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중국 흑룡강신문 길림성 특파원 윤운걸 기자의 글 몇 편을 싣는다. 35여년간 오로지 기자로, 언론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는 기자의 양심과 정의로 사회 곳곳의 흑과 백을 가려주면서 지성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는 역할을 많이 해왔다. 그의 글은 신문기사 같기도, 르포 같기도, 칼럼 같기도 하다. 신문기사의 6하원칙(기사 작성에 있어서의 필수조건으로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what, 왜why, 어떻게how의 여섯 가지 기본이 되는 조건)을 엄격히 지키면서도 르포의 특성인 “현실의 사건과 사실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기록”을 하고 있으며, 또 칼럼의 풍격을 잃지 않고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는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연변의 발전을 눈으로 보고 글로 남기며 살아온 연변 역사의 산 증인의 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연변축구와 관련된 그의 글들은 연변축구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귀한 사료적 가지를 갖고 있다. 아래 글의 중국 조선말표기법을 그대로 둔다...<편집자> 
▲ 윤운걸 약력 : 흑룡강신문 길림성 특파원(길림성 지사장). 중국 연변대학 의학원 의료학부 졸업. 1984년부터 연변방송국,흑룡강신문에서 전직기자로 현재까지 2000여편의 글 발표. '돈의 하소연'작품이 1986년 중국라디오영화TV방송부, 중국과학기술자협회 등에서 주최한 “백학컵”2등상을 수상하면서 과학보급작품, 신문작품이 중앙급, 성급, 지구급 상을 수차 수상. 수차 국외 각종 세미나서 논문발표. 중국과학기술협회 중점항목 ‘무엇 때문에’ 총서 10권 2002년에 출판발행(공동 주필), '농촌과학기술보급총서' 8권 2004년에 발행(공동주필), 1992년부터 KBS방송 해외 통신원으로 중국에서 사상 처음 등단하면서 오늘까지 의무 수행.  2002년 대한민국 한국방송공사(KBS)로부터“감사패” 수상. 제2회 동도컵 '장백문화대상' 대상 수상
  제1편 
연변축구팀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 시절  1989년 가을,필자가 연변방송국에 근무할 때였다.어느 날 보도부 체육기자인 김남룡(현 연변텔레비전 부주필)씨가 찾아와 길림축구팀이 갑급팀에서 탈락했는데 축구의 고향인 연변에서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90년도 전국축구시즌에 대비해 축구팬협회를 설립하고 조직적인 지원과 응원을 제안했다.이에 맞장구를 쳐 연변축구애호자협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회장단을 구성하다보니 회장을 필자가 맡게 됐고 상무비서장에 김남룡,상무부회장 겸 홍보담당에 남명철(현 도문시 부시장),상무부회장 겸 조직담당에 양동섭(전 연변텔레비전 기자)씨 그리고 상무부회장에 연변가무단 김동관 단장 모두 5명이 맡게 됐다.  자금 후원과 응원단 구성
 
회장단은 먼저 지역 언론이 앞장서 연변축구를 살려야 한다는 취지 아래 언론사를 찾아갔다.당시 길림신문사 이송영사장을 찾아가니 적극적인 보도협조와 함께 1천 위안의 지원금을 쾌척했으며 연변일보사,연변인민출판사,중국조선족소년보사,대중과학잡지사,동북과학기술신문사 등 각 언론사들이 경제적인 후원과 함께 인력 후원에 나서 연변팀을 지원하기 위한 준비가 빨리 진척되였다. 한편 연변가무단악대와 연변라디오텔레비전악대가 잇따라 합세하였고 조선족 가수 유병걸씨가 악대를 지휘했다.또 응원단 수송을 위해 연길버스운수공사도 경기 때마다 버스를 무상지원하기로 했다.협회가 발족했다는 소식에 연변변경무역공사 ,연변건축공사 등 일반 기업들의 후원행렬도 이어졌다.    90년도부터 경기마다 인파몰이  초보적인 응원단을 구성한 협회는 북,괭가리,연변축구팀만세 등의 머리띠 등 각종 응원도구를 준비하는 가하면 붓글씨 솜씨에 뛰여난 박운학,허일춘 기자 등은 표어판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는 등 준비작업이 시작됐다.특히 감동스러웠던 것은 전 연변텔레비전 주필 김희관(현 연변공공관계협회 회장),부주필 김영택씨 등 언론인들도 "축구팬"이란 머리띠를 매고 응원 대열에 합세해 질서유지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국가연주가 있었는데 협회 관악단이 유병걸씨의 지휘 아래 연주했고 연변축구팀이 승승장구를 이어갈 때는 <아리랑>, <나가자 나가자>등을 연주하면서 축구장 관람석에서는 자연스럽게 파도타기 인파물결이 일어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협회는 경기마다 득점 선수 또는 최고활약 선수들을 선정해 상금을 주는 등 선수들이 민족의사명감을 갖고 공을 찬다는 정신력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그래서 당시 최고 공격수였던 고종훈 선수는 "축구팬들의 사랑과 성원에 힘입어 민족 정신의 사명감을 갖고 푸른잔디위를 원 없이 달렸다"고 말하기도 했다.연변에는 지금도 "고종훈노래방"등 그의 이름을 딴 상점들이 많다.    가는 곳마다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   연변팀의 홈 경기는 가끔 용정,도문시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92년 도문 경기 때였다.연길에서 3대의 버스로 출발한 응원단들이 도문시 경기장에 들어서자 도문시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영했고 열띤 응원을 벌이는 등 지역 응원단도 구성됐다. 이런 응원의 결과였을까,7월 삼복 더위에도 선수들은 3대0으로 대승을 거둬 관중들의 열띤 응원에 보답했다.경기가 끝나자 도문시 정부 차원에서 연길에서 온 200여명의 축구팬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마련하는 등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하지만 이날 저녁식사는 미리 연길에서 협회와의 예약이 돼 있어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축구팬으로서의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미있는 뒷이야기   협회 회원은 반드시 축구장에 들어갈 때 머리띠를 착용해야 했다.당시 입장료가 비싸 입장권을 구입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입장권이 모두 팔리는 바람에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관중들은 경기장 바깥에서"귀"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무에 올라가 경기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아마도 이런 진풍경은 연길경기장에서만 있었을 것이다.당시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가운데는 혹시 조직담당자 가운데 자신이 아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하며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이런 사람들은 조직담당자와 눈길만 마주치면 입장이 어느 정도 가능했고 이런 일을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에는 없었다.   92년 8월,연길경기장에서 응원을 마친 뒤 응원단 만찬장에서였다.관악단을 온몸으로 지휘해온 유병걸씨가 단번에 냉면 두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이를 옆에서 보던 나는 "형님 한 그릇 더 하시죠"라고 농담을 건네니"내가 쓩튀냐"(사투리로 게걸이라는 뜻)라고 받으면서도 또 한 그릇을 거뜬히 해치우던 그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추억으로 남는다.협회 회원이 늘어나면서 연변연극단 코미디 배우 이옥희(별명 쑤이러우)씨를 선두 지휘자로 선정했다.그가 응원단을 지휘하면서 관중들은 축구를 관람하면서도 중간 휴식 때는 재미있는 그의 연기를 즐길 수도 있었다.   경기에서 연변축구팀이 승전하면 회원 만찬에는 맥주가 동이날 정도였고 패하는 날이면 안타까운 탄식으로 다음 경기를 기약했다.그리고 회장단은 축구선수들을 찾아 축하와 함께 위로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수들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결과 연변축구애호자협회는 93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로부터 표창금기까지 받는 행운을 누렸다.그때 그 시절 축구팬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날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연길축구팬협회가 연변축구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한 떨기의 꽃이 되길 기대한다.
(본문은 2005년 3월13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제2편 최은택 교수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
-고 전연변오동축구팀 감독 최은택교수님의 명복을 빌면서  기원 2007년 2월 5일 새벽 전 연변오동축구팀 감독이었던 한국 한양대 최은택교수가 66세를 일기로 너무나도 일찌감치 이 세상을 마감했다는 비운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연변은 물론 중국 각지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충격에 쌓여 분분히 애도의 뜻을 표하고있다. 기자도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비운에 쌓인 나머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그제날 최은택교수를 취재하면서 적어 내려간 수첩을 뒤져보고 재정리한다. 1997년 중국축구 갑A련맹 제12륜경기가 끝난 7월 28일에 기자는 연변오동축구팀의 최은택감독이 심장병으로 한창 치료 중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훈씨(현 연변축구팀감독)에게 의뢰해 취재를 부탁했었다. 그랬더니 “금방 죽지 않는데 왜 취재를 접수 못하겠는가”며 바로 만나자는 것이었다. 일단 만나고 보니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한창 점적 주사를 맞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띄우면서 인자하게 기자를 만나주었다. 당시 기자의 인상은 그가 호랑이같은 축구감독이 아니라 아주 선비다운 교수 그 자체였다 그가 연변팀의 사령탑을 잡게 된 배경  1987년 중국 광주에서 아시아축구련맹회의가 있었다. 당시 한양대학교수로 있던 최교수도 회의에 참가했는데 연변에서 안내로 온 추명(당시 연변오동팀의 부감독)을 알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여름에 연변을 방문, 그 기회에 연변축구관계자들의 요청에 의해 축구강습반을 조직했는데 그는 축구지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면서 연변축구관계자들은 연변축구팀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청구를 했다. 당시 최교수는 한양대에서 학장을 4년간 련임했기에 97년도에 1년 안식년(휴식년)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안식년도 마다하고 휴식의 한때를 제쳐놓고 바로 이듬해인 97년도에 연변오동팀의 사령탑을 잡게 되였다.
처음 연변오동팀을 맡았을 때  당시 최은택교수는 중국축구의 정황을 잘 몰랐고 더욱이 연변오동팀의 진짜 실력도  잘 몰랐으며 다만 이 팀이 중국축구팀에서 하위수준이라는 것만 알았다. 그가 나중에 알게 되였지만 프로축구에서의 연변팀 선수들은 수준이 낮고 또 수자적으로 훌륭한 선수가 적고 쓸만한 선수들은 간염이 아니면 위염이 있었으며 당시 연변팀에서 주력으로 활약하던 리홍군선수가 북경국안팀으로 이적했다는 것도 몰랐다. 소개를 통해 연변팀의 선수들의 능력수준은 괜찮은걸로 알았는데 접촉해보니 그가 생각한것보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굉장히 당황했단다. 실력도 실력이겠지만 연변팀의 정신력이 대단히 부족하다는것을 최교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에 따르면 축구는 11명이 치르는 단체경기로서 어느 개인이 설사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단합심이 없으면 경기는 엉망이 되고 감독의 전술배치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개개인의 수준이 낮은것을 단합심을 통해 강한 축구팀으로 키우는것이 가장 빠른 길일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 길을 걸어 정신력을 키워야 연변축구가 살아나갈수 있다는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팀을 틀어쥐자마자 정신력고취에 전력 당시 연변팀을 맡고보니 선수들이 선배인지 후배인지 친구인지 뒤섞여 례의란 도무지 찾아볼 없었단다. 또 감독을 우습게 보고 감독에게 인사하는 기본적인 례의도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그래서 우선 례의 즉 감독과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정신력부터 고취시켰다. 기술이나 체력이나 전술에서 단결력을 강조, 선수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러서 인사를 반드시 하게끔 “채찍질”했다. 결과 처음에는 인사성도 없고 말도 반말을 쓰던것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면서 인사례절도 밝아지게 되였고 후배들도 선배들의 말을 잘 듣는 기풍이 이 팀에 서서이 일어나게 되였다. 당시 주력선수로 있었던 고종훈선수에 따르면 최은택감독이 사령탑을 쥐면서 선수들은 조금도 숨돌릴 사이없이 훈련을 그렇게도 이른바 “악독”하게 시켰단다. 하여 1996년도에 갑급팀에서 강급의 변두리를 헤매던 연변오동축구팀을 1997년도에 일약 4강에로 껑충 끌어올려 이 팀은 중국축구협회로부터 “진보가 가장 빠른 상”을 수여받았으며 따라서 연변축구팀이라 하면 모두 겁나하는 팀으로 부상했다. 당시 중국의 한 스포츠언론은 “연변축구팀 선수들은 마치도 들에서 줄기차게 달리는 야생말처럼 좀처럼 지칠줄 몰라 상대방팀이 기진맥진했을 때에는 어디서 오는 힘인지 더욱 기승스러웠고 강자와는 더욱 강해서 이른바 중국에서 강자라고 스스로 자랑하던 팀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했다”고 평했다. 바로 그 힘이 정신력이 아니겠는가.
중국축구에 대해 최은택교수는 당시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 한국, 일본은 동북아시아에 속하는데 축구의 기술적 능력이나 수준은 비슷하다. 중국선수들의 체력이나 기술이 한국에 떨어지는것은 없다. 중국이 자주 한국에 지는 주요원인은 주로 정신력이다. 중국선수들은 직업에 대한 근성이 몸에 배지 못했다. 축구경기에서 정신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 일이고 이런 정신력을 키우자면 우선 “머리부터 씻어야 한다”. 그는 또 축구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전술을 알아야 할뿐만아니라 상대방의 력사, 문화, 풍속도 알아야 한다. 중국축구가 한국을 이기지 못하는것은 바로 한국의 축구를 모르기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한동안 최은택교수는 연변팀의 사령탑을 내놓을 생각도 했다. 그 원인이 바로 중국축구 심판의 편파적인 추태였다. 당시 연변팀 대 북경팀과의 경기뿐만아니라 12륜경기에서도 심판의 불공정한 판결을 받았다. 최은택교수는 내가 몸도 좋지 않고 돈을 받자고 여기에 온것도 아닌데 연변팀이 손해를 보고있으니 괴롭고 굉장히 불쾌하다고 밝혔다. 당시 슬라프나(중국국가팀 첫 감독)는 최교수에게 돈을 얼마나 받는가고 문의했단다. 다 아는바와 같이 그는 일전 한푼도 받지 않고 연변팀을 이끌어 왔던것이다. 황차 이런 판국에 중국땅에 와서 감독을 맡아나선 자신이 바보같다는 느낌이 들어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가졌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변팀이 이기든 지든 자기가 선수들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려는 각오는 돼있었다.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심판원이 심판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얘기했다. 최은택교수가 1999년 3월에 중문으로 “축구와 예술”이라는 책을 청도에서 펼쳤는데 그는 이 책을 펴내면서 “1년 더 되는 시간에 중국에서 감독을 맡으면서 중국축구를 잘 알게 되였다. 여기에서 재삼 얘기하고 싶은것은 축구는 육체적인 대항성 운동일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력의 싸움이므로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반드시 심각하게 결핍한 정신력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피력했다. 국가팀 감독설이 나왔을 때 최은택교수가 연변팀 사령탑을 잡으면서 고종훈선수도 제2의 청춘이 꽃피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침하게 지냈던 고종훈선수가 당시 연변팀의 주력순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일찍 고종훈선수가 국가팀에 가담했을 때 최은택교수는 몇번이나 당시 국가팀을 맡았던 척무생감독에게 고종훈의 능력을 과시하게 하라고 얘기했지만 척무생은 시종 듣지 않고 국가팀이 국외의 몇차례 월드컵예선 경기에서 고종훈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이른바 “척가군단”이 “10강경기”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자 중국본토 감독의 명성이 잇달아 일락천장이 되였고 따라서 중국본토에서 감독을 맡은 외국적 최은택교수에게 눈길이 돌려지기 시작했다. 연변구단의 4강신화, 축구팬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의 절박한 호소, 일부 축구관원들의 추천도 잇달았다. 그러나 최은택교수는 기자가 당시 취재시에 그럴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사실 그가 연변팀에 오게 된것은 한피줄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에서였다. 연변팀을 잘 춰세웠다면 일개인으로서 죽어도 보람이 있다고 그는 당시에 호매롭게 얘기했다. 자기는 대학교수로 있기때문에 1년이란 안식년이 있어 여기에 왔지만 명년에는 올수 없다고 했다. 만년에 대학에서 조용히 정년퇴직하겠다고 그는 기자에게 얘기했다. 그는 또 세계적으로 보아도 스포츠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듯이 연변팀이 몇차례 이겼다해서 자기를 재차 초빙하려는것은 성급한 처사라고 했다. 현시점에서 사색해볼 점 한개 민족, 한개 국가의 정신력을 어떻게 보는가? 최은택교수가 연변팀을 떠나 1998년도에 귀국한 뒤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창조했다. 최은택감독이 강조하던 정신력은 단순히 축구에만 귀속되는것이 아니라 제반 조선민족의 정체성구축에 굉장히 귀감이 되는 리론이라 하겠다. 고 최은택교수의 명복을 빌면서 축구의 정신력과 민족의 정신력이 동심일체라는것을 심각하게 느낄 시기라고 본다. (본문은 흑룡강신문 2007년03월2자, 5일자, 9일자 3기에 나누어 발표)
<윤운걸기자문집>에 수록 
     
 
▲ 러시아에서 취재를 하고있는 윤운걸기자(오른쪽 첫 번째 사람)
 제3편  재론 “연변축구팀 정신력”  연변축구팀이라 하면 바로 중국 2백만 동포의 얼굴이요,연변의 브랜드라는 것은 이미 전 사회적으로 알려진바이다. 그젯날 우리의 조상들은 축구로 한을 달랬고 또 축구로 이땅에 살고 있는 조선민족의 위상을 올리기에 충분했다.그래서 일찌기 50년대에 중앙 수장들로부터 조선족의 축구 정신을 반드시 따라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런데 80년대 이후부터 연변축구팀은 지속적으로 불온정한 상태에 처해 있으면서, 특히 중국에서 프로리그가 시작되면서 연변축구팀은 쇠퇴일로의 변두리에서 헤매다가 한국 한양대 최은택 교수가 안식년을 맞아 연변축구팀 사령탑을 잡고 난 뒤에 중국 축구 수퍼리그 즉 갑급1부리그에서 4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 이후 1부리그에서 또 지속적인 하강선을 그어 2부리그에 머물다가 지어는 을급리그에 까지 탈락되는 운을 면치못해 절강성에 팔려가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 축구팬들은 그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탄했는가?제반 연변은 “슬픔의 바다”가 되면서 저 멀리 절강성에 가서도 “잘 자라라”고 진정어린 기원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연변축구팀의 굴곡적인 역사는 더 거론하지 않겠다.연변축구팀이 작년에 을급팀으로 강급되었다가 하늘이 도와서 그런지 어부지리로 2부리그에 다시 머물게 되었고 따라서 지난 14차 리그에까지 8승6무의 불패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되어 2부리그에서 사경에 헤매던 연변축구팀이 이렇게 연변은 물론 제반 중국축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겠는가? 
한마디로 정신력을 한보한보 차분히 길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찍 1997년 중국축구 갑급1부리그 제12라운드 경기가 끝난 뒤에 당시 이 팀의 사령탑을 잡았던 최은택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그는 한마디로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이다”라고 잘라 말했다.금방 연변축구팀을 맡아보니 선수들이 선배인지,후배인지,친구인지 뒤섞여 예의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고 지어는 감독을 우습게 보고 감독에게 인사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우선 예의 즉 감독과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정신력 기르기부터 시작했다.그러면서 전술에서 단결력을 강조하고 선수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러서 인사를 반드시 하겠금 “채찍질”했다.결과 처음에는 인사성도 없고 말도 반말을 쓰던 것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면서 인사예절도 밝아지게 되었고 후배들도 선배들의 말을 잘 듣는 기풍이 이 팀에 서서히 일어서게 되었다. 당시 주력선수로 활약했던 고종훈 선수는 “최은택 감독이 사령탑을 잡으면서 선수들을 조금도 숨돌릴 사이없이 훈련을 그렇게도 이른바 ‘악독’하게 시켰다”고 했다 한마디로 전장에 나가서 “내가 살자면 반드시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로 평소훈련에 '채찍질' 하면서 체력보강에 전력을 몰부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도 연변축구팀 선수들 대부분은 그 축구실력이 중국축구에서 하위권이었지만 똘똘 뭉친 집단으로 정신력을 키웠기 때문에 4강까지의 진출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 올해 박태하 한국감독이 어떻게 되어 연변팀을 오늘까지 무패행진의 길을 열어 놓았겠는가? 그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감독과 선수의 신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내가 팀에 와서 제일 처음 추진한 일이 바로 선수들과 한덩어리가 되고 그들과 무슨 이야기나 스스럼없이 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라고 했다.그러면서 박감독은 “연변팀은 무슨 비밀이 없다.그저 그동한 쌓은 감독경험에 따라 선수들의 생활과 훈련량에 근거해 알맞는 방안을 짰다”고 했다. 특히 선수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식사시에 수걱수걱 밥만 먹고 인츰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식사시간도 서로간의 대화를 나누는 좋은 장소이므로 서로간의 소통에 신경을 쓰다보니 지금 선수들과 친구가 되어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이런 기초상에서 축구는 집단적인 대항성이 강한 경기이기에 혹여 심판원들의 편파적인 판정이 있어도 절때 감정으로 처리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하라고 일러주는 한편 지금 순위는 무의미하다고 선수들에게 특별히 강조했기에 선수들의 사기가 올라가게 되었고, 시시각각 사기진작을 고취하면서 완강한 태세로 시합에 임하라고 선수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던 것이다.선수들한테 우리는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또 최고의 무대에 오를 준비가 돼 있다는 인식고취에 게으르지 않았다. 선수들이 이미 박감독을 철저하게 믿고 훈련과 시합에 임한 모습을 보면 이것이 바로 박태하 감독의 정신력 고취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독립유공자 수훈 애족장 윤낙세 후손인 윤운걸 흑룡강신문 특파원과 그의 부인 박진숙씨
 
     제4편  조선족의 한 달래는 연변축구...중국 축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발탁할 조짐  우선 이 글의 이해를 돕기위해 노불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를 설명한다.이 단어의 의미는 바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설명이다. 오늘날 연변축구는 지금 바야흐로 상승선을 긋고 있다.이 상승선을 긋는 데는 그 얼마나 많은 고통과 피눈물 그리고 뼈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왜 연변축구가 이런 피어린 역사가 있었겠는가?아마 어느 누구도,필자도 정확하게는 답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 한가지 즉 연변축구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그 진정한 내함에는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이 땅에 온 우리민족의 한을 달래는 일종 스포츠임이 분명하다.왜 그러냐하면 다른 체육운동은 일인 혹은 몇사람들이 경기장에서 치르는 경기이지만 축구만은 그 대항성이 어느 체육운동보다 강하고 또 집단적인 배합이 그 어느 체육운동보다 이른바 “처참”할 정도로 잘 되어야 할 경기인 것이다.즉 철저한 집단적인 융합의 합일체가 있어야만이 경기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료에 따르면 연변축구는 1908년부터 즉 명동학교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그럼 명동학교란 어떤 학교인가?명동학교는 1908년 김약연 주도로 북만주 화룡현 명동촌(지금의 용정시)에 세워진 민족교육기관이다.그래서 오늘의 용정시는 그젯날 우리민족 즉 중국 조선족의 교육,문화의 발상지었던 것이다.거기에서 반일저항시인 윤동주를 비롯한 수많은 반일지사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설명하고싶은 것은 일제의 철저한 통치와 감시하에 어느 한 민족의 집단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그래서 수많은 지성인들은 암암리에 이리저리 피해다니면서 반일사상을 고취한 것만 사실이다. 그러나 축구라 하게 되면 아무리 감시해봤자 운동이니 일본인들이 감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다.이런 집단적,대항성이 강한 축구를 통해 진정 조선인들은 민족의 한을 달래면서 구심점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만은 사료를 통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연변에서 축구운동이 활발히 벌여지면서 그젯날 위만주시기에 아주 훌룡한 성적을 따낸 것만은 사실이고 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연변축구라 하면 길림성대표이고 또 전국 축구대회에서 수차 우승을 따내고 지어는 중국을 대표해 국외에까지 나가서 위용을 떨친 것만 사실이다.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공산당 중앙서남국 제3서기,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임을 역임 했고1952년에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을 담임했던 하룡 원수(중국 10대 원수의 일원)가 중국축구는 연변축구를 따라배우라고 호소했단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연변축구가 이미 중국 축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임에 분명하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연변축구는 이렇게 파란만장의 곡절을 겪으면서도 오늘날 중국축구의 수림에서 홀시할 수 없는,아니 홀시하지 못할 집단으로 군림한데는 한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즉 “내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부모를 존중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남을 생각할 수 있고, 내 민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타민족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어찌 국가를 사랑할 수 있으며 국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이 지구촌을 사랑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조선족은 그젯날 민족의 한을 달래려고 집단적이고 대항성이 강한 이 축구라는 매개물로 성장해 왔고 그 기저에 있는 정신력으로 오늘까지 지탱해 왔다고 분석해 본다. 알기로는 오늘날 연변부덕축구팀은 중국1부리그에서 월급도 최하위라고 하는데 그럼 왜 이렇게 중국조선족은 물론 타민족도 환호하는가?여기에서 한마디 “연변축구는 이미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언하고싶은 것은 중국땅에서의 조선민족 문인을 비롯한 반일계몽운동이 바야흐로 전개 된 사건들은 많이 발굴되었지만 축구를 포함한 기타 운동을 통한 반일계몽운동사에 대한 정리가 아직 부족하므로 이한 연구에 신경을 써 봄이 오늘날의 시점에서 바람직 하다고 본다. 흑룡강신문 2016-8-5  제5편 
새해에 붙이는 메시지 "귀맛 당기는 술자리에 앉아라"  몇 년 전의 일이다.한 교수 동료가 민속주 관련 세미나에서 한마디 충고했다. "잡사람하고 술 마시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즉 아무 사람하고 술을 마시지 말라는 뜻이다.
일찌기 연변의 한 고위급 간부도 당정대회에서 "아무 사람하고 술을 마시지 말라"고 권고했다. 실제로 현실에서 공중 술자리도 좋고 어떤 파티에서도 좋고 서로 대화가 안되는 사람과 술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예전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술자리야 말로 반가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눈맛과 입맛이 돌아야 술좌석이 영글어간다는 것을 애주가들은 잘 알고 있다.술안주 즉 안주가 아주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우면 그 술좌석은 우선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다음, 입맛이다.술좌석은 말그대로 술을 위주로 하는 좌석이기에 좋은 안주에 술을 곁들면 고도로 흥분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그런데 입은 두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즉 마시고 먹고 하는 기능을 갖고 있을 뿐만아니라 언어표출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 언어표출도구를 통해 서로 말이 오가는데 그 오가는 말이 조화롭지 못하면 큰 사달이 생긴다는 것은 고금동서로 이미 수없이 많았다.즉 귀맛이 당기겠끔 술자리가 영글어 가느냐, 아니면 귀맛을 잃게 되느냐 하는 문제이다."취중 진담", "벙어리도 술만 마시면 입을 연다"라는 말이있다.왜 그런가? 대뇌피질은 제반 인체에서 "사령부"작용을 한다.알콜은 중추신경계인 뇌간망양체에 직접 작용한다.이 속에 있는 상행성망양 억제계는 통상 대뇌피질의 작용을 억제하는데 알콜에 의해 그 작용이 마비되기 시작하면 기타 중추들 즉 언어중추,기억중추,성중추 등이 통제를 잃고 이른바 제멋대로 "행실"한다.그것이 바로 술을 많이 마시면 말이 많아지게 되는 생리적인 기초이다.거두절미하고 그럼 왜 아무 사람하고 술 마시지 말아야 하는가. 답은 하나다.귀맛을 당기지 못하는 사람하고 술 마시면 기분이 잡칠 뿐만아니라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술 관련 야사들이 많다.술자리에 오가는 말을 제 3자에 전하여 알륵이 생기게 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는가 하면, 술자리에서 하찮은 일로 말다툼이 벌어져 지어는 손찌검까지 생기는 일,등등의 별아별 추태들이 우리 주변에서 밥먹듯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명지한 사람들은 술자리 요청이 있을 때 흔히 누가 참석하는가 하는 것을 묻고서야 참석한다. 술의 우점은 많다.슬플 때나,즐거울 때나, 술이 동반하게 되고 심리적인 고통이 있을 때 절친한 친구를 찾아 한잔 나누면서 친구의 조언을 들으면 그것처럼 기분이 상쾌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에 술을 잘 못마시면 육체(간 위주)를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 해이해 지면서 "사달"이 생기게 된다.바로 누구와 술을 마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주가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월요일에는 원(월)래 술 마시고, 화요일에는 화가 나서 술마시고, 수요일에는 수가 좋아서 술마시고, 목요일에는 목이 컬컬해 술마시고, 금요일에는 금술이 좋아서 술마시고, 토요일에는 토했기에 해장하느라 술마시고, 일요일에는 일이 없어 술마시고,하여간 애주가들에게는 즐거운 변명의 "명언"이라 하겠다. 새해에 이런 이른바 변명의 '명언'은 삼가하는 것이 현명한 인생행로가 아니겠는가? 술좌석에서의 눈맛,입맛,귀맛에서 귀맛이 당기지 않으면 눈맛을 잃는 것은 물론 입맛도 없어지므로 귀맛의 중요성을 오늘날 재삼 거론하는 것은 어찌보면 건전한 사회생활의 필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오직 진정한 술 친구 즉 서로 귀맛이 당기는 술자리를 택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20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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