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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화순]3.1운동 100주년 즈음, '조선혁명군 부사령 박대호'를 추억하여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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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9  0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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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화순 약력: 중국 심양 소가툰 출생. kbs방송국에 수필 다수 발표, 우수상과 장려상 여러 번 수상, 특집에도 당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  머리글
 
올해는 뜻 깊은 한해이다. 3.1 운동이 일어 난지 100 주년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 된지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100여년 전에 일본은 조선땅을 탐내 침략전쟁을 발동했으며 또는 조선을 통하여 대륙을 진출하기 위하여 별아별 짓을 다 벌이었다. 일본은 중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전 하면서 조선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905년에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약하고, 1907년에는 조선의 군대를 없앴으며 2년 뒤에는 감옥사법을 일본에게 인계했다.
 
이것이 무슨 정부고 국가인가. 껍데기만 있는 국가는 1910년 9월에 완전히 일본에게 빼앗겼다. 그로부터 한민족은 말도 못하게 억눌려 살았다. 고급 기술 습득도 박탈당하고 말았고,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모든 분야를 일본놈들이 독점하다 보니 조선의 백성들은 살길이 없었다. 대다수 농민들이 소작농이었지만으로 좀 괜찮게 살았다 하는 사람도 생활난으로 만주동북삼성 등지로 유랑의 길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1차 대전이 끝나면서 고종황제의 승으로  한민족의 운명은 한민족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였다. 그런데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어떤 일본인이 고종황제를  “독살”하였다. 이때 민족의 분노를 참다못해 민족대표 33인이 3월 1일 정오를 지나서 2시에 탑골공원(구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를 계기로, 놀라운 것은 그후 집회수가 1500회, 참가 인원이 202만명, 사망자가 7500명, 부상자가 1600명, 피체포자가 4500명이 되었고, 소각 당한 교회가 47개, 학교가 2개, 그리고 민가가 718채가 불에 타 버렸다.
 
밖으로 전혀 나오지 못하게 되였던 여대학생들은 “죽어도 좋다! 나라만 되찾을 수만 있으면 된다!”고 부르짖었다. 유관순 언니를 비롯한 2000명도 집회 도중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이리하여 나라를 찾고자 하는 원동력이 바야흐로 생겨났다. 3.1운동의 영향력은 점차 미국, 중국, 일본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60년대 붉은기 아래서 성장한 나는 매년 3월 1일이 닥쳐오면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되는 분을 한번 더 생각 하게 된다. 내가 소학교 3학년에 다닐 때의 일이다. 매주 월요일 정우를 지나서 첫 시간이 바로 주회 시간이었다. 이 시간을 통하여 최광석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민족, 조선 나라를 구하려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영용하게 희생된 선열들의 이야기이며, 박사령관의 가족이 일본 놈들에게 너무 비참하게 죽은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뿐만 아니라 박씨의 씨알머리를 없애겠다며 그의 친척들한테도 눈에 독을 올려 총칼을 겨누었던 일본 놈들의 만행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선생님의 진실한 강의를 열심히 귀담아 듣고 있던 우리들의 작은 얼굴들은 어느덧 눈물 바다가 되었었다.
 
방학하고 집에 돌아 왔는데도 그냥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흑흑 소리까지 나오면서 울음을 좀처럼 끊어 지질 않았다. 나와 마주친 어머님께서는 깜작 놀라시며 물어 보셨다. “왜, 왜? 너 어디 아프니?”  나는 그제야 선생님께서 들은 이야기를 어머님께 죄다 말씀 드렸다. 어머님께서는 “오늘 선생님이 말씀한 그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의 할아버지란다”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 그 시기부터 우리 가문에 이렇게 휼륭한 분이 계셨다는 것을 알고 가슴 속에 자부심을 갖고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기회를 빌어 껍데기만 있던 조선이란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사랑하는 가족들도 나라에 바치고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돌아가신 나의 친할아버지, 박인호의 육촌동생 박대호 할아버지를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조선혁명군 부 사령–박대호
 

박대호(朴大浩) 의 자는 상춘(相春), 호는 춘하(春河  )이며, 별명은 대호(大虎,大豪,大镐) 이다. 한시기에는 박청암(朴青岩) 이라고 하였다.
 
박대호는 1895년 조선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고평동의 한 농민가정 에서 태여났다. 4형제중의 셋째로 키가 크고 몸집이 장하고 눈섭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하여 강직한 성격과 패기가 흘러 넘쳤다. 그는 어려서 학당에서 글을 배우고 한자를 익혔다. 그의 청소년시기는 조선이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되던 때였다.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은 독립투사 유지 인사들은 항일의 기치를 들고 도처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초 박대호의 부친은 전 가정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료녕성 관전현 보달원 고령지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압록강을 건너 관전,환인, 집안, 흥경 등지에 이주해온 조선사람이 3만여명이나 달하였다. 이해 3월1일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폭발 후 중국 환인현, 흥경, 룡정에서 3.1운동을 지지하는 반일집회를 가졌다. 박대호도 황인, 관전 반일집회에 흰옷을 입고 적극적으로 성원에 나섰다. 그는 이 반일집회에 활동하던 중 일제경찰에 발견되어 《독립사상의 고취자》란 죄명을 쓰고 20일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동생과 사회 각계 애국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석방되었다.
 
1919년5월 박대호는 집을 떠나 일찍 소문을 들어오던 최 시흥이 영솔한 천마신대(天摩山队) 독립군을 찾아가 총가목을 잡았다. 항일투쟁 중에서 철마병영(铁马兵营), 또는 천마(天摩)별영으로 불리워지던 부대는 가장 용맹을 날리던 부대이다. 이 부대는 원래 3.1운동 후 최시흥(崔时兴), 최지풍(崔志丰), 박응백(朴应伯) 등 수십 명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였던 천마산대(天摩山队)였는데, 그 명칭은 부대가 처음 평안북도의 의주, 귀성, 삭주 3개 군 접명에 있는 천마산에서 편성되고 또 천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 하였기 때문에 천마산대라 한다. 박대호는 천마산독립군부대를 따라 일제놈들을 타격하고 적과 싸우는 기예를 닦았다. 그는 전투때마다 뛰어나게 적들과 싸웠다. 독립운동가 리회영, 리동녕 등은 그 당시 중국 류하현 고산자에 신흥무관학교를 설치하여 많은 청년 항일투쟁인재를 배양 하였다. 김좌진장군은 왕청현 서대파 사관 연성소를 설립하고 우수한 사관 생을 배출하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큰 성과를 취득하였다. 량세봉도 천마산 독립군부대에서 항일활동을 하고 있었다.
 
1920년 천마산 독립군부대는 첩첩한 적의 포위를 돌파하고 오동진이 영솔하는 대한광복군총영과 합병하여 박대호는 소대장으로 입명되었다. 후에 륙군 주만참의부에서 제5중대 대장 겸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였다. 이 기간 박대호는 량세봉과 함께 압록강 량안의 국경선에서 활약하면서 일제의 군부와 경찰서를 빈번히 습격하였다.  박대호 중대장은 부하를 영솔하여 관전, 황인, 신빈, 홍화 집안 등 지로 다니면서 령활한 유격전술로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고 교통을 파괴 차단하고 통신 연락선을 파괴하였다.
 
최시흥은 천마산 별영장이다. 최시흥은 1923년 중국 림강에서 중국 관형에게 불법 감금 되였다가 일본측에 넘겨져 악형을 당하게 되였으며 1925년3월 12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22년8월30일 환인현 마권자에서 독립단체, 서로군정서, 대한 독립단, 한교회, 대한광복단, 대한정의군, 대한광복총열, 평북 독판부, 통군부대표 등 8개 단체 71명이 참석하에 남만의 통일기구 통의부(统一府)를 설립하게 되였고 후 전덕원이 1923년 2월 환인현대황구에서 따로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1928년9월 길림 교구 신안둔에서 정의부(正义府)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参义府) 각 대표가 모여 장시기의 협상을 거쳐 국민부(国民府)를 구성하였다.
 
현익철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리웅이 사령관으로 량세봉이 제1중대장 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20일 국민부는 제1차중앙회의를 소집하고 리웅을 지휘부 총사령으로 량세봉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였다. 12월에 민족의 유일한 당조직 연맹을 조선혁명당으로 재칭하였으며 혁명군을 조선혁명군으로 개편하였다. 국민부와 중앙위원회는 형세에 비추어 료녕성 신빈현 왕청문으로 옮기여 새로운 항일투쟁의 길을 모색하였다.
 
1931년9월 18일 일본제국주의가 9.18사변을 일으키고 동북3성을 침략하였다. 1931년12월19일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중앙이 9.18사변에 대처하기 위하여 신빈현하북 서세명집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있을 때 밀정에게 탈로 되어 일본경찰들이 포위하여 중앙간부 리호원, 장세용, 조선혁명군 사령 김보안 등 10여명 간부들이 체포 되였다. 그리하여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조직은 엄중한 타격을 받았다.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에서는 이 위급 한 시국에 당면하여 긴급중앙회의를 소집하여 량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김학규를 참모장으로 박대호는 조선혁명군제1로군 사령관으로, 한검추를 제2로군 사령관으로, 조화선을 제3로군 사령관으로, 최윤규을 제4로군 사령관으로, 그리고 정광배를 제5로군 사령관으로 선거하고, 고이허는 조선혁명당 주석으로, 리상관을 재정부 부장, 홍심원을 상해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박윤걸을 총사령부 비서로 임명하였다.
 
   
▲ 박대호 사진, 세월의 흔적처럼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1932년4월21일 동변도 보안사령부 제1퇀 당취오는 비밀리에 동변도 각 현의 군정요원들로 하여금 항일봉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동북군 수뇌인 장학량의 지지하에 당취오,  왕육문, 곽정산 등 30여명은 환인현 소학교에서 “료녕구 국위원회 군사위원회”와 “료녕민중항일 자위군총사령부”를 설립하였다. 조선혁명군 총사령 량세봉은 새로운 항일투쟁의 국면을 개척하기 위하여 료녕민중항일 지위군 총사령 당취오사령을 만나 연합하여 공동히 항일 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당취오 사령은 조선혁명군 제1로군 박대호의 부대는 료녕민중가위군 제1로군 당옥진 부대의 특무대로, 조선혁명군 제1로군 한검추의 부대는 료녕민중자위군 제16로군 손수암부대의 특무대로, 조선혁명군 제3로군 조화선부대는 료녕민중자위군 제6로군 리춘윤 부대에, 조선혁명군 제4로군 최윤구 부대는 제5로군 장종주부대의 특무대로, 조선혁명군 제5로군 정광배 부대는 료녕민중 자위군 제18로군 림진창부대의 특무대로 재편성 되었으며 조선혁명군의 기타 각 소대로 료녕민중자위군 각 급 조직에 재편성되었다. 4월29일 량세봉 사령은 참모장 김학규를 대표로 파견하여 당취오 사령과 협상하여 《중조 두 민족연합항일투쟁협의》를 체결하였다.
 
1932년9월 상순 조선혁명군 제1로군 박대호사령은 료녕민중자위 군당옥진부대의 특무대로 편성되어 관전현 우모오를 포위 공격하였다. 우모오는 환인현과 관전현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지세가 복잡하였다. 이곳은 괴뢰 압록강지구 사령관 서문해의 거점이였는데 8개 련의 근 1000명이나 되는 괴뢰군과 일본군 나까이지로의 한개 중대가 주둔해있었다.
 
9월7일 새벽 우모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박대호가 이끄는 조선혁명군 특무대가 기세당당하게 우모오로 진격하였다. 대도회부대를 이끄는 동술선과 협동작전하여 괴뢰군과 시가전을 벌리였다. 박대호는 돌격대를 이솔하여 우모로거리로 돌격하여 포화속에서 적들과 육박전이 벌어졌고 적들의 시체는 여기저기에 너부러졌다. 료녕민중 자위군 당옥진, 장종주 사령이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니 전사들은 사기가 더욱 높았다. 괴뢰군서문해는 황급히 말을 타고 도주하였고 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적들은 괴뢰군 3개련과 일군 2개 중대가 산포, 박격포, 경,중, 기관총 등 무기를 앞세우고 우모오로 증원해 왔으며 봉성석두성에 주둔해 있던 괴로군 600명도 증원부대로 파견했다. 료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 특무대는 치열한 격전끝에 일본군과 괴뢰군 이 겹겹한 포위를 뚫고 감천령 방어지로 철퇴하였다.  조선혁명군 특무대는 료녕민중자위군과 신빈, 통화, 류하, 무순, 청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용감히 싸우면서 허다한 전과를 거두었다.
 
1933년1월 량세봉 총사령은 신빈현 왕청문 남의수골에서 조선혁명군 골간회의를 소집하였다. 항일투쟁의 실정에 비추어 회의에서는 조선혁명군 번호를 회복하기로 결정하고 량세봉이 총사령원을 박대호가 부총사령원을 담임하기로 결정하고 조선혁명군 제3지휘부 지휘장으로 임명되었다. 4월 위만봉천성 경비사령부 사령관 우지산이 위만군제1부를 인솔하여 산성진 에 주둔하였다. 그놈들은 일본군의 감독과 인솔하에 료동일대의 항일무장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박대호는 량세봉 총사령의 명령에 의해 력량을 보존하면서 적들을 영활하게 타격하기 위해 대오를 료동지구 에서 철퇴시키고 집안현 쌍분자, 문자구, 마의촌 로령, 림강현 쌍산자 일대의 국경선에서 활동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적의 경철소등을 습격하고 일분 골간대원들은 동홍, 자성, 만포, 강계, 초신, 덕천, 평양등 일대에 드나들면서 반일활동을 빈번하게 전개하여 적들을 습격하고 무기를 로획하였다.
 
1933년에 조선 총독부 경무국에서 편집한 《조선내부에 조선혁명 군비 적이 침입한 차수가 10차에서 142인차에 달한다.》라고 기재되었다. 이로 보아 박대호사령이 이끄는 조선혁명군 제3지휘부의 항일활동이 얼마나 활발히 전개되었는가를  알수 있다.
 
박대호의 맏형과 둘째형 가정은 관전현 보달원 고량지에서 1년간 살다가 환인현상전자로 이사하였다. 박대호의 동생 박영호의 가정은 고령지에서 생활하면서 박대호가 항일대오에 투신한후 박영호가 집에서 두 집 살림을 돌보아주면서 형님의 항일투쟁운동을 전력 지지하였다.
 
일본 동변도 특별공작부는 변절자 정만기, 박수림 등 놈들이 한밤중에 박영호집에 기여 들어 가족을 통하여 박대호사령을 투항하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놈들은 온 가족에게 형벌을 들이대면서 박대호의 활동거점을 대라고 울러 메였다. 악형 앞에서 온 가족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놈들은 《두고보자》 하면서 어름장을 놓고는 돌아가 버렸다. 이에 불안한 예감이 든 박영호는 온 집식구들을 데리고 박대호형이 있는 험한 심산밀림으로 찾아갔다. 박대호는 량세봉 등 조선혁명군간부들과 상황을 보고하고 박영호를 조선혁명군 호위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어 구치적으로는 사령부가족들의 생활을 안치하고 부대를 따라 전이하고 안전조치를 댔다. 박영호는 총가목을 쥐고 조선혁명군 가족을 보살피기에 시작하였다.
 
1934년 왜놈들은 남만지대에서 《치안숙정》을 전개하면서 모조리 죽이고 불사르고 빼앗는 《3광》정책을 잔혹하게 실행하면서 전면적인 대토벌, 대도살을 진행하였고 많은 밀정들을 도처에 파견하여 조선혁명군을 소멸하려고 날뛰었다. 박대호 부사령은 료녕민중자위군 장종주 부대와 연합하여 하로하, 사첨자에서 온 일본군 100여명 외뢰군 200여명과 쌍수동에서 치렬한 격전을 벌려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안기였다.
 
박영호소대장은 조선혁명군가족을 전이하면서 각별히 박대호의 맏며느리를 보살피였다. 그녀는 임신 막달이 되여 행동이 불편하여 전이중 띠쬬즈에서 부대가족이 머물기로 하였다. 밤중에 괴뢰군과 경찰 몇 놈이 통역을 데리고 띠쬬즈를 돌연 습격하면서 포위해왔다. 박영호소대장과 부대가족들이 몽땅 붙잡히고 말았다. 놈들은 박영호소대장을 나무에 묶어놓았다. 이때 박영호 소대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부대가족을 거느리는 독립군 간부다. 죽일테면 나를 죽여라! 부녀자들과 애들은 무고하다. 너희들도 가족이 있지 않느냐. 그들을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절대 그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왜놈들은 박영호의 태도가 견결한 것을 보고 더 말하지 못하게 총살해버렸다. 그리고 막달이 된 박대호 맏며느리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박대호의 장자 박윤희, 둘째 박윤규를 끈으로 묶어 경철서로 압송하였다. 왜놈들은 부녀자와 애들을 몽땅 살해하려 하였다. 이때 왜놈의 통역인 장모씨가 그래도 인간성이 좀 있던지 왜경에게 사정하였다. “군인들이 반일하는 데는 죄가 있겠지만 부녀자와 애들은 송아지와 같아 끄는 데로 갈수밖에 없지요. 그들이 뭘 알겠습니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사정을 좀 봐주세요.” 그러자 왜경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하였다. 박윤희, 박윤구 두 형제는 부녀와 애들을 데리고 소추피구에서 환인 북쪽 상전자에 자리잡고 사는 큰아버지네 댁에 밤길을 헤치고 의탁하러 갔다. 이렇게 되여 집식구는 토벌을 면하고 후손이 남게 되였다.
 
1934년9월 왜놈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 량세봉과 박대호, 최윤구, 장명도 등 조선혁명군을 잡으려고 가진 음모를 다 꾸몄다.  조선혁군에서 활동하던 박창해가 일제에게 변절하자 일제는 임무를 박창해에게 맡기고 거액을 내 많은 변절자를 매수하였다. 9월19일 량세봉 총사령은 왕동양 변절자에게 암살되었다. 이에 조선혁명군 총사령은 김활이 선거 되었고 박대호는 부총사령으로 임명되고 혁명군정부 범무 부장으로 선거되었다.
왜놈들은 소탕을 가속화하였으며 잔혹하게 《3광》정책을 실행하였다. 왜놈들은 《동변도 특별사업부》를 설치하고 간첩활동을 창궐하게 진행하였다. 조선혁명군간부들은 선후로 체포되고 변절하게 되여 조선혁명 군 내부의 정치와 군사, 경제상에서 극도로 곤난하게 되었다. 이에 내부에서는 의지가 박약한 투항파들과 박대호, 최윤구, 장명도 등 대표로 하는 동북 항일 련군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끝까지 진행하려는 사람들 간의 모순이 치열하게 존재했다.
 
1937년 봄, 동북 항일련군 제1군단의 간부와 조선혁명군간부가 환인현 쌍수하자 대황구 밀영에서 연속 회의를 소집하고 연합 항일문제들을 연구하여 쌍방이 공동의 인식을 갖게 되였다. 11월 박대호, 최윤구는 60여명의 조선혁명군을 인솔하여 환인현 요전수구 밀영에서 동북 항일련군 제1군단과 연합하였다. 박대호와 그가 인솔한 대오는 드디어 량세봉 총 사령원의 생전 염원을 실현하였다.
 
그 후 동북항일련군 총사령 양정우이 최윤구를 동북 항일련군 제1로군 교도려 참모장을 임명하였다. 최윤구 참모장은 왜놈들과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는 1938년12월27일 길림성 화전자 홍석라자  이지선골에서 왜놈과 싸우다 희생되었다. 박대호부 사령은 장기간 전쟁의 포화속에서 악전고투 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며 많은 질병을 얻게 돼 더는 전투를 직접 지휘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집안, 통화, 무송 등지와 안도 이도백하의 심산밀림 속에서 생활하면서 1934년까지 계속 지하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런데 변절자의 밀고로 무송현 산굴 밀영에서 불행하게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무송현 감옥에 갇히게 되였고 후에는 안도현 명월진 태평촌에 있는 반일분자 수용소로 이동되어 강제로동을 하였다.
 
그는 감옥생활을 하던 중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박대호는 옥중에서 너무 잔혹한 형벌에 시달리여 신체가 몹시 허약해져 1947년11월15일에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였다. 현재 그의 묘지는 환인현상전자 남산에 모셔져 있다.
 
24년간 항일투쟁의 혁명생애를 지낸 박대호 부 사령은 남만지대에서 일제와 싸우면서 위풍을 떨친 장군이다. 그는 혁명 투쟁 중에서 두번이나 체포되었지만 혁명의지를 꺽지 않았다.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한 항일투사 박대호의 영웅적 사적은 료동지대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이상, 박대호의 손자 박홍민 진술)
 
 
       결속어
                                   
100년전에 3.1운동이 일어났으며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미국 임정부가 수립 된지 100주년을 앞두고 오늘 나는 우리의 민족을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 날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 대한민국, 자랑할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부르고 수많은 혁명열사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자유의 나라 행복한 대한민국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한번 더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된다.
 
우리들이 세계 어디나를 막론하고 뿌리박고 살고 있는 곳마다 자부심과 긍지감을 안고 한 마음으로 대대손손이 한민족의 얼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그리하여 한번 더 생각해 본다. 희생한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천추만대 영원히 변함없이 우리 한민족의 기개를 만천하에 떨치며 무궁한 발전에 온 힘을 다 쏟을 것을 결의한다.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희생한 선열들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 드린다.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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