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80후 동포의 글을 읽고, 그 재치를 더듬어 본다...<편집자 주> 

▲ 현청화 약력 : 무역 프리랜서, 1980년흑룡강성 수화시출생.흑룡강성가목사대학일본어학과졸업.2003년부터 온라인창작활동 시작. 현재 광주 거주. 수필[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영혼은 지치지 않는다],[미생지신],단편소설[장사장],[이모],[내몽골아줌마],[신춘향전],[피안]등 발표. 제1회 중국조선족청년문학상 금상 수상.

 

제1편  

슬픈 거짓말

 

 그를 처음 만났을 땐 대학 3학년의 어느 봄날 오후였다. 땅위에 내리드리운 나무그림자 사이로 해빛이 사이사이 비쳐들어오고,멀리서 아지랑이가 다가오는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그런 화사한 봄날이었다. 내가 지극히 싫어하던 어떤 여교수의 수업을 펑크내고,캠퍼스 한쪽 구석의 숲속에서 아름드리 나무 그루터기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끄덕끄덕 졸고있을 때였다. 서늘한 기분에 눈을 떠보니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선연한 남학생이 눈앞에 버티고 서있었다. “왜?여기가 니 자리냐?” 저정도 미모...아니 얼굴이면 학교에서 알려지지 않을리 없겠는데...그렇다고 내가 얼굴을 밝히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걸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못보던 얼굴이니 당연히 후배라 생각하고 말을 놓아버린 내게 그는 잠시 고개를 기울여 볼뿐 아무 말도 없다. “진짜 니 자리야?그렇다고 내게 자리세 받을건 아니지?” 나무 그루터기에서 내려서 먼지를 툭툭 털었다.그런 나를 그는 여전히 물끄러미 바라볼뿐이었다. “뭐 암튼...가끔 올테니 자리 하나 갖고 그러진 마라.” 선배답게 적당히 유연하게 뒷일을 기약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숲속을 나와 숙소로 들어왔지만 선연한 그 얼굴이 눈앞에 얼른거렸다.그후 몇일은 숙소 룸메이트나 친한 선후배에게 물어봤지만 누구도 그런 남학생은 인상이 없다고 한다. “에이,잘생긴 남학생들은 다 여우같은 여학생들이 선수를 쳐서...지금은 쭉정이들밖에 안남았는데 무슨.”“그건 그렇지.” 룸메이트의 말에 나도 맞장구를 쳤지만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은 여전했다. 일주일뒤,그 여교수의 수업은 어김없이 돌아왔고 나는 여느때처럼 수업을 피해 숲속의 나만의 아지트로 향했다.큰 나무 몇개를 에돌아 몇일전 내가 앉았던 그 나무 그루터기가 보일 무렵이었다.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나무 그루터기앞에 고즈넉히 서있는 훤칠한 실루엣은...그가 분명했다. 그가 왜 여기 있을까?설마 여기서 나를 기다리기라도?놀라움과 반가움이 엇갈린 마음으로 나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고,그런 내게 그가 고개를 돌려 싱긋 웃는다. 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화사한 햇살이 그의 미소를 한결 눈부시게 만들었다.가만히 있을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제한 모습이다가도 웃을땐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전율시키다니.나는 홀린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어느 과야?” 그는 내가 던진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웃했다. “우리 과는 아닌거 같고...난 널 본적 없는데.신입이야?”“전산과.”“아...그러니까 내가 못봤지.그런데 여긴 왜?전산과는 저쪽 체육장 뒷건물에서 수업을 듣는 게 아니었어?” 나는 마치 이 대학 모든 학과의 남학생들은 으레 내가 다 알고 지내야 한다는 듯이 떠들어댔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지속되었다.만날 때마다 나 혼자 떠들어댔고 그는 묵묵히 경청만 해주는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말이다.나는 우리 학과 꼴보기 싫은 여교수 이야기에 윗학년 선배를 짝사랑하는 룸메이트 이야기,지난해 체육대회때 누가 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진 이야기며 곧 닥치게 되는 진로에 대한 고민 이야기를 이어댔다.우리는 매주마다 캠퍼스 숲속에서 만났고 그외에는 캠퍼스 어디에서도 우연하게라도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틈만 나면 어디로 쏘다니는 거야?너 그러다 그 학과 빵점 맞을라.교수님이 출석체크에 빠진 애들 벼르고 있어.” 룸메이트의 잔소리가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다.그런 나를 룸메이트가 어이 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너 그 숲속으로 작작 다녀.거기 음기가 성해서 낮에도 귀신봤다는 사람들 있어.” 나는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음...인간세상에 드문 얼굴이긴 하지.”“정말이야.선배한테서 들었는데 거기 불과 이년전 어떤 학생이 목을 맸다고...”“너야말로 그 선배한테 적게 다녀.선배 말이면 팥으로 매주 쑨다 해도 믿겠네.정말 그 선배 여친 있다고 하지 않았어?”“꼴키퍼 있다고 꼴이 안들어가냐?”“그것도 어떤 공격수인가 봐야 할거 아니야?”“너라는 공격수도 거기서 거기지.왜 지금까지 만났는데 아직도 커플로 발전 못했냐?뭐 빛을 못볼 사연이라도 있어?”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빈정대다가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하지만 나는 쉽게 잠을 이룰수 없었다.룸메이트의 말이 묘하게 신경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튿날은 면바로 만우절이었다.매사 직진형이었던 나는 이날을 빌어 한가지 방법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지었다.누가 고백은 남자들의 전권이라고 했던가. 일단 좋아한다고 고백을 던져봐서 놀라는 눈치면 만우절이라는 핑계도 댈수 있고 일석이조 아닌가.아무래도 나는 천재가 분명해.이렇게 자화자찬도 아끼지 않으면서 나는 숲속을 향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그가 하도 어두운 얼굴이어서 나는 섣뿔리 말을 할수 없었다.평소보단 말수가 적어진 내가 힐끔거리며 자기쪽을 쳐다보자 그가 둥근 미소를 그린다. “할말 있어?”“넌 정체가 뭐냐?”“...?”“대체 뭔데 이렇게도...” 사람 마음을 시리게 하니...못다한 말이 입속으로 사라졌다.그가 움찔 몸을 일으켜 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선 그가 고개를 숙였고,싱그러운 바람결에 그의 작은 속삭임이 내 귀가를 간지럽혔다. “...할말 있으면 해.”“난...” 나는 고개를 들었다.그의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 일렁이는 내 모습이 보였다.그가 말하라는 듯 시선을 주었다. “응.”“니가 좋아.” 나는...마침내 고백을 했고,내뱉는 말로 마음의 진동이 이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가슴 한구석이 움찔거렸다. “...” 주위를 살랑이던 봄바람도 잠시 멈춘듯 했고,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도 알수 있었다. “그냥 오늘은 이 말이 하고싶었어.” 이제... 너는 해마다 오늘이 되면 나를 떠올리게 될것이다. 온 세상이 가벼운 농담이나 거짓말로 즐거운 하루를 보낼 때. 지금 내 얼굴의 홍조,내 목소리의 떨림,거짓말이라 만회하려 준비한 내 진실된 마음까지도... 어느것 하나 놓치지 못한채,오늘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아스라히 눈을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그에게 만우절의 기억이라는 혹독한 주술을 건 채. “나도.” 문득 나는 눈을 떴다.이상하다.내 최면이 그에게 먹히지 않다니. “니가 좋아.” 그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사랑해.” 아아.물론...완벽하다.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그날이후로 우리는 다정한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드디어 숲속이 아닌 캠퍼스 곳곳에 밀회를 즐기는 사이가 되었고 손을 깍지끼고 허리를 끌어안는 친근한 애정행각도 서슴치 않았다.그런 우리는 어느새 학생들의 화두에 올랐고 하루는 룸메이트가 정색하고 나를 불러앉혔다. “니 남친이 전산과에서 유명한 괴짜라는 거 알어?휴학도 2년이나 했었대.”“또 니 그 인맥 넓고 박식다학한 선배가 알려준거니?”“휴학 기준이 최장 2년인데,큰 병이나 일이 없다면 누가 그렇게 길게 휴학하겠어?잘 알고 사귀는거 맞어?”“넌 알고 사귀는 게 제3자냐?” 나의 말이 룸메이트에게 준 상처가 깊었는지,그녀는 그후 꼭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더이상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호기롭게 룸메이트를 물리쳤으나 더 큰 산은 뒤에 있었다.드디어 내가 출석을 펑크낸 여교수가 노기충천해서 나를 호출했다. “내 수업에 몇번 빠졌는지 알지?아니다...몇번 출석했는지 본인도 기억하지?”“아마두요.”“너 지금 이 학과 빵점 맞아도 상관 없다는 거냐?”“글쎄요.호르몬이 행동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뇌의 각 부위의 기능을 수년 연구해봤자 제 현상 하나도 제대로 해석 못하는 생리심리학 강의 들어도 무의미하네요.”“너....”“차라리 이참에 교수님도 초(超)심리학으로 연구과제를 바꾸는 건 어때요?” 여교수의 화난 얼굴을 뒤로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문을 닫기전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깟 독심술 좀 안다고....건방진 녀석.” 나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그와 사귄지 정확히 일년이 되는 날,졸업을 앞둔 만우절이 돌아왔다.그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우중충했다.낮에 만나기로 한 그가 하루종일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서 불안했는데 저녁시간이 되자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내리드리웠기 때문이다. “홍콩배우 장국영이 오늘저녁 18시에...” 캠퍼스 저녁방송이 울려퍼지자 곳곳에서 학생들의 경악에 찬 탄식소리가 들렸다.누군가 운동장에서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하지만 나는 아침부터 연락두절된 그를 찾느라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식당에도 도서관에도 교실에도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 무렵 우리가 만났던 숲속에서 나는 드디어 그를 찾아낼수 있었다.내가 자주 앉아있던 그 나무 그루터기에 그가 고즈넉히 앉아있었다.희미한 달빛이 그의 실루엣을 타고내려 자잘하게 부서졌다.하얀 빛에 둘러싸인 그를 보느라니꼭 마치 영혼이 떠난 사람 같았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어?”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그가 고개를 돌렸다.투명한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리...” 나는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그리고는 그의 말을 이었다. “헤어지자?” 그가 다시 고개를 내쪽으로 돌렸다.당혹감으로 가득찬 눈동자가 내 모습을 담은채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나는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서서히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일년 사귀었으면 내 전공이 뭔지 알텐데.”“....”“아니다...사귀기전에 알았겠지.너는 나를 의도적으로 접근했을테니까.”“...”“그래서 일년전에 난 네게 고백을 해줬고,넌 내 고백을 받아줬어.” 나는 다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시린것이 외려 따뜻함을 안겨주던... 그날,그 자리에서. 나는 지금 일년동안 지속되었던 그의 거짓말을 또박또박 발가놓고 있다. “어때?니 복수가...성취감이야?허무감이야?지금 니가 흘리는 이 눈물은 어느쪽이지?”“어떻게...” 그가 드디어 입을 연다.그래...이쯤해서 궁금하겠지. “내가 아니야.”“...?”“니 복수상대는 나 아니라고.번지수 잘못 찾았다고.” 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진다.그래...나도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게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사랑한다고 했어.넌.”“...”“해마다 우리 학교에서 뽑는 만우절 거짓말 베스트 1위에 등극할만한 정도였지.완벽했어.”“...”“하지만...상대가 하필 나였어.”“심리학 전공이어서?” 그의 반문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독심술.” 그는 어정쩡한 얼굴이 되어 나를 보았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아직 증명을 하지 못하는 초심리학 범주라고 할까.난 독심술에 능해.천부라고 해도 좋아.”“...”“넌 날 알아내고,사귀고,헤어지려고 했어.그렇게 복수하려고했어.그게 무엇때문인지 처음엔 몰랐지만.”“...”“작년 만우절 내가 건 최면에도 넌 넘어오지 않았어.복수심이라는 집념이 너의 의지를 단단하게 만들었으니까.그래서난 널 뒷조사했어.의외로 어렵지는 않더라구.”“...”“사랑한다는 거짓말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미움?”“그런 너는 왜 그런 고백을 했지?” 그의 시선이 문득 날카로워졌다.우리는 자정의 숲속에서 이윽토록 서로를 응시했다.누가 봤다면 참으로 기괴한 모습이었으리라. “잼있을거 같아서.”“뭐?”“만우절이기도 했고.너라는 연구대상감이 내 호기심도 자극했으니까.”“...”“지금까지 내 최면에 넘어오지 않는 사람은 없었어.”“...”“그러니 다 잊어.니 복수심이 무엇때문인지 알겠지만 너의 복수대상은 내가 아니야...널 아프게 했던 것들은 다 잊어.니 잘못이 아니야.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서로를 위한 마음들이 얽혀서,누군가를 다치게도 하고,불의의 사고도 일어날수 있어.그러니까 미워하지 마.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이미 발생한 불행에 장본인이 있다면,그것이 곧 우리 삶이니까.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눈물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이번 최면은 성공적이었다. ...... 졸업을 앞두고 룸메이트가 말을 걸어왔다. “나 유학 간다.”“잘됐네.학교에 조교로 남은 니 그 선배는 어쩌고?”“결혼한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침묵하던 룸메이트는 다시 나를 힐끔 보았다. “너 괜찮아?”“괜찮아.실연은 나만 하냐.”“너만 한것 같은데?니 남친...” 내가 힐끗 보자 룸메이트는 금세 말을 고쳤다. “니 전남친은 아무 일 없다는듯 돌아다니더라.전산과 퀸이랑 사귄다고도 하고.” 나는 말없이 창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룸메이트는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선배가 그러는데,우리 졸업후에 학교에서 대규모 공사 시작한대.저기 숲속은 밀어버린다 하네.”“...”“잘됐지머.이젠 우울증으로 나무에 목매죽은 학생 혼이 떠돌아다닌다는 그 소문 잠재울수 있으니.” 나는 서글피 입꼬리를 올렸다.멀리 숲속에 걸린 잔양이 피빛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외국행을 선택한 사람은 룸메이트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몇일후 알게 되었다.인파가 붐비는 공항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질리게 봐왔던 얼굴을 마주했다.긴 곱슬머리와 생머리가 구분되었을뿐 부모가 우리 얼굴에 작용한 유전자는 놀라울 정도로 근접했다. “잘 가요.교수님.”“학교밖이니 이젠 말 편하게 해도 괜찮아.” 그녀는 살짝 웨이브를 넣은 머리를 목뒤로 쓸어넘겼다.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린 흔적이 분명한 그녀 눈밑의 다크서클이 내 시선안에 들어왔다. “갑자기 웬 연수?”“원래는 좀 더 일찍 가는건데 너 졸업하는거 보려고.”“내가 어린애냐?혼자 졸업 못하게?”“니가 말한 초심리학 전공은 아직 미국밖에 없더라.”“정말 그것때문에 가는거야?” 내 질문에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응.” 탑승수속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고맙다.”“뭐가?”“그냥 다...”“언제 올거야?”“글쎄...” 그녀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게이트안으로 들어갔다. “말 전해.미안하다고.”“언니 탓이 아니야.” 우리는 작별인사 대신 서로 동떨어진 말을 주고받았다. 학교에 돌아온 나는 덤덤히 그녀의 사무실에서 액자를 거두어 가방에 수습해 넣었다.그녀의 옛 연인으로 추정되는 어떤 남자의 사진이었다.사진속의 남자는 내가 잘 아는 그 누군가와 어깨를 결은채 활짝 웃고있었다. ...... 졸업한후 나는 정부의 어느 한 심리연구실에 추천한다는 학교측의 제의를 거절하고 멀리 도시의 외곽에 자그마한 개인 심리상담실을 오픈했다.10년이 지난후 나는 이 도시의 인지도 높은 심리상담사로 이름을 날렸고 의뢰인들의 방문에 문턱이 닳을 정도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또 하나의 만우절이 찾아왔고,지인과 친우사이 가벼운 농담과 거짓말들은 여전히 유행을 타고있었다.퇴근준비를 앞두고 마지막 한사람의 클라이언트가 곧 방문한다는 비서의 내선 전화가 울렸고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오늘은 야근 안하는걸 몰라요?”“죄송합니다.원장님...제가 깜빡하고 예약을 받아놓아서요.30분만이라도 안될까요.”“들어오라고 하세요.” 벗으려던 가운을 다시 입고 자리에 앉은 나는 인기척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서로 뒤엉킨 시선사이로 숨막힐듯한 적막이 흘렀고 잠시후 내 입술사이로 허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집요하시네.여기까지.”“네?” 의뢰인 남자가 내 맞은켠에 앉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정제한 모습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얼굴과 행동...나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표정관리를 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복수를 하고싶습니다.” 나는 시선을 들어 그를 이윽토록 보았다. “복수...요?”“네,만우절 복수...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그리고는 한결 차분한 태도로 그를 마주했다. “왜 하필 저를 찾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독심술과 최면에 능한 상담사님이라 들었습니다.”“그뿐인가요?”“아,또 하나...거짓말에 능한 분이라 알고있습니다.”“거짓...어떤 거짓말을 했는데요?”“글쎄요.슬픈...거짓말?”“왜...슬픈가요?” 나는 차츰 입안이 말라드는 감을 느꼈고,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난...진심이었으니까.” ...... 세상에서 제일 강한 최면은 바로 주술자와 피주술자의 감정이었다.11년전 나는 그를 상대로 최면을 걸었지만 그의 사랑고백에 외려 역최면에 걸려버렸다.다행이 독심술에 능하고 의지가 강한 덕에 정확히 일년만에 최면에서 풀려날수 있었다. 10년전 만우절날 밤,장국영의 불행한 소식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그 최면을 풀 의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날 내가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면,그는 증오와 회한의 감정으로 누구처럼 생을 마감할지도 몰랐다.그때의 그에게 사랑은 적합하지 않았다.꼭 마치 그의 절친처럼. 그가 2년 휴학을 신청했던 이유는 우울증때문이었다. 휴학도중 비슷한 우울증 증상을 겪고있던 그의 절친이 심리학 전공인 여인을 만나면서 치유가 되는 과정에 캠퍼스 숲속에서 자결했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 전해졌다. 그는 휴학을 마무리 하고 친구의 일기장에서 단색을 찾아나섰다.친구의 죽음은 그다지 미스테리는 아니었다.만우절 헤어지자는 여친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게 도화선이었다. 농담이라는 건 밝혀졌으나 그로 인해 불안해진 친구는 여인에게 둘사이를 오픈할 것을 요구했고,그것으로 둘의 연애는 파국을 맞이했다. 사연이 어찌되었든 친구가 한 선택은 극단적이었다.그러나 그는 친구가 남긴 유언 내용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복수해줘.더도 말고 덜도 말고,사랑때문에 아프게.” ......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이젠 이해가 되었어?”“내탓 아니야.친구가 그린 초상화가...실제보다 많이 어려보였어.” 10년의 시간을 건너뛴 우리는 커피를 앞에 두고 석연하게 마주앉았다.나는 커피잔에 그려진 정밀한 난초그림에 시선을 내렸다. “그때문에 그 멍청한 여교수는 아직 먼 이국타향에서 오랜시간동안 자아학대를 하고있지.”“여기서도 한 멍청이가 휘황한 전도를 포기하고 개인 심리상담실을 운영하고있고.”“난 언니보단 나아.”“말 전해줘.누구의 탓도 아니야.” 나는 힐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이미 발생한 불행에 장본인이 있다면,그것이 곧 우리 삶이니까.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니까.”“부탁인데,남의 말을 도용하지 말지?” 내가 눈을 흘기자 그는 피씩 미소를 지었다. “왜?망각의 최면에 걸리지 않아서 화난건가?”“거짓말쟁이.”“내가?”“사랑한다는 말도,최면에 걸린척 한것도...어느것 하나 진심이 없어.그러고도 내가 거짓말에 능하다고?”“잘못했어.” 시선을 내려 순순히 시인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피씩 웃었다.차츰 내 눈앞이 흐려졌다. “못됐어.정말.”“잘못했어.”“십년씩이나...기다리게 하고.”“잘못했어.”“나쁜자식...전산과 퀸카도 사귀고.”“잘못...”“지금 이것도 만우절 거짓말이지?다음에 또 복수하러 오고 그러는 건...” 내 말이 급작스레 멎었다.그가 몸을 일으켜 키스로 내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머리속이 하얗게 비었다.미처 방비하지도 못하고 다시 그의 역최면에 걸려버린 것이다. “보고싶었어.” 아아.이젠 안풀어도 되었다.최면 따위. “사랑해.” 이걸로 되었다. 거짓말이든 정말이든... 이젠 난 더이상 슬프지 않으니까. 창밖에는 어둠을 밝혀주는 네온사인이 이 도시를 오래동안 지켜왔다는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제1편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

 

 춘추시기 정백(鄭伯)의 한사람가운데 정장공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정장공의 이름은 오생(寤生)으로서,그 어머니인 강씨가 잠결에 낳았다고 지은 이름이었다.   강씨는 잠결에 아기를 낳은 것이 불길하다고 느껴져 줄곧 오생을 꺼렸다.  오생의 동생으로서 태숙 단이라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강씨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강씨는 총명한 태숙 단으로 하여금 정백의 뒤를 있게 하고싶었으나,그의 제의는 장유의 질서를 깊이 알고있는 정무공에게 건납되지 않았다.   정무공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장공은 주평왕(周平王)의 좌경사(左卿士)가 되어 조정을 장악했다.  일찍이 왕명을 빌어 송(宋)나라를 정벌했고 제(齊)나라,노(魯)나라와 연합해서 송나라,위(魏)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    한편 강씨는 그런 정장공으로 하여금 태숙 단에게 두번째로 큰 경성을 떼주게 했다.  정장공이 어머니의 뜻을 받들자 대신들은 의논이 분분했다.   “태숙은 주공의 동생이십니다.  주공이 위를 이으면 태숙은 멀리 떨어진 작은 도읍을 떼여주어 살아가게 하는것이 도리입니다.  태숙에게 나라에서 경성을 떼준다는것은 화를 불러오는 일입니다.  ”“어머님이 그리 분부하셨는데 어떻게 어긴단 말이요.  ” 정장공은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경성을 받은 태숙 단은 비밀리에 강씨의 명을 받들어 사냥을 핑계로 군사훈련에 열중했다.  그리고는 주변의 이웃마을들을 무력으로 쳐서 빼앗아 땅을 넓혔다.  땅을 빼앗긴 관장들이 이를 고하자 정장공은 잠잠히 아무 말도 없었다.   공자 여가 정장공을 찾아가자 정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이미 대책을 세웠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  지금 군사를 일으킨즉 모친이 반대하려니와 모든 사람들의 입에도 오를 것이다.  차라리 단의 잘못을 길러 그가 반역하기를 기다려 그 죄를 묻는다면 모친의 입도 막고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알 것이다.  ” 결국 태숙 단은 시기를 엿보아 강씨와 내응하기로 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나,미리 준비가 있은 정장공의 방비로 크게 실패하고 낡은 공성으로 쫓겨갔다가 정장공이 공성을 함락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파생된 전고(典故)는 여러가지가 있다.   바로 “불의를 저질러 화를 자처하다(多行不义必自毙)” “잘못을 길어 그 죄를 묻다” “황천에 가기전에는 만나지 않는다” 등이다.   정장공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 것으로 알고있다.   우선 정장공은 정치적으로는 큰 업적을 이루었으나,태숙 단의 내란을 키워 진압하는 과정에 국력소비가 엄청나서 패권을 잡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제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 강씨에게 한 “황천에 가기전에는 만나지 않겠다.  ”는 맹세는 대신 영고숙의 지혜를 채택하여 후세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다소나마 줄이긴 했지만,“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성에까지 허위와 가식의 수단을 아끼지 않은 방식으로 지금까지 부정적인 평가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고금중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는”것은 과연 정장공 한사람뿐이었을까.   돈을 빌리기 좋아하는 지인이 있었다.  그 지인은 처음엔 소액으로 돈을 빌리다가 후에는 점점 그 액수가 커졌다.  소액으로 돈을 빌릴때는 친구사이 그정도 돈도 안빌려주겠냐 싶어서 거절을 하지 못했다.  후에 금액이 커졌을 때에는 줄곧 빌려주다가 갑자기 끊어낼수 없어서 역시 거절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지인은 마지막 한번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빌려간후 연락을 두절했다.  일년후 다시 어렵사리 연락이 되었지만 그는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연락이 두절된 일에 대해서는 다만 개인 사정으로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더이상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처음부터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돈을 빌려가는 차수가 잦아졌을때 따끔하게 충고를 주었더라면 친구를 잃지 않았을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친구와는 다른 일로 버성길수도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 친구의 잘못을 키운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비슷한 예로 번역을 가끔 부탁하는 학교 선배가 있었다.  처음엔 간단한 단어를 물어보는 정도였는데 후에는 문구,단락,지어는 꽤 긴 문장에 이르렀다.  나중에 몇페이지나 되는 문서 파일로 보내오면서 언제까지 번역해서 넘겨달라는 부탁까지 곁들었을 때에는 이미 그 빈번함이 도를 넘어서 내 생활에 퍼그나 영향을 주는 정도였다.   나는 몇번이나 거절하려고 했으나 딱히 거절의 이유를 찾지 못하여 한번,또 한번 번역에 임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부탁해온 사람에 대하여 내가 더이상 그 재간이 없다라는 말이 차마 입밖에 나오지 않은 경험이었다.  후에 나는 기한을 미루는 것으로 완곡하게 거절의 태도를 표시했으나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득달같이 재촉을 당하고 끝내는 짜증을 내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선배가 나와 연락을 중단했다.   나는 두번의 경험에서 거절에 약한 내 성격이 쉽게 타인에게 뭔가를 권하거나 부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길러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권유나 부탁을 거절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걸로 오해받을까 염려했지만,나중에 감당하지 못할 청을 무리하게 들어주어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그에 관한 인간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것 보다는 처음부터 명료한 입장을 취해주는 편이 더 나은 거라고 뒤늦게야 깨달을수 있었다.   그렇다면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지 않고 잘못이 크지기전에 그 잘못 된것을 바로잡는 방법에는 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번째는 거절을 자주 연습해야 한다. 거절은 나쁜 것이라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우선은 사소한 부탁이라도 사양하고 금지시키는 방법을 쓰는 것이 우선이다.  둘째로는 불필요한 인간관계의 유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게 자잘한 부탁을 자주 하는 사람중에는 이기적이고 배려심이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인간관계는 내 삶의 긍정적 에너지와 시간적 여유를 갉아먹는 인간관계일수도 있기때문에 과감히 버릴수도 있으며 그 관계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정작 마음을 넓게 포용해야 하는 때에 이르러 감정적인 기질을 발휘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버려야 한다. 상대방이 부탁을 해올때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제때에 불편한 감수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민이 지나쳐 도와줌으로써 상대방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착각을 주면서,속으로 그 상대방에 대해 불만이 생긴다면 애초에 돕지 않는 편이 낫다. 평소에는 심성이 너그러운척 습관적으로 수용하다가 한계에 이르러 갑자기 화를 내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돌발상황이라 분명 억울한 느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상대방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하고 상대방과의 인간관계를 소중히 생각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바로 첫 이야기에서 정장공은 태숙 단에 대해 진정 혈육의 정으로 대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돈을 빌려간 지인,번역을 부탁한 선배와의 관계를 진정한 우정으로 대했던 걸까. 그리고 그 우정에 걸맞게 최선을 다한 충고를 건넨적이 있던가.  춘추의 오패에서 유감으로 사라진 정장공의 진심이 무엇이었든간에,그가 남긴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는” 방법이 후세에 이렇게 회자되어 인간관계의 시금석으로 쓰일줄은 아마 정장공 본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의 존재가 불안해지자 제거할 명분을 얻기 위해 계략을 써서 천하를 속이고 후세에 골육상잔의 예를 남긴 정장공의 졸렬함이 결국 그를 춘추오패의 자리에서 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졸렬하게도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친구를 가까이하고 쓴소리를 하는 친구를 멀리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친구의 잘못에 대해 함구하다가 그 잘못이 서로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면 우정마저 버리지 않았던가.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진정한 우정은 어떤 방식으로 영위해가야 하는지,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솔함,성실함뿐만 아니라 옳바른 처세술도 한몫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살면서 나는 누구의 잘못을 길러준 사람이었을까,아니면 누군가에게 잘못이 길러져 있는 사람일까…많은 사색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연변일보 6월1일 해란강지면 발표.) 
▲ 여행은 세상을 배우는 계기가 된다. 젊음은, 그래서 더더욱 여행의 아름다운 코스를 그리게 된다...<편집자>
   제3편

피안(彼岸)

 그녀를 만났을때 나는 봉두난발에 헐렁한 수유복을 입고3개월이 채 안된 딸애를 띠로 안고 있었다. 늘 그러하 듯 파스타와 피자를 곁들어 먹을 수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우리는 만났고 그녀는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혼자 나오는 줄 알았더니…”“애를 볼 사람이 없어요.”“남편은?”“그이는 그이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요.”“아무리 그래도 커피 한잔 할 시간도 안 주니?” 남자가 백일도 안된 갓난아이를 본다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이며 딸애가 모유수유중이어서 엄마를 떠날 수 없다는 설명을 구구히 하려다가 나는 관두었다. “뭐 드실래요?”“이미 시켰어. 니가 좋아하는 매운 것들로.”“아… 수유 중이라 매운 거 못 먹어요.” 내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종업원을 불러 메뉴를 변경시켰다. 그녀는 내가 출산 전 다니던 회사의 오너였다. 아직도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의 그녀 표정이 나는 기억에 생생했다. “결혼?”“네.”“결혼한다고 사직하니?”“저 임신했어요. 6주 넘었어요.”“…”“의사가 상황이 안 좋다고 보름 입원하라고 하네요.” 회사는 업무량이 많고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였다. 아무리 비상상황이라 해도 내게 보름이라는 휴가는 있을 수 없는 사치였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주일만 입원하면 안돼?”“출산휴가는 가능하겠어요?”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그녀는 말없이 한숨을 톺아올렸다. “차라리 지금 새 직원을 뽑아서 가르치는 게 더 빠를 거 같아서요. 성수기에는 직원 교육할 시간조차 없으니깐요.” 나로서는 모든 사심을 빼고 최선의 방법을 제안한 셈이었다. 그녀는 끝내 사직서에 사인을 했고 나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였다. 그리고 일년 후, 그녀는 나를 호출했다. “집에서 일을 좀 봐줄 수 있을가? 출퇴근은 안해도 돼. 페이는 원하는대로 줄게.” 다행이도 지금은 위챗이며 카톡으로 모든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여 있었다. 폰으로 여러 문서 앱을 다운받을 수 있고 파일을 첨부한 메일도 보낼 수 있다. 컴퓨터가 하는 일을 스마트폰이 대체하는 시대가 왔다. “가끔 만나서 중간점검은 해줄 수 있겠지?” 그래서 정한 곳이이 카페였고 그녀는 커피가 올라오자 바로 노트북을 작동시켰다. 하지만 얼마 안 되여 딸애가 요란하게 울어번지기 시작했다. “기저귀가 젖었나봐요. 잠시만요.” 화장실에 가서 아기 기저귀를 바꿔주고 돌아오니 그녀는 노트북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중간점검은 메일로 하자.”“네, 그러죠.”“너는 왜 그리 빨리 결혼해서는…” 그녀가 입끝까지 올라오는 지청구를 간신히 참는게 보였다. 나는 딸애를 달래며 시무룩히 웃어보였다. “서른에 결혼했으니 빠른 건 아니죠.”“그래도 한창 멋부릴 나이에 이게 뭐니?”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내 헐렁한 수유복에 와 닿았다. 나 역시 그녀의 정제된 옷차림과 아름다운 메이크업, 한들거리는 귀걸이와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를 눈에 담았다. “그러게요…”“내가 이래서 결혼이란 걸 안하는 거다. 나중에 정 아기가 갖고 싶다면 그때 하면 몰라도. 연애만 하면서 즐기면 될 걸 왜 덜컥 결혼까지 해서는.” 그녀는 담배 한가치를 꺼내다가 아기가 빤히 쳐다보는 것을 의식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자유라고는 꼬물만치도 없지, 육아는 혼자 전담해야지, 애가 크면 늙어버리지… 여자 인생이란게 뭐야? 젊은 나이에 제대로 실컷 즐기지도 못하고 남편 위해 아이 위해 희생하는게 여자 인생이니?”“…”“다음에 또 보자.”“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기의 수유시간이 다 되였는지라 나는 그녀의 작별인사가 내심 반가웠다.  그렇게 유선상으로만 연락이 유지되다가 그녀가 다시 나를 호출했다. 이번은 호프집이였다. 나를 불러낸 것은 업무에 관한 일이 아니었다.이번에는 딸애가 조금 커서 유아용 의자에 간신히 앉힐 수 있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간잔지런해진 눈을 뜨고 나를 보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프집에 애를 데리고 오는 사람은 아마 너 밖에 없을 거다.”“남편이 출장 갔어요.”“어차피 집에 있어도 네가 데리고 나와야 하는 게 아니야?”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라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앞의 빈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술은 당연히 안되겠지?”“네, 수유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요.”“이젠 끊을 때도 되지 않았니?”“두살까진 애 면역력 때문에 수유 견지하고 싶어서요.” 그녀는 더이상 이 화제는 이어나가기도 싫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 오늘 헤어졌어.”“만나던 그 분이랑요?”“응.”“이번은 제대로 만난 거 같다고 하지 않으셨어요?”“자식이 꼼수를 부리는 거야. 재수없이.”“…”“결혼 전 부동산에 제 명의를 넣어달래.”“아… 네.”“그리고 결혼식 비용을 반반 부담하재. 게다가 신혼집 가구는 내가 사넣고. 말이 되냐?”“결혼 얘기까지 오갔어요?”“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떠봤지. 그랬기에 다행이지, 아니면 그 자식 이런 얍삽한 계산 하고 있는 줄도 모를번 했잖아.”“…”“정말, 넌 어떻게 결혼했니?” 그녀가 자세를 고쳐앉았다. 나는 딸애에게 쌀과자를 건네주면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저희는 무일푼으로 결혼했어요. 같이 벌어서 같이 내고, 재산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없이요.”“사돈 보기는? 례물은?”“생략했죠.”“함은? 젖값은?”“그런 거 다 해야 해요?”“저런, 헐값에 팔렸군.” 혼인이 장사냐고 한마디 되물으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이 도시에서 한다 하는 도매상들은 다 알아주는 유명한 에이전시로서 그녀는 모든 일을 장사와 연관짓는 일에 능숙했다. “이 것 저 것 다 따지면 피곤해져요. 그냥 웬만한 건 넘어가주고 그러는 거죠 뭐.”“너 그렇게 헌신하다 헌신짝 된다.”“짝이라도 있는 거에 만족하죠 뭐.” 문득 그녀가 조용해져서 나는 내 실언을 깨달았다. 때마침 딸애가 징징거려서 나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가 한 곳에 오래 앉아있진 못해요. 나중에 또 뵐게요.” 그리고 일년 후,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시키는 일이 점차 적어져서 다른 알바라도 찾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시점이였다. 이번엔 길거리 포장마차였다. 눈가에 진 잔주름은 더이상 메이크업으로 커버가 안되는 모양으로 그녀는 몰라보게 초췌해있었다. 이번엔 아이가 있건말건 그녀는 다짜고짜 담배를 물었다. “나 사기 당했어.”“어느 업체인가요?”“업체 아니고 남자.”“아…”“바에서 만난 남자인데…”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유독 밤생활이 현란한 이 도시에서 흔히 들려오는 퇴폐적인 이야기 중 하나였다. “경제적인 손해를 보셨나요?”“뭐 한 이삼십만원쯤?”“그 정도는 괜찮네요. 그냥 털어버려요.”“그런데 이 놈이 연락을 안 받아. 내가 그렇게도 문자를 보냈는데 씹더라? 나쁜 새끼.”“문자 보내서 뭐 하게요?”“서로 잘 지내라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안 그래? 우리가 뭐 원수냐? 그깟 돈으로 잠적하다니? 나쁜 새끼…” 나는 작게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테이블 주위를 촐랑거리며 뛰어다니는 딸애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녀가 다시 담배 한가치를 붙였다. “넌 어때? 안색은 퍽 좋아보인다.”“애가 크니 좀씩 좋아졌어요. 힘든 시기는 다 지나가게 되어있는가 봐요.”“나, 그냥 아무 남자나 찾아 결혼할가?” 나는 다시 그녀의 삭막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남자…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어요?”“아니, 애가 갖고 싶어서.”“그 애한텐 불행이 아닐가요? 감정 기초가 없는 가정에서 태여나는게.”“그렇기도 하겠네.” 다행히 그번 만남에서 그녀는 깜박했는지 더이상 남편은 뭐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작별할 때 그녀의 시선은 딸애의 얼굴에 꽤 오래 머물러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최근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에이전시 일을 접고 백수로 빈둥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녀로부터 독립해서 자영업을 시작했고 제휴하고 있는 업체와 바이어도 꽤 많이 불어나있었다. 나는 늘어난 수입으로 도우미 아줌마를 고용했고 딸애는 이젠 유치원을 다녀서 개인 시간도 부쩍 많아졌다. 역시 처음 만났던 그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고, 이번에 그녀는 내가 혼자인 것이 퍽 신기한 모양인지 나를 아래우로 훑어보았다. “일은 잘돼? 그렇게 꾸미고다니니 애 엄마 같지 않구나.”“네, 그럭저럭.” 나는 그녀의 맞은켠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올라온 커피 한모금을 들이켰다. “나 결혼하려고.” 그녀의 말에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우멍한 시선으로 나를 건너다 보았다. “생각해보니 나이도 꽉 찼지… 널 보니 결혼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꾸 이 것 저 것 따지고 남자 조건도 보고 그랬는데, 세상일은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그런 장사 같은 것도 아니고.”“…”“사람만 좋으면 설령 무일푼이라도 내가 재산이 있으니까… 사는 걱정은 없을 것 같아. 전에는 이런 거 민감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상대방에겐 그리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도 있더라구. 서로 가치관 차이는 분명 있지만 또 마음만 먹으면 극복해낼 순 있을 거 같고.” 두손을 마주잡고 이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경건하다 못해 그 어떤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피씩 웃었다. “그렇긴 하죠.” 나는 웨이터를 손짓으로 불러 라이터를 달라고 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담배 펴?”“네, 일 하다보니 그렇게 되네요.” 나는 연기 한모금을 깊숙히 빨아들였다가 허공에 대고 작은 동그라미를 내뱉었다. 동그라미는 점점 그 윤곽을 넓혀가며 공기 속으로 침투되였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건가요?”“그래, 니 남편 주위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시켜주라고. 이젠 맞선을 볼 거야. 나이나 가진 것 이런건 다 괜찮고 그냥 무던한 사람이면 돼. 나 올해 안으로 꼭 결혼하고 싶어.”“어쩌죠? 저 이건 못 도와드릴 거 같아요.”“왜?” 나는 동그란 담배연기 속으로 그녀의 희미해진 얼굴을 보았다. 차츰 의혹으로 물드는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드디어 피안(彼岸)의 세계를 보았다. 그곳은 황량한 무(無)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끄고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말아올렸다. “저 이혼했어요. 꽤 오래전에.” (연변일보 11월30일 해란강지면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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