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윤동주유혼지비(「尹東柱留魂之碑」)

[서울=동북아신문]  도시샤대학 정문을 나와서 길을 건너니 작은 식당들이 사이사이 보였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우동 괜찮으세요?”

  11월이라지만 몇 시간이나 밖에 있고 나니 몸이 차가워졌던지라 따뜻한 우동이 좋을 것 같아서 일행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다들 좋다고 해서 우동집을 찾아 나섰다. 마침 골목으로부터 제복을 입은 OL(여사무원)가 나오기에 “すみませんが、近くに美味しうどん屋ありますか?(근처에 맛있는 우동집이 있어요?)”하고 물었더니 우리를 보고 “韓国人ですか。(한국사람이에요?)”하고 되묻더니 자기도 한국드라마를 좋아한다면서 친절이 우동집까지 안내해주었다. 상냥한 그녀를 보며 일본에 한류가 얼마나 깊이 침투되었는지 실감 되었다.

 

▲ 교토조형예술대학 앞의 '윤동주유혼지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은 우동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우동 쯔유(국물) 특유의 가츠오부시(가다랑어) 냄새가 훅 코를 찌른다. 좀 어스레한 가게 안에는 손님들이 빼곡 빼곡 앉아있었다.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아 주문하니 금방 기쓰네우동이 나왔다. 노란 유부와 핑크색 가마보코 아래 말간 국물이 식욕을 불렀다. 일본에 와서 처음 우동을 먹었을 때 먹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국물맛에 깜짝 놀랐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 맛이 입에 배어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서 집에서 끓여 먹기도 하니 일본에서 산 세월이 고스란히 몸에 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근처에 세운 박 선생님의 차를 타고 교토조형예술대학(京都造形芸術大学)으로 향했다. 자가용이 없으면 JR교토역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고 한다. 도리마루 중앙출구(烏丸中央口北側)로 나와 정면의 버스터미널로 가면 앞에 교토타워가 보이는데 A1 탑승구에서 시내버스 5계통 이와쿠라행(市バス5系統/岩倉行)을 타고 카미하테쵸 교토 조케게다이마에(「上終町京都造形芸大前」)에서 내리면 된다고 한다.

  차를 타고 10분쯤 가니 금방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 편의점이 있어서 물도 살 겸 거기에 잠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저쪽에 시비가 있어요.”

 

▲ '尹東柱留魂之碑' 앞에서 기념 사진 남긴 저자

  박 선생님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큰길 옆 학교건물 아래 시비가 보였다. 길을 건너 가까이 다가가니 길바닥에서 1미터쯤 높은 곳에 「尹東柱留魂之碑」 가 있고 그 왼쪽에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위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윤동주의 친필필체로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이부키 고(伊吹郷)가 번역한 일본어 시가, 그리고 아래에는 그곳에 대한 설명이 일본어와 한글로 씌어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여기에 있었던 다케다(武田)아파트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연행된 것은 
   一九四三년七월十四일이었다.
  북간도에서 태어난 그가 一九四二년 일본에 건너와 도우시샤
  (同志社)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청렬(淸冽)한 시를 쓰던 곳이
  이곳, 타카하라(高原)이다.
  一九四五년二월十六일, 조국의 해방을 기원하면서 후쿠오카
  (福岡)형무소에서 二十七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윤동주 시혼(詩魂)은 그가 작품활동을 하던 이곳에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二00六년 六월 二十三일

 

  소개문을 읽어내려가노라니 윤동주가 6첩 다다미방에서 고심하며 시를 쓰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쉽게씨워진詩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남의나라、

詩人이란 슬픈天命인줄알면서도
한줄詩를 적어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주신 學費封套를받어

大學노―트를 끼고
늙은敎授의 講義 들으려간다。

생각해보면 어린때동무를
하나、둘、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홀로 沈澱하는것일가?

人生은 살기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나라.
窓밖에 밤비가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잡는 最初의 握手。

  물론 이 시는 1942년 6월 3일에 쓴 시이기 때문에 교토가 아니라 도쿄 릿쿄대학교에 다닐 때 쓴 시이다. 하지만 그 후 3달밖에 안 지나서 비슷한 환경의 교토 다케다 아파트에서 생활했으니 그의 생각 정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습관 되지 않는 다다미방, 그 차가운 6첩 다다미방이 윤동주에게는 낯설고 숨 막히는 일본이라는 ‘남의 나라’ 자체로 느껴졌을 것이다. 따뜻한 온돌에서 살던 그이니 비 내리는 날이면 더욱더 차갑게 느껴지는 다다미방에서 자신의 처지와 현실에 외로움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보내주신 學費封套를 받어’들고 자신이 부모님의 사랑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반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송몽규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자신은 ‘大學노―트를 끼고∕ 늙은敎授의 講義 들으려간다.’는 것,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 이 모든 것에 그는 ‘부끄러운 일이다.’ 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쉽게 씌어 지지 않은 ‘쉽게씨워진詩’이다. 만약 그가 이듬해에 체포되지 않았다면 그도 송몽규같이 열렬한 반일투사가 되어서 격정적인 저항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다른 시대 다른 현실에 살고 있지만, 나 역시 그런 고민을 해보았다. 일본이라는 이국땅에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지? 그런 고민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무릇 일본에 와서 유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라면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들 그와 비슷한 고뇌 회의감을 느껴봤을 것이다. 그래도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이렇듯 윤동주가 자기 성찰을 통해서 각성했듯이 나도, 재일 유학생들도 미래를 믿고 다시금 자리 차고 일어난 것이다. 

  이같이 윤동주의 시는 지금도 우리에게 희망과 미래에 대한 신념을 안겨주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성기조 시인, 김귀희 시인, 박은희 박사와 함께 '윤동주유혼지비' 앞에서

   윤동주가 살았던 기숙사에서 도시샤대학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는 카모대교(加茂大橋)를 건너서 학교에 다녔다고 하는데 좋아하는 시인인 정지용의 ‘압천’(鴨川)을 읽으며 다리를 건넜을 것 같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교토의 중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가모강,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 정지용이 느꼈던 그 처연함과 애수를 윤동주도 똑같이 느끼지 않았을까? 같은 강을 건넜고 같은 교정을 거닐었던 두 사람, 시인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시는 남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윤동주가 살았던 다케다 아파트, 그가 거닐었던 가모강변, 그곳에 윤동주의 시비를 세우려고 노력했고 드디어 시비를 세워낸 이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는 바이다. 그들의 노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윤동주를 찾아올 수 있게 되었고 윤동주를 떠올리며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윤동주유혼지비」(「尹東柱留魂之碑」)의 비문은 한국 영주석(栄州石)에 새기었고 토대석은 교토 안마석(鞍馬石)을 썼다고 한다. 2006년 6월 23일에 거행된 제막식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윤동주의 막내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씨와 남편 오영범(呉瀅範)씨, 연세대학교 정창영 총장, 홍익대학교 예술문화연구원의 박언곤 소장이 참석했다.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윤동주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가 남겨준 시를 읊으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박은희 박사는 이곳에 올 때마다 윤동주가 걸었던 그 길을 함께 걷고 싶어서 도시샤대학에서부터 걸어서 왔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다음 곳을 향해서 떠났다.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또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마음속으로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도 이 길을 따라 윤동주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걸어보고 싶다. 정지용의 시를 읊조리는 윤동주의 그림자를 따라 그의 시를 읊으면서…….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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