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김범송 박사는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재한중국동포사회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학술회의에 자주 초청을 받아 특강도 하고, 또 본지를 비롯해 여러 신문에 수많은 칼럼을 발표하기도 했다. 더욱이 수필 창작도 열심히 하면서 문단에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몇 년전에 벌써 '동포문학' 3호 수필부문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칼럼과 수필들은 거의가 조선족 사회에 대한 우려와 관심,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편집자>      

 

김범송, 사회학 박사, 흑룡강신문 논설위원, 재외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본문은 얼마 전에 있은 나의 병원생활을 기록한 ‘입원일지(日誌)’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열흘 간의 입원생활을 통해 나는 생로병사와 ‘죽음’에 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이 또한 졸문에 거창한 제목이 붙여진 이유이다. 

   지난 3월 한주 간(3.18~23), 한국 출장에서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며 최악으로 치닫은 나의 몸 컨디션이 입원의 발단이 됐다. 피곤이 누적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의사인 아내와 의논하고 그동안 차일피일 미뤄왔던 ‘입원’을 마침내 결정했다. 결국 지천명(知天命)을 지난 내가 ‘계획이 없었던’ 병원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반백이 넘은 나이에 ‘첫 입원’이다. 어렸을 때 편도선 수술로 며칠 간 입원한 적이 있고,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반나절 병원에서 CT(컴퓨터 단층촬영) 검사를 한 것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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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덟시, 나는 아내가 출근하는 대련대학 중산(中山)병원에 도착했다. 번잡한 입원수속을 마치고, 카운터에서 보증금 지불시 문제가 생겼다. 카운터 직원의 말에 따르면, 나의 사회보험료가 ‘사용 불가’라는 것이다. ‘사회보험료’를 이용하지 못하면, 모든 치료비를 자부담해야 한다. 미상불 호사다마다. 그래서 입원을 ‘포기’하고 정부 관련 부서를 찾아가 미납된 보험료를 지불했는데, 담당직원은 일주일 후 ‘보험료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침 한국에서 얻은 ‘치통(齒痛)’이 도져 심신이 불편했던 나는 ‘입원 연기’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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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여덟시 반, 1층 카운터에서 보증금을 지급하고 번잡한 수속을 마쳤다. 마음이 홀가분해졌으나 자유가 제한된 ‘병원환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내심 걱정이 앞섰다. 평소 의사들의 오만한 태도와 간호사들의 ‘불량 서비스’를 목격하면서 병원 선입견이 컸던 나에게 ‘병원 트라우마’가 생겼던 것 같다. 나는 아내와 함께 담당의사를 찾아가 인사를 한 후, 3충 카운터에서 입원신청을 했다. 나에게 배정된 것은 이비인후과(耳鼻咽喉科) 3층 13호실 2호침대였다. 입원실은 크고 깨끗한 3인실이었는데, 실내에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이 설치되고 온수가 공급되어 생각보다 편리했다. 한편 불안감은 쉽사리 가셔지지 않았고, 수술 공포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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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담당간호사는 30대 초반의 베테랑 간호사였다. 그녀는 병원에서 오래 근무한 아내를 알아보고 나에게 살갑게 대했다. 또한 스스럼없이 나를 ‘아저씨(叔)’라고 부르며 입원시 주의사항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처음엔 ‘아저씨’라는 호칭이 썩 내키지 않았으나, 듣다 보니 친근감을 느꼈다. 그녀의 친절한 태도에서, 평소 쌓아진 간호사에 대한 ‘불신의 벽’이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간호사들의 안내를 받아 수술 전에 반드시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 CT 등 건강검진을 무난하게 마쳤다.  

입원하면, 필히 간호사와 ‘친근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의사와 병원규정을 어김없이 집행하는 간호사들의 눈에 나면 모든 것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담당간호사는 환자의 ‘직계상사’이다. 입원 기간, 간호사와 친분이 유지되면 마음이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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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CT 등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담당간호사는 나에게 내일 오전에 주임의사가 수술을 한다고 통보했다. 또 밤 12시 이후에 음식을 먹으면 안 되며, 물도 마시지 말라고 당부했다. 수술 전문가인 주임의사는 나와 일면지분이 있었다. 1년 전 내가 계절성 비염과 수면 장애로 아내와 함께 찾아 갔을 때, 그는 나에 수술을 권고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피일차일 입원을 미뤄왔다.  

점심에 나는 아내를 통해 주임의사와 담담의사에게 ‘고급술’ 2병을 선물했다. 처음에 아내는 반대했으나, 결국 나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장기간 외자기업에서 대외협력 업무를 주관해온 나는 선물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의 병원은 여전히 인맥과 ‘관시(關係)’가 잘 통한다. 몇 년 전 독일국적의 한국인 친구는 나에게 ...중국인들은 아는 사람에겐 친절하고, 모르는 사람에겐 냉담하다고 푸념했다. 중국의 ‘관시’를 꼬집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여전히 ‘인맥이 중요시’되는 병원이다. 저녁 무렵, 40대 초반의 담당의사는 친절하게 수면다원검사(Polysomnography) 장비를 부착해주며 오후에 내과의 X주임(아내의 대학동창)이 와서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다고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얼마 전 서울 ‘특강’시, 나는 중국 특유의 ‘관시’를 사회발전의 걸림돌이라고 혹평했다. 한편 ‘관시’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이 퍽 머쓱하고 쑥스러워졌다. 

▲ 병상에 누워 인생의 참뜻을 생각하며...<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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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덟시, 아내의 도음으로 깨끗한 환자복을 갈아입은 나는 ‘수술준비’를 마쳤다. 반 시간 후, 나는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이동 수술침대에 옮겨졌다. 그녀들은 환자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나를 5층 수술실로 조심스레 옮겨왔다. 나는 눈을 딱 감고 모든 것을 그녀들에게 맡겼다. 수술 공포감이 더욱 옥죄어왔고, 머리속이 하얘진 나는 몽롱상태에 빠졌다. 이동 수술침대에서 수술대로 옮겨진 나는 ‘죽음의 공포’를 새삼 체감했다. 아홉시경, 간호사들은 곧 수술이 시작된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또 그녀들은 같은 물음을 나에게 반복했다. 어느 순간 혼수상태에 빠진 나는 그녀들의 물음에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드디어 주입된 마취제의 약효가 발현된 것이다.  

오전 열시 반, 눈을 번쩍 뜬 나는 의식을 되찾았다. 간호사들은 나에게 수술이 원만하게 끝났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들은 나를 조심스럽게 이동 수술침대에 옮긴 후 병실로 밀고 왔다. 의식을 잃었던 ‘죽음’의 한 시간 반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나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염라대왕이 있는 저승에 여행을 갔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모처럼 ‘죽음의 사회학’의 심층적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보는 계기였다. 한국 대학원 시절, 한 선배가 ‘죽음’에 관한 주제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선택한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한편 나는 난생처음 생로병사와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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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덟시, 주임의사와 담당의사가 잇따라 나의 병실로 찾아와 수술상처를 진찰했다. 그리고 상처가 잘 봉합돼 수술이 매우 ‘성공적’이라고 나를 위안했다. 간호사들은 나의 침대에 ‘동통평고(疼痛評估)’라는 팻말을 걸어 놓았다. 졸지에 나는 ‘중점보호대상’이 됐다. 병원 측에서 공급한 마취박스의 마취 작용으로 인해 나는 잠시나마 수술 후의 통증을 잊고 있었다. 물론 마치박스의 비용은 자부담해야 한다. 한편 입원 기간 내내 다른 환자가 배정되지 않아 나는 줄곧 ‘독방’을 사용했다. ‘환자 가족’인 아내가 밤새껏 나를 간호를 해주었다. 환자 배정은 담당의사 특유의 권한이다. 나의 ‘독방 사용’이 담당의사의 배려인지, 선물의 ‘위력’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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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다양한 영양제와 진통제를 배합한 정맥영양주사를 맞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가 되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금방 잠이 들었고, 몸은 젖은 솜뭉치처럼 무겁고 무기력했다. 어느덧 나는 ‘침대의 포로’가 됐다. 마취박스의 부작용이다. 정심은 아내가 병원식당에서 사온 심심한 죽 한그릇을 먹었다. 찻물과 탄산음료 등은 삼가고, 뜨거운 물은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고 담당간호사가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병 자랑은 하여라’ 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그래서 나는 입원과 수술 상황을 평소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에게 웨이신(微信, We Chat)으로 알렸다. 한국과 일본, 국내 친구들의 관심 어린 문안이 담긴 문자메시지가 잇달아 날아왔다. 대개 인간은 병들어 몸이 아프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심적 위안이 필요한 것 같다. 친구들의 위문메시지는 환자인 나에게 큰 정신적 위안이 됐다. 특히 산동성의 연태(煙臺) 고등학교 동창이 보낸 ‘건강이 최고’라는 문자메시지가 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얼마 전 병으로 입원한 적이 있는 그 친구와 나는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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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영양액(營養液) 주입과 지통(止痛)을 위한 점적주사를 맞았다. 많은 액체가 몸에 주사(注射)돼 화장실 출입이 잦았다. 한 손에 마취박사를 들고 또 링겔병을 들고 들어가야 하니 여간 번거롭지 않다. 아내가 부재 중에는 간호사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불편해도 꾹 참아야 한다. 이 또한 환자의 고통이다.   

오후에는 대련에 있는 친구들의 병문안이 잇따랐다. 흔히 병원에 환자위문을 할 때 손에 들고 오는 것이 화려하게 포장된 과일바구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친구가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매우 중요시한다. 외자기업 시절, 인연을 맺은 중국인 오(吳)사장은 과일바구니를 들고 오지 않고 돈봉투를 주고 갔다. 극구 사양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봉투속에는 자그마치 인민폐가 5천위안이 들어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뇌물수준’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역시 중국인 특유의 ‘관시’일 것이다. 

저녁에는 드디어 마취박스 사용을 중지했다. 마취제 부작용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옆방 환자의 신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온다. 게다가 마취제 효능이 사라져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수면에 실패한 나는 밤잠을 설쳤다. 새벽 다섯시, 통증을 참을 수 없어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다. 새벽잠을 설친 20대 초반의 풋내기 간호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진통제 엉덩이주사를 대충 놓아주었다. 그녀는 내가 ‘병원가족’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불량태도’에 화가 난 나는 간호사를 훈계했다. 내가 주임의사에게 일러바치겠다고 엄포를 놓자, 그녀의 태도는 금방 상냥해졌다. 불면증과 통증에 따른 불편한 심기를 애꿎은 간호사에게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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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8일) 오전 아홉시, 상처를 재확인한 담당의사는 오늘부터 집으로 다니며 지정된 시간에 점적주사를 맞으면 된다고 했다. 10일 오후, 정해진 정맥주사를 다 맞고 퇴원수속을 마쳤다. 마음이 홀가분하고 집으로 향한 발검음도 가벼워졌다. 죄수가 감옥에서 형기(刑期)를 마치고 석방된 심정도 아마 이런 느낌이었 것이다. 지긋지긋한 입원생활이 끝났다. 해탈감으로 가슴이 후련했고, ‘자유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수술 후유증: 퇴원 후 나를 괴롭힌 것은 극심한 두통과 메스꺼움이다. 또 매일 죽으로 ‘연명(延命)’하다 보니, 체중도 3~4키로 감량했다. 설상가상으로 심신을 괴롭히는 이앓이가 재발했다...근육과 뼈를 다치면 100일 휴식이 필요하다(傷筋動骨一百天)는 중국 속담이 있다. 10년 의사 경력을 가진 후배의 말에 따르면, 나의 상황은 ‘상근(傷筋)’에 속한다. 한국에서 장기간 생활한 나에게는 커피와 사우나 ‘중독증’이 있다. 그런데 커피와 사우나는 ‘금기사항’이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유명한 골초인 모택동은 매운 음식을 즐겨먹었고, 밤낮이 바뀐 ‘불량한 생활습관’을 갖고 있었으나 83세까지 살았다. 또 어르신은 ...의사의 말을 다 들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오늘은 ‘금기’를 어기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마 인간은 책대로만 살 수 없는 것 같다.  

후기(後記): 불교에선 생로병사를 사람이 반드시 겪게 되는 네 가지 고통, 즉 ‘사고(四苦)’라고 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행복일 수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에는 결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얼마 전 친구가 보내온 ‘나훈아 넋두리’ 동영상을 보았다. ...인생이 딱 두번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번은 법을 지키며 살고, 한번은 법을 어겨 마누라도 열댓 명 거느리며 살아보고... 그러나 인생은 연습도 없고 한번밖에 없어요. 

인생은 두 번 다시없다. 어쩌면 후회없는 삶이 ‘여유로운 죽음’을 맞는 최선의 방책일 수 있다. 10일 간의 입원생활을 통해 나는 좀 더 보람찬 여생을 보내야 하겠다고 삶의 의지를 다지게 됐다. 모든 인간이 인생의 최종 목적지 ‘죽음’을 향해 매진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죽음의 명언’이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제2편 

한족아이로 변해가는 나의 자녀들

 

 

고국인 한국에서의 10여 년 간 파란만장했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서 낯 설고 물 설은 해변도시 대련에 온지도 어언간 4년 철을 잡는다. 미상불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옛말이 새삼스럽다. 필자가 정든 한국생활을 접고 대학시절 20대부터 오랫동안 생활해온 ‘제2고향’인 북경을 포기하면서 생소한 대련을 ‘후반생의 삶터’로 선택한 것은 결국 나의 쌍둥이 자녀들 때문이다. 그동안 가족과 떨어진 별거생활을 통해 가화만사성의 중요성과 가정의 소중함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1년 주저 없이 귀국을 선택했다.

 

한편 한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8년 전부터 대련대학 부속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아내가 그간 고향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해온 아이들을 드디어 대련에 데려왔던 것이다. 일년에 겨우 두번인 대학 방학때만 가족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간절하고도 끈질긴 ‘조기귀국’ 요구에 결국 두손을 들고 말았다.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해외생활에서 심신이 지쳐있던 나에게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누리는 천륜지락이 더 이상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진정성있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에 돌아온 후 한동안의 고민 끝에 대학교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아쉽게 포기하고 세계 굴지의 철강기업인 포스코의 중국 법인, POSCO대련강철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가정과 직장생활이 안정되어가면서 타향객인 나에게 한때 매우 낯이 설었던 대련이 점차 안거락업(安居樂業)의 익숙한 ‘삶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역시 타향도 정 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가족에게 큰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현재 칭니와(青泥哇)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한족학교의 교육환경에 적응되면서 고향에서 배워온 조선말을 거의 다 잊어버린 것이다. 날이 갈수록 중국어 회화에 익숙해진 애들은 점차 ‘한족아이’로 변해가고 있다. 즉 한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부모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미운 네 살’에 대련에 온 애들의 생활용어는 조선어이었다. 이미 연길 6.1유치원에서 2년 간 조선말을 배웠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 무렵 딸애가 방학때만 만나는 ‘이국아빠’에게 조금은 서먹해하면서도 연변 특유의 조선말을 유창하게 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의 문제는 평소 조선말로 소통하고 조선족 음식에 습관된 애들이 언어와 생활환경이 바뀐 타향의 생활에 금방 적응되지 못한 데서 기인되었다. 이주 초기 애들은 낯 설고 언어마저 통하지 않는 한족유치원에 다니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아들녀석이 유치원에 가기를 제일 싫어하는 이유는 ‘맛없는’ 중국음식 때문이었다. 딸애의 이유는 친구도 없고 선생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침마다 벌어지는 ‘유치원 전쟁’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이 시기 생활환경 변화로 애들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일찍 조선족유치원에서 조선어로 교육받았고 조선말이 생활용어인 그 애들이 조선족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어로 대화하고 중국음식을 먹는 한족유치원의 생활환경에 금방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애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 ‘고역’은 애들이 새로운 환경에 점차 적응되어 중국어를 대충 알아듣고 중국음식에 습관된 2~3년 후에야 끝났다. 애들이 새로운 환경에 의외로 빨리 적응될 수 있었던 것은 유치원 원장과 담임교사가 먼 변강오지에서 온 소수민족 쌍둥이를 무척 귀여워해주고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본 유치원이 부속병원 산하에 있고 부속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아내와 무관하지 않다.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애들은 초등학교에 입학 전에 중국어 구사가 가능해졌고 이는 한족학교에 입학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애들이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족학교에 보내는 문제로 나와 아내는 의견 차이로 언쟁이 오갔다. 결국 애들을 조선족학교에 보내려는 나의 주장은 중국의 실정과 현지 사정과 ‘괴리가 크다’는 이유로 부결되고 말았다. 아내의 주장에 따르면 애들이 몇 년 동안 유치원에서 배운 중국어 수준으로 향후 한족학교에서 공부하는 데는 지장이 없고, 조선어를 거의 잊어버린 애들이 교통이 불편하고 교사의 자질이 낮은(?)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것은 현실 여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해당 구역에 호적이 있는 애들만이 입학이 가능한 ‘학구(学区)’ 내에 집에서2~3분 거리인 시중점 초등학교가 있어 매우 편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중국의 대도시에서는 ‘외국어’인 조선어보다 중국어와 영어가 더욱 중요하며 실용성이 더 크다는 것이 아내의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 '포스코 대련강철' 대외 부사장으로 있을 적의 사진....<편집자>

그동안 아이들의 의식주와 생활교육에 관해서는 줄곧 애들과 함께 생활해온 아내가 결정권을 행사해왔다. 한편 1년 중 거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족과 별거해 있었던 나에게는 큰 발언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애들을 한족학교에 보내기로 하고 향후 방학과 주말을 이용해 조선어를 따로 배워주는 걸로 아내와 타협했다. 사실 아내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현재 대도시로 이주한 절대다수의 중국 조선족가정의 현주소이며 어쩌면 더욱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실제 연변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어 위주로 교육받은 나는 북경의 대학시절과 직장생활에서 중국어 ‘빈곤증’으로 큰 고역을 치렀었다. 또한 중고등학교에서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기에 한국유학시절에는 심각한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자녀들이 부실한 아빠의 전철을 밟지 말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한족학교에 진학한 애들은 첫 한 두해는 미숙한 중국어로 성적이 부진해 좀 고생했다. 그러나 2학년 후학기부터는 중국어 교육과 환경에 완전히 적응되면서 딸애의 성적은 전 학년에서 3등 안에 들어갔고 아들애도 6~8등으로 상승세를 보였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애들은 중국어는 중국인처럼 구사하는 반면 조선어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애들은 더욱 바쁘다. 방과후 학원과 영어학원에서 하루종일 숙제를 완성하고 영어회화 수업에 참가하는 등 타이트한 스케쥴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나와 아내는 애들에게 조선어 공부를 병행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수포로 돌아갔다. 학업의 막중한 부담으로 애들은 조선어 공부에 도무지 흥취가 없었고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한족아이’로 변해가는 애들이 조선어에 대한 애착과 ‘배울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었다.

 

▲ 2008년, 한국의 모 학술대회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어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애들이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된 전환적 계기가 있었다

 

재작년 가을에 애들의 학급에 서울에서 온 유수민(柳秀敏)이라는 한국 여학생이 전학해온 것이다. 마침 그 여자애는 부모와 함께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어 나의 자녀와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특히 딸애는 그 애와 매일 그림자처럼 붙어다녔고 드디어 그 친구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신 아직 중국어가 미숙한 한국친구에게 중국말을 가르쳐주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가부다. 딸애는 얼마 안되어 간단한 일상언어와 인사말을 습득했는데 워낙 조선어기초가 있었는지라 발음도 매우 정확했다. 승벽심이 강한 아들애도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면서 함께 배웠다.

 

그런데 작년 말에 그 한국친구는 부모의 사정으로 갑자기 서울에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딸애는 무척 서운해 했다. 최근 들어 딸애는 금년 여름방학에는 서울에 여행가서 그 한국인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나에게 졸라댔다. 그래서 나는 우선 승낙해 놓고 딸애가 향후에도 한국어 공부를 지속하는 것을 서울 여행가는 조건으로 내걸었다. 

 

딸애와 아들애는 그 한국애와 1년 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많은 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한국에 무관심하고 한국어에 전혀 흥취가 없던 애들이 한국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간 잃어버린 민족 정체성을 되찾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요즘 들어 딸애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한국이란 어떤 나라이며 서울엔 무슨 맛있는 음식이 있냐고 물어본다. 한국은 엄마·아빠가 10년 동안 유학생활을 한 고국이며 엄마가 서울에서 너희들을 잉태했기에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대답하면 딸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KBS 뉴스프로를 시청하면 엄마에게 달려가 아빠가 ‘나쁜 TV’를 본다며 고자질하던 아들녀석은 최근에는 한국식 삼결살과 김치마니아가 되었다. 또한 딸애는 한국산 김을 즐겨먹는다.

 

요즘 들어 우리가족에게는 우려했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한국 여학생이 귀국한 후 동기부여가 상실된 아이들의 한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이 갈수록 시들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들애는 ‘학업 부담’을 핑계로 아예 한국어 배우기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애들은 언어를 빨리 배우지만 금방 잊어버리기도 한다. 딸애가 그동안 힘들게 배운 한국어를 까먹고 그 한국친구도 배운지 얼마 안 되는 중국말을 잊어버린다면 그 애들이 서울에서 만나도 한국어나 중국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딸애는 결국 아빠인 나에게 통역을 부탁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서글퍼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연변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나는 북경·서울을 거쳐 현재 해변도시 대련에 정착해 큰 걱정없이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시대의 ‘행운아’일 수 있다. 한편 나의 자녀들은 민족어의 상실과 정체성의 변화, 주류민족 동화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한국 유학출신인 아들이 중국여자와 결혼해 늘 못 마땅해 하시던 북경 선배님의 고충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다. 결국 나의 자녀들이 ‘Kim(김)’이 아닌 ‘Jin(金)’으로 정체성이 변화되면, 나의 시대에서 대대손손 이어온 우리 ‘전주김씨’ 가문은 막을 내릴 것이다. 어쩐지 슬프고도 씁쓸하다. 요즘 들어 지꿎게 갈마드는 죄의식에 마음이 더욱 착잡해진다.

 

대도시로 이주한 나의 자녀들은 민족어의 상실로 자의반 타의반 ‘한족아이’로 변해가고 있다. 주류민족에 동화된 오늘날 만족(满族)의 암울한 현실이 내일의 조선족 운명일지도 모른다. 기성세대들의 진지한 성찰과 자기반성이 절실한 시점이다. 최근 나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져 간다. 어쩌면 이는 나만의 슬픈 고민거리가 아닐 것이다. 

 ※ 본문은 <동포문학> 3호(2015) 수필부문 대상 수상작임. <中國朝鮮族百年實錄(2017)>에'日益加深的苦惱'로 번역되어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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