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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19.5.21 화 07:03
사회·문화
[한중작가포럼/문학작품특집47] 현동화의 '빨강구두' 외 2편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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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4  14: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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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 수필은 사소한 스토리들을 감정선으로 요리조리 코바느질을 해서 끌고가며 잘 꿰메 자기 나름대로 예쁜 조각보를 만드는 작업인지 모른다. 현동화의 수필은 이런 펙트에 강한 것 같다. <편집자 주>

   
현동화 약력:  흑룡강성 수화시 출생, 북경 상해 광주에서 10여년 간 여행업 종사. 2009년부터 한국으로 이주.  현재 화장품 유통업에 종사. 연변일보, 중국조선어방송넷, 해외문학, 대전중구문학 등에 수필 다수 발표. 

제1편 

빨강구두 

 


내가 태어나서부터 총각이었던 삼촌은 할머니와 우리와 함께 살았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나서 삼촌은 꽤 오래동안 어깨를 축 떨어뜨린 채 혼자 집과 일터로만 오갔다.
 
어느 하루 삼촌은 엄마가 차려 입힌 멋진 옷을 입고 내가 처음 듣는 동네로 기차를 타고 가서 숙모가 될 이쁜 여인을 둬번 데려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한동안 주방을 마주한 맞은 켠 건넌방에 살다가 참대곰같이 귀여운 사촌 남동생이 태어나자 마을 뒤쪽에 집을 짓고 숙모와 참대곰 동생을 데리고 새살림을 차렸다.
 
삼촌이 이사 가는 날, 난 마을이 떠나갈 듯 대성통곡을 하며 삼촌네 집에 가서 살겠다고 삼촌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 나를 엄마는 억지로 집으로 데리고 왔으나 눈 깜짝 할 사이 난 또 삼촌 집에 가있었고, 엄마가 데려오면 또 어느새 삼촌 집에 가있는 반복적인 현상은 꽤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삼촌이 어느날 얼굴이 푸르댕댕해 우리집에 와서 온돌에 벌렁 드러누우면 나는 엄마한테 삼촌이 이젠 영 돌아와 우리와 함께 살려는가하고 신나서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누워있던 삼촌이 깜짝 놀라 일어날 정도로 나의 등짝을 소리나게 팍 때리고는, 일어나 앉은 삼촌의 등짝까지 팍팍 때려 잡아 끈 후 숙모가 기다리는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곤 했다.

나는 항상 엄마 뒤에 삼촌이 또 따라오나 살피느라 정신을 팔았다. 당연히 오지 않는 삼촌을 기다리다 지친 나는 삼촌네 집까지 찾아가서 빼꼼히 들여다본다. 그때면 푸르댕댕하던 삼촌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음꽃이 피어있고 그러는 삼촌 옆에는 이쁜 숙모가 나를 반기며 냄비뚜껑을 열었다 닫는데 난 그 냄새만 맡아도 그 안에 보글거리는 것은 바로 삼촌이 좋아하는 숙모표 된장찌게라는 것을 바로 알아맞힐 수 있었다.
난 전쟁이 끝나고 화해모드에 들어갔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와서 엄마한테 일러주는 걸로 삼촌네 부부싸움은 그렇게 막이 내리곤 했다.
 
 
나를 특별히 이뻐하는 삼촌을 따라 숙모도 나를 이뻐했다.
난 수시로 삼촌네 집에  들락날락하며 심지어 이삼일동안 집에 오지않기도 했다.
드문드문 일어나는 전쟁을 제외하고는 삼촌네집은 항상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나는 매일 책만 들여다고 글만 쓰시는 엄격한 부모님이 계시는 우리집에서가 아니고 서로 농담도하고 툭툭 쥐여박으며 온집안이 친구처럼 어울리는 삼촌네집에서 태여났어도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밥먹을땐 막내동생의 밥그릇에 고기가 더 많아야하는 그런 규정말고 내가 젤 많이 먹어도 되는 삼촌네집이 좋았고 예의를 지키며 반말 한마디만 해도 안되는 우리집보다 내가 맘대로 뛰여놀고 소리지를수 있는 삼촌네 집이 더 좋았다.
 
오분거리인 삼촌네 집에 자주 가지않고 가서 자지도 않았을때는 내가 어느정도 컸을쯤이다.
여느때와 같이 난 삼촌네 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다 집문앞에서 기다리는 엄마와 마주쳤다.
엄마는 내가 드라마 때문에 금요일에는 집으로 꼭 올줄 알았단다.
 
엄마의 눈동자에서 나는 엄마가 기댈수있을만큼 자라난 단단한 나무를 보았다.
그후 나는 다시는 외박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마을엔 구두 신은 애가 거의 없었다. 아까운 구두는 흙만 밟는 시골길의 사치였다. 지금도 내가 받았던 제일 좋은 선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삼촌이 그때 사준 빨강구두를 손꼽는다. 갈 때는 가격이 좋으면서 따뜻한 왕바신(털신발)을 사려고 갔지만 몇 배나 훨씬 비싼 반짝거리는 구두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한참 바라보시더니 삼촌은 아무 말없이 그 빨강구두를 사줬다.
 
후에 알았지만 그날 그 빨강구두 때문에 삼촌은 아주 중요한걸 못 사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겨우 공사툰까지 오는 막차에서 내려 집까지 눈꽃 날리는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나는 삼촌이 구두사준걸 후회할까봐 오는 내내 구두를 꼭 끌어안고 왔다.
 
지금도 가끔 집에서 오분 거리인 이마트에서 장난감을 사서 들고 오는 아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삼촌 생각을 한다. 나는 아들이 힘들까바 장난감을 대신 들어줄까고 물어보지 않는다. 어릴적 빨강구두를 품에 안고 그 먼 길을 걸어 집에 오던 나에게도 삼촌은 들어다주겠다고 하지 않았었다. 그냥 가끔씩 머리를 돌려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삼촌의 그 눈길을 떠올리며 나도 가끔씩 머리를 돌려 아들을 돌아보기만 한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내 눈에 멋지기만 하던 삼촌은 점점 작아져 갔고 촌스러워져 갔다...
삼촌이 중요한걸 포기하며 내게 사주셨던 빨강구두는 이미 많이 작아졌고 난  엄마를 졸라서 까만신발을 사 신은지도 꾀 오래되였다.

가끔씩 중학교에 나를 찾아온 삼촌은 꼬깃꼬깃한 돈 몇원을 꺼내여 쑤빙(호떡)과 함께  내 손에 쥐여주고는 자신은 길옆에 쭈크리고 앉아서 떡을 와작와작 먹었다.

하지만 난 더이상 어렸을 때처럼 삼촌과 함께 쭈크리고 앉아 촌스럽게 호떡을 먹을 수 없었다. 난 나를 더오래 보고싶어하는 삼촌을 버리고 공부해야 한다면서 학교문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에 지금도 가끔씩 머리를 마구 잡아뜯지만 사춘기였던 나는 그랬었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난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열차를 타고 가야하는 다른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고등학교옆에는 초등학교건물이 붙어있었다.

공부가 스트레스였던 우리는 항상  4층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며 뛰여노는 천진란만한 초등학생들을 보는게 낙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항상 뒤쪽에서 조용하게 놀던 곱슬머리 여자애가 친구들에 빙 둘러쌓여 있는것을 보았다. 그 애는 예쁜 빨강구두를 신고있었고 아이들은 그 빨강구두에 대해 담론 하는것 같았다. 얼굴이 발그스레해져 신나게 말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난 그 애의 맑은 얼굴표정과 몸짓에서 어릴적 삼촌이 사준 빨강구두를 신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나를 보았다.
 
삼촌이 사준 그 빨강구두는 나를 아픈 동생을 업고 다녀야만 했던 천덕꾸러기로부터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백설공주로 탈바꿈 시켰고 바로 그때 우뚝 산처럼 솟아난 그 자신감은 아무리 센 바람이 내리쳐도 끄떡없는 꿋꿋한 지금의 나를 만들어놓았다 .
 
난 갑자기 삼촌이 무척 보고싶었다. 우리는 꾀 오래동안 못본듯했다.  나는 방학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미 훌쩍 커버린 나는 삼촌한테 자랑할게 많아졌고 물어볼 것도 많아졌다. 난 삼촌에게 나를 좋아하는 남자애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방학마다 병원이 있는 먼 고장으로 이사한 우리집에 찾아오는 삼촌을 생각하며 집으로 달려갔다.
 
삼촌은 오지 않았다...
난 방학 내내 많이 아팠다...
창자가 끊어질듯한 그 아픔...
나는 빨강구두를 끌어안고 기절할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새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엄마 손에 떠밀려 겨우 학교로 갔다...
 
방학에 오지 않았던 삼촌은 그렇게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 후 밤늦게 다시 일어나 쿨쿨 자고 있는 참대곰 동생의 머리를 만지다가 쓴 술을 한잔 또 한잔 들이키는 아버지의 모습을 3년동안 보았고, 아버지와 엄마는 자다가 삼촌을 부르며 깨어나서 우는 나를 7년동안 보았을 것이다.
 
그런 우리 식구의 슬픔의 깊이가 숙모와 두 동생들과는 동일하게 비길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게 시간이라는 자에게 아픔의 빈도를 맡기며 조금씩 그 고통을 이겨왔다.
 
두 자식 걱정도 되지만 혹시라도 사춘기의 내가 이겨내지 못 할까봐 나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삼촌의 재치와 유머만 생각하자던 숙모, 그래야 삼촌이 기뻐할 거라고 말했던 숙모는 자신이 한 거짓말에 자신도 평생 속으면서 삼촌이 좋아하던 된장찌개를 끓이며 수없이 냄비뚜껑을 열고 닫았을 것이다. 그 열고 닫는 냄비뚜껑에는 어쩌면 수 십년의 그리움과 기다림이 올올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그 해 가을 참대곰 동생은 우리집에, 울보동생은 집을 봐주러 오신 외가에 맡기고 숙모는 심양의 한식당으로 떠났다. 그 후 몇 년 지나서 참대곰 동생과 숙모네는 삼촌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천진에 자리잡았다. 동생들이 결혼하고 손주손녀들이 태어나자 숙모는 여느 부모들과 마친가지로 좀이라도 더 많이 자식들에게 보태주기 위하여 다시 한국으로 떠났다.
 
요리 솜씨가 뛰어나고 맘씨가 고운 우리 숙모는 지금은 서울 강남의 어느 한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신다. 된장찌게를 특별히 잘 끓이는 이유여서인지 스카웃 제의가 끊임없이 들어온다고 한다.
 
삼촌은 이십여년전 그때,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그 방학 직전에,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젊은 나이에 불치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삼촌이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난 삼촌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난 그저 내가 삼촌을 마지막에 본 꽃이 피던 그 봄날을 기억한다.
꽃피는 그 해 봄날에 삼촌은 말했었지...
- 이제 몇 번의 꽂이 더 피면 우리 동화도 남자친구를 데려오겠지? 꼭 술 잘하는 사람으로 데려와야돼!
 
비록 머리에 서리가 내린 환갑이 넘은 삼촌의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난 삼촌이 우리를 보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오시면 뭐부터 자랑하지...나도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듯 기쁨과 아픔을 느끼며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고?  남편도 삼촌이 원하셨던  사람으로 잘 골라왔다고? 삼촌이 상상도 안갈 딱 나를 빼닮은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삼촌이 사줬던 빨강구두는 여전히 내 마음을 더욱더 단단하게 남부럽지 않는  부자의 마음으로  꾸준히 성장시키고 있다고?  그리고 삼촌의 참대곰과 울보도 아주 잘 살고 있다고...둘은 악착같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서 지금은 집을 몇 채나 장만해놓았다고...아직도 홀로 지내는 숙모는 된장찌게를 버리고 또 끓이며 삼촌을 그리고 있다고...
 
내 유년의 행복 바이러스였던 삼촌, 삼촌이 돌아가신지도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내 기억의 한 귀퉁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삼촌, 나에게  빨강구두를 사주던 삼촌은 아직도 내가 그리워할 때마다 하얀 뭉게구름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가 어느새 비구름이 되어 내 눈을 흠뻑 적시고  사라지곤 한다.
 
 
 
 제2편 
 친정길


 
얼마만의 친정길인가? 얼마만의 자유인가? 남편으로 부터, 애들로부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으로 부터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희희락락 떠나는 친정 길, 그 길 위엔 항상 내가 없었다. 구정 때도 시댁에 먼저 가야 하는지? 친정은 언제 가나? 다른 부부들에게는 흔히 일어나는 그런 싸움들까지도 난 그냥 부러울 뿐이었다.
 
몇 번이었던지 명절을 지내고 친정으로 떠나는 형님댁 차가 멀리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았지만 난 항상 그 자리에 오래오래 서 있었다.
 
하루는 같이 일하는 동생과 수다를 떨다가 나는  친정도 마음대로 못간다고 말했던적이 있다. 그랬더니 동생은   "그게...언니네 집이 외국이라서 문제인거지..."라고 짚어주었다. 그래서 둘이 한참은 키득키득 웃었던 생각이 난다.
 
그러던 내가 친정 길에 올랐다. 나의 생일을 앞두고 어떤 선물을 줄가 고민하던 남편이 "이번 생일선물은 친정에 보내주는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친정에 가게 되었다. 가족이 다 함께 다니다가 혼자는 가본 적이 없는 친정 길, 홀로 친정에 가게 되기까지는 정말이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혼자 공항에서 보딩을 받고 혼자 비행기타고... 참 뭐라고 할까? 어린 아들을 남편한데 맡기고 떠나며 걱정과 기쁨이 허공에서 어우러져 너울너울 흐느적이는 마음으로 서울과 광주사이를 마구 헤집으며 난 광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광주 공항에 도착하니 아빠가 마중 나오셨다. 술을 안드시면 말씀이 별로 없으신 아빠지만 오랜만에 혼자 친정에 놀러온 딸이 반가워 공항버스 타고 오는 내내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한 가득 음식상을 차려놓고 있었고 옆 동네 사는 동생네 부부도 조카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 하트가 가득가득 넘쳐나는 저녁상 앞에서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고, 그러다 동생네 부부와 한 잔 두 잔 하던 술이 과해져 나는 그만 동생네 부부에게 아빠, 엄마 잘 모셔주어 고맙다는 말만 서른여덟번을 하게 되였다.
 
다음날, 우리는 호텔을 예약하고 계획했던 온천여행을 떠났다.
 
어렸을 적 엄마, 아빠는 방학만 하면 나와 여동생을 친척집에 맡기고 아픈 남동생을 데리고 전국의 유명한 병원들을 한곳한곳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한 여름방학,할빈병원으로 떠나면서 나와 여동생 둘다 친척집에 두기가 미안한지 여동생도 데리고 길을 나섰다. 같이 가겠다고 울며 따라나서는 나의 등을 큰집쪽으로 밀어주면서 엄마는 동생병을 꼭 고치고 올테니 이번만 참으라면서 떠나셨다.
 
남동생의 병치료에 항상 많은 돈을 써야 했기에 여행이라고는 다녀본적 없던 엄마지만 병을 고칠수있다는 할빈병원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기뻐서 동생들을 근처에 있는 태양도 구경이라도 시켜주려고 배타는곳까지 갔다고한다.
 
인파에 밀려서 선착장으로 가던중 갑자기 혼자 두고온 내가 생각이나서 머뭇거리는 사이, 아빠는 동생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서 태양도로 건너갔고 핸드폰도 없던 그시절, 혼자 남게된 엄마는 행여나 돌아오는 아빠가 찾지못할가봐 높은 돌위에 서서 두시간이나 아빠와 동생들을 기다리며 고생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혼자 집에 두고온 나를 생각하며 다섯식구가 함께 갈수있는 그날을 계획했기에 두시간 땡볕아래의 시간이 그리 원망스럽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그때 엄마는 찹잡한 마음을 감추고 싶을때만 부르던 <훙타이양> 노래를 두시간내내 흥얼거렸을것이다.
 
졸업후 나는 바로 북경에 있는 여행사에 취직했고 , 그 후 서른여섯번의 여름이 흘렀지만 우리는 끝내 다섯식구 함께 태양도는 가지 못했다.
 
사는게 머가그리 바빴는지, 아니면 우리에겐 시간이 많다고 생각해서였던지 부모님께는 돈만 드리고 매번  미루기만 하다가 한번도 식구끼리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온천욕을 하고 시골길도 걷고 유람선을 타며 재잘거리는 조카를 제외한 우리는 조용히 저멀리 산과 푸른 숲,깊은 대자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많이 하게되면 행복한 순간이 날아갈가봐,식구끼리 끝내 가보지 못한 태양도를 그리며,머리에 서리가 내린 엄마 아빠와 이렇게 여행 한번 하고나면 그 다음번은 또 언제가 될런지 하는 생각에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유유히 흐르던 그때 시간은 지금은 너무나 빨리 달리고 있었고,어릴적 항상 같이 살거라고 생각했던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일년에 겨우 한번 보는 정도이니 말이다.
 
나는 식구들과 애써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며 붉어지려하는 눈시울을 빠르게 깜빡이였고 배머리에 서있던 엄마의 흥얼거리는 <훙타이양> 노래를 못들은척 내 마음속에서 밀려나오던 쓰나미와 함께 깊은곳에 묻어버렸다.
 
마지막 이틀동안은 아빠가 아침마다 내가 좋아하는 고추가루 팍팍 넣어서 끓인 물고기요리를 해주었고, 풋콩을 삶아 놓고 깨워주셨다. 나는 또 엄마의 요구대로 돌아가기전에 큰 여행가방을 채우느라 여기저기 끌려 다녔다. 동생은 이것 저것 그동안 먹고 싶었던 중국음식까지 사주겠다며 메모를 체크하기에 바빴고, 1주일이란 시간은 그렇게 살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떠나는 날, 난 아직도 아픈 막내동생을 끌어안고 한참을 토닥이다 서글픈 눈길을 맞추지 못한 채 돌아서 나왔다. 엄마, 아빠 ,여동생 앞에서도 난 웃으며 손을 흔들며 힘있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유유하게 떠났다. 그러다, 탑승을 기다리며 나는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을 폭포처럼 쏟고야 말았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가기로 다짐하고 돌아섰지만 그게 그렇게 잘 될는지… 또 언제 보게 될가… 집에 한 번가는 것이 이렇게 쉽지 않을 줄은 한국에 와서 살기 전에는 생각도 못했었다. 오랜시간 여행업에 종사하며, 나는 이곳 저곳을 누볐고, 1주일에 서 너 번씩 비행기도 타며 출장길에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길 떠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가정이 생기고 애들이 태어나고 직업도 바뀌고 남편의 사업이 흥하다 망하다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맘만 먹음 맘대로 다닐 수 있었던 처녀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맏딸인 내가 부모님 곁에 있어야 당신들의 맘이 편하시겠지만, 난 이미 산 넘고 바다건너 너무나 먼 곳으로 와 버렸다.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많아지는 엄마 아빠를 생각하며 난 울었고, 일하랴 애키우랴 잠도 제대로 못자는 여동생을 생각하며 난 또 울었고, 오랜시간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남동생을 생각하며 난 울고 또 울었다.
 
비행기 탑승시간이 되었다. 나는 느릿느릿 화장을 고치고 뒤를 한 번 더 돌아보고 나서 천천히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남편으로 부터 좋은 생일 선물을 받았으니 집에 돌아가면 나도 그에 보답하느라 한동안은 바빠지겠지. 1주일동안 두고 간 애들한테 미안해서 한동안은 더욱더 정성을 들이겠지.
 
그리고 직장과 집으로 뛰어다니며 빠른 시일 내에 곧 익숙하고 바쁜 내 자리로 복귀하겠지. 그러니 또 한동안은 내 자식들과 남편을 챙기느라 엄마, 아빠 동생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을것이다.
 
시어머니와 통화 횟수는 엄마와의 통화횟수보다 훨씬 더 많아질 것이고, 가끔씩 저 산너머 바다너머 서남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짠해지며 눈가가 촉촉해지겠지. 그러다 엄마,엄마 하며 매달리는 아들놈을 꼭 끌어안고 엄마가 부르던 <훙타이양> 노래를 흥얼거리겠지. 그리고 창문을 열고, 불빛 찬란한 맞은켠의 밤하늘에 대고 한마디 외치겠지. 참 아름다운 밤 입니다, 라고.
 
비행기가 서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잊지못할 친정 길, 내 삶의 쉼터를 뒤로 하고서...

 

   
▲ 인생은 아팠던 과거를 지우고 스스로 자기를 예쁘게 단장하며 충전해 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비로소 빛을 받을 수가 있으니까... <편집자 주>

  
 제3편 

그날 저녁에 있은 일


 
십여년 전,  상해의 여름날 저녁은 항상 그렇듯 후덥지근하게 더웠다. 하지만 그날 저녁만큼은 여느때와 달리 초저녁부터 갑자기 어디서인가  스산한 바람이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땐 내가 십년간 다니던 북경의 여행사를 떠나 아름다운 해남도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상해로 가서 본업인 가이드를 시작한지도 한참 되던 때였다.
 
그날 저녁 장가계에 갔다 오는 팀을 인솔하고 소주,항주를 다녀와야 했기에 나는 호텔에서 2박 투숙할 일정대로 옷가지와 화장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1박을 했을 적엔 자그마한 가방 하나를 들고 가면 되였기에 캐리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은 이유로 우리는 보통 캐리어를 높은 옷장위에다 올려놓았다.
 
평소같으면 남편더러 꺼내달라고 했을텐데 그날은 남편이 통화를 하고 있어서 혼자 캐리어를 내리려고 의자위에 올라갔다.
 
그날따라 원래 크지도 않은 내키가 더 작아졌는지 발꿈치까지높이 치켜들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케리어를 조금씩 힘겹게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앞으로 살짝 당겨 낸 뒤 두손으로 들어 내리려 했으나 순간 어디서 생겨난 힘인지  한손으로 캐리어를 앞쪽으로 너무 당겨버리고 말았다.
 
미처 두손으로 잡을 겨를도 없이 캐리어는 먼저 쿵하고 내 머리를 치고나서 또 한번 쿵하며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나는 아픈 머리를 매만지며 휘청거리다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빈 캐리어여서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텐데 어찌된 영문인지나는 마루바닥에 발이 닫자마자 털썩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렴풋한 의식가운데 쿵 소리를 듣고 놀란 남편이 내옆에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나는 갑자기 벌떡 튕겨 일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날이 희붐히 밝아 오고 있었다...
 
한잠 자고 일어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나는 벌떡 일어나서 공항을 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문득 캐리어를 보니 마루바닥에 내리워져 있었다.나는 남편이 꺼내놓은 줄로 생각하고 속으로 고마워했다.
 
주섬주섬 캐리어에 물건을 넣고 있는데 남편이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여보,병원에 가보자..."
"어제 일 기억 안나? 지금 날이 다 샜어...팀은 이미 다른 가이드가 나갔을거야..."
 
나는 멍하니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슴푸레 어제 일이 생각이 났다.
 
"나...공항에 못 나간거야? 팀 깼어?"
 
남편은 머리를 끄덕였고 나는 또 쿵하고 쓰러져버렸다. 십여년 가이드 경력에 베테랑이란 칭찬과 무 클레임으로 항상 당당했던 자부심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버렸다.
 
하늘땅이 돌아가고 너무도 억이 막혔지만 남편의 말을 들으며 가까스로 기억의 퍼즐조각을 맞춰보았다.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쓰러진후 분명  다시 일어났었다.그후에 나는 ? ... 쿵, 소리를 듣고 놀란 남편이 내 옆에 다가오는 것을 보았고 나는 갑자기 벌떡 튕겨 일어났다. 그리고 방과 거실, 주방을 왔다갔다 했다.
 
그다음 남편이 내 머리를 만져보며 어서 침대에 누워있으라 했지만 나는 그렇게 수백번을 같은 동작으로 방과 주방사이를 오갔다고 한다. 그리고 입으로는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는데 거의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라고 했다.
 
그렇게 반복하는 내가 너무도 이상해서 남편이 병원으로데려가려 했지만 내가 갑자기 힘이 너무 세져서 뿌리치는 통에 어떻게 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공항 나갈시간도 훨씬 지났고 이러다가는 팀미팅이 펑크나고 말 것 같아  회사 담당직원한데 전화를 하려고 남편은 나의 핸드폰과 다이어리를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핸드폰은 구식 폴더형이어서 중국어를 몰랐던 남편은 한참이나 헤맸지만 끝내는 회사 담당직원 전화를 찾지 못했다.
 
행여나 해서 내가 갖고 다니던 다이어리를 찾아보았지만 그날 가방안에 있었던 모든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던 다이어리와 그 팀의 확정서는 감쪽같이 감취를 감추어버렸다고 한다.
 
다급해진 남편은 그리 멀지 않은 동네에 살고 있었던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여동생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멘트만 나오고 있었고 동생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예 핸드폰이 꺼져있었다고 했다.
 
남편은 속수무책으로 그때까지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왔다갔다 하는 나를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남편은 결국 내게 동생을 보러 가자고 말을 꺼냈다. 그나마 동생이란 말에 내가 반응을 보이며 걸음을 멈추었고 남편이 입혀주는 옷을 입고  이끄는대로 나갔다고 한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동생네 집에 갔지만 동생네 집대문은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이 옆집 사는 동생 친구가 나오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동생은 회사직원들과 어떤 섬으로 놀러 갔고 동생남편은 친구들 모임이 있어서 나갔다고 전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 기사에게 길까지 가리켜주는 나를 보며 남편은 그제서야 괜찮아졌나보다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집에 들어서자 갑자기 내 핸드폰이 울렸고 익숙한 핸드폰 벨소리에 내가 화들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여보세요"
"혹시 ...오늘 마중나오기로 한 가이드가 아닌가요..."
"네...누구...시죠..."
"아 미스현 맞죠?지금 어디세요? 저희는 지금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방금 나왔어요"
 
난 머리를 한대 호되게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있었다.기억이 아득하긴 하지만 그때 내 머리는 분명 우뢰소리로 가득차 있었다.나는 간신히 뒤를 돌아보며 남편에게 물었다.
 
"나 ...오늘...팀...있었어?공항에 가야 돼?"
 
그리고 다시한번 핸드폰을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남편은 떨어진 핸드폰을 주어들고 가이드가 사고가 나서 나갈수가 없어서 죄송하다며 빨리 확정서의 회사 담당직원 핸드폰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전화번호대로 회사직원에게 전화를 해서 나의 사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다른가이드를 내보내달라 부탁한 후 통화를 끝냈다고 한다.
 
남편에게서 그날 저녁의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억이 막혀 기절할 맥도 없었다.너무도 황당하고 충격적인 그날 저녁...내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저녁쯤이 되어서야 섬에서 돌아온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리고 내게서 이런 황당하고 두서없는 말을 들은 동생은 울먹이면서 당장 병원쪽으로 오라고 했다. 병원앞에 이르니 동생과 제부가 서있는게 보였고 그때에야 갑자기 설음이 왈칵 밀려왔다.
 
울면서 다가가는 나를 바라보며 동생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미 형부한테서 모든 얘기를 전해들은 동생은 다짜고짜 나를 끌고 병원안으로 들어갔다.동생은 의사에게 내게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지만 한참 듣고만 있던 의사선생님은 그런 우리둘이 이상해보였던지 나는 물론이고 동생도 함께 검사해보라며 마구 휘갈겨 쓴 종이장을 우리 손에 한가득 쥐여주었다.
 
나는 그날 생에 처음으로 그토록 많은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한 상태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반신반의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집에 들어서니 집안벽을 돌아가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흰 부나비들의 시체가 쫙 깔린 것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낯선 외국에서의 타향살이에 또 잦은 출장때문에 집을 자주 비웠던 나였기에 소심해진 남편은 살면서 카텐도 거의 걷지 않았고 창문도 자주 열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설사 창문을 열었다 해도 방충망때문에 흰 부나비가 들어올 수 없었을텐데 어디서 나타난 부나비들인지,갑자기 왜 그많은 부나비가 주검으로 변해 우리 집 안벽밑에 빙 둘러가며 쌓여있는지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이였다.
 
집청소를 하고 난 뒤 남편은 다시 다이어리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은 침대와 침대옆 탁자 그사이 끼인 다이어리와 확정서를찾아냈다. 그것을 들고 주방과 방사이를 서너번 왔다갔다 하더니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그날엔 분명히 없었는데...거기 찾아봤는데도 없었는데..."
 
나는 너무 지친 나머지 침대에 몸을 기댄채 마루바닥에 앉았다. 한참 앉아 있다 침대모서리를 짚고 일어서면서 저도 몰래 손에 힘이 실렸고 그바람에 침대 매트가 한쪽으로 밀리면서 뭔가 손에 잡혔다. 이상한 느낌에 머리를 돌려보니 50원짜리 지페 한장이 삐죽이 보였다.
 
나는 놀라서 새된 소리를 지르며 남편을 불렀다. 우리는 매트를 밀어제꼈다. 매트 밑에 한층 쫙 깔린 돈을 세여보니 50원짜리가 열장이였다.오백원...그리 많은 돈은 아니다. 
 
우리는 한참이나 의심이 서린 눈초리로 서로를 쳐다 보았지만 공포에 젖은 상대방의 눈빛에서 이 돈은 우리 둘중 그 누가 숨겨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돈은 나의 떨리는 손에서 책상위로 옮겨졌다.
 
왜 이틀동안 기괴한 일들이 연속 일어나는지 우리는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우리는 전에 이집에 세들어 살던 사람이 돈을 침대밑에 깔아놓고 잊어버렸다가 생각나면 혹시라도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올수 있으니 그 돈을 고스란히 보관해 두기로 결정지었다.
 
그리고 집에 흰 부나비가 쭉 깔려 죽어있는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혹시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4층에 있던 집주인이 2층으로 내려와서 우리집 초인종을 누른 것은 정확히 두시간이 지난후였다. 나는 문을 열고 집주인에게 들어와서 부나비가 죽은 걸 한번 보라며 그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주인은 들어오지 않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더니 이틀전 로모가 돌아가셨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안에서 자신의 동공이 점점 커지는것을 바라보며 한동안 서있었다.
 
문득 뭔가 의식한 나는 소름이 끼쳐 빠른 속도로 문을 쾅 닫았고, 곧이어 문밖에서도 많이 놀란 듯 투닥투닥 급하게 뛰여올라가는 집주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게 생긴 이상한 일을 얘기하며 통화를 하던중에 밖에서 울려오는 곡소리에 창문을 내려다보니 4층에 살고 있던 집주인이 상복을 입고 앞에서 곡을 하며 걸어가고 있었고 그뒤에는 자식들과 친척들이 흰천으로 덮은 커다란 관을 들고 따라가고 있는게 보였다. 섬뜩한 기분에 나는 남편을 소리쳐 부르며 창가에서 급히 물러났다.
 
얼마후,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살던 집이 바로 4층 집주인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살던 집이란 걸 슈퍼 아저씨의 입에서 듣게 되였고 그 소식을 들은지 며칠 안되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그 뒤로 그날의 트라우마때문에 힘들게 가이드 생활을 이어가다가 후에는 일을 그만두게 되였고 다음해 결국 남편과 함께 상해를 떠나게 되였다...
 
일년후 한국에 간 동생이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며 점보러 간다고 해서 내 것도 같이 봐달라며 문자로 부탁을 했다.
 
점보러 갔다온 후 웬 영문인지 동생은 점쟁이 얘기를 더이상 꺼내지 않았고 나 또한 그 일을 잊어버려 동생에게 점본 일이어떻게 되었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또 몇년이 지나서 나는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였고 언젠가 한국에 설 쇠러 온 동생이 그날 점보러 갔다가 점쟁이와 나눈 대화를 내게 알려주었다.
 
"언니가...기가 세긴 세구만...사실 자네 언닌 우리와 같은 무속인의 팔자야."
"붙다가 결국 못붙고 딴데 갔어..."
"네???머가요?"
"머긴 머겠수...*신이지""
"......."
"근데 ...언니한데 못붙었는데...동생한데로 갔어...음....."
"..........!!!"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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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매
슬프긴 햇으나 감의깊고 마음이따뜻해지는 수필입니다
(2019-03-01 18:31:59)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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