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작가포럼/2019 작품특집 32] 조성래의 시 '단동 안개' 외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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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작가포럼/2019 작품특집 32] 조성래의 시 '단동 안개' 외9수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9.02.0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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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박명호]목단강牧丹江에서 동태가 된 두 시인
[서울=동북아신문]시로 보는 한국문인의 정감세계...
 
▲ 조성래 casscho@hanmail.net
*경남 합천 출생
*1984년부터 <지평>,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시국에 대하여], [카인 별곡], [바퀴 위에서 잠자기], [두만강 여울목], [천 년 시간 저쪽의 도화원], [목단강 목단강] 있음
*제15회 최계락문학상 수상

1.단동丹東 안개
 
 
겨울 안개 속
압록강이 얼어 있다
강가에 서서 건너편 바라보는
추운 사내들의 낡은 생애 몇
안개에 반쯤 잘리고 없다
그 사내들 곁에 줄지어 선 실버들
실버들의 설화 얹은 머리칼도
태반은 안개에 먹히고 없다
그리운 것들은 반쪽만 이편에 남아
강 건너편을 하염없이 바라보나?
안개 저편에서 가끔
실루엣으로 두런거리는 소리
해독 안 되는 기호로 새어 나온다
겨울 안개 속
단동丹東의 아침 풍경이 얼어 있다
 
 

2. 고수촌古樹村의 그믐밤
 
 
 
  눈 덮인 연변의 겨울밤 유난히 빨리 찾아온다. 나무울타리 안에 가축이 많은 민가는 허름해도 구들이 따뜻하다. 비닐봉창에 물방울 맺힐 무렵, 동네 불빛만큼의 별들이 하늘에 돋고, 낡은 라디오에선 서울 가리봉동에 돈 벌러 가서 설에도 돌아오지 못하는, 애타는 조선족 여인이 아들과 전화하는 생방송 흘러나온다. 방문도 없이 윗방 아랫방 부엌이 하나로 터진 온돌방에서, 일행은 농부시인 김일량과 긴 밤을 이야기하며 들쭉술 마신다. 그는 대자연에서 언어의 이슬 받아 시를 쓴다고 자부한다. 자정 넘어 다시 눈은 내리고, 멀리 한족漢族마을에서 이따금 설맞이 폭죽 소리 들려온다.
 
 
 
3. 돈화 터미널
 
 
 
돈화는 바람 어구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곳
턱없이 늦게 출발하는 버스 기다리며
양지쪽 참새처럼 궁싯거린다
지인들은 설 휴가 너머 자취 감추고
수양버들 머리칼 빗는 한랭전선 위
양미간 찌푸린 목탄화하늘 찔끔찔끔
행인들 발길에 눈발 흩뿌린다
개털모자 속 얼굴 깊이 파묻고
우리도 소수민족 피붙이에 섞여
길짐승처럼 낯선 산기슭 기어들어 볼까?
간혹 색동옷 아이들 까치걸음 칠 때
유년의 명절 그리워 언 발 비비며
동모산 모롱이 눈대중해 본다
 
 
 
4. 경박호 부근
  ― 돈화에서 출발한 버스는 체인도 감지 않고
     북쪽으로 하염없이 기어간다
 
    
    1
어느 순간 운전석 차창 앞으로
눈 덮인 얼음호수 펼쳐진다
언젠가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본 풍경
나도 무한설경의 주인공으로 질주한다
옆 차창은 성에 뒤덮여 아무것 볼 수 없고
오직 앞만 보고 내달리는 혹한의 북국 여행
야산 등성이 굽어 돌 때마다 얼음호수는 자꾸
나에게 숨바꼭질하며 맑은 눈 맞춘다
저 얼음호수는 아무래도 내게
머나먼 설국의 전설 들려줄 모양이다
호숫가에 오두막 짓고 사는
늙은 아비와 버들처녀 아직 있을까
호수에 빠진 발해의 거울
그 행방 묘연하고
나는 차라리 짐승의 털가죽 걸친
사냥꾼 그려본다  
깨어 있는 승객 아무도 없는
정오 무렵
 
    2

경이로운 북국의 스크린 비집고
길가 수양버들 시나브로
하얗게 설화 쓰고 시야 스쳐간다
그 때마다 차창의 앞이마
그늘졌다 맑아졌다 내면의 음영 비춘다
이정표 보니
옛 발해의 동경성이 가깝다 
 
 
▲ 책 소개: 북지방 겨울기행 시집이다. 시인은 눈 덮인 민가와 벌판, 그리고 목단강 가는 눈길 위에서 만난 풍경들을 섬세하고 명징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집 안에 들어 있는 북방의 지명과 설화들은 우리민족의 오랜 애환을 담고 있다. 멸망한 왕조의 터전이나 일제 강점기 고난극복의 현장에서 촉발된 이미지들이 애잔하면서도 짙은 향수를 생성해 낸다. 그런데 이러한 북방 정서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국경을 따라 다른 의미로 재현되기도 한다. 시인은 분단 상황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아픔을 내면화하는 한편, 하루빨리 민족공동체가 회복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5. 목단강 목단강
 
 
시내 벗어나 도착한 목단강
두꺼운 얼음과 눈에 덮여 있다
여기저기 파헤쳐진 강바닥 양쪽
세월에 쓸린 수양버들 서 있고
건너편 공장굴뚝 하얀 연기 뿜어낸다
얼음축제 조형물 있는 둥 마는 둥
나루터도 뱃사공도 찾을 수 없는 강가
팔녀투강八女投江 석상만 유달리 씩씩하다
가까이 다가가 내면 읽으려 해도
겨울 목단강은 차고 딱딱한 얼음제국
기러기 날던 하늘마저 쩡쩡 얼려 버렸다
목단강 목단강 애타게 부르며
평화로운 목가 하나 들려주고 싶지만
살갗 마비되는 극한의 냉기 속
아쉬운 발길 돌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봄이 오면 목단강,
가슴 속 물고기 하나 둘 앞세우고 먼 북국
휘돌아 물살 출렁이며
유정한 몇 천리 가고도 남으리
 
 
 
6. 조각보
 
 
강 건너 적막강산
눈이 허옇게 쌓여 있다
도문에서 버스 타고 용정 가는 길
두만강 건너편은 북한 땅이다
길게 누운 민둥산이
조각보 기운 듯 덕지덕지
산등성이까지 경작지로 일군 흔적 역력하다
누룽지 긁어먹은 가마솥 형국이랄까
적설 속에도 드러나는 동족의 가난
노숙자 맨발보다 남루하다
국경에 긴 밤이 내리면 이내
모든 것 어둠에 지워지겠지만
바라보는 마음 밑창으로 시린 물소리,
응달의 미루나무 빈 가지들 자꾸
찬 허공 찔러댄다
 

7. 삼합의 눈
 
 
 
말 못할 그 무엇이
우리 가슴에 눈으로 쌓이는가
다시 찾은 두만강,
그리움은 강 저편에 적막으로 파묻힌다
국경선 가로지른 철책에 찢겨
분단 세월은 여기서도 생채기로 긁히고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해관 근처의 눈밭 서성대다가
전망대 오르면 회령이 보일 동 말 동
얼음 언 강줄기만 유장하게 굽어 있다
강 건너 길게 누운 산등성이 하나
무량한 눈 맞으며 평화 꿈꾸듯
우리도 그냥 눈사람바보 되어
맨 처음의 순수로 돌아가면 안 될까
이쪽저쪽 나누어진 경계선 지우고
눈 맞으며 눈 맞으며 하나 되면 안 될까
세 개의 촌락이 하나로 합해진 삼합
오늘은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8. 이도백하二道白河
 
 
몇 년 만에 찾아온 이도백하
평안도 아바이 밥집에서 저녁밥 먹고
박룡인을 수소문하여 만난다
그는 여전히 오소리 인상이다
일행의 빈틈 노리며 돈벌이할 궁리
별주부가 토끼 꾀어 수궁 데려가듯
자기 집 안방으로 고이 모셔간다
그러고는 능숙한 말솜씨로
이곳 이도백하의 소식 전한다
약수툰의 김천경 노인 이태 전에 세상 뜨고
리영석 가족도 다른 곳으로 옮겨 살고……
이제 특별히 갈 곳 없으니
눈구덩이 속에 다니지 말고 여기 눌러앉아 
여자랑 며칠 놀다 가라는 말투다
감기 걸린 나는 약 사먹고 콜록콜록
근처 여관방에 두통 싸매고 투숙한다
다음날은 장백으로 떠날 예정, 
밤새도록 백두산 눈바람이 낡은 창문에 매달린다
 
 
9. 작은 버스
 
 
이도백하에서
장백 가는 작은 버스
안에 못다 실은 짐들 차 지붕 위
낟가리 높이로 빼곡히 싣고
노새보다 무거운 몸으로 눈길 간다
아직 설 휴가 끝나지 않아
친척 방문 승객들 많아서일까
간신히 발 딛고 통로에 낑겨
담배연기 참으며 흔들리며 간다
비닐로 가린 차창 성에마저 끼어
바깥풍경 도무지 볼 수 없고
송강하 지나고 백두산 기슭 한참 돌아
승객들 한둘씩 내리기 시작한다  
앉을 자리 없어 마냥 서 있으니
안내양이 나무판때기 하나 가져다준다
버스 통로에 걸쳐놓고 앉으라는 눈짓
바지 닳는 줄도 모르고 거기 걸터앉아
두더지처럼 웅크리고 간다
 
 
 
10. 국경선
 
 
 
이른 아침 강가
이쪽 장백과 저쪽 혜산 사이
강폭은 좁다
아낙네들 도란도란
빨래하기 맞춤한 강물 꽁꽁 얼고
그 위에 정갈한 숫눈 쌓여 있다
감시자 없어도 국경선의 긴장감 팽팽하게
얼음눈밭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어놓았다
아, 그런데 눈여겨보니 간밤에 누군가
도강한 흔적 눈 위에 찍혀 있다
조심조심 저쪽으로 건너갔다 이쪽으로 건너온
해맑은 발자국, 가지런히 눈밭에 찍힌
국경선 위의 발자국 
굶주리는 혈육에게 양식이라도 전해주고 온 것일까
그 은밀한 조바심,
얼음 밑의 환한 거울로 가슴 파고든다 
  
 

[단평]목단강牧丹江에서 동태가 된 두 시인

 
 박명호 (소설가)
 
  한겨울 만주 여행에서 기대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영하 이십 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뿐이다. 애초 우리가 여행을 계획한 것도 그 추위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기왕이면 그쪽의 설[춘절] 풍속도 맛볼 겸해서 시골 벽촌 김일량 시인의 집에서 설을 나기로 한 것이었다. 만주 벽촌이니까 아직 우리의 옛 풍속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설 풍속이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한족의 풍습인 요란한 폭죽 소리만 마을 여기저기서 그믐밤을 지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풍속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제사가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진작 사라졌기 때문이다.

  서규정 시인의 재촉도 있었지만 더 이상 벽촌의 추위에 갇혀 구들장만 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정을 앞당겨 목단강으로 떠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돈화를 거쳐 만주에서 가장 크다는 경박호 호수 옆을 지나 흑룡강성 목단강까지 끝없는 눈길을 달려갔다. 목단강에 도착하니 벌써 해는 떨어지고 초저녁이었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였지만 표준시가 한국보다 한 시간이나 늦은데다가 위도 상으로 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저녁이 일찍 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름만 낯익고 모든 것이 낯선 목단강에 내리자마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우리를 맞아 준 것은 영하 이십 도가 넘는 살인적인 추위였다. 그것은 마치 부산 앞바다에서 팔딱거리던 정어리들이 목단강 얼음판 위로 내동댕이쳐진 형국이었다. 같은 온도라도 초저녁 무렵의 추위가 훨씬 춥게 느껴진다. 눈가의 물기마저 얼어붙는 바람에 눈을 잘 뜰 수가 없었고, 턱이 얼어붙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춘절 기간이라 상점들마저 문을 닫아 도시는 가로등 불빛만 그 매서운 추위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예상치 못한 혹한에 노출된 우리는 어디든 들어가 추위를 피해야 했다.

  마스크에 입김마저 하얗게 얼어붙어 거의 동태가 되어버린 조성래,  서규정 두 시인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어떻게 해보라고 명색 가이드인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은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가게라도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면서 전화를 걸든지 길을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블록을 돌고 돌아도 도무지 문을 연 가게가 보이지 않았다. 턱이 얼어 입을 열기도 힘이 드는지, 얼어 죽겠다는 두 사람의 우는소리마저도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렇잖아도 당초 명절 기간에 움직인다는 것은 힘들다는 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앞당기자고 보챈 것은 그들이었기에 노골적으로 투정을 부릴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언 목단강 거리를 추위와 허기에 허우적거리다가 거의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사람들의 출입이 있는 상점을 발견했다. 그곳이 어떤 곳이건 기어들어갈 작정이었다. 그곳은 마침 백화점 식품 코너였다. 우선 얼었던 눈자위가 풀리면서 시야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턱이 녹으면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냉동된 물고기가 따스한 물에 녹아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의 표정들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우리는 한동안 냉동된 상태로 모든 의식이 정지되어 버린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것 같았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우리는 그곳에서 빵과 음료수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러나 전화 걸 곳이 없어 다시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목단강에는 우리를 안내해줄 시인이 있었다. 급하게 떠나오는 바람에 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고, 도착해서 어떻게 해 볼 요량이었는데 그것이 결국 어려움을 자초한 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적으로 만주의 추위를 확실하게 맛볼 수 있었다.

  뒤에 마음씨 고운 아가씨의 도움으로 현지의 그 시인에게 전화했지만, 명절이어선지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호텔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우리의 여행은 계속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목단강에서 얼음 속에 잠든 동태가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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