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툰촌사》를 읽고서

[동북아신문=이동렬 기자]오랜만에 중국 요녕성 수필가의 수필을 싣는다.  수필이라기보다 독후감이라 해야 더 정확한지 모르겠다. 글을 읽고 인물을 다시 조명을 했으니 <인물 르포>의 성격도 다분하다. 산재지구에 위치한 <신흥툰촌사>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중국 조선족은 선조들이 개척한 땅을 지키면서 삶의 기반을 다져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었다. 오늘날 중국조선족 농촌이 동공화 되어  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의 글은 충분히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주고도 남음이 있다. 아래 글의 중국조선족 표기법을  그대로 둔다....<편집자>    

▲ 서정순 약력: 중국 요녕성 심양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회원. 요녕성조선족문학회 이사, 수필분과 주임. 수필집 《흰눈이 내리면 그리움도 내린다》(2010년 출간), 한중시집 《시의 소통, 경계를 넘어선 만남》(2009년 번역),《문학명작열독지도》(2012년, 공저).
추석연휴로 집에 있으며 이웃에 살고있는 고향아저씨가 빌려준 《신흥툰촌사》를 읽었다.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다. 내가 태여났고 자라난 정다운 고향에 대한 력사라 단숨에 내리읽었다. 내 삶의 뿌리가 신흥툰이였지만 신흥툰 마을의 력사에 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었다. 책을 읽고나니 신흥툰마을의 지나간 력사들이 내 머리속에 그림으로 그려지고있었다. 1937년 신흥툰에 첫삽을 박은 사람은 뉘였는지 지금에 와서 고증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허나 신흥툰이라는 마을은 명실공히 조선에서 건너온 우리 민족이 세운 마을이며 신흥툰 70여년의 력사는 조선에서 이민해온 이민민족이라 불리우는 조선족들의 력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고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단히 느끼는 곤혹이다. 선인들이 걸어왔던 지나간 세월들은 우리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살기 위해 찾아왔던 신흥툰이라는 이곳에서 시작했던 선인들의 초라한 삶은 수천 수만의 신흥툰사람들을 길러냈다. 말 그대로 “촌사”라 소박하고 정많던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다 담아내지 못했지만 마을의 굵직굵직한 흔적들 속에서 나는 얽히고 얽혔던 정다운 사람들과의 잊지 못할 추억들을 되새길수 있어 감회를 금할수 없었다. 흘러가는 강물만큼 야속한것은 흘러간 세월이라 하겠다. 다시는 돌아올수가 없길래 기억의 언저리에 남아있는 한자락 그리움을 글로써라도 담아내야 하지 않을가. 《신흥툰촌사》는 무릇 신흥툰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하많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타임머신이라 하겠다. 이 소중한 책을 기획하고 편찬한 《신흥툰촌사》 편찬자들의 현명한 결단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수 없다. 책을 읽으며 머리속에 떠올랐던 사람들의 일화를 적어보려 한다.  마을의 최고령 장수로인—신석찬할아버지 신석찬할아버지는 나의 고모할아버지의 형님이 되시는 분이니까 우리 집과는 먼 사돈쯤 될것이다. 바로 이런 관계가 어릴적의 나에게는 대단한 “빽”이라고 착각했던것 같다.  그 집의 큰아드님이 결혼을 하고난뒤 나는 아침밥만 먹고나면 그 집으로 향하군 했다. 새색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왜서인지 그때의 새색시들은 참으로 예뻤다. 말없이 다소곳한 모습도 보기가 좋았고 함박꽃처럼 환한 얼굴들도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무릇 어느 집에서 잔치를 한다고 하면 새색시를 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잔치때 나보다 바쁜 사람이 있을가. 새색시가 어디 있을가 싶어 창문 유리창에 달라붙어 코를 납작 붙이고 들여다보다가는 그것도 성차지 않아 끝내는 둘러리와 함께 포대기우에 살풋이 앉아있는 새색시가 있는 방으로까지 진입하기에 이른다. 그때 내 눈에는 새색시들이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들같이 보였다. 아마 그때 내 꿈을 이야기하라고 했으면 새색시가 되는것일거라고 선뜻 대답했을것이다.  신석찬할아버지의 집은 원래 있던 대대사무실(촌사무소)의 남쪽에 자리하고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세집을 지나고 2소대사양실을 지나면 도착할수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초가지붕이 대부분인 집들과는 달리 신석찬할아버지네가 살던 집은 기와를 얹은 기와집이였다. 말이 기와집이지 실은 지붕만 기와를 얹은 흙집이였던걸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때 어린 나의 눈에는 영화에 나오는 지주나 부농이 사는 유족한 집 같다는 인상이였다. 내 눈에 으리으리해보였기때문이다. 집안에는 귀한 미닫이문도 있었고 미닫이문을 열면 신랑신부방도 있었다. 방안은 언제나 정갈하였다. 일군들은 일하러 나갔는지 집에는 할머니 혼자 있을적이 많았다. 할머니는 말이 없는 분이셨고 내가 들어가 미닫이문을 열고 닫고 하며 놀아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촌사”를 통해 알았지만 신석찬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제2임촌장을 하셨던 분이시다. 그러던 분이 한동안 신흥툰을 떠나있다가 다시 신흥툰으로 들어온걸로 기억된다. 신흥툰으로 다시 들어올 때는 쉽사리 들어오지는 않은것 같다. 어느날 새벽 엄마가 새벽밥을 지을 때 신석찬할아버지께서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두분이 정지에서 두런두런하시더니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도장을 갖고 나갔다. 그리고는 신석찬할아버지 손에 든 종이에다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는것이였다. 후에 들을라니 마을사람들이 동의하면 받아들인다는 대대간부들의 건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긴 그때 신흥툰에서는 외지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였으니 대대에서도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고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 할아버지가 신흥툰에서는 산력사가 되여 “신흥툰촌사”를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신석찬할아버지의 로후의 알콩달콩한 생활은 “료녕조선문보”에도 여러번 보도되였었다. 일본에 가있는 손자의 사장님께 일본어로 편지를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친정에 한번씩 갈 때면 아흔이 된 고령에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올 8월말 한국에서 돌아온 신석찬할아버지의 조카로부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자전거 타고 다니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할아버지는 아마도 저 세상에 가서도 계속 공부를 하시며 부지런히 밭으로 드나들것 같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평생 쉴새없이 머리를 쓰시고 일해오셨던 분으로 기억에 남아있으니 그럴수 밖에. 할아버지의 명복을 빈다.  “낮도깨비”—리용우아버님 “새로운 영농법의 연구와 탐색에 촌민 리용우는 남다른 열성을 보이였다. 신생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그는 호조조와 초급합작사시기, 새로운 육묘법을 탐색하기 위해 가정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집안에 버치며 온갖 그릇들을 벌려놓고 벼씨를 파종하고 관찰하였기에 동네에서는 해괴망측하게 “도깨비”장난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 도깨비는 밤에 출몰하지만 리용우는 환한 대낮에 도깨비장난을 하니 “낮도깨비”라는것이였다. “낮도깨비”라는 별명과 그에 대한 이야기는 먼 후날까지 잊혀지지 않고 전해내려왔다.” “촌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촌사”를 집필하신 최태렬선생님께서 알려주셔서야 나는 리용우라는 분이 바로 우리 집 이웃(우리 집이 마을 앞켠에 살 때)에 살고계셨던 상도아버지임을 알게 되였다. 그분이 병이 나서 그렇지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것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무척 놀랐었다.  내 기억속의 리용우아버님은 중풍으로 다리를 옳게 쓰지 못하여 한쪽 손에 지팽이를 짚고 다니는 분이셨다. 뿐만아니라 말도 옳게 하지 못하셨다. 뭔가를 말하는데 우리 아이들 귀에는 “쟈스뭐쟈”로 듣겨 이름이 뭔지도 모른채 그저 “상도아버지” 혹은 “쟈스뭐쟈”하고 불렀다. 그분한테 나는 정말 해서는 안될 고약한 짓거리를 저질렀었다.  그때 어린 나의 눈에 그분은 한낱 병들고 말도 옳게 하지 못하는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으로 보였다. 어떻게 그런 고약한 버릇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나는 병나고 약한 사람을 보면 동정은커녕 오히려 놀리고 비웃군 하였다. 우리 또래 친구들 가운데는 60년대 돌림병으로 다리를 저는 친구들이 제법 된다. 그런 친구들과 말다툼이 있을 때도 나는 간혹 불편한 다리를 놀려대기도 했었다. 정말 이 글을 통해 무지하고 철없던 나를 용서해달라고 량해를 구하고싶다. 때는 내가 열살좌우, 한창 멋모르고 까불 때였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헝겁신을 씻어 말려놓고는 심심하여 앞마을로 향했다.(그때 우리 집은 이미 북단으로 이사해왔다.) 원래 내가 살던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다. 한무리 조무래기들이 리용우 그분을 따라다니며 “쟈스뭐쟈”하며 놀려대고있었다. 그분은 아이들이 그러건 말건 흥얼거리며 뒤뚱뒤뚱 걷고있었다. 사람을 곯려먹는것을 은근히 즐기는 나다. 그런데다 함께 놀 친구도 옆에 없었고 뾰족하게 놀거리도 없었다. 옆집에 살던 아저씨였기에 잠간 망설이긴 했지만 이내 나도 아이들 속에 끼여들고말았다. “쟈스뭐쟈, 쟈스뭐쟈.” 그분은 아이들이 그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였는지 아이들이 아무리 놀려대도 대꾸도 하지 않고 흥얼거리며 앞으로 걷기만 하였다. 놀려주는 사람들의 심리는 놀림당하는 사람이 반발을 해야 재미가 더해지는 법이다. 그분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우리 아이들은 더욱 돋아나 승벽내기로 목이 터져라 고아댔다. “쟈스뭐쟈” 그러고는 다 함께 깔깔거렸다.  드디여 그분도 화가 나셨다. 지팽이를 휘두르며 아이들을 향해 뭐라고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분이 우리를 때리려고 그러는줄 알고 와— 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마치 쫓겼던 파리떼들이 다시 먹이에 달려들듯 아이들은 재다시 그분의 뒤에 몰려들며 놀려댔다. 그분한테는 다른 애들보다도 이웃에 살았던 내가 자기를 놀려대는것이 더욱 화가 난듯 싶었다. 옆의 애들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더욱 기고만장해서 앞장서 놀려대니 참으로 한심했을것이다. 그분은 마을을 한바퀴 돌아 북단으로 왔다. 그 와중에 지나가던 어른한테 그러면 안된다며 쓴소리도 들었지만 그때뿐 우리 아이들은 지친 기색이 없이 계속 놀려대며 따라가고있었다.  헌데 그분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것이 아닌가. 나는 심장이 멎는것 같았다. 다행히 집에는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집안을 기웃거리다 창문밖에 널어놓은 나의 헝겁신 한짝을 들고 나오셨다. 대번에 나의 얼굴은 울상이 되였다. 헝겁신이 없으면 래일 학교 갈 때 신고 갈 신이 없기때문이다.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것은 부모님들이 오늘 나의 행실을 알고 혼을 내줄가봐서였다. 나는 그분의 뒤를 따르며 “내 신 주세요. 내 신 주세요. 왜 내 신 가져가요?”하며 빌빌 울기 시작했다. 삽시에 형국은 전변되였다. 놀려주던 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였다. 그분은 흥얼거리며 앞으로 가고 나는 그분의 뒤를 따르며 울면서 신달라고 졸라대고있었다. 함께 놀렸던 아이들은 놀란 눈빛으로 그런 나와 그분을 따라가며 구경하고있었다. 울면서 한참을 따라다녔지만 소용이 없자 나는 그만 풀이 죽어 그분을 따라다니던 짓을 그만두고말았다. 마음은 근심걱정으로 가득 찼다. 오늘 저녁 어떻게 집에 들어갈가. 엄마와 아버지는 뭐라고 할가. 늦은 저녁이 되여서야 나는 살얼음판을 건네는 심정으로 조심조심 집으로 들어왔다. 헌데 이상했다. 집안은 역시 평소와 다름이 없고 부모님의 얼굴에 노기도 없었다. 창문밖으로 나가보니 그분이 가져갔던 신 한짝이 원래 그 자리에 놓여있는것이 아닌가. 후— 안도의 숨이 나왔다. 거의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열살의 조무래기는 벌써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그때의 그 정경은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날의 일은 정말 한차례의 생생한 인생수업이였다. 친정어머니로부터 그분이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그때의 그 정경을 떠올리며 마음으로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후날 로신의 “아Q정전”을 읽으며 나는 약하고 무식하고 할일없는 사람들의 소일거리가 바로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사람을 곯리는것임을 알게 되였다. 놀거리가 없던 그때 병이 난 어른을 곯려대며 즐거움을 느꼈던 그  수치심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교훈으로 자리잡고있다.  이야기꾼—리규봉(李圭凤)선생님 사전에서 “꾼”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1) 어떤 일,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2) 직업적인 일이나 전문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러한 일이나 행위를 전문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사전의 해석대로라면 리선생님을 “이야기꾼”이라고 하면 어울리지 않는다. 신흥촌 당지부서기를 력임하셨고 후에는 신흥툰학교의 령도직을 맡았던 분을 “이야기꾼”이라니, 잘못되여도 한참 잘못되였다. 게다가 “꾼”이라고 하면 어딘가 고상하지 못하고 천한 느낌도 준다. 그런데도 나는 “이야기꾼”이라는 표현이 아니고는 리규봉선생님을 따로 표현을 못하겠다. 토속적이고 서민적인 느낌의 리선생님을 “이야기하는 선생님”이라고 표현하면 어딘지 도포를 입고 논을 가는 기분이 날것 같기때문이다.  리규봉선생님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이야기꾼이시다. 그분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감칠맛이 난다. 내가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던것은 그분이 우리들의 상식과 지리 과목을 가르쳤기때문이다. 소학교때의 상식이나 지리과목은 별로 중요한 과목은 아니다. 아마도 선생님이 부족하여 령도로 계셨던 그분이 우리들의 수업을 맡지 않았나 싶다.  고즈넉한 가을 구름 한점없이 낮게 드리운 저녁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밤 서리가 내리겠구나.”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반신반의한다. 하지만 이튿날 일어나보면 떨어진 락엽우에 어김없이 하얀 서리가 앉아있다. 서리가 내릴 징조를 알아보는것은 바로 리선생님의 지리수업덕분이다.  서리가 내리기전은 하늘이 맑고 바람이 고요하며 습도가 비교적 높다. 서리는 가을에 초겨울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등등은 교과서에 나와있는 내용들이다. 만약 그때 이런 내용들을 외우라고 했다면 지금에 와서 나는 기억하지 못했을것이다.  그때 리선생님은 이야기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바람이 잠잠하고 구름없이 저녁하늘이 낮게 드리워있으면 서리가 올 징조다. 그래서 철이는 엄마한테 오늘밤 서리가 내릴것 같으니 고추가을을 빨리 하자고 권한다. “서리는 무슨 서리! 날씨가 좋기만 한데…” 아들의 말을 믿지 않는 부모, 끈질기게 달라붙어 설득하는 아들, 끝내 철이네 집에서는 아들의 말을 듣고 밤으로 고추가을을 끝낸다. 이튿날 하얗게 내린 서리를 보며 철이엄마는 입이 귀에 걸려 아들칭찬에 입이 마를새가 없다. “아이구, 우리 아들 헛공부시키지 않았구나.” 헌데 옆집에 사는 창식이는 지리과를 잘 배우지 않아서 서리가 오는줄도 모르고 늦잠만 자다가 엄마한테 궁둥이를 얻어맞는다. “이놈의 새끼 공부하라고 학교를 보냈더니 공부는 안하고 뭘 했노? 옆집에 철이 봐라. 서리 올것을 알고 미리 알려줘 그 집에선 어제밤 고추가을을 하지 않았나. 아이구, 우리 집은 고추가 절단이 났구나. 망할 놈의 새끼.” 손짓 몸짓을 해가며 리얼하게 표현하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우리는 깊이 빠져들지 않을수 없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살아 통통 튀는 지식을 우리들 머리에 심어줬을뿐만아니라 공부를 잘하면 농사짓는데도 유리하고 부모님들한테도 으쓱한 자식이 될수 있다는 인생의 도리를 알게 했다. 그분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 학년 전체(3개반) 학생들을 모아놓고 조선전쟁(항미원조)시절의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다. 3개 반이 한 교실에 모여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앉아 들었으나 삐걱거리는 걸상소리조차 없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분의 이야기에 심취해있었기때문이다. 조선인민군이 락동강까지 밀고 내려갔을 때다. 갑자기 련합군의 인천상륙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은 퇴로가 끊기고 적들에게 포위되였다. 그때 리선생님은 조선인민군 어느 영의 지도원으로 락동강까지 내려갔댔단다. 미군의 비행기가 하늘이 까맣게 날아오고 처음으로 코큰 미국놈들을 본 순간 에크 하며 놀라 뒤걸음쳤다는 이야기, 적들을 향해 소총소사를 하다 부산 어느 곳에서 적군의 포에 맞아 자신의 다리 한짝을 묻었다는 이야기 등은 평화시대에 살고있던 어린 우리들에겐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마저 갖게 했다. 선생님의 달변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효과였다.  사모님이 부대에 있는 선생을 찾아왔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사람들의 배꼽을 잡게 했던 구수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들은 쉴참에 선생님께서 논머리에 앉아 젊은 친구들에게 해줬던 이야기들이다.  “촌사”를 보면 리선생님은 신흥툰에서 줄곧 간부사업을 해온 분이시다. 간부라고 하면 어깨에 힘부터 바짝 세우는 사람들과 비할 때 익살과 유머로 사람들을 웃기고 교육했던 리선생님이야말로 얼마나 현망한 분인지 모르겠다. 익살과 유머라는 무기로 물처럼 유연하게 사람들을 대했던 리규봉선생님, 어쩐지 “최고의 선은 물이다.”라는 로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신 리선생님은 아마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그런것은 중요한것이 아니다. 중요한것은 그분은 나한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놓은 분이라는것이다.  아버지의 절친—김구범의사 해가 노루꼬리만큼 짧은 겨울은 저녁만 먹고나면 밖은 칠칠야밤이다. 지금처럼 가로등이 있는것도 아니였으니. 그때 저녁을 먹고나면 창문 밖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서동무 있소?” 그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털모자를 들고 나가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 뒤를 따르던 엄마의 어처구니없어하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저녁만 먹으면 통과의례처럼 어김없이 찾아오던 김의사. 어느날 장난기가 동한 나는 저녁을 먹고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의사 목소리를 본따 창문을 노크하며 “서동무 있소?”하였다. 킥킥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을 막으면서. 그런데 방안에 계셨던 아버지께서 대답을 하며 털모자를 들고 나오셔서 무척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바람에 온 집안이 배를 끓어안고 웃어댔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민망해하셨지만.  그때 아버지와 함께 몰려다니며 놀던 패들이 있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내 인상에는 의사, 선생, 상점점원, 공장에 출근하는 로동자 등 어딘가 시골에서는 좀 한가한 선비들이다. 그가운데서도 아버지와 김의사는 늘쌍 콤비처럼 딱 붙어다니셨다. 중등키의 아버지였지만 몸이 왜소한 김의사와 함께 있으면 한사람은 무척 커보이고 한사람은 더욱 작아보여 마치 재담하러 다니는 사람들 같았다. 김의사네와 우리 집은 마을 앞켠에 살 때도 앞뒤집이였고 마을 뒤단으로 이사왔어도 앞뒤집 사이였다. 자식들도 같은 나이또래들이 많아 김의사네 집을 나는 제집나들듯 드나들었다. 집안일을 잘 안하기는 두분 다 매일반이여서 바가지를 끓어대는 엄마들의 잔소리를 자장가처럼 듣군 했다.  어느해 봄철 김의사네 집의 어른 아이 할것없이 밭에 모여 강냉이를 심을 때다. 김의사 부인은 호미로 구멍을 파고 김의사는 강냉이 알을 집어넣군 하였다. 아무래도 구멍을 파는 사람이 허리를 폈다 굽혔다 하며 계속 일을 하기 마련이다. 헌데 김의사는 파놓은 구멍에 강낭알을 얼른 집어넣고는 허리를 쭉 펴고 앉아 여유작작하게 “일이란 할줄 알아야 한단데, 너 엄마 봐라, 폈다 굽혔다 얼마나 힘들게 하노? 내 봐라, 요렇게 쉬여가며 해도 할일은 다 한다.”하며 강낭알을 집어넣고는 허리를 펴고 앉아있고 하여 아이들이 우스워 죽을번했다. 집안일을 안한다고 푸념을 하는 부인을 은근슬쩍 나무람하는 야유도 어딘가 숨어있어 김의사부인도 어이가 없어 따라 웃고말았다.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게 되였을 때다. 남동생은 그때 김의사가 자기 집 뜰안에서 뒤짐을 지고 먼곳을 바라보며 “한국이 뭘 볼것 있노? 손바닥만한게. 우리 따수푸(大淑堡)보다도 작은 곳이.”하며 허풍을 떨었다며 웃어댔다. 한국가기가 쉽지 않은 그때 가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김의사는 한국을 가게 된 기쁨과 희열을 그런 능청으로 나타낸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어쨌든 김의사하면 나는 재미있는 분이라는 인상이다.  한국 KBS “가요무대”를 보다가 “산팔자 물팔자”라는 노래를 들으며 어쩐지 이 노래를 아버지와 김의사도 부른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불렀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이 노래가사가 이분들의 성정을 너무나 잘 반영한듯 싶어 여기에 옮겨본다. “산이라면 넘어주마 강이라면 건너주마/ 화류계 가는 길은 산길이냐 물길이냐/ 흑싸리 한장에도 담지 못할 풋사랑을/ 인심이나 쓰다가자 소원이나 풀어주자.” 어쩌면 두분은 남들의 소원을 들어주러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 같다. 아버지는 역지사지의 달인자셨고 김의사는 능청과 유머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셨다. 이분들에게서 나는 따뜻한 감성이 흘러넘치는 휴머니스트의 모습을 보군 한다. 이런 김의사가 “촌사”에 버젓이 한자리를 차지하고있다. “50년대초 내몽골위생학교를 졸업한 김구범이 신흥툰진료소 의사로 왔었지만 몇해 지나지 않아 그마저 새로 설립한 대숙향위생원으로 전근하여 신흥툰은 또 의사가 없는 마을로 변했다.” “문화혁명시기 다시 촌으로 돌아온 김구범은 농촌의사의 배양목적으로 추천받아 심양위생학교에 가 2년간 학습을 거치고 “맨발의사”자격을 따서 돌아온 배동호와 함께 신흥툰위생소를 운영하였다. 현재 의사로 일하고있는 정창수는 그 시기 의사보조로 위생소에 들어가 김구범의 가르침을 받으며 의술을 익히였었다.”  그리운 아버지를 본듯 무척 반가운 대목이였다. 나의 계몽선생님들 토끼띠 꼬리를 달고 태여난 나는 호구책에 양력으로 올려지는 바람에 토끼띠들이 학교 붙을 때 함께 붙지 못했다. 반년이 지난후 학교에서는 우리 학년을 3개 반으로 분반하는데 학생수가 조금 모자라다 싶어서 생일이 늦은 애들을 더 받아들였다. 나는 그때 아래 웃집에 살고있는 영화, 호철이와 함께 2반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바로 방순복선생님이시다.  영화는 아버지가 학교의 선생님이여서 100까지 수자를 다 쓸수 있었지만 나와 호철이는 집에서 배워주지 않아 정말로 낫놓고 기억자도 몰랐다. 지어는 연필 잡는 법도 몰랐다. 이미 반년이나 배워 자모와 수자를 다 뗀 아이들을 따라잡자면 과외복과를 할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과외복과와 지금의 과외복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돈을 주고 자기가 선생을 찾아 해야 하지만 그때는 선생님들이 알아서 해주셨다. 부모님들도 아이를 학교에만 보내놓으면 그만이였다.  아이들이 하학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 셋은 교실에 남아 방순복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했다. 손재주가 별로 없는 나는 연필쥐는 법을 선생님께서 가르쳐줘도 주먹쥔채로 연필을 쥐고 쓰기가 일쑤였다. 오죽 답답했으면 선생님께서 엄마에게 어째 연필쥐는것도 안가르쳐줬냐고 했다고 한다.  처음 수자를 익힐 때였다. “1”자는 내리금만 그으면 되니까 쉽게 써졌는데 “2”자는 좀 애먹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운 “2”자가 되군 했다. 제일 어려운 고비는 “3”자였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손을 잡고 한획 한획 일일이 배워주셨다. 우리들도 도정신해서 열심히 따라썼다. 헌데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3”자가 되지 않았다. 올챙이 꼬리처럼 되는가 하면 오리모양이 되기도 했다. 너무 힘을 주어 연필을 부러뜨리지 않으면 종이에 구멍을 내군 하였다. 조그만 얼굴들도 빨갛게 상기되여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놈의 “3”자는 좀처럼 잘 써지지 않았다. 영화는 “1”부터 “100”까지 다 쓸수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나와 호철이는 남아서 계속 “3”자관을 넘겨야 했다. 조바심도 나고 그러니까 꼼수도 생겼다. 선생님이 호철이쪽에 돌아섰을 때 난 “3” 웃부분을 쓰고 책을 돌려서 나머지 아래부분을 썼다. 선생님이 돌아보시더니 참 잘 썼다고 칭찬을 하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렇게라도 “3”자관을 넘기고 나니 다른 수자들은 일사천리로 잘 써졌다.  수자관은 넘겼으나 문자관이 문제다. 어느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겠다고 징징대는 날 엄마는 두들겨 깨워 세수를 하게 했다. 잠을 더 못자게 한다고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있는 그때 선생님께서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집에 복과를 해주러 오신것이다. 엄마께서 민망하여 어쩔바를 몰라하며 선생님을 집안으로 모셨다. 그날 나는 내복바람으로 앉아 선생님한테 자음과 모음을 배웠다. 만일 그때 어느 유명 화가가 그 자리에 있어 그때의 그 정경을 화폭속에 담았다면 사람을 감동시키는 명화가 되지 않았을가.  그때 선생님한테는 개구쟁이 남자아이 셋이나 있었다. 가정살림하랴 자식 키우랴 얼마나 바쁘랴만 일주일에 하루밖에 쉬지 않는 휴일을 리용하여 학생의 집까지 손수 찾아오셔서 복과를 해주셨다.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이 있었기에 늦게 스타트를 뗀 나지만 인차 다른 애들을 따라갈수 있었다.  3학년에 올라와서는 김순옥선생님이 나의 담임을 맡으셨다. 겉으로 엄격해보이는 선생님이지만 그분 역시 학생들을 제 자식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다. 우리 반 여자애들의 머리카락은 그 선생님이 도맡아놓고 깎아주셨다. 그 누가 자기 집 아이 머리를 깎아달라고 부탁을 한 학부모들도 없다. 철부지들이라 고맙다고 인사도 할줄 모른다. 너무나 순박한 학부모들이라 사탕 한알 사다줄줄도 모른다. 그런데도 하학후면 사무실에서 혹은 교실에서 여자애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여 머리를 깎아주셨다. 쓰다 달다 한마디 말씀이 없이.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리발도구는 자신이 손수 마련한것이였다. 지금 돌이키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런 분이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니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다.  신의식선생님, 신흥중학이 세워졌을 때 우리를 맡으셨던 중학반 담임선생님이시다. 우리 집과는 사돈쯤 되는 사이다. 대부분 선생님들이 정통적으로 교육하는데 반하여 그 선생님의 말씀은 소리없이 던지는 시한폭탄이였다. 그만큼 숨김없이 진실을 말하군 하였다. 옛날에 지주들이 왜 잘 살았나 하면 머리 잘 쓰고 부지런해서 잘 살았다. 옛날 못살던 사람들 가운데는 노름을 놀거나 살림을 잘하지 못해서 못사는 사람도 많았다는것이다. 탈곡을 하여 쌀을 팔아서는 술이나 흥청 마시고 노름이나 놀다가 돈을 거덜내다보니 빚을 지어 농사를 짓고 그 빚이 새끼를 쳐서 못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면서 사람은 생활습관이 좋아야 하고 머리를 쓸줄 알아야 하며 부지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계급투쟁이 갓 끝나서 아직까지 사람들의 머리속에 남아있는 좌적사상이 청산되지 않았을 때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구사회에서 못사는 사람들은 지주 자본가의 착취와 압박을 받아서 못산다고 여겼던 터라 신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어마지두 놀랐다. 그러면서도 막혀있던 사유의 곬이 틔워지는것 같았다. 원래는 그런 영문이였구나. 교육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사회의 유용한 인간으로 키우는 사업 혹은 사상, 도덕, 품성 면에서 깨닫도록 가르치거나 일깨워주는것이다. 나는 이분들이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어떤 영예를 받았는지 모른다. 허나 명성과 영예가 결코 교육자의 인격을 절대적으로 대변하는것은 아니다라는것이다. 진정한 교육자는 소금 같은 존재로 아이들의 마음속에 녹아있는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의 계몽선생님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자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본다.  사람은 절대 절로 크지 않는다. 나무도 물과 해빛과 바람이 있어야 클수 있듯이 인간도 선생이라는 해빛과 물과 바람이 있었기에 사람으로 되여가지 않을가. 배워준만큼 크지 못한 제자가 되여있는게 미안할뿐이다. 고마운 선생님들의 건강을 빈다.  신흥툰의 아나운서—계명선생님 신흥툰의 문화인을 꼽으라면 나는 계명선생님을 꼽고싶다. 그분은 줄곧 문화와 인연을 맺고 신흥툰에서 살아오신 분이다. 신흥툰의 아나운서라고 하면 신흥툰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것이다. 신흥툰에서 집집마다 확성기를 달아주고 신흥툰방송을 시작할수 있었던것은 계명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음악소리와 함께 ‘여기는 신흥대대 방송소입니다. 사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는 말로 시작되는 방송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촌사》에서 쓴것처럼 확실히 그렇다. 신흥툰에 방송이 있다는것은 신흥툰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이였다. 설이 되면 방송에서 흘러나오던 도라지타령, 양산도타령 등 민족정서가 다분한 노래들은 신흥툰 조선족동네의 민족특색을 물씬 풍기게 했다. 그분의 목소리는 마치 중앙인민방송국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같았다. “촌사”를 통해서 알게 되였지만 그분은 방송의 질을 높히기 위해 끊임없이 화술련습을 하였다고 한다.  그분은 신흥툰의 방송후비군을 배양한답시고 방송써클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때 나도 그속에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방송이라면 아주 높고도 고상한것으로 보았기에 시골티가 줄줄 흐르면서도 한껏 멋을 내고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써클은 몇번에 그치고말았지만 계명선생님이 나한테 준 인상은 뭔가를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였다.   그분은 글솜씨가 좋아서 “료녕조선문보” 등 신문에 드문드문 통신을 써서 발표하기도 한것 같다. 나의 고모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고 배상금문제로 문서를 작성해야 했을 때도 계명선생의 손을 빌렸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신문사의 기자 한분이 신흥툰에 계명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재능있는 사람이 아깝게 촌에 박혀있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다. 기회가 닿지 않아 더 큰 무대로 나가지 못했지만 신흥툰이라는 무대에서 그는 자신만이 할수 있는 일을 성심껏 하였다.  “안다는것은 좋아하는것만 못하고 좋아하는것은 즐기는것만 못하다”는 공자의 말도 있듯이 계명선생은 자기가 맡은 일들을 즐기면서 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을 어떻게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방송이면 방송, 신문배달이면 신문배달 멋지게 해낼수 있었을가. 양복에 흰장갑을 끼고 신문을 배달하던 그분의 모습이 인상깊다. 이런 계명선생에 대해 “촌사”는 이렇게 쓰고있다.  “계명은 자신의 불리한 조건도 이겨내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임성있게 각종 신문, 잡지와 우편물을 사원가정에 배달하였다. 그가 해마다 나르는 우편물의 수량도 어마어마하였다. 480여 가구가 주문한 신문이 최고로 많았을 때는 1432부에 달하였고 잡지는 182종에 달하였다.”  “1981년 1월부터 2009년까지 장장 29년의 세월 하루도 빠짐없이 마을을 돌며 새로운 소식을 전하고 마을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며 신흥툰 문화생활에 기여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오래오래 기억될것이다.”  문화라는 일은 눈에 보이는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일을 하고있을 당시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문화사업의 가치과 진가를 더욱 알게 되는것이다. 계명선생에 대한 “촌사”의 평가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지 않을가 싶다. 그때 시절 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신흥툰사람이 아닌것처럼 계명선생은 신흥툰 문화인이라는 딱지로 그때 신흥툰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을것이다.  “성축은 쉬여도 차는 쉬지 않게 하자” “성축은 쉬여도 차는 쉬지 않게 하자” 이 말의 의미인즉 성축은 쉬더라도 사람은 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때가 신흥툰 력사에 있었다. 말은 힘들다고 마구간에 매여놓고 하루 일을 마친 피곤한 사원들을 말 대신 마차를 끌게 하였다.  어느해 겨울철 마차에 끈들을 매고 남녀사원들이 엇갈아 서서 마차를 끌던 정경을 잊을수가 없다. 청장년 장골들은 마차 안쪽에 서고 힘이 약한 아녀자들은 힘이 좀 덜 드는 바깥쪽에 서서 마차를 끌었다. 한번은 길을 걷고있는데 마중켠에서 사람들이 끄는 차가 다가오고있었다. 마스크라면 답답해서 잘 끼지 않는 엄마가 추위를 막으려고 그랬던지 마스크를 코아래 입까지만 걸치고 마차를 끌고있었는데 나를 보고 그 추위속에서도 웃어주고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엄마의 그런 모습을 힐끔힐끔 보며 우습다고 손으로 입을 막아댔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좀 창피하기도 했고 안스럽기도 했다. 헌데 그 차가 내 옆까지 와서는 사람들이 하나둘셋 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들뛰기 시작하는것이였다. 한 50메터쯤 뛰다가 차가 불현듯 멈추더니 마차를 끄는 사람들 속에서 하하하— 하며 일장 폭소가 터져나왔다. 지금 돌이키면 참말로 렬악한 환경속에서 하는 고된 일이였지만 어쩐지 그때 사람들은 참으로 락관적이였던것 같다. 말 대신 사람들이 마차를 끄는 신흥툰의 그 전통은 1969년 토양의 비옥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기원된것임을 “촌사”를 통해 알게 되였다.   “소가툰의 림호바닥에 깔려있는 개흙을 발견하고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실어나르게 되였다. 시커멓게 썪어있는 심양제2종이공장의 페수침전물이 좋은 거름이 되겠다고 착각한것이다. 1969년 년말부터 각 생산대의 소차와 마차가 모두 동원되여 매일같이 분주히 개흙을 실어날랐는데 다른 대대에서도 노다지가 생기기라도 한듯 우르르 몰려와 실어나르자 개흙을 한차라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성축은 쉬여도 차는 쉬지 않게 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하루 일을 마친 사원들을 마차 끄는 밤작업에 동원하였다. 개흙을 실어나르는 로동은 ‘혁명적명절을 쇠자!’는 명분으로 하여 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였다. 수많은 인력을 랑비하면서도 림호의 개흙에 알칼리성분이 많이 포함되여 있어 작물생장에 불리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있었다. 그후 과학적인 분석에 근거한 관계부문의 설득이 있어서야 무익한 로동은 끝이 났다.”살아가면서 우리는 부단한 실수와 오유를 반복한다. 애초의 취지는 좋지만 무익한것으로 끝을 맺는 경우도 허다하다. 세상에 성공만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실수는 실천하는 자의 권리이다. 관건은 일을 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더욱 편안해지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을 받으려면 우선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성축이 힘들다고 사람들더러 차를 끌게 했던 처사는 좌적사상이 성행했던 시기 뭔가를 잘해보려는 자니친 욕망이 부른 결과일것이다. 참으로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험한 로동속에서도 사람들은 더불어 하는 즐거움을 느꼈고 세월이 흘러서도 그때 그 시절이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으니 지나간 모든것은 그리움으로 남아있다는 뿌쉬낀의 시가 진정 철리이긴 철리인가부다.  파아란 하늘과 노오란 유채밭,  파아란 하늘아래 노오란 유채밭이 펼쳐져있고 유채밭 옆으로 난 흙길을 따라 나는 하염없이 뛰여가고있다. 마치 가고 가고 또 가면 천국으로 갈수 있을것 같이. 언젠가 병실에서 쓰러졌다가 깨여날 때 꿈처럼 머리속에 떠오른 장면이다. 나는 그때 내가 천국으로 가고있었던것은 아니였을가.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갈수 있지 않을가. 만약 천국이 있다면 바로 파아란 하늘과 노오란 유채밭이 펼쳐진 곳일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  파아란 하늘과 노오란 유채밭은 내가 어릴 때 고향에서 봤던 풍경이다. “1975년 신흥대대에서는 봄에 유채를 심고 유채를 수확한후 모를 옮겨 심는 이모작농법을 실험하기도 하였다. 북방지역 농업에서의 대담한 실험이였다. 유채씨로 기름을 짜서 부족한 식용유를 보충하고 유채줄기 아래부분은 써래질할 때 땅속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려 시도한 일이지만 유채기름이 콩기름보다는 식감이 떨어지는데다 대규모재배가 불가능했고 록비의 효과도 뚜렷하지 않았기에 이듬해부터는 보급되지 않았다.”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그 이듬해 아름다운 유채꽃을 손꼽아 기다렸다. 분명 마을 남쪽 길 앞으로 노오란 유채밭이 펼쳐졌었는데 올해는 왜 없을가. 어디 다른 곳에 심었나 싶어 논밭을 기웃거렸다. 참다못해 엄마한테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유채기름은 맛이 없어 이제는 심지 않는다.”는거였다. 그때 어린 나에게 유채기름이 맛이 있는가 없는가는 크게 관심이 되지 않았다. 안타까운것은 아름다운 유채꽃을 더는 볼수 없다는것이였다. 한해밖에 심지 않았던 유채였지만 어린 소녀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펼쳐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는 사람들의 리성을 수요하지만 리성만의 생활만으로는 사람들은 행복해질수가 없다. 인간들의 행복지수는 리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표현이 되니까. 시골의 전원풍경은 알게 모르게 시골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한없는 랑만과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그런 전원적인 정서들이 바로 시골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겐 살이 되고 피가 되는것이다. 새벽이슬을 맞아 촉촉히 젖어있는 돌담우의 호박꽃들,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하얗게 피여있는 박꽃들, 새벽이면 처마밑에 얼기설기 쳐놓았던 거미줄들, 락조가 물든 황혼이면 하늘이 낮다하게 날아다니던 잠자리떼들, 노오랗게 익은 벼들사이로 제 세상인듯 날아다니던 메뚜기들, 눈내린뒤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고드름들, 신흥툰이 나에게 준 전원적인 풍경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뜰안에 피여나던 꽃들과 터밭에 자라던 싱싱한 야채들과 알을 낳고 꼬꼬댁하던 암탉들과 배고프다고 꽥꽥 소리지르던 돼지들과 아궁이에서 밀려나오던 연기에 콜록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과 메주콩을 얼궈서 먹던 기막힌 그 맛과 그리고 그리고 … 한낱 벌방 시골인 신흥툰은 자연히 산수가 어우러진 풍광이 있는것도 아니고 고색창연한 명승고적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 그 어느 명승지보다도 내 눈에 더 아름답게 보이는것은 그곳이 바로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정다운 고향이기때문이다.  김소월의 “고향”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짐승은 모르나니 고향이나마/ 사람은 못잊는것 고향입니다/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하던것/ 잠들면 어느새 고향입니다//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아 꿈에서도 항상 고향입니다//  …… 고향이 마음속에 있습니까/ 마음속에 고향도 있습니다/ 제 넋이 고향에 있습니까/ 고향에도 제넋이 있습니다” 그렇다. 내 꿈의 원천이 되여준 잊지 못할 고향—신흥툰, 그곳의 풍광과 그곳에 살고있던 정다운 사람들은 영영 마르지 않는 강이 되여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갈것이다.  2013. 9.28  서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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