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지난 1980년 1월 22일, 음악교원으로 있던 나는 갑자기 건 피소변이 나가면서 아랫배가 아파 연변병원에 호송되어 수술대에 올랐다. 29세 꽃나이에 '악성방광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을 줄이야.

매일 체온이 40도를 오르내리고 통증을 참다못해 헛소리를 치다가는 혼수상태에 빠지군 했다. 나의 생명은 꺼져가는 불씨와도 같았다. 수술한지 1주일이 지난 후 수술실을 뽑자니 응당 아물어야 할 수술 자리에서 고름이 왈칵 터져 나왔고 곪아터진 피부를 칼로 도려내야 했다.

마취제를 쓰지 않으면 수술자리가 빨리 아문다는 말을 들은 나는 마취제를 쓰지 않고 대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6개월 만에 수술자리가 겨우 아물자 나는 아내한테 업혀 천진시공안병원에서 한 달 동안 화학치료를 받았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고 체중이 32킬로그램으로 줄었으며 이제 남은 시간이 석 달밖에 안 된다는 '사형판결'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때 나는 수술자리가 아물지 않아 통증이 심해 맞은 강통정(强痛定)주사에 은이 박혀 하루라도 주사를 맞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황이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온 몸에 진땀이 줄줄 나고 견딜 수가 없어 닥치는 대로 부셔버리고 했다.

병원에서는 하는 수 없이 나를 철침대에 꽁꽁 묶어놓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나는 발광하다 맥이 빠져 쓰러지군 했다. 석 달 동안의 치료를 거쳐 나는 기적적으로 약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사회를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젊어서는 앓음 자랑만 하다 보니 사회를 위해 뭘 좀 하려고 해도 몸이 허락되지 않았다. 2009년부터 나는 <노년세계>, <흑룡강신문>, <연변노인의벗> 등 아홉 개 신문잡지사의 특약기자로 활동하면서 문명가정, 모범며느리, 모범시어머니 등 선진사적과 왕청현 아홉 개 향진, 세 개 가두 노인협회의 사적들을 글로 써서 제때에 편집부에 제공하군 하였다.

2014년 3월 15일, 나는 자식들이 한국이나 연해도시로 돈벌이를 떠나고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져 고독하게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 노인들을 대상해 28명의 학원들로 현에 <가야하노래교실>을 꾸렸다. 정작 노래교실을 마련하고 보니 활동 장소와 음향 설비가 없는 것이 제일 큰 난제였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푼 두푼 모아 두었던 1만 1200원을 가지고 연길에 가서 전자풍금과 음향설비를 사다 셋집에서 노래교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노래교실이 섰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마작에 푹 빠졌던 노인들,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던 노인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비좁은 활동 실에 학원들이 많아지자 학원들이 한 달에 25원씩 내는 회비로는 일 년에 9천 원씩 내는 집세도 부족했다. 거기에다 설 명절이나 하향 공연에 드는 식사비, 차비 외에도 교실에서 쓰는 전기세, 물세, 관리비 등은 1년에 평균 만원씩 들었다.

2015년 6월에 노래교실이 <가야하예술단>으로 개칭되면서 학원은 92명으로 늘어나 월, 수, 금 오전에는 여덟 시반부터 열시까지 노래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한시부터 세시 반까지 전자풍금을 배웠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예술단은 연변에서는 물론 국가급 언론에도 실려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예술단 합창 조는 해마다 혁명열사기념비, 소왕청 항일근거지를 찾아 항일가요를 불러 학원들이 오늘 날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도록 이끌어 주었다.

올해 85세인 김련순 학원은 일주일에 세 번 있는 노래공부 시간을 기다리는 게 너무나도 지겹다면서 손꼽아 노래공부 시간을 기다린다고 한다. 올해 62세에 나는 리연화 학원도 우울증으로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친구의 소개로 예술단에 와서 4년째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우울증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올해 69세에 나는 김태수 노인도 마작에 재미를 붙여 밤낮이 따로 없이 마작 판에서 허송세월을 보냈는데 예술단에 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니 인젠 마작을 진짜 멀리하게 되였다면서 기뻐하고 있다.

왕청현 가야하예술단에서는 “좋은 사람, 좋은 일들”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나고 있다. “일체는 예술단을 위하고 일체는 학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좋은 기풍이 예술단 내에서 형성되고 있다. 부단장 전선금은 해마다 예술단에 5천 원 이상 기부하고 김련순, 전해옥,림금화,정화분,김해옥,리순덕 등 학원들도 해마다 천 원 이상 기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26명의 학원들이 각각 500원씩 기부하고 어떤 회원은 자기 집을 무료로 제공해 협회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어떤 회원들은 많지 않은 퇴직금을 한푼 두푼 모아 예술단에 후원하고 있다. 예술단에서도 학원들이 앓거나 갑자기 돌아가면 병문안과 후사를 책임지고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학원들마다 <노년세계>, <노인의 벗>신문을 한부씩 주문하게 하여 정신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한 회원은 세상을 뜨면서 자식에게 유언을 남겨 협회에 2천원을 기부해 큰 감동을 주었다. 일부 신체가 불편한 학원은 지팽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협회 활동에 참가하고 있고 자녀들을 동원하여 물심양면으로 협회를 도와주고 있다. 나도 선후로 <왕청본보기>, <연변본보기>, <길림성우수지원자>등 영예를 받아 안았다.

아담하고 정결한 활동 실에 모여 이같이 사회대가정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면서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여생을 보람 있게 보내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나도 온몸에 힘이 솟구쳐 10년 동안에 개인일로 청가를 맡은 적이 하루도 없이 만 출근을 보장하고 있지만 힘든 줄 모르고 있다. 병마로 '사형판결'을 받았던 내가 지금까지 건강하고 온 몸에 활기가 차넘치는데는 예술단 학원들의 다함없는 지지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살아도 유감없이 보람 있게 살고 싶다.

학원들은 익숙하고 또 정든 가야하예술단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전자풍금도 연주하면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한다. 학원들은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제일 큰 희망이라고 한다. 아마 자식을 둔 천하 모든 부모님들의 똑 같은 마음일 것이다.

제공 : 길림성왕청현신문보도센터 특약기자 리강춘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