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배와 부두, 떠나려는 자와 안주하려는 자, 품어주고 떠나 보내는 자들의 이야기, 이별과 상봉, 또 짧은 시간의 만남이 가져다 주는 행복과 스릴, 그리고 솟는 해님을 향해 돛을 달고 가는 희망찬 이야기...배와 부두의 스토리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우리들 삶의 이야기가 아닐까. <편집자> 
▲ 홍용암 약력 : 중국 흑룡강 출생, 연변과학기술대학 전문경영학과 졸업. 16세때 첫 시집 <꽃무지개>를 출판한후 중국, 조선, 한국에서 조선문, 중국문으로 50여권 저서 출판. 한국 한반도문학상 대상, 조선 통일문학상 등 국내외 문학상 30여 차 수상. 중국 <중국100명개혁창업걸출인물>, <중국당대 걸출한 인재>에 선정. 연변 <연길시10대우수청년>, <연변청년5.4상장획득자>, <연변10대청년창업새별>에 선정. 2002년 중국 연변텔레비드라마제작중심에서 저자의 인생일대기를 반영한 텔레비영화 <흰구름의 길>(상, 하집) 촬영, 제작, 방영. 중국에서 중화공훈 훈장, 조선에서 노력훈장, 한국에서 중한우호교류공로메달 수훈. 현재 중국 료녕성 단동시웰빙건강제품유한회사 동사장, 재중동포작가통일문학회 회장, 연변정치협상위원회 위원, 연변두만강지역국제합작개발추진회 부회장, 중국아세아태평양지역경제발전연구중심 고급연구원 등 겸임.
  1.
배와 부두  

 
                홍용암 
 
옛날에 내가 배였을 때
당신은 쓸쓸한 부두였습니다
언제쯤 돌아올지 모르오나
아주 자주 기약 없이 바다로 떠난
그 배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몹시 지친 외로운 부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 반대로
당신은 자유로운 배가 되고
내가 당신의 부두가 되겠습니다
쉬임없이 떠도는 분방한 넋
아득히 먼 바다로 떠났다도
사나운 폭풍과 파도를 피해
배가 잠시 머무르는 삶의 부두 --
 
외롭지만 나는 매일 당신이 떠난
그 자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그리운 당신만을 기다리고
당신은 여로에 지칠 때마다
이 나의 부두에 닻을 내려서
조용히 가끔 잠간 쉬여가도 좋습니다
 
그러다가 싫증을 느끼고
어디론가 또다시 떠나고 싶으면
기타부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문득 훌쩍 떠나도 되는 자유로운 배
 
그래도 나는 언제나
눈물로 웃으면서 오래오래 손을 저어
떠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래줄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동안 떠돌다가
어느 날 왕창 지친 생각이 들어
영원한 안식처가 수요된다면
다행히 당신에겐 일편단심
당신을 기다리는 내가 있으니
언제든 곤고한 몸과 맘을 기대일
그 부두에 영영 정박해도 좋습니다
 
오로지 
내 품으로 돌아올 당신만을 기다리며
나는 날마다 천천히 낡아갈 것입니다...
 
 2.
배가 부두로 되려는 이유

 
옛날에
당신이 부두이고 내가 배였을 때
나는 먼 바다 항해에 뜻을 둔
야망 찬 배였지만
당신은 오직 배와의 사랑에만
동동동 매달린 고독한 부두
 
흔들리며 떠나가는 무정한 배
한사코 밧줄로 꽁꽁꽁
영원히 묶어두고 싶었지만
도무지 잡아둘 수 없었던 부두
그래서 끝끝내 떠나보내며
한없이 슬퍼서 울었던 당신 --
 
그 옛날에
당신이 부두이고 내가 배였을 때
그렇게 더없이 외로운 당신을
너무 오래 지치고 기다리게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그 징벌로 거꾸로
당신이 배가 되고 내가 부두가 되여
당신이 인고(忍苦)했던 그 인내로
한평생 당신만을 기다리렵니다
 
배가 부두로 되려는 이유
내게는 그게 바로 이유입니다...  
3.
당신은 배, 나는 부두 
 
당신은 자유로운 배
나는 고독한 부두
 
어느 날 야속한 배가 떠나면
당신이 잠간 머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홀로 남아
눈 빠지게 망연한 바다를 보며
언제면 다시 올까 기다리는
나는 한없이 외로운 부두
 
사흘 밤을 머물러도 좋습니다
아니면 이틀 밤 하루 밤도 됩니다
무정한 긴 세월이 흐른다 해도
너무나 짧디 짧은 순간이지만
당신이 내 품에 정박하였던
아름다운 그 밤들을 못 잊습니다
 
애틋하고 황홀했던 추억들
가끔씩 나에게로 찾아와
정을 준 당신을 못 잊어서
오늘도 바질바질 속을 썩이며
멍하니 기다려 서있습니다
 
설사 그렇게 떠나간 당신이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질 않는대도
기다리다 눈이 먼 망부석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이 생명 촛불이 다 타는 그날까지
나는 계속 기다리며 서있습니다...
 
 
4.
작은 부두  
 
당신은 배
한 척의 작은 나룻배입니다
 
나는 부두
그러나 큰 부두가 아니라
조그마한 나룻배 한 척만 겨우  
정박하기 알성맞춤한 아주 작은 부두입니다
 
하여 내 작은 부두에는
어쩌다가 배가 잠시 머문다 해도
그 여느 번화한 항구처럼
세 척, 열 척, 스무 척이 아니라
언제나 님인 작은 나룻배 한 척만이
항시 달랑 매여져 있습니다
 
나는 부두이지만
들락날락 아무 배나 받아들이어
무시로 마음대로 머물게 하는
개방된 그런 부두, 큰 항구가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찾아 다시 돌아올
그리운 당신만을 기다렸다가
한품에 와락 꼭- 얼싸안는
너무나도 자그마한 당신만의 전용부두
 
그래도 나는 참말
이름 없는 이 부두가 좋습니다
영원히 작은 당신만을 품에 안는
당신만의 미니부두가 되렵니다...
 
 
5.

배의 꿈, 부두의 꿈 
 
당신은 야속한 배
내 가슴은 당신이 머무르는
유정한 부두
 
자유롭고 분망한 배는
자주 부두를 두고 떠나가지만
기다리는 부두는 언제나
배가 영영 머물기만 바랍니다
 
그보다도 배는 항상
먼 바다로 항해하는 꿈을 꾸지만
부두는 날마다 그 배를 붙잡아
품에 꼭 그러안는 꿈만 꿉니다
 
그렇게 배와 부두는
깊이 끔찍 사랑하는 사이지만
꾸는 꿈이 달라서
서로 크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꿈이 다른 배와 부두
언제면 영원한 한몸이 될까요... ???!
 
 
6.
돌아오는 배 
 
일편단심 배만을 사랑하는
눈물겨운 부두의 진실이
출렁이는 물결과 파도를 통해
바야흐로 대해에서 풍랑을 헤가르는
용감한 배에게 전달되어
 
드디어
하늘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 배가 가슴으로 느꼈다며는
 
아무리
망망한 대양너머 큰 바다로
머나먼 항해를 떠났다가도
배는 다시 곧바로 머리를 돌려
기다리는 부두로 돌아올 거예요
 
부두는
아무리 야속한 배라도
처음으로 순정을 깡그리 바친
한번 깊이 정이 든 운명의 배를
영원히 절대 잊지 못합니다
 
떠나간 그 배도
결국 더욱 그 부두를 못버립니다
마침내 뱃고동소리 붕-- !
그리운 부두 찾아 돌아옵니다...
 
 
7.  돛을 다는 배 
 
지금은 바다에서
오락가락 갈팡질팡 방황하며
정처 없이 떠돌고 있지만
배가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그리운 부두의 품뿐입니다
 
한평생 떠도는 나그네의 꿈
방랑에 몹시 지친 몸이지만
외로운 배는 늘쌍 추억합니다
부두와의 행복했던 그 시절을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품
기다리는 부두가 있다는 거
배한테는 그게 큰 위안이고
마지막 귀속인 희망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어도
그 배만을 기다리는 부두가 있어
오늘도 더 큰 힘을 얻으면서
배는 더욱 용기백배 돛을 답니다...
 
 
8.    헌 배와 부두 
 
외로운 부두는
새 배보다 헌 배를 좋아합니다
 
유정한 부두에겐
물 위에 갓 띄운 새 배보다도
다슬고 초라하고 헐망한 헌 배가
훨씬 더욱 편하고 좋습니다
 
든든한 새 배는 자주 훌쩍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가지만
낡아버린 허술한 헌 배는 
멀리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고
끝내 영영 부두에 정착합니다
 
그래서 쓸쓸한 부두는
자기도 점점 같이 낡아가지만
어쨌든 배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오히려 그것이 더 다행스럽고
너무너무 가슴 뿌듯 행복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부두는
세월이 살같이 어서 흘러서
차라리 배가 빨리 낡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부두가 영원히
그 배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깐...
 
  9.
불붙는 늦사랑 
 
배와 부두의 사랑은
아마도 늦사랑인가 봅니다
처음에는 대부분 나날들을
항상 피차 머얼-리 헤어져
애달픈 이별가만 부르다가
 
이제는 배도 낡고 부두도 낡고
둘이 모두 퍼그나 낡아서야
마침내 찰떡 같이 종일 찰싹
한 몸인양 딱- 붙어 있습니다
 
배는 부두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두는 그 배를 품에 꼭 안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습니다
좀체로 떨어질 줄 모릅니다
 
아무리 거세찬 파도와 폭풍이
그들을 갈라놓으려 하여도
둘은 서로 굳게 옹근 한덩이 되어
더더욱 억세게 끌어안습니다
 
이제부터 이 세상 아무도 그들을
영원히 절대로 갈라놓지 못합니다
배와 부두의 사랑은
불타는 저녁노을처럼 활활활 불붙는
너무너무 아름다운 늦사랑입니다...
 
 
10.
이제부터 시작인 사랑 
 
배와 부두는
가끔씩 이별을 하고
상봉을 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별이 주류인가 봅니다
 
더욱이
배와 부두가 젊었을 적
처음에는 먼저
이별의 연습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배와 부두가 점차 낡으면
이별보다 상봉을 자주 하며
늘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젊은 날 너무나 아프게 사랑하며
자꾸 멀리 떨어져 있었길래
이제라도 늦게나마 매일 만나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낡았지만
서로 끔찍 손에 손을 꼭 맞잡고
날마다 아기자기 소곤대는
그 모습이 참말 보기 좋습니다
 
정녕 배와 부두는 한몸인양
날마다 딱- 붙어 있습니다
배와 부두의 진짜 사랑은
이제부터 시작인가 봅니다...
 
 
11.

바다물이 짠 이유 
 
수천 년 전
수만 년 전
 
높다란 육지에서
싱거운 강물이 흘러내려와
그 고인 물들이 모이고 모여
작은 바다가 된 것을 ---
 
어느 날
그 작은 바닷가 기슭에
먼저 배가 생기고
뒤이어 부두가 생겨났습니다
 
이별과 상봉이 너무 잦은
배와 부두가 생겨나면서부터
그들이 흘리는 그 눈물에
바다물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또 짜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평선 출렁출렁 바다물은
배와 부두가 흘린 찝찔한 눈물
그 눈물이 자꾸만 섞여들어
드디어 짜디짜게 돌변하고
망망한 큰 바다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지에서 흘러온 강물은 싱겁지만
바닷물은 짜디짠 눈물입니다... 
▲ 최근 <도서출판 바닷바람>에서 출판한 홍용암 시인의 시집 ' 술 한잔에 정든 님과 시 한수' 앞뒤 표지
 
 
12.
바  다 
 
유달리 눈물이 많았던
배와 부두
 
배와 부두가
이별하며 흘린 슬픔의 눈물
상봉하며 흘린 기쁨의 눈물
 
그 눈물들이 모이고 넘쳐서
해마다 붇고 또 붇고 자꾸만 불어
바다가 되고 대양이 된 것을 ---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바다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대양이라 불렀습니다
동해, 서해, 남해, 홍해, 지중해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북빙양... 
 
바다는
그렇게 생겨나고
그렇게 불리워 지기 시작했습니다...
 
 
13.
내가 다시 배로 된다면 
 
지금은
당신이 배이고
내가 부두이지만
 
만약
그 옛날로 되돌아가
당신이 도로 부두가 되고
내가 다시 배로 된다면 --
 
나는 아예
이 나의 동아줄을 당신께 던져
스스로 다시는 영영 못풀게
당신의 그 허리에 꽁꽁꽁
단단히 비끌어 옭매어두렵니다
 
이제부터
나는 정말 한시라도 영원히
당신 곁을 떠나가기 싫으니깐...
 
  14.
속 죄 
 
지금은
당신이 배가 되고
내가 부두로 되였으니
 
이제부터
나는 속 태우며 기다리고
당신은 자유롭게 항해하십시오
 
그래도
나는 절대 한마디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그 옛날에
당신이 부두이고
내가 배였을 때
당신이 종래로 이 나를
원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
 
당신 앞에서
그렇게 뼈속까지 속죄하며
한평생 묵묵히 살으렵니다...
 
 
15.

한없이 너무 아픈 사랑 
 
이별의 대명사이자
기다림의 상징이기도 한
배와 부두
 
어쩔 수 없이 정해진 그 숙명
기나긴 이별을 해놓고
지루하게 기다리는 뼈아픈 사랑
 
이별이 천년처럼 너무나 길고
상봉은 한 순간 찰나뿐이라 
그 사랑이 까무라치게 아프지만
배와 부두는 그 모든 시련을
반드시 겪어야만 합니다
 
통배추가 매서운 고춧가루랑
짜디짠 소금에 푹- 절지 않고서는
맛있는 김장김치로 될 수 없듯이
쓰라린 이별 눈물, 기다림 고통
그 세찬 몸부림이 없이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괴이한 사랑
 
그렇게
배와 부두의 사랑은
한없이 너무 아픈 사랑입니다...
 
 
16.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 
 
바닷가에
오늘도 멍하니 외로이 서서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배는
언제나 부두를 뒤에 두고
매정하게 떠나가고
 
부두는
날마다 손꼽아
돌아올 그 배만을 기다리고
 
여기서
이별과 상봉
기쁨과 눈물이 엇갈립니다
 
붕 -- !
뱃고동소리 울리지 않아도
부두는 가슴으로 느낍니다
떠나갔다 돌아오는 운명의 돛배
파도치는 그 감동과 설레임을
 
가슴을 먹먹케 하는 사연으로
오늘도 배와 부두는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를 엮습니다... 
배와 부두, 사람과 배, 그리고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
 
 
[평론]
 
사랑에 죽다, 그리고 사랑에 살 다
  ― 홍용암 시인의 근작사랑시 10수에 부쳐
 
 (중국) 김춘택
 
 
                 시작하면서
 
    사랑은 인간의 특권이고, 영원한 숙명이라 했던가!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지도 모른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다는 처참하고도 극단적인 말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가!
    오늘 나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홍용암시인의 사랑시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반가운 흔열(欣悅)이 아닐수 없다.
    10년전, 나는 문학평론습작을 할 때 홍용암 시인의 사랑시에 대해 어설픈 시평을 한 경력이 있다. 본시 시인으로서의 활약에도 수준이 변변치 못하고, 더욱 시비평자로서의 천부와 시학공부마저 없다보니 10년이란 강산의 변화에도 내 비평수준은 여전히 초학의 수준에 머물러있어 좋은 비평을 내놓을수 없지만 그래도 못난 재주를 믿어준 홍용암 시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비록 내 감상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시평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내어놓는다.
    오늘 내가 만난 홍용암 시인의 사랑시 10점은 시적인 구도에서 볼 때 화려한 시창작 기교를 동원하지도 않았고, 또 사랑에 대한 위대한 철리를 끄집어내지도 않았지만 시인이 자신의 뜨거운 영혼과 뜨거운 가슴으로 분출해낸 사랑의 그 가치관이야말로 금전과 관능의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사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순수한 가치>>를 심어주기에 손색이 없다.
    우선 홍용암 시인이 뜨거운 영혼과 뜨거운 가슴으로 분출해낸 <<순수한 사랑의 가치관>>에 대해 시평이란 작업을 하기에 앞서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개념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스턴버그(Sternberg)는 세 가지 구성요소를 가정해 사랑의 삼각형리론(triangular theory of love)을 제안했다. 세 가지 구성요소란 열정(passion)과 친밀함(intimacy), 그리고 헌신(commitment)을 가리킨다. 스턴버그는 사람들의 사랑이 모두 다른 이유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서로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열정이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다. 상대방과 신체적으로 함께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갖게 한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다. 상대방이 곁에 없으면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리워하게 만들어 가장 매력적이지만 가장 위험하기도 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리유도 바로 열정 때문이다.
    친밀감이란 상대방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이다. 상대방에게 따뜻한 마음을 갖고 배려하게 만든다. 친밀감은 상대에 대한 신뢰와 연결되어 서로의 비밀과 삶을 공유하게 한다. 또한 정서적인 지지와 위로를 준다.
    헌신이란 사랑을 지속하도록 서로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끈과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관계를 유지하려는 결단과 책임감을 말한다. 열정은 금방 식게 마련이고 친밀감도 사라질 수 있지만 헌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스턴버그에 의하면 열정은 사랑의 초기에 강렬하게 나타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드는 반면에 친밀감과 헌신적인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발전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성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은 빨리 발전하고 급속도로 감정의 정상에 도달하지만 쉽게 사그라지기 때문에 친밀감과 헌신적인 태도가 발달하지 않으면 열정적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지기 마련이다. 아래의 어휘적 공식처럼 세 가지 요소의 조합에 따라 다양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
 
   열정=얼빠짐(infatuation)
   친밀감=좋아함(liking)
   헌신=공허한 사랑(empty love)
   열정+친밀감=로맨틱한 사랑(romantic love)
   열정+헌신=어리석은 사랑(fatuous love)
   친밀감+헌신=동반자적 사랑(companionate love)
   열정+친밀감+헌신=완전한 사랑(consummate love)
 
    어떤 사람은 열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친밀감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헌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맞지만 틀린 말이다. 스턴버그는 세 가지 요소가 가능한 한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불안정한 사랑이라고 한다.
    이상으로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개념을 스턴버그의 삼각형이론을 통해 알아보았는데 사랑이란 바로 열정, 친밀감, 헌신의 결합결정체인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금전과 관능에 대한 집착이 너무 심해 <<열정+친밀감+헌신>>의 삼위일체 공식이 깨지면서 순수한 사랑은 퇴폐적인 사랑의 그늘아래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내가 시평을 작업하게 되는 홍용암 시인의 10점의 시도 바로 이러한 실상에 대한 혐오로 창작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홍용암 시인의 이 10점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감정은 <<사랑에 죽다, 그리고 사랑에 살다>>의 절규라고 본다.
    그럼 아래에 홍용암 시인의 근작 사랑시 10점에 대해 나름대로 시평이란 문자적 행위를 해보기로 하는데 그 전주(前奏)로 시<<인생과 사랑>>을 서시로 내세워 본 시평의 대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먼저 시<<인생과 사랑>>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산다는 건/ 너무너무 고독한 거// 고독하니/ 저 혼자 힘들지 않으려고/ 인간은 자기 다른 반쪽을 찾아/ 저저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 사랑하면/ 너도 나도 설레인다// 설레이니/ 가슴 뿌듯 행복을 만끽하고/ 따뜻한 위안을 느끼면서/ 그 삶이 무지무지 즐겁다// 인생은/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것 같다...>>
    이 시에서 시인은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고독한 것이지만 사랑이 있는 인생이야말로 행복하다.>>는 인간이 가져야 하는 사랑의 특권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인간이 가져야 하는 특권의 사랑을 해나가는 일은 심상치 않을뿐더러 경이로움 그 자체로까지 되고 있다. 바로 <<인간은 자기의 다른 반쪽을 찾아 저저마다 사랑하는>>것이다. 시인은 또 <<인생은 사랑하며 살아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것 같다.>>고 사랑의 의미를 성스럽게 부여하고 있다.
    시 <<인생과 사랑>>에서는 <<인간은 자기의 다른 반쪽을 찾아 저저마다 사랑한다.>>고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사랑의 기원>>에 대해 번지를 찾아주는 것으로 존 캐머런 미첼(John Cameron Mitchell)이 감독한 영화 <<헤드윅(Headwig)>>에서 그리스신화를 패러디한 <<사랑의 기원>>과 거의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화 <<헤드윅>>에서는 <<사랑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태초의 인류에게 세 가지의 성별이 있었다. 즉 두 남자가 한 몸으로 된 태양의 아이, 두 명의 여자가 한 몸으로 된 지구의 아이, 여자와 남자가 한 몸으로 된 달의 아이이다. 그러나 신들은 이 세 가지 성별을 가진 사람들의 힘과 반항심에 점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여 뭇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번개를 내려 세 가지 성별을 가진 사람들을 쪼개버렸다. 그런 와중에 태양의 아이와 지구의 아이들을 없어지고, 달의 아이만 둘로 갈라져 지구에 남게 되였다. 남자와 여자로 갈라진 달의 아이들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 결사적으로 <<사랑>>하게 되였는데 이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둘로 갈라질 때 하나였던 심장이 둘로 갈라지면서 생겨난 상처였다.>>
    이와 같이 홍용암 시인은 시 <<인생과 사랑>>에서 인간의 특권인 <<사랑의 기원>>에 대해 성스럽게 가미(加味)함으로써 순수한 사랑의 가치관을 고양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시 <<인생과 사랑>>을 통해 <<금전과 관능의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사랑의 시대>>에 순수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반추(反芻)해보아야 할 것이다.
 
 
1)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不褪色) 사랑의 약효

 
    인간에게 사랑만한 약이 없다고들 한다. 그만큼 사랑의 에너지는 강력한 것이다. 홍용암 시인은 바로 이런 강력한 사랑의 에너지를 시 <<천성병과 영단묘약>>의 주제로 삼으면서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 사랑의 약효를 도출해내고 있다.
    먼저 시 <<천성병과 영단묘약>>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이란/ 참으로 외로운 존재// 그래서 누구나 살아가면서/ <고독>이란 무서운 천성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 병을 치료해주는/ 영단묘약 <사랑>이 있어서/ 결코 절대 불치병은 아니다// 산다는 건/ 너무너무 고독하나/ 고독하면 사랑하면 되는 거다...>>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우선 인간이란 한생동안 고독에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는 <<고독의 숙주>>라고 시적대상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독의 숙주>>인 인간은 <<고독이란 무서운 천성병>>에 걸리지만 신의 은혜를 받아 <<영단묘약―사랑>>을 얻음으로 하여 <<불치병의 희생자>>로는 절대 되지 않는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있는 <<고독의 무덤>>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특권인 사랑은 인간을 <<고독의 섬>>에서 탈출하게 해주는 영단묘약으로 그 약효는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2) 영원히 마르지 않을(不干涸) 사랑의 헌신

 
    사랑의 위대성은 바로 이성 상대에 대한 헌신이라 할 수 있다. 스턴버그는 헌신은 <<공허한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는 헌신이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자신은 텅 비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용암 시인의 시 <<내 가슴과 작은 새와 새둥지>>에서는 바로 이런 영원히 마르지 않을 <<사랑의 헌신>>을 힘차게 노래하고 있다.
    먼저 시 <<내 가슴과 작은 새와 새둥지>>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정든 님이 한 마리 작은 새라면/ 내 가슴은 그대 님이 깃들을/ 따스한 새둥지인 보금자리/ 온 하루 쉬지 않고 하늘을 날던/ 한 마리 착하고 순한 새가/ 저녁에 둥지로 돌아와 깃들듯/ 너무나 세상 삶에 찌들어서/ 한없이 지치고 외로운 님이/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채/ 그 품에 꼭 껴 안겨 파고들면서/ 살풋이 눈을 감고 잠이 들 때/ 마침내 그대를 품은 내 가슴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보금자리/ 만시름을 놓은 새의 둥지가 된다...>>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작은 새의 시적대상을 정든 님으로 설정하고, 내 가슴의 시적대상을 새(님)가 깃들 보금자리로 설정함으로써 우선적으로 시적대상의 공간을 넓혀주고 있다. 본시 보금자리란 안식처이기에 순수 그 자체여야 하고, 그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헌신의 공간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늘가에서 깃을 펴다가 날개가 지친 작은 새가 날아와 안식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작은 새의 시적대상물인 찌든 삶에 지쳐 외로운 님도 안식에 들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영원히 마르지 않을 <<사랑의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영원히 동요하지 않을(不动摇) 사랑의 집착

 
    드팀없는 사랑은 그 집착이 강해야 할것이다. 여기서<<집착>>이란 피곤하게 달라붙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되는 <<견고한 사랑>>인 것이다. 홍용암 시인의 시 <<나는 한 나무에만 매달리리라>>에서는 영원히 동요하지 않을 <<사랑의 집착>>을 절박하게 다루고 있는데 그 사랑의 불변성은 마그마바다에 빠져도 녹지 않을 것이다.
    먼저 시 <<나는 한 나무에만 매달리리라>>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오직 한 나무에만 매달리리라/ 봉황이 오동나무에만 내려앉듯/ 내 비록 봉황새가 못되고/ 님 또한 오동나무 아닐지라도/ 나는 평생 당신 한 나무에만 깃들리라// 나보고 사랑하며 살라고 하면/ 내 집 뜨락 배나무에 열린 배만 따먹고/ 남의 집 과일은 절대로 넘보지 않듯/ 나는 당신 한 나무에만 달린 열매/ 님이 주는 그 사랑만 납작 받아먹으리라// 그리고 나더러 죽으라 하면/ 오로지 당신이란 그 한 나무에만/ 밧줄로 동동동 목을 매달아/ 나는 혀를 빼물고 눈을 휘뜩 뒤집으며/ 아이고 나 죽소하며 꺼벅 죽으리라!>>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사랑에 대한 집착의 시적대상을 <<절망>>의 이미지로 끌어가고 있다. 봉황이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듯이 시적화자는 한나무에만 <<바보>>처럼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그냥 한 나무에만 매달리는 집요한 집착만 아니라 그 나무에만 매달려 행복하겠다는 의지까지 내비치고 있는데 바로 시적화자가<<내 집 뜨락 배나무에 열린 배만 따먹고, 남의 집 과일은 절대로 넘보지 않듯 나는 당신 한 나무에만 달린 열매, 님이 주는 그 사랑만 납작 받아먹으리라>>라고 행복에 목을 매고있는 그것이다. 나중에 시적화자는 자신의 죽음까지 <<님이란 나무>>에 목을 매달려고 하는데 이는 <<행복의 연장선>>일수밖에 없다. 이렇듯 이 시는 행복한 사랑의 집착을 노래하고 있다.
 
 
4) 영원히 오염되지 않을(不染污) 사랑의 단맛
 
    사랑의 추구는 사랑의 그 달콤함 때문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사랑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법이지만 그 맛의 순서는 여간만 교묘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먼저 달콤하고 후에 쓴 것으로 유혹이 먼저이고, 행복이 먼저인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든 자신의 사랑에 영원히 단맛만 있기만 갈망한다. 홍용암 시인의 시 <<엿 같은 내 사랑 그대>>에서도 영원히 오염되지 않을 사랑의 단맛만 동경하고 있다.
    먼저 시 <<엿 같은 내 사랑 그대>>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내 사랑은/ 처음에는 달다가/ 씹으면 씹을수록 씁쓸해지는/ 그런 입안의 껌이 아니다// 내 사랑은/ 시작뿐만 아니라 그 뒤끝이/ 켜면 켤수록 더더욱 달달해지는/ 물엿이다 후에는 더 맛이 오른/ 걸쭉한 타래엿이다// 씁쓸한 껌이 아니라/ 달디 단 엿으로 내게 다가온/ 내 인생의 운명속의 그대여/ 오늘도 내 사랑 그대는/ 햇빛 같은 달콤한 미소로/ 나에게 타래엿을 선사한다...>>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사랑의 맛을 시적대상 <<물엿>>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적화자는 자신의 사랑은 <처음에 달다가 씹으면 씹을수록 씁쓸해지는 그런 입안의 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적화자의 사랑은 진행하면 할수록(켜면 켤수록) 더더욱 달달해지는 <<물엿>>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적화자가 추구하는 <<완미한 사랑>>에 다르지 않다. 스턴버그는 완전한 사랑을 <<열정+친밀감+헌신>>의 결합체로 보고 있는데 홍용암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달콤한 사랑>>도 이와 같은 맥락이 되고 있다.
 
 
5) 영원히 냉각되지 않을(不冷却) 사랑의 열기
 
    사랑은 영원히 분출하는 화산이라고도 한다. 뜨거움이 분출되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할 가치도 존재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사랑은 그 분출이 폭발적이고 강열해도 밖으로 뿜겨져 나온 부분은 곧바로 냉각되어 용암의 시체 암석으로 된다. 홍용암 시인의 시 <<그대의 화산>>에서는 영원히 냉각되지 않을 사랑의 열기를 용암처럼 내뿜고 있다.
    먼저 시 <<그대의 화산>>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그대에게/ 나는 정녕 산이고 싶다/ 그것도 우뚝 높이 솟아올라/ 활활활 세찬 불길 확ㅡ 뿜을것 같은/ 엄청 뜨거운 화산(火山)이고 싶다// 독수공방 안타까이/ 님과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이 가슴에 움틀꿈틀 고패 치는/ 열류 같은 그리움 꽉 재워두며/ 지긋이 잠자는 휴화산(休火山)이다가// 동방화촉 두근두근/ 님을 만나 품속에 꼭 품을 때는/ 참고 참던 그 사랑을 슝슝슝/ 용암처럼 거세차게 분출하며/ 연해연방 폭발하는 활화산(活火山)이고 싶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혹시 님과 사별하여 다시 볼 수 없다면/ 나도 아예 고요히 영면하여/ 다시는 그 심장도 뛰지 않는/ 영영 죽은 사화산(死火山)이고 싶다...>>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열렬한 사랑의 시적대상을 뜨거운 용암을 분출하는 <<화산>>으로 내세우고 있다. 시적화자는 자신이 <<뜨겁고도 세찬 불길을 활활 내뿜는 활화산>>이 되기를 소원하고, 또 <<님과 서로 떨어져있을 때는 열류 같은 그리움을 잠재워두는 휴화산>>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렇게 한생동안 <<활화산과 휴화산>>으로 엇바뀌어가면서 오로지 님과 단 둘이서 격정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만약 님이 없어지면 자기도 영영 죽은 사화산이 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 시는 영원히 식지 않을 정열적인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6) 영원히 멈추지 않을(不停息) 사랑의 갈구

 
    아마도 사랑의 추구는 갈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욕망적인 갈구가 없는 사랑이란 절대 이상적인 사랑을 가질 수 없다. 사랑에서 갈구는 원초적인 욕망의 배태가 아니라 그 욕망덩어리를 눈덩이처럼 굴리면 굴릴수록 더 커지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의 갈구는 이상적인 사랑을 얻는 기점이 되고 있다. 홍용암 시인의 시 <<무인도(2)>>에서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사랑의 갈구를 사랑의 이상을 위해 뻗어가고 있다.
    먼저 시 <<무인도(2)>>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님과 겨우 데이트에 성공해/ 쪽배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갑자기 획 태풍에 휘말려/ 정처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여/ 어느 날 한 무인도에 닿았다/ 세상과 천리만리 격리된/ 아무배도 영영 닿지 않는 섬/ 풍경이 그지없이 아름답지만/ 나 외에 남자가 한명도 없고/ 님 외에 여자가 한명도 없어/ 우리 둘은 부득불 결혼하겠지/ 님을 너무 사랑하는 나에게/ 신이 내린 큰 은총에 감사하며/ 나는 평생 그 섬에서 살아간다/ 애도 펑펑 낳으면서 행복하다가/ 불현듯 깨고 보니 꿈인 것을/ 아쉽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님과 둘이 다시 한 번 버려져/ 그렇게 그런 섬에 살고 싶다...>>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갈구를 꿈속의 뜨거운 사랑을 통해 이루어가고 있다. 본래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의 특권으로 처음엔 환상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고, 그 이상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갈구가 없는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수 없다. 이 시의 <<무인도>>는 사랑의 치열한 갈구를 위해 존재하는 유토피아의 세계이다.
 
 
7) 영원히 막히지 않을(不隔绝) 사랑의 교감

 
    사랑은 어떻게 대화를 하는 것인가? 바로 교감으로 신비의 대화를 이루는 것이다. 서로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사랑은 짝사랑이란 빈껍데기로 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교감을 나눔으로서 실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서로 활활 타오르게 된다. 홍용암 시인의 시 <<섬과 섬, 그리고 쪽배>>에서는 바로 이런 영원히 막히지 않을 사랑의 교감을 소통하고 있다.
    먼저 시 <<섬과 섬, 그리고 쪽배>>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섬과 섬 사이에는/ 다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섬과 섬 사이가 너무 멀어/ 다리를 놓을 수 없다면/ 한척의 쪽배라도 오가야 한다// 아니면 섬은/ 점점 너무 더더욱 고독해진다// 당신과 나 두 섬 사이에/ 바다물이 마르지 않은 한/ 그 바다가 육지로 되지 않는 한/ 반드시 사랑을 실은/ 오가는 쪽배가 있어야 한다...>>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두 사랑의 시적상대를 두 섬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시가 되는 것은 <<두 섬 사이에 다리를 놓을수 없다(여기서는 <교감이 없는 사랑>의 이미지로 되였다)>>는 것이고, 그래서 <<두 섬이 점점 너무 더더욱 고독하지 않으려면 쪽배 한척이라도 오가야 한다(여기서는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이미지로 되였다)>>는 것이다. 이 시는 아름다운 사랑에서 교감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8) 영원히 꺼지지 않을(不熄灭) 사랑의 신비
 
    신비를 잃은 사랑은 어딘가 따분할 것이다. 사랑은 영원한 소녀와 소년이여야 한다. 왜냐하면 한생을 동반할 사랑이라면 신비를 잃어 무미건조해지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본래 먹고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완숙한 사랑이라면 상대에 대한 신비는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홍용암 시인의 시 <<모험가와 보물섬>>에서는 바로 이런 영원히 꺼지지 않을 사랑의 신비를 환상의 동산에 부여해주고 있다.
    먼저 시 <<모험가와 보물섬>>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태평양 망망대해 한복판/ 누구도 살지 않은 무인고도/ 아무배도 닿지 않는 외딴 섬/ 나는 너무 외로운 그 섬이다// 어느 날/ 동화에나 있을법한 보물섬 찾아/ 천방지축 이리저리 표류하다/ 우연히 그 섬에 닿아 올라온/ 님은 전혀 겁도 없는 모험가다// 하지만 그 섬에/ 보물이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잠시 시만 무성하게 자랄 뿐이다/ 그 섬 땅 밑에/ 무엇이 묻혔는지 아무도 몰라/ 그러나 님에게는 적어도/ 산삼 같은 그 시만도 엄청난 보물이다//”
    이 시에서 홍용암 시인은 시적화자인 <<나>>의 시적대상물을 <<무인고도>>로 배정하고, 또 <<님>>의 시적대상물을 표류하다가 섬에 올라온 <<모험가>>로 배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묘한 시적 무대설치에 힘입어 <<나>>와 <<님>>은 <<보물섬>>과 <<탐험자>>의 인연으로 궁합이 잘 맞아 돌아간다. 그런데 나란 <<보물섬>>에게는 영원한 탐험으로도 바닥이 들어나지 않을 신비한 <<보물>>이 만재해있고, 님은 겨우 <<산삼 같은 시>>만 건지고도 굉장히 만족하는 것이다. 이처럼 완숙한 사랑이란 바로 신비를 잃지 않는 것이다.
 
 
                 끝내면서
 
    사랑은 어쩌면 인류의 <<발명품>>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만이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한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그의 삶은 무미건조할 것이다. 아니, 한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그는 인간도 아닐 것이다. 또 홍용암 시인의 시에서처럼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은 고독이란 <천성병>이나 <불치의 병>에 걸려 올바른 인생살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처럼 사랑은 인간이 후대를 이어나가는 육체활동이기 전에 정신활동이고, 인생의 질적 가치(욕구만족 ․ 행복)를 제고해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사랑의 성격은 뜨겁고도 치열한 것이고, 사랑의 행위는 능동적이고도 극단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사랑의 열병을 치열하게 앓기도 하고, 사랑에 살뿐만 아니라 죽기도 한다. 이런 사랑의 속성에 대해 기원전 7세기 후반에 활약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사포(Sappho)는 자신의 시 <<사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랑은 나의 팔, 다리를 풀어놓고
        나를 어지럽게 합니다
        달콤하며 쓰며
        나의 힘을 빼앗아가는 괴물입니다
 
    사랑의 성격에 대해 너무나 잘 표현한 시이다. 사랑은 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마력은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양분(養分)이 된다. 사포는 또 사랑의 매력에 대해 시 <<질투>>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대를 볼 때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내 혀는 비틀거리고
        가느다란 불길이
        내 팔다리에 스며들고
        내면의 천둥소리가
        내 귀를 멀게 하고
        내면에 내린 어둠이
        내 눈을 멀게 하거니
 
    사랑의 능동적인 매력에 대해 너무나 잘 표현한 시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매력 앞에 반항할 힘을 잃고 순종할 수밖에 없다. 아니 우리 스스로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에게 사랑이란 신의 은총이다.
    이제 홍용암의 시 <<사랑이 있고 시가 있어서>>를 결시(結詩)로 내세워 둘러보면서 본고의 시평에 대한 마무리기를 하기로 한다.
    먼저 시 <<사랑이 있고 시가 있어서>>의 전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님과 둘이 서로 손을 꼭 맞잡고/ 이 험한 세상의 온갖 풍파/ 사랑으로 이겨내고 헤쳐 나가며/ 그 감동을 나는 매일 시로 씁니다/ 목화보다 더 포근한 해볕시/ 꿀보다도 더 달콤한 사탕시/ 금반지보다 더 귀한 보배시/ 님에게만 써주는 사랑시입니다/ 님은 그런 내 시를 받아들고/ 천사처럼 미소 짓고 행복해하며/ 생명처럼 소중히 간직합니다/ 님에겐 별장이나 빌딩보다도/ 그게 제일 보물이고 재산입니다/ 님과 나 사이에는 사랑이 있고/ 그렇게 또 사랑시가 있어서/ 언제나 가슴 뿌듯 설레이며/ 너무너무 한평생 행복합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우선적으로 <<이 험한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님과 단 둘이서 사랑으로 이겨나가기 위해 시를 쓴다.>>고 자신의 시작(詩作)의무를 밝히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님에게 <<목화보다 더 포근한 햇볕시, 꿀보다 더 달콤한 사탕시, 금반지보다 더 귀한 보배시>>를 써주면서 행복에 겨워하고 있다. 시인이니까 님에게 <<사랑의 시>>를 써줄 수밖에 없지만 그 <<사랑시>>는 <<별장이나 빌딩>>보다 더 값진 것이다. 어쩌면 시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님에 향한 사랑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하기만 하다. 그렇다. 사랑은 본래 그렇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상으로 홍용암 시인의 사랑시 10점을 <<사랑에 죽다, 그리고 사랑에 살다>>의 주제로 둘려보았는데 이 10점의 사랑시들은 금전과 관능의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사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순수한 가치>>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사랑에 죽다
        그리고 사랑에 살다
 
    이는 내가 사랑의 시인 홍용암 시인에게 바치는 헌시이기도 하다.
    금후 홍용암 시인이 더 아름다운 사랑시를 더욱 많이 써내기를 기원하며 이만 시평을 접기로 한다.
 
                  ( 2017년 9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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