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고안나 시낭송가의 애송시 10편을 소개한다.  애송시 창작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편집자 주>   
먼저, 나는 마음에 스미는 詩, 여운이 오래 남는 詩를 선호한다.
여러 번 읽다 보면 어느 새 글 쓴 시인의 마음이 되어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인다.
촉촉이 눈가가 젖어
온다. 잠간씩 가슴앓이도 한다.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詩는 전혀 감동이 오지 않는다.
웃고 울며 사랑하는
고달프면 고달프다 말 할 수 있는
아프면 아프다고 가슴을 내 보일 수 있는
블랙커피 한 잔의 여유가 꼭 필요한 그런 詩였으면 더 좋겠다.
그런 애송시들이 많이 창작되었으면 좋겠다.

<고안나 시낭송가/시인> 
▲ 고안나 약력 : 시인. 시낭송가, 한국오페라교육문화진흥원 추진위원. 국제에이즈 연맹 한국 홍보이사, 부산시인협회 회원. 모닥불문학회 부회장. 시전문지『작가와 문학』편집위원, 시전문지『청암문학』부산시 지부장, 동북아신문 상임이사. 미당문학회 이사. 미당시낭송회 회원, 한국낭송가협회전문시낭송가로 활동. 중국 '도라지 문학지 해외문학상' 등 수상 다수. 2018 '제3회 중한문화예술교류공헌상' , '2018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수상.
 
 
 1.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심고 고추심고 상추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은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2.
적막한 바닷가
 
송수권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3.
연어

 
정호승
  
바다를 떠난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서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 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로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 우리 몸에 피처럼 흐르는 시를 낭송하면 맘은 절로 피며 웃는 꽃이 된다...

 
 4.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5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 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 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 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
 
 
 6.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 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볕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7.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한복처럼 예쁘고 투명한 시의 날개가 나의 시낭송 소리를 가뿐히 싣고 어디론가 멀리 무언가를 찾아 떠난다... 

  8.
어머니의 부채바람
 
백성일
 
삼베적삼 우아하게 차려입고
둥근 부채 들고
삼복더위 몸으로 막으며
이마에 포도송이 같은 땀방울이
둥근 부채질에 자맥질 한다
모듬내 다리 밑에서
바람들이 동무하여 몰려오고
매미소리 베개 삼아
늙은 아들 코 고는 소리
부채질하는 어미는
아주 오랜 예전의
지아비 모습 떠올리며
하나 둘 떨어지는 땀방울이
행여나, 늙은 아들 얼굴에
떨어질세라 조심스럽다
어미의 찌든 얼굴이
그새 호박꽃처럼 환하다
 
 
 9.
그대 착한 아내 되어
 
김남희

 
산이랑 들이랑 살래 그대 착한 아내 되어
속절없이 보낸 세월 등짐 부려 내려놓고
심술로 얼룩진 맘 명경같이 닦아놓고
흐르는 시냇물에 욕심도 헹궈내고
눈부신 햇살 사랑으로 내리는 날
옥양목 빛바래듯 넌출넌출 널어 말려
닳고 찢긴 상처는 누덕누덕 기워 입고
들풀처럼 살아갈래 그대 착한 아내 되어
 
바다랑 하늘이랑 살래 그대 착한 아내 되어
그림자 짙어지면 등짐 부려 내려놓고
굽이굽이 지나온 길처럼 넘겨놓고
흐르는 바람 따라 미움도 헹궈내고
화안한 달빛 사랑으로 내리는 날
갈기갈기 찢긴 상처 꽃물처럼 풀어 말려
아련한 풀벌레 소리 세레나데로 엮어서
찔레꽃 향기로 남을래 그대 착한 아내 되어
 
 
 10.
풀리는 한강 가에서
 
서정주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 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음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밈둘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라 함인가
황토 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 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음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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