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류일복 수필가의 수필은 아주 디테일하다. 현장의 목소리를 그린 듯이 전달하며 깨달음을 녹여내는 재치가 돋보인다...<편집자>

▲ 류일복 약력: 중국 화룡시 숭선촌 태생. 화룡방송국 편집기자. 청도 한글신문사에서 기자 근무. 연변작가협회 회원. 2010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직장 생활. 2016년 수필집 <한국서 밥 먹고 삽니다> 출간. 문학상 수상 다수.

         제1편 

     쐐기목

 

야적장의 겨울날이 틈서리로 꽉 차오르는 황소바람처럼 쌀쌀하다. 드럼통 난로에 불을 지피려고 쐐기목들을 조몰락거린다.

오랜 세월 평소 육중한 파일의 뒤치다꺼리로 한 치도 드티지 않은 쐐기목은 온전한 제 몸이 아니다. 늘 햇빛과 바람 속에서 몸을 내번지고 일해선지 금이 가로비쌔지고 모가 으끄러지고 색조차 바래 건드릴 때마다 아픈 듯 달그락거린다. 불쏘시개로도 적격임을 표방하듯 금세 불길이 일고 연기에 가려진 쐐기목들은 아련해진다. 제 몸을 던져 추워하는 이들을 혼혼해주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검정 티끌로 남는 쐐기목은 어쩜 직삼각형으로 민틋하게 대팻밥을 먹으면서부터 제물로 귀추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순간 일가붙이를 떠나보내는 화장장에 마주선 것 같이 마음이 서글프다.

야적장에서 일하면서부터 쐐기목은 항상 내가 놓치지 않는 어느 일도구보다 중요한 비품으로 간수되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쐐기목은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파일과 침목사이 바특한 틈을 노리고 30~40도쯤 각도로 몸을 딱 박고 파고들면 무게가 최저 2톤이 넘는 콘크리트 파일도 감히 껄떡대지 못한다.

콘크리트 파일을 상하차 하는 지게차 기사들과 데모도인 내가 손발을 맞추는 것보다 더 중요시한 것은 눈길교환이다. 바깥쪽으로 더듬듯이 삼가며 오와 열을 맞추어 쌓아 나온 후 지게차 발로 맨 바깥 파일을 떠받친 기사의 눈짓신호탄이 신중히 허공을 가르면 나는 독립군마냥 지게차 발밑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 적의 화구에 작탄을 투척하듯 마무리작업으로 쐐기목을 괸다.

저 육중한 놈이 쉽게 굴러 떨어질라고. 갓 입사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경쳤다. 콘크리트 파일이 서로 닿지 않게 끈을 묶어주는 작업이 진행되도록 기사가 지게차로 뜬 파일을 굴려 조금씩 틈을 내주는 중이었다. 눈썰미가 없는 나는 지레채고 나부대다가 그 틈에 손등을 짓찧고 말았다. 육중한 무게라 변을 당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는 너스레를 늘어놓았던 동료들이 이때다고 법석구니를 하는 모습에 나는 더 기가 꺾여 다친 손을 감아 잡고 정형외과로 향했다. 요행히도 타박상으로 머문 데는 파일 사이에 서로 닿지 않게 묶어 주다만 비닐 끈의 이바지가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그때 사고 이후 나는 현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쐐기목이 암팡스레 받쳐져 있는 가부터 살핀다. 거무칙칙한 콘크리트 파일 밑의 제쳐둔 암팡스러움이 언제 잊고 지나가는 빈틈이 되어 대형사고가 생길지 몰라서다.

먼 길을 떠나는 트레일러 기사들도 파일을 실은 밑줄 침목에 쐐기목들을 꼭 물리고 시름 놓이지 않는지 대못까지 쾅쾅 박아 넣는다. 일단 틈이 생기면 운전 도중 시나브로 확대되고 스태빌라이저마저도 효용이 없는 외경험에 그 누구보다 아로새기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그런 틈새가 제 자리인 쐐기목은 콘크리트 파일이 굴러 떨어지지 않게 파수를 보고 야적장에서 함께 해오는 동안 내 생명안전을 든든히 지켜주는 보물이었다.

돌이켜보니 아버지도 땔나무시절 쐐기목을 사용했다. 아버지는 새 도끼자루를 만들 때마다 쇠도끼와 나무자루 짬에 뾰족한 쐐기목을 박았다. 팽이처럼 생겼지만 윗몸은 말라깽이인 굴참나무 쐐기목이 수분이 가득한 도끼자루에 파고들면서 몸집을 불리면 쇠도끼 아귀에 꽉 차고 사개가 단단히 맞물렸다. 짬이 없는 도끼는 아무리 힘껏 휘둘러도 빠지지를 않았다. 아버지는 땔나무를 찍다가 도끼자루가 헐렁해지면 즉석에서 뾰족한 쐐기목을 깎아 급한 땜질을 하기도 했다.

나의 인생에도 쐐기목 비슷한 것이 꼬라박힐 때가 있었다. 학력이 낮고 저축이 없는 내가 장인에게 감잡히면서 결혼 후에도 볼썽사나워 했다. 모진 장인에 미운털이 붙었지만 헐수할수없이 불미스런 틈새를 메우고자 돈이 되는 직장을 찾아 일한 나는 틈틈이 독학도 시작했다. 해외 근로자생활에서도 동료들은 퇴근 후 끼리끼리 주흥을 즐기러 다닐 때 학구열이 식지 않은 나는 도서관의 단골손님이었다. 점차 알차지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반전의 쐐기를 쳐준 장인에게 비로소 아픔이 멎고 딱지가 앉았다. 생살에 쐐기목을 받아먹으니 얼마나 아팠겠냐만 빈틈없는 든든한 부부가 되어 오래갈 수 있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뿐만 아니다. 허다한 외짝의 해외 근로자생활이 견우직녀가 되게 하고 미로처럼 아득해진 거리가 틈새로 생성했다. 별거라는 벌거벗은 꼬리표에 헐렁해진 그들의 사랑의 도끼자루가 쉽게 빠져버릴 때 사이 버성길세라 바투 들이대는 것이 일인 쐐기목을 정신 번쩍 들게 심장부에 꽂아 주리라.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쐐기목이 참고 견뎌내는 고빗길이라면 훌륭하게 사수해내지 싶다.

살다보니 내 인생은 끊임없이 틈이 생겨 쩍쩍 갈라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면서 골머리 썩일 때가 많은가 하면 이런 저런 틈서리를 노리고 파고들어 온 많은 것들이 고통스럽게 하고 상처가 된다. 그때마다 헐렁해지고 금이 생기기 시작한 곳에 더 깎고 다듬어진 두 아버지의 쐐기목이 갈길 헤매는 송아지 어르듯 수월수월 흔들려 맞춰 넣으면서 결국 깊이 파고들어와 사개를 단단하게 맞물려주곤 한다.

우리 주위에는 구석구석 눈여겨보면 항상 도움닫기가 되면서도 얕잡아보게 되는 하찮고 수수한 것들이 지천이다. 자기보다 천만 곱절 무거운 녀석도 주눅 들지 않고 온몸을 내던져 버텨내는 천만금같이 보배로운 쐐기목처럼 관건적인 순간에 내 손을 덜 다치게 한 비닐끈처럼 이 세상의 작은 것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리라.

 

▲ 청도에서

        제2편 

     돼지머리가 날 웃다

 

유한꽃차례같이 귀밑머리, 눈썹, 코밑, 입아귀, 턱수염 등을 면도기로 깨끗이 밀어주자 허옇게 잘 생긴 녀석으로 탈바꿈하는 돼지머리가 날 보고 살포시 눈웃음 짓는 것 같다.

가끔 수백 마리 실려 온 돼지머리털을 반나절 깎아내야 하는 지루함은 재미나는 연상으로 몰아내려고 애쓴다. 나처럼 머리카락이 빳빳이 쳐들린 녀석은 어깃장을 잘 부리는 야비다리고, 양볼제비처럼 튀어나온 볼때기에 턱주가리가 두둑한 녀석은 잘 먹고 잘 살아온 부잣집 도련님으로 소묘해낸다. 말라깽이 같이 마른 녀석은 자기 해도 잘 뺏기는 가련한 허섭스레기로 치부하고 귀때기에 둥근 혹이 딸린 녀석은 귓불에 멍울 같은 혹이 붙어도 언제나 밝게 웃던 건넛집 아저씨가 떠오르게 한다.

어쩜 나름의 인생도 잘 살든 못 살든 저승사자가 인도하는 저승길로 넌 난 날 내 났듯이 결국 다 가야 하지 않던가? 숨 탈 때 서로 어울리어 일하는 행복을 느끼고 둘이 나누는 일이 하나 되는 인연의 기쁨도 만끽해봐야지 않던가!?

옛적에 백정이 탄 가마는 동네 개가 짖는다는 천한 직업으로 일컬어왔다면 우리 일터는 칼잡이의 정석도 보여줄 푸줏간이 따로 없었다. 해녀들에 버금가는 물질을 하고 선지를 갈다보면 얼굴에 피칠갑을 하며 칼끝으로 짼 창자에서 썩은 똥물이 튀기도 하는 진일과 두꺼비씨름을 해오는 게 전부다.

작업장은 인과관계를 떠나면 더 일이 안 된다. 신입인 나의 실수도 “괜찮아.”라는 단골소리로 다독여주고 굼뜬 일손이어도 성가셔하지 않고 알아서 품앗이를 해주는 동료들이 내심 다습다. 출근 일주일째인 내게 오래 된 것 같다고 해준 이반장의 귀엣말은 많은 구직자들이 사흘거리로 떠난 데 대한 위무인 것을 미처 몰랐다. 일도 힘든데다 동료들의 내밀손이 탐탁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루박을 속셈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반장이 허드레옷을 주어입고 주먹구구식 농사를 지을 때 책상머리에서 고무줄 통계로 달걀 낟가리 쌓던 번지르르하던 나의 과거는 모두 이곳에서 묵혀졌다. 여기서는 일동무만 있고 어깨동무만 소중했다. 손방처럼 일에 휘둘린 나를 뚝심 좋은 이반장이 차근차근 이끄는가 하면 출근부에 아라비아숫자마저도 비뚤비뚤 메워내고 있는 캄보디아 청년의 알음장은 미끄러운 물 바닥에 넘어질까 걱정하는 순후함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우리 재외동포 비자와 달리 취직 선택이 몇 번 없는 그 청년이 걸리적거리는 동료의 비위에도 맞장구를 놓으려니 참속인들 오죽했을까?

일은 사람으로 출발해서 사람과 마무리 짓는 일이다. 일이 사랑이라고 그렇지 못한 동료사이가 애매해지고 일이 일로 된다. 일은 무게나 기술 때문에 힘든 것보다 그 귀결에 닿기 위해 하루해를 함께 알이마를 맞대야 하는 동료와 극과 극을 달려야 하는 간격에서다. 자신만의 편리나 이기의 잔머리는 피죽바람에 말려 노숙자 술안주 같은 노느몫보다 더 나은 생산성은 없다.

청소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마다 사원 한 명씩 동원되어 산더미를 이루는 쓰레기주머니를 버리러 갈 때면 동료들의 잡을손이 감질나게 그립다. 미꾸라지 한 마리 개울 흐리듯 더럽고 무거운 일엔 늘 일손이 새빠지고 또 그럴라치면 손힘이 곱절 들어야 하는 대열의 편성이다. 일정한 간격의 원추형으로 서로서로 동아줄에 묶여 가로수를 받치는 지지대들처럼 이 손가락에서 받아 그 손바닥으로 넘기고 저 손길에 옮겨나가면서 단단히 엮어질 수밖에 없는 단결의 질서라야 덜 힘들면서도 빨리 끝나니까.
이럴 때일수록 동료여서 훈훈한 향기를 어찌 잎 없는 꽃무릇에 비기랴. 가사와 곡이 만나 노래가 만들어지고 쌀과 가마가 만나 밥이 만들어지고 너와 나가 만나 우리가 있는데 말이다.

팔고 사는 관계로 만나는 장터처럼 직장도 사람 냄새가 진동한다. 모르는 사람끼리 흥정하며 만나서는 단골고객이 되고 얼굴장사로 믿음을 쌓아가는 것처럼 입사시간이 다른 새내기들이 손동작을 맞추면서 선후배 사이로 입지를 굳히고 사내 역량을 뻗어가게 된다. 동무장사든, 얼렁장사든 신뢰의 서로치기로 나누고 상술도 이바지하면 언젠가 똑 부러지게 남는 장사처럼 둘이던, 열이던 동고동락하면 우정이 돈독해지고 거친 일도 완성하는 인향만리人香萬里가 지혜롭다. 그러나 도 넘는 장삿속이거나 과욕한 외목장사로 오래 가지 못하는 꼴뚜기장수의 장사판처럼 동료와의 동행과 상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용심과 욕심이 배 밖으로 나오는 직장인생은 풍년거지밖에 더 될 일이 없다.

내 방도 깨끗하게 치우는 습관을 덤으로 얻게 되었다. 세상 지저분한 쓰레기산도 다 치우려니 내 맘속의 이기적인 불순물도 수수방관한 수치스러움을 힘껏 몰아낸다. 그리고 동료들을 불러 방석을 내주었다.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한 말공부를 좀 하여 왔던가? 직접 온몸으로 부딪치지 않는 한 직장의 함의를 다는 몰랐다. 어떤 것이 눈치작전의 꼴값 떠는 것이고 어떤 것이 육체노동의 참다운 노래인지 일의 가치를 위한 허실의 가름이 그 곳에서 확인되었다.

도마 위에 오르는 돼지머리를 보면서 나도 도마질을 당하지 싶다. 돼지띠인 나는 전에는 실속 없이 일에 큰소리만 치고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고 놀고먹기 좋아했다. 이 미련한 짐승은 빨리 살찔수록 도살장으로 하루하루 시나브로 끌려가지 않던가? 비장한 최후도 아니요, 초라하고 불유쾌한 끝장일 뿐이다. 양돼지같이 허둥지둥 살아왔던 나의 직장생활도 남에게 인상을 남기지 못한 뜨내기 삶이었고 허섭스레기나 혹처럼 시답지 않게 붙어있기도 했다. 그러다 외워줄 벗 하나 없이 삶과 마무른다면 이 또한 초라하고 쓸쓸함이 아닌가?

회사 몇백 미터서 기차가 고동을 울린다. 투덕투덕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바퀴소리는 어떤 연주 같이 가락 맞다. 침목 하나는 별 것 아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뤄내는 것이 없다. 무수한 침목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기차의 꿈을 이뤄내는 것을 보면 그 침목들의 뭉침이 나는 값지다. 바람처럼 떠나가고 떠나오는 직장생활에도 드팀없이 연결고리를 엮어나가는 손가락 안에 드는 동료들이 있었다.
돼지머리가 날 웃는다. 따뜻한 길동무의 손을 놓치는 어정쩡한 직장인생을 살지 말고 조금씩 배려를 닮으라는 미소다. 일감이 넘치게 들어온다. 나는 이발사마냥 단단하게 면도기를 잡는다.

 

▲ 해빛을 마주하고 앉아 잠깐 포즈를 취하는데, 수필같은 세월의 흔적은 눈귀를 스쳐가고 있다...<편집자>

      제3편 

   추억을 담은 기찻길 벽화 앞에서

 

낡은 채양모를 쓴 아저씨가 아래윗니 한 대씩 보이는 입을 벌린 채 등받이에 기대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등에는 작은아이, 가슴에는 내어진 두 팔로 작은 봇짐을 꼭 껴안고 있는 큰아이를 포대기에 싸 한 몸이 되어버린 아주머니가 머리에 가득 봇짐까지 이고 숨차게 역을 향하고 있다. 몸을 돌린 할머니가 칭얼거리는 등에 업은 손자 녀석을 어르고자 사발에 담긴 국수를 먹이고 있는가 하면, 손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애정소설책을 든 청소년들이 문 쪽에 서서 고향석별을 하고 미래에 달뜬 듯 하염없이 떠나오는 마을을 향해 돌아서 있다. 주근주근 세상이야기로 금방 말잔치를 끊은 듯한 아낙네들도 끼어있다. 두 분은 창밖으로 머리를 길게 뽑고 한 분은 사색에 잠긴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으며 한 분은 그 어깨에 의지해 머리를 놓아 단잠에 취했다.

안동 기찻길 옆 벽화의 거리가 이울어가던 지난 추억을 토막토막 진실토록 피워냈다. 단색의 소묘로도 지난 시절 열차손님들의 모습과 풍경을 잘 회귀해낸 아련하고 애틋한 기억들의 벽화들이다. 차표 한 장 살 돈 마련하기 어렵던 지난 시절이 좋기야 하겠냐만 그것은 비켜갈 수 없는 우리 지난 세대가 걸어온 발자취이며 상흔이다. 기차에 희망을 실었고 기차를 타면서 나도 성장했다.

어릴 때 벌방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기차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사는 동네는 버스길도 울퉁불퉁, 고갯길도 많은 현성에서 동떨어진 백두산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두만강가의 시골이었다. 그러다 큰집으로 놀러가면서 “기차를 타고 싶다메,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감?”하는 사촌 형 덕분에 기차를 타기 위하여 현성으로 에돌아갔던 12살 때인 여름방학이었던가.

번화한 시가지에 현혹되어 정신을 놓았다.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던 높은 아파트, 어깨를 맞대고 사랑을 속삭이는 발랄한 옷맵시의 싱싱한 연인,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같은 또래의 한 무리 아이들을 보고 걸으면서 머리를 뒤로 빼다가 가로등에 “뽀뽀”를 하고 코가 숨 막히도록 삐뚤어졌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도시는 먹을거리들도, 볼거리도 많았고 사람들도 많아 뭐나 풍족해 보였다. 당연히 갖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나는 훌쭉한 호주머니를 잡은 채 주눅이 들어 번마다 외면했다.

나는 도시인이 되고 싶었다. 사촌 형은 도시인이 되자면 공부를 잘하라고 했다. 우선 중점 고중에 입학하면 현성에서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서 미역국을 마셨고 어려운 집 생활에 재학을 엄두내지 못했다.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난 항상 도시인의 꿈을 접어본 적 없었다. 책 보기를 좋아하던 데로부터 돌파구를 찾아 터나간 것이 있었으니 문학공부였다. 약재 부업해 번 돈으로 책도 사고 기차도 탔다. 현성보다 큰 도시에는 나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우상의 세계가 있었고 하루 오전, 오후 왕복하는 완행열차에 어김없이 내가 있었다. 문학편집들과 낯익히고자 오르고 원고를 들고 오르고 그 수정 때문에 올랐다. 반기지 않을 정도로 편집부 문턱을 드나든 것은 원고 때문만 아니었다. 편집부 책꽂이에는 새 서적들이 가득했고 웬만하면 빌릴 수가 있었으며 지난 잡지와 신문들은 무료로 받을 수가 있는 것이 신났다. 기한 내에 돌려야 할 빌린 책들은 상행열차에서 마저 읽어낸 적도 적지 않았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문학작품 발표 후 시상식에도 불려서 올랐고, 시작이 절반이라더니 꿈이 반쯤 이루어졌다. 현성 방송국 기자가 된 나는 늘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농촌으로 내려가 취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은 변화의 바람이 일어 당시 공무원들에게 월급이 몇 달씩 미지급되고 하향 바람개비가 재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어렵게 들어왔던 방송국 기자직을 내놓고 더 먼 길, 더 긴 기차를 타고 더 큰 해변도시에로 달렸다. 그곳에도 나처럼 중국 진출 한국기업들을 전환점으로 삼아 도시 꿈과 부자 꿈을 이루려고 찾아온 동포들이 많았다. 나는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직장을 찾았고 후진이 없는 기차처럼 곧게 달려 점차 자리를 잡아갔고, 식구가 둘이 부픈 한 일가의 대장이 되었다.
나에게 역시 그곳이 끝이 아니었다. 시조부님이 계시는 한국과 그 근원의 세계로 마음의 기찻길이 놓여졌다. 마침맞게 내가 일하던 안동서 직접 그곳으로 열차가 데려다주었다.

시조부의 기념비 앞에 절을 올리고 나서 동북풍에 실려 오는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나는 북쪽 통일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는 우연한 꿈결같이 동네분의 소개말을 전해 들었다. 순간 예감의 꽃들이 명치끝에서 찡하게 움을 틔우더니 곱게 혈관으로 퍼져나갔다. 혈맥이란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절박함을 안고 곧바로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로 내달렸다.

한눈에 잡히는 것은 휴전선을 뚫고 남북 허리를 질러나간 두 줄기 레일이었다. 길막이에 나뉜 레일은 사명을 다하지 못한 듯 침묵한 채 외롭게 남북으로 갈라진 채 각자의 숲 속으로 뻗어있었다. 비어서 더 길어 보이는 쓸쓸한 기찻길에 몸을 정처 없이 실었을 벽화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들이 점철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두 어린 자식과 한 몸이 되어서 머리에 인 봇짐처럼 어머니는 이동하는 삶이 버겁고 무겁지는 않았을까? 귀가하는 그 짬에도 혼곤히 잠을 자면서 일의 노역을 풀어야 했던 할아버지는 굶주리지 않는 식구들을 위하여 실향민이 된 아픔을 계절병처럼 앓지는 않았을까? 그것보다 기성세대는 남쪽 땅도 북쪽 땅도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누림의 자유는 어떤 쾌감이었을까? 나뿐만 아니라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부러운 한편 곤혹스럽지는 않았을까?

우리 가족과 한민족의 모습을 기찻길이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일에 꿈을 실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열차와 쉼 없이 교감하면서 삶의 열정을 안고 달려왔던 윗세대들. 멀고 먼 여정에 미처 마치지 못한 역의 수행을 얹고 품었던 가족의 끈끈한 연결고리는 내리내리 나에게까지 왔다. 기차가 달리지도 않는 허허한 기찻길은 놓여있어 뭘 할까만 새삼 사람 냄새 가득 싣고 무풍지대로 달렸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이 횡단했다. 통일전망대 입구에 열차 바구니 모양의 식당가를 바라보면서 통일에는 거침없이 열차가 오갈 때만이 꿈이고 희망이고 미래라는 확신이 더욱 들었다.

이제 내 꿈은 더는 큰 도시에 나가는 꿈이 아니다. 내 꿈은 아버지의 고향인 이남에서 어머니의 고향인 이북으로 향해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밟으며 집으로 가는 열차에 오르고 싶다. 두만강을 건너 고향인 연변에 이른다면 속 시원하게 아리랑 가락을 뽑으며 덩실덩실 도라지 춤을 출 것 같다.
저렇게 방치된 비무장지대가 아니며, 휴전선의 철망을 쑥 걷어내고 질풍같이 기차를 타고 내달리는 신바람 나는 길이다. 단축하는 고향 길도 편해 좋고 생경한 사투리가 섞인 우리말로 우리 민족끼리 교감하는 기차생활도 더 정겹고 행복할 것 같다.

그리고 그려도 컴퍼스는 그 원추의 반경 내에서 꼭 맞는 속성에로 풀돌고 마는 정점의 규칙. 궤도를 벗어나면 기차가 탈선하고 쓰러지는 기찻길도 마찬가지다. 두 레일이 마음 맞춰 규칙적인 박자를 타면서 마감까지 평행을 유지해야만 종착역까지 닿는 기차는 무엇을 탑재해야 했을까? 백두에서 한라산까지, 한강에서 두만강까지, 한겨레에서 겨레붙이까지 그 피가 어디로 흘러 갈 것인가! 기찻길의 숙명이고 소원이며 꿈이다.  한 가족이 세 동포란 명분으로 모여 살아야 했고, 찢어졌던 고향, 고향, 고향. 내 소망은 가는 곳마다 동족과 형제들이 환호하며 맞아주는 땅으로 왕복하는, 영원으로 가는 행복의 기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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