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중국 조선족 유명 평론가 김호웅은 연변대학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이다. 그의 평론은 작품에 대한 투철한 이해로부터 나오는 비교적 합리적인 사색과 판단, 날카로운 비평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런데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바쁜 여가에도 짬짬이 발표하고 있는 그의 수필 창작 성과이다. 그의 수필은 거의가 자신이 겪은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써내고 있는 논픽션 형식의 글이다.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수한 위치에 있는만큼 그의 수필은 단순한 문학성을 떠나 학계와 문학계의 자료성적이고 역사성적인 데이타도 내재하고 있기에 중국 조선족 수필 문학에서는 나름대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편집자>

▲ 김호웅 약력 : 1953년 연길 출생,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문학박사. 일본 와세다대학교, 한국 한양대학교, 배재대학교, 한국국제교류재단 객원교수 역임. 현재 연변대학교 교수, 박사생지도교수,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중국 4대 국가문학상의 하나인 “준마상”(2012) 등 다수 수상.

    

   제1편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김호웅  2003년 한국 대전에 있는 배재대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강의를 했다. 대학 구내식당에서는 간혹 불고기나 닭다리튀김을 주었지만 거개는 된장국에 김치만 주는지라 속이 출출할 때면 기름진 중국 료리에 독한 배갈 한잔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끔 홍문장이라는 중국료리집을 찾았다. 배재대학 후문으로 나와 내리막길을 걷다보면 언제나 장바구니를 든 서민들로 시끌벅적한 재래시장이 나온다. 그 시장 뒤쪽에 아담한 단독주택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홍문장이다. 처마밑에 진하고 활달한 글체로 홍문장(鴻門莊)이라는 간판을 건 술집인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 사천에서 온 40대의 중국인 왕씨 부부가 경영했다. 료리도 일품이거니와 한 모금 마시면 콕 쏘면서도 뒤맛이 개운한 북경 고량주도 있어 참 좋았다.  술집이름이 홍문장이니 이 술집에 가면 자연 홍문연(鴻門宴)이라는 유명한 고사를 떠올리게 된다. 더더구나 창가에 있는 술좌석에 앉아 뒤뜰을 건너다보면 목검과 방패를 들고 뛰고 솟고 치고 찌르면서 무술을 하는 애들을 볼수 있다. 모두 홍문장 주인 왕씨네 애들이다. 왕씨에게 물어보니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저들끼리 《홍문연》이라는 전통극의 한 장면을 본 따서 무술을 익힌다고 했다. 홍문연이란 천하의 영웅 류방과 항우가 자웅을 다툴 때 술판에서 벌어졌던 아슬아슬한 장면을 두고 말한다. 홍문연 이야기는 이러하다.  진나라 말기에 류방과 항우는 각자 군사를 휘몰아 풍전등화같이 흔들리는 진나라를 들이쳤다. 류방의 병력은 항우의 병력에 미치지 못했지만 먼저 진나라의 도읍인 함양(咸阳)을 깨뜨렸다. 이에 항우가 괘씸하게 생각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류방이 관중(关中)에 틀고앉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고자질을 하는 자가 있었다. 항우는 천둥같이 노해서 이튿날 아침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류방의 군사를 들이치고자 했다.  일장 광야를 피로 적시는 큰 싸움이 일어날 판이라 류방은 깜짝 놀라 항우의 계부 항백(项伯)을 찾아 좋은 술로 달래고 그더러 항우를 찾아가게 했다. 류방이 귀한 선물을 가지고 인사하러 온다는 항백의 말을 듣고 항우는 짐짓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기다렸다. 실은 이 기회에 류방을 죽여 버리고자 한 것이다. 황차 항우 수하의 대장군 범증(范增)은 진작 류방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해오던 터이라 주연을 베풀자 항우가 눈치를 주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항우는 유예미결로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범증은 항장(项庄)을 불렀고 항장은 칼춤을 추어 흥을 돋우는 척하다가 류방을 냅다 찌르려 하였다. 이에 항백은 류방을 보호하기 위해 역시 검을 뽑아들고 항장과 맞서서 겅중겅중 돌아갔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류방의 부하인 번쾌(樊哙)가 검과 방패를 량손에 갈라 쥐고 성큼 뛰여들더니 항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항우는 번쾌의 기품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술을 내리게 했다. 번쾌는 단숨에 큰 술잔을 비웠다. 항우가 깜짝 놀라 이번에는 돼지다리를 하나 가져다주게 했다. 번쾌는 방패를 도마로 삼아 칼을 빼서 고기를 잘라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 이 기회에 잔꾀가 많은 류방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조금 있더니 류방의 부하 장량(张良)이 들어서더니 류방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작별인사도 고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대왕께 백옥(白璧) 한쌍, 대장군께 옥두(玉斗) 한쌍을 드리라고 하더라고 했다. 항우가 백옥을 받아놓는데 범증은 분김에 자기에게 차려진 옥두를 검으로 내리쳐 부수어 버렸다. 법증은 “장차 항우의 천하를 빼앗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류방일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이리하여 홍문연을 두고 후세 사람들은 살기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연회를 암시하는 상징으로 쓰고있다… 아무튼 칼춤을 추는 네 아이가 하도 귀여웠다. 나는 뒤뜰에 나가 누가 류방, 항우이고 누가 범증, 번쾌냐고 물었다. 큰놈부터 히쭉히쭉 웃으며 차례로 나서는데 나중에 제일 작은 막내가 방패와 검을 들고 깡충 뛰여나오더니"제가 바로 산하를 삼킬듯 하는 기개를 가진 번쾌랍니다!(我就是气吞山河的樊哙吗!"하고 제법 어깨를 으쓱거린다. 조자룡이 창 다루듯이 제법 사자성구까지 쓰는 품이 중국어실력이 만만치 않다. 술좌석에 돌아와 왕씨에게 물어본즉 큰놈과 둘째는 국제학교를 다니고 셋째와 막내는 한국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한국어와 중국어를 다 잘한다고 했다. 중국어는 주로 부모와 대화하고 저들끼리 놀면서 배우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사천에 데리고 가도 다 통한다고 했다. 망망대해와 같은 한국문화의 포위 속에서도 저들의 문화와 모국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홍문장 주인 왕씨네 아이들, 참으로 신기하고 대견스러웠다. 이런 절해고도와 같은 상황에서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지킨 사례가 우리 연길에도 있다면 독자 여러분은 믿어주시겠는가? 물론 중국인 가정이 아니고 로씨야인 다위도브(1899-1970)선생네 가정이다. 다위도브선생은 연변대학에서 로어를 가르쳤는데 그와 부인 사이에 칠남매를 두었다. 그들로는 어머니 성씨를 딴 박정실, 박명순, 박승영, 박애연, 박승철, 박승민, 박승진인데 그중 내가 이 자리에서 소개하려는 사람은 다섯째 박승철이다. 그의 로씨야 이름은 수라다. 수라는 연변의 유명한 스케이팅 선수라 나도 스케이트장에서 그의 멋진 질주를 먼빛으로 본적 있다. 2002년 나는 수라씨를 로씨야 연해주에서 만나 큰 신세를 진적 있다. 사연은 이러하다. 우리 대학에서는 손동식총장을 단장으로 하는 4인 대표단을 무어가지고 블라지 보스또크에 있는 원동대학을 5박 6일 일정으로 방문하게 되였다. 나도 그 무렵 조문학부 학부장으로 일했기에 재수 좋게 대표단 성원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나는 쏘련문학 전문가이며 박사생지도교수인 정판룡선생을 보고 연해주구경을 하게 되였노라고 자랑을 했다. 그랬더니 선생은“시커먼 빵에 감자비빔을 사나흘 먹어보라구, 속에 불이 나지 않는가. 연해주에서 쌀밥에 된장국을 먹을데를 알려줄가?”하고 싱긋이 웃는다. 물론 선생에게 잘 부탁을 드렸고 이튿날 선생은 수라씨에게 전화 한통을 넣은 모양이다. 실은 정판룡 선생은 다위도브선생에게서 로어를 배웠고 다위도브 선생이 “쏘련간첩”으로 몰려 무진 고생을 하다가 1970년에 작고했을 때 조문을 갔던 유일한 제자인지라 수라씨네 칠남매는 정선생을 무척 존경하고있었다.  우리 일행이 블라지 보스또크 공항에 내리자 수라씨가 벌써 공항 안쪽 홀에 들어와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개찰구는 벌써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수라씨는 우리 려권을 거두어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잠간 뒤에 되돌아와서 우리를 데리고 옆문으로 빠져나왔다. 우리가 짐을 챙겨가지고 나오자 수라씨는 우리는 안내해준 꺽다리 세관일군을 보고 몇 마디 인사를 하는것 같았다. 그러자 꺽다리는 수라씨의 어깨를 툭 치더니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슬쩍 반어(反語)를 구사해 한 마디 던졌더니 그렇게 좋아했다는 것이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이거 참, 번마다 신세를 져서 부득부득 이가 갈리네, 이 원쑤를 언제 갚지?” 아마도 이런 투로 인사를 했을 것이다. 말 한마디 천량 빚을 갚는다고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사흘 후 우리 일행은 수라씨의 비까번쩍하는 7인승 승용차를 타고 불라지 보스또크에서 40키로 떨어진 농장에 들어섰다. 대형 비닐하우스들이 큰 골짜기 하나를 꽉 채웠다. 오이를 주종으로 여러 가지 남새를 재배해서 불라지 보스또크에 공급한다고 했다. 길이 100메터, 너비 10메터 되는 비닐하우스가 47개라고 하는데 남새값이 금값인 로씨야이니 여기서 나는 수입만 해도 가관일 것 같았다.  실은 중국인의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남새농사를 할뿐이지 큰 수입은 무역을 해서 챙긴다고 했다. 일례로 모스크에서 불라지 보스또크에 이르는 철도는 1907년에 개통되였는데, 씨베리아 폭설과 강바람에 레일(铁轨)도 휘고 비틀어지고 금이 서기 마련이였다. 제철 같은 중공업이 발전한 나라인지라 레일이 파손되면 뽑아서 풀숲에 던지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니 100년 가까운 세월 풀숲에 가로세로 방치된 강재가 얼마나 많았을가. 수라씨네 형제는 능숙한 로어로 로씨야 관원들과 협상을 벌려 흑룡강성의 감자를 주는 대신에 블라지 보스또크에서 치따까지 수천키로에 달한는 철도연선에 버려진 레일들을 수거해가지고 안산강철공장에 팔아 거금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도 처음 듣는 소리지만 연길감옥 죄수들이 만든 스팀이 일품인데 이를 년초에 전량(全量) 매입해 두었다가 불라지 보스또크에 신축건물들이 일어설 10월경에 실어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란다. 중공업이 발전한 대신에 경공업이 락후해서 최첨단 땅크나 전투기를 만드는 나라가 스팀 하나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 그러니 연길감옥 죄수들이 만든 스팀을 가지고도 떼돈을 벌수 있었던 것이다. 신판《허생전》을 보기라도 하듯이 우리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데 수라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 우리 아버지 덕분이지요. 낮에는 학교에 나가 조선어나 중국어를 배우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일단 숙제를 끝내면 반드시 로어를 배워야 했거든요. 이건 우리 집의 불문률이였답니다. 어떤 날에는 운동까지 하고 와서 정말 곤해서 죽을 지경인데 아버님은 회초리를 들고 앉아 여전히 두 시간씩은 우리 자식들에게 로어를 배워주었거든요. 아니, 중국에 살겠는데 로어를 배워서는 무얼 한단 말이야 하고 우리는 속으로 불평을 부렸지요. 그땐 아버지가 정말 야속하고 미웠어요. 허지만 오늘 와서 보니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었지요. 로어를 배운 덕분에 애연 누나는 대학의 로어강사로 됐구, 나는 로씨야 무역을 해서 이만큼 사는게 아니겠습니까?""정말 아버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셨군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이렇게 수긍했다. 하지만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리 선견지명을 가진 다위도브 선생이라 한들 어찌 50년 후의 오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국타향에 홀로 살아도 제 자식들만은 모국어를 아는 진짜 로씨야인으로 키우고 싶었던 그 욕심과 집념이 결국은 개혁, 개방을 맞아 이들 남매들을 살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때 연길 인구는 10만 명, 다이도브 선생네 일가는 그야말로 창해일속(滄海一粟)이나 진배없었다. 다위도브 선생의 고독과 외로움은 얼마나 컸을가? 황차 조선족녀인과 함께 중국에서 살고있으니 로어를 버린다 한들 누가 탓 할것이며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밤마다 독 오른 뱀처럼 회초리를 들고 자식들의 미움을 사면서 악착스럽게 로어를 가르쳤던 것이다.  아무튼 새는 두 날개로 하늘을 난다. 세계화시대라 민족과 언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두 개 이상의 언어를 장악해야만 국제사회에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수 있다. 그런데 두개 이상의 언어를 배운다고 할 때 그중 모국어는 가장 투자가 적게 들고 쉽게 익힐수 있는 언어다. 앞에서 본 왕씨나 다위도브 선생과 같이 올곧은 민족정신만 가지고 있다면 가정교육만을 통해서도 자식들에게 모국어를 배워줄수 있다. 아이에게 젖만 먹이고 밥만 먹여도 모국어는 배워줄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리고 다위도브 선생네 수라씨가 중로무역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듯이 왕씨네 네 애들도 조만간에 중조, 중한간의 정치, 경제, 문화분야에서 맹활약을 하리라 생각한다. 개천에서 룡 나고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없는 법이니 홍문장 왕씨네 아들중에 주한 중국대사나 중국의 반기문(UN사무총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 애들은 두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2015년 1월 19일 
사진은 작고전 병상에 계시는 김학철옹(좌) 방문 시, 김호웅 교수(우)와 담소하는 모습이다. 김학철은 중국어 일본어 영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접목시켜 특유의 독창적인 비유와 풍자, 익살과 해학으로 문학가라로서의 큰 족적을 남기신, 일제시대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한 '최후의 분대장'으로 유명하다.
  제2편  아름다운 노래는 세월의 언덕을 넘어  지난 12월 초 조룡남(趙龍男)시인과 함께 길림성장백산문예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2박 3일로 장춘을 다녀오게 되였다. 최근 선생은 중병으로 여러 번 병원신세를 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진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건강하고 락관적이였다. 하루밤은 열차에서, 하룻밤은 자그마한 호텔에서 원로시인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선생이 한창 시적재능을 꽃피우던 20세 초반에 재수없이 “우파(右派)”로 몰려 장장 20여년동안 이 풍진세상에서 무진고생을 하였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선생의 지지리 고달팠던 인생의 갈피갈피에 기막힌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눈물겨운 이야기의 하나가《황성의 달(荒城の月)》이라는 일본가곡에 얽히고설킨 일화(逸話)라 하겠다. 맨 처음 《황성의 달》이라는 일본가곡에 접한것은 국민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란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이 노래를 미칠듯이 좋아한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어느 자그마한 양복점에서였다. 1940년대 초반 선생네 일가족은 로씨야 연해주와 이웃한 훈춘의 어느 자그마한 읍내에 살았다. 이 동네에는 아낙네들의 허드레치마나 애들의 옷가지를 만들어주거나 기워주는 조그마한 양복점 하나 있었고 또 동네에서 사오리 떨어진 산기슭에는 일본군병영이 있었다. 주말이면 젊은 군인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와서 읍내 장터를 돌아보거나 양복점에 들려 훈련 중 찢어지거나 구멍이 난 군복을 수선해가지고 돌아가군 했다. 그런데 이 토끼장만한 양복점 바람벽에 바이올린 하나가 댕그라니 걸려있었다. 이 집에는 애들도 보이지 않는데 이놈의 바이올린을 누가 켜는 걸가? 군복을 맡겨놓고 걸상에 앉아 기다리던 일본군인들이 재봉사를 보고“저 바이올린은 주인장이 켜는 겁니까?”하고 물으매 사람 좋은 재봉사 아저씨는 잠간 고개를 돌리고 안경너머로 일본군인들을 뻐금히 건너다보더니“심심할 땐 한곡 켜지요 뭐.”하고 한 손으로 재봉기 바퀴를 그냥 돌리는데 일본군인들이 중구난방으로“자, 그럼 어디 한곡 좀 들어봅시다.”하고 청을 드는지라 재봉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일어나더니“이거 오늘 망신하게 되었구려. 무얼 켜드린다? … <황성의 달>을 한 번 켜볼가요.”하고 벽에 걸린 바이올린을 벗겨 들고 활을 당겨 몇번 음을 조정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장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일본군인들이 재봉사 아저씨의 연주에 맞추어 침울한 어조로 노래를 따라 부르더니 다들 시뻘겋게 눈시울들을 적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한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벌써 쿨쩍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꿰진 홑바지를 들고 문지방 옆에 서서 오도카니 차례를 기다리던 개구쟁이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룡남이였다. 아니, 이게 《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아닌가. 이 노래가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소년은 진작 배워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 국민학교에서 무슨 연주회가 있었는데 녀선생님의 손풍금 연주에 맞추어 조룡남네 학급의 단발머리 소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비처럼 하늘하늘 독무를 추었다. 그때 연주한 노래 역시《황성의 달》이였다. 이 공연은 차차 학생과 선생님들의 합창으로 번져갔고 마침내 연주가 끝나자 앞좌석에 앉아있던 일본인 교장이 성큼 무대우로 뛰어올라가더니 소녀를 닁큼 안고 한 바퀴 빙 도는 것이였다. 팔자수염을 기르고 평소 근엄한 표정으로 교사와 학생들에게 무섭게 굴던 교장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혀있었다. 조룡남은 이 이상야릇한 관경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황성의 달》이라는 노래만 들으면 왜 바늘로 찔러도 피도 나지 않을 일본인들이 눈물을 보이는 것일가? 조룡남이 두 번째로 《황성의 달》에 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였다. 연변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인데 자료실에 있는 묵은 책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일본잡지 몇 권을 발견했고 그것을 심심풀이로 펼쳐보았는데 그 잡지에《황성의 달》이라는 노래가 실려 있었다. 조룡남은 가사를 반복적으로 뜯어서 읽어보았다. 뜻은 대개 알만 한데 어려운 한자와 평소 잘 쓰지 않는 일본 고유어들이 많았다. 국민학교시절 일본인 군인들과 교장선생님이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짓지 않았던가. 조룡남은 이 일본가곡을 우리말로 확실하게 옮겨가지고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일본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게다가 일본어사전도 없을 때였다. 이리저리 고심(苦心)하던 끝에 휴식시간에 백호연(白浩然) 선생을 찾았다. 그 무렵 백호연 선생은 연변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소설을 창작, 발표해 꽤나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도 일본사람을 뺨치게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호연선생은 잡지를 받아 얼핏 보더니“일본의 명곡이거든. 헌데 이를 번역해선 뭘 하려나?”“어릴 때 불렀는데 곡도 좋고 가사도 맘에 들어서 그럽니다.”“그럼 수업이 끝나거든 교연실로 와.”45분 수업이 끝나자 교연실로 천방지축 뛰어갔더니 백호연 선생은 원고지에 정히 번역한 원고를 건네주면서 빙그레 웃는다. 꾸벅 큰 절을 올리고 원고지를 받아가지고 교실에 돌아와 읽어보니 단편소설《꽃은 새 사랑속에서》를 쓴 작가답게 우리말로 매끈하게 변역해놓았다. 그후 선생은 《황성의 달》의 일본어가사와 함께 백호연 선생이 번역한 조선어가사를 몽땅 외웠는데 지금까지도 한 글자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홍위병들이 백호연 선생 친필 번역문을 압수해가는 바람에 아쉽게도 영영 분실하고 말았지요. 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한 글자도 빼앗아가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자 나는 여러 가지 언어로 된 번역본들을 두루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우리 집에는 이 노래가 실려 있는 《일본의 노래(日本のうた)》1, 2, 3집과 삽화와 사진까지 실려 있는 대형일본가곡집《고향의 노래(ふるさとのうた)》가 있어요. 내가 보건대는 한국의 번역, 중국의 번역, 지어는 김학철 선생의 번역까지 다 가져다 비교해보아도 백호연선생의 번역이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해요. 노래를 완전히 감정화하고 번역한 것이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지요. 그것도 단 45분, 수업 한번 보는 시간에 번역한 것이니 감탄할 수밖에 없거든요. 정말 아까운 인재였지요.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한번 백호연 선생의 번역으로 된 <황성의 달>을 읊었더니 그때 자리를 같이하고 있던 임효원 시인이‘누군지 참 멋지게 번역했구만!’하고 찬탄하던 일이 기억되는군요.” 아무튼 조룡남 선생은 은사님이 번역해 준 일본가곡을 보배처럼 정히 간수했다. 그런데 이 일본가곡 때문에 또 한번 졸경을 치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선생은 “우파”로 락인이 찍혀 훈춘지역의 구석진 시골을 전전하면서 말단교사로 일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홍위병들이 선참으로 달려들어 가택수색을 하는 바람에 자료함에 정히 보관해두었던 《황성의 달》이 나왔던것이다. 홍위병들과 그 막후에 서있는 좌파교원들은 “우파”가 일본가곡을 번역해 사사로이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을 했고 황성(荒城)을 천왕페하가 있는 황성(皇城)으로 해석하면서 “네놈이 지금도 황성의 달을 그리고 있느냐?”고 무섭게 닦달질을 했다.“우파”감투를 쓰고 시골소학교에서 조용히 살던 선생은 날마다 고깔모자를 쓰고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고 선생네 댁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황성의 달》이라면 신물이 날 법도 한데 그때로부터 또 18년이 지난 1983년, 조룡남 선생은 김학철선생의《항전별곡》을 읽다가 세번째로 《황성의 달》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태항산지역에서 싸울 때, 밤마다 일본군과“대화(對話)”라는 것을 하였다. 말하자면 적진 150메터 쯤까지 접근하면 우선 징소리 대신 수류탄 한발을 터뜨려 “개막”을 알렸다. 고요한 적막이 뒤덮인 끝없는 전야에 이 느닷없는 폭발음에 놀라 깨지 않는 놈은 없다. 그런 다음 “프롤로그”로 일본여자 이무라 요시코(井村芳子, 당시 스물한살인 포로)가 고운 목소리로 《황성의 달》,《반디불의 빛(莹の光)》 이 노래는 일본학교의 졸업가인데 학교마다 졸업식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온 식장이 눈물바다가 되곤 했다. 원곡은 스코틀랜드 민요인데 일본사람들이 가져다 가사를 바꿔 넣고 《졸업가》를 만들었고 중국에서는《우의는 영원하리(友誼長久)》라는 이름을 달아 가지고 부르고있다.  조룡남 선생이 어느 날 김학철 선생을 찾아뵙고《항전별곡》에 나오는 《황성의 달》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니까 김학철 선생은 그 특징적인 천진무구한 미소를 짓고 껄껄 웃더란다. “아무렴 잊을 수 없는 곡이지요. 그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 일본군인들이 향수병에 걸려 밤잠을 설쳤고 전의(戰意)를 상실한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사실은 그 무렵 태항산에는 일본의 반전작가(反戰作家) 가지 와다루씨와 그의 부인 이께다 사찌꼬씨가 와있었어요. 그때 나는 일본놈이라면 무조건 악귀, 살인귀로만 보여서 이를 갈았는데 이들 부부를 보고서야 ‘이런 일본사람도 있구나!’하고 시야가 갑자기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구요. 밤에는 가끔 오락회를 열곤 했는데 사찌꼬 부인이 <황성의 달>을 불렀고 어느새 만좌(滿座)가 다 같이 따라서 불렀지요.‘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하고 말입니다. 가지씨 부부도 그렇고 조선용군 젊은이들도 그렇고 일본제구주의가 망하지 않으면 다들 고국땅을 밟아볼 수 없는 신세들였기 때문이지요. … 마침 잘 됐어요. 며칠 후면 오무라 선생이 연변에 오시게 되는데 그 량반이 무슨 선물을 할가 하고 고민을 하기에 <황성의 달>을 담은 록음테이프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우리 해양에게 말해서 조선생에게도 하나 복사해서 드리지요.” 오무라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 교수요, 해양(海洋)씨는 김학철 선생의 아드님인줄은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해양씨는 록음테이프를 CD로 바꾸어 드린다고 했으나 워낙 바쁜 사람이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만 참을줄이 끊어진 조룡남 선생은 한국 원광대학교에서 류학하고 있는 아들에게 부탁해 《황성의 달》과 함께 10여명의 일본 유명가수들이 부른 노래파일을 이메일로 받았다고 한다. 조룡남 선생은 요즘도 《황성의 달》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옛일을 되새기는 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 날 장춘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룡남 선생은 언제든지 한번 놀러오면 들려주겠노라고 하였지만 나 역시 참을줄이 끊어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놓고 한멜 검색창에 “황성의 달”을 입력했다. 몇 초 사이에 일본의 남녀가수들이 부른 《황성의 달》이 떠오를 뿐만 아니라 이 가곡의 작사자와 작곡자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해석도 실려 있었다. 그중 하나를 풀어놓았더니 애수에 젖은 비창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봄날 고루(高樓)에 꽃의 향연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천년송(千年松) 가지 사이로 비추는 달빛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전쟁터의 가을에 서리 내리고울며 날아가는 기러기 몇 마리빛나던 긴 칼에 비추이던그 옛날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황성의 밤하늘에 떠있는 저 달변함없는 달빛은 누굴 위함인가?성곽에 남은 건 칡넝쿨뿐소나무에 노래하는 건 바람뿐 밤하늘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영고성쇠(榮枯盛衰)는 세상의 모습비추려함인가 지금도 역시아아, 황성의 달이여 春高楼の花の宴/ 巡る盃かげさして/ 千代の松が枝わけ出でし/ 昔の 光いまいずこ//秋陣營の霜の色/ 鳴き行く雁の數見せて/ 植うる劍に照りそいし/ 昔の光いまいずこ// 今荒城の夜半の月/ 替らぬ光たがためぞ/ 垣に残るはただ葛/ 松に歌うはただ嵐// 天上影は替らねど/ 榮枯は移る世の姿/ 寫さんとてか今もなお/ 嗚呼, 荒城の夜半の月//   가만히 들어보니“나라는 망해했어도 산천은 의구해/ 봄 깃든 성곽에 초목만 우거졌네 ”라고 노래했던 당나라 대시인 두보의 명시《춘망(春望)》을 련상케 하는 노래요,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페허에 실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라고 노래했던 1930년대 초 우리 류행가요 《황성옛터》에 큰 영향을 끼친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가사는 일본 고유의 음영의 미(陰影の美)가 서려있고 곡은 비창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이 들었다. 4절로 된 노래를 다 듣고 보니 부서진 성터, 옛날의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는 오간데 없고 천년 묵은 솔가지 사이로 무심한 달빛만 흘러드는데 영고(榮枯)와 성쇠(盛衰)는 세상의 섭리인듯 어디선가 거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이 노래를 반복적으로 풀어놓고 다른 자료들을 검색해본즉, 이 노래는 도이 반스이(土井晩翠, 1871-1952) 작사에 타키 렌타로(瀧廉太郎, 1879-1903)의 작곡으로 되어 있었다. 도이 반스이는 동경제국대학 영문학과 출신의 유명한 시인으로서 오래동안 문명을 날리면서 81세를 살아 천수(天壽)를 다 누렸지만 타키 렌타로는 24살의 애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타키 렌다로는 1879년 8월 24일 도쿄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요시히로(弘吉)는 대장성에서 근무하다가 내무성의 지방관리로 전직하여 가나카와현, 토야마현, 오이타현 다케다시 등지로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타키 렌타로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일본 각지를 떠돌게 되였다. 그는 1894년 도쿄음악학교(현재는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해 1994년 본과를 졸업하고 연구과에 진학해 작곡과 피아노로 재능을 키워갔다.  명치시대 전반기에 많은 번역창가가 생겼으나 일본어가사를 무리하게 끼워 넣은 어색한 노래가 많아 일본인 작곡가에 의한 오리지날의 노래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에 가장 빨리 응한 작곡가가 바로 타키 렌다로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황성의 달》,《하코네 80리(箱根八十里》,《꽃(花)》,《사계(四季)》 등이 있는데 그중《황성의 달》은 1900년, 그러니까 그가 21살 때 지어서 1901년 3월 《중학창가(中學唱歌)》에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서 일본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곡이다. 이 곡을 구상한 곳은 오이타현 다케다시에 있는 오카성지(岡城址)다. 성안에는 타키 렌타로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지금도 다케다역(竹田驛)에 렬차가 도착할 때면 이 곡을 들려주고 있다고 한다. 이 곡은 세계로 펴져나가 1910년에서 1930년까지 구라파의 벨기에서 찬송가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타키 렌다로는 1901년 일본인 음악가로는 두번째로 문부성 장학생으로 뽑혀 독일의 Leipzig음악원에 류학해 피아노와 대위법(對位法) 등을 배우게 되였다. 하지만 불과 2개월 후에 불행하게도 페결핵을 얻게 되어 1년 만에 귀국했고 부친의 고향인 오이타현에서 료양하지 않으면 아니 되였다. 하지만 1903년 6월 29일 그는 24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아쉽게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국경을 넘고 민족과 리념의 벽을 넘어 영원히 정직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메아리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그 험난한 항일전쟁시절에 벌써 흑백논리를 벗어나 오히려 적국(敵國)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가지고 향수를 달랬던 우리 조선의용군용사들의 넓은 흉금과 안목을 생각할 때, 무릇 자본주의나라의 작품이면 덮어놓고“황색가곡”이라고 벌벌 떨거나 길길이 뛰였던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존재였던가를 깊이 반성하게 된다. 더우기 모진 세파에 부대끼면서도《황성의 달》.《반디불의 빛》과 같은 명곡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고 또 그러한 명작들을 밑거름으로 인생의 아픔을 딛고 《반디불》, 《황소》,《옥을 파간 자리》와 같은 주옥같은 명시들을 남긴 우리 원로시인 조룡남 선생의 한평생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진정한 예술작품은 그 누가 만들었는지를 막론하고 그것은 력사의 상흔(傷痕)밑에 돋아나는 새살이요, 세계의 모든 인종과 민족의 마음을 소통시키는 맑은 령혼의 샘물이며 별빛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에 요즘도 나는 조룡남 시인의 바이러스에 전염되여《황성의 달》을 내 애창곡의 하나로 간주하고 짬만 나면 컴퓨터를 틀어놓고 흥얼거린다.  “봄날의 높은 루각에 꽃놀이 잔치, 돌고 도는 술잔에 그림자 비치고…”  - 2012년 1월 10일  제3편  빛나는 우정  친구간의 우정을 이야기하는 사자성어는 너무 많다.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어릴적 친구는 죽마고우(竹馬故友)라 하고, 뜻이 맞고 허물없이 사귄다면 막역지교(莫逆之交)라 한다. 서로 높고 맑은 뜻을 가진 친구간의 사귐이라면 지란지교(芝蘭之交)라 하고, 쇠붙이나 돌처럼 변함없는 우정이라면 금석지교(金石之交)라 한다. 또한 동아시아 3국에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管鮑之交)”,“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은 이야기(伯牙絶絃)”가 있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은 이야기만 보기로 하자.  백아는 거문고를 잘 연주했고 종자기(鍾子期)는 백아의 연주를 잘 감상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그 뜻을 높은 산에 두면 종자기는“훌륭하구나. 우뚝 솟음이 태산 같도다”라고 했고, 그 뜻을 흐르는 물에 두면 “멋있구나. 넘실넘실 흘러감이 흐르는 강물과 같도다”라고 했다. 백아가 뜻하는 바를 종자기는 다 알아맞혔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더 이상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거문고를 줄을 끊어버리고 종신토록 연주하지 않았다. 상대의 값어치나 속마음을 알아주는 우정, 아니 우정의 최고 경지인 지기(知己)나 지음(知音)에 대한 이야기라 하겠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만큼 진한 감동을 주는 사례는 드물 것이다. 윤동주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유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게 된 데는 정병욱의 빛나는 우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북간도 명동에서 나서 자란 윤동주(1917-1945)와 조선 전라남도 광양군에서 나서 자란 정병욱(鄭炳昱, 1922-1982)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정병욱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동주를 알게 된 것은 연희전문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쪽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자로 굳게 담은 입술, 그는 한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다고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는 아니었다. 천성으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태어났었다.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태산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몹시 단정하고 결백했다. 모자는 비스듬히 쓰는 일이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  정병욱은 윤동주에 비해 연희전문학교 2년 후배이고 다섯 살 아래였다. 윤동주는 정병욱을 아우처럼 사랑했고 정병욱은 윤동주를 형처럼 따랐다. 식사시간이면 윤동주는 으레 정병욱의 방에 들러 그를 데리고 나가 식탁에 마주앉아야 밥술을 들었다. 정병욱은 책방에 가서 책을 뽑아 들었을 때도 윤동주에게 물어보고야 그 책을 샀고 시골에 있는 동생들에게 선물을 보낼 때도 윤동주가 골라주는 것을 샀다. 그들은 교회나 영화관도 함께 다녔으며 저녁식사 후에는 한두 시간씩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후에는 소설가 김송씨네 집과 북아현동에 있는 하숙에도 함께 들었다. 하기에 정병욱은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이라는 글에서 "오늘의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된 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동주가 심어준 씨앗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고 했다.  연희전문시절 윤동주는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간>을 썼다. 윤동주는 덜 익은 시를 함부로 원고지에 써놓고 이리저리 고치지 않았다. 몇 주일, 지어는 몇 달씩 마음속에 넣고 숙성시킨 다음에야 원고지에 적어놓았다. 그러면 곧 하 수의 시가 탄생하군 했다. 그렇지만 윤동주는 자기의 작품에 대해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별 헤는 밤>은 워낙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로 끝났다. 윤동주가 이 시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자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 후 윤동주는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에 <서시>까지 붙여서 정병욱에게 주면서 "지난 번에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정병욱의 의견을 받아들여 덧붙인 4행의 시구가 <별 헤는 밤>에 금상첨화가 되었으니 지금 보는 <별 헤는 밤>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필로 엮은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3부 만들어 하나는 자기가 간직하고 하나는 은사인 이양하(李敭河) 선생께 드리고 다른 하나는 정병욱에게 선물하였다. 그런데 윤동주가 간직했던 것은 그가 1945년 2월 2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 인멸된 것 같고 이양하 선생께 드린 것도 찾을 길 없게 되었다. 오직 정병욱에게 준 것만이 보존되어 1948년 2월에 출판되었는데 여기에 깊은 사연이 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정병욱은 학병(學兵)으로 징병되어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 정병욱은 어머니께 자신의 물건과 함께 윤동주에게서 받은《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맡기면서 특별히 "일본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잘 보관해주세요. 혹시 제가 전장에서 죽고 돌아오지 못하거든 해방을 기다렸다가 연희전문에 가지고 가서 여러 선생님들께 보여드리고 발간을 상의해 보세요." 하고 간곡히 부탁했다. 전쟁이 끝나자 정병욱은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윤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시면서 기뻐하였다.  그렇다면 이 자필유고가 어떻게 되어 윤동주 유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가? 정병욱이 자기의 여동생 정덕희와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가 혼인하도록 다리를 놓았고 이를 계기로 이 자필유고는 윤동주 유가족의 품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던 것이다. 이 자필유고가 1999년 민음사를 통해 출판되는데 여기에 또 기막힌 사연이 있다.  윤동주의 자필유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보려고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 중에는 한 장이라도 고가로 구입하겠다고 찾아오는 골동품수집가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자필유고가 TV영상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원본을 연구하겠다고 하는 연구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정병욱과 윤일주의 노력으로 출판된 1948년 판《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만 의존한 연구서들이 발표되고 윤동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연구할 것이 없다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1985년 윤일주 교수가 작고하자 그의 부인 정덕희 여사는 더더욱 윤동주의 자필유고를 쉽게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윤동주 연구자 오오무라 교수가 나타났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왕신영, 심원섭이 정덕희 녀사와 그의 아들 윤인석을 설득해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을 내게 되였다. 윤인석은 윤동주의 조카요, 윤일주와 정덕희 여사의 큰아드님인데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다. 필자는 1991년 1월 일본의 오오무라 교수 댁에서 도쿄대학에서 건축학 박사학위공부를 하고 있던 윤인석씨를 만나 1988년 판《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선물로 받았고 그 후 서울과 연길에서 여러 번 만났다. 그는 어머니가 윤동주의 자필유고를 공개하게 된 경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사실 어머니는 당시 중학생시절이었던 일제 말기, 집안의 귀중품, 형제들의 혼례 때 필요한 혼수품 같은 것과 함께 고향집 마루 밑 항아리 속에 숨겨져 있던 큰아버지의 원고를 가슴 졸이며 보아왔습니다. 결혼 후 안방 깊숙이 귀중하게 보관해 왔던 터라 세상에 공개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보물'들을 '책임진다'는 것이 어머니로 하여금 결정을 더욱 어렵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광복 후 여학교시절 오빠인 정병욱 교수로부터 국어과목을 수강하던 때, 아직 윤동주가 누구인지 잘 모르던 시절, 그 자필원고들을 가지고 와서 수업도중에 한편씩 낭독해 주다 원고로 얼굴을 가리고, 목이 메어 계속 읽지 못한 채, 교실 창가로 가서 먼 산을 쳐다보며 눈물을 닦던 오빠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치 오래 된 친구를 먼 길 보내는 심정으로 원고 공개를 결심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윤동주의 생전에 애경(爱敬)의 마음을 다해 그의 참다운 벗이 되었고 그의 사후에도 그의 유고를 생명처럼 간주하고 지켜주고 세상에 널리 알린 정병욱, 그 빛나는 우정은 그의 어머니를 거쳐 녀동생에게까지 이어졌다. 그 덕분에 우리는 윤동주와 그의 시를 알게 되였다.  로신은 "인생은 지기(知己) 한 사람으로 족하다(人生得一知己足已)"고 했다. 하지만 윤동주와 같이 훌륭한 인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는 지기가 결코 한둘이 아닌 것 같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그의 친구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다. 장덕순은 "동주는 외미내미(外美內美)의 인간이다. 그의 시가 아름답듯이 그의 인간도 아름답고 그의 용모가 단정우미(端正優美)하듯이 그의 마음도 지극히 아름답다"고 했고, 문익환도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나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한다"고 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과 시를 기리고 있는가.  나는 윤동주의 시집을 펼쳐들 때마다 윤동주와 정병욱의 빛나는 우정을 떠올리게 되고 나 스스로에게 가만히 물어본다. 나에게도 지기라고 말할 수 있는 미더운 벗이 있는가, 나는 친구의 지기가 될 만한 자질과 품격을 갖추었는가? 사실 나는 스승에게서, 또는 선배나 동료들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사랑과 은공에 갚은 것은 별로 없다. 치열한 경쟁사회에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주변의 아픔과 슬픔을 별로 느끼지도 못했다. 애오라지 도전과 성공만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알았다. 참으로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이라는 맑은 거울에 비추어보면 금시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깊은 물에 큰 배가 뜨는 법, 이는 우정에도 통하는 이치라 하겠다. 이제부터라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남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가슴과 아량을 가져야 하겠다. 남의 지기가 될 줄 알아야 나에게도 지기가 생기는 법이니까. - 2017년 청명에

 

▲ 한민족의 혼 무궁화가 필 때, 하늘과 땅은 무궁화의 꽃잎과 꽃술에 정기를 쏟아 빚는다...<편집자>

제4편

 한 그루 무궁화

                                         

   요즘 세상살이가 어렵고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다고 하지만 가끔 빈 들판에 핀 가을 국화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이 세상이 한결 따스한 느낌이 든다. 왕유 왕유(王瑜), 한족, 교수, 강소성 무석시 출신. 1934년 5월 19일 상해시에서 태여나 1953년 중경 남개중학을 졸업하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 모스크바 레닌사범학원 로씨아언어문학학부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연변에 와서 연변대학교 로씨아학부와 영어학부에서 교편을 잡았고 학과 주임, 학부장 등 직무를 역임했으며 1996년 정년을 했다. 연변대학교의 영어학과 설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조선족의 외국어 교육 및 영어, 조선어, 한어 비교연구에 관한 다수의 론문과 저서를 내놓았으며 정년 후에는 조선족 문학지에 여려 편의 글을 발표했다.

 교수가 바로 그러한 분이다. 왕유 교수라 하면 잘 모르실 분들이 많겠지만 이분이 바로 연변대학의 저명한 영어교수요, 고(故) 정판룡 교수의 사모님이다. 

   왕 사모님은 1934년 상해에서 태어나 1953년 중경 남개중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구소련 모스크바 레닌사범학원 러시아 언어문학학부를 졸업했다. 왕 사모님은 거기서 만난 정판룡 교수를 따라 연변에 왔고 연변대학교에서 러시아어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장장 46년 세월을 하루와 같이 조선족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다.

   왕 사모님은 1996년에 정년을 했고 2001년 평생의 반려요, 지기인 정판룡 교수를 여의고 외기러기 신세로 지내고 있다. 딸 홍(虹)이네 식구와 아들 진(辰)네 식구가 모두 일본에 있어 혼자 지내는 왕 사모님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기실 그는 여전히 이 가을도 지칠 줄 모르고 꽃을 피우는 무궁화처럼 일에 바쁘고 사랑을 나누기에 바쁘다.

   자, 연변대학교 서대문 옆에 있는 왕 사모님네 댁으로 가보자.
   호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정판룡 교수의 유상이 벽 중앙에 걸려 있는데 그 아래에는 일본에 있는 손녀, 손자 녀석들이 할머니를 위로하느라고 빨갛고 노란 크레용으로 그려 보낸 크고 작은 그림들이 붙어 있다. 토끼나 노루와 같은 착한 짐승도 보이고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뜬 호랑이도 보인다. 서툴고 우습기는 하지만 애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환상력이 꼼틀거려 볼수록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판룡 교수가 앉아있던 안락의자에는 수염이 달린 큰 인형이 비스듬히 앉아 있다. 왕 사모님의 말씀으로는 정판룡 교수라고 한다. 묵직한 테이블 위에는 큰 화분에 자란 무궁화 한 그루가 탐스러운 꽃을 떨기떨기 피우고 있다. 

  왕 사모님은 바로 여기서 일하고 계신다. 자서전을 쓰고 후학들의 논문을 수정하고 영어강습반 강의안을 짜기에 늘 바쁘다. 정판룡 교수가 작고한 뒤로는 무궁화를 손보아 주는 일도 왕 사모님 혼자의 몫이라 이래저래 늘 바쁘다.      
   오늘은 왕 사모님의 에피소드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좀 버릇없이 왕 사모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왕 사모님의 한복차림

   우리 제자들은 왕 사모님을 두고 “연변의 왕소군”이라고 한다.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인데 기원전 33년 흉노(匈奴)와의 친화정책을 펴기 위해 흉노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을 갔던 절세의 미인이다.『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원제는 화공들에게 궁녀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궁녀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으나 워낙 성품이 정직한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다. 원제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왕소군을 호한야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야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게 된 원제는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흉노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그녀를 보내고는 화공들을 죽여 버렸다고 한다. 아무튼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전송되었고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다루어졌는데 원대(元代) 마치원(馬致遠)의 희곡『한궁추(漢宮秋)』를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왕 사모님을 왕소군과 동일시하는 것은 심통한 비유라고는 할 수 없다.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제물로 바쳐진 셈이지만 왕 사모님은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연변에 왔고 평생 조선족형제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 사모님은  성씨도 왕소군과 같은 왕씨(王氏)요, 자색에 있어서도 결코 왕소군에 짝지지 않으니 그녀에 비유해도 크게 어폐는 없으리라.

   언젠가 왕 사모님네 댁에서 사진첩을 본적 있는데 20대의 나이에 러시아 볼가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이 사진은 요즘 왕 사모님의 자서전 『남에서 북으로 날아와 70년 세월(從南到北七十載)』에도 수록되었는데 가히 20세기 미스 차이나 반열에 올릴 만한 아름다운 용모였다.

   왕 사모님은 이젠 칠십 고개를 넘은 분이지만 그냥 해맑은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간직하고 있다. 제자로서 사모님의 자색을 두고 품평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지만 우리 부모님의 회갑잔치 때 얼핏 본 그분의 백옥 같은 살결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큰형 봉웅, 셋째 형 관웅, 그리고 넷째인 나까지 정판룡 교수의 문하에서 문학공부를 했는지라 우리 부모님의 환갑잔치에 정판룡 교수 부부를 모셨었다. 

   그 날 환갑잔치는 요즘처럼 화려한 호텔에서 한 게 아니라 연길시 광명가의 어느 널찍한 노인 독보조를 빌려서 했다. 아마도 지금의 코스모호텔 뒤에 있었던 것 같다. 환갑상을 차려놓고 어르신들을 모시는데 자연 정판룡 교수는 우리 아버지 옆에, 왕 사모님은 우리 어머니 옆에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울긋불긋 풍성한 한복들을 차려입은 우리 어머니와 안사돈들 사이에 끼인 왕 사모님의 옷매무시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수수한 남색 평복을 입고 오신 것이다. 

   연변박물관의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왕 사모님도 한복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구들 되는 자식들을 다 출세시킨 집안의 환갑잔치라고 사진작품으로 만들어 연변박물관에 번듯하게 걸어놓을 심산으로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에서 고풍스러운 병풍을 빌려오고 “어동육서, 홍동백서(魚東肉西, 紅東白西)요”하며 직접 환갑상을 차려온 사진작가인지라 그의 아집을 꺾을 수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난색을 지었다. 누가 감히 한족인 왕 사모님을 보고 한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권할 수 있으랴!
   버르장머리 없는 비유지만,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은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왕 사모님을 조용히 병풍 뒤쪽으로 모셔내다가
   “오늘 환갑상을 받는 장면은 연변박물관에 영구히 전시한답니다. 죄송하지만 사모님께서도 한복으로 갈아입었으면 하는 데요…”
  하고 한 마디 조심스레 여쭈었다. 그랬더니 왕 사모님은 당신 자신의 옷매무시를 얼핏 내려다보더니
  “나두 닭 무리에 오리가 끼인 격이라 생각했어. 헌데 한복이 있어야 입지.”
  하고 천만뜻밖으로 한복을 입겠노라고 했다.
  나는 얼씨구 좋다 하고 이 소식을 형제들에게 알렸고 누님은 득달 같이 달려가 여벌로 장롱에 넣어두었던 한복을 받쳐 들고 달려왔다. 누님이며 큰형수며가 마치 황후를 모시듯 왕 사모님을 옹위해 가지고 옆방으로 들어가는데 얼마 뒤 방안에서 아낙네들이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새여 나왔다.
   “과시 미인이야!”
   이는 걸걸한 성격의 누님 목소리였고
   “아이구, 어쩌면 살결이 저렇게 희지요. 떡가루 같아요.”
   이는 큰형수가 혀를 차는 소리였다. 

   나그네 귀 석자라고 나는 그 소리들을 다 들었고 호기심을 참을 길 없어 슬쩍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누님과 큰 형수가 왕 사모님에게 치마를 입히고 나서 저고리를 입힐 차례였는데 두 팔을 벌리고 얌전하게 입혀주기를 기다리는 왕 사모님은 그야말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비둘기 잔등 같은 동그란 어깨, 백옥 같은 두 팔, 이팔청춘 소녀처럼 홍조를 머금은 능금 같은 두 볼, 그야말로 화용월태(花容月態)라 눈이 부셨다. 

   쉰 고개를 넘어선 분이 저토록 아름다울진대 처녀시절에는 과연 얼마나 청순하고 싱싱했을까! 그래서 천하에 비위 좋고 넉살좋은 정판룡 교수도 시퍼런 대낮에는 도무지 프로포즈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지지리 못나게도 둘이 암실(暗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에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덥석 왕 사모님의 손을 잡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날 한복을 입고 앉은 왕 사모님의 모습은 참으로 한 떨기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더욱이 일개 대학교의 유명한 영어교수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족 노인네들 사이에 허물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형제들은 물론이요, 연변박물관의 사진작가도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후일 이 사진은 확대, 현상돼 연변박물관에 전시했는데 좋이 10여 년은 걸려있었다. 요즘 연변박물관이 진달래 광장 쪽으로 옮겨간 뒤로 그냥 걸어두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아무튼 남방의 대도시에서 자랐으되 뽐낼 줄 모르고, 모스크바 유학까지 한 적 있는 영어교수가 가두의 노인네들과 허물없이 앉아 있는 모습, 철두철미 한족이지만 조선족의 풍속과 습관을 존중하는 왕 사모님을 우리 형제들은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왕 사모님 마음은 열두 폭 치마

   한평생 서캐를 훑어야 하는 언어학을 전공한 까닭일까, 왕 사모님은 성미가 꼼꼼하고 날카롭다. 영어로 말하자면 노(no)와 예스(yes)가 분명하다. 그녀 앞에서 근신(謹身)하지 않고 흰소리를 치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 상대가 남편이든, 교장이든, 제자이든 관계없이 따끔하게 일침(一針)을 놓는다. 우리 제자들은 정판룡 교수한테서는 별반 꾸중을 듣지 않았지만 왕 사모님에게서는 거개가 한두 번씩 코를 떼였다.     

   왕 사모님은 문자에 밝아 정년을 한 후에도 연변대학교의 최대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간명한국백과전서》를 비롯해《조선-한국학연구총서》의 문자수정을 맡아했는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렁뚱땅 원고를 낸 친구들은 모두 혼쭐이 났다. 원고만 수정해 연구소에 돌려주는 게 아니라 마치 소학생의 숙제검사를 하듯이 직접 당사자를 불러다놓고 깐깐하게 설명을 하고 해석을 하는지라 그네들은 진땀을 내야 했다. 왕 사모님은 설사 연변대학교의 석학으로 정평이 난 학자의 원고라 해도 새까맣게 고쳐서 되돌렸다. 그래서 왕 사모님을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실은 그의 깊은 속내를 모르기 때문이리라. 

   왕 사모님은 원리원칙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고 학문적인 문제를 두고는 미주알고주알 캐고 들지만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더없이 너그럽고 대범하다. 그야말로 왕 사모님의 마음씨는 열두 폭 치마라 하겠다. 남편인 정판룡 교수와의 사이도 그런 줄로 알고 있다. 

   정판룡 교수는 워낙 학식도 인품도 넉넉한 사람이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한 품에 안을 만한 호걸남아라 그를 따르는 여성들이 꽤나 많았다. 우리 문단의 해반주그레하게 생긴 여류작가들도 정판룡 교수를 졸졸 따라다녔고 우리 대학의 여성 교수들 중에도 은근히 정판룡 교수를 사모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한 여교수는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데다가 노래를 썩 잘 불렀고 글재주도 좋았다. 정판룡 교수도 그녀를 퍽이나 예뻐해 주는 눈치였는데 그녀는 내놓고 정판룡 교수를 감싸고돌았다. 

   연변대학교 남녀 교수들이 가끔씩 연길시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식당에 가서 회식을 하고 돌아오면 정판룡 교수와 그녀는 우리와 함께 연변대학교 서대문까지 왔다가는 슬쩍 자취를 감추곤 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호젓한 다방을 찾아가 밤늦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이다. 왕 사모님도 이를 모를 리 없었고 그래서 그녀를 좀 쌀쌀하게 대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2001년 가을 정판룡 교수가 결장암에 걸려 2년 남짓이 고생을 하다가 운명을 하게 될 무렵인데 그 여교수가 조용히 왕 사모님을 찾아왔다.
   “사모님, 제가 정 교수님을 하루 밤만 간호하고 싶은데요. 허락해 주시겠어요?”

   왕 사모님은 그만 억이 막혔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철면피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가더란다. 내 남편이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좋았기에 피골이 상접해 임종에 직면한 이 마당에 하루 밤 모시겠다고 나서는 여인이 있단 말인가. 또한 남녀관계를 막론하고 세상의 인심이란 얻어먹을 게 있으면 아첨을 떨고 애교를 부리다가도 얻어먹을 게 없으면 등을 돌리기 마련이거늘 이 여자가 무엇을 바라고 정 선생을 모시고자 하는가. 그게 바로 이슬처럼 맑은 인간의 정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그녀가 측은하게 보였고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겠다고 하는 그녀의 행실이 결코 밉지 않았다고 한다. 왕 사모님은 그녀더러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게 하였다. 

   물론 그 여교수는 이 일을 두고 왕 사모님을 더없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왕 사모님 또한 일생에 제일 잘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그 여교수더러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게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자는 시 300수는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고 했다. 왕 사모님이야말로 티 없이 맑은 거울과 같은 분이라 그분의 앞에 서면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넋이 맑아짐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하고 천진하지만 인간적 깊이가 있고 아름다운 천품을 지녔지만 언제나 수수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왕 사모님, 그야말로 “물은 깊으면 조용한 법”이라는 어느 명인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왕 사모님의 믿음 속에 정판룡 교수를 하룻밤 시중든 그 여교수도 정성을 다 고였을 것이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체험했으리라 생각한다.  

   왕 사모님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

   며칠 전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문득 전화가 걸려 왔다. 연변병원에 입원한 왕 사모님의 전화였다. 사모님은 요추(腰椎) 통증으로 오래 동안 고생을 하다가 며칠 전 수술을 받고 연변병원 골과병동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후슝(虎雄)―”
   왕 사모님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단 내 이름을 불러놓고
   “오늘 점심 내 병실로 왔을 때 104호 병실에 있는 한 정실이라는 애를 보고 왔었지.” 하고 말꼭지를 뗐다.
   “예, 그랬는데요.”
   “글쎄 그 애가 엄마와 함께 방금 날 보러 왔지 않겠어. 고맙게도 음료를 사들고 말이야. 이태 전 정 선생이 만든 아동장학금을 탄 적 있다고 해. 그래서 감사를 드린다고 했어. 얼마나 착해. 헌데 엄마, 아빠가 다 하신을 잘 쓰지 못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애마저 다리를 다쳐 아홉 달째 병원에 누워있다는 거야. 여봐 후슝, 요즘 자네들이 문병을 왔다가 부조한 돈이 5천 원은 좋이 되거든. 그걸 한정실의 입원비에 보태주고 싶어. 그래도 되겠어?”
   “왜 안 되겠습니까? 허지만 사모님도 입원한 신세고 이제부터 돈을 많이 써야 하겠는데요.”
   “아니야, 난 입원비를 못 낼 사람이 아니야. 이 돈은 내 돈도 아니구 여러 사람들의 정성이니 이를 정실이를 치료하는데 써야 하겠어.”
   막무가내였다. 일단 이 정도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한정실이란 연길시건공소학교에 다니는 소녀인데 올해 정초 이모와 함께 모아산 민속촌에 가서 눈썰매를 타고 쏜살같이 아래로 지쳐내려 오다가 그만 해묵은 소나무 등걸에 부딪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쳤었다. 정실이는 수술을 받았으나 골수염이 생겨 재차 수술을 받게 되였다. 그 애의 어머니 박금숙(45세)은 “애비, 어미 모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데 정실이마저 다리를 잃으면 어떡해요?…” 하고 쌍지팡이를 짚고 병원 안팎을 드나들며 온갖 정성을 다했고 그 애의 아버지도 불편한 다리를 끌고 목기공장에 다니면서 아득바득 입원비를 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4만원이나 들어간 입원비를 갚자면 그야말로 하늘에 장대 겨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 제작진에서는 사회에 향해 구원의 손길을 호소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 연변대학교에서는 정판룡 교수 서거 5주기(週忌)를 기념할 겸 9월 30일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 협찬을 하게 되었고 사전 준비로 나는 이 광실 기자와 함께 한정실 학생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자리에서 그 애에게 힘이 되라고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교수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 왕 사모님이 지금 115호 병실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왕 사모님의 진정어린 말씀에 그만 콧마루가 쩡해났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당신 자신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건만 한 조선족 어린이를 위해 5천 원의 거금을 선뜻 내놓으려 하는 것이다.
   기실 정판룡, 왕유 부부는 1996년 KBS해외동포상으로 받은 상금 10만 원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고 2001년 정판룡 교수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제자와 벗들이 문병 차로 와서 내놓은 부조금 11만 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몽땅 장학기금에 보태주었다.《정판룡교육발전기금》설립 10주년을 맞는 오늘 이미 56명의 대학생들이 이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왕 사모님이 두 어려운 대학생을 도와준 이야기는 그 누구도 모르리라.
   하나는 연변대학교 영어학과 학생인데 길림성 요원시(遼原市) 출신이다.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기고 인사성도 밝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홍반성 낭창(紅斑狼瘡)이란 몹쓸 병을 앓고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왕 사모님은 이 학생에게 모름지기 1년 학잡비 5,000원 대주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매 연변대학교 당국은 그 학생의 2년 분 학잡비를 몽땅 면제해 주는 특전을 베풀었다. 왕 사모님에게 그 학생의 근황을 물었더니 “지금 소주에 살고 있지. 몸은 여전히 아픈 모양인데 내 둘도 없는 멜 커플이지! 가끔 재미있는 이야길 주고받지. 후슝에게는 말해 줄 수가 없어.”하고 방긋 웃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호북성의 오지에서 온 토가족(土家族) 대학생인데 왕 사모님이 가만히 보매 방학마다 집에는 가지 않고 빈 교실에 앉아 공부만 하고 있었다. 왜 방학에 집에를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차표를 끊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고 했다. 차근차근 물어보니 방학에 한 번 갔다 오는데 800원이 드는데 부모님은 가난해서 그 돈을 댈 수 없고 설사 돈이 있어도 아까워서 차표를 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왕 사모님은 젊은 시절에 구소련에 가서 여러 해 공부를 했고 평생 나서 자란 상해, 무석, 중경과 수 천리 떨어진 연변에 와서 살고 있으므로 부모형제를 그리는 그 학생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왕 사모님은 그 학생에게 800원을 주어 차표를 끊고 3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상봉케 하였다. 이 학생은 이제 곧 졸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고 했다.

    무궁화는 영원히 피리라

    정판룡 교수의 서재에 있는 무궁화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1983년 이웃으로 살던 연변대학교 김지운(金址云) 선전부장이 정판룡 교수가 무궁화를 각별히 좋아하는 줄을 알고 자기네 자택 베란다에서 기르던 무궁화나무에서 한 가지를 베어 물병에 넣어 뿌리를 내리게 한 다음 예쁜 화분에 담아 선물한 것인데, 올해까지 23년 동안 왕 사모님네 댁에서 무탈하게 자라고 있다. 2001년 정판룡 교수가 작고했으니 18년은 정판룡 교수가 키우고 올해까지 5년 채 왕 사모님이 키우고 있는 셈이다. 

   요즘 왕 사모님은 썰렁한 가을바람이 불자 정판룡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여름에 베란다에 내갔던 무궁화 화분을 집안에 들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담홍색 꽃송이는 대여섯 송이 피었다가는 지고, 졌다가는 다시 피어서 온 객실에 은은한 빛과 향기를 던져주고 있다. 금시 호걸스러운 정판룡 교수가 껄껄껄 웃으며 서재에 들어와 안락의자에 앉아 구수한 이야기를 꺼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왕 사모님의 무궁화 사랑은 자별하다. 무궁화를 보면 저 하늘에 계신 남편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왕 사모님이 이토록 무궁화를 아끼는 것은 이 꽃이 바로 남편의 모국인 조선이나 한국의 국화(國花)요, 그녀 자신이 또한 조선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 그루의 무궁화를 두고 우리 제자들은 왕 사모님과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무궁화는 바로 거친 연변에 와서 뿌리를 박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왕 사모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따스한 남방의 대도시에서 나서 자랐고 남개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연변에 온 왕 사모님, 그가 겪어야 했던 고생은 그야말로 일구난설이다.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는데다가 1960년대 초반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한 쪽 신장마저 떼어버려야 했던 왕 사모님이다. 더더구나 하늘같은 남편을 잃은 이 무렵 왕 사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허전하랴. 또한 왕 사모님에게도 귀한 자식들이 있고 그들은 일본에서 고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왕 사모님은 이 모든 상처와 괴로움과 그리움을 약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조선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니 그이야말로 왕 사모님이야말로 21세기의 왕소군이요. 한 그루의 무궁화가 아닐 수 없다. 찬  바람 부는 이 가을에 온 생명을 다 바쳐 한없이 피고 또 피는 무궁화, 그게 바로 왕 사모님이다.
   왕 사모님네 댁 무궁화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냥 탐스럽게 필 것이다.
   왕 사모님의 쾌유(快癒)를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 2006년 10월 1일, 깊은 밤

 

한낙연회화작품전시회에서 일본 학자부부와 함께(우, 김호웅교수) 

제4편

북청 물장수― 동훈 선생

 

    삼가 동훈 선생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방금 한국 체류 중인 서옥란 박사가 동훈 선생의 골회를 모시고 발인하는 길에 있다는 전화를 보내왔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하루만 먼저 부고를 받았더라면 급히 날아가 제주라도 한 잔 부어 드리고 사모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그저 20년 전에 쓴 이 글로 이 불초제자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오후라, 세월도 무정하구나!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두터운 정치서적이나 철학저서에서보다 한 인간과의 만남에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우가 있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1년 반, 1995년대 중반 한국에서 1년 간 동훈(董勳) 선생의 슬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던가?
    달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더욱 그리운 그 얼굴, 그 목소리! 오늘도 선생님네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아름다운 추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1. “북청 물장수”의 이야기
  
    선생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89년 12월 중순, 일본 와세다대학 정문 앞에 있는 자그마한 라면집에서였다. 이른 정심시간이라 아직 손님은 별로 없는데 안쪽에 앉아있던 50대 중반의 신사가 조용히 일어나며 반겨주었다. 중키의 다부진 체구, 이마는 약간 벗어졌는데 안경 너머로 한 쌍의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매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판룡(鄭判龍) 교수님의 사진첩에서 뵌 얼굴이었다. 

    선생은 밥상을 사이 두고 좌정하자 우리 대학교의 박문일(朴文一), 정판룡, 주홍성(朱紅星) 등 교수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자상히 물어왔다. 표준적인 서울말씨였으나 함경도 억양이 얼마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선생은 여러 해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문득 지나가는 고향사람을 만난 듯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1984년 8월 말 우연히 연변을 다녀간 후 우리 연변대학 중진 교수들과는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고 중국에 우리 민족의 대학을 꾸리고 있는 일이 너무나 대견해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일본에 데려다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공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군, 부모님은 다 건재하신가?”
   “예, 두 분 다 계십니다.”
   “아버님의 고향은?”
   “저희 아버지는 평남 평양 출신이고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입니다.”
   “함경도? 난 함남 북청사람일세.”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함경남도 북청(北靑)이라면 지금은 북한의 사과산지로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북청물장수’의 고향으로 유명한 고장이 아닙니까? 옛날 북청사람들은 약수 길어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고 하던데요.”

    내가 한마디 알은 체를 했더니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 그런 이야기를 북청내기들에게 했다가는 귀뺨을 맞는다구요. 자식만을 공부시킨다면 북청물장수가 아니지. 북청물장수 물 길어 팔아 사촌을 공부시키구 마을 젊은이들을 공부시킨다구 해야 할 것일세…”
   후에 선생의 주선으로 북청 출신의 사람들과 많이 사귀고 두루 책자를 보고 알게 된 일이지만 예로부터 북청은 교육을 숭상하고 그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한 고장으로 소문이 높았다. 조선왕조시대의 유명한 재상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은 “내 만일 북청에 귀양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높은 학문과 고결한 지조를 갖춘 북청선비들과 교유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했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선생은 가는 곳마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는 북청을 돌아보고 “독립된 후 우리나라를 북청과 같은 고을로 만들고 싶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래서 “교육 없이는 북청을 논하지 말라”고들 한다.

   북청물장수가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조선왕조 철종년대(1849-1863)이다. 당시 권세가였던 안동 김씨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의 서울 저택에 북청 출신의 김서방이 물을 길어댄 일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북청물장수들이 서울에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물장수를 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년대(1863-1907)부터이다. 1868년 북청군 신창 토성리 출신인 김서근(金瑞根)이라는 사람이 서울 돈화문 앞 단칸방에서 기거하면서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오는 고향 선비들의 시중을 들었다.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빨래를 했는데 물은 주로 삼청동 공원 안에 있는 약수터 물을 길어왔다. 부지런하고 인품 좋은 북청사람 김서근은 차차 물지게와 물통을 가지고 이웃 주민들에게도 물을 길어다 주었는데 상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그 소문은 이웃으로 번져가 물을 배달해달라는 집들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그리하여 김서방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고향에 연락하여 친구들을 불러다 물도가(都家)를 만들었다. 이것이 북청물장수의 시작이며 수방도가(水房都家)의 원조(元祖)로 된다.

   수방도가는 점차 서울의 명물로 등장했고 북청물장수들은 물지게로 물을 길어 벌어들인 수입으로 자식들을 서울에 데려다 공부시켰다. 그리고 많은 북청출신의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수방도가를 거쳐 갔다. 말하자면 지금의 아르바이트 식으로 잠시 수방도가에 행장을 풀고 물지게를 지고 학자금을 벌었던 것이니 만국충절(萬國忠節) 이준(李儁, 1859-1907)도 1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수방도가를 거쳐 갔다. 

   수방도가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수십 개로 불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호 연계를 맺고 서로 협동하여 체계적인 운영을 모색했다. 그 산물이 《북청청우회(北靑靑友會)》인데 이 장학회는 여러 수방도가에서 출자하는 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북청군 출신 학생들에게 정기적인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활발하게 뒷바라지를 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서면서 북청물장수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권학사상(勸學思想)에 투철한 북청인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 서울에만 중산고등학교, 고명상업고등학교와 같은 10여 개 소의 학교를 설립했고 수많은 인걸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북청물장수들을 두고 시인 김동환(1901년~미상)은 그의 시<북청 물장수>(1924)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北靑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北靑 물장수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최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北靑 물장수        
     
    동훈 선생은 함경남도 북청 니곡면(泥谷面) 출신인데 그의 삼형제는 서울에 올라가 하숙을 잡고 공부를 하던 중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만 서울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선생은 전임 국무총리 이홍구(李洪九) 선생과 동기동창으로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는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거쳐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대통령비서관(政務, 司正 담당), 1975년부터 1979년까지는 통일원 차관(남북 당국회담 대표) 등 정부 고위직에 있다가 1980년 남북평화통일연구소를 창립했고 1989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정권이 나오자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1985년부터는 일본 동경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남북통일연구에 집념하고 있었다…
   그 날 정심으로는 초밥(壽司) 한 접시에 라면 한 그릇씩 올랐다. 맥주 한잔 청하지 않는다. 처음 뵈옵는 어른 앞이라 술은 주어도 사양하겠지만 빈 말이라도 “맥주 한잔 들지 않겠어?” 하고 물어주지 않는 데는 객지에 온 몸이라 얼마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2. 잊을 수 없는 가이겐(外宛)의 불고기 맛 
  
    지금도 젊은이들은 일본에 가면 돈닢이 우수수 떨어지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인들의 천국이지 가난한 나라에서 간 유학생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매일 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고 자료를 수집, 정리해 리포트(소논문 형태의 숙제)를 작성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하루가 눈 깜빡할 새에 지나버리고 삭신은 물러날 것만 같다. 나와 같이 장학금을 받는 젊은이들은 그래도 얼마간 점잔을 빼며 지낼 수 있지만 사비유학생들은 일 년 열두 달 365일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 뛰어다녀야 한다. 개중에는 일본에 3, 4년씩 있었다 해도 술집 출입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웬만한 식당에 가도 맥주 한 병에 500엔(인민폐로 35원 좌우), 불고기 1인분에 5,000엔(350원)씩 하니 중국의 한 달 월급을 팔고 팔자 좋게 술집 출입을 할 유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친구가 좋다고 한번 모여 불고기 파티를 열어 보라. “와리깡(割勘)”― 제 각기 돈을 내여 계산을 해도 1인당 1만 엔(인민폐로 500원)씩은 내야 하니 친구 만나기도 무서운 게 일본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가면 그래도 드문드문 대접은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역시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일본에 1년 반이나 있었지만 지도교관 오오무라 교수 댁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일본인의 집에도 초청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학원생이요, 조교요 하는 대학가의 친구들 사이 역시 야박한 “와리깡”이니 중국에 처자를 두고 온 유학생들, 번쩍번쩍 금띠를 두르고 금의환향하기를 바라는 부모처자를 생각하면 슬쩍 구실을 대고 술좌석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부자의 나라 일본이라 하지만 술 한 잔, 기름진 요리 한 접시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바로 이렇게 궁상스럽게 지내고 있는 조선족 유학생들 앞에 귀인이 강림했으니 그분이 바로 동훈 선생이었다. 우리는 선생의 지도와 후원을 받고 재일조선족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고 현지조사, 학술토론회 같은 행사를 자주 가졌다.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동경기독교회관을 견학했고 고구려 후예들이 건너와 살았다는 사이다마현(崎玉縣)의 유명한 고마진쟈(高麗神社)도 참관했으며 일본 제일의 관광명소 하꼬네(箱根), 닛꼬(日光)도 답사했다. 사꾸라 피는 4월, 단풍이 드는 11월이면 아름다운 신쥬꾸고엔(新宿御宛)의 푸른 잔디 위에 노천 파티를 벌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파티는 요요기(代代木) 부근에 있는 가이겐(外宛)이라는 불고기집에서 많이 했다. 나는 그렇게 맛있는 불고기를 다시는 먹어볼 것 같지를 않다. 늘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지칠 대로 지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늘 속이 출출하던 우리는 사흘 굶은 호랑이처럼 기름진 불고기를 포식했다. 선생은 한 구들 되는 자식들에게 어쩌다가 좋은 음식을 얻어다가 배불리 먹이고 있는 어버이처럼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실없이 젊은이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는 자꾸 술이며 안주를 새록새록 청했다. 술과 안주도 당신 자신이 직접 청하지 않고 나를 보고
   “간사장 동지, 술이 좀 부족허구만. 한 잔 더 하지요. 고기도 좀 더 시키고…”
    하고 화기 오른 안경을 벗으며 두 눈을 끔뻑해 보였다. 내가 친목회의 간사장 직무를 맡고 있다고 일부러 “간사장동지, 간사장동지”하고 일본식으로 개여 올리는 것이었다. 당신 자신은 친목회의 보통 회원이고 질긴 술꾼인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낮에는 절대로 술 한 잔 하지 않았고 일본 소주보다 맥주를 더 즐기는 편이지만 일단 저녁에 우리 젊은이들을 만나 기분이 좋으면 2차, 3차로 대작을 하군 했다. 그리고 술값은 꼭 당신 자신이 내군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먼저 결산을 하면 크게 화를 냈다.
   “이 봐, 동경바닥의 주인은 내가 아닌가? 썩 물러서게. 자네들의 술대접은 연변에 가서 받겠어!”
    우리 유학생들이나 방문학자들 뿐만 아니었다. 학술회의나 무역상담 차로 일본에 온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 기업인들 모두가 동훈 선생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선생이야말로 우리 중국조선족들에게는 동경의 급시우 송강(急時雨 松江)이었다.

    1990년 8월 제2차 오사카조선학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중국 측 대표 96명이 동경을 거쳐 귀국할 때 역시 가이겐 불고기집에서 대접을 했다. 미닫이들을 활짝 밀어놓고 두 줄로 길게 차린 불고기상이 장관을 이루었다. 8월 삼복염천이라 후끈후끈한 화기가 진동하고 불고기 굽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앉은걸음으로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술잔을 권하는 선생의 모습, 이마며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돋아 있었다. 참으로 보기에 민망했다. 연변사람들에게 무슨 신세를 졌기에, 중국 조선족과 무슨 인연이 있기에 바람처럼 지나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처럼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일까?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그 무렵 우리는 조상의 나라 한국에 가 보고 싶었다. 1990년도라 그때만 해도 친척 초청이 아니고는 한국에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도 일본에 있는 중국조선족 학자라면 찬스를 잡을 수 있었지만 아직 학문적 깊이가 없는 우리들을 어느 대학교에서 초청해 주며 설사 초청을 해준다 해도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우리 고학생들이 무슨 자금으로 한국나들이를 한단 말인가?
    우리의 말 못하는 사정을 손 끔 보듯 하는 선생은 그 당시 오사카 국제해상운수주식회사 사장으로 계셨던 허영준 선생을 찾았던 모양이다. 그 때만 해도 허영준 사장은 재일동포들 중에 손꼽히는 기업인이요, 자산가였다. 그는 일본의 고베항(神戶港)과 한국의 부산항을 나드는 기선(輪船)과 화물선을 가지고 있었고 부산에 크라운호텔, 서울 강남에 리버사이드호텔도 가지고 있었다.
   “허사장님,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젊은이들이 동경대학, 와세다대학과 같은 일본 명문대학에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을 모른답니다.”
   “일본은 알고 자기의 모국은 모르다니요?”
    격장법(激將法)이 바로 들어맞았는지라 동훈 선생은 한 술 더 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학을 하는 젊은이들이 아닙니까? 무슨 돈이 있어서 한국관광을 하겠습니까? 하나같이 머리들이 총명하구 열심히 공부들을 하니까 장차 큰 재목이 될 건데참, 나도 옆에서 보기가 딱하군요…”
   “아니, 돈이 없어서 모국도 가보지 못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 돈은 제가 내놓을 테니 동선생께서는 주선만 해 주십시오.”

    마침내 동훈 선생의 주선으로 우리 조선족 유학생 25명(그 가운데 金昌錄씨의 10살 먹은 딸과 金光林씨의 7살 먹은 아들놈도 있었다)은 고베(神戶)에서 오림피아호 기선을 타고 부산을 바라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의 크라운 호텔에 묵으면서 3박4일, 서울의 리버사이드호텔에 묵으면서 5박6일, 토끼장 같은 다다미방에서 살던 우리는 금시 중동 석유왕국의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매일 관광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모국의 도시와 명승고적들을 돌아보았고 저녁이면 저마다 널찍한 호텔 방을 차지하고 오랜만에 늘어지게 발 편 잠을 잘 수 있었다. 동훈 선생은 허영준 사장네 팀과 함께 서울까지 날아와 우리들에게 일일이 용돈을 주었고 대통령 각하도 가끔 찾아오신다는 유명한 신라술집에서 연예인들까지 불러 풍악을 잡히며 풍성한 환영만찬을 베풀어주었다.

    그 때 그 감격과 감동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3. “코리아인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지”

    선생은 사모님과 아들 동헌(董憲)과 함께 동경에 살고 있었고 그분의 큰따님은 미국에서, 작은따님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선생네 가족은 동경에서 아파트를 전세 맡고 살았는데 내가 일본에 있는 사이에도 신쥬꾸구(新宿區)에서 시부야구(涉谷區)로, 다시 나카노구(中野區)로 자주 이사를 했다. 

    아직도 음으로 양으로 민족차별을 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요사스러운 일본인 부동산 업주들은 한국인에게 좀처럼 세를 주지 않았고 세를 주었다가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이런 저런 구실을 대고 아파트를 내게 했다. 선생네가 신쥬꾸구 쪽에서 시부야구 쪽으로 옮길 때, 우리 유학생 친구들 몇이 달려가 이사를 거들어준 적 있었다.

    요통(腰痛)을 심하게 앓고 있는 사모님까지 나오셔서 짐을 싸고 있었는데 우리는 운송회사 직원들을 도와 짐을 메여 나르느라고 땀을 뻘뻘 흘렸는데 선생만은 부지런히 화장실에서 욕조를 닦고 있었다. 당장 내야 할 집인데 괜히 부득부득 청소할 건 뭔가? 오히려 옆에서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공자님 이사에 책 보따리밖에 없다더니 무슨 책 상자가 그렇게 많았던지! 우리가 5층에서 1층까지 이삿짐을 다 메여 내렸건만 선생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서 구들에 물수건을 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생은 허리를 펴고 우리를 둘러보더니
   “짐을 다 내려갔으면 창문들을 닦아주게.”
    하고 걸상을 내주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낼 집인데 청소를 해선 뭘 합니까?”
     선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선생은 물수건으로 문고리들을 샅샅이 훔쳐내고 있을 뿐인데 사모님이 곱게 눈을 흘기며 끌끌 혀를 찼다.
   “저 양반은 이사할 때마다 저런 답니다. 새로 드는 집주인에게 코리아인들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 한다고 말예요. 열 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빌어야 할 땐데 번마다 참 코 막고 답답하지요.”
    그제야 우리는 얼마간 깨도가 되어 선생을 거들어 일손을 놀렸다.
    이젠 집안 어디를 보나 신접살림처럼 알른알른 윤기가 돌았다. 나는 분명 내일 찾아들 주인의 휘둥그런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참으로 우리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의 어디에 가서 살던지 밝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줄 때, 자기의 인격과 품위를 지킬 때 세계인들도 우리를 다른 눈길로 볼 것이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사사건건, 구석구석에서 우리 촌뜨기 유학생들에게 귀감을 보여주었다. 우리와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일 없었고 약속 장소에는 단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와 계셨다. 그렇게 술을 즐기는 분이지만 낮에는 단 한 모금도 술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색 정복에 반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신사 풍의 깔끔한 모습, 그분의 단정하고 빠른 걸음은 우리 젊은이들도 무색케 했다.

   “옛날 개념으로는 부자들 모두가 뚱뚱보로 되어 있지만 현대 부자들은 모두 날씬한 편이거든. 여기 일본의 마쯔시다나 쏘니의 회장도 그렇구 한국의 정주영, 김우중 회장도 그렇단 말이야. 그러니 호웅씨도 부자로 되려거든 체중부터 줄여야 하겠어.”
    선생은 체중이 90키로로 육박하는 나를 두고 가끔 농을 걸기도 했다.

    4. 넉넉한 유머와 백성의 통일논리

    동훈 선생과 앉으면 언제나 우리 젊은이들 쪽에서 찧고 까불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만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 절대로 당신 자신의 인생경력이나 인생철학을 도도하게 펴내지 않는다. 혹시 좌중에 젊은이들을 상대로 고담준론을 펴내는 어르신네가 있으면 슬쩍 우스운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리군 했다. 

    하지만 선생은 박문일, 정판룡 등 선생들과 함께 앉은자리에서는 가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거나 진한 육담마저 꺼내군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나나>,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와 같은 이야기는 영영 잊을 것 같지 않다. 실례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만 옮겨보고자 한다.

    ― 대한민국 어느 기업의 회장 어른께서 양쪽에 쭉 중진들을 앉히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판인데, 비서란 놈이 살그머니 다가와 귀에 대고 한마디 여쭈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오셨는데요!”
    비서가 말하는 “그분”이란 물론 회장 어른이 비밀리에 좋아하는 젊은 여자지요.
   “왜 또 왔지?”
    회장 어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데 비서란 놈이 슬쩍 원탁 밑에 오른 손을 넣더니  먼저 왼손 장지(長指)와 식지(食指)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이것 아니면…”
    하고 다시 오른손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소곤거렸습니다.
    왼손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는 건 돈을 의미하고 오른손 장지를 왼손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어 보이는 건 섹스를 의미함을 회장 어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회의 중이지 않는가? 임자가 알아서 잘 모시도록 하게!”
    회장 어른이 난색을 하면서 비서를 물리치고 다시 회의를 주최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문서를 들고 들어오는 비서를 보고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지라 회장 어른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아, 어제 그분은 잘 모셨는가?”
    그러자 비서란 놈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또다시 왼손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지어 보이면서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이것으로 잘 모셨지요!”
    하고 오른손의 시뻘건 장지를 왼손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쯤하면 좌중은 그만 포복절도하게 된다. 말뚝이가 양반을 야유하고 골려주는 <봉산탈춤>의 현대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생을 모신 자리는 늘 즐겁고 배울 것이 많다.
    이러한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와 뛰어난 유머 감각은 그의 칼럼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30대 초반에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으로 맹활약을 했던 선생, 최근에도 <동아일보>와 <문화일보>에 칼럼들을 실어 세계정세의 추이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현 당국의 통일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마침 여기에 필자가 눈에 띄는 대로 스크랩해 두었던 선생의 칼럼 몇 편이 있다. <統一의 논의-‘政治打算’해선 안 된다>(88.7.1), <北京 東京 平壤서 본 서울>(97.12.15), <개혁의 2가지 필요조건>(98.2.4), <통일정책 大道로 가라>(98.2.13), <이산가족문제 접근법>(1998.38), <남북대화 大局的으로>(98.4.10), <‘소떼 訪北’ 남북해빙 계기로>(98.6.15), <北韓 상공에서의 묵상>(98.12.29), <욕심보다 ‘차가운 머리로’>(00.6.19) 등 9편이다. 이는 선생께서 지금까지 제출했고 발표했던 수많은 보고, 칼럼, 논설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만 이 9편의 칼럼을 통해서도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을 얼마간 엿볼 수 있다.  

    첫째, 선생 역시 1천만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통일철학은 철두철미 순박한 백성의 소원과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생은 1947년 봄, 병석에 계시는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두고 북청을 떠났는데 그 동안 아버님은 옥살이와 강제노역, 끝내는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고 누이동생 경희와는 생리별이 되고 말았다. 하기에 선생은 말한다- “50년 세월을 하루같이 헤어진 혈육의 정을 못 잊은 채 끝내는 북녘을 향해 머리라도 돌려서 숨 거두게 해달라는 실향민들의 애통된 호곡에 이제 정말 귀를 기울여 한다. 한을 안은 채 한줌의 잿가루가 된 어버이 유해를 휴전선 북녘에 날려 보내며 흐느끼는 비운의 겨레를 외면하면서 거기에 무슨 민족이요, 통일이요를 외쳐대겠다는 건가.” 

    선생은 이산가족의 아픔은 도외시하고 제 잇속만을 채우려는 당국자들을 비판한다. “쌀을 주면 군인이 먹으면서 남침할 기운을 차릴 것이기 때문에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통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독일통일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요는 북한동포와 함께 살게 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 비유하자면 옹졸한 졸부 집안에서 노부모도 귀찮고, 남루한 친척 왕래도 싫고 남남으로 살아야 내 돈이 축나지 않는다는 요지다. 결코 축복받지 못할 것이다. 순박한 백성들 사이의 흐뭇한 겨레사랑, 그리고 역사 감정을 함께 이어가는 것이 통일의 원점이 아닐까.”        

    둘째, 선생은 통일문제를 백성의 논리로 접근하고 있는 것만큼 “통일정책은 민족의 역사에서 큰 발전을 향한 웅대한 과제이므로 그 기조로부터 표현문구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기록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격조 높은 것”이어야 하며 “그 동안 쌓인 갖가지 당착 모순 불합리를 청산, 정리하고 이치에 맞고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통일정책은 당당하고 대도(大道)로 가야할 것”이니 “남북관계에서 대결과 승패의 관념은 극복되어야 하고 “너”와 “나”가 “우리”로 되게 하는 데는 정직과 성실이 근본이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생은 “오늘날 대명천지에 잔꾀나 속임수에 넘어갈 사람도 없고 공작이나 술수에 의해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무슨 기발한 계략을 내놓는 경쟁이 된다든지 나라 안팎의 하찮은 관중석을 의식해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나 연출 같은 발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남북 사이의 접촉, 통일 논의에는 결코 ‘단독’도 ‘밀실’도 없다. 가상(假想)이지만, 남과 북이 마주하는 곳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자리 하나가 마련돼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의 눈’이 임하는 자리다. ‘역사의 눈’은 실로 냉철, 엄격하며 후대 역사에 진실을 전하고 시비를 분별해 줄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눈”은 민족사적 정통성 위에서의 민족 발전과 민주주의의 상궤(常軌)를 일탈하지 못하도록 예의 주시할 것이다.”

    셋째 선생은 통일정책은 북과의 상관관계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국내 정책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장차 통일된 나라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미리 우리 주변에서부터 구현시켜 나가는 다양한 노력이 바로 통일정책”이며 “청결한 정부, 질서 있는 공평한 사회를 이뤄 바람직한 통일의 모태를 만드는 개혁이 바로 중요한 통일정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훈 선생은 특히 개혁이 번번이 실패하는 원인을 꼬집고 나서 “개혁의 두 가지 필요조건”을 말한다. 첫째는 개혁의 추진주체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법이라는 반성기능이 정상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필요조건을 논하면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비유한다. 

   “개혁은 개혁을 이끌 사람들이 ‘규격(規格)’에 맞아야 할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지난날 개혁시도마다 좌절된 경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알 수 있듯이,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규격에 맞을 때에만 국민은 한편이 돼주고 그래서 성취도 남겼다. 그 규격이란 어떤 것일까. 간단명료하다. 개혁을 들고 나왔으면 개혁의 전 과정에서 자신에게 엄격함으로써 흠 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감히 남(국민)에게 도덕률 준수까지 당당히 강청할 수 있자면 그들 자신이 행적과 도덕성에서 양심(良心)으로부터의 합격판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에 규격의 잣대가 헷갈리면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 알려진 사기, 변절, 방탕에다가 이혼경력도 있는 사람이 어느 날 말끔히 단장하고 주례석에 서서, 인간이란 정직해야 하고 지조도 있어야 하며 조강지처와는 백년해로 운운하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손님들은 실소(失笑)할까, 존경할까.”

    한마디로 동서고금을 주름잡는 해박한 지식,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긴  안목, 종횡무진의 비유와 풍부한 유머, 그래서 우리는 선생의 칼럼을 좋아한다. 바꾸어 말하면 선생을 통해 우리는 열 대학 교수들에게서 배운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5. “연변대학교를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일본에서 어느덧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선생은 신쥬꾸에 있는 스미도모(住友) 빌딩 55층에 있는 대동문(大同門) 한식관에서 우리 부부를 위해 환송 파티를 차렸다. 그 때 일본에 있던 큰따님과 아드님은 물론이요, 사모님까지 불편한 몸에 쌍엽장을 짚고 나와 주셨다. 초밥에 불고기,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안주들을 많이 청해놓고 양껏 술잔을 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때 남긴 사진은 지금도 나의 가장 귀중한 기념물로 남아있지만 그 날 연변의 한 젊은 학도에게 남긴 한마디 말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연변의 명동학교가 유명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안수길 선생의 소설에도 배경으로 나오지만 김약연 선생과 같은 반일투사가 교편을 잡았구 윤동주, 송몽규 같은 민족시인들도 많이 배출했다구 하더군… 일본에 왔기에 하는 말이지만 일본에도 유명한 학교가 있었어요. 저 야마구치현에 가면 쇼오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유명한 사숙이 있어요. 명치유신을 주도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선도해나간 유명한 인물들, 말하자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이도 히로부미(伊藤博文),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요시다 도시마로(吉田稔磨), 마에바라 이츠세이(前原一誠), 시나가와야 지로(品川彌二郞)와 같은 거물들을 길러냈단 말일세. 자그마한 시골 사숙에서 명치정부의 중신(重臣)들을 거의 전부 키워냈다는 말이 되겠지.

    아무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는 법이지. 우리말로 하면 개천에서 용 나고 말이야. 아무튼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간 친구들이 연변대학을 잘 꾸려주게. 연변대학을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헌데 요즘 나를 바라고 일본에 오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뼈가 없단 말이야. 여기 3류, 4류 대학에 와서 뭘 하나. 동경대, 와세다대 같은 명문대학이 아니면 안 돼요. 그런 명문대학에서도 일본인들을 젖히고 수석(首席)을 차지해야지…”

    그 날 밤 동훈 선생은 사모님과 자제분들을 먼저 보내고 우리 부부를 데리고 동경의 밤거리를 거닐다가 자그마한 닌교(人形)들을 벽장에 총총 앉혀놓은 토속음식점에 들어가 또 술상을 마주 하고 앉았다. 선생은 우리 내외에게 정교한 손목시계 하나씩 선물하고 봉투 하나를 건네준다.
   “일제 텔레비전이 좋다고들 하니까 이 돈으로 부모님께 텔레비전 한 대 사다가 선물하게.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가는 아들놈이 선물이 없어야 안 되지.”
    얼마나 마셨을까? 점점 말씀이 적어지고 술잔만 내는 선생, 이 새파란 젊은이와의 작별을 그토록 아쉬워하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마지막 작별은 아카사카(赤坂) 역에서였다.
   “잘 다녀가. 그리구 일본에두 늙은 형 하나 있다고 생각해 주게.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 년에 한 번씩 연하장이야 주겠지 허허…”
    선생은 물기 어린 두 눈을 슴벅거리면서 돌아섰고 나는 승객들 속으로 사라지는 선생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10여 년 전 선생께서 북청물장수의 사랑으로 키워준 가난한 유학생들이 자랑스럽게 일본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들을 따냈다. 김희덕씨와 김광림씨는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상철씨는 죠지대학(上智大學)에서, 한족인 노학해씨는 쯔꾸바대학(築波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동훈 선생께서 길러준 20여명의 장학생들 중 그 대부분이 귀국해 연변대학의 중견 교수로, 지도일군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사범학원 원장으로 있는 이학박사 최성일씨, 외사처 처장으로 있는 황건씨, 일본어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권우씨, 도서관 관장으로 있는 한철씨, 그 외에도 조문학부의 김병활 교수, 체육학부의 김영웅 제씨들도 중견교수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참으로 선생께서 심고 가꾼 자그마한 솔씨들이 낙락장송으로 자라난 것이다.
    선생은 연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인재들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의 기초건설에도 많은 기여를 하셨다. 1980년대 중반 선생께서는 대우그룹의 지원을 유치해 한화로 3,000만원에 달하는 한국의 최신 학술도서 1,500권을 기증했다. 지금 전국의 수많은 1,대학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연변대학교 정문도 한화로 2억 원 이상의 자금이 들었는데 역시 선생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마운 동훈 선생, 지금은 동경의 어느 거리를 거닐고 계실까, 아니면 서울의 대우빌딩에 있는 남북평화통일연구소에서 칼럼을 집필하고 계실까? 대한민국 통일고문회의 고문, 동아일보사 21세기평화재단 이사, 명지대학교 교수(겸), 사단법인 평화포럼 이사, 남북평화통일연구소 소장 등 중책을 맡고 일하는 선생은 1989년 이래 남과 북의 교류를 위해 10여 차 조선을 방문했는데 지금도 노익장의 정열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연하장 한 장 띄우면서 선생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을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 1998년 12월 20일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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