼 한강이 비껴 흐르고허리 휘도록 거리의 리듬을 따는나는 재즌지 록인지 팝인지의 멜로디한 소절이 되어 밀물 썰물에 떠밀리고 휘말린다 빛처럼 지칠 줄 모르는 나의 무게를 짊어지고짐꾼처럼 따라와 주던 헌신적인 그림자가 있었다창밖으로 쏟아지는 불빛들의 현란한 각도는그림자의 감정을 바꾸어 놓았고가라앉는 무게를 부둥켜안고 나는그늘만 우거진 섬이 되어간다. (<동포문학>6호) 
▲ "바다가 좋은 것은, 그냥 바다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6. 어떤 울음    문틈으로 새나오는 무지개 빛깔 누군가 그 문을 열었나보다또 어떤 절실한 울음이 그 문을 열었나보다 제대로 울어본 자만 열수 있다는 문제대로 울 줄 아는 자들만 모여 산다는 동네 나는 몇 년째 울고 있다목놓아 엉엉 울어도 보고입 틀어막고 오열하기도 했다 눈물이 그 문 열쇠란 것은 아는데열쇠는 어떤 모양일까길이나 굵기는 어느 정도며톱날형일까 구멍형일까그렇게 몇 년째 나는 울려고 했다눈물의 모양새를 궁금해했다 싱거워, 문득 내 눈물을 핥아주던누군가 말했다장마철 내리는 비 같다 했다절실한 울음은 모양새가 아니라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맛이 필요했던 걸까 오감을 비틀며 울어보지만열쇠가 되지 못한 눈물이처량한 모습으로 돌아오군 한다 문 너머 동네 무지개동네얼마나 더 울어봐야 그 문이 열릴까 언어를 몰라 더 절실했던어릴 적 울음이 그립다. (<연변일보>2017.8.4.)   7. 캠핑카   언제부턴가 집도길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끝도 없이 길은 뻗어나가고집 떠난 나그네 발걸음 정처 없어허구한 날 가슴 시렸던 집이따라나섰다 간단한 식솔만 거느린 채 갈 길 아득한 나그네 등 뒤에서끼니를 재촉한다쉬어가자 졸라댄다귀여운 식솔들 짤랑거리며 유랑이면 어떻고여행이면 어떠랴 나그네를 품어 안고풍류를 울리는 집이 있다그려둔 풍경 찾아 자연과 나란히흔들리며 가는 식솔들이 있다. (<연변문학>2017년 11월호)   8. 빗방울   우산 같던 사람우의 같던 사람그들이 비워버린 자리에구멍들이 뚫린다 바람 불면더 시려오는 구멍들발걸음은 길을 잃고시선은 방향을 잃는다 엉겨붙는 구멍들은하늘이 뚫어놓은 은빛함정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며두 팔이 허우적거린다삿대질도목마른 부름도자욱한 은빛에 묻힌다 속살을 삼켜버릴 구멍들짙은 얼룩으로 메워질 구멍들 구멍들이 뚫린다. (<연변문학>2017년 11월호)   9. 기다림   어머니 손끝에서 반짝반짝 광내는재떨이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어요 마음을 초조하게 흐트러놓는 것들바깥으로 새나가면 시끄러워지는 것들아버지가 간간이 털어낸 숱한 비밀들을보드랍게 가루 내어 울타리 속에 모아두지요 구석 찾아 씩씩거리던 시뻘건 울화허리 쉼 하는 틈에 튀어 나온 A씨, 그 불씨불길로 번질까봐 서둘러 비벼 끄고누렇게 색 바랜 몸 인파속에 묻히지요 협착증 앓는 허리 걱정하는등받이의자 침대마음이 움푹 파여요누런 냄새는 싫어도 아버지 인기척 나면재떨이보다 먼저재떨이보다 반짝이며마중하고 싶어요 재떨이의 문은 오늘도 활짝 열려있어요어디쯤에서시커먼 땀방울 뚝뚝흘리고 계신가요아버지아버지.   10. 강 너머 마을    처마 밑 둥지에 별들이 기어든다 겁 없이 산길에 뛰어들 것 같은시골집 누룽지 누렁 빛 차는 저만치 강기슭 더듬어간다강 너머 마을 사람들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길들이 모두 닫혀있다 통금시간 놓치고저편 하늘 머뭇거리는 별떼 한 무리강은 한편으로 계속 꺾어든다집집이 가마목엔 어떤 냄새 배어있을까 어느 집 아기 깨어 쉰 울음 울고 있지 않을까  노란 솥뚜껑 머리 위에 얹힌다한 솥 가득 허기진 숨소리바퀴를 지지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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