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홍연숙 시인은 최근 꽃에 대한 시를 유독 많이 쓰는 것 같다. 꽃에 부여하는 디테일한 감성과 애틋한 사랑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시구를 빚어낸다. 꽃이 꽃으로 태어나기까지의 처절함과 꽃으로 홀로서기를 그려내고자 애를 쓰고, 거기에 자기만의 언어로 남과 다른 이질적인 정서를 만들어 감성을 응축시켜 분출시키거나 자유분방한 감정을 토로하는 등 창작 기법이 눈에 띈다...<편집자>   

  

▲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동포문학 시부문 우수상 수상. 현재 울산 거주

1.

부다라궁 돌담속에 핀 민들레꽃
홍연숙


1350년의 흐느낌이
적막속에 짓눌러져
꺾 꺾 비집고
노랗게 흘렀구나
얼마나 많은 울음들이
아직도 터져나오지 못하고
저렇게
아프게
삐여져 나오려고
발가락을 긁고 있을까

2017.7.24

 

▲'부다라궁 돌담속에 핀 민들레꽃'은 유독 초록 속에서 작고 예쁜 노란 우산을 들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편집자>

2

송엽국이 지나는 겨울
 
 

어디에도 묻히지 못하고 있다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존재들이
이를 악물고 손에 손 잡고 이어져 있다
모래먼지 일어나는 뼈다귀들 사이에
무수히 뻗어 나온 손가락들이
허공을 외치고 있다
갈 곳 없는 소리들은 추락하고 
다시 흙을 잡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야위고 비틀어진 메마른 줄기 끝에
우묵하게 꺼져 들어간 할머니의 자궁과, 말라붙은 젖

갈수 없는 아프리카* 를 향하여
얼룩진 눈물자국이
겨울바람에 푸슬푸슬 씻겨 날린다

*아프리카-송엽국의 원산지
2019.1.24

 

2

매화는 침묵한 적이 없다 
 

 
따뜻한 남쪽에서 파랗게 세운 말들이 무성하다
바람 불면 감추지 못하고
알몸으로 부딪치다가
비에 젖어 곬 따라 간다
동천강으로
태화강으로
바다로 간다

매화는 침묵한 적 없다
찬 서리에
깨물었던 입술이 부르터지고
핏줄에 박힌 말들이 얼음 깨고 나온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하지마라
매화는 
조 용 히 핀 다, 요 염 하 게

 2019.2.6

 

▲붉은 매화가 피는 것을 보면 가슴에 흐르던 피가 멎는 것 같다...<편집자> 

3.

세잎꿩 비름의 再起
 

 
세잎꿩 비름이 늦가을 된 서리에 쓰러지고
진물이 고인 침묵의 나날들

뿌리의 상처를 찢어 싹을 틔우고
터져나오는 아픔들이 꽃으로 피어
꽃들의 가슴을 열어 줄기를 올리고
줄기의 오체투지로 세잎의 비늘을 떠 올려

암흑속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프게 전해오는
홀로서기의 나날들

개콘을 보며 웃다가
드라마를 보고 찔끔거리다가
해빛이 부서지는 강가를 거닐다가
따슨 이불속에서 뒹굴다가 꿀잠에 빠지다가
새털구름, 양떼구름, 접시구름, 비닐구름들을 다 올려다보고 시간이 없다고 툴툴대기만 하다가
고삐에 끌려다니다가
쏘맥 한잔으로 풀며 나의 하루는 후딱 가버리는데
지겨운 일상뿐이라고 인생사주나 보며 귀인의 출현을 학수고대하는데

저 눈 덮힌 땅속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고
어둠속은 재기의 꿈들로 빛날 것이고
봄이면 작품들이 치솟을 것이니

 2019.1.1.

 

4.

수선화는 위험해

수선화는 위험해
봄에 피였다가 지고
이 가을 웅크리고 힘 모으는

한 잎의 송엽국이 
쏟아진 물 같이 퍼지더니
수선화의 마당을 덮었다
싸우지마라
네 땅, 내 땅이 어디 있냐
다육이 동네로 
치자꽃 동네로 발을 붙이고
함께 사는 글로벌 세상
송엽국이네
다육이네
치자꽃들의 응원에
수선화가 싹텄다!
차거운 가을밤의 방황도
터진 발가락의 진물도 
따뜻한 거름으로 덮어준다
얘들아 이제 나와도 괜찮단다
수선화의 기사들이 우후죽순 나붓기고 
온 정원이 수선화의 이야기로 끓어 넘친다

수선화는 위험해
봄에 피였다가 지고
이 가을 웅크리고 힘 모으는

 2018.11.13

 

▲ "수선화야,  이 밤은 위험하지 않아, 정원에 너희들 이야기만 있지 않느냐?" ...<편집자>  

4.
방아꽃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철쭉꽃들의 발가락사이를 
겨우 비집고 나왔소
숨 한오리의 천박함이라지만
온 몸의 피를 내려 땅을 감고 버텼지
세상의 살벌함이 어디 
천둥 치고 벼락때리는 것 뿐이겄소?
광풍에 소나기는 어떻고 줄창 
쏟아지는 장마는 또 어찌했겠소만은
다 그렇고 그렇게 견디는게 아니겄소
장미꽃 그늘에 몸을 숨기고
국화꽃잎사귀들에 무릎을 꿇고
세상이 원하는대로 
뼈대없이 흔들리는 거지
그리하여
꽃밭에서도 뽑히지 않고 
한줄의 희망에 매달려 있다오
장미는 시들어 그늘을 벗겨주고
나는 드디어 꽃을 피웠소
국화가 만발하여 사람들이 열광할때
누구도 모르게 씨앗을 품을거요
그리고 
온 천하에 뿌리를 내릴거요
장미도 아닌 국화도 아닌 
방아꽃으로 말이오

2018.10.16

 

5.

벚꽃

 

참았지요
오래오래
그러니까
작년 여름부터
초가을 늦가을
긴긴 겨울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도록
지나가는 이들을 다 그냥 흘려보냈지요
봄바람이 사타구니를 익숙하게
슬슬 어루만지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군요.
햇빛 기껏 따스한 봄에
아예 홀랑 벗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속살을 내보였죠

자 이제 얼른 들어오세요
꿀샘 마셔보세요
그리고
우리 끈적하게 서로 녹아들어요

이제 닥칠
여름
가을
겨울

이겨요, 우리

 2018.3.28

 

6.

튤립은 알고 있다
 
 

새벽 6시
떨리는 입술이 위태하다
제발...반쯤만...반쯤만 피어라*
아침 9시
머피의 법칙이
튤립으로 활짝 피어버렸다

동공 안에 피어난 검은 속살에
당황한 듯 그대로 굳어지고
철근을 짊어진 초침의 황소걸음으로
하루가 길다

또다시
새 아침이 오고
시간이 촘촘히 주름지더니
반쯤 열린 입술로
튤립이 선명하다

벼랑 끝 까지 가봐서일까
투박한 시어가 다듬질해가는
그 짜릿함을
절정보다는 절정으로 가는 길의
그 황홀함을
튤립은 어떻게 알았을까

 2018.4.7
*송나라 시인 소 옹의 시중에 "好花看到半开时"

 

▲길게 목을 빼들고 한 순간에 붉은 몽오리를 짓고, 고고히 서있는 이 튜립은 선남선녀가 맡기고 간 한쌍의 술잔 같지 않은가...<편집자> 

 7.

개나리꽃

 

그래 그때가 초봄이었지
찜통이 된 주방은 연신 너를 녹이고 있었지
빽빽이 들어서는 고층건물로 유일한 창구마저 한 뼘도 안되는 몸뚱이를 가누지 못해 희미하게 사라지고
육체의 피로와 삶의 고단함은 너를 중얼거리게 했고
개나리는
듣고만 있었지
그냥
들어주고 또 들어주고만 있었지

그러던 어느날
개나리는 노랗게 한 잎으로 널 감동시키더니
또 노랗게 한 아름이 되어 가더니
노오란 물결 출렁이며 다가섰지
어느새 너의 가슴은 노랗게 차오르고
너도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지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노랗게 노랗게 노랗게
홍아
연아
숙아
저기에 개나리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어

 2018.4.2

 

8.

구절초


너를 닮았구나 구절초
너의 환생이구나 구절초
이미 꽃이면서도 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더 원했던 구절초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자다만 꽃 하얗게 피워 올리고
하늘 너머 멀리 소망을 빌어보는 구절초
구절초가 핀 이 가을
하늘마저 푸르디 푸른 이 가을
너를 떠올려
내 눈시울 붉어 지누나
아닌 새벽에 학교 가자며
아직 이불속인 나를 찾아와
울 엄마 눈총에 따악 얻어맞던 넌
이가 아파 학교 못가던 날
울 집 주변 슬슬 돌며
휘파람 실실 불던 넌
그날 넌 왜 학교 안갔지
긴 병으로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간식거리 몰래 훔쳐와
퉁퉁 부은 나의 볼에 넣어주며
걱정으로 바라보던 넌
까만 눈동자를 가졌지
학교에서 유명한 왕따쟁이 우리 둘
담장아래에 앉아
교실에서 쫓겨난 도시락을 풀었지
숟가락을 빼먹고 울먹이는 나를 보다
쇠살창 끝을 부러뜨려 불쑥 내밀고
시뚝거리던 너
그립다 그립다
그때가 그립구나
머리 큰 애들 모여와
모래웅덩이에 뛰여내리라고
나를 윽박지를 때
나를 대신해 뛰여 내리다
혀를 깨물어 피를 쏟던 너
네가 거기서 나오는 내내
난 울기만 했지
그래도 나오자 바람으로
조꼬만 어깨에 힘주고
나부터 위안해주던 너
친구들의 따돌림속에서도
니가 있어 즐거운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는 니가 얼마나 부럽던지
도시락만 들고 학교다니던 니가
숙제 안해도 상관없던 니가
그때 그 작은 질투가
이제는 이렇게 가시가 되여
아프게 아프게 
찌르는 구나
백혈병
이름처럼 얼굴이 하얗던 너
웃음마저 하얗게 눈부셨지
어느날 그 하얀 웃음이 바람결에 날려
멀리 가버린 날
우리 소꿉시절 사금파리를 만지작거리다
하얗게 피여난 구절초를 보며
나 역시 하얗게 울었지
하얗게 하얗게
이제는 세월 흘러
내 나이 반백을 바라보지만
지금도 산과 들에 구절초 만발하면은
나는 하얀 얼굴의 너를 떠올린다
내 기억속에 영원한 열한살짜리야
구절초 같은 나쁜 놈아

2017.8.17

 

▲ 검박하고, 수수하게, 그러나 유독 밝게 피어 웃고있는 구절초란 너, 그 꽃의 이름....<편집자>

10.

수선화 나의 수선화
 

 
수선화와 처음 만나는 날
그 참된 뿌리를 위해
내 족욕통을 내어주었다
플라스틱이나 도자기에
그 진실된 뿌리를 담그는 건
욕이 될 것 같아서였다
오로지 편백나무로 된 내 족욕통이
그것만이 근사해보였다
그리하여 지금

수선화,
너의 숨결이
내 발가락들을 간질이고
내 혈관을 따라
가슴의 계단을 따라
올라오며
올라오며
마침내
찌르르 찌르르
어느 벌레의 울음소리로
화하고 있는 줄을
나는 온 몸이 귀가 되어
듣고 있거늘
그런 사연을 너가 아느냐


2018.3.8

 

11.

희말리야의 풀꽃
 


참았던 울음들이 빙하로 굳어지고
따가운 햇살에 하얀 미소로 부서진다

쌓아둔 말들이 산으로 침묵하고
지나가는 비에 하얀 바람으로 일어선다


2019.3.8

 

12.

복수초說
 


털 다 뽑힌 뻔뻔한 눈위에 피었다고
저다지도 떠들어대고 난리를 치니
이 촌스런 이름이 하늘을 찌른다
그 엄청난 비유에 낯 간지럽고 부담스러워
낯선 여인의 향 만으로도
뒤가 저려 자꾸만 시든다
그냥 풀꽃이면 좋겠다
앞 바람 뒷 바람 들 바람 강 바람
바람이란 바람은 다 피는
바람둥이 풀꽃이면 좋겠다
스치는 여인의 손길에도
타는 입술 내밀고 사정없이 불타는
봄처녀의 홍조낀 두 뺨에
여름새색시의 풍만한 젖가슴에
가을아줌마의 물컹대는 엉덩짝에
마음껏 넘실대며 욕심껏 바람 피는 풀꽃이면 좋겠다
피면 지기 마련인데
지고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름 석자로 세상 다 가진 듯 해봐야
저 풀꽃만도 즐기지 못하는 데
뽑히고 잘리고 짓밟히는 풀꽃이라도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볼품없는 이름일지라도
천하에 널린게 풀꽃이 아닌가
아무데서나 피어나도 향기 한점 머금고
세상을 소소하게 웃는 저 풀꽃이면 좋겠다

20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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