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경주는 신라의 수도였고 서라벌이라 불렀으며 천년 역사동안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신라시대 초기부터 통일 이후까지 신라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들로,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경주를 여행하는 것은 신라를 알아가고 그 숨결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경주로 자주 간다. 그래도 서뿔리 잘 안다고 말을 못한다. 오래 만나도 그 속을 모르는 인연처럼 먼 경주를 6월에 만나기로 했다. 경주를 잘 알고 싶었고 경주와 함께하고 싶었다.

딸 하고 사위가 일본에서 열흘 휴가 내고 울산에 왔다. 자주 못 만나는 백년손님은 경주처럼 서먹하다. 보고 싶다고 입에 달고 있었지만 정작 들이닥치니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저녁에 언니네, 시 동생네, 조카랑 앉아 술이 좀 되자 경주 생각이 났다. 경주 보러 가자고 했다. 딸하고 사위는 무조건 오케이었다. 옆에서 다들 사위보고 사기당했다고 후회할 거라고 귀띔했지만 사위는 백년손님만큼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 아버님을 모시고 따라 나서기로 했다.

 동리.목월문학관

울산에 온지 12년, 우리 부부는 일년에 한번씩은 경주를 찾는다. 그래도 문학관만은 한번도 오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문학을 금방 시작한 초년생으로 한번은 꼭 오고 싶었지만 남편이 썩 달가워하지 않아 여직 미루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지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아버님을 모시고 병원에 들리는 사이 나는 애들을 닥달하여 먼저 출발했다.

김동리선생의 소설은 <바위>만 읽었었다. 시 적인 서두와 경산도의 특유의 방언으로 눈길을 휘어잡았던 기억이 좋았다. 건방지게 평가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만의 이끌림이었다. 김동리 선생님이 나한테 준 인상은 그것 뿐 이었다. 문학관 입구에 김동리 선생의 정원에 있던 석조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글 쓰시는 분이 이상한 취미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20대에 출가의 꿈을 가졌었다 했다.

<황토기> 가 영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위와 딸은 호기심에 심취하여 들었고 나는 유리벽에 새겨진 선생님의 연보와 전시된 작품들의 구절들을 읽어 내려가며 간만에 얻어진 자유를 즐겼다. 진렬된 선생님의 영혼이 스며든 육체 글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선생님의 시 세계를 읽으며 북을 치듯이 울려오는 구절에 빠졌다. “소설은 형상이요, 시는 영상이다. 소설은 육체를 갖춘 생명이요, 시는 육체를 거세한 영혼이다. 따라서 시는 영혼을 노래해야 한다. 사람의 혼을, 산천의 혼을…… 이것이 시의 가장 본질적인 의의요, 기본적 기능이다.”

김동리선생은 한국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 등 신비적이고 허무하면서도 몽환적인 세계를 통하여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그 이후에는 그의 문학적 논리를 작품에 반영하여 작품세계의 깊이를 더 했다. 6.25 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과의 갈등을 조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친일단체인 문인보국회와 국민문화연맹으로부터 가입통지서가 날아왔으나 불살라 버렸고 소설 <소녀>와 <하현>이 일제의 검열에 걸려 전면 삭제되자 해방 때까지 절필하고 침묵했다 한다. 선생님의 작가정신은 문학관을 도는 내내 가슴을 채워 주었고 어느 땐가 글을 쓰려면 작가정신이 투철해야 한다는 조언을 주셨던 어느 시인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김동리선생 흉상의 바로 뒤 유리벽에는 이어령 시인님의 글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동리 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던 선생님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구절이다. 선생님의 서재가 재현되어 있는 벽면에는 한문으로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春风雅雅熊蓉物 秋水文章不染塵”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처럼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재 앞에서 사진 한 장 남겼다.

74세와 44세의 30년의 차이를 극복하고 혼인을 맺은 소설가 서영은과의 재혼, 놀라웠지만 그 보다 둘째부인 손소희와 재혼할 당시 김동리 선생은 첫 부인 김월계와 혼인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 더 놀라 웠다. 삶도 소설 같은 김동리 선생님이었다. 삶이 소설을 쓰게 하고 소설은 삶의 대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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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 켠은 목월 문학관이다. 박목월 시인의 사랑이야기는 누구나 입에 담았다. 시인이 현숙한 아내가 있음에도 여대생 제자와 사랑에 빠져 서울대 교수의 자리와 가정까지 두고 떠났다 는 건 심심한 입들이 껌 처럼 씹기에 적정했다. 그때 아내 유익순 여사는 제주에 하숙하고 있는 시인과 그의 애인을 찾았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한복 두벌과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돈봉투를 건네 주고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생활을 위로했다 한다. 시와 시인을 진정 사랑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 가고 생각한다. 유익순 여사님은 나를 감동시켰고 어느 시인한테 박목월 시인은 연필로 시를 썼지만 유익순 여사님은 삶을 시로 썼다고 희떠운 소리를 쥐여 친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시인은 웃을 뿐 아무 말 없었다.

“나는 소년 시절을 달빛 속에서 자랐다면 지나치게 시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신라의 고도로서의 페허다운 애수를 짙게 간직하고 있었다. 경주는 달빛이 하얗게 비치는 골목길이 어린이들의 놀이터요, 풀이 우거진 봉황대나 잔디가 아름다운 왕릉이 어린이들의 생활 무대였다.” 박목월의 <달과 고무신>의 부분이다. 여기에서 박목월 시인의 시의 배경을 말해준다. 박목월의 초기시집 <산도화>, <난, 기타>에 나타나는 향토적 정서는 고향 경주의 문화재와 자연환경을 통해 형상화된다. 시인은 산문 <나와 청록집 시절>에서 당시의 심정을 회상했다. “나는 늘 혼자였다. 사무가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거리랬자 5분만 거닐면 거닐 곳이 없었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페한 고도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 여기에서 김동리 선생님의 고독이 무서운 유년시절과 흡사하다. 우울하고 병약했던 소년 김동리는 계절마다 이유없이 앓아 누웠고, 혼자서 산과 들을 배회했다. 그에게 외로운 “혼자”는 무서우면서도 오히려 본향으로서의 자연과 합일하는 의식이 되었다.

정지용 시인이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 칭송할 정도로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청록파시인인 박목월, 그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을 녹여서 나온 “이별의 노래”는 아프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건 우리의 이별 노래다. 너도 가고 나도 간다. 우리의 그리움과 우리의 슬픔의 끝이며 우리의 인생이다. 나도 아파보고 싶다… 아픈 사랑 한번만이라도 하고 싶다….

박목월 시인의 대표시들이 월실에 전시되어 시인의 시낭송 영상과 함께 시인의 육성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무겁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으며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전시된 서재 앞에서 사진 한 장 박았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사랑하는 마음도 박아 넣었다. 
“참말로 경산도 사투리에는/약간 풀냄새가 난다/약간 이슬냄새가 난다/그리고 입안이 마르는/황토 흙 타는 냄새가 난다” 박목월 시인의 <사투리>의 부분이다. 경산도의 어투가 투박하다 하여 어느 땐가 서울 말씨를 따라 하다가 그만 둔 적이 있었다. <사투리>는 그 때의 나를 돌아보게 하고 잔잔하게 다가오는 시인님의 향수에 감화되어 간다. 박목월 시인은 연필로 시를 썼다 했던 무례함을 두손 모아 사죄하고 그때 웃음으로 넘겨줬던 그 시인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고조선 이후의 무속적 분위기에, 통일 신라의 분위기가 접목되어 독특한 정신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경주에서 나고 자란 문학의 두 거장, 김동리 선생, 박목월 시인의 문학관을 나오며 경주를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이 달아오른다.

 역사의 왜곡

동리, 목월 문학관을 나오다 보면 왼쪽에는 <아사달의 혼>이라는 석재 기념탑이 만들어져 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탑이라 명명한 후 매년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현수막으로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씌여져 있다.

“통일 신라 경덕왕 시절(8세기 중엽) 옛 백제 땅에 아사달이라는 이름난 석공이 부인 아사녀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이때 불국사를 창건하던 김대성은 아사달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석가탑 건립을 맡긴다. 아사달은 아사녀에게 빨리 다녀오겠노라 하고 서라벌로 왔건만 석가탑 건립은 그리 쉽지 않아 몇해가 흘러가고 말았다. 기다리다 못한 아사녀는 서라벌로 남편을 찾아온다. 그러나 불국사에서는 아사달의 마음이 흩어져 역사에 방해가 될까봐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려고 날마다 찾아오자 한 스님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신령스런 못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당신이 지성으로 기도한다면 탑이 완성 되는 대로 탑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네. 그러면 곧 남편을 만날 수 있으리라.’ 고 했다. 아사녀는 남편이 하루빨리 탑을 완성할 수 있도록 못가에서 매일 지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한 달 두 달 세월이 흐르고 또 계절이 바뀌어 한 해가 지나도 탑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지친 아사녀는 남편이 다른 여인과 같이 산다는 뜬 소문까지 듣고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어느 달 밝은 밤, 물에 비친 아사달의 환영을 보고 못 속으로 뛰어들고 만다. 이윽고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못으로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무심한 물결만 출렁일 뿐이었다. 아내에 대한 연민으로 못가를 헤메던 아사달은 어스름에 문득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 보니 못 가 바위였다. 아사달은 미친듯이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조각에만 몰두하던 아사달이 비몽사몽간에 완성된 바위를 보니 얼굴은 아내요 형상은 부처님이었다. 아사달은 이제 더 할 일이 없는 듯, 달빛 내린 못에 자신도 풍덩 몸을 던져 그리운 아내 곁으로 갔다. 그후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하고 끝내 그림자를 나타내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불렀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한 입 두 입 건너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전설일 뿐이고 석공 아사달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다. “아사달”이라는 인물은 소설가 현진건이 1938년에 소설 <무영탑>에서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만들어 낸 것이란다. 그런데 신라 역사속 인물로 둔갑시키고 불국사의 석가탑을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그렇게 알아버리는 역사의 왜곡은 알고 지나야 겠다.

 신라의 정신

동리, 목월 문학관 입구에 낮다란 단층 기와집이 <신라를 빛낸 인물관>이다. 딸, 사위하고 셋이 들어서자 중년의 여자 안내원이 어디에서 오느냐고 친절하게 물었다. 우리는 중국 조선족이고 애들은 일본에서, 난 울산에서 왔다고 하자 일부러 찾아 주어서 감사하다며 간략하게 설명을 쭉 해주시더니 더 알고 싶으면 또 물어 달란다. 기분 좋게 전시실로 들어섰다.

신라는 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 오면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흥륜사 신라 십성인 아도, 위촉, 안함, 혜숙, 의상,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은 신라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스님들이다. 여기에 돈키호테라고 불리는 원효대사는 과부인 요석공주와의 금지된 사랑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스님의 사랑이라니? 원효가 파계도 불사하면서까지 태종 무열왕의 둘째달 요석공주와의 만남을 실행한 것은 단지 사랑때문이였을까? 원효는 요석공주를 사랑했을까? 진골 귀족도 아닌 6두품출신인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만남으로 무열왕의 사위가 되었고, 김유신과는 동서가 되었다. 하지만 단 3일만에 인연을 끊고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낳았지만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하고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며 대중교화를 하였다. 그후 왕권이나 권력층이 독점하다시피했던 불교종교가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 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며,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는 신라의 불교문화를 만든 것은 원효대사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하겠다.

원효를 얘기하면 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의상대사이다. 의상과 원효는 친한 친구였고 진리를 함께하는 도반이었지만 그들의 삶의 자취는 정 반대다. 당나라로 가는 부두에서 젊은 날의 의상과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 한 잔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정치적인 의상은 대궐쪽을 쳐다봤지만 원효는 백성들과 노래하고 술마시고 뒹굴었다. 의상은 명문가의 아들로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산동바닷가의 여염집 딸 선묘처녀한테 걸려들었다. 원효나 의상, 그들의 사랑에 박수를 보내지만 스님의 사랑은 슬픈 것이다. 의상은 공부를 마치고 말없이 신라로 돌아왔고 선묘는 의상이 떠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 사랑을 지켰다. 의상은 부석사를 지어 선묘의 넋을 기렸지만 원효는 아들 설총까지 낳은 요석공주를 그리움속에서 늙어가는 외로움을 잊었다. 불법의 사랑은 아픈 것이다.

신라의 천년의 역사를 이끌었던 56명의 왕 중에는 박혁거세왕(신라의 시조), 탈해왕(신라 제4대 왕), 미추왕(신라 제13대 왕), 법흥왕(신라 제23대 왕), 진흥왕(신라 제24대 왕), 무열왕(신라 제29대 왕), 문무왕(신라 제30대 왕), 신문왕(신라 제31대 왕), 경덕왕(신라 제35대 왕) 등 용감하고 현명한 왕들이 있다. 여기에서 무열왕과 문무왕은 신라 삼국통일로 이끈 두 주역이다. 태종 무열왕은 선덕 여왕과 진덕 여왕의 조카 김춘추이다. 김춘추는 신라의 외교가로서 고구려와 왜(일본)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실패하고 당나라의 당태종과 동맹을 제안하고 나당연합군을 이루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수 있는 무력을 만들어 주었다. 김춘추는 무열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고구려의 멸망과 삼국통일의 끝은 보지 못했다. 이후 무열왕의 맏아들 문무왕이 김유신과 함께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친구들이 울산에 놀러오면 난 꼭 대왕암을 구경시킨다. 아담한 바위섬으로 보이는데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납골이 뿌려진 곳으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현명한 왕 옆에는 왕을 보좌하며 신라를 지탱해온 버팀목, 재상들이 있다. 거칠부(신라 진흥왕 때의 재상), 김대성(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가), 김양(신라 하대의 대신) 등은 위대한 왕만큼이나 빛나는 현명한 재상들이다. 그중 김대성은 불국사, 석굴암(석불사) 창건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대로 내려온 설화에 의하면 불국사는 현세의 양쪽 부모를 위해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창건하였다 한다. 비록 설화이지만 당시에 널리 유포되었던 점찰법회, 전생 및 보시에 대한 관념, 그리고 무엇보다도 효도의 관념을 담고 있다. 이는 신라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일반인들로 하여금 불교적 신앙의 실천으로서의 보시와 정치적 이념이었던 충의 또 다른 일면으로서의 효의 관념을 고취시켰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말을 타고 전장을 질주하며 용감하게 싸웠던 김유신(가야 왕족 출신의 무장), 무력(진흥왕 때의 장군), 이사부(지증왕, 진흥왕 때의 장군), 당천(문무왕 때의 장군)은 빛나는 승리를 이끌었던 신라의 장군들이다. 여기에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이끈 신라명장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리던 낭도를 이끌었고 가야 왕족으로서 전공을 세워 신라에 귀화하였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을 때 김유신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났으며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의 즉위에도 김유신의 공로가 크다고 한다. 그후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하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의 통혼으로 그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지만 기생집의 노비 천관녀와의 아픈 사랑도 있었다. 어머니 김만명의 눈물에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말을 몰아 천관녀의 집문앞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칼로 말의 목을 베여버리고 다시는 찾지 않았다 한다. 훗날 천관사를 지어 원한을 품고 죽은 그녀의 혼을 달랬다 한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친구를 만드는 김유신의 인간성으로 빚어진 비극적인 사랑이지만 단칼로 자르는 그의 군자의 기질 또한 존경스럽다. 태종 무열왕을 뒤이어 문무왕이 즉위한 뒤에도 그의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고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진영의 단결과 전략 수립에 기여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나라와 결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한 김유신장군에 대해서는 평가가 좋지 않다. 하지만 신라 삼국통일을 위하여, 왕을 위하여 생을 바쳐 장군의 직책을 다 한 김유신은 신라의 명장임에는 손색이 없다고 본다.

붓 한자루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삐어난 신라 문화를 이끌었던 설총(신라 중대의 대학자), 강수(통일신라의 유학자이자 이름난 문장가), 김대문(진골귀족 출신의 학자이자 저술가), 최치원(신라 말의 대 유학자)은 뛰어난 학문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여기에 설총은 원효대사의 아들로서 원효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원효는 불교였지만 설총은 유교에서 거목이었다. 갓 통일 왕국을 이룬 신라는 불심에 있어서는 수백년의 깊이를 지녔으나, 통일된 국가로서는 미흡함이 많았다. 설총은 당에서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와 유교의 9경을 신라말로써 쉽게 풀이하여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그후 신라에 유교가 번창하고 유도에 의해 정치가 안정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설총의 유교 경전과 가르침은 500여년간 변치 않고 유학의 기준이 되어 이어졌다.

 이렇게 전실관에는 신라를 이끌었던 56명의 군왕, 이들을 보좌했던 여러 충신과 재상들, 전쟁에 활약했던 장군과 화랑, 학문과 예술을 이끌었던 학자와 예술가,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효자와 효녀 등 수많은 신라를 빛낸 인물들의 기록으로 신라의 역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경주 여행의 첫 코스를 여기로 정한 건 참말로 잘 된 일이었다. 나오는 길에 남편이 불국사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석불사로

불국사로 안가시고요? 석불사는 또 어디죠?
석불사로 가자는 나의 말에 사위는 놀란 듯 되묻는다. 경주 나들이 기사로 자칭하고 나선 사위, 인내를 하며 장모의 비위를 맞춰주려는 모습이 귀엽다. 석불사가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이 석불사이니 그리 불러야지 않을까.

남편은 몸이 불편한 시아버님을 모시고 석불사까지 오기는 힘이 드는지 불국사에서 기다리겠다 한다. 우리 앞에는 구불구불 뱀 처럼 늘어선 올리막 토함산길이 펼쳐지고 또 펼쳐진다. 딸은 연신 속이 불편하다며 괴로움을 하소연한다. 사위가 차창을 열고 좌석을 뒤로 제껴주며 부산을 떠는 새에 석불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경주가 발 밑에 펼쳐지며 한 눈에 보인다. 경주의 하늘은 흐렸고 바람도 차지만 신성한 고요가 안개처럼 깔렸다. 바람에 실려오는 고도의 숨결, 오랜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고풍스러움을 잃지 않으려고 곳곳에 스며든 신라의 혼들.

매표소 방향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불국대종각의 모습이 보인다. 통일대종은 한국에서의 최대의 종이다. 불국사주지 최월산스님의 남북통일을 위한 발원으로 지난 87년 제작에 착수하여 석불사에서 3백m 떨어진 토함산 산마루의 아자형 종각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 불국사와 고도 경주에 닿는 곳이다. 일찍이 신라 문무대왕이 호국의 용신으로 남기 위하여 묻힌 동해의 해중능을 바라보고 있는 이 종은 오늘 날 남북통일의 원음을 울려줄 목적으로 조성됐다. 우리 셋은 서로의 념원을 담아 종을 쳤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한번의 타종에 1,000원 이상의 돈을 받아 모은 돈으로 요양병원과 더불어 아동관련시설 및 불이웃돕기행사를 진행한다하니 더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개인당 5천원의 입장료를 내고 석불사로 가는 길에 올랐다. 도보로 15분 정도 걸린단다. 숲이 울창하고 굽어진 길 아래는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어느 미궁으로 들어서는 신비스러움이 온 몸을 감싼다. 파자작대는 소리에 흠칫 하며 ‘엄마, 저기 봐’ 하는 딸이 가리키는 곳에서 조그만 청솔모가 두 앞발을 모으고 뭔가를 먹는게 똑 마치 참배하는 보살상이다. 빌고 빌고 또 비는 저 다소곳한 모습을 지나며 몸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듯 하다. 여기 저기에서 파다닥거리며 달려 나오는 청솔모들이 반긴다고 분잡다. 딸과 사위는 갸들의 재롱에 홀려 문학관에서의 지루한 역사공부를 잊었는가 보다. 발걸음도 빨라 졌고 목소리도 챙챙하다.

다양한 연등색들로 한 눈에 안겨오는 석불사.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석불사는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해 774년 해공왕 10년에 완공됐다. 국보 24호인 석불사는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석굴 사원으로 불국사와 동시에 짓기 시작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인공 석굴로 360여개의 돌을 사용해 만든 둥근 천장과 선실의 모습은 신라 장인들의 뛰어난 석조 건축 기술을 잘 보여준다.
석불사는 크게 전실, 주실, 통로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실은 현실세계를 표현한 공간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전실 벽에는 팔부신중이 좌우에 4개씩 모두 8개가 조각되어 있다. 전실과 주실을 잇는 통로 입구에는 양쪽에 금강역사가 서 있다. 부처님의 세계로 나쁜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며 힘이 코끼리의 수백배에 이른다는 금강역사는 험상궂게 생겼고 자세는 비슷하지만 얼굴표정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통로 벽면에는 무장한 4개의 사천왕이 새겨져 있다.

석불사의 중심은 안쪽 주실이다. 타원에 가까운 둥근 주실은 부처의 세계를 표현한 공간이다. 주실의 주인은 본존불이다. 본존불은 1.8m높이의 연꽃이 새겨진 좌대에 앉아 있고, 앉은 키가 3.5m에 이르는 커다란 불상이다. 얼굴 너비가 2.2자, 가슴폭은 4.4자, 어깨폭은 6.6자, 양 무릎의 너비는 8.8자로 1:2:3:4의 비율이다. 눈을 감고 엷은 미소를 띈 얼굴은 근엄함이 느껴지고 커다란 귀와 어깨, 손, 다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 여유로움을 준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진다. 
 ‘가 봐야 불상 하나야’ 주위에서 석불사는 별 의미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했었다. 듣지 않은게 다행이다. 차분해지는 마음은 그 어떤 일이라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바다를 품는다. 모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다밑으로 가라 앉는다. 나는 부처가 되어간다.

수학적 기법으로 잘 만들어진 석불사는 신라 예술의 극치이다. 동양 불교미술의 대표적작품으로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석불사가 1,000년 이상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었던 건 바닥 밑을 흐르는 지하수에 있다고 한다. 지하수는 바닥의 온도를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하게 만들어 불상 표면의 결로현상을 막았다. 석불사 주실에 상층부에 위치한 10개의 감실과 감실을 받치고 있는 돌 사이에는 작은 틈이 존재해 공기를 순환시킨다. 출입구의 아치형 천장 위 광창은 햇빛을 잘 받게 하고 원활한 통풍이 이루게 했다. 신라인들의 지혜로 자연과학 원리들에 의해 석불사가 천년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거다. 많은 외국인관광객들이 육속 올라온다. 우리는 길 옆에 눕힌 석조물들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아 본다. 신라인들의 숨길을 느껴본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도 불어넣는다. 우리는 이어간다.
청솔모들의 배웅을 받으며 석불사를 나오는 길에 산딸나무꽃이 도도하게 피어 있다. 고결한 신라인들의 마음을 전하는 양 순백의 꽃잎을 받쳐들고 있다.

 불국사에서의 나홀로 산책
 
우리가 불국사에 도착하자 남편은 시아버님을 데리고 음식점을 찾으러 나섰다. 한 곳에 오래 있질 못하는 아버님이 또 보채셨나 보다. 애들도 지쳤는지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럼 그럴래?’ 하고 돌아서며 즐거워하는 티가 들키지 않으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표소로 씽씽 발걸음을 옮긴다. 5천원의 입장료로 드디어 나홀로의 산책이 시작된다.
 사실 불국사는 가족들도 여러 번 왔었으니 질리는 것도 이해가 된다. 결혼 1년차 사위보고 후회할 거라고 귀띔해주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아마 지금쯤 멋 모르고 따라온 사위는 후회가 스물 대며 올라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불국사에 올 적마다 내 안의 넘치는 욕망들을 부려 놓고 가볍게 떠나는 욕심에 또 찾는다.

불국사는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로서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모든 사찰이 그러하 듯이 불국사에 들어서면 사람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돌, 나무, 공간들은 인간의 절실한 염원들을 담았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피상적의 세계이다. 불국사 경내에는 많은 문화재가 잔존하지만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려 그후부터 몇 십차례의 복구와 중건으로, 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정성으로 다시 일어섰다. 

 불국사로 들어가는 문은 일주문, 인왕문(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등 4개의 문이 있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왔을 때의 첫 문이며 불국토에 들어왔으므로 부처와 내가 일심으로 뭉쳐서 깨달음을 얻자는 의미이다. 인왕문은 금강문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두분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경계하고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신과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불국정토의 외각을 맡아 지키는 사천왕이 안치된 곳이다. 수행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없애 한마음으로 정진할 것을 강조하는 의미이기고 하다. 나는 불국사의 서쪽에 위치한 불이문으로 들어섰다. 불이문은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이곳을 통과해야만이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라는 불이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오래전에 신라인들이 밟았을 돌길을 따라 걷는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구경하다가 가끔씩 보이는 생을 다 한 고목을 한 참 올려다보다가 그 느낌과 냄새와 질감을 마음속에 저장한다. 올때마다 설레는 건 나무들 사이로 불어주는 바람의 음절이다. 시간의 공간을 넘어 신라의 목소리와의 만남이다.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더라도 불러들이는 속삭임들이다. 언제 걷혔는지 맑게 개인 하늘위에 6월의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 쬐지만 신라의 숨결을 머금은 울창한 나무잎들이 한줄기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다. 꽉 들어찬 나무들의 내음이 혈관속까지 들어와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긴다.  

 불국사 앞, 대석단 동쪽은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앞 계단을 청운교라 하고 위쪽 계단을 백운교라 하는데 국보 제23호다. 전체 33계단이고 청운교는 17단인데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는 16단인데 흰 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며 경사각도는 45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불교 우주관에 의하면, 33이라는 숫자는 곧 우주를 뜻 하기도 하고, 하늘나라의 신인 제석천이 사는 도리천을 의미하기도 한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다. 지금은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지 못하게 하고 왼쪽으로 길을 내어 대웅전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자하문은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백화교를 이어주는 문이기도 하다. 자하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이 통하는 중문으로 부처님의 몸에서 비추는 자금광이 안개처럼 서린 문이라는 뜻이다.
자하문 옆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소박한 받침돌 위에 좌경루라는 누각이 있다. 원래는 경전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운판과 목어가 있다. 좌경루와 함께 경전을 보관하던 ‘우경루’를 범영루라 부르며 내부에는 법고가 놓여 있다. 범영루는 그림자가 물에 뜬 누각이란 뜻인데 지금은 앞이 마당이지만 예전에는 연못이었다고 한다. 화려한 수미산 모양의 팔각 받침우에 지은 범영루는 108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을 구현한 것인데 108명이 앉을 수 있다.

불국사 앞, 대석단 서쪽은 국보 제22호인 연화교.칠보교다.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18계단의 다리로 아래쪽에 있는 10계단은 연화교이고 위쪽은 8계단의 칠보교이다. 연화와 칠보는 두개의 다리로 아미타불과 보살이 이용할 수 있는 계단으로 삼았다 한다.
좌경루의 오른쪽으로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옥로수라고 사람들이 시식하고 있다. 나도 따라 한모금 마셨는데 생각밖에 잡내도 없고 정수기 물보다 감칠맛이 있다. 시원한 토함산 샘물에 개운한 마음으로 대웅전을 향한다.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화엄경>에 극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는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일곽과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들을 이루어 놓았다.
좌경루의 회랑에 있는 대웅전의 옆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국보 제21호인 석가탑이 있고 오른쪽에는 국보 제20호인 다보탑이 있다. 벌써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웅전으로 들어서며 불공을 열심히 들이고 있다. 나는 합장을 하고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에 인사를 간단히 드리고 안을 기웃거리며 관찰중이다. 대웅전은 대웅보전이라고도 하는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 큰 힘이 있어서 도력과 법력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앞에서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이야기를 길게 널어 놓은 것도 석가탑 때문이다. 전설과 달리 석가탑은 탑신에 아무런 조각이 없고 간결해 보인다. 하지만 각 부의 비례가 균형이 잡혀 안정되고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신라 석탑의 표본이 되는 탑이다. 이 탑을 무영탑이라고도 하는데 아사녀의 전설과 관련된 것이다. 바로 옆에서 두 연인이 서로 사진을 찍어 준다고 그러더니 여자분이 이 탑은 모양새가 너무 없네 하며 사진찍기를 거부하고 다보탑으로 가더니 포즈를 잡는다. 다보탑은 석가탑과 짝을 이룬다. 신라의 독창적인 고안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며 석조물의 조형기술이 탁월하여 신라석탑의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그 이름이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석가탑의 오른쪽 범영루에 법고가 침묵하고 오랜 세월 보여주듯이 튼 살결들을 드러내고 있다. 저 북소리는 어디까지 울렸을까? 하는 생각을 따라 보이는 건 대웅전을 마주하고 가지런히 진열된 수십장의 시를 적은 액자들이다. 그 중의 “우리 아빠는 이순신/우리 집의 규칙과 규율을 정하고/밖에서 일과 전쟁하여/우리집을 지키는 왕…” 경주초등학교 5학년생 어린이가 <우리집의 왕>으로 지은 시의 첫 부분을 읽는데 법고가 뇌리를 치며 울리는 듯 하다. 치매로 애가 되어버린 시아버님도 저런 왕의 시절이 있었다는 슬픔이 둥둥 떠다닌다.

대웅전 뒤편으로 들어선다. 무설전이라는 불경을 강의하는 강당인데 진리의 본질과 불교의 깊은 뜻은 언어로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설법이 없는 큰 집이라는 뜻이다. 670년에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최초로 설법을 하였다. 무설전이라며 설을? 하는 집요함이 심술궂게 따른다.
무설전 뒤 계단을 오르려는데 외국인 아가씨가 가파로운 계단을 힘겹게 내려오고 남자분이 커다란 카메라로 위에서 찍어준다. 나도 그 장면을 찍었더니 둘은 폭소를 터뜨린다. 이런 성스럽고 장엄한 곳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크게 한바탕 웃고 관음전으로 오른다. 관음전은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살을 모신 성전으로서 관세음 보살은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중생을 구원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불국사의 관음전은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관음전 왼쪽아래로 내려오면 고려시대 양식으로 지은 비로전이 있다. 비로전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국보 제26호인 비로자나불이 있다. 몸은 바로 앉아서 정면을 향하고 오른손의 둘째손가락을 세워서 왼손으로 잡는 지권인을 하고 있다. 지권인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심오한 뜻을 나타낸다.

비로전 옆 뜰에는 보물 제61호인 사리탑(부도)이 있다.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장식이 화려하고 섬세한데 전각속에 갇혀 있어 답답해 보인다. 사리탑의 바로 앞, 작은 옆문으로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제자인 16명의 나한을 모신 전각이 나오는데 나한전이라 한다.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 말로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를 끊은 덕이 높은 승려를 의미한다. 나한전 둘레에는 많은 참배객들이 돌탑을 쌓아 소망을 기원하는 “소탑지”가 형성되었다. 나도 돌을 몇 개 주어 다가 쌓았다. 그런다고 달라지진 않겠지만 아버님의 아픔을 돌탑우에 올린다.
나한전의 왼쪽 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들이 진열되었다. 신라시대 화장실 유구가 우리 재래식 화장실모양 그대로인 것이 눈에 띈다. 왠지 친근한 느낌이다. 꼬마 관광객들이 그 석조에서 볼일보는 흉내를 내느라 신이 났다. 슬쩍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그냥 앞 계단을 타고 내려와 조그마한 찻집에서 경주 찰보리빵을 한 세트 사고 말았다. 따끈하고 쫀뜩한 경주의 감미로움을 한 입 가득 채우고 그 아래 계단 따라 내려오니 범종각이다.

범종각 안에 걸려있는 범종은 불국토의 원음을 연주하는 악기로 땅 속 중생을 구제하는 교화 도구이다. 사찰에서는 예불의식 때나 시간을 알릴 때 범종을 친다. 서재에 앉아 책을 보다가 사찰에서 들려오는 범종의 소리를 들을 때가 가끔 있다. 그때는 그 종소리가 끝날 때까지 멍을 때려 본다. 짧은 휴식이지만 행복하다.
남편의 메시지가 떴다. 보문의 “진수성찬” 한정식으로 오라 한다. 아직 극락전을 돌지도 않았는데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불이문으로 나간다. 애들도 기다리다 지쳤는지 차안에서 자고 있다. 미안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더 큰 건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예전에 돌았던 기억을 살려서 마음의 산책으로 여유를 가진다.

극락전은 연화교.칠보교를 거쳐 안양문으로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위치에 있다. 중생의 고난과 고통을 살피고 구제하는 극락정토의 주불이신 국보 제27호인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상,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극락전의 옆에는 황금돼지가 놓여 있고 항상 입에 지페가 물려 있다. 제물과 의식의 풍요로움을 상징하고 길한 동물로 여겨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극락정토의 복돼지는 아마 오늘도 입에 돈을 물고 있을 거다.

 그림속의 첨성대

보문 “진수성찬”에서 우리 다섯식구가 드디어 상봉을 했다. 아버님은 우리를 보자 해맑게 웃으신다. 어디에 갔댔냐고 엄청 찾았다며, 당신이 귀찮다며 관광을 포기한 건 벌써 잊으시고 맛있게 드신다. 갈비찜 정식, 간장게장 정식, 한우 수제비 떡갈비 정식에 따라 나오는 멸치볶음부터 버섯볶음, 호박나물볶음, 새우튀김, 가자미구이, 더덕구이, 해파리냉채, 김치, 깍두기에 물김치등 밑밥찬들에 구수한 된장찌게까지 두 테블이 꽉 찬다. 한상 차림으로 경주 한정식 맛집의 감동을 준다. 아버님은 갑자기 알을 꼭 품은 간장게장을 젓가락으로 툭툭 치며 이걸 왜 먹냐 면서 먹어 대는 우리를 꼿꼿한 눈길로 본다. 왠지 죄 지은 느낌이 들지만 입맛은 돋군다. 음식들이 비워갈 무렵, 예상대로 집에 갈래! 하는 아버님을 모시고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렸다. 그 순간 살그머니 시름을 덜었는데 애들 데리고 하루 밤 더 묵으면서 집 걱정 말고 경주를 다 돌고 오라는 남편의 말에 괜히 미안하고 민망하다.

그 것도 잠시, 우리는 재빨리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만났다는 요석궁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먼저 차에서 내린 나는 애들이 주차를 하는 사이 대릉원이 펼쳐진 풍경속으로 벌써 녹아 들었다. 박목월은 “신라 고도로서의 페허다운 애수를 짙게 간직했다”며 경주가 간직한 옛 분위기를 찬양했었다. 육체와 풍경의 서로의 교감을 보여준 것 처럼, 나도 보드라운 잔디로 덮인 신라 왕들의 묘지들과 유달리 예쁜 하늘과의 선명한 그림속에 몸을 풀어 섞여 들었다.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오는 반월성에서의 벌초 향이 몸속에 스며들고 그 몸으로 걸어서 신라의 고도와 자유롭게 교감한다. 시야가 탁 트여서 좋고 곳곳에 릉이 보이는 것도 좋고 넓은 잔디밭에 들어가서 달리고 싶은 충동의 느낌도 좋다. 늘쩡늘쩡 걸어 비단벌레 전기자동차 주차장까지 들어왔지만, 또 자전거도 빌려주기도 하지만 걷는 자의 땅을 딛고 오는 직접성의 축복은 불가능 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걷기만 한다.

어느새 앞에 횔체어를 탄 사람들이 육속 모이더니 첨성대 입구 쪽으로 들어간다. 우리도 따라 들어가는데 입장료가 무료다. 첨성대는 생각보다 작고 맨땅위에 휑하니 서 있는 굴뚝 같은게 소문보다 소박하다. 국보 제31호로 높이는 9.5m이며 석재의 개수가 365개라는 점이 재밌다. 경주관광 불구자협회 팀원들의 뒤에 서서 안내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본다. 첨성대는 신라의 제27대 임금인 선덕 여왕 때 만들어진 천문대이다. 신라의 토기처럼 원통모양인 첨성대는 몸통은 27단인데 이는 선덕여왕이 27대 여왕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 꼭대기 ‘정’자 모양 돌을 합치면 28단인데 이건 28수라는 별자리와 관계가 있다. 또 2층의 기단부까지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데 이것은 음력 한 달의 날 수와 같다.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위쪽 12단과 아래쪽 12단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는 각각 일년 열두 달 합치면 24절기와 같다. 또한 첨성대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비추는 것으로 춘분, 하지, 추분을 측정할 수 있다. 신라인들의 지혜가 보이는 흥미로운 숫자들의 비밀이다. 신라인들이 천문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시기를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빠져드는 첨성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진을 박는다. 신라인들이 별을 관측하는 장면도 상상속에 찍어 넣는다.
작년 경주, 포항 지진은 무서웠다. 울산에 있으면서도 집에 들어갈 수 없어 텐트를 치고 밖에서 잠을 잤으니… 그런데도 첨성대는 아무런 흉터도 없이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니 신라의 건축학이 대단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다.

 계림에서 만난 연인   

첨성대 입구 맞은 켠에는 사방으로 된 친절한 안내표가 가이드를 하고 있다. 계림이란 글자가 유독 눈에 띈다. 우리나라 리강의 계림을 연상해서 인가부다. 엄마, 여기에 계림이 있어요 하는 투에 호기심이 동한다는 기색이다. 그럼 계림으로 먼저 가자.
숲이다. 피고 또 지는 왕조들은 썩어서 무너져 갔어도, 봄마다 새 잎으로 피어나는 그 무너진 왕조들의 숲 속에서 삶은 여전히 경건하고 순결한 것이어서 계림의 숲은 그 숲에 가해진 정치적 치욕에 물들지 않는다 고 김훈은 말했다. 넓은 잔디밭 가운데 천년의 나무들이 숨을 쉬며 커다란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게 우리들이 간직한 전설을 보는 듯 하다. 계림 입구에 보이는 건 직경 2m로 1,300년이나 되는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고사하여 10%로의 생명력으로 생존해 있는 모습이다. 이곳 계림은 신라때부터 왕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지금도 100주의 고목이 자라고 있다. 오랜 세월로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무들을 지나며 노송숲이 이어진다. 역시 경주는 가는 곳 마다 노송숲이 압권이다. 귀중한 역사 유적지에는 이런 노송들이 그 깊이를 더 해준다.

좀 더 가다 보면 숲 안의 ‘향가비’가 보이는데 향가비 앞면에는 신라의 승려인 충담이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여 지은 <찬기파랑가>라는 10구체 향가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삼국유사를 지은 승려 일연의 업적을 기리는 ‘일연 현창 향가비’가 새겨져 있다. “흐느끼며 바라보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간 아래/ 여기 시퍼런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 냇가 자갈밭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강을 쫓고자/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 못 올 고깔이여”. <찬기파랑가>의 전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이 엮은 가집 3대목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고려 후기 일연이 그의 삼국유사에 그 일부를 기록해 놓으므로 우리는 신라의 아름다운 시 정신을 접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지게 된 거다.

숲 가운데는 앙증맞은 작은 비각 하나 서 있는데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비각이다. 신라 탈해왕 때 호공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보니까 나뭇가지에 금궤가 걸려 있었다 한다. 그 궤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해서 성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이 숲을 계림(雞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 허구이겠지만 어쨌거나 김씨성을 가진 분들은 한번은 와 줘야 겠다고 하자 황급히 참배를 드리는 사위땜에 웃는다.
나중에 애를 낳거든 데리고 오너라…
네~
숲 뒤로는 녹색 싱그러운 배경을 펼쳐주는 왕릉들이 있다. 경주 향교 옆으로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데이트 장소인 월정교가 멀리 보이고 바로 뒤에는 사적 제188호로 지정돼 있는 내물왕릉이 보인다. 내물왕은 신라 제17대 왕으로서 김씨 왕으로는 두번째로 즉위에 오른 왕이라고도 한다. 내물왕릉을 마주한 노송 숲 속에 두 연인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잡힌다. 나도 모르게 한 컷 남긴다. 그들이 부럽다. 김알지의 탄생 신화로 더 신비하고 신성한 이 곳에서 천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최상의 데이트인 듯 싶다. 무덤과 연인의 그림으로 단어들이 끼어 맞추기를 하며 머리속을 돈다. 사랑을 맺는 순간 쌓아가는 현실의 찌꺼기들이 무덤으로 높아져만 가는 고달픈 인생들. 저 순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은 맺는 것 보다 하는 것이다. 이혼과 결혼이라는 형식에 억메이는 사랑은 가벼운 것이다. 사랑이 힘들다고 우는 친구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반월성을 돌아 동궁과 월지로

계림에서 좀 더 들어가면 월성 발굴현장이 펼쳐져 있다. 월성은 신라 천년 왕조의 궁궐터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반월성이라 하였다 한다. 파시왕이 성을 쌓아 이곳에 도성을 옮겼으며 그 이후로 신라 역대왕들이 거처했다. 여기에는 잼있는 이야기가 있다. 월성에 성을 쌓기전 호공이란 사람이 거처를 했는데 석탈해가 꾀를 내어 이 곳을 차지했고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으며 석탈해는 나중에 신라 4대왕이 되었다 한다. 지금은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빈 터만 남아 유적 발굴에 오픈하고 있으며 보물 제 66호 석빙고만 남아 조선시대의 얼음 창고를 보여주고 있다.

고대의 석빙고는 지금의 냉장고를 있게 한 계기가 되였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끼도 배부르게 못 먹는 평민들은 생각도 못했겠지만 궁에 사는 부자들은 남은 음식에 어지간히 신경을 썼을 거다. 그러니 석빙고라는 게 나오지 않았겠는가. 고대의 유적들은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아픔과 슬픔의 흔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자그마한 석빙고 앞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빈부의 차이에 흔적 없이 죽어간 영혼들을 달랜다. 갑자기 나타난 저 짙푸른 창공을 날아 예는 이름 모를 하얀 새를 오래오래 바래준다.
인부들의 벌초에 진한 내음이 흐르는 황토길을 따라 내려오면 자그마한 인공 못이 보인다. 아직 연잎들은 애기때를 못 벗었고 귀엽게 입을 오무린 연꽃몽우리들이 도약을 준비한다. 여긴 사실 왜란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인공으로 파 놓은 함정인데 물을 넣고 연꽃을 키우며 야생 들오리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한마리 야생오리가 고요를 깨는 우리의 침입에 잔뜩 긴장을 하며 푸드득 댄다. 우리는 빨리 그 고요를 돌려줄 상으로 영화 <선덕여왕>의 포스트를 대충 보고는 길가로 길게 늘어진 연꽃단지들을 늘쩡늘쩡 에돈다. 느리게 걷는 순간들이 주는 행복은 경주의 여행뿐이라 생각한다. 하늘을 많이 볼수 있는 여유속에서 동궁과 월지로 들어선다.

매표원 아저씨가 하는 말이 안압지는 해 지고 들어서면 조명들로 굉장하단다. 그래서인지 관광객은 우리들 뿐이다. 안압지는 조선시대에 붙혀진 이름이다. 신라가 멸망하고 화려했던 건물과 연못이 페허가 되자 오리와 기러기들이 날아 들었다고 기러기 안, 오리 압 자를 써 김시습이 지은 이름이다. 지금은 동궁과 월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태자가 사는 동쪽의 궁이라 해서 동궁,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부른다. 하긴 이름만 고친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이름만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민밋한 터가 한참을 걷게 한다.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동궁안에 창건된 전궁 터이다. 임해전이라 하였으며 효소왕, 혜공왕, 헌왕왕이 군신을 모아 큰 잔치를 하였고 경순왕이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한다.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 중의 하나이며 통일신라 정원의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실 생활 유물들이 많이 나와 전각에 진열하여 궁내에서의 호화스런 생활들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나무로 만들어진 14면의 주사위에 글을 적어 술 게임에 사용되었던 주령구가 눈길을 끌었다. 우리 현대 술자라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행위와 유사해서 낯설지는 않지만 통일 신라 시대의 태평함을 엿볼수도 있었다.
엄마, 여기 뭘 보라는 거죠?
이 공간을 채웠던 신라 귀족들의 정원을 상상으로 느껴봐.
이 널다란게 정원이라구요?
그때의 사치가 문화유산으로 남아 우리에게 볼거리를 준다는게 아이러니하지만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궁궐 안에는 우리나라 사천성 명산인 무산의 12개 봉우리를 본따 돌을 쌓아 만들었고,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전설 속의 해중 선산인 봉래, 방장, 영주를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고저 꽃을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한다. 앞에 보이는 월지는 아직인 애기 연잎들을 동동 띄우고 웅장한 전각과 하늘을 비쳐진 얼굴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구비구비 돌아 반시간, 호수 둘레에는 대나무, 배롱나무, 노송을 포함한 여러종류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또 갖가지 꽃들이 피어 한적한 아름다움을 그려준다. 호수안의 비단물고기들이 큰 몸통을 흐느적이며 애들의 따분한 기분을 살려준다. 또 북천의 물을 끌어 앙증맞게 꾸며진 수조를 지나 배수로에서 퍼져 나오는 소리는 우리 만을 위한 연주로 신라의 귀족이 되어본다. 저 배수로 처럼 느리고 더 느리게 이 정원에서의 시간을 잡아 본다.

 

 대릉원, 천마총

저녁은 요석궁에서 먹기로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과 같은 최부자댁에서의 한국전통의 가정식을 맛본다는 건 경주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아닐가 하며 경주에 더 머무르고 싶은 간절함이다. 애들은 그러자요 하고 나서는데, 아직 해가 한발이나 늘어져 좀 이르지 않니? 천마총만 보고 저녁을 먹어도 시간이 많이 남을 텐데… 어지간히 무리 쓰는 나다. 엄만 힘들지도 않아요? 하는 딸 대신 그래요 장모님, 가서 편하게 돌고 오세요 하며 눈치껏 맞추는 사위가 고맙다. 딸 한테 살짝 윙크를 날리고 차에서 음악 들으며 자기들만의 여유를 즐기는 애들을 뒤로 하고, 여행은 혼자 하는 거구나 하면서…
대릉원 입구를 지키는 삼십중반의 여자가 신라복으로 차려 입었다. 2천원을 냈을 뿐 인데신라시대로 들어서는 느낌이 확 온다. 천마총은 어디에 있어요? 마침 앞에 있는 남성 관광객이 나의 해결사로 나선다. 나도 천마총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부랴부랴 그 남자의 뒤꽁무니를 따라 나선다. 잔디떼가 잘 입혀진 동산 같은 고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드문 드문 감나무도 보이고 아름드리 늙은 고목도 보이며 대나무 숲과 어우러져 유달리 뻥 뚫린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동화속을 거니는 듯 싶다. 소담하게 핀 개망초꽃들이 대형 고분앞에 멍청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까딱인다.

미추왕릉이다. 신라 13대 이사금,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6세손이며 김구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칠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이다. 왕비는 전전대 왕인 조분 이사금의 둘째 딸인 광명 부인인데 이사금은 석씨 왕실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신라에서 왕의 성씨가 달라지는 부분들은 대부분 사위계승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부언하자면 왕이 된 사위만 해도 탈해, 미추, 실성, 내물, 눌지, 흥덕, 경문, 신덕 등 8명의 왕들이 있고 홀해미사금, 지증왕, 진흥왕이 외손자로서 왕이된 사례들을 보면 모계사회 이후 세계에서 가장 남녀평등이 잘 되어 있고 이를 실천한 신라였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 왕릉같이 큰 무덤인데 주인을 확실히 모를 때는 총이라 하며 원은 갈문왕같이 임금의 부모나 왕세자내외의 무덤을 말하고, 여기에 못 끼는 것을 묘라고 한다. 미추왕릉의 뒤로 고분들이 전체가 하나의 공원으로 조성되어 가볍게 걷는 산책길이 매혹적이다. 신라의 왕들이 잠들어 있는 만큼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간다.
인공적으로 잘 다듬어진 자그마한 늪에 연꽃들이 피어 있다. 찬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지대라서인지, 고분들이 따뜻하게 감싸줘서인지 수줍게 일찍 핀 연꽃들이 풍경의 의미를 더해준다. 바로 앞에 제일로 크다는 쌍분이 연못에 비낀다. 황남대총이다. 대릉원 내 고분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대형무덤으로서 남분과 북분을 연결한 쌍릉이다. 피장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출토된 유물로 보면 북분은 남자이고 남분은 여자이며 신라왕족의 부부무덤이라 한다. 죽어서도 한 무덤에 가는 영원한 사랑을, 끝없이 높고도 넓은 하늘을, 다 담아 조용히 드러낸 연못의 아름다운 가슴에 유유히 헤염치는 붕어떼들이 죽음과 생동을 시로 적는다.

바로 앞에 천마총이다. 무덤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이상할 만치 약간은 소름이 돋았다. 아마 혼자였으면 들어 갈수 없었을 지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가고 있었고 묻혀서 들어간다. 천마총은 신라시대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5세기말~6세기초에 축조된 것으로 밑둘레 157m, 높이 12.7m로 비교적 큰 무덤이며 왕 또는 왕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은 평지위에 나무널과 껴묻거리상자를 놓고, 그 바깥에 나무로 짠 덧널을 설치하여 돌덩이를 쌓고 점토를 꼼꼼하게 채운후 봉분을 높게 쌓아 축조하였다. 천마총 발굴에서 유물11.5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광복이후 처음으로 신라의 금관이 출토되었다. 특히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가 나와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먼저 보이는 건 목관이다. 열린 목관에 유물들을 진열하여 보여주고 있다. 목관안에는 금제 허리띠를 두르고 금관을 썼으며 둥근 고리장식의 자루가 붙은 칼을 차고 팔목에 금팔찌 및 은팔찌, 그리고 손가락 마다 금반지를 낀 주검이 누워 있었다. 한 외국인 관광객이 영어로 뭐라고 묻자 해설원이 코리안? 하고 되묻는 거였다. 예쓰~ 하며 웃는 얼굴은 우리 랑 다르지 않았는데 우리말을 못하는 것 뿐이다. 조상을 찾고 뿌리의 역사를 알고 싶은 건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하며 내내 무덤안을 함께 도는 우연한 인연이 반가웠다.
화려했던 신라시대의 유물들은 영상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경주는 유적지마다 동영상을 시청하는 곳과 터치스크린이 잘 되어 있어 시간의 단축도 된다. 다음 전시관에는 ‘천마도 말다래’와 ‘천마총의 말갈춤’으로 중앙 벽면에 주제에 대한 설명이 있다. ‘말다래(장니)’란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 뜨리는 판을 말하는데, 보통은 산돼지 등 동물의 가죽으로 사용한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것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백화 수피제 말다래’, ‘죽제 금동 천마문 말다래’ 등 두 종류가 있다. 발굴 때 원형이 회손 된 것을 복구하는 정비제작과정을 영상으로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말갈춤은 말을 치장하는 부장품들인데 ‘천마총의 말갈춤’은 신라의 부위계층들이 마립간시대 지배계층들의 위세용으로 활용된 것이다. 금동투조 말안장 앞뒤가리개, 금동장식 재갈, 금동 투조장식 재갈, 금동 발걸이(등자), 청동 말방울, 금동 솟을장식, 금동 말띠드리개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사용방법까지 설명이 되어 있다. 

   그다음 전시관의 주제는 ‘황금유물로 본 지배층의 권력’ 이다. 보물 제618호인 ‘천마총 금제 관식’은 고대 신라시대의 지배층이 위세용으로 모자에 꽂던 금제 관식으로, 큰 새의 날개 모양으로 한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중앙부의 몸동체와 양쪽의 날개모양 금판 등 총 3장을 연결 접합하고, 앞면에는 400여개의 순금제의 원형 달개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국보 제189호 천마총 관모는 신라때 내관으로 쓰였던 모자형 관인데 각각 모양이 다른 금판 4개를 연결하여 높이 16cm, 너비19cm로 만들어 졌다. 보물 제617호 천마총 금제 관식은 1장의 얇은 순금제 금판을 좌우대칭의 나비모양으로 도안한후 투조기법으로 오려 만든 관식으로 앞면에는 150여개의 금제 원형 달개가 장식되어 있다.
그다음 전시관의 주제는 ‘천마총의 외래유물’인데 신라의 대외교류 관계를 볼 수 있다. 상감유리구슬, 은제 허리띠, 유리잔, 곱은 옥(곡옥), 야광조개국자 등은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에서의 대외교류로 들어온 것으로 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천마총 발굴 보고서’ 원본이 진열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고대 신라의 지배자 천마총의 주인공을 만나고 떠나다’란 주제로 천마총 발굴에 관한 사항을 디지털영상자료로 보여주며 천마총 발굴 현장에 대한 사진을 전시하여 간략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다.
무덤안에서의 관광체험을 마치고 러씨아에서 온 고려인이랑 걷다가 아무 생각없이 후문으로 따라 나와 버렸다. 정문에 있는 애들을 찾아 다시 돌아 가려 하니 입장권을 내라 한다. 진퇴량난이다. 어쩔 수 없이 허둥지둥 설명하여 아니꼬운 눈길을 받으며 도로 들어가 안내판을 찾는다. 이러다가 무덤밖을 못 나가겠네~ 영혼을 무덤안에 둔 듯이 실소를 하며 대릉원 정문까지 이어지는 황남대총 뒤편의 산책로를 허겁지겁 걷는다.

산책로를 좀 걸으면 앞에는 석조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초석, 장대석, 신방석, 기단석, 석탑부재, 계단소멧단, 디딤돌, 난간석 등의 건축부재를 모아 둔 것이다. 해결사로 나섰던 아까 그 남자가 석조물들을 손으로 살살 만지며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시를 쓰시는 분일까? 소설을 쓰시는 분일까? 건축가일까? 화가일까? 신라의 숨결과 교감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경주가 고풍스러움을 간직하는 것도 신라의 정신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저렇게 기억하려는 노력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경주를 자주 찾는 것도 내 안에 무언가가 자꾸 흘러 합쳐지고 싶고 그 의미를 건져 올리고 싶은게 아닐까?
자그마한 무덤들을 지나 미추왕릉 숲에 들어서는데 인디안 추장같이 요상하게 생긴 새 한마리가 긴 부리로 열심히 땅을 뚜지고 있다. 살그머니 다가가서 사진을 찍는데도 날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아예 동영상을 찍는데도 배터리가 다 닳아가는데도 대놓고 휘~휘~ 쫓는데도 피하다가 다시 들어 않는다. 이건 또 뭔 인연이지? 자꾸만 뭔가를 이어 놓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만의 만남이 아니고 언제인가 헤어졌다가 다시 상봉하는 질긴 운명처럼… 배터리가 빨간 신호를 보내는 순간에 검색창을 훓는다. 후투티란다. 이름도 생소한 이 새와 연결고리를 찾다가 경주의 선물로 간주하기로 한다. 후투티와 작별하고 나오는데 ‘기다림’이라는 단어 가 조용히 가슴에 자리잡는다.

차안에서 잠들었던 딸이 잔뜩 피곤한 눈으로 엄마, 집에 가요~ 말 떨어지기 바쁘게 사위는 시동을 건다. ‘요석궁’이라는 단어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꿀꺽 넘어가고 저녁에 뭘 해줄까? 하며 생각에도 없던 말이 튀어나온다. 청국장 해주세요~ 이구동성의 경쾌한 답에 어이없는 내 웃음이 새어 나가고 차는 고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엄마, 경주를 다 돌거죠? 사진 꼭 보내 줘요~  

여자의 신체중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 자궁이듯 한국의 자궁은 경주라고 기행작가 이재호 선생님이 말했다. 신비의 세계 경주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기다리는 경주를 찾아, 나는 가을의 황리단길을 예약한다. 그리고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박목월 시인의 발자국을 밟아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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