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북아신문=리동렬 기자] 김철웅 박사는 연변대학교 부속병원의 주임교수이다. 의학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름대로 문학이란 삶의 커리어를 열심히 쌓아가고 있다.  일상의 사소한 스토리를 놓치지 않고 진주처럼 꿰가는 수필의 서술 기법을 잘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편집자>  

▲ 1955년 생. 1983년 연변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 부속병원 비뇨외과에 근무. 1994년 일본 京都大学과 高知医科大学에 유학해 1999년 의학박사학위 취득. 1999년부터 연변대학 부속병원 비뇨외과 주임교수 등 역임. <호박꽃 예찬>, <함박꽃 이야기>, <아! 사쿠라, 사쿠라>, <마음의 동상>, <생명의 환희>등 10여 편의 수필을 발표. 2016년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 2018년 <청년생활> 제2회 계림문화상 대상 수상.

제1편

아! 사쿠라, 사쿠라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을 흘린다고 3월말이지만 여기 동토의 땅 연변에는 아직 봄소식이 없다. 산등성이의 진달래도 꽃망울을 터치지 못하고 추위에 떠는 소녀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때쯤이면 저 바다 건너 일본의 사쿠라를 그린다. 거대한 꽃너울처럼 천산만야를 새하얗게 덮은 사쿠라, 막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고 그속에서 이마가 쭉 벗겨진 작달막한 키의  일본노인과 그의  옥상(부인)이 나막신을 살살 끌며 걸어나오는것만 같다.

  사쿠라(樱花)는 우리 말로 벗꽃이라 한다. 갓 일본에 갔을 때는 사쿠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웠으니 사쿠라철이 언제 오고 언제 가버리는지조차 몰랐다. 일본에 간 이듬해에 우연히 요시가와(吉川)선생을 알게 되였고 해마다 3월말이면 그들 내외와 함께 사쿠라구경을 갔다. 

  유학생활을 마치던 해의 3월말도 우리는 요시가와 내외분과 함께 시코쿠겐 미노마루에  있는 고우찌죠(高知城)에 가서 사쿠라구경을 하기로 했다. 5년 유학생활의 클라이막스가 되겠구나고 생각하니 무등 기뻤다. 고우찌죠 주위에는 400여 그루의 사쿠라나무가 있는데 약속이나 한듯이 하루아침에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예닐곱날 지나면 하얀 꽃잎들이 꽃보라를 날리며 우수수 떨어진다. 꽃구경이란 꽃잎이 떨어지면 무색해진다.

  우리 내외는 이른아침부터 고우찌죠 천수각(天守阁)아래에 가서 바리를 치고 돗자리를 깔고 요시가와선생 내외를 기다렸다. 천수각에 서서 사위를 바라보면 푸르른 태평양과 아담한 고우찌시가 한눈에 안겨온다. 사쿠라꽃으로 하얗게 덮인 산기슭을 바라보면 겨우내 울적하게 지냈던 가슴이 확 트이는듯 싶다. 

  마침내 산뜻한 기모노(着物)에 나막신을 신은 부인을 앞세우고 헌탱캡을 눌러쓴 작달막한 키의 요시가와선생이 택시에서 내렸다. 우리 내외가 달려가자 부인이 잔걸음으로 마주 달려오며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김선생, 이이 오덴끼데스네(참 좋은 아침이지요). 오늘 김선생네 내외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꽃구경이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선생님네 가족도 저의 고향을 꼭 찾아주세요. 중국에는 가는 곳마다 명승이요, 고적입니다. 그리고 맛있는 중화료리도 있거든요.”
  “글쎄요. 저는 상해와 소주를 다녀왔어요. 하지만 우리 선생은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거든요.”
  부인이 살짝 푸념을 늘어놓자 요시가와선생은 나를 보고 게면쩍게 웃더니 오랜만에 처음으로 이런 말씀을 했다.
  “그렇소, 나는 나이도 많거니와 젊었을 때부터 별로 여행하지 않았소. 하지만 중국엔 한번 꼭 가보고싶었소. 난 태평양전쟁때 일본군 2등병으로 말라카해협에서 미군과 대치해가지고 3년을 지냈다오. 밤낮 모기에게 뜯기면서 무진 고생을 했구 많은 전우들을 정글에 묻었소. 일본이 패전하자 나 혼자만 살겠다고 허둥지둥 일본으로 돌아왔구만. 다음날 내 자서전을 한권 드리리다.”
  내가 흥미진진해서 물었다.
  “집사람에게서 듣자니 지난겨울에도 마쯔야마 군깐지마(军艦岛)에서 열린 전쟁생존자모임에 다녀왔다면서요?”
  내옆에 있던 안해가 나더러 입에 지퍼를 잠그라고 살짝 눈을 흘겼다. 요시가와선생은 잠자코 사쿠라가 만개한 바다기슭을 내려다보고있는데 부인이 생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선생은 해마다 전쟁생존자모임에 가신답니다. 칠팔년전에 함께 다니던 우리 선생의 친구가 세상을 떠났어요. 남경학살에 참가했던 우리 선생의 후배 야마무라씨지요. 그이는 림종에 우리 집 선생의 두손을 꼭 잡고 ‘중일전쟁에 참전해 많은 죄를 지었수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나도록 중국인들에게 사죄 한번 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늘나라에 가게 되였수다. 기회를 잡거든 저를 대신해 중국인에게 사죄해주시우.’ 하고 눈을 감았답니다.”
  그러자 요시가와선생이 부인의 말을 받았다.
  “난 아시아의 이웃나라에 갈 면목이 없소. 지난날 일본은 큰 죄를 지었소. 하지만 여태껏 피해국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배상하지 않았소.”

  이마가 홀딱 벗겨진 작달막한 노인네, 자그마한 진료소를 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요시가와선생의 고요한 눈빛을 통해 나는 인간적인 도덕과 량심을 가진 한 참전전사의 뼈저린 참회와 반성을 읽을 수 있었다.
  요시가와선생의 은공을 얼마간이라도 갚으려고 우리 내외는 요시가와선생의 생일날에 그들 내외를 우리 집에 모시기로 했다. 그해부터 대학원을 다니는 4년간, 요시가와 내외분의 생일파티는 아예 우리 집에서 했다. 요시가와선생은 정종 한잔 들가말가 했지만 음식은 달게 드셨고 부인은 조선김치가 일품이라고 치하했다. 요시가와선생은 돌아갈 때마다 꼭 사례금 2만엔을 우리 아들놈의 손에 쥐여주었다.

  요시가와 내외분에게는 겐(健)이라는 아드님이 있었는데 대학병원 내과의사였다. 그는 나보다 대여섯살 손아래사람인데 좀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프라이드는 강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중국인이기에 해마다 자기 부모의 생일상을 차려주는가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다. 어느 한번 부모와 함께 우리 집에 온 겐은 나와 솔직한 대화를 나누게 되였고 그후부터 나와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였다. 그때부터 그는 나를 보고 “아니끼(형님)”라고 불렀다.

  1996년 8월, 류학생지원회와 국제녀성조직 회장을 맡고있던 요시가와부인이 나를 장학생으로 추천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한꺼번에 현금 30만엔을 받게 되였다. 당시의 30만엔이면 인민페로 3만원이다.  생각지도 못한 큰 떡이 차례진셈이였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팬츠바람으로 쭈크리고앉아 만엔짜리 일화를 트럼프장처럼 펼쳐놓고 금은보화를 앞에 둔 《몽떼 그리스도 백작》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환상에 들떠있었다.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쓸가?”
  “오도산, 샤신 이찌마이 도루조, 치즈!(아버지, 사진 한장 찍어드릴게요. 찰칵!)”
  하고 아들녀석이 연속 샤타를 눌렀다. 필림은 동네에 있는 사진관에 맡겼다. 며칠후 사진을 찾으려고 사진관에 들렸더니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옥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풋이 웃었다.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나요?”
  “아니요. 그냥요. 스미마센(미안합니다).”
  옥상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더니 나의 눈길을 피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사진을 아들녀석에게 주었다. 사진을 보고있던 아들녀석이 제 엄마와 함께 사진을 보더니 배를 끌어안고 깔깔 웃어댔다.
  “자아식, 웃긴 왜 웃어. 턱이 빠질라!”
  “오도산! 반쯔노 나까까라 긴다마(银玉)가 히도쯔 죳삐리 데데이루조(아버지! 팬티안에서 은방울 하나가 달랑 나왔네요). 하하하!”
  “엣끼!  이놈의 자아식!”
  나는 다시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입을 헤벌린 나그네의 팬티아래로 거시기가 반쯤 나와있지 않는가.
 “아, 그래서 사진관집 옥상이 생글생글 웃었나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기왕 나왔으면 나왔지, 그놈이 밥을 달라나. 목돈이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또 있으랴?
  아무튼 이 가난한 유학생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슬그머니 도와준 단아하고 후덕한 요시가와부인이 한결 돋보이고 눈물나게 고마왔다.

▲ 문학상 수상식(저자와 아내)에서
   이뿐만이 아니다.  이듬해 여름,  파시피크 골프장 캐디를 하던 나의 안해를 요시가와선생은 자신의 진료소에 와서 일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우리를 돕는것이였다. 그래서 안해는 요시가와진료소에 다니게 되였고 월급도 적잖게 받았다. 나도 그 덕분에 공부와 연구에 전념할수 있었고 살림도 어느 정도 윤택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연변에 계시는 노모의 전화가 걸려왔다. 막내동생이 기어코 일본유학을 하겠다고 하니 좀 도와주라는 부탁이였다. 노모의 부탁이라 이는 지상의 최고명령이였다. 막내동생을 일본에 데려오자면 일본인 신원보증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중국인의 신원보증을 서기 몹시 꺼려했다. 이리저리 생각하던 끝에 나는 지도교관을 찾아가서 동생의 신원보증을 서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대번에 코를 떼우고말았다. 자신의 수입명세, 납세문서, 가족들의 신상정보 등을 남김없이 나에게 공개할 의무가 없다면서 딱 잡아뗐다.

  그야말로 궁여지책으로 요시가와선생을 찾아가 어렵게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동생의 신원보장을 해주겠다고 했다.
  “김선생의 동생도 성실한 젊은이겠지. 공부하겠다는 사람을 어찌 막을 수 있겠소. 내가 보증을 서겠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내가 깊이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올렸더니 요시가와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했다.
  “아니,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일전에 어느 신문에서 보니 중국 흑룡강성 방정현에 있는 한 농민은 수십명의 일본인 전쟁고아를 키웠다고 하더구만. 중국의 사자성어로 이덕보원(以德报怨)이란 말이 있지요.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요!”

  훗날 요시가와선생은 막내동생을 데리고 에히메대학 도자와교수 연구실까지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부탁했다. 뿐만아니라 동생에게 도서권 3만엔과 현찰 2만엔을 주었고 맛갈스러운 점심을 사주면서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알리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유학생활은 고달프고 힘겨웠소. 그렇지만 형과의 약속도 저버리기 어려웠거니와 요시가와선생의 뜨거운 사랑과 기대를 생각하면 차마 학업을 포기하고 돈벌이할수는 없었소.”
  동생은 여러 형제들과 앉은 술자리에서 요시가와선생을 두고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동생은 일본에서 수사과정(중국의 석사과정)을 마친후 중국에 돌아와 연변대학 교수로 취직했고 재일조선인문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3월 25일 오전, 마침내 나는 손꼽아 기다리던 의학박사학위를 받게 되였다. 우리 세 식구는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요시가와선생네 저택으로 천방지축 달려갔다. 요시가와 내외분은 마치 친자식이 박사학위를 받은것처럼 기뻐했다.
  귀국하는 날, 두분은 국제회관까지 배웅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허탈증에 걸린 사람처럼 우리 내외가 옆에서 부축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아쉬워했다.
  이렇게 갈라진지도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 해마다 일본에 사쿠라가 피는 계절이면 요시가와 내외분을 사무치게 그리지만 여태 한번도 일본을 다시 찾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요사스러운가. 일이 바쁘다는 핑게로 해마다 한번씩 년하장을 보내고 전화를 드렸을뿐이다. 내가 너무나 무정했다. 요시가와선생은 외아들 겐을 간암으로 먼저 보낸후 시름시름 앓다가 2008년 가을에 하늘나라에 가셨다.

  사쿠라꽃은 피여서 이레(樱花7日)라는 일본의 속담이 있다. 아무리 화려한 사꾸라꽃도 이레를 넘기지 못하고 어느날 아침에 깨끗하게 땅에 떨어진다. 그래서 사꾸라는 활짝 피였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꽃으로 유명하다. 이게 사쿠라의 매력이다.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짧은 인생을 사쿠라꽃처럼 화려하게 살다가 갑자기 비장하게 죽는것을 인생의 숭고한 목표로 삼았다. 사무라이들의 할복자살에 대해서는 나도 끔찍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참혹한 패배(敗北)를 깨끗이 인정하고 그 치욕을 말끔히 씻어버리는데 그 취지가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꽃은 사쿠라, 사람은 사무라이”라고 한다.

  이러한“사쿠라의 미학”과 더불어 “예의의 문화”와 “사죄의 문화”는 일본전통문화의 핵심으로 된다. 나는 요시가와선생 내외분이야말로 이러한 사쿠라의 미학과 일본의 정신의 표본이요, 일본전통문화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하이꾸시인 카야시라오는 “그대  그리워져서 등불 켤무렵 벗꽃이 지네.”라고 노래했고 모리다께는 “꽃잎 하나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니 나비였네.”라고 노래했다.  사쿠라는 올해도 명년에도 영원히 필것이요, 요시가와선생은 아름다운 나비 한쌍으로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2016.3.10
2916년 길림신문 [두만강 문학상] 최우수 수필상
 

▲ 그리운 유학시절(교도대학)

 제2편

생명의 환희
 


    고층 아파트 창문으로 내다보면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슬슬 풀리는지 저 멀리 산기슭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여오른다. 온 겨울 고층아파트에 묶여 살던 우리 내외, 왁자지껄한 도심에서 부대끼던 우리 내외는 서둘러 자가용을 몰고 청자관산기슭에 마련한 전원주택으로 달려갔다.

    시내물도 바닥을 드러내고 졸졸 흐른다. 청차관산기슭에는 양떼들이 구름같이 널려 한가로이 새싹을 뜯고 있다. 어디선가 어미를 찾는 목매기의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온다. 어느새 강남 갔던 제비들이 돌아와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그물망처럼 하늘을 새까맣게 덮으며 날아옌다.

   우리 전원주택에도 봄아씨가 찾아왔다. 서북쪽 처마밑에는 자그마한 터널 모양의 제비 둥지가 하나 있다. 그러께 지은 둥지다. 지난해 여름,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아 키우던 엄마, 아빠 제비가 다시 돌아왔다. 둥지에 어설프게 깔린 묵은 지푸라기들을 물어 던지고 보송보송한 지푸라기를 물어들인다. 제비가 다시 찾아올 때마다 이 몇년간 어려운 인생길을 걸어왔던 나에게 위안과 보람과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 마음은 기쁘기 그지없다.

    돌담주변에는 몇 해 전에 심어놓은 개나리꽃도 노랗게 피였고 S형으로 쌓아올린 돌담 틈에는 보라색 제비꽃(앉은뱅이꽃)들이 수줍은 듯 빠금히 얼굴을 내민다. 독일의 대시인 괴테의 <앉은뱅이꽃의 노래>라는 시가 떠오른다. 한떨기 조그만 앉은뱅이꽃이 양젖을 짜는 시골처녀의 발에 밟힌다. 그러나 앉은뱅이꽃은 조금도 서러워하지 않는다. 추잡하고 못된 녀석의 손에 꺾이지 않고 착하고 고운 처녀에게 밟혔으니 꽃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해 전, 나도 암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여태껏 살아있다는 것이 큰 보람이고 행복이라고 느껴진다. “사람은 자기가 결심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아브라함 링컨이 말했다. 나도 보람 있게 살고자 애를 쓴다. 지금도 삶의 보람을 찾기 위하여 이순의 고개를 넘긴 이 나이에도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노라면 조만간에 행복의 녀신이 나를 찾아주리라고 확신한다.

    5월은 분명히 태양의 계절이다. 지난해 5월 초순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나와 안해는 터밭에서 마늘, 양파, 배추, 상추, 케일과 같은 푸성귀를 심고 꽃나무들에 거름을 주었다. 문득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자두나무 가지에 제비 한 쌍이 날아와 앉았다. 작은 꽁지를 나풀거리며 지지배배 재잘거린다.
    “주인장, 겨우내 안녕하셨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아마도 이런 인사말을 건네는 것 같다. 나는 흘끔 안해를 건너다보며 롱담조로 말을 건넸다.
    "여보. 제비들이 당신을 찾아 왔구려. 참 기특한 놈들이야. 길조이니 이 놈들을 잘 보살펴야겠소."
    안해는 하던 일을 금시 멈추고 못마땅하다는듯이 슬쩍 비꼰다.
    "아니, 보살펴주다니, 어떻게요? 머리에 이고 다니란 말이에요?"
    땀투성이가 된 안해가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며 조금은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그냥 즐거웠다. 조물주가 보내온 현조(玄鸟)가 내 마음 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날 정오부터 제비 두마리가 정문 발코니 기둥 우에 고추장종지 만한 둥지를 틀기 시작하였다. 시내가의 마른풀과 촉촉한 진흙을 한톨한톨 물어와 둥지를 튼다. 어쩐지 그 솜씨가 서투르고 느림보처럼 굼뜨다. 반나절에 겨우 두어줄 밖에 쌓아올리지 못한다. 신출내기 제비임에 틀림이 없다. 어쨌든 그놈의 제비 내외가 깜찍하고 기특하기만 하다. 이제부터 한지붕을 쓰고 살게 될 내 일가족이 아닌가.

    사나흘 후의 오후 2시 경, 낮잠에서 깨여난 나는 2층 베란다에 나섰다. 대문 옆에 나란히 심어놓은 능금나무가지에 눈송이 같은 흰 꽃이 가득 피었다. 돌담 아래 십여 그루의 자두나무도 진주알 같은 꽃망울을 터뜨렸다. 보라색 라이라크, 연분홍의 앵두나무, 진분홍의 산철쭉도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정원은 화사한 꽃들로 천자만홍의 봄을 이루었다.

    그 다음날 정오 무렵. “지지배배, 지지배배” 제비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침대머리에 놓은 조명등에 제비 두마리가 겁도 없이 앉아 두눈을 깜빡거리며 뭐라고 재잘대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벽에는 양복차림의 아들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며느리가 찍은 결혼사진이 걸려있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나는 카메라를 잡고 사진 몇장을 찰칵찰칵 찍었다. 그리고 그 즉시 바다 건너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냈다. 금시 아이들도 신기하고 반갑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때 문득 <어우야담>이라는 유명한 야담집을 낸 조선왕조 중기의 문신이며 문장가인 류몽인(柳梦寅)의 야담 <론어를 읽을 줄 아는 제비>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류몽인은 제비들도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謂知,不知謂不知,是知也)라는 론어의 한구절쯤은 읊조릴 줄 안다고 했다.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니라" 라는 뜻이다. 이를 빨리 읽으면 마치 "지지배배" 하고 조잘대는 제비의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고 류몽인은 말했다. 옛날 선비들의 뛰여난 감각, 익살과 해학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비들이 왜 우리 애들의 결혼사진 앞에서 지지배배 노래할가? 조금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앙증맞은 신출내기 제비들도 인간사의 오묘함과 신비를 알고 있다는 말인가? 또 네댓새나 지났을가, 진종일 봄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제비들이 반 쯤 쌓아올린 둥지가 비물에 몽땅 씻겨내려갔다. 너무도 애석한지, 제비들은 둥지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배회한다.
    “쯋쯋 쯋쭈르르.”

    제비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나는 발코니 안쪽의 모서리에 대못을 두개 박고 하늘색 플라스틱판을 깔아주었다. 하지만 플라스틱판과 대못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제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디론가 휙 날아가버렸다. 이튿날 그놈들은 뒤마당의 보일러실에 옮겨가 새로 둥지를 짓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진작 그래야 했었다. 거기는 검둥이가 틀고 앉아 쥐도 새도 얼씬하지 못하게 지켜주는 안전지대였다. 장마비가 쏟아져도 끄떡없을 것이고 여름 한철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나운 매나 까치나 뱀 따위도 범접할 수 없기에 “어린이집”을 짓기에는 최상의 자리였다.

    서너 주일 후, 마침내 제비둥지가 만들어졌다. 어느새 뒤마당은 제비새끼들의 놀이터, 아니 육아전쟁터가 되였다. 둥지가장자리에 조롱조롱 매달린 새끼들은 제가 먼저 먹겠노라고 샛노란 부리를 짝짝 벌리며 옴실옴실 밀고 당기고 하며 열을 올린다. 생존경쟁이 따로 없다. 어미 제비들은 죽기 내기로 벌레와 곤충들을 물어 오군 한다. 대체로 5분 간격으로 먹이를 물어 오는 셈이다.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단조롭고 힘겨운 일이다. 마을에 분홍빛 저녁노을이 곱게 드리우면 그 날의 육아전쟁은 막을 내린다. 기진맥진한 어미제비들은 둥지 근처의 돌담이나 나무 우에서 쪽잠을 청한다. 찜통더위 속에서 알을 까기도 어렵지만 농약으로 말미암은 먹이의 부족으로 새끼를 기르는 일 또한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가까운 거리에서 저물도록 이런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코언저리가 찡해나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네들란드의 저명한 화가 피터 데 호흐의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녀인>이란 유화가 있다. 이 유화를 보노라면 어느 오붓한 가정의 내밀하고 행복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모두 사랑을 먹고 살고 정성을 먹고 큰다. 아마도 이 세상에 제일 위대한 사랑은 거룩한 모성애일 것이다.

    안해가 모진 진통을 참아가며 힘겹게 아들애를 출산할 때의 일이다. 나는 명색이 외과의사지만 안해가 출산할 때 모든 일을 장모님께 떠맡기고 3.8절 경축행사에 참가해 닭털을 불어 넘기는 유희를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평소에도 일이 바쁘다는 구실을 대고 제시간에 집에 들어오는 때가 거의 없었다. 내 아들애를 업어본 기억은 딱 한번 밖에 없다. 그것도 연탄가스에 중독된 안해를 집에 그냥 내버려두고 제 아들애만 살리겠다고 둘러업고 천방지축 병원으로 내달렸다. 병원에 가서야 안해가 그냥 집에 누워있다는 생각이 들어 쏜살같이 집으로 뛰여갔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무던한 안해를 만났으니 망정이지, 소크라테스의 ‘악처’-크산티페 같은 녀인을 만났더라면 물벼락을 맞아도 열번은 더 맞았을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녀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이제야 철이 드는군” 하고 놀림을 당할 일이지만 성실하고 총명한 아들을 낳아주고 키워준 소박하고 강직한 안해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이젠 나도 환갑이 지났으니 다시 아들딸을 볼 기회는 영영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된다면 열심히 잘해보고 싶다. 할아버지에게 반드시 필요한 ‘라이선스’는 없지만 강아지를 앞세우고 산과 들, 정원에서 나무와 꽃들의 이름을 손주에게 가르쳐주고 <이소프우화>나 <안데르센동화>도 읽어주고 싶다. 어느 나무그늘에서 손주가 잠들면 슈베르트의 <자장가>도 불러주고 싶다. 귀여운 손주나 손녀, 참으로 내 인생에 이보다 더 큰 선물과 보람과 행복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솔직히 고백하지만, 해마다 봄소식을 가지고 제비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우리 내외에게도 손주나 손녀 하나 점지해줍시사 하고 빌었다. 작년에는 제비가 처마끝에 앉아 지지배배 울 때 우리 내외는 어쩐지 귀여운 손주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섯해 전, 내가 암에 걸려 죽었다고 일본과 미국에까지 뜬소문이 퍼졌었다. 그런 내가 손주를 보다니! 정말 그날이 오면 나는 브랜드 넥타이를 반듯이 매고 귀여운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백일사진을 찍어야 하겠다. 그리고 일본과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보았노라.” 하고 편지와 함께 사진도 보내야지. 허나 제비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가지고 명색이 의사라는 사람이 아들과 며느리에게 "아기를 가졌어?" 하고 어두운 밤에 홍두깨 내밀 듯 하기도 주책없는 짓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과 며느리는 결혼한지 5년이 다 되도록 애가 들어서지 않아서 은근히 송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손주가 보고 싶어도 콩밭에 서슬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날도 깜찍한 제비들이 더위를 피해서 2층 침실의 샹들리에에 앉아서 재잘거린다. 그것도 잠간, 서재로 살짝 옮겨가 책장 우에 앉아 지지배배 우짖는다. 근년에 별로 없던 일이다.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게로구나.”
    나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문득 "뚜—뚜르르—, 뚜—뚜르르—" 하고 전화별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안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며늘아기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임신반응이 양성이래요. 벌써 한달 반이래요. 아이구, 얼마나 좋아요.”
    안해는 너무 기쁘고 흥분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여보, 좀 자세히 얘기해 주오. 내가 손주를 본단 말이요? 내가? 어이구, 당신이 할머니가 되고 내가 할아버지가 된다는 거지, 으하하…”
    이 때 안해는 덜컥 전화를 끊어버렸다.

▲ 아들과 며느리

    그때로부터 서너 주일에 한 번씩 전파를 타고 며느리와 손주의 정기검진결과에 관한 속보가 날아들었다. 손주의 초음파 사진도 날아들었다. 손주의 심장박동도 스피커를 타고 선명하게 울려나왔다. 손주는 하루 볕이 새롭게 무럭무럭 자랐다. 코도 덩실하고 귀도 꽤 커 보였다. 아들 녀석이 자신의 태명을 물어왔다. 태명이 무엇이더라? 그런 것도 모르고 허무하게 살아온 우리 내외다. 손주의 태명을 ‘미르’라고 지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룡이란 뜻이다. 태아를 아들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아쉽게도 손녀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게 무슨 대수냐. 요즘 세월에는 오히려 딸을 낳고 한술 더 떠서 아들을 두면 100 점에 15점이 가산된다고 하지 않는가. 좌우간 내가 예비할아버지가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여운 '미르’의 할아버지 말이다. 비록 아직 태아이긴 하지만. 그날부터 나는 친구를 만날 때마다 손녀자랑을 늘어놓았다.
    “명년 춘삼월이면 내가 할아버지가 된다네.”
    친구가 무척 반가워하리라 싶었는데 그와는 정반대다.
    “나 원 참, 몇번이나 그 얘기를 하지? 자네 혼자만 손녀가 있는가?”
    “여보게, 자넨 ‘외’자가 달리고 나는 ‘친’자가 달렸단 말이야. 달라도 엄청 다르지. 외손은 아무리 키워주어도 외할머니에게는 개를 추기여부치고 외할아버지에게는 감도 개똥을 발라준다고 하거든. 우린 친손이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에끼, 이 사람아! 지금은 그와는 정반대란 말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사랑과 정성을 먹고 산다. 사람은 사랑이 필요하고 또 사랑해줄 대상이 필요하다. 나에게 사랑할 사람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눈앞에 다가올 춘삼월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귀여운 제비같은 손녀딸 ‘미르’이다.

    어느덧 가을이 왔다. 가지가 휘게 열린 새콤하고 달달한 자두, 알알이 붉게 익은 능금, 비지땀을 흘리며 가꾸어온 친환경 야채들도 풍작을 이루었다. 일가친척들, 친구들, 제자와 후배들에게도 한 박스씩 안겨주었다. 지난 추석에는 아들며느리가 고향을 찾아주었다. 며늘아기의 품속에 있지만 다섯 달 남짓한 내 손녀 ‘미르’와 함께 말이다.

    그렇다. 행복의 파랑새는 저 멀리 산속에 사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집 처마 밑에 살고 있다.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스스로 삶의 보람을 찾아 즐거움을 만들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다.

▲ 손녀 가람이의 첫돌생일

    지난해 가을도 전선줄에 수십 마리의 제비들이 모여서 긴 려행을 떠나기 전의 미팅과 련습을 하고 있었다. “지지지- 배배배-” 제비새끼들에게 어미가 주의사항을 준다. 새끼제비들은 지지배배 재잘거리며 고개를 까닥거린다. 어린 제비들이 높고 푸른 하늘에 치솟아 오르더니 강풍을 맞받아 힘차게 나래를 펼친다. 때로는 자유롭게 비상하기도 한다. 때로는 힘을 합쳐 독수리 같은 맹금도 저 먼산까지 몰아낸다.
    아들며느리도 산 넘고 바다 건너 저 먼 나라에 가있다. 제비도 구름 넘어 강남으로 날아간다. 허나 명년 봄 제비가 돌아올 즈음이면 우리 아들며느리도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는 귀여운 내 손녀 '미르'를 앞세우고 연길에 찾아올 것이다.


    아, 생명의 환희여, 삶이란 얼마나 신비롭고 황홀한 것인가!
   (끝)

   2018.2.2.
   <청년생활>잡지2018년4월호에 발표/  <청년생활> 제2회 계림문화상 대상수상

▲ 저자 김철웅 교수


  제3편

마음의 동상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릭 번(Eric Berne)은 어리시절 최초에 격게되는 마음의 상처를 "기초 상처"라고 일컫다. 이것은 인생 초기의 자아 도취, 즉 아이의 자기애를 상처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발랄함과 적응성, 자존감을 짓밟아 뭉개는 "부정적인 모든 메시지"들은 모두 이 기초상처가 될 수가 있다.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아이는 언제나 마음이 우울해지고 성격이 일그러지게 된다. 가슴 깊은 곳에 치유할 수 없는 차디찬 동상(冻伤)을 입게 되어 쓰라린 아픔을 가슴에 영영 묻어두게 될 수 있다. 사춘기에 들어선 소년들의 경우, 엄마아빠의 지나친 관심과 지극한 사랑을 거부하고 인생을 저주하며 반항아가 되거나, 차라리 마음의 상처를 감추고 자아 감정을 억제한 채 발랄함과는 완전히 절연된 채 우울증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내가 정년퇴직 하기전의 일이니까 아마도 3년전의 일이겠다. 그날 오전 아홉시께나 될까. 나는 한 사춘기 소년을 진찰하게 되었다.
  8십고령에 가까운 할머니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헐떡거리며 나에게로 달려 왔다. 할머니 등뒤엔 얼굴이 하얗게 질린 10대 소년이 잇따라 문지방에 들어섰다. 애들의 천진하고 발랄함은 도저히 찾아 보기가 어려웠다. 겁에 질린 두 눈은 휘둥그레지고 얼굴엔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꼬마는 몰려오는 아픔을 가까스로 참는듯 보기에도 민망스러웠다. 비뇨외과 외래에는 이런 아이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건너편 의자에 간신히 몸을 웅크리고 앉은 할머니는 이윽고 목멘소리로 겨우 말을 시작한다.
  "의사선생님, 손자놈이 새벽부터 불알통이 아프다면서 학교에도 안가네요. 문을 닫아 걸고 밥도 안 먹네요"
  할머니를 매섭게 째려보던 꼬마가 내뱉는 한마디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이씨, 아무것도 모르면서, 늙은게 주책없이, 흥!"
  아이는 콧방귀를 끼며 나를 쳐다본다. 할머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바가지를 긁는다.
  "저것 보지, 쯧쯧! 망할놈의 새끼. '외할미에게 개를 추겨 붙인다'고 눈알을 부릅뜨고 빡빡 대드네요. 3살때 이놈을 나한테 맞겨 두고 한국에 돈벌이를 떠난 제에미애비는 여태껏 오지도 않고. 헌데, 불알통이 정말 아프기나 한지 좀 잘 봐 주세요"
  "아무렴요. 할머니 고생이 많으십니다. 조만간 뭉칫돈을 메고 돌아 오겠지요. 어르신도 인젠 여생을 유유하고 느슨하게 보내겠네요"

  나의 덕담에 할머니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하소연을 늘여 놓았다.
  "뭉칫돈이라니요. 나의 퇴직금이 아니면 되기나 하겠소. 헌데 말이오, 요즘따라 이놈이 사춘기가 왔는지 좀처럼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며 외고집만 부리네요. 늙어 빠져서 주책머리 없다는둥,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는둥 못하는 소리 없네요. 내가 제명에 못 살어. 선생님이 이놈의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게나"
  늙은이는 한참 푸념을 늘어놓더니 의자에 도루 주저 앉는다. 꼬마는 할머니를 매섭게 째려보며 시끄럽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린다. 저 세상을 바라보며 외롭게 지내는 늙은이도 애석하지만, 부모의 따뜻한 사랑도 못받고 외롭게 살아가는 반항기 꼬마의 처지도 측은하였다. 하긴, 짐승도 제 새끼를 곱다면 눈물을 흘린다고 제 새끼가 곱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꼬마, 우선 의자에 않아봐요. 엄마아빠가 몹시 보고 싶지요? 여름방학에 엄마아빠 계시는 한국에 갔다 오면 좋지 않을까요?"
  "엄마아빠요?! 전화 한 통도 없는데요 뭐! 그들이 나를 모르는척 하는데 내가 왜 그들이 보고 싶죠. 이젠 서울인지 거울인지 가고도 싫지 않아요. "
  "설마? 엄마아빠가 너무 일이 바빠서 그러겠지. 헌데, 꼬마는 이름이 뭐죠,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는 학교에 다니죠? 언제부터, 어디가, 어떻게 아픈거죠?"
  내가 부드럽고 상세하게 인적사항과 병세를 물어서야 얼음처럼 굳어졌던 꼬마의 얼굴이 차츰 밝아지더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보지 못하니 엄마아빠 얼굴이 생각나지 않네요. 한국에서 다닐 학교가 마땅치 않다며 한해 두해 미루어 왔어요. 내가 부담이 되겠지"
  꼬마는 이따금 얼굴을 찡그리면서 떠듬떠듬 말을 잇는다.
  "이름은 P철수, 나이는 13살이네요. HC시 제8소학교 6학년에 다녀요"
   철수는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며 식지로 가랑이 사이를 가르킨다.
  "여기요, 여기. 아침에 오줌을 보려니 왼쪽 불통이 몹시 아파서 오줌을 겨우 똑똑 떨구었네요. 침실에 돌아와 다시 누웠는데 불통이 터질듯 아파났어요. 헌데, 한쪽에선 할머니가 학교에 가라고 문을 쾅쾅 두드리지 뭐요. '이놈의 새끼, 또 학교에 가기가 싫어 잔꾀를 부리지'라고 욕설을 퍼부었어요. 원참, 할머니와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아 말하기 조차 싫어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는 철수는 툴툴거리며 할머니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순진무구한 얼굴에 생글생글 웃어야 할 아이가 험상궂게 만 보였다. 게다가 과식에 운동부족으로 얼굴엔 군살이 가득 쪄 있었고, 아랫배는 축 처져 중년 사나이를 방불케 하였다. 젖가슴도 숫처녀가 울고 가겠다.
  진찰용 침대에 철수를 바로 눕히고 바지와 속내의를 무릅아래까지 내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철수는 할머니를 흘금흘금 쳐다 보더니 제 할미도 여자라고 밖으로 나가라고 고래고래 볼멘소리를 지른다.
  "에씨, 나가란데"
  "에키! 이 망할놈의 새끼야, 네 할미가 네 불알이라도 떼 먹니! 비린내  나는 불쪽을 거저 준대도 싫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문밖으로 피했다. 그제야 우물쭈물하며 알몸통을 들어낸다. 개암벌레가 따로 없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외음부를 자세히 살펴보니 노랑 거웃(阴毛)이 나오기 시작했다. 허나, 흉작은 흉작이다. 가물에 싹이 나오듯이 말이다. 사춘기는 부모 몰래도 찾아오는 법이다. 페니스(阴茎)의 지름이나 크기는 동아리 어린이에 비하면 조금은 약하고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쓸 만은 하다. 정상적인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에 비하면 외생식기(外生殖器)의 발육이 미흡하긴 하지만 말이다.  의학적으로 사춘기 소년에게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엄격한 생활관리가 따라야 한다. 어린이의 과체중은 생식기의 발육이 더뎌지기 때문이다. 엎친다 덮친다고 좌측 음낭(阴囊)의 피부가 발갛게 부어있었고 다치기 무섭게 모진 고통을 호소하였다. 

▲ 오오사카죠
    3십여년 경력의 베테랑 비뇨외과 의사인 나는, 꼬마의 인적사항과 간단한 질병경과를 듣는 것 만으로도 십상팔구 짐작이 갔던 것이다. 꼬마는 음낭급성질환(阴囊急症)인 고환꼬임증(急性左侧睾丸扭转)이라는 병에 걸리고만 것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오른쪽 고환이 급기야 180~720도로 비틀렸다는 뜻이다. 마치 젖은 빨래를 비비꼬듯이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고환에 공급하는 영양혈이 들어가지 못하기에 6시간이 지나면 95%이상의 고환이 괴사(坏死)하여 고환을 잘라내지 않으면 안되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만 것이였다. 어린이의 고환을 살리느냐 마느냐 여부는 시간과의 겨룸이다. 한데, 이미 7시간도 더 지났으니 제거 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병의 상황과 치료계획을 있는 그대로 할머니에게 상세하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구, 하나님 맙소사.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절대 불알을 떼서는 안되네. 내 불알을 살려주소. 자식들을 볼 면목이 없소. 차라리 내 불알이라도 뗐으면, 아니 내가 죽어야지, 내가 천벌을 받겠다. 내가 이런 것을 보자고 여태껏 살아왔나, 엉-엉-"

  수술실문 기둥에 희석희석한 머리를 마구 박는 할머니는 아예 땅바닥에 덜렁 주저 앉으며 통곡한다. 가슴이 미어지게 말이다. 그러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수술실에 들어서는 내 마음도 쓸쓸하고 불안스러웠다.
  수술결과는 참담하였다. 가래떡처럼 한바퀴도 더 비틀어진 정삭(精索) 아래의 좌측 고환은 이미 새카맣게 괴사되어 있었고 핏물이 낭자하였다. 되살아 날 가망은 제로였다. 반시간 남짓이 따뜻한 생리염수에 잠그고 핏색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하였다. 허나, 헛 수고였다. 좌측 고환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외불이 되고만 사춘기 철수가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 무거운 죄라도 진 사람처럼 할머니를 대하기가 죄송스러웠다. 엄마아빠가 있었더라면, 서너시간 더 일찍이 병원에 왔더라면 꼬마의 고환을 되살릴 수 있었지 않았을까? 고환암, 전립선암, 고환외상 등, 병이 든 고환은 몇백개는 떼어 냈건만, 애숭들의 고환을 절제한다는 것은 참으로 할 짓이 못된다. 지난해에는 열에 두 아이쯤은 고환을 살려냈는데 말이다. 두 아이의 엄마아빠가 일찍이 발견하고 적시에 병원에 왔기 때문이였다. 결손가정은 결코 아이들의 안식처가 아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알프레드 아들러는 그의 명작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일차적 양성소가 바로 가정이다"라고 하며 가정의 소중함을 피력하였다. 유명한 철학가이자 수필가인 안병욱교수는 "가정은 인생의 안식처이고, 사랑의 보금자리이고, 인생의 학교이고, 도덕의 수련장이다"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지당한 말씀이다.

   거칠은 인간 세상에 부모 있는 가정처럼 포근하고 아늑하고 영원히 그리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가정이란 피로 맺어진 생명의 집단이고 운명의 공동체이다. 가정이라는 이 운명의 공동체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바로 애틋한 부모의 사랑이다. 사랑중에서도 제일 위대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자유로운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도 역시 어머니이다. 눈을 떠서 옆을 굳게 지켜주는 것도 어머니요, 사랑의 눈길과 달콤한 키스와 생명의 진액(乳液)으로 애지중지 키우는 것도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이 배움의 요람이요, 넓디넓은 어머니 무릎이 곧 테이블이요, 어머님의 따뜻한 말씀이 곧 바로 참된 교과서이다. 갓난아이가 처음 부르는 것이 엄마아빠이고, 제일 먼저 예의범절과 도덕과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도 엄마아빠이다. 아이는 피부로 사랑을 느끼고 가슴으로 사랑을 간직하며 엄마아빠의 그들의 생의 모델이다. 어머니란 생모이자 양모이고, 또 교모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헌신적인 존재이다. 

   "현명한 부친은 백 명의 교장보다 낫다"고 영국의 유명한 시인 조지 허버트(Goeorge Herbert)가 말한 바가 있다. 힘과 일의 상징인 아버지는 온 가정의 대들보와 같이 없어서는 안되는 거룩한 사랑의 존재이다. 현명하고 용기 있는 아버지는 자라는 아이의 성격을 올바로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막심한 경제적 책임과 교육적 책임, 그리고 가정을 세워야 할 책임은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랑할 사람이 있어야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철수가 엄마아빠의 따뜻한 사랑을 얼마나 받았을까 의문이 간다. 만약, 아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엄마아빠의 무시, 거절, 방치, 그리고 그로 인한 소외감, 우울감, 불안감, 좌절감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마음이 상함, 수치심, 분노, 고통이 마음의 저변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 것이고, 어린 자존심을 몹시 건드리는 경험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미해결 과제(offene Gestalt)가 애어린 철수의 뇌리에 기억되고 무의식 안에서 마음의 동상을 입었을 것이다. 앞으로 바야흐로 성장해야 할 철수가 또다시 비난, 배신, 거절, 퇴짜, 버림, 무시를 당하면 미해결의 옛날의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마음의 상함을 가차없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애들은 자기가 체험하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세계를 일식하게 된다고 한다. 즉, "자기는 부모가 관심을 갖고 돌보아줄 가치가 없는 버림받은 아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가정 비극의 첫 고리이다.

  오붓한 가정의 따사로움이 없고 애틋한 부모의 사랑이 결여된 철수의 외롭고 쓸쓸한 눈길이 시나브로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찌 철수의 가정뿐 이겠는가. 순진무구함과 발랄함을 잃은 수많은 철수와 같은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사회적 관심과 가족의 따사로움을 되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세상에는 돈으로 살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가정애가 아닐까. 메추리알만 한 철수의 불알도 영원히 갋으로 매길 수 없는 그 가정의 소중한 보물이 아니겠는가! 산토끼를 잡으려다 집토끼를 놓쳐버린 철수의 부모들이 너무나도 애석하다.

  어린시절 자기애를 잃고 마음에 미해결 과제(offene Gestalt)로 기억된 외로운 어린이들은 마음이 바다처럼 깊어지고 하늘처럼 넓어질 수가 없는 일이다. 사막처럼 거칠고 빙하처럼 차디찬 콘크리트 문화의 장벽에 갇힌 결손가족의 어린이들의 입지는 졻아만 지고 있고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가고 있다. 하루빨리 온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결손가족 어린이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미해결 과제를 시급히 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2017년8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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