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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춘-하면 연변사람들은 대부분 “문화행정 영도 출신”으로 알고 있다. 좋게 말하면 민족간부이고 민간의 말을 따르면 “관료”출신이다. 하기에 이 글을 쓰기 전에 먼저 그의 위치와 자리(定位)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금도 문화행정의 시각에서 보면 채영춘의 이름 앞에는 전(前)국장, 전(前)부부장이란 행정직무가 따라붙는다. 이런 칭호로 미루어볼 때 채영춘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철두철미한 “관료”출신이지만 문학계에서 볼 때 채영춘은 먼저 작가이고 그다음 민족문화행정령도 출신이다. 어찌 보면 기름에 물을 섞듯 애매한 통일체 같지만 내역을 알고보면 채영춘은 각자의 배역에 충실했고 양자 사이를 유연하게 줄타기하면서 두 가지 배역을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채영춘의 사업과 직무를 두루 섭렵해보면 선후로 연변TV방송국, 신문출판국, 선전부 같은 이데올로기를 선도하는 쟁쟁한 문화1번지에서 사업한 “관료”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실 역사적으로 보면 관료란 좋은 칭호였고 좋은 이미지였지만 해방 후 중국식 “관료행정”, “관료주의”, “봉건관료” 같은 신조명칭들이 출시되면서 “관료”에 대해 이미지가 퇴색한 것뿐이다. 현재 채영춘은 중국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하고 이미 저서 내 책을 펴낸 수필가이기도 하다.  채영춘은 1951년 3월 12일 연길 출생으로 소학교로부터 줄곧 그와 한 학급이었던 김관웅(현 연변대학 교수)과 같이 중대위원으로 공부를 잘했다. 그 후 아버지가 우파로 몰리면서 우파아들이란 낙인이 찍혀 주류사회의 편재를 거부당하는 불평등을 겪어야만 했던 채영춘의 전도는 암울했다. 이 시기 채영춘은 초중도 마치지 못하고 하향지식청년 대열에 합세하여 농촌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공부를 잘한 밑천으로 연길로 돌아온 후 연변대학 조문학부(통신학부)를 무난하게 졸업하고 중문학부까지 마쳤다. 졸업한 후 연변주당위 기관지인 《지부생활》잡지사 총편집,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국장, 주신문출판국 국장, 주당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공직생활을 이어왔으며 퇴직한 후 현재에도 길림성조선문 신문, 잡지 심열위원, 《연변일보》 특약론설위원, 연변인민출판사 선제전문가위원, 연변조간신문사 고문 등 언론문화령역활동을 왕성하게 하고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래일도 연은 하늘에서 날것이다》, 《샘이 깊은 물》, 《세월의 정(한어문)》, 《내일은 오늘에서 모양 짓는다》 등 네 책을 계획도서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문학창작을 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주관하는 “진달래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연변 《청년생활》 “화신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수상경력도 만만치 않다.  2 필자가 채영춘을 알게 되는 무렵은 그가 신문출판국 국장으로 재직하던 지난세기 90년대 말이다. 당시 필자는 도문시문련에서 사업했는데 행정벌금 건으로 그를 찾았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낯을 익혔다. 그를 알기전에 필자는 연변TV방송국 국장으로 사업했던 그의 성함을 익히 들어왔고 그를 알기전의 인상은 “깔 맵겠구나”라는 추상적인 편견이 고작이었다. 우리들은 흔히 위치가 있고 높은 자리에 앉은 간부들에게 선입견이 있는데 필자의 선입견도 그런 맥락 이였다. 당시 필자는 출판업에 대한 상식이 숙맥인데도 도문에서 담이 크게도 오락과 취미성격이 짙은 《두만강》이란 내부간행물을 편집, 공개 발행했다. 필자가 편집과 디자인을 맡고 도문시의 번역가들을 동원하여 중국에서 출판하는 각종 간행물에서 자극적인 기사, 오락과 취미선 기사만 선재, 번역해서 2기까지 출판했는데 출판부수가 꽤 많았다. 하지만 불법경영으로 출판국에 호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위법출판발행으로 그 당시의 돈으로 2만원의 행정벌금처분을 받게 되였다. 월급이 고작 500여원밖에 안되던 그 시절 2만원 벌금은 천문수자였다. 구원투수를 찾다가 채영춘국장을 생각해냈다. 선입견이 있어도 그를 찾아가는 길밖에 다른 길은 더 없었다. 사정을 여쭈었더니 “작가가 글을 안 쓰고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판다”는 핀잔을 들었다. 채영춘은 그 당시에 나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를 핀잔했지만 그의 기색은 감당하기 어려운 벌금을 고집할 것 같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필자의 언어는 시골 식으로 순화를 몰랐다. “채국장님, 내 aa 빼서 팔아도 그 벌금 돈이 안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채영춘국장은 껄껄 웃으면서 다시는 그런 일에 정력을 팔지 말라고,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는 그 일을 좋게 무마해주었다. 그 일을 겪으면서 필자는 채영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졌다. 그 후 선전부 문화통괄 부부장으로 사업하면서도 필자가 연변일보사 문화부 주임으로 발령받는 일에 그가 나서기도 했고 작가협회로 전근되는 과정에서 인사획책에 한몫하기도 했다. 필자가 《연변일보》 문화부에 발령받은 후 민족문화 관련 보도기획을 했는데 취재비용 같은 경비사정으로 번번이 채영춘부장을 찾아가군 했고 그때마다 한마디 싫은 소리 없이 당장에서 재정국과 연락을 해서 경비를 해결해주군 했다. 그의 지지로 《연변일보》 문화부는 “중국조선족민속문화계렬”기획과 “우리 민족의 전통과 뿌리를 찾아서”란 굵직한 계렬 보도를 추진했다. 그런 인연이라 필자가 작가협회로 전근된 후 한여름이면 낚시하려 함께 다니기도 했고 가서도 점심이면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는 문학담론을 하군 했다. 그는 술, 맥주를 가리는 게 없고 그의 말대로 닥치는 대로 마셨고 억척으로 마시군. 했다. 술장소에 대한 그의 선호도도 필자와 같았다. 시골 출신인 필자는 순두부집, 작은 선술 집이였고 알짜 연길시내 출신인 채영춘부장만은 “맥주는 그래도 명태를 찢는 재미지” 하면서 명태집을 찾곤 했다. 그런 술집으로 가서 하는 대화가 문학담론이거나 집체호 시절 사원(현재의 촌민)들과 어울려서 김을 매던 이야기, 달구지를 몰던 이야기, 산에 가서 땔감을 하던 시골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집체호 출신이였으니깐.   3 모르긴 해도 채영춘의 혈액형은 꼭 B형일것이다. 그는 혈액형이 제시하는 대로 성격이 급하고 많은 경우 직설적이다. 속으로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겉으로도 아니다고 말한다. 급수가 높은 행정간부 출신에게서 보기 드문 성격이다. 하기에 현재 그가 쓰는 칼럼들은 대단히 날카롭고 직설적이다. 그의 칼럼을 읽는 것은 일종의 향수다. 글을 쓰는 외에 그의 생활취미는 다양하다. 그는 젊은 시절 아마츄어 축구선수로 뽈판을 주름잡았고 퇴직직전까지 청년같이 날파람 있다는 평을 받을 만치 운동장을 편력했다. 낚시, 등산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데 마작, 트럼프 같은 놀음을 제외한 모든 생활취미를 갖고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특히 채영춘은 그림 그리기에 취미가 있는데 유화창작은 취미라고 할 수 없이 전문가를 뺨 칠 수준이다. 그의 집에 가보면 바람벽에 그가 그린 유화들이 번듯하게 걸려있기도 하다. 화가의 정규적인 교육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그의 서화작품들은 취미로 그렸다기보다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기에 그의 수필작품들은 서화처럼 원근법에 능숙하고 풍격에서 서화의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같은 특색으로 완성된다. 화가는 예술적 감각과 손 감각을 기초로 한다면 문학작품은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한다. 하기에 화가들에게는 문학작품, 영화 같은 다양한 문화예술쟝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채영춘은 되려 문학작품창작을 위하여 화가의 예술적인 감각을 문학에 접목시켰다고 보아야 하고 잘 소화해내고있다. 그는 연변미술가협회 명예주석이기도 했었다. 필자가 그의 작품을 접해보기에는 문화부 주임 시절이다. 당시 필자는 “해란강”문학부간의 편집을 맡았는데 어느 날인가는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되였다. 채부장이 수필을 쓴다?… 반신반의하면서 다 읽고 난 후 필자는 채영춘에게 전화까지 걸었다. “황소 영탄곡”이라고 이른 이 작품은 집체호 시절을 회고한 작품으로 필자가 채영춘을 다시 보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황소를 상징형상으로 세우고 그 뒤에 파묻힌 집체호 잔상들을 핍진하게 파헤쳤는데 이 글이 나간 후 사회반향이 대단히 좋았다. 그래서 필자는 이 작품을 해란강문학상에 추천하려고 했는데 당시 채영춘이 선전부 부부장이란 직위에 있었고 황차 그 자신도 이를 거절했다. 그 후 필자는 그를 연변은 물론 전 조선족 당정간부 출신들 속에서 문학을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쓰는 사람이라고 나름으로 평했다. 현재 채영춘은 칼럼 창작에서 성숙도를 완성하고있다.  채영춘의 사업경력을 보면 《지부생활》잡지사 총편집, 텔레비죤방송국 국장, 신문출판국 국장, 주당위선전부 부부장까지 줄곧 령도 직위여서 자칫하면 전문적인 행정에 빠져들면서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맹랑한 결과를 자초하기 십상이지만 채영춘은 용케도 이 시기에 문학적인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놓았다는게 정설이다. 채영춘의 문단 데뷔는 개체적인 작품보다 작품집 《래일도 연은 하늘에서 날것이다》를 출판하는 그 시각이라고 봐야 한다. 그 후로부터 그의 문학창작은 맹렬하게 진행되었다. 행정령도 출신의 문학창작은 연변문단에 참신한 풍경선을 그렸다는 평을 받기에 족했다. 짧은 시간 안에 채영춘은 계획도서로 《샘이 깊은 물》, 한문 수필집 《세월의 정(岁月情)》을 출판했고 그 뒤를 이어 《래일은 오늘에서 모양 짓는다》 수필집을 출판했다. 이런 문학실질과 실천으로 조선족문단에서 채영춘만의 문학적인 내연을 다지기에 족했다.   4 채영춘에게 있어서 문학적인 업적이 첫째라면 둘째는 민족문화간부로서의 업적이다. 그는 재직 시에 조선어 사용과 문자사용에 가장 열성을 보이고 애용한 민족간부이다. 그는 주내에서 문화관련 회의를 주체할 때마다 조선어를 제 1언어로 했고 퇴직 후에도 관련 기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어 사용에 대한 건설적인 제안을 했다. 채영춘에게는 이것이 가장 복귀한 점이다. 특히 1995년 연변TV방송국 국장 시절부터 연변대학 겸직교수로 초빙되어 언론관련 특강을 했는데 2008년까지 13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의 강의를 받은 많은 학생들이 현재 언론관련 업종에서 중진으로 뛰고 있다. 현재도 채영춘은 부정기로 대학가와 언론기관에 나가서 언론관련 특강을 지속하고있다.  채영춘이 선전부에서 연변문학 관련 사업을 통섭하는 동안 조선족문단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과도하는 중요한 시기에 처했고 이 시기가 중국조선족문학사의 “문예부흥기”이기도 했다. 채영춘은 전반 문단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문단발전을 제약하는 문제점들을 실제적으로 분석한 후 정품창작을 고무하였다. 이 시기 연변문단은 그의 노력으로 무려 8년 동안 휴화산으로 남아있던 자치주 “진달래문학상”을 활화산으로 복원시켰고 “진달래문학상”은 그 후 정기적으로 진행되면서 현재까지 문학창작을 고무 추동하는 일익을 잘 감당하고있다. 이 시기 작가대오도 날 따라 장대해졌으며 다양한 장르의 문학작품이 창작 되였다. 노일대 작가들로 우리 문학의 기틀이 잡혀지고 중청년작가들이 우리 문단의 주류로 자리잡았으며 신진들도 대거 문단에 진출하였다. 소설, 시, 아동문학, 평론, 번역 등 기성쟝르와 함께 수필문학이 흥기했다. 채영춘에게는 작가(수필가), 민족간부라는 두 가지 상징 아이콘이 있다. 하지만 이중에서 작가가 가장 첫 번째 아이콘이다. 필자가 채영춘을 쓰게 된 동기다. 그의 집에서 가장 자랑찬 공간이 바로 즐비한 장서로 장식된 서재다. 이 공간에서 채영춘은 오늘도 문학창작에 정진하고있다. 퇴직 후 채영춘은 아쉽게도 술을 삼가하고있다. 그는 그렇게 즐기던 술을 절제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낚시는 여전하게 즐기신다.  채부장, 올 여름에도 우리 슬슬 낚시하러 갑시다. 그리고 점심에는 산새들이 훨훨 날아다니는 연변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그늘진 곳에 비닐 막을 펴놓고 퍼더버리고 앉아서 진 초록색으로 물든 연변의 산천을 바라보면서 문학을, 인간을 지절거려봅시다그려!

 

출처: 장백산잡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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