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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한중작가포럼/2019 작품특집 33]정성수의 시 '효자동 연가' 외9수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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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9  1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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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한국문인의 정감세계...
 
   

정성수 약력

저서 : 시집/공든 탑. 동시집/첫꽃, 장편동화/폐암 걸린 호랑이 외 다수.
• 수상 : 세종문화상. 소월시문학대상. 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 외 다수.
• 전)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
• 현) 향촌문학회장. 사)미래다문화발전협회회장. 고글출판사 상임이사.


 
 
1.효자동 연가 
 

효자가 산다기에 효자동 골목을 기웃거렸네
만나는 사람마다 꽃이였네
염천 하늘 아래서
뭔가를 간절히 바라본다는 것은
간절한 그리움이라고
담장 위에 핀 능소화가 말하네
기쁨과 환희는 쌍둥이 같아서
땅에 찍은 발자국마다 능소화 꽃잎이었네
효녀 또한
효자와 피를 나눈 남매라네
능소화 향기 가득한
안마당에서
늙은 어머니와 자식들이 능소화를 바라보네
백행의 근본이
효자동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제 알겠네
능소화 피고 진 뒤 땅을 치지 않겠네
 
 
 
2. 호박꽃
 
 

호롱불 내다걸듯 호박꽃은 피었는데
호박꽃도 꽃이냐고 빈정대던 친구는 가고 없다
호박꽃도 꽃이라고
벌나비가 기를 쓰고
호박꽃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태양이 익어갈수록 호박꽃은 농염해지고
하초가 촉촉이 젖어와
퍼내도 퍼내도 꿀물은 꿀물인데
끝을 모르고 땅 위를 기어가는 호박 줄기가
장마를 몰아낸다
호박꽃 떨어진 자리마다 갓난아이 씨불알같은
호박들이 대롱거리면
두 눈이 멀 것 같은 여름은 간다
사랑도 시들면
노오란 비상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가을로 가면 그만이겠지?
드럼통 같은 여자도 여자는 여자니까
 
 
 
3. 비애悲愛 
 
 

서산 뒤에 달이 산다기에
해는
하루 종일 허공을 건너 서산으로 갔지만
달은 없었다
달은 해를 기다리지 못해
밤새도록 밤하늘에 나와 있었지만
해는 오지 않았다
상사화 피고지고 또 피고 져도
해와 달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해가 붉은 것도 달이 노란 것도
상사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4. 어머니의 저녁 
 
 

어둠이 오래 된 저녁 간이정류장에 어머니가 앉아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등 뒤에는
서럽게 뜬 별 하나가 측은 하고
고단한 하루는 아직도 갈 길이 남았다는 듯이
자꾸만 버스가 오는 쪽으로
눈을 갖다 놓는다
기어이 기어이 버스는 달려와서
어서 타라고
경적을 울리면
어머니가 든 가방은 몸을 움츠려 무게를 줄여준다
차장에 스쳐가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어머니의 밤하늘에 뜬
별들은
이승에서 핀 수많은 꽃들이었다
 
 
 
5.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피었다. 흰꽃 옆에 보라꽃, 보라꽃 뒤에 흰꽃, 희죽희죽 웃으면서 알탕갈탕 피었다.
어머니가 산비탈 퇴알밭에 도라지를 심을 때 여름은 옛날같이 늙어갔다. 산으로 놀러 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데 산꿩이 일직선으로 날아가면서 울던 날이었다. 보랏빛 손수건으로 희디흰 눈물을 닦으면 산천에 비가 내리고 도라지 향내는 적막하게 여름밤을 적셨다.
도라지꽃은 입술을 세워 이 세상 어디선가로 슬픈 노래를 보낼 것이고 흰 입술 보랏빛 입술을 깨물면 식용도 관상용도 약용도 다 부질 없는 것이라고 도라지꽃이 고개를 숙였다.
 
   
▲ 도라지 꽃이 피는 계절의 언덕 너머...
 
 
6. 나비 
 
 

꽃과 꽃 사이에
길을 내는
길 위에서 잠이 드는
하루를 평생처럼 살다가
평생을 하루처럼
꿈을 꿈꾸다가
나비는
꽃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목숨을 위해
꽃을 바치기도 하는
날개를 접었다 펴도 다리를 폈다 접어도
한 줄기 바람이 되는
그래서 혼자인
혼자여도 슬프지 않은 나비여 나비여
 
 
 
7. 그것이 사랑
 
 

배고픈 남자와 배곯은 여자가 밥상머리에 마주 앉았다
남자는 양푼밥 한 그릇을 해치우고도
배가 고팠고
여자는 고봉밥 한 그릇을 비우고도
뱃구레가 차지 않았다
허기가 허기를 위로하는 동안
배고픈 남자와 배곯은 여자는 집 한 채를 짓고
이층을 올렸다
외로움은 뱉을수록 외롭고 슬픔은 씹을수록 슬프다
 
 
 
8. 아버지의 목덜미
 
 

절벽이었다 아버지의 목덜미는
구부정한 어깨로
다리 하나를 질질 끌면서 걷는 것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잎들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버지는 절벽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가래를 뱉어내듯이 그렁그렁 뱉어냈다
절벽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절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눙을 치는 나는
한 마리의 늙은 짐승이 되어 오늘도 절벽을 기어오른다
푸르른 날을 염원하는 어린 이끼들을 위해서
목살 한 근도 안 되는
아버지의 목덜미는
절벽 아래서 입을 벌리는 자식들의 허기였다
 
 

9. 모여모여
 
 

몇 사람이 땅을 판다고 지구가 바닥나는 것이 아니다
촛불 몇 개를 켜든다고 세상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먼저 땅을 파기 시작해야 너도나도 따라
삽질을 한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수천수만 개가 되면
비로소 우주가 환해진다
작은 묘목이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작은 물방울이 
강을 이루고 바다가 되듯이
작고 보잘 것 없고 시시한 것들이
모여모여
세상을 바꾼다
너의 뜨거운 가슴과 나의 작은 손이라면 안 될 일이 없다
 
 

10. 가을저녁 
 
 

어둠을 깔고 이불을 눈썹까지 끌어 당겼다
거리를 떠돌다 돌아 온 발바닥이
숨을 들이마시자
핏발선 눈이 감겼다
절망은 깨물어도 깨물어도 단단했다
문밖의 세상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음으로
마른 잎들은 자꾸만 떨어졌다
바람은 나무를 흔들어도
나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있었다
절망과 절망 사이에도
슬픔과 슬픔 사이에도
눈물과 눈물 사이에도
헛기침 한 번에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가을저녁이었다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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