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족 출신 장율 감독 영화 『경주』 評

▲ 이미옥 약력 : 중국 화룡시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학과 석·박사, 한국외국대학교 중문학과 박사후 연구원,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객원조교수.

[서울=동북아신문]  '죽음과 사랑의 뫼비우스' 를 쓴 중국동포 이미옥 박사의 평을 읽는 시간 가져봅니다.     <편집자 주>

 

0. 프롤로그 

영화 『경주』는 조선족 동포 장률 감독의 열 번째 작품이다. 장률 감독은 연변대학 중문학과 교수였다가 영화계로 입문했으며 작품이 세계 3대 영화제인 칸영화제, 베를린 국제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수차례 초청받고 각종 영화상을 받은 감독이다. 

영화 『경주』는 경주에 온 한 남자=주인공 최현(북경대학 교수, 박해일 역)과 우아한 외모와는 달리 엉뚱한 차집 주인(신민아 역)의 1박 2일의 만남을 그린 영화로 감독의 한국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1. 죽음의 序曲

 영화는 처음부터 복선을 그으며 시작된다. 그것도 죽음과 관계된다. 우선 경주역에 도착한 주인공이 처음 보게 된 노란 옷의 귀여운 아이와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여자가 불과 몇 시간 뒤에 자살한다. 이러한 죽음은 하루 종일, 1박2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주인공을 따라다닌다. 감독은 영화 곳곳에 관객이 인식할 수 있게 인간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인공의 이번 경주 여행 또한 죽음을 맞이한 한 선배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주인공 주변에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죽음들은 영화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말미에 폭주족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교통사고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8살 난 딸아이와 함께 자살한 모녀의 죽음은 엄연한 ‘자살’이고 선배 창희의 죽음은 타살도 자살도 아닌 마치 스님의 ‘입적’과도 같은 기이한 형태의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죽음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전개되고 영화 끝까지 죽음이 주인공 최현을 따라다니게 된다. 즉 어느 하루 삶에서 마주친 일상적이지 않은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주인공 최현은 일상적인 삶을 중지하고 경주를 방문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마치 죽음의 실마리를 일부 푼 사람처럼 경주를 떠나게 된다.

최현이 생각하건대, 이러한 죽음의 가장 큰 실마리는 7년 전 경주에서 본 ‘춘화春畵’였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장례식장에서도 추측만 난무한, 창희의 알고도 모를 사인死因이 바로 그 이유가 된다. 자살도 타살도 아닌 죽음. 스님의 입적과도 같은 그 처절하고 고요한 죽음이 정말 창희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면 그 죽음의 이유는 무엇보다 창희가 사랑했던 미모의 여인 - 창희 처 – 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결혼식도 생략한 채 서로에게 미친 듯이 빠져든 그 3년의 사랑이 한 사람의 배신으로 깨질 수밖에 없었다면, 사랑의 호르몬이 다 하고 남은 자리에 혼자만 우두커니 남겨진 남자한테는 삶 그 자체가 이미 무덤이었으리라. 사랑이 떠난 자리에서 이미 혼자 무덤을 만들기로 자처한 남자에게서 삶도 모든 의욕을 잃은 듯 저만큼씩 멀어져가고 결국 창희는 자살도 타살도 아닌 죽음 그곳으로 온전히 가버린 것이다. 그러니 창희의 죽음은 자살이냐 타살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 그것이 원인이었으며 미모의 여인에게 풍기는 그 ‘사랑의 비밀’을 찾기 위해 최현은 ‘미인’들을 만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최현이 가는 모든 곳에는 여인이 있고 그 여인들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 ‘미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 장률 중국조선족 영화감독

  2. 美人과 판도라의 상자  

경주의 관광안내소에서 주인공이 잠깐 마주친 첫 번째 안내원은 밝고 명랑한 미인이었으나 그녀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다. 삶에 대한 호기심과 단순함으로 가득한 그녀는 한 남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만큼의 독기는커녕 그런 세계는 전혀 경험치 못한 것 마냥 생기발랄함으로 가득 차 있다. 미인은 미인이되 삶과 죽음의 실마리를 풀어줄 수 없는 단순 미인이다. 최현은 반사적으로 과거를 더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두 번째 미인 – 최현의 과거 여인이었던 여진(윤진서 역)이 재빠르게 현재로 ‘소환’된다. 영화에서는 비록 짧게 등장했지만 윤진서가 연기한 이 ‘여진’의 비중은 단언컨대 여주인공 ‘윤희’ 못지않다. 그녀를 통해 주인공 최현은 삶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윤리적 성장’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최현을 계속 기다려 왔다는 듯 여진은 기다림의 상징인 ‘노란’ 원피스를 입고 경주驛에 재빨리 등장한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나타난 과거의 그녀는 여전히 새초롬하고 아름답지만 누가 봐도 불안하고 불행한 현재적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불행의 씨앗이 최현 자신임을 알게 되는 순간 최현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비로소 삶을 가로 질러온 죽음의 답을 얻게 된다. ‘사랑’은 ‘죽음’과 무려 같은 무게를 지니며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무섭게 그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몇 년 전 저지른 불장난으로 인해 어린 생명이 피지도 못하고 죽었고 – 낙태로 인한 - 한 여인이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 그 죄의 현장을 자신이 주도하였다는 사실은 친구 창희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태事態’이다. 친구의 죽음에선 단지 방관자로서 죽음을 목격했다면 이제 최현은 죄의 현장에서 ‘죽음’의 실행자로서 비로소 직접 죽음의 무게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최현 자신의 행동양식을 ‘수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사랑’의 깊고 깊은 무게를 알아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최현의 가치관 또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세 번째로 맞닥뜨리게 된 미인 윤희는 감독이 가장 공을 들여 창조한 여성 캐릭터임과 동시에 삶의 비밀을 알아 버린 최현의 진정한 ‘변화’를 판가름하는 시험대로서 역할하게 된다. 윤희는 단아하고 소박하며 한없이 수수해 보이지만 ‘경주의 여신’으로 불리며 주변 남자들의 마음을 전부 사로잡고 있다. 처음에 최현을 변태로 오인하였음에도 찻집 여주인의 침착한 자태를 잃지 않고 대한다. 그러다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자신들의 모임에 초대하며 종국에는 집에까지 데려와서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라고 묻는 등 천연덕스러움을 보여준다. 외적으로는 단아하고 정갈한 자태로 동양적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는 데도 서투르지 않다. 흥분한 박교수의 손을 꼭 잡으면서 잠재우고 최현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방문을 슬며시 열어 놓는 장면에서 그녀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녀 또한 죽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은 우울증으로 자살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죽음의 냄새에 최현이 알게 모르게 끌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최현에게 끌린 윤희는 남편과 귀가 닮았다는 이유로 최현에게서 죽은 남편의 흔적을 찾아보려 하지만 전혀 닮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조용히 방문을 열어둔 윤희 앞에서 최현은 엄청난 갈등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윤희의 집에 오기 전까지 최현은 단지 본능대로 움직였으므로 최현의 행동양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노래방에서 윤희 앞에서 브루스를 추고 그녀의 집에 쫓아오기까지 과정은 너무나 본능적이어서 최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끌림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음식점에서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한두 잔 취한 술과 그녀의 은근한 자태에 유혹되지 않을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과거 아니, 여행이 시작되기 하루 전의 최현이라 하더라도 백번도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으리라. 그러나 최현은 이제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삶의 비밀을 알아 버렸고 ‘사랑’과 ‘죽음’이 공존하는 보이지 않는 그 세계에서 죄의 씨앗이 먼 시간을 거쳐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임을 목도하고 체험했다. 이제 시험대 위에 놓여 진 최현은 윤희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다. 행동양식에 큰 변화를 이룬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어쩌면 한 사내의 ‘성장 드라마’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감독은 관객들이 이해 가능한 지점에서 점을 찍은 게 아니라, 한 발 더 아가서 줄임표와 물음표로 여운과 질문을 계속 남겨두고 있다.

 이제 접근법을 달리하여 영화 스토리가 아닌, 영화의 몇 가지 특징들을 통해 장률 감독의 문제의식에 접근하고자 한다. 

 

3. 무엇이면서 그 무엇도 아닌 것, 정체성의 혼종 

최현은 한국인이고 북경대학 교수라는 명확한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초반부터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무엇이라고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함 속에서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윤희가 무엇을 가르치냐고 물었을 때 ‘동북아 정치’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그의 전공은 다소 의외기도 하다. 최고 지식인의 신분을 갖고 있음에도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더욱 모호하다.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함에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거나 명문대 교수임에도 ‘학문은 똥’이라고 매도한다. 이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그 무엇이기도 한 최현의 정체성은 디아스포라의 그것에 가깝다. 이는 중국조선족 출신인 장률 감독의 디아스포라 의식이 주인공 최현한테 투사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전혀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가 북경대에서 동북아 정치를 가르치고 누가 물어보기 전에는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의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정체성의 혼종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런 혼종성은 언어, 문화적인 지향에도 두루 걸쳐 있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능통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중국인 아내를 두고 있고 중국차를 즐겨 마시며 일본 낫토를 좋아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디아스포라 인의 혼종성과 다른 한편 그가 지향하고 조망하는 정신적 세계가 한국도 중국도 아닌 동아시아라는 거시적인 위치에 있음으로 인해 더 폭넓은 시야와 정체성의 확보를 의미한다.

그러나 최현은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식인으로서의 모호한 정체성은 제쳐둔 채 ‘사랑’의 이름을 묻고 있다. 어쩌면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사랑’을 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성’이라는 성 정체성에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춘화와 미인을 쫓아가는 최현의 행적을 보면 그 하나만은 뚜렷해 보인다.

 

▲ 영화 '경주' 포스터

4. 불교적 세계관이 녹아든 경주 그리고 『경주』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국교로 승인되면서 더욱 발전되었고 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곳곳에 신라의 문화재와 불교문화의 문화재가 남아있다. 이처럼 경주는 천년 동안 신라의 역사와 국교였던 불교의 정신이 녹아든 공간으로 경주에서는 화려한 빌딩이나 우후죽순 늘어선 교회당 보다는 확실히 마당 넓은 찻집이나 푸릇푸릇한 왕릉이 더 잘 어울린다. 이런 공간에서 최현의 여행은 새로운 단위로서 시·공간의 분할점이 된다. ‘죽음’의 환기를 통해 시작된 짧은 일박 이일의 시간 안에 7년 전의 기억과 인물이 소환되고 최현의 내면을 구성하는 시간은 현재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채 7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7년 이라는 시간이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천 년의 역사가 담긴 경주의 시간에 비해서는 찰나이며 윤회를 반복하는 불교적 시간에 비추어 봤을 때도 짧고 짧은 시간이다. 또한 최현이 ‘업보’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찰라지만 그것을 얻기까지 7년이란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경주에서의 여행은 마치 무중력의 공간처럼 시간을 가로질러 있다.

최현은 찻집에서 스님들이 즐겨 마신다는 ‘황차’를 두 번이나 마신다. 두 번 마시는 사이에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첫 번째 마시고 났을 때 7년 전의 여정과 재회하게 된다. 번개처럼 왔다 사라진 여정과 불현듯 나타나서 점을 봐준 할아버지는 모두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기억과 환상 사이에 미묘하게 걸쳐 있는 인물들이다. 여정을 보내고 나서 돌아선 최현의 등 뒤로 절에서 치는 종소리가 길게 두 번 울리는 데, 이는 마치 종교적 계시가 주는 깨달음인 듯 사뭇 의미가 크다. 다시 ‘차집’에 와서 마시는 차는 처음의 차와는 다소 다르다. ‘차집’이라는 공간은 무엇보다 최현이 깨달음을 얻는 공간으로 작동하며 동시에 윤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으므로 또 새로운 인연과의 ‘업’을 생성, 테스트하는 시험대로서 중층적인 역할을 한다.

이처럼 주인공 최현이 세상을 보는 방식과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모두 ‘업보’, ‘윤회’라는 불교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장률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영화의 흐름과 지향점은 분명 불교적 세계관에 기대어 있다. 마지막 엔딩 곡, “텅 빈 마음으로 텅 빈 방을 보네, 텅 방안에는 텅 빈 니가 있다. 텅 빈 니 눈 속에는 텅 빈 내가 있네……”라는 「사랑」 의 노랫말은 가슴 깊은 곳을 울리고 치며 긴 여운을 남긴다.

 

5. 시·공간의 색을 비껴간 色 

신민아가 연기한 찻집 주인 윤희는 더없이 소박한 흰 옷을 입고 있다. 심지어 비에 옷이 젖었을 때조차 같은 옷으로 갈아입는데 그 친구 다연 또한 디자인은 다소 다르지만 흰 옷을 입고 있다. 이는 최현의 옷 색깔인 검은 색과 잘 조화를 이루지만 동시에 경주라는 지역의 소박하고 유서 깊은 공간성과 역사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을 여름으로 하고 있는 경주의 능은 정말이지 싱싱하고 아름다운 초록으로 스크린 안에서 빛이 나고 있다. 싱그러움으로 가득 한 무덤이라니, 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인물은 그 누구도 화려한 무늬나 다양한 색상의 옷을 고집하지 않는다. 이토록 소박한 주인공들의 의상 색상은 무채색에 가까운 것이지만 흰색은 검은색과 조화되고 초록은 푸른 생명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색을 드러내지 않은 무채색 속에는 그러나 제거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色’이 도사리고 있다. 오히려 절제된 무채색으로 인하여 억압된 ‘色’의 욕망은 더 커진다. 그걸 대변이라도 하듯 왕릉은 죽은 자의 무덤이지만 초록으로 뒤덮인 봉긋한 분묘는 무척이나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왕릉 사이에서 키스하는 교복 옷차림의 남녀 커플과 그 사이를 천진난만하게 가로질러가는 한 무리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모두 말할 수 없는 원시 생명력이 넘친다.

저 들어가도 돼요?. 능에 누워서 외치는 윤희나 맞은 편 능에 같은 자세로 누운 최윤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존재하지만 이 장면은 오히려 한 방에서 윤희가 최윤의 귀를 만지는 장면보다 더 에로틱하다. 죽음과 사랑, 인간에게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본능이 동시에 존재한다. 타나토스는 죽음에 대한 본능이며 파괴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두 에너지는 균형을 유지할 때 그 생명력은 극대화 될 수 있다. 왕릉은 그 둘을 공존케 하는 매개물로서 윤희와 최현사이에 항상 가로놓여있다. 

이 영화는 이처럼 죽음과 사랑, 욕망과 깨달음 사이에서 한평생 길항하는 인간 본연의 色을 절제된 색의 미학으로 조용하고도 강열하게 스케치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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