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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한중작가포럼53/문학작품 특집] 千愛玉 수필 '가방'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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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06  14: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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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愛玉 약력: 연변대학 국문과 졸업, 연변방송국 문학부, 음악부 PD. 한국주재 연변TV방송국 지국장 역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현재 사)효세계화운동본부 본부장

[서울=동북아신문]3월, 내 생일과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는 계절에 개나리 같은 딸들이 내게 가방을 선물해 주었다. 이유는 “엄마 가방이 지쳐 보여요”라는 것이었다. 딸들이 선물한 가방은 화려한 골드 색상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은방울꽃이 은은하게 수놓아져, ‘지쳐 보이는’ 내 가방과 달리 생기 있고 봄을 타는 듯 보였다. 낡고 지친 내 가방은 그 세월을 증명하듯 속이 터져 내용물이 이러 저리 안감 언저리에서 놀고, 어느새 들어간 지도 모르는 동전들이 노랗게 시간의 세례를 받아 변신되어 있었다. 가방을 바꿔 준 아이들에게 고마워 “돈을 주랴?”라고 했더니 “돈을 받을 만큼 비싼 건 아닌데요.”하고 혀를 날름 내밀며 저만치들 물러앉는다. 

사실 나는 누군가가 내 가방을 바꾸어 주지 않으면 쉽게 바꾸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메고 다니던 푸른색 책가방이 기억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아 세상에 그보다 더 값지고 귀중한 가방이 없을 것 같아서이다.

내가 처음 학교 가던 날은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하얀 백두산이 그려진 푸른색 광목천으로 된 책가방을 메고 갔는데 담임선생님은 웃으며 한 마디 하셨다.
“너 힘이 장사구나. 산을 다 메고 다니고…….”

하긴 책가방에 교과서와 수업 준비물 외에도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등의 책들이 들어 있어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늘 책가방이 터질 지경이었다. 책들이 많아지자 나중엔 집의 방 하나에 작은 독서실을 만들고 방과 후면 애들이 모여와 책을 읽었다. 책 무게 때문에 가방 밑바닥이 닳아 구멍이 나면 어머니는 두툼한 헝겊을 안에 대고 깁고 또 기웠다. 더불어 내 꿈도 하룻밤 자고 나면 덧붙여지고 단단해졌다. 줄곧 최우등생에 전교 소선대대 부대대장(학생회 부회장에 해당)이었던 나의 꿈이 하늘을 날려고 할 때, 광복 후 중국 역사에 가장 처참했던 대동난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고향이 경상북도 문경군이었던 아버지는 광복 훨씬 전에 독립운동을 하던 천보락 할아버지를 따라 간도 땅이라 불리던 화룡현 토산자라는 두메산골에 왔었는데 누가 밀고했는지 ‘남조선 특무’라는 죄명을 쓰게 되었다.

햇볕이 따스한 봄날 오후였다. 소선대대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서는데 애들이 “새끼특무가 왔다”고 소리를 질러댔고 내 책가방은 교실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하얗게 질린 내가 책가방을 주우려고 경황없이 달려가는데 한 아이가 불쑥 발을 내미는 바람에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교실을 뛰쳐나왔다. 무작정 가다가 다다른 곳이 북쪽에 있는 개울가였다. 빨래하는 아낙네의 방망이소리가 저만큼 들리고 시름을 비껴가는 맑은 개울물은 돌돌 잘도 흘러갔다.

조약돌을 하나 주어 손바닥에 놓고 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시름없는 돌멩이보다 못한 내 신세가 서러워서였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여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니 앞집 영숙이가 시커멓게 짓밟힌 책가방을 놓고 갔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빨아서 다림질까지 한 책가방을 내놓았다. 학교 가기 싫어 머무적거리는데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배워야 힘이 된단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내 책가방은 헐렁해졌다. 시험 성적이 높게 나오면 자본주의 벼슬 사상에 젖어있다는 자기비판을 해야 했으므로 당시 유행되던 모택동 어록만 달랑 넣어가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당시 모든 지식 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농민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너는 꼭 대학교를 가야 하는데……”라고 하시며 친히 가정 방문을 오신 최삼룡 담임선생님이 안타까워하셨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논두렁길에 거름통을 지고 걸으며 나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밤이면 기숙사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졸리는 눈을 억지로 뜨며 내 꿈과, 내 희망과, 내 생각들을 노트에 정리하여 가방 속에 넣었다가 낮에 일하러 갈 때면 그 가방을 이불 속 깊숙이 감추어 두곤 했다. 자칫 발각되면 계급성분이 나쁜, 재교육 대상인 나는 자산계급사상이 숙청되지 않은 반혁명분자로 몰릴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추천을 받아야만 대학교를 갈 수 있는 내 앞길이 영영 막힐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촌에 내려가 4년 만에 나라 주석이 바뀌고 대학 시험 제도가 회복되었다. 몇 달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여 마침내 대학 시험에 합격하였다. 대학 합격 통지를 받던 날, 나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한없이 울었다. 동네의 어르신들을 만나면 “우리 막내딸이 또 최우등을 했다.”고 자랑을 하셨던 아버지. ‘틀림없이 대학생이 될’ 거라던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린 이 일이 불효자인 내가 부모님께 행한 제일 큰 효도인 것 같다.

대학 가던 날, 어머니는 인조가죽으로 된 그 당시에는 꽤 근사한 가방을 내놓으셨다. 어머니는 가방에 얽힌 딸애의 깊은 상처를 잊지 않으셨나 보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 지나면 어김없이 피는 봄꽃의 아픔을 다 알지 못하듯이 나는 그때까지 어머님의 깊은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러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푸른색 가방의 의미와 어머니의 뼈저렸던 아픔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내 아이가 커서 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는 예쁜 책가방을 사주었다. 내 아이들만큼은 책가방을 메지 못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또한 그런 시대가 아닌 것을 안심하며, 가방 안에는 오직 소중한 지식들만 차곡차곡 쌓아가길 바랬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두 딸애는 공부도 잘 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그런데 큰 아이가 중학교 입학해서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이가 자꾸 연필을 떨어뜨리는데 병원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이튿날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지방의 크고 작은 병원들을 다 찾아다녔지만 확실한 진단을 받지 못했다. 나는 등허리에 서슬 푸른 칼이 꼽힌 듯 오싹한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18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장춘 베쮼의학원으로 갔다. 의사들의 진단은 너무 간단하여 냉혹하기까지 했다.

“희망이 없으니 집에 돌아가라”는 단 한마디뿐이었다. 쿵! 가슴이 내 나이만큼 서른아홉 번 내려앉았다. 영혼은 둥둥 떠서 어딘가 가버리고 두 눈은 초점을 잃었다. 멍한 무의식 상태로 긴 시간을 보내다가, 나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건 한참 후였다. 나는 무너진 가슴을 일으킬 수 없어 한 계단, 한 계단 기어서야 내려갔다.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꽃이 피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아이 앞에 섰을 때,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세상에서 가장 맑고 순수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며 빨리 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아이의 두 손을 꼭 잡고 물어보았다. “무얼 갖고 싶어?”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이는 “책가방!”이라고 했다. 바로 아이 손을 잡고 나와 장춘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 가서 예쁘고 비싼 책가방을 사주었다. 한겨울 설풍 속 추위가 몸과 마음에 사정없이 휘몰아쳐 뼈까지 갉아 먹는 듯 했다. 눈물을 삼키려고 쳐다본 밤하늘에는 어머니가 별이 되어 굽어보고 있었고 푸른색 가방이 은하수로 걸려 있었다.

큰 아이가 앓기 시작해서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나는 책가방을 샀다. 가방은 그 애한테는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나한테는 아이가 살아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병 치료하는 동안 큰아이의 가방은 전부 작은 아이에게로 물려졌다. 자신이 가진 걸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내주는 큰아이도 놀라웠지만 허전한 내 꿈을 채워주듯이 물려준 가방에 군소리 없이 자신의 삶을 밀도 있게 채워 나가는 작은 아이도 나한테는 선물이 되었다. 아픈 큰 딸을 돌보느라 막내에게 욕심을 부릴 수 없는 사이, 막내는 학사, 석사를 마치고 더 긴 가방끈에 도전장을 내밀어 끝내 박사학위를 땄다.

삶은 어쩌면 하나님이 선물한 가방과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면서 가방 한 개쯤은 평생 갖고 다녀야 하고 그것이 짓누르는 무게는 그 사람만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니까 말이다. 가방이 무겁든 가볍든 우리는 그걸 통해서 인생을 배우게 되고 가끔씩은 원치 않은 내용물에 원망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조차도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삶의 시작점에 와 있는 아이들과 나 스스로에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삶의 길에 무게 없는 가방을 갖고 가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는 무게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이제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겨 버린 내 마음에게 무엇이든지 담아 낼 수 있는 넉넉한 가방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가 내가 선물할 가방은 다름 아닌 ‘마음 가방’임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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