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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기행수필/엄정자의 문학까페]故都의 빛나는 별(1)―교토에서 만난 윤동주 시비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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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3  10: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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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시샤대학의 윤동주 시비

[서울=동북아신문] 지난가을, 한국에서 오신 성기조 시인과 김귀희 시인을 모시고 교토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찾아가게 되었다. 단풍이 한창인 계절이라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이 꽉 찬 신칸센을 타고 겨우 교토역에 내리니 불교대학의 박은희 박사가 마중을 와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귓가를 스치는 단발머리, 가무스름한 얼굴에 동그랗고 까만 눈이 반짝이는 귀여운 모습이다.

  “오래간만이에요. 잘 계셨어요?”
  가벼운 포옹과 인사를 나누고 둘이 서로 안부를 물으며 지하철역으로 손님들 마중 나갔다. 지하통로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서 왼쪽으로 도니 지하 동쪽 출구 개표구가 있었다.
개표구를 나가서 그대로 쭉 20∼30미터 걸어가니 지하철 도리마루(鳥丸線)선 개표구가 오른쪽에 나타났다.

   
▲ 도시샤대학 예배당
   그런데 진작 도착했어야 할 손님들이 안 보였다. 전화로 연락해보니 호텔 사람들의 설명대로 간다는 것이 다른 역에 내려버렸다고 한다. “아침에 교토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왜 거기로 갔지?” 하는 혼잣말에 옆에서 박 선생이 “늘 빨리빨리 앞질러 가려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민족성이잖아요.”라고 말하기에 나도 웃었다. ‘우리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였을 것인데 도리어 서로 어긋나고 말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교토역으로 돌아오라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한 5분 기다리니 손님들이 도착해서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세계 펜클럽 회장을 지냈고 조선족 작가들과도 오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기조 시인은 칠십 고령임에도 늠름한 풍채가 여전했다. 짙은 회색 코트에 감색 베레모를 쓰고 있는데 중후함에 카리스마가 스며있어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김귀희 시인은 파란 등산복에 하얀 캡을 쓰고 있었는데 갸름한 얼굴에서 지성이 깃든 큰 눈이 빛나는 밝은 분위기를 지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인사를 마친 우리는 국제회관(国際会館)행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을 타고 9분쯤 가니 금방 이마데카와(今出川)역에 도착했다. 1번 출구로 나와서 밖에 나오니 길 건너편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캠퍼스가 보였다. 하얀 담장 너머로 빨간 벽돌로 지어진 청사들이 옛 그림같이 아련히 보인다.

  길을 건너서 담장을 따라 왼쪽으로 좀 가니 도시샤대학의 서문이 나오는데 서문에서 다시 왼쪽으로 100m 정도 걸어가자 예배당이 보였다. D.C.그린의 설계로, 1886년 6월에 준공한 건물인데 개신교의 벽돌 구조 채플로서는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정면 중앙에는 원형의 장미 창문을, 그 좌우에 아치형 창문을 설치하고 크고 작은 두 개의 삼각형 지붕과 뾰족한 아치형 입구를 가지고 있어 고딕 건축의 특징이 있었다. 운치가 있는 예배당건물을 쳐다보노라니 윤동주가 기독교 신자였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니 그도 이 예배당에 다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옆구리에 책을 끼고 아치형 입구에 들어서는 윤동주의 모습이 환영같이 떠오른다.

  “이 예배당은 1963년 7월에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박은희 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예배당을 지나 동쪽으로 좀 가니 윤동주의 시비가 보였다. 노란 단풍이 든 작은 정원에 윤동주의 시비와 정지용의 시비가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었다.

  윤동주는 1942년에 일본에 건너왔는데 4월에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했고 그해 9월 교토로 옮긴 뒤 10월 1일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 영문학과로 입학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 정지용이 민예학 연구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로부터 영문학을 배운 학교이다. 야나기 교수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의 문화유산을 사랑했고 조선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했던 인물이다. 정지용은 이 학교 재학 중 〈압천〉, 〈향수〉, 〈카페 프란스〉 등 20여 편의 시를 썼다. 그렇게 보면 정지용이 윤동주의 대학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지금 두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으니 저세상에서 만났다면 지금도 시를 말하고 민족을 말하며 즐거운 담소를 하지 않을까.

  1943년 7월 14일, 윤동주는 조선 독립운동을 하던 종형 송몽규와 일본의 조선 정책을 비난하고 조선인들에게 조선 독립을 호소하였고 조선어로 시를 써서 민족 운동을 선동했다고 하여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가 도시샤대학에서 공부한 시간은 1년이 안 되지만 그의 인생에서 자유의 몸으로 살았던 마지막 시간이었으니 후쿠오카 형무소의 철창 안에 갇혀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서 새우잠을 잘 때 그의 꿈속에는 교정의 빨간 벽돌예배당, 빗물에 젖은 교정의 산책로, 배고픔을 달래주던 학교식당의 모습들이 풍경화같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지금 윤동주의 꿈속에라도 들어간 듯 눈앞의 모든 풍경이 애틋하게 아름답게 보이었다.

   
▲ 도시샤대학 윤동주 시비

  1995년, 도시샤대학 출신의 재일동포들을 중심으로 윤동주 시비 건립안을 대학교 측에 제의했고 도시샤대학에서도 전면적으로 협력하여 시비 건립이 결정되었다. 드디어 1995년 2월 16일, 전후 50년, 윤동주 사후 50년 되는 때에 윤동주 시비가 도시샤 대학 캠퍼스 안에 건립됐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가 한국·조선어와 일본어(伊吹郷이부키 고 번역 )로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와세다대학의 오무라 마스오(大村正雄) 교수가 쓴 윤동주의 소개문이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다시 읽어보아도 마음을 뜨겁게 하는 시이다. 나라 잃은 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지만 ‘한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수난의 시대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시인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식민지 통치하에 ‘죽어가는’ 민중의 모습이다. 하지만 시인은 참혹한 현실 앞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시인은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라고 다짐한다. 여기에서 ‘별’은 아마 시인 자신일 것이다. ‘바람’은 시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고민일 것이고, 하지만 시인은 그 고민 속에 침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자기 성찰 속에서 한층 더 높은 경지로 승화된다.

  윤동주의 「서시」에 대해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석이 있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거닐었을 그 자리에 서서 거기에 세워진 시비를 보면서, 구절구절 새겨진 그 시어들을 읽어내려가노라니 나는 나대로 마음속에 새로운 감회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타향살이를 하는 내 심경에 맞춘 해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읽으니 감동이 조수같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야 하는 나는 진정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고 있는지, 그런 질문을 나에게 하면서 시인의 시비 앞에서 묵도하였다.

  시비 건립은 도시샤대학 코리아 출신의 OB들이 교우회 조직을 만들 때 남북의 대립 때문에 명부를 정비하지 못한 데로부터 유래한 일이라고 한다. 남북 양측이 다 높이 평가하는 윤동주의 시비를 세워 통일적인 교우회 조직을 만드는 동시에 윤동주를 현창하고 남북의 통일과 일본과의 우호 친선을 도모하려는 취지에서 건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징으로 시비의 왼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화 진달래가, 오른편에는 한국 국화인 무궁화가, 북쪽(예배당 앞)에는 도시샤대학의 창시자인 니지마 죠(新島 襄)가 사랑했던 매화꽃이 심겨져 있다. 

   
▲ 정지용 시비 앞에서 성기조 시인 김귀희 시인 박은희 박사와 함께(왼쪽 첫 번째, 엄정자 작가)
  지금은 가을이라 노란 단풍만 있지만 이른 봄 2월에 빨간 매화가 꽃을 피우고 5월에는 분홍 진달래가, 한여름에는 보라색 무궁화가 피고 있을 것이니 윤동주도 정지용도 시가 절로 나오는 풍경 속에 살아있는 셈이다. 이 아름다운 학교 정원 속에 지금도 윤동주가 살아있고 다시 시를 짓는다면 그는과연  어떤 시를 지을 것일지?

  윤동주를 일본의 교과서에 올린 이바라키 노리코는 “尹東柱의 매력은 이십 대의 ‘젊음과 순결’이 그대로 보존 처리된 데에 있으며, 그 상태로 영구 보존되어 왔기 때문에 항시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獨協大學 沈元燮 「茨木のり子와 尹東柱」)라고 했지만,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윤동주라면 여전히 사람들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강직한 시들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들도 여전히 그의 시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 멋대로 생각해 보았다.

   “선생님들, 점심때도 되었는데 우리 윤동주가 식사하던 학교식당에 가서 밥이라도 먹을까요?” 박 선생님의 제의에 우리는 학교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 양편에 늘어선 빨간 벽돌 교사(校舍)를 구경하며 식당 앞에 이르고 보니 오늘따라 식당 문이 닫혀 있지 않은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고등학교 학생들이 센터시험을 보는 날이라서 쉬는 것 같았다. 아까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던 고등학생도 아마 그래서 대학교 정원을 지나갔던 모양이었다.

  윤동주가 밥을 먹던 자리에서 밥을 먹어보는 기회를 잃은 것이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근처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노란 단풍과 빨간 벽돌집이 보기 좋게 어우러진 윤동주의 혼백이 살아있을 교정을 나서면서 나는 속으로 시인의 시를 다시 한번 외웠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다음에 계속/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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