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미성, 1982년 중국 길림성 룡정시 출생. 중국 연변대 조선언어문학 학사, 석사 졸업. 한국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박사 수료.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이사.

‘중국조선족’이라는 명칭에 대한 오해

 

윤동주는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후세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는 일제강점기 대표적 시인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인 2017년에 이어, 3.1운동 100주년인 올해에도 윤동주는 시낭송회, 문학예술제, 콘서트, 뮤지컬, 영화 등 여러 가지 형식의 행사로 재조명받고 기념되고 있다.

윤동주는 '북간도(北間島)'에서 태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윤동주의 생가는 중국 지린성 룡정시 명동촌(吉林省龍井市明東村)에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지칭하는 '간도(間島)', 즉 '북간도'는 두만강 이북의 룡정시를 포함한 지금의 연변조선족주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일대다. '간도'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중국과의 영토문제를 논하면서 '간도'를 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윤동주의 조부가 이주하고 윤동주가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다녔던 '북간도'는 적어도 그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중국의 땅이었음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윤동주 생가는 2012년 연변조선족주치주의 추진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아 수리되었다. 그런데 수리과정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힌 표지석이 새롭게 세워졌고, 그 뒤로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는 호칭에 불편해하거나 반감을 드러내는 시선들이 한국사회에 상당수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중국 대표 포털사이트바이두(百度)의 백과사전에 윤동주의 국적이 중국으로, 민족은 조선족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고 언론화하면서 ‘중국조선족’이라는 윤동주에 대한 호칭의 문제점이 다시 한 번 불거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던 한국인들과, 윤동주 관련 연구나 사업을 하던 한국인들로부터 소폭으로 전해지다 보니 파장이 크지 않았지만, 언론에 대한 반크의 폭로는 인터넷을 타고 일파만파 번져 급기야는 ‘중국에서 고구려 땅을 빼앗더니 이제는 윤동주까지 빼앗으려 한다’며 중국 혐오 태도를 보이는 국민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 연출됐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에 부쳐 출간된 『윤동주 시 함께 걷기』를 보면, 윤동주의 출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중국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으로 독자의 흥미와 주의력을 끌어내는 부분이 인상 깊다. 북간도에서 출생한 윤동주의 귀속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중국과 윤동주의 관계가 공론화되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윤동주를 ‘조선족애국시인’이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정당한 측면을 설명해주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로지 부당한 측면만을 꼬집는 글들이 앞 다투어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하면 안 되는 이유 등을 누누이 강조하는 목소리를 높일 뿐이라는 점이다. 

윤동주가 중국 사람이라니? 대한민국에서 윤동주는 교재나 시험문제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무릇 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국민이라면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윤동주는 대한민국의 명망 높은 시인이다.

현대시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진행되었던 여론조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1위가 윤동주였다. 그런데 이렇듯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윤동주 시인을 중국 사람이라고 하다니,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충분히 순간적으로 당혹스럽고 어처구니없고 분노할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중앙일보와 전남일보의 인터넷 기사내용을 각각 인용해보자면, “지난 2012년 중국 지린 성에서 윤동주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국적을 마치 중국인 것처럼 소개한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윤동주 시인을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본 것과 다름없다.

일본 검찰이 공개한 윤동주에 대한 재판 기록들을 봐도 윤동주 시인의 본적은 함경북도로 한국인임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윤동주의 가족이 일본의 폭압을 피해 북간도로 피난을 갔지만 국적이 바뀐 적은 없다. “조선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한민족 계열의 소수민족이다. 1910~30년대 만주에 거주한 사람들과는 애시 당초 다르다. 1909년 청ㆍ일 간도협약에 ‘도문강 이북의 간도지역 내 한국민 거주를 승인한다’고 돼 있다. 간도 거주 한국민은 청의 보호(통제)를 받지만, 그 나라 백성은 아니었다”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사내용들은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호칭을 못마땅해 하는 인식의 배후에 깔려있는 생각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배후에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공동으로 망각되고 있다. 그 망각이 불러일으킨 오해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불만과 분노가 더 크게 끓어 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조선족’이라는 호칭과 중국조선족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진실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한민족 계열의 소수민족이고, 1910~30년대 만주에 거주한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전자의 경우는 국적을 취득하였고 후자의 경우는 국적과 상관없이 거주로 보기 때문에 둘이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근대 간도에 거주하였던 한인들의 국적문제는 한중일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뒤엉켜진 아주 복잡한 문제다.

해방 전 한국과 중국은 모두 명확한 국적법이 없었거나 국적법이 만들어진 다음에도 지금처럼 국적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출입국통제를 철저하게 실행하지 못했다. 또한 국적법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각 나라마다 자국의 여러 상황에 비추어 제정하고 관리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고 모순될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 한국은 국민이 다른 나라 국적을 가져도 자기 나라 국적이 자동 말소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이었고, 중국은 만주국 성립이전에 국적법을 만들고 간민들의 중국입적을 강요하지만, 이후 '만주국'에 대한 일본과의 협약과 모순되는 점이 발생하자 중국과 일본 쌍방 모두 각자의 수요와 이익을 위해 간도이주 한인의 국적문제에 대해 보다 명확한 규명을 짓지 못했다.

한마디로 '간도'에 이주한 한인의 국적문제는 '간도'에 대한 통치권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태도와 국적법 규정이 달라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였다. 때문에 '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은 '간도'와 고국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국적법에 대한 관리가 엄격해짐과 더불어 중국으로 이주한 한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되고 중국 공민으로서의 합법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족’의 역사를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혼돈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새롭게 생겨난 것은 ‘중국조선족’이라는 명칭이지, 조선족이라는 민족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을 명기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수식어의 의미

‘조선족시인’이 아니고 ‘중국조선족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윤동주를 중국에 ‘강제로’ 귀속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의 원래명칭이 ‘중국조선족’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 애당초 ‘조선족’과 ‘조선민족’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굳이 ‘중국’이라는 수식어를 넣어서 중국의 소수민족을 일컫는 이름으로 특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시인’이라는 문구에서 ‘중국’과 ‘조선족’이 각각 ‘시인’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은 ‘조선족’을 수식하고, ‘중국조선족’이 하나의 명칭으로 다시 ‘시인’의 수식어가 된다는 말이다.

지난 5월 20일부터 22일까지 한국문학번역원이 마련한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이라는 행사와 관련 기사가 참으로 바람직했다. 탈중심의 중심, 모두가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한인문학을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고 소통하는 장을 만들고자 한 기획의도가 좋았고, 조선족은 독자적인 문단을 조성하고 문학지도 발간해왔다면서 윤동주 시인도 조선족작가라고 써준 경향신문 문화면의 탈중심적이고 우호적인 기사내용에 큰 박수를 보낸다. 

아리랑을 중국조선족이 부를 때는 조선족 민요가 되고 한국인이 부를 때는 한국 민요가 된다. 한복을 중국조선족이 입으면 조선족 전통복장이고 한국인이 입으면 한국 전통의복이다. 김치를 중국조선족이 담그면 조선족 전통음식이 되고 한국인이 담그면 한국 전통음식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의 윤동주문학은 조선족문학이고 한국에서 윤동주문학은 한국문학이다. 뺏고 빼앗길 것이 없이 이 모두가 공동의 민족문화유산이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조선족시인’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지금까지의 ‘민족시인’이란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에게도 윤동주를 ‘조선족시인’으로 고쳐 부를 것을 요구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여전히 한국 대표 시인이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시인’으로 평가하는데 대해서 한국인도 무작정 반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조선족 이주역사, 윤동주 집안의 이주사와 윤동주의 출생지, 조선족사회에서의 윤동주 연구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고 윤동주를 걸출한 ‘조선족시인’으로 정의 내리는 조선족사회의 현실적 과제를 들여다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시인’이라는 수식어 하나로 인하여 조선족사회는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첫째, 조선족 문학사 기술에 있어 든든한 기둥뿌리가 생기고 한결 당당한 문학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윤동주를 통하여 자기 민족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고 아울러 젊은 세대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민족적 사명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윤동주를 통해 조선족의 이주사를 보여줌으로써 조선족 사회와 한국 사회의 민족적 유대감을 끈끈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조선족시인’도 좋고, ‘민족시인’이나 ‘한국대표시인’도 좋다. 부르는 방법은 달라도 결국은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시인이고 찬란한 민족문화유산이 아닌가.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인 경계를 만들지 말고 ‘한국의 대표시인’이면서 동시에 걸출한 ‘중국조선족시인’이란 두 날개를 달아주어 마음껏 세계를 비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윤동주를 향한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주해 :
1 장백산 서남쪽,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지방 한인의 이주, 정착지역을 서간도(西間島)라 호칭했는데, 원 간도의 호칭을 서간도와 구별하기 위하여 북간도 또는 동간도라 지칭하게 되었다.
2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룡정시, 연길시,(延吉市) 화룡시(和龍市), 왕청현(汪淸縣), 훈춘시(琿春市), 도문시(圖門市), 안도현(安圖縣)과 돈화시(敦化市)를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www.baidu.com
4 최설,『윤동주 시 함께 걷기』, 서정시학, 2017
5 http://news.joins.com/article/20707937
(중앙일보 <윤동주 생가에 ‘조선족 애국시인’ 표지석 세운 중국>)
6 http://www.jnilbo.com/read.php3?aid=1475679600507520049
(전남일보 <만주에서 조국의 역사를 생각한다>)
7 중국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을 장백산이라고 한다.
8  지금의요닝성 신빈(遼寧省新賓)
9 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201841001&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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