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칼럼은 "시사성이 있는 문제나 사회의 관심거리 등에 대해 평한 짧은 글"이다. 칼럼니스트가 보고 현실을 분석하고 견해를 내놓으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서 날카롭게 펴놓는 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연변주당위선전부 상무 부부장을 역임해온 채영춘 부장은 그동안 칼럼을 통해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보다 합리적인 생각과 조선족의 입장을 내놓고자 무척 애를 써온 것으로 사료된다. 

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상당부분의 중국동포들이 이제는 중국의 실정을 잊어버린 것 같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나들이를 잘하지 않은, 적지 않은 조선족들도 어쩜 한국의 실정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가운데의 유대를 이어놓은 이들이 바로 한국와 중국을 왕래하는 조선족들이요, 그 유대 가운데서 핵심 포인터들을 체크해서 비평하고, 또 바로잡고자 반짝이는 생각과 아이디를 내놓아 조선족 포함 한민족 삶들의 끈을 끈끈히 이어놓고 있는 이들이 바로 채영춘 부장과 같은 칼럼니스트들이 아닌가 싶다.

칼럼에는 분명 비평이 있다. 그것을 어떤 각도로 어떻게 받아들이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보다 합리적인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아래 글은 연변에서 사용하고 있는 조선어문 표기법을 그대로 두니 양지 바란다. 

 <편집자>   
  

▲ 채영춘 프로필 : 중국 연변대학교 중문학부 졸업. 선후하여 연변TV방송국 국장, 연변주신문출판국 국장, 연변주당위선전부 상무 부부장, 연변대학교 객원교수로 임직.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길림성 조선문신문잡지 심사 위원, 연변일보 고문 론설위원.진달래문예상, 해란강문학상 등 수상. 저서로는 수필집 <내일도 연은 하늘에서 날 것이다>, <샘이 깊은 물>, <세월의 정>, <내일은 오늘에서 모양 짓는다>등이 있음.
        

 제1편

“민족동화(同化)”론

  채 영 춘

 

일전에 한 조선족 지인의 아들혼례식에 다녀온적이 있다. 그날 혼례식 포인트는 “한족며느리 맞기”였다.
결사반대했던 혼인이였는데 예비신부의 깎고 닦은 조선족 례의범절수준과  완벽한  조선말 구사실력에 높은 점수를 줄수 밖에 없었고 결국 지인내외가 내 언제 그랬냐싶게 한족며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상당히 인상적인 혼례식이였다. 조선족의 뺨을 칠 정도의 류 창한 조선말로 혼인서약을 맹세하는 한족신부의 자태도 일품 이지만 우아한 한복차림을 한 한족신부의 어머니가 조선족 신랑의 어머니와 조선족 춤으로 자연스레 엮이면서 화기애애 하게 혼례식절차를 밟아나가는 장면은 하객들의 마음을 훈훈 하게해주는 하나의 진풍경이였다. 조선족문화에 입문하고저 한족며느리는 물론 그 부모들이 얼마나 땀동이를 쏟았을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였다.  세월의 변화가 느껴진다.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세간에서 충격적인 이슈로 말밥에 올랐던 조선족과 타민족사이의 혼인이 오늘날 그 당사자는 물론 가족이나 세간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있는 혼인문화로  서서히 정착해가고있는 사실에 놀랍다. 그날 례식장에서 내가 앉은 좌석만 봐도 그렇다. 아홉명 조선족하객가운데 아직 자식들이 미혼인 나를 포함한 세명은 이미 한족며느리를 맞아 드린  다섯명 경력자들의 “포위”속에 “약소군체”로 자리매 김한 상황이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주관념원과는 상관없이 조선족정체성의 존속과 발전은 오늘날 글로벌시대의 도래와 함께 다원공존이라는 변화의 흐 름을 타게 되였다. 소박한 민족공동체의 단일화 생태공간에서 전통적 민족의식에 국한된  삶을 살아온 조선족에게 먼 장래의 가능성으로 들먹거려졌던 민족동화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변화된 환경은 변화된 의식을 낳기 마련이다. 민족의 운명, 민족의 미래와 같은 거창한 표현은 이제 더는 지난 세월 페쇄된 생존공간에서 인식되던 그같은 획일적인 사유의 꼬리표가 될수 없음을 분명히 시사하고있다. 여러 민족 공존공생의 다원화 생 태는 우리로 하여금 조선족과 기타 민족이 사회갈등과 인정세태, 물질적 삶과 정신적 추구, 환회와 번뇌, 리상과 곤혹 등 면에서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로 되고있음을 깨닫게 하고있다.

열린 민족주의리론의 시각에서 력사를 도리켜 볼 때 순수한 민족이란 없다. 인류의 력사는 이민의 력사이며 타민족과의 융합의 력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방된 글로벌화 환경에서 보 다 긍정적인 자세로 조선족과 타민족의 혼인을 인식하며 이런 혼인이 조선족사회발전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수 있다는 점 을 주목해야 한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조선족의 타민족며느리, 타민족사위는 다원공존생태환경의 필 연적 산물로서 그들 대부분이 본문의 서두에 언급한 “한족 며느리”처럼 조선족례의범절과 조선말구사실력을 포함한 조선 족문화의 입문에서 뼈를 깎는 각고로 조선족사회 구성원으로 될 “자격”을 당당하게 따낸 이들이라고  알고있다. 오늘날 이같 은 상황은 300여년전  하북성 청룡등지에 이민하여 조선족언어, 문자, 력사, 풍속을 깡그리 망각하면서 만족, 한족속에 녹아든 “박씨성”조선족들의 통혼실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조선족 문화가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로 이 땅에 건재할 때  청룡”박씨성”조선족의 그런 비극은 두번 다시 없을 것이다.

조선족의 대이동이 전격화되면서 조선족 미풍량속을 비롯한 조선족문화의 전승과 발전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있을 때 중한 수교에 의한 두 나라 문화교류의 장이 열리면서 조선족 사회발전의 중요한 변수로 되고있어 고무적이다. 한류의 물살을 타고 우리 나라에서 200여개에 달하는 대학교가 한국어강좌를 설치하여 타민족이 우리말 언어와 문화로의 접근에 푸른등을 켜주고있다. 현재 연변대학만 보더라도  260여명의 한족학생이 우리말 배우기에 전념하고있다. 이들 다수가 어릴 때부터 조선 족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는 점이 주목된다. 따라서 이들이 조선족의 며느리감, 사위감 후비력량으로 될 확률이 높다는 점 에 대해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민족 언어를 완벽하게 익히고 우리민족 미풍량속을 환히 꿰뚫고있으며 우리민족문화에 흠뻑 도취된 타민족며느리, 타민 족사위는 조선족사회의 귀중한 인문자산으로서 21세기 조선족 문화교두보에서 특수한 군체로 떠오를 것임이 분명하다. 상기 한  타민족며느리, 사위감에게  높은 점수를 주려하는것이 오늘 날 조선족 부모들의 마음일 것이다.

타민족의 우수한 며느리, 사위들의 조선족사회 가맹에 힘입은 이같은 민족동화가 조선족의 밝은 미래와 점철되는 오작교가 될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3년 5월 31일

 

제2편

윤동주,  연변의 자산  겨레의 재부
 

 

연변이 낳은 항일저항시인 윤동주가 일전에 탄생 99주년을 맞았다. 72년 전 일제감방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한 시인의 육신은 고향 룡정에 묻혔어도 그 넋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무한한 것을 깨우쳐주고있다.

누군가 “세익스피어는 시대가 없다”는 말로 위인이 창출한 문학정신의 영구불멸을 함축성 있게 정리한바 있다. 민족수난기 겨례의 비극을 뼈저리게 아파하고 이를 극복할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부끄러워한 윤동주의 순수한 정신, 반성의 자세는 일제식민지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겨례의 소중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세계 기타민족의 명인들과 마찬가지로 윤동주는 연변의 자산임과 동시에 겨레의 공동한 문화재부로서 그가 부각시킨 불멸의 정신적 유산은 지역을 넘어  민족과 나라, 더 나아가서 세계 평화애호인민에게 속한다.

고금중외에 자국의 력사문화명인을 초개처럼 대한 나라는 없는 줄로 알고있다. 자국인이 아니더라도 일단 자국운명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결코 “홀대”하지 않고 자국력사에 기록돼온 사례는 많고도 많다.
몇년전 19세기 저명한 작가 고골리의 탄생 200주년에 즈음  하여 로씨야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 사이에 고골리의 나라귀속 문제를 두고 치렬한 론쟁이 벌어졌었다. 고골리가 우크라이나 에서 태여났고 우크라이나에서 생활했으니 당연히 우크라이나 작가라는것이 우크라이나측의 태도였고 고골리는 로씨야어로 집필하고 로씨야어로 사고하였으니 백퍼센트 로씨야작가라는게 로씨야측의 주장이였다. 구쏘련이 해체되기전에는 전혀 문제시 되지 않았던 이슈다. 결국은 두 나라에서 각자 자기“유산”으로 표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수 밖에 없었던것 같다.

고골리 나라 귀속이 어떻게 변했던 그가 19세기 저명한 비판적사실주의문학 정초자로서의 세계적지위, 그와 관련된 지금까지의  문화콘텐츠내역은 변한게 없다.

윤동주도 가끔 나라귀속론란에 휩싸일 때가 있다. 장장 150 여년이라는 중국조선족이민사에 대한 료해가 전무하거나 삐뚠시 각을 가진 일부 이방국 학자들이 윤동주가 처했던 일제식민지 력사시기 민족수난의 생태를 도외시하면서 상식을 벗어난 이른 바 윤동주 “국적반환싸인” 헤프닝까지 벌리여 우리 나라 학자들 의 빈축을 샀던적까지 있다. “헤프닝”은 어디까지나 “헤프닝”일 뿐이지만 우리에게 은근히 시사하는바가 크다고 생각해본다.

“위인 치고 고립된 산정(山顶)은 드물다. 위인은 련산(连山)  의 정상이다.” 윤동주는 “고립된 산정”에서 우연하게 배출된 인물이 아니라 20세기초  룡정반일항쟁의 피어린 “련산”에서 솟아난 선각자의 한사람이라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윤동주에 대한 리해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패러다임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윤동주는 28년이라는 짧은 생애에서 21년을 룡정이라는 이 반일항쟁성지에 몸담고 반일계몽교육을 받으며 항일저항시인으로 부상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과정을 차례로 소화했다고 할수 있다. 룡정의 비장한 반일 넋이 윤동 주의 정신을 정화시켰고 시인의 지조와 사상적 뿌리가 고향 룡정에 내려지게 하였다. 어찌보면 일제의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의 룡정회귀는  락엽귀근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겠는가?

윤동주는 룡정이 낳은 연변의 아들로서 숙명적으로 우리가 정중하게 대해야 할 위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초급단계에 머물러있 다는 점이다. 윤동주 발견이 우리가 아닌 일본학자에 의해 지난 8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후 연변문단이 비로서 윤동주에 접근하기 시작했지만 어쩔수 없이 이방국 연구성과에 편중해온 것도 사실이다. 어찌됐던 이는 윤동주고향의 타이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수 없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때 남의 “입양아”로 전락될수도 있음은 먼 일이 아닐것이다. 일부 이방인들이 벌린 “싸인”촌극도 이같은 맥락에서 나오지 않았나싶다.

다행스러운것은 소설가 김혁선생이 3년전 대학교교수, 문인 들을 규합하여 룡정• 윤동주연구회를 발족시키고 왕성한 활동을 펼치면서 늦은대로 윤동주연구가 본격적인 흐름을 타고  있어 체면을 살리게 되였다. 윤동주 살리기, 우리 정부의 힘이 보태 져야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윤동주연구는 문학인들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따라서 조선 족에게만 국한된 명인연구가 돼서도 안된다. 윤동주연구가 광범 한 조선족과 기타민족, 나아가서 아세아 여러 나라 학자들의 폭넓은 관심, 동참, 성원과 이어졌을 때만이 윤동주정신의 탈지역 세계화의 가치성이 증폭될수  있다.

올해는 윤동주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동주의 고향 룡정이 세계 윤동주연구의 구심점으로 돼야함은 당연지사인줄 안다. 시인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동주연구작품활동, 연구포럼, 각종기념이벤트가 탄력을 입으며 윤동주생가기념관, 명동기념 관을 비롯한 룡정의 관련유적지건설이 세계적인 눈높이에서 재검토, 재기획, 재정리되면서 명실공히 정신적 품위가 돋보이 고 문화적 향기가 그윽하며 새로운 비전이 꿈틀거리는 거창한 윤동주연구전시체험공간으로 재건되리라는 소망을 가져본다.

2017년 1월 10일

 

 제3편

“버리기는 쉬워도 찾기는 힘든 법”


 

“…그들이 고향을 버린만큼 고향은 그들을 버렸다. 버리기는 쉬워도 찾기는 힘든 법, 고향을 떠나면 비루 먹은 개처럼 천한 신세가 되여야 하는가?...”

림원춘선생이 신작 중편소설 “신도시인”(《연변문학》제7호) 에서 고향을 두고 터쳐낸 절규이다. 손자녀석을 도시학교에 보내고저 쟈피거우 고향땅을 버리고 낯선 도시 연길에 들어와 “신도시인”이 됐으나 결국 도시인들의 “왕따”를 당하다가 허 무하게 객사한 주인공,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도 고향은 자기를 버린 “신도시인”을 무자비하게 외면한다. 작품은 주인공의 비극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회적화제를 던지고있다 ---
조선족농민들이 떠난 자리는 누군가가 “점령”해버린다. 결국  피와 땀으로 걸군 내 땅은 이미 남의 땅이 되여버렸다.

개혁개방 후 해외로무바람이 불면서 언녕 우리 민족 앞에 로 출된 심각한 사안이였으면서도 오늘 림원춘선생의 작품이 새삼 스럽게 깊은 사상적여운을 남기고있는 것은 아마 “버리기는 쉬 워도 찾기는 힘든 법”이라는 깊은 뜻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땅은 조선족을 있게 한 근거이고 연변이라는 전국 유일 조선 족자치주가 존립할수 있는 리유이기도 하다.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것이 땅이다. 그런데 자식의 학업을 위해서일 때 상황은 달라진다. 따지고보면 “소 팔아 자식공부시키는” 조선족의 전통 미덕이 오늘날 “자식학자금 마련”을 위해 땅 팔고 내 몸 파는 해외로무수출로 이어지고있는 것이 아니던가? 땅과 자식을 놓고 아무리 갈등해도 결과적으로 마음의 천평은 자식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라지만 오늘날 자식들 학업보장을 위해서는 꼭 우리의 선대가 피와 땀으로 걸구어 온 땅을 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걸가? 조선족농민들 고향지키기의 확고한 자세, 자식들 학업보장의 애절한 숙원이 우리 정부의 정치적혜안과 복합되여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안으로 창출될 수는 없는 것일가?

해외로무수출은 연변에 많은 리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다. 수많은 조선족 농민들이 해외로무에 모든 것을 걸고 자기가 도맡아 경영하던 땅을 양도해버리고 경제 기반을 잃어가고있다. 적잖은 조선족원주민마을이 쑥대밭이 되 였다. 앞으로 그들이 살아가야 할 길은 멀지만 영원히 국외에 정착 불가능한 현실에서 외국로무수입이 있어도 생산터전을 잃 고 경제기반을 상실한 그들의 미래는 불확실할수 밖에 없다. 버리기는 쉬워도 찾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눈앞의 경제리익만 보고 우리 선대들이 어렵게 일궈내고 지켜온 경제적기반을 일조일석에 날려버리면서 해외로무에 모든 것을 거는 경솔한 선택보다도 철저한 대비책이 병행된 해외 로무로 고향에 돌아와서도 떳떳한 땅의 주인이라는 본연으로 돌 아 갈수 있는 튼튼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 정부차원에서도 그들 이 벌어드리는 외화수입과 동시에 황페화돼가는 조선족농촌을 조선족농민들에 의해 다시 기지개를 켤수 있게 하는 대안을 두고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가? 더구나 나라의 “3농”정책의 활성화에 따른 농촌토지경영에서 농민들이 반가워할 일대 변혁 이 기성사실로 되고있을 때 정부의 능동적인 안내역할이 절실 하다는 생각이다.

일전에 우리 주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농촌토지경영권대출을 실시하여 이미 1461건, 금액으로 3억여원을 지급했다는 가뭄에 단비같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조선족농민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존의 일가일호 소농경제 운영체제가 전문농장, 가정농장화 규모경영체제로 전환하면서 연변에도 이미 전문농장 1137호, 가정농장 8108호, 여러가지 재배전문경영호가 3054호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재한조선족농민과 해외로무를 시도하는 조선족농민들에게는 상 당히 고무적이고 한번 해볼만한 2차 창업의 기회로 될수 있지 않을가? 이런 기회를 놓치고 땅을 타민족에게 팔아 버린다면 향후 연변농촌의 농장주는 타민족, 농장원은 조선족이 되는 불미스런 상황이 연출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지금 이미 그런 기미가 보이고있어서이다.

“버리기는 쉬워도 찾기는 힘든 법”,  100여년 조선족의 이주 력사에는 험악한 대자연과 싸워 이 땅을 개척하고, 일제와의 피 어린 항쟁으로 이땅을 지켜내고, 당과 정부의 민족정책배려로 이땅의 주인이 되여 이 땅을 동북아의 명주로 건설하느라 혼신을 쏟은 몇세대 조선족의 넋이 스며있다. 이런 땅을 버리는 것은 조선족선대에게 미안하고 우리 후대에게 미안하며 당과 정부에 미안한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이 땅의 주인으로 영원해야 한다. 버리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찾기 힘든 것은 아예 버린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2015년 7월 20일

 

▲ 제주 바닷가에서 ,  세월의 무상함을 깨닳으며, 그래서 더더욱 비상의 나래를 펼치며...<편집자>

 

제3편

깨여나는  룡정 “넋”

 

3년 전 이맘 때 모아산 산정에서 유유히 흐르는 “한줄기 해란강”에 흠뻑 도취되여 “해란강의 의미”를 들먹거렸었는데 3년후 “일송정 푸른솔” 우거진 비암산 산정에서  가난의 때를 벗고 의젓하게 변신해가는 룡정유적지의 황홀경에 매료되여  “깨여나는 룡정 넋”을  격찬하게 된다.

필자의 머리속에 룡정은 풍운의 “연변1번지”로 각인되여왔다. 유서 깊다는 말을 난생 처음으로 붙혀본 지명이 룡정이 아니 였던가싶다. 세상을 놀래웠던 비장한 력사사건과 혜성처럼 빛나는 력사인물 유적지들을 포용하고있는 룡정, 이 룡정을 한눈에 조감할수 있는 터가 비암산이다.

일전에 외빈들과 함께 비암산에 올랐을 때 필자 눈에 잡힌 일송정은 수년전의 초췌하던 그 모습이 아니였다. 산아래로 부터 정상까지 미끈하게 포장된 콩크리트도로, 잘 가꿔진 울창 한 소나무 숲속에서는 자연과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목조 유보도와 쉼터, 유적지 구조물들이 적재적소에서 관광객들을 반기고있었다. 음침한 날씨임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광 뻐스들이 들이닥치는데 한쪽 시공현장에서는 전기톱 작동소리가 귀맛좋게 울리고 인부들의 일손이 분주하였다. 일송정의 화려한 몸단장은 이제 시작인것 같다.

기분좋게 산아래를 조감하니 몸살을 앓던 어머니 강 해란강이 비암산을 에돌아 잘 손질된 하천공사를 따라 룡정시가지를 호탕하게 관통하며 세전벌을 적셔나가고 있었다.

비암산과 해란강의 변화하고있는 모습에서 필자는 깨여나는 룡정,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룡정“넋”을 본다. 이같은 변화는  룡정유적지 곳곳에서 유표하게 번뜩이고있었다.

이미 복원을 마친 명동학교건물, 아담하고 탄탄하게 신축된 “15만원 탈취의거” 기념비, 몰라보게 변모한 윤동주생가와 대성 중학교 유적지, 화려하게 부상하는 한락연기념공원… 룡정 유적지 변화에서 필자는 룡정 당정의 리념변화를 읽을수 있었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거나 심지 어 외면당하는 불운을 맞았던 우리의 자랑스런 반일유적지들이 드디어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것이다. 혁명유산 상속자들인 우리가 오랫동안 나몰라라 하면서 남들이 “입양”해가려는 억울 함과 유감이 증폭되는 시점에 늦은대로 정부의 명지한 용단으로 우리 유산을 살릴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고마운 민간 인들에 의해 겨우 지탱해오던 “로숙자”신세의 유적지들에 우리 정부의 긍정적 에너지가 주입되면서 활기를 되찾게 된 것이다.

윤동주생가만 봐도 그렇다. 그제날 초라하고 지저분했던 흔적 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고풍스런 돌담속에 잘 보완되고 신축된 생가와 진렬관, 그밖에 윤동주 시 석각구조물들이 정부의 거액 투자에 걸맞게 유적지 정원의 구석구석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정부의 리념변화가 이끌어 낸 룡정유적지들의 변신! 얼마나 기대해온 변화였던가?

중국조선족의 150년 이주력사에서 룡정은 조선족의 반일 투쟁력사의 산증인이다. 중국조선족의 빛나는 혁명투쟁사는 20세기 초엽부터 1920년대에 이르는 사이 룡정땅에서 있었던  조선족 반일투쟁을 그 서막으로 하고있다. 망각되고 왜소화되고 외면당했던 조선족력사가 제대로 정립되여 세상사람들 앞에 떳떳히 모습을 드러내야 조선족이 바로서고 중국근대사도 이 면에서 보다 완벽성을 기할수 있다.

력사를 모르면 자기를 낮추어보게 된다. 조선족의 자랑스런 반일투쟁력사를 떠올림에 불편해하거나 눈치보기에 전전긍긍할 그 어떤 리유도 없다.

우리민족이 중국으로 이주한 후 우리의 얼과 말, 글 그리고 력사가 살아남을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 봉건통치세력 및 일제 통치하에서 우리조상들이 민족사교육을 끈질기게 일관시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결과였음을 1920년대 이전의 연변지역 에서 발발했던 반일계몽사립학교의 창설과 교육이 잘 실증해 주고 있다. 그런데 룡정이 그 효시로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룡정의 3.13반일집회를 시작으로 전개된 연변지구 조선족반일시위운동은 연변지구항일투쟁사에서의 전례없는 장거 였으며 조선족항일무장투쟁의 서막으로 되고있다. 그래서 이 시 기  룡정의 유적지건설이 왜소화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룡정“넋”은 연변의 넋이고 중국조선족의 넋이다. 룡정유적지 복원과 재건은 연변 나아가서 중국조선족의 넋을 구축하는 천자호공정과 맞먹는다고 느낀다. 룡정유적지 복원과 재건이 정부의 힘있는 견인으로 전례없는 탄력을 받고 있을 때 꼭 동반 돼야 할 여건이 있다. 아마추어의 저급적인 시각이 아니라 고차 원의 전문가시각에서 비롯된 세계급 수준의 유적지 기획디자인 이다.

윤동주생가 유적지 복원의 경우, 정부의 결연한 의지가 고차 원의 전문가 시각으로 잘 보완되였더라면 굉장히 멋진 탈연변 수준의 유적지포장이 탄생될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윤동주의 120여수의 시를 눈에 뛰이는 유적지의 구석구석, 지어는 장의자, 전선주, 쓰레기상자, 유보도에까지 꽉 박아넣어  사람들의 시야를 혼란스럽게 하기 보다 적재적소에 가장 대표 적인 시를 조형화하여 세우고 나머지는 진렬관에 소중히 전시 하는것이 더 미학적이고 인상적일수 있다. 넘쳐나는 것보다 좀 모자라는 것이 더 매력적인 법이다. 여백이 전혀 없이  숨막히 고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 “미”는 작품을 보는 이들을 질식 시킬뿐이다.
 

당정의 리념변화에 힘입은 룡정유적지의 수준급 복원과 재건 은 고차원 전문가들의 명석한 사유, 현대적인 시야와 재능이 접 목되였을 때만이 가능하다. 우리가 복원하고 재건하려는 것은 유적지라는 빈 껍데기가 아니라 그 탑재물속에 비친 우리민족 의  “넋”이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20일`

 

제4편

국격과  인격
 


사드배치로 인해 우리 나라와 한국 량국관계가 악화돼 있는 시점에 필자는 서울에서 한국사회의 이슈로 돼있는 두 가지 사건을 직접 체험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하나는 한국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은 세월호 선체인양작업 이였고 다른 하나는 로씨야월드컵 아세아 최종예선 중한 대항전이였다. 두 사건 모두 중국과 엮어진 때문에 필자 또한 신경이 날카로울수 밖에 없었다.
세월호, 한국정치사에 악재로 기록된 특대 해상조난사고 가 한국사회를 슬픔속에 빠뜨린지 3년 만에 우리 나라의 거대한 바지선 두 척 사이로 한많은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 내는 순간 한국국민은 바지선 위에서 펄럭이는 상해샐비지 (上海打捞)의 깃발을 바라보며 중국의 힘에 놀라워했다.

사실 2015년 7월 세월호 선체인양업체 선정 국제입찰시 미국, 네덜란드 등 해양분야의 7개 컨소업체를 누르고 선체 인양업체로 선정된 우리 나라 상해샐비지에 대한 한국사 회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지어는 거의 부정적이였다. 그러다 1만여톤의 세월호선체가 물속에서 나왔을 때 한국국민은 뒤늦게나마 중국선체인양기술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했고 따라서 이 기적을 스무달 동안 350명의 중국직원들이 차디 찬 바지선우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쪽잠을 자면서 이 뤄낸 것임을 알게 되면서 상해샐비지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은 경건해질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한 주류매체는 “916억원 받는 상해샐비지, 쓴 돈은 2000억원 넘어”, “금전적 손실이 크지만 고난도 인양작업을 성공시켜 기술력 있는 업체라는 명성을” 얻을수 있었다고 극찬하였다.

불색 구난작업복을 입고 바지선 위에서 악전고투한 350 명 중국직원의 헌신적 노력으로 중국의 국가위상이 소리 없이 올라가는 순간이였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돈이 아닌 마음으로 한국국민과 비통을 함께 나누며 열악한 해상선체 인양을 성공시킨 상해샐비지는 고상한 인격으로 한국국민에 게 잔잔한 감동과 더불어 중국의 국격을 보란듯이 과시 하였다고 생각한다.

중한대항전, 사드배치로 두 나라 사이에 긴장분위기가 감 도는 상황에서 치뤄질 로씨야월드컵 아세아 최종예선 중한 전은 불꽃 튀는 접전이 예상되는 경기가 아닐수 없었다. 더 구나 승부 각축장이 중국이여서 한국으로서는 부담이 이만 저만 아닌것 같았다. 한국팀은 물론 취재길에 오르는 한국 기자들의 공통된 생각은 불안감이였다. 필자 또한 홈장 모 든 주도권을 거머쥐고있는 중국에서 혹시나 불민한 사태가 터지지 않을가 은근히 마음을 조였었다.

하지만 한국기자들의 불안감이나 필자의 우려는 부질없는 것이였다. 장사는 이날 한국팀이나 한국언론이 수긍하는 멋 진 경기를 차분하게 소화했다. 중한 두팀의 경기와 경기장 안팍 장사시민들의 표정에 대한 한국언론의 보도가 이 점을 실증하고있었다.

우선, 두 팀의 경기를 두고 한국의 주류언론은 이렇게 평 가하였다.
“중국축구는 한국보다 한 수 아래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아는 모습은 그랬다. 이제는 이 생각을 바꿔야 할것 같다 … 인정하기 어렵지만 중국축구는 한국보다 한 수 위의 모습을 보였다.” “중국은 거친 반칙, 침대축구 일절 없이 투지, 경기력 면에서 한국을 앞섰다.”

다음, 경기장 안팎 장사시민들의 표정에 대해 한국매체는 이런 인상을 담아냈다.
“정치와 축구가 이상하게 엮인 분위기속에서 발을 들여놓 은 장사는 너무 평온했다. 최소한 기자가 만난 장사사람들 은 친절했고 한국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한.중전이 열린 당일, 경기장 안팎에서는 적대감을 느낄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사드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축구경기를 앞두고 상대를 흔들어서라도 상대를 이기고싶은 자연적인 감정의 표현일 뿐이다. 그걸 누군가 ‘사드 적대감’으로 해석한다면 그건 분명히 잘못됐다고 본다.”

패배원인을 늘 궁색하게 합리화하며 대방 꼬집기에 정평 난 한국언론이 이번 중한전 관전평 그리고 경기장 안팍 장사 시민들의 표정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이례적이지만 그만큼 중국국가팀과 장사시민들의 긍정적모습이 이끌어낸 긍정적 반응이 아니겠는가?

중국국가팀 선수들은 멋진 정신력과 경기력으로 홈장경기 에서 축구인이 갖춰야 할 인격을 완벽하게 펼쳐보였고 장사시민들은 성숙된 시민의식으로 한국인들에게 깍듯한 례 우를 갖춤으로서 우리 나라의 국격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격은 국가의 체면이고 존엄이다. 국격의 핵심요소는 국 민의식수준으로서 국격이 높아지려면 국민의 생각과 생활자 세의 격이 높아져야 한다. 상해샐비지 350명 직원들이 보여준 치렬한 직업의식이나 중한전에서 보여준 국가팀 선수들의 진지한 경기자세, 그리고 장사시민들의 성숙된 시민의식은 모두 우리 나라 국민인격의 자연적인 발로로써 우리 나라 국격향상에 이바지되였는바 이거야말로 가장 진솔한 애국행위라 볼수 있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애국”이란 타이틀을 걸고 국격을 보란듯이 훼손하는 좀벌레들도 가끔 눈에 띄여 가슴 아프 다. 대 한국팀전 경기 전날 중국 어느언론매체의 앵커라는 자는 중한 두 나라 국가팀 훈련모습을 생중계하는 마당에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치졸한 언사를 내뱉어 국가언론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국격을 훼손하는 추태를 연출하였다. 사회적공분을 일으킨 이 행위를 질책한 건강한 사회여론에 대해 “매국노”, “한간”이라고 헐뜻는 무뢰한도 있었다. 이같 은 망발은 적어도 그날 긍정적자세로 열심히 경기를 치른 국가팀 선수와 성숙된 시민의식을 선보인 광범한 장사시 민들의 인격에 먹칠을 한 무모한 행위가 아닐수 없다.
일전에 《인민일보》론평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애국은 일종의 정감이면서 동시에 리성 화한 능력이라 할수 있다 … 오늘날 중국에서 법치는 민족 부흥의 근본적인 담보이다. 법률을 존중하고 타인의 합법 적권리를 존중하였을 때만이 나라를 사랑하는 격정이 ‘흐리 멍텅한 사랑’으로 령락하지 않고 맹목적인 충동,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동으로 돌변하지 않을수 있다.”

우리모두의 애국정서를 리성적으로 반추해보게 하는 의미 있는 글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드배치로 중한 두 나라관계에 비상이 걸린 오늘날 가장 신경이 날카로운 군체가 재한 70만 조선족이 아닐가 생각 한다. 이런 사태에서 우리 조선족들은 보다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성숙된 재한조선족사회 공동체의식을 부각시키며 보다 리성적이고 책임적인 재한조선족 인격의 함양으로 우리 나라 국격이미지 수호에 보탬을 주어야 할것이다.

2017년 4월 8일

 

▲ 이 땅, 연변, 그리고 소리치며 익어가는 가을의 노래....<편집자>

제5편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당신들은 왜 여기에 왔습니까? 당신들은 배고파서, 땅이 없어서, 농사지으러 바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가 넘도록 이 땅을 개간하고 논밭을 만들며 어렵게 생활터전을 닦아나갔습니다. 이제 이 땅은 우리 민족의 삶의 근간이 되였습니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되여버린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갖지 못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천시당하는 천덕꾸러기로 정착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가슴뭉클한 연설을 터쳐낸 위인은 바로 초대 자치주주장 주덕해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새 중국이 탄생되기 전야의 혼란기에 동북지역 조선족동포들이 조국관과 민족정체성으로 갈등하며 반도로의 대이동이 가시화되던 그 나날, 조선족동포들을 향해 절절하게 쏟아낸 주덕해의 이 유명한 연설은 “땅의 주인”이라는 투철한 정치적안목으로 광범한 조선족민중을 이 땅에 결집시킨 안정제로 작용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 태동의 정치적근간으로 다져진다.

그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의 민족정책의 포용하에 이 땅에서 벌어졌던 창상지변을 골고루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투혼과 지혜, 량지와 슬기에 힘입은 위대한 실천으로 중화민족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60여년 전 주덕해의 그 절절한 호소가 조선족의 결집을 이끌어냈고 중국조선족메카로서의 연변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연변이라 일컫는 “이 땅”을 우리민족이 중국소수민족으로 떳떳히 정착할수 있는 현실적인 삶의 징표로, 확실한 정치적근간으로 인식할수 있게 한 주덕해의 “땅의 주인”론, 60여년이 지난 오늘 그 의미가 어느때보다 새롭게 우리의 가슴에 맞쳐온다.

오늘날 천지개벽의 변화의 흐름속에서 대대손손 주어진 땅뙈기에만 집착하면서 해해년년 이 땅의 소출에 목을 매야했던 조선족농민들이 전통적인 농부의 삶에 도전장을 내는 시대적용기를 낳을수 있은 현실적가능성은 당의 개방정책에 따른 해외로무진출이라는 조선족농민들만의 특수한 “시험 테라스”에서 비롯되였고 이 가능성은 또한 조선족농민들로 하여금 단순한 농지로서의 “땅”을 복합적의미의 창업 시공간으로 인식시키는 위대한 발상의 힘으로 되게 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시대의 변화를 도외시하면서 농경민족이니 그냥 농경민족답게 몇무지 땅에 목을 매고 농사만 지으면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려 않는 그같은 삶이야말로 “하루아침에 천시당하는 천덕꾸러기” 삶일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이라는 정치적신념을 확고히 갖추고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발전변화의 흐름속에서 부단히 갱신하고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삶의 근간을 더 튼튼히 다져가는것이야말로 주덕해 초대주장의 오늘날 바램일것이다.  그 과정이 “탈땅”을 시작 으로 실망과 고민, 곤혹으로 얼룩졌어도 결과적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고향재건”에 그 뿌리를 내린 합리한 “수험료”라고 해석할수 있지 않을가?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선대들이 피땀으로 개척하고 목숨으로 지탱해온 이 땅을 “지킨다”는 소박한 농심에서 “재건한다”는 현대적리념에로의 전환이 “버린다”에서 파생되지 않았을가 생각 해본다.  “버릴수 없는 삶”은 “이룰수 없는 꿈”과 직결된다. 물론 모든 긍정적인 변화의 행보에는 엄청난 대가가 따르듯이 위대한 변혁을 도출하기 위한  비장한 선택으로 조선족농민들이 잠시 빠져나간 우리농촌의 공동화(空洞化) 현실, 역시 간과할수만 없는 상황이다.

조선족농민들의 해외로무수출은 궁극적으로 우리자신의 삶을 위한 선택일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다. 고향떠나 20여년, 이제는 연변이란 고향의 부름에 귀를 기울릴 때가 된듯 하다. 이것이 오늘날“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가 아닐가 싶다. 고향재건을 위한 잠시의 “탈땅”이 영구화로 이어지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탈땅”공백이 그냥 주인의 귀환을 무작정 기다리며 황페화돼야한다는 도리가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때 인간의 매력적인 거동을 이끌어낼수있는 활력은 매력적인 흡인책에 있다. “귀향창업 흥변부민”프로젝트의 가동, 드디어 자치주 당정이 고향 떠난 “이 땅의 주인”들에게 60여년 전 주덕해 초대주장의 력사적인 연설과 맞먹는 화끈한 귀환메세 지를 보내고있다 –--“고향은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향창업지도의견의 반포, 귀향창업 봉사체계의 시달, 귀향창업 인적자원파일의 구축, 귀향창업로무자 련계통로의 설치, 귀향창업자 봉사수요의 파악 등 실질적이고 효률적인 대책마련이 뒤따르면서 귀향창업프로젝트가 탄력을 입고있다. 일반호소가 아닌 강력한 시스템의 보완으로 력동적인 상황이 기지개를 켜면서 귀향창업의 붐이 드디여 밝은 전망을 예고하고있다.

귀향창업의 량호한 생태환경구축에서 지역사회 엘리트, 유지, 명인들의 선도적역할이 중요한 변 수로 되고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귀향지식청년” 류창은, “귀향장령”김문원과 같은 리더들의 저력이 귀향창업자들의 열정과 끈끈한 조화를 이룰 때 연변의 “귀향창업 흥변부민”전략은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라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해외로무자 흡인책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일련의 격려차원의 정책이 뒷받침해주어야 할것이다.

“고향재건”이라는 우리 조선족농민들의 오랜 숙원이 자치주 당정이 펼치고있는 “귀향창업” 프 로젝트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드디여 농촌“공동화”의 우려를 깨끗히 씻어내고 “이 땅”에 매력이 넘치는 현대판 농촌지상락원을 일떠세웠울 때 우리는 다같이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자부감을  한껏  누릴 것이다.

주덕해 초대주장은 4인방의 박해로 무한의 한 초라한 병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한마디 유언을 남겼다고한다 --– “저는 연변에 돌아가겠습니다.”

“이 땅의 주인으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잃지 말라는 당신의 당부를 간직하고 고향재건에 떨쳐나선 연변사람들의 오늘의 모습에 주덕해 초대주장은 저 세상에서 흐뭇한 축복의 미소를 보낼것이다. 

2016년 4월 10일

 

제6편

 재한조선족과  언론의  포용
 


      "나는 량심이 한점 없는 / 빼빼 마른 손가락질에 /
       억울함을 타 마신다 / 나는 뒤통수 아프게 하는 /
       어릴적에도 못 배운 욕질에 / 격분을 타 마신다 /
       나는 하루아침에도 내국인이였다 / 외국인이 되는 /
       카멜레온에 / 슬픔을 타 마신다 /
       나는 장백산 칼바람의 따뜻함에 /그리움 타 마신다 …
       지루함과 억울함과 격분과 / 슬픔과 그리움을 토해 /
       거기에 붓을 찍고 / 자랑스럽지 않게 이역에서 /
       눈물의 시를 쓴다” (림금철)

해외로무자의 심장박동을 느낄수 있는 한편의 격문이다.
해외로무자의 생존현장을 떠올릴수 있는 한폭의 그림이다.

“나는 쇠가루를 마신다”는 제목으로 쓴 한 로무자의 현장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연변 “해외민생”들의 그 처절한 생존 몸부림과 결연한 투혼의지에 가슴 뭉클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더 큰 관심은 로무자의 의분강개한 현장시보다 이같은 현장시를 따뜻한 마음, 랭철한 리성으로 보듬어 담아낸 언론의 숨겨진 자세에 있었다.

병신년이 다 저물어가는 시점에 재한 조선족로무자들의 현장 시 특집으로 “해란강”문예판 한면을 전부 도배한 《연변일보》 의 멋진 시도는 이제 화려하게 오픈할 연변TV음력설야회 “서울상륙”편과 더불어 우리 언론이 해외 수십만 조선족동포 들과 맥락을 같이 하며 중국조선족의 글로벌시대를 함께 열어 간다는 결연한 의지의 징표로 가슴 뜨겁게 안겨왔다.

일전에 라지오방송국의 지도일군과 한담중 재한 조선족 이미 지쇄신을 위한 해외지역방송사와의 프로그램 공동개설화제를 가 지고 생각을 나누며 공감대를 가졌던적이 있다.
연변의 3대 주류언론이 재한 조선족로무자를 두고 펼쳐보인 긍정적인 사유와 행보는 세가지 부동한 공략(攻略)루트를 구축 하고있다고 생각한다.

《연변일보》의 재한 조선족로무자 현장시 특집은 본토 조선 족들에게 재한동포들의 이역땅 렬악한 생존실태와 완강한 도전정신에 대해 주목하고 그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주자는 뜨거운 마음의 웨침을 담고있으며 이제 KBS 홀에서 펼쳐질 연변TV음력설야회 서울편은 연변 당정과 여러민족 인민들이 재한 동포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안부와 힘찬 성원의 감동을 담고있으며 연변라지오방송이 해외지역방송과의 프로그램 공동 개설구상은 재한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긍정적인 인식변화 를 이끌어내기 위한 절절함을 담고있다.

세가지 부동한 측면의 공략루트는 모두 “해외민생”이라는 21세기 중국조선족 생존과 발전테마를 둘러싸고 본토 조선족, 재한 조선족, 한국 코리안들속에서의 공감대 구축을 위한 우리 언론의 “합동플레이”로 해석하고 싶다.

“합동”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우리는 “재한 조선족로무자”화제 를 가지고 상당히 획기적이고 고무적인 “플레이”를 펼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연변일보》가 펼쳐낸 재한 조선족 로무자 현장시 특집은 “재한조선족문인협회”의 배합으로 이루 어졌고 이제 펼쳐질 연변TV음력설야회 서울콘서트는 한국언론 사와 연예인들의 동참으로 펼쳐지게 되며 기획중에 있는 라지 오방송의 재한 조선족 이미지쇄신을 위한 프로그램개설도 한국 지역방송과의 공동합작으로 현실화된다고 할 때 우리언론의 합동공간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부풀어질수 있다.

이 연장선에서 인터넷시대에 걸맞는 멀티미디어의 전격활용, 강력한 국가급 언론과의 파격적인 련합작전에 의한 “합동”을 “합성”으로 업그레드시킬 때  재한 조선족동포들을 위한 우리 언론의 포용은 커다란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재한 조선족동포들은 반드시 우리가 챙겨야한다는 리념이 확실히 서고 그들의 이역땅 도전에 우리의 따뜻한 사랑이 동반 돼야한다는 리치가 분명히 뿌리내리고 그들이 고향재건의 막강 한 인적자원으로 된다는 믿음이 드팀없을 때 재한 조선족동포 들을 위한 우리 언론의 포용은 일종의  문화자각으로 승화되면 서 그들의 마음속에 뿌듯한 자부감으로 안주하리라 믿는다.

2016년 12월 9일

▲ 집 떠난 사람들의그 한결 같은 그리움은 '따뜻한 집'과의 스킨십, 그런 목마름...<편집자>

 

제7편

“집 떠난 사람들”의 도전과 변신

 

“…집 떠난 사람들의 삶이란 바람 앞의 수풀마냥 어쩔수가 없이 마냥 흔들리게 되어있다. 낯선 주위환경에 거세당하며, 낯선 내지인들의 눈치를 보며, 그런 삶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아득바득 발버둥질을 하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 “디아스포라 문인”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있는 연변작가 리동렬씨가 자신이 발간한 “집 떠난 사람들”이란 책의 권두언에서 한 말이다. 70만 재한조선족을 망라한 “집 떠난” 해외동포들의 처지를 극명하게 담아낸 고백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가 수년 전 한국 안산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낯선 주위환경에 거세당하며, 낯선 내지인들의 눈치를 보며” 많이 위축된 듯한 자세였었다. 그런데 지난 두달 전 서울 대림동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당당하고 의젓했다. 정확하게 9년만의 만남이였다. 어느 동포신문사와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장으로 거기다 재한동포문인사회를 호령하는 대표자로 부각되여있는 그의 눈에서는 문인리더로서의 강인함과 더불어 한국주류사회 인정을 한몸으로 받고있다는 그같은 뿌듯함이 번뜩이고 있었다. 처절한 도전으로 바꿔온 화려한 변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순간이였던 같다.

이를 반증하듯 며칠전 그가 필자에게 보내준 갓 발간된 “동포문학(제3호)”은 이런 도전과 변신을 확인할수 있는  새로운 견증물이 아닐수 없었다. 중한수교 23주년을 맞아 그의 재한동포문인협회가 개최한 “제1회 중한문화예술 교류대전”과 “뿌리 바다로 흐르다” 도서출간기념식에 쏟아낸 한국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 총령사와 대한민국 여야국회의원들을 망라한 정치 인, 문인들의 찬사와 호평은 재한동포문인협회의 수년간 로고와  업적에 내린  값진 훈장이 아닐수 없었다.

 중한수교 20여년래 재한조선족사회는 여러 형태의  민간 단체들을 배출했지만 많이는 조선족들의 피로한 심신을 달래고 친목을 다지는 차원의 스포츠, 오락, 문화공연과 같은 행사유치 에 그쳐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결정하는게 아닌가 싶다. 이제 70만 재한조선족사회의 문화 의식을 선도해 가는 구심점이 나타날 때도 된듯 하다. 이같은 구심점에 의해 재한조선족사회도 서서히 자체의 정신을 형성 해야한다는 생각 을 필자는 줄곧 하여왔었다. 그런데 이번에 재한동포문인협회의 움직임에서 필자는 희망의 섬광같은 것을 보았다. 평양중심의 조선문화나 서울중심의 한국문화와는 색다른 연변중심의 중국 특색 조선족문화에 기반을 둔 재한조선족 동포문화의식의 고양 과 선도를 위한 조선족문인들의 몸부림이랄가?

문화의 핵심은 정신이다. 정신은 한 민족의 문화기질이고 문화풍격으로서 민족의 생존 및 발전과 직결된다.  우리 민족이 반도를 떠나 중국으로 이주한 100여년간 일제시대와 랭전 시대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이 황페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걸출한 문화민족으로 부각될수 있도록 지탱시켜준 강인한 자질 과 적응력은 조선족 유일의 문화정체성에서 비롯되였다. 이 문화정체성은 오늘날 개혁개방의 흐름을 타고 해외진출의 새 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70만 재한조선족을 문화적으로 결집 시키는 힘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조선족의 100여년 중국이주사와 20여년의 해외로무진출사는 모두 화려한 변신을 위한 처절한 도전을 동반하고있다. 물론 이 변신의 중심에는 문화의식의 선도를 이끌어가는 재한동포문인 사회의 구심점역할이 병행돼야함은 두말 할것 없다. 이런 구심 점역할은 재한조선족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정확히 알도록 리드 해주고 한국사회가 재한 조선족을 정녕 마음으로  “대한민 국 국력신장과 발전의 조력자”로 받아드리도록하는 노력에서 구현 돼야 한다.

 일전에 한국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지인한테서 자신이 가르친 30여명 한국학생들이 중국에서 출제한 hsk 중국어 능력 시험에 전부 합격하여 그 부모들로부터 생란리가 났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자식들이 중국어를 배우도록 고취하는 부모들의 목적은 화려하게 펼쳐지고있는 중국의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향후 아이들이 중국 또는 중국관련 회사에 가 취직하거나 일을 할 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도록 하게 위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장래 이 애들이 “중국통”이 되여 중한교류현장에서 가교역할을 출중히 해나간 다고 할 때 필자의 지인은 오늘날 한국은 물론 중국으로서도 위대한 일을 감당해내고 있는 것이다.

재한조선족동포사회의 문화의식을 선도해가고 이끌어가는 견인차로 되여 조선족동포이미지향상에 이바지하고있는 리동렬 씨의 재한동포문인협회의 노력이나, 수많은 “중국통”을 길러내 고 21세기 중한교류의 가교자를 량산시키기 위해 애쓰는 필자 지인의 소행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성스런 로동이 창조해낸 사회적가치는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2015년 7월 7일

 

제8편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을 두고  


“지난 8월 처음으로 연길에 가게 되였다. 솔직히 어린 딸애를 데리고 떠날 때까지 엄청 무서웠다. 연길은 영화 ‘황해’의 한 장면처럼 시장바닥에 개를 끌고다니는 락후한 모습에 인신매매에 걸려 장기라도 적출당할거 같은 범죄천국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처음 만난 연길은 충격자체였다. 한국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였다. 빌딩이 숲을 이룰만큼 도시는 너무 발전해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조선족안해를 둔 한국 젊은이가 연길초행길을 두고 언론에 터놓은 솔직한 마음의 고백이다.

“연변에서 느꼈던 충격과 부끄러움만큼… 연변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족 재발견”이라는 “량심저술”을 기획하기에 이른 한국 젊은이한테서 필자는 신선한 감흥을 느꼈다.

연변을 다녀온적 없는 대부분 한국인들이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리해는 백지화수준이라 할수 있다. 민족상잔의 피비린 악연과 점철된 반목의 깊은 곬, 그속에서 파생된 무지와 편견은 반세기를 주름잡으며 지금까지도 진행 형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고있다.

연길에서 10여년 살아온 “연변통” 한국기업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한국친구를 연변으로 초청했는데 처자식은 물론 한국의 대부분 사람들이 “연변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가느냐”며 극구 말리더라면서 “연변에 한국인을 전문 납취하여 눈, 간, 심장 등 장기들을 적출해 팔아먹는 범죄집단이 있 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말에 너무 기가 차서 까무러칠뻔 했다고 한다. 더 한심한 것은 이같은 악성 루머를 영상화하여 연변 과 조선족을 매도하는 여론의 앞장에 서서 한국사회의 삐뚠시각을 가시화 하는 한국 일부언론의 저의가 의심스러울수 밖에 없다.

연변에 지점장으로 부임된 한국인 한분은 연변을 공포지역으로 알고 발령 받는 순간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했는데 와서 지내며 보니 여기처럼 안전하고 살기좋은 곳이 없다고, 오히려 한국보다 더 안전하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들며 왜 연변이 무시무시한 고장으로 소문났는지 모르겠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한다.

2년 전 필자도 오랜 고민끝에 연변행을 작심하고 떠나온 처가편 한국 친척분들과 함께 할수 있는 기회를 가진적이 있었다. 며칠간의 연길체류에 서 보여준 한국친척분들의 충격적인 반응과 믿기지 않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들이 얼마나 한국사회의 조작되고 왜곡되고 부풀어진 여론에 세뇌되여 왔는지를 알것 같았다.

페쇄된 환경에서 세상을 보는 창은 언론 한편, 영상화면 한순간으로 커버될수 있다. 연변에 대해 생면부지인 한국인들에게 주류매체가 만들어 내는 영화 “황해”나 “아수라”, 드라마 “신세계”, 뉴스언론에서의 연변비하 화면과 보도는 려과없이 한국인들에게는 연변인상 가이드로 작용된다. “국민의 알권리”를 그처럼 강경하게 표방하는 한국 일부언론이 랭전시대의 진영론 사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연변과 조선족을 제멋대로 우롱하고 릉멸하는 추태에 마음이 무겁다.

지난세기 80년대 초반까지 연변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인간 생 지옥”이였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 당시 “남조선”을 료해할수 있는 유일 한 통로는 조선의 간행물과 영화가 전부였다. 어느 월간 화보에 실리 군하던 남조선의 처참한 사진화면은 끔찍함 그 자체로 받아드려졌었다….

가물로 쩍쩍 갈라터진 논밭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초췌한 모습의 농부, 깡통을 차고 거리를 류랑걸식하는 소년거지, 허름한 판자집으로 덮힌 빈민 굴동네 …, 어느 년대의 사진인지는 몰라도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 인민 들의 참상”은 액면 그대로 우리 머리속에 각인되였었다. “국민의 알권리”가 철저히 유린되였던 세월의 징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같은 상황이 오늘날 한국판으로 재연되는게 아닌가 싶다. 랭전 시대 페쇄된 적대리념공간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연변관(观)이 중한수교 20 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악성바이러스로 류포되면서 “범죄천국” 으로 요괴화되고있음을 한국젊은이의 고백이 실증하고있어 가슴 아프다. “연변의 모습은 한국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였다”고 까밝힌 한국젊은이의 말은 한국국민을 바보취급하는 한국 일부언론에 날린 경고메 세지라고 생각한다.

연변은 무릉도원이 아니다. 하지만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동북아의 명주로 부상하고있는 매력적인 고장이라는 점은 객관적사실로 세인들 앞에  드러나있다. 일부 한국언론이 연변을 “인신매매”와 “장기적출”이 성행 하는 “범죄천국”이라고 릉멸하는 무모함에서 그들이 표방하는 “국민의 알권리”가 얼마나 허황하고 창백한가를 보여줄뿐이다.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이 더많은 한국인들의  연변행에 긍정적 에너지로 되면서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오해가 깨끗히 세척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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