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희 프로필 : 중국 룡정 출생. 한국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문학박사(비교문학) 졸업. 연길시담배공장 기술원,한국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특별연구원 역임. 현재 자유기고인. 단편소설 "하우스키핑","사랑의 원죄", 논문 "'고향'의 상징성과 리얼리티의 예술적 형상화" 등 발표.
중편소설


이방인

 

김성희


유리는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숨이 콱콱 막히는 것 같았다. 시시각각 숨통을 노리는 승냥이 무리들 속에서 온몸을 오그리고 오들오들 떨었다. 맨 앞의 제일 크고 흉악해 보이는 승냥이 한 마리가 시위하듯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어느 순간, 한동안의 ‘평온함’을 어설프게나마 지켜주던 투명하고 딱딱한 외피가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입에서 ‘아’하는 소리가 미처 새어 나오기도 전에…… 유리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주위를 맴돌던 승냥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부서진 외피의 뾰족한 조각을 주어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침내 승냥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우면서 덮쳐 들었다. 유리는 두 손을 모아서 힘껏 짐승의 목을 찔렀다. 시뻘건 피가 콸콸......

앗! 승냥이 꿈은 심유리가 입사초기에 자주 꾸던 꿈이다. 그런데 그 시절의 꿈 속에는 눈앞에 부각되는 승냥이는 없었다. 아니, 그 승냥이는 무리 뒤쪽에서 어슬렁거렸던 것 같다.

악몽 때문에 밤잠을 설친 유리는 때 아니게 몰려오는 졸음을 쫓아버릴 양으로 평소의 두 배나 되는 커피를 마시고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기 바쁘게 탈의실에 들러서 패딩을 벗고 앞치마를 두른 다음, 핸드폰과 보온병을 챙기고 자기 근무 부서인 써브(생산라인에 일부 부품을 가공해서 제공하는 부서)쪽으로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듯이 숨이 턱에 닿아 달려갔다.

유리가 속한 써브는 3층 대형 작업현장의 맨 남쪽에 위치해있다. 남북방향으로 가로놓인 써브의 커다란 작업대들은 동서방향으로 열을 이루고 있다. 이 디지털 도어록(디지털화한 첨단의 잠금장치. 비밀번호, 무선카드, 지문 따위로 접근이 가능함) 회사에서 써브는 생산라인과 대비해 A부서로 불리기도 한다. 써브의 북쪽에는 차례로 도어록을 생산하는 B, C라인이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있다. 그리고 각 라인은 중간 부분에 위치한 검사 작업대를 기준으로 동쪽은 조립라인, 서쪽은 검사 작업대를 포함해서 포장라인으로 구분된다. 써브도 써브의 중간쯤에 위치한 유리 작업대로부터 동쪽은 조립 써브, 서쪽은 유리 작업대를 포함해서 포장 써브로 나뉜다.

유리의 작업대 위에는 형형색색의 스크류(나사)가 담겨있는 투명 플라스틱 수납박스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C라인에서 생산하게 될 보조키(C라인에서 생산하는 도어록의 1종) R2 모델의 포장에 들어갈 스크류다. 스크류 박스들 왼쪽에 놓인 투명 플라스틱 쟁반에는 스크류 포장용 투명 미니 지퍼백들이 담겨있다. 스크류 박스들 오른 쪽에는 전자저울이 있다. 전자저울 오른 쪽에는 저울을 마친 스크류 봉투들을 담는 투명 플라스틱 박스가 놓여있다. 양손에 흰 장갑을 낀 유리는 작업대앞에서 스크류 포장 작업에 열중했다. 왼손으로 지퍼백 한장을 잡고 지퍼를 여는 동시에, 오른 손으로는 천연색 쟁반 머리 스크류(FHD 4×25) 4개를 잡는다……

백색의 둥근 머리 스크류 PHD 4×25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몸을 뒤로 돌린 유리는 바닥에 쌓아놓은 종이 박스에서 해당 스크류 봉지 하나를 집어서 작업대 위에 올렸다. 가위로 스크류 봉지 입구를 막 자르려던 참이다. 작업대 옆의 좁은 통로(써브와 B라인 사이의 통로)를 지나가는 과장의 실루엣이 보였다.

과장은 또 아까부터 유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유리 쪽을 흘끔거린다. 저 인간은 참 한가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애꿎은 사람 잡을 궁리만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 같다. 약 2개월 전, 같은 교포인 김경희 언니가 과장과 대판 싸우고 사직한 후, 과장의 올올이 신경이 전부 유리에게 쏠려있는 듯 하다. 유리는 거의 매일 과장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리한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과장은 유리를 궂은 일에 빼돌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약점을 잡아서 내쫓기 어려우니, 스트레스를 가해서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는 수작일 것이다. 유리는 작고 가지런한 이를 뽀드득 갈면서 자그마한 손으로 가위를 힘껏 움켜쥐었다. 사장의 정부라고? 아니, 정부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직원 20~30명 정도로 시작한 서울소재 이 디지털 도어록 회사 초창기 때의 일이라고 하니까.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회사도 한번 이전했다고 한다. 약 2년 전, 유리가 입사할 때 직원이 90명을 웃돌았고, 그 후에도 회사가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서 지금은 직원이 150여명이나 된다.

유리의 입사 초기 때까지만 해도 예쁜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름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던 과장이었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최근 들어서 폴싹한 느낌이다. 값진 옷들과 화장품들도 반백이 넘은 과장을 세월의 더께에서 구해주기는 무리였을까. 어깨까지 드리웠던 굵은 파마머리도 짧은 파마머리로 변했다. 조금은 우아해 보이던 분위기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삼성출신의 카리스마 넘치는 유부남 사장이 대여섯 살 이상인 별볼일 없는 유부녀와 여태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어쩐지 어불성설로 느껴진다. 그게 아니라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과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차장, 주임, 반장, 조장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사장의 말에 토를 다는 법이 없다. 그런데 과장은 사장한테 말대꾸는 기본이고 뿔나면 휑하니 집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시치미를 떼고 출근하기도 한다. 이튿날에도 출근하지 않으면, 사장이 몸소 전화를 걸어서 ‘모셔 오’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 되었다고 한다.

유리가 하고 있는 보조키 R2 스크류 포장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 블랙 둥근 머리 스크류 PHM 4×33이 부족했다. 유리는 키 큰 자재 담당 총각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여러 가지 포장자재를 운반하는 그 총각은 현장에 자주 드나든다. 원래 자재가 부족하면 과장한테 말해서 포장자재 담당 총각한테 전화를 걸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유리는 늙은 승냥이의 눈을 닮은 과장의 눈을 마주보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갑자기 B라인의 포장 쪽에서 여자와 남자의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래, 때려라 때려! 여자는 최미나라고 하는 얼굴이 동그란 B라인 포장의 한국 언니였다. 미나 언니가 소리소리 지르면서 사람들한테 잡힌 몸을 비틀고 있었다. 맞은 편의 장정 역시 사람들한테 잡힌 몸을 펄쩍펄쩍 뛰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B라인의 맨 끝에서 마지막 포장작업을 담당하는 박성헌이라고 하는 남자직원이다. 지난번에도 둘이 싸우더니…… 이번에는 무슨 원인으로 싸우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는 미나 언니의 잘못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유리가 스크류 담당 선배언니 밑에서 보조로 일할 때의 일이다. 여유가 생긴 미나 언니가 성헌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유리네 스크류 일을 도운 것이 도화선으로 되었다. 그때는 몸싸움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었다. 그 와중에도 미나 언니는 딸리지도 않는 스크류 일을 기어코 반나절이나 도왔다. 스크류 담당 언니가 다른 부서에 가서 도울 것을 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워낙 스크류가 적게 들어가는 모델인지라 포장된 스크류가 금세 쌓여버렸다. ‘덕분’에 유리는 원하지 않는 부서에 가서 거의 한나절이나 ‘봉사’했다. 물론 유리는 다른 직원들로부터도 그런 일을 수없이 당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과장의 조종에 힘입은 행동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그 후부터 유리는 미나 언니를 아니꼽게 보아왔다.

성헌으로 놓고 말하면, 살짝 지적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힘든 자리에서 잘 버티기로 유명한 직원이다. B라인에서 주로 생산하는 삼성 도어록은 벽돌보다 더 무겁다. 성헌이 매일 400개 정도 들어서 옮기는 큰 박스에는 그런 도어록을 비품과 함께 포장한 박스가 5개씩 들어간다. 그 자리는 다들 얼마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골칫거리 자리였었다. 그런 일을 성헌이 2년여 동안이나 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리숙하게 보는 과장은 툭하면 그에게 소리를 지른다. 대부분 직원들도 덩달아서 그를 무시했다.

과장이 다가가서 고주파 소음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성헌을 끌어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성헌은 그 길로 해고당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둘 다 교육시켜서 그냥 두거나, 대개는 불문곡직하고 둘 다 해고시키는 것이 사장의 오래된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장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문득 경희 언니가 성헌 때문에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일이 생각났다. 경희 언니의 본업은 B라인의 검사였다. 그날은 과장에 의해 성헌과 가까운 거리에서 포장 박스에 라벨스티커를 부착하고 있었다. 마침 일이 딸려서 씩씩거리던 성헌이 가위를 쓰고는 홧김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 가위는 경희 언니의 다리를 향해 씽 날아갔다. 두터운 청바지가 찢어지고 살갗이 살짝 긁히는데 그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나중에 전해 들은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성헌의 일은 B라인에서 모티스(도어록 부품) 포장 작업을 하는 교포 이동윤 오빠가 대신했다. 모티스 포장 역시 성헌의 자리 다음으로 고된 자리다. 자그마치 무게가 나가는 모티스를 빠른 속도로 비닐에 포장하느라 손과 손목이 아픈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모티스 25개씩 담은 박스를 하루 종일 들어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고역이다.

유리의 우려대로 과장이 유리한테 다가왔다. 오늘 퇴근할 때까지 이동윤 오빠가 하던 모티스 포장작업을 대신하라고 했다. 지금은 B타임(하루의 작업타임은 오전의 A, B와 오후의 C, D로 나뉜다)이니까 거의 한나절이나 자리를 비워야 한다. 다음 모델의 스크류 포장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딸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장은 그냥 무시하고 가버렸다. 유리가 한마디 더 하면 또 소리지를 것이 뻔하다.

과장의 속셈을 유리는 잘 안다. 딸리면 또 사람을 붙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어제 사람을 붙여서 스크류를 많이 포장해놓게 할 때 찜찜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도 보조키 모델은 항상 스크류 포장이 딸리기 때문에 설마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라 가라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싫어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솔직히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유리가 참지 못하는 것은 과장의 차별적인 태도다. 유리가 속한 포장 써브는 특성상 하루 정도 여유 있게 제품을 쌓아놓는 것이 기본이다. 딸리는 제품은 다들 2~3일 전부터 미리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래도 과장은 다른 직원들한테는 별말이 없다. 그들이 간혹 다른 자리에 가는 것은 자재 부족 때문에 본업을 할 수 없는 경우뿐이다. 과장은 유일한 조선족인 유리한테만 야박하게 군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직원들도 따라서 유리를 얕본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손이 가위 쪽으로 갔다. 가위를 덥석 잡고 책상 위에 팍 내리꽂았다……


같은 시각, 경희는 집에서 그 동안 구상한 소설 ‘이방인’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가증스러운 과장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몰입이 안되었다. 입사 후, 거의 반년 동안 얼떨떨하게 과장한테 당하기만 했었다. B라인에서 삼성 도어록을 생산할 때에는 검사 인원이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다른 도어록을 생산할 때에는 검사 인원이 남아돈다. 그럴 때면 과장은 항상 경희부터 빼서 다른 곳에 지원 보냈다. 한국 회사 생활이 처음이다 보니 상황파악이 잘 안되었다. 나중에야 의견 제기를 했고, 다른 검사를 먼저 빼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경희를 주로 빼돌렸다. 그리고 그 후부터 과장은 사소한 일에서도 트집을 잡으면서 경희한테 소리지르기 일쑤였다.

그날, 켜켜이 쌓여있던 울분이 순식간에 폭발했었다. 누가 목소리 더 큰지 내기할까요? 과장이면 다야? 사람 속 뒤집어 놓는 것 말고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뭐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도리도 몰라?...... 말문이 터지자 그 동안 쌓였던 말들을 속사포 쏘듯이 마구 쏟아냈다. 얘 뭐라는 거야? 뜻밖의 격렬한 반격에 과장은 입을 반쯤 벌이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잘 먹고 잘 사세요, 라는 말을 끝으로 경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장에서 나와버렸다. 묵었던 체증이 한꺼번에 확 풀려버리고, 최고의 짜릿한 쾌감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사람이 당하게 될 고초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날 매너 없이 보였을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자, 경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잖아도 한국인들이 중국교포들에 대해서 촌스럽다느니, 세련되지 못했다느니, 기본이 안됐다느니 하고 쉬쉬거리는 마당이다. 그래서 과장이 더욱 저주스러웠다. 전에 노무를 하는 지인들한테서 교포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들의 분노가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언젠가 조선족 남자가 자기를 괄시하는 한국인 업주를 칼로 찌르고 도망갔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에는, 중국교포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망나니라고 비난의 화살을 수없이 날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직접 당해보니 치가 떨려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입장이 되고 보니, 용서란 남의 말을 하듯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만큼 갈등의 곬이 깊어서일까, 아니면 인간이란 상처 준 상대방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을 갖고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래, 그 년이 죽지 않는 한 용서할 수 없다! 아니, 죽여야 해! 입술을 파르르 떨던 경희는 노트북 스크린에 뜬 소설 제목을 ‘마녀 죽이기’라고 고쳐 버렸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사장은 작업현장에 나가보려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침에 잠깐 둘러보고는 하루 종일 나가보지 못했다. 오늘은 월말 정산인데다가 성헌의 문제까지 겹쳐서 정신이 없었다. 3층에 있는 사무실과 대형 작업현장 사이에는 대형 실내 공간이 있다. 공간의 중앙에는 생산 자재가 높이 쌓여있다. 공간의 남쪽 통로는 동쪽으로 사무실 출입문과, 북쪽 통로는 서쪽으로 작업현장 출입문과 닿아있다. 퇴근하는 직원들이 줄을 지어서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남자 직원들 탈의실은 사무실 안의 칸막이 바깥 쪽에, 여자 직원들 탈의실은 사무실 남쪽에 있는 식당의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들어가세요. 일일이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사장은 작업현장을 향했다. 통로를 따라서 가다가 우회전해서 조금 걸으면 좌측에 있는 작업현장 출입구에 도착한다. 퇴근시간이어서 출입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작업현장 출입구에 거의 당도할 때, 뒤늦게 나오는 유리와 맞닥뜨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버렸다. 당혹스러웠다. 교포 대부분이 사장과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칠 때가 많다. 그런데 유리와 경희는 남달랐다. 둘 다 사장을 만나면 언제나 깍듯이 인사를 잘했었다. 그러던 유리가 언제부터인지 사장을 일부러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에 마주치면 공식적인 인사는 꼭 했었다. 한동안 고혹적인 눈빛으로 사장한테 추파까지 보내오던 유리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직감으로 느끼면서도 워낙 머리가 복잡하던 터라 그냥 지나쳤다.

작업현장 출입문에 들어서면 현장 뒷문과 통하는 넓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 북쪽 벽의 출입문 가까운 곳에 칠판이 걸려있다. 사장은 칠판 앞에 멈춰 섰다. 칠판을 들여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B, C 두 개 라인의 제품 생산량이 다 형편없었다. 이런 식이면 본전도 뽑기 힘들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하긴 사장이 자리를 비우면 작업이 더디 진행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월말이면 항상 그렇듯이, 잔업에 특근을 이어가면서 이달 생산량을 미리 완성하게 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대체 왜? 내가 매일 노심초사하는 덕분에 자기네들은 근심걱정 없이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잘하면 이익을 얻고, 잘못하면 거꾸로 돈을 처넣는 사장과는 달리 직원들은 꼬박 꼬박 월급을 챙겨간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각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은 많지 않다. 사장 앞에서만 열심히 일하는 척 하는 약아빠진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사장이 눈치를 모를 것이라 여기지만 천만에…… 10여년 동안 눈치를 키워온 사장이다. 게다가 간혹 팩트(진실)를 일러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교포 대부분은 앞뒤가 다르지 않아서 좋다. 그들은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여유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돕기도 한다. 대체로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인 것 같다. 한두 마디 칭찬만 해주어도 신바람이 나서 더욱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보인다. 아무튼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사장은 교포 직원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여의치 않았다.

기분이 울적한 사장은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싶었다. 주로 기술문제를 담당하는 차장은 관리 인원 중에서 유일한 남성이다. 차장을 불러서 함께 회사 근처의 횟집으로 향했다. 자가용은 주차장에 두고 택시를 타고 귀가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도 택시를 타고 출근하면 된다.

술기운이 오르자 유리의 새침한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오늘 B라인의 모티스 포장작업을 누가 했냐고 차장한테 넌지시 물었다. 퇴근할 때까지 유리 혼자 했다고 한다. 과장은 분명 B, C 두 개 포장라인의 여유 인원들을 번갈아 가면서 시키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조그마한 여자애한테 거의 종일 혼자 하게 했단 말이지? 사장의 눈에는 유리가 그냥 아이로만 보인다. 30대 후반이라지만 얼굴도 동안이고, 몸집도 작고, 키도 작은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갸름한 턱의 선, 작지만 균형 잡힌 몸매…… 과장의 질투심이 또 발동한 걸까? 그렇다 치더라도 사장한테까지 삐딱한 유리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황차 까짓 힘든 일 좀 했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혹시 과장과 나 사이를 의심하는 걸까? 당장이라도 안겨올 것 같던 유리가 쏙 들어가버린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사장보다 대여섯 살 젊은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의 줄임말. 신조어) 차장이나, 포장자재 담당 총각한테는 해쭉 웃으면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가끔 보인다. 그래서 젊은 남자 좋아하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었고, 슬그머니 밸이 꼬이기도 했었다.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차장한테 불쑥 물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 빗나갔다. 아차 싶었다.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안주를 집는 척 했다. 네? 글쎄요. 차장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착하고 순진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최근 주변의 동료들과 가끔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 좀 걱정된다고 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아서는 사장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고, 유리에 대한 특별한 감정도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차장은 제품을 수리하거나 조립 라인의 써브 일을 도울 때면, 유리 작업대 동쪽에 있는 작업대에서 일을 한다. 둘이 등을 돌리고 일하기는 하지만 유리의 동향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차장은 낮에 유리가 작업대에 가위 꽂는 소리를 들었었고, 그 가위를 뽑아서 치운 것도 차장이었다. 그래서 사장한테 이 일을 말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확실히 유리는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입사 초기에 비해서 많이 달라졌다. 아니면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재주라도 있는 건지. 교포들의 이질적인 부분 때문에 관리자들이나 한국 직원들이 가끔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들 그럭저럭 잘 극복해 나간다. 그런데 과장이 책임진 포장 쪽만은 예외다. 경희와 유리 둘 다 자기 맡은 바 업무는 야무지게 잘하지만, 과장과 일부 직원들과의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는다. 써브 쪽이나 검사 쪽이나 다들 실수가 잦아서 재 작업 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그런데 경희와 유리는 실수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직원들보다 속도가 느린 것도 아니다. 사장이 볼 바에는 일도 훨씬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과장은 늘 경희와 유리를 잡지 못해서 안달이다. 거지 같은 것들이 편한 일 하면서도 좋은 줄 모른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경희와 유리 역시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경희는 결국 입사 1년 만에 퇴사했고, 유리도 언제 그만둘지 모를 일이다. 다들 나한테 왜 이래. 사장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퍼 마시고 싶었지만, 내일의 일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미칠 노릇이다.


이튿날 아침, 사장은 사무실에 잠깐 머물다가 현장으로 향했다. 통로 중간의 남쪽에 있는 회사 출입문이 벌컥 열리면서 유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상큼한 미소를 날린다. 안녕하세요. 뜻밖이어서 잠깐 멈칫하면서 답 인사를 했다. 작업할 때에는 항상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기에 오랜만에 보는 생머리 모습이 신선하게 안겨왔다. 게다가 헤어 스타일 때문인지 빨간색 패딩 때문인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이 시점에 갑자기 파마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경희 얼굴이 떠오른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해반주그레하게 웃는 모습이 퍽 매력적이었는데 잘 웃지 않던 경희다. 대학교 졸업생이어서 좀 다르게 보기는 했지만, 대학교 졸업생이 경희 한 명뿐은 아니었다. 취미는 독서, 특기는 소설창작이라고 이력서에 적어 넣은 부분이 퍽 인상적이었다. 은근히 호기심이 동했다. 게다가 사장과 동년배라는 점도 플러스로 작용했다. 그래서 많은 직원들이 선망하는 검사 일을 맡겼었다. 그런데 입사 1년 만에 회사를 떠들썩하게 해놓고는 미련도 없다는 듯이 떠나버렸다. 사장은 머리를 설레 설레 저으면서 계속 갈 길을 갔다.

유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장이 한창 칠판에 오늘 생산하게 될 모델명과 수량을 적고 있었다. C라인에서 보조키 R2 다음에 생산할 모델은 보조키 R3이다. 원래의 스케줄 그대로이다. 써브에서는 과장의 스케줄 노트를 빌려서 자기 스케줄 노트에 옮겨 적기 때문에, 예상 스케줄은 유리도 알고 있었다. R2 생산은 아마 첫 타임에 끝날 것이다. R3에 들어갈 스크류는 R2에 비해 종류도, 종류당 개수도 훨씬 더 많다. 지금처럼 딸리는 상태로는 한 사람을 더 붙여도 감당이 안 된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면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거나 과장한테 사람을 붙여달라고 설레발을 쳤을 테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C라인이 끊겨도 내 잘못은 아니다. 어제 딸릴 거라고 과장한테 미리 말을 했으니까.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일단 엊저녁 교포멤버그룹 회식에서 나온 대안대로 밀고 나아가기로 작심했다. 누가 이기나 게임 한판 진하게 해보는 거다.

유리는 C라인과 B라인의 머리 옆을 차례로 지나서, B라인과 써브 사이의 좁은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자기 작업대 앞에 도착한 유리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일을 시작했다.

작업대 안쪽에 비치된 작은 책꽂이에서 작업일지 노트를 꺼냈다. 오늘 날짜와 요일, A타임에 작업하게 될 내용 등을 적어 넣었다. 블랙 스크류 PHM 4×33은 어제 퇴근 전에 자재 담당 총각이 갖다 놓았다. 스크류 봉투를 까서 해당 박스에 붓고 작업을 시작했다. 스크류를 담을 때, 개수도 정확하게 세고 불량도 잘 가려내야 한다. R2 하나당 스크류를 다 담은 다음, 지퍼백의 공기를 빼면서 지퍼를 잠근다. 그리고 전자저울 위에 올려서 무게를 단다. 저울의 수치가 오차 허용 범위 안에 있으면 패스하고, 아니면 육안으로 다시 검사해야 한다. 많이 들어간 스크류는 덜고, 적게 들어간 스크류는 보충하고, 잘못 들어간 스크류는 바꾸고, 불량은 정품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도 유리 혼자 일할 때에는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좋다. 포장된 스크류 봉투를 담은 박스가 차면 25개씩 세어서 큰 지퍼백에 담는다……


경희는 쓰고 있는 소설 ‘마녀 죽이기’가 잘 내려가지 않아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머리를 쥐여짜고 있었다. 갑자기 B라인 조립의 교포 정혜영이 전화를 걸어왔다. 과장이 죽었다고 한다. 3층의 대형 작업현장이 아니라 2층의 작은 작업장에 쓰러져 있었단다. 오늘 아침에 발견했다고 한다. 경찰서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조사 중이라고 했다. C라인 조립의 교포 이선화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경희는 과장이 죽으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죽은 과장보다도 이를 앙다문 유리의 얼굴이 먼저 눈앞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유리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바빠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려고 했지만, 점심 시간이 다 지나가도 전화가 오지 않으니 더욱 안달이 났다. 이런 일이 있으면 정작 제일 먼저 전화를 해야 할 법한 사람은 유리가 아닌가. 그렇다고 일부러 통화를 거부하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먼저 전화하기도 주저되었다. 죽여버릴 거야. 지난 번에 있은 교포멤버그룹 회식에서 하던 유리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1개월 전, 친하게 지내는 교포 몇 명이 회식을 가졌었다. 멤버 중 막내인 유리 때문이었다. 유리, 선화, 혜영, 경희 4명은 가끔 퇴근 후 회식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그룹의 맏이인 경희는 회사를 그만 둔 후에도 동생들의 요청으로 회식에 계속 참석한다. 죽여버릴 거야. 유리의 말에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깟 인간 때문에 아까운 네 인생 종칠 일 있니? 과장의 자가용 차를 부숴 버릴까? 조폭 고용해서 흠씬 두들겨 패줄까?...... 유리를 위안하느라 하는 말들이었지만 현실적인 대안은 없었다. 회사 때려칠 꺼야. 이번에도 다들 만류하느라 바빴다. 바보니? 2개월 더 견지해서 퇴직금이랑, 연차(1년 간 8할 이상 근무한 직원한테는 15일의 유급휴가가 주어진다. 이 회사에서 연차는 휴무로 사용할 수 없고, 1년에 한번씩 돈으로 계산해서 준다.)랑, 연말 상여금이랑 다 받고 그만둬야지, 여태 죽게 고생만 하다가 돈만 날리고 말 꺼야?......

이 회사는 입사해서 만 1년이 지나야 정직원이 될 수 있고, 정직원이 되기 전의 퇴직금과 연차는 별도로 계산한다. 정직원이 되고 나서 다시 만 1년이 지나야 퇴직금과 연차를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연말도 오라지 않으니, 지금 그만두면 연말 상여금까지 근 400만원 상당의 금액을 날려버리게 되는 것이다. 최저시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적지 않은 돈이다. 그래서 경희도 만 1년을 채우려고 과장의 횡포를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았었다. 그래도 결국 연말 상여금은 놓쳐버렸다. 유리한테는 받을 돈 다 받고 나서 과장한테 화끈하게 한방 먹이라고 했다.

경희는 노트북에서 손을 뗀 채, 코딱지만한 원룸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왔다 갔다 했다. 과장의 죽음이 설마 유리와 관련되는 것은 아닐 테지? 아닐 거야! 그런데 의혹은 자꾸 눈덩이처럼 불어만 간다. 그때 그렇게 과장의 체면을 구겨놓지 않았더면, 과장도 유리한테 그 정도로 가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개월 전 회식이 있던 그날 저녁, 경희는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인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었다. 그리고는 자기 견해를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과장의 눈에 이방인인 교포는 어리숙한 한국인보다도 못한 거지같은 존재다, 게다가 과장은 질투심이 무척 강한 인간이다, 예쁜 여직원이라면 무조건 배척하고 구박하는 마녀의 습성이 있다, 교포이면서 젊고 예쁘기까지 한 유리가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끔찍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들 이의 없었다. 혜영과 선화도 사실 라인에서 교포차별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직원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서 힘들다고 했다. 혜영과 선화는 젊어서부터 한국에 살면서 여러 일자리를 전전해왔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교포차별의 설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포차별에도 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대놓고 교포를 무시하는 과장에 대해서는 진작 비호감형 인간으로 점 찍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과장의 무지막지한 질투심에 대해서는 알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어차피 인간의 예의가 통하지 않는 마녀한테 합리적인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유리에게 2개월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실어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경희가 초보 제안을 내고, 다 함께 연구해서 ‘임시구급’ 대책을 마련했다……


사장은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고 막 사무실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었다. 과장의 죽음 때문이었다. 타살이 의심된다고 했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 피곤한데다가 2시간 남짓 가슴을 졸이면서 조사받느라 머리가 돌 것 같았었다. 혀가 바싹 말라서 바닥에 들러붙으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어제의 진술까지 뒤엎어버렸다. 죄진 사람으로 오해 받기 딱 좋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러다 괜히 살인 누명이라도 쓰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제는 담당형사한테 그저께 퇴근 시간에 수미와 같이 2층 작업장을 나섰다고 말했었다. 2층 작업장 조장인 한수미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기가 먼저 나오고, 수미는 언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수미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것이다.

어제 아침 출근하자마자 수미의 전화를 받았었다. 과장이 2층 작업장에 쓰러져있다고 했다. 2층까지 헐떡이며 뛰어내려간 사장을 붙잡고 수미는 울먹였다. 전날 퇴근 시간에 뭘 찾으러 내려온 과장을 혼자 두고 퇴근한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과장이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면서 작업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거 같다고, 괜히 자기가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장한테 전날 함께 작업장을 나섰다고 담당형사한테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했다. 수미가 자기도 곧 따라 나서겠다 했었고, 과장과 절친한 사이인 수미가 과장을 해칠 일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컴퓨터를 켜면서 그저께 퇴근 시간대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렸다. 수미와 2층 작업장에서 일 때문에 이야기하는 중에 퇴근시간이 되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직원들은 다 퇴근하고 수미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다음날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사장이 먼저 작업장을 나섰다. 수미도 곧 따라 나서겠다고 했다. 2층 작업장 출입문과 사선 방향으로 나있는 2층 출입문 사이에 제품을 임시 저장하는 공간이 있다. 공간을 지나서 출입문을 열 때,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과장이 보였다. 퇴근시간에 웬 일이냐 물었지만 듣는 척도 안하고 지나쳐버린다. 3층 출입문과 사선방향으로 나있는 3층 작업현장 뒷문 사이에도 제품 임시 저장에 쓰이는 공간이 있다. 공간을 지날 때, 이번에는 유리가 사장한테 “안녕히 가세요” 하면서 씽 하고 사장 옆을 지나쳤다. 출입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서 아마도 2층으로 내려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그때 2층에서 올라오는 수미와 마주쳤을 텐데, 수미가 유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아니면 유리가 출입문 옆에 있는 자재과 사무실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유리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어야겠다.

사무실에는 다른 관리인원들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기 불편했다. 유리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서 식당으로 불렀다. 유리는 그날 퇴근시간에 보온병 가지러 2층에 내려갔다고 했다. 오후에 2층 작업장에 지원 내려갔었는데, 보온병을 깜빡 잊고 두고 왔단다. 그래서 2층까지 내려간 건 맞는데 작업장까지 가지는 않고 되돌아 올라왔다고 한다. 2번째 버스까지 놓칠까 봐 생각을 고쳤다나?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까지 갔다가 보온병도 챙기지 않고 다시 올라왔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수미도 다른 사람도 본적이 없다고 했다. 말투도 딱딱하고 사장을 쳐다보는 눈빛에도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물론 사람이 죽은 마당에 예전처럼 살가운 표정을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저 차가운 표정은 뭘 의미하지? 유리가 증언을 선다면, 자칫 수미와 공범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런데 유리의 태도를 보아서는 시치미를 뗄지도 모를 상황이다. 최근 1개월 동안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착각이었을까? 그래도 나중에 불리해지면 유리를 내세울 수밖에……

아 참, 내 정신 좀 봐, 출퇴근 카드부터 확인했어야지. 유리를 보낸 후 카드를 확인해보니, 유리가 수미보다 1분 먼저 퇴근 카드를 찍었다. 그렇다면 유리의 말이 맞을 법도 하다. 아니면 유리와 수미가 공범? 그것도 아니라면 수미가 나온 다음, 다른 사람이 2층 작업장에 들어가서 과장을 살해했다? 그날 오후 성헌이 복직시켜달라고 회사에 오긴 왔었다. 그 전날부터 연 이틀 회사에 찾아왔었다. 1개월 전, 회사에서 나갈 당시 성헌이의 살기 어린 눈빛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그 일은 오전에 담당형사에게도 이야기했다. 행여나 수미가 전화라도 걸어오면 잘 이야기 나눠봐야겠다.


사장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대로 돌아온 유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퇴근시간까지 머지 않았고 스크류 포장도 딸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퇴근시간까지 간신히 버틴 유리는 재빨리 작업대를 정리하고 장갑을 벗었다. 핸드폰과 보온병을 챙기고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에 도착해서 앞치마를 벗고 패딩을 입은 다음, 핸드백에 핸드폰과 보온병을 쑤셔 넣으면서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출입문에 거의 도착할 때, 멤버 중에서 키가 제일 큰 선화 언니와 마주쳤다. 어디 아파? 걱정스런 눈길로 유리를 내려다보면서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그만둔다. 잘 가. 내일 봐.

유리가 허둥지둥 차고지에 다다랐을 때,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나왔다. 기계적으로 버스에 올라탄 유리는 맥없이 의자에 몸을 실었다. 사장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 사장의 눈빛이 그렇게 말을 했다. 사장이 찾기 전까지만 해도 대체로 평온한 마음이었다. 이제부터는 얼마만큼 커질지 모를 공포와 사투를 벌어야 한다. 아직도 과장을 위해서 뭘 하려고 애쓰는 사장이 얄미웠다. 과장 스스로 넘어져서 죽었다고 결론이 난 마당인데 말이다. 어제도 점심 무렵에 형사들이 철거하는 대로 직원들을 퇴근시켰다. 그때, 유리는 선화 언니와 혜영 언니한테서 그 결론을 들어서 알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내내 두근거리던 마음이 진정모드에 들어갔었다. 쓰러지던 과장의 모습도 눈앞에서 차츰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경희 언니한테는 끝까지 전화하지 않았다. 마음이 채 정리되지 않아서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유리의 의식은 1개월 전의 교포멤버그룹 회식의 날로 되돌아갔다. 그날 유리를 위한 대책이란 대개 이런 것이었다. 첫째는 수미와 동년배인 혜영과 선화는 사장에 대한 수미의 사모의 정을 자극한다. 수미의 장점을 부각시켜서 잔뜩 칭찬해주고, 사장이 수미한테 뜻이 있다고 확신하게 만든다. 그러잖아도 근래에 과장과 절친인 수미가 사장과 가까워지면서, 뒤에서 쉬쉬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수미의 우정을 굳게 믿는 과장만 모르고 있는 눈치다. 최종목적은 수미에 대한 과장의 질투심을 유발시켜서 유리한테 덜 신경 쓰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는 유리가 과장의 눈을 절대적으로 피해서 사장한테 아부하는 것이다. 목적은 과장과 사장 사이를 이간질하여 사장이 유리 편에 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유리는 솔직히 그 대책의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선화, 혜영 언니에 대한 믿음도 별로 크지 않았다. 유리는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경희 언니가 후다닥 엎어버리고 유리 곁을 떠나버린 후부터 솔직히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유리가 입사해서 1년이 지난 다음 정직원으로 재계약을 한 데에는 사실 경희 언니의 지지가 큰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평소에 남달리 차분하고 침착하던 경희 언니는 그런 식으로 훌쩍 유리 곁을 떠나버렸다. 선화 언니와 혜영 언니는 처음에는 유리한테 별로 살갑게 굴지 않았었다. 힘들게 일하는 자기들에 비해서 편한 일 하면서 좀 왔다 갔다 하는 게 대수냐는 식의 어투였었다. 반년 전쯤부터 함께 회식하기 시작하면서 유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 같았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아리송하다. 어차피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것만이 제일 믿음직스럽고 안전한 방법이다. 그래서 유리는 스스로의 시나리오를 머리 속으로 재편성했고 이튿날부터 실행에 옮기기로 작심했다.

이튿날 유리는 여느 때보다 열심히 화장하고 일찍 출근했다. 마침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사장을 만났다. 달콤한 미소로 사장을 유혹했다. 일부러 라인이 끊기도록 내버려두고 과장 탓으로 돌려버려야지. R2 스크류 포장을 마무리해서 C라인 액세서리 작업(도어록 포장에 들어가는 카드키, 건전지, 스크류…… 등 작은 보조물들을 작은 박스에 포장하거나 한데 모아서 포장라인에 가져가는 일)대에 가져갔을 때, 유리는 C라인에서 R2 생산이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침부터 사장이 ‘호랑이 눈’을 하고 설쳐대는 바람에 두 개 라인에서 다 장난 아니게 제품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유리는 계속해서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움직였다.

R2 스크류 포장 샘플을 샘플박스에 넣고, 대신 R3 스크류 포장 샘플을 꺼내 놓았다. 모델별 스크류 포장 사양(포장할 스크류 종류와 개수)을 적은 노트를 펼치고, R3 사양과 샘플을 번갈아 보면서 스크류들을 정리했다. R3에 들어가지 않는 스크류가 담긴 박스들을 비우고, R3에 추가로 들어갈 스크류들을 빈 박스들에 부었다. 박스가 많이 부족해서 작업대 안쪽 부분에 놓아둔 빈 박스들을 꺼내 놓았다. 필요한 스크류들을 계속 선별해서 빈 박스들에 부었다. 미니 지퍼백 15묶음도 꺼내놓았다. 한 묶음이 100EA니까 도합 1500EA다. 한 묶음을 풀어서 투명 플라스틱 쟁반에 펼쳐놓고 R3 포장 작업을 시작했다.

워낙 모델의 작업을 바꾸는 과정은 무시 못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예전 같으면 이런 경우, 유리는 뒷골이 땡길 정도로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오늘은 거기에 비해서 거의 2배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게다가 바보 같은 과장은 아침부터 신입한테 B라인의 모티스 포장작업을 가르치고, B, C 두 개 라인의 포장 작업을 지휘하느라 스크류에 사람 붙이는 것을 깜빡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유리의 계획대로 진행되어갔다. R3 스크류 포장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C라인이 끊겨버렸다…….

과장은 사장한테 야단맞고 삐쳐서 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유리는 이대로 과장을 영영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 번째 날 늦은 시간에 과장은 마침내 출근했다. 사장도 같은 시간에 나타난 걸 보아서는 또 사장이 설득해서 ‘모셔’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그 후부터 유리만 다른 일에 빼돌리는 일은 없어졌다. 대신 써브의 모든 직원들이 유리와 함께 분주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리를 내쫓고야 말겠다는 과장의 의지는 모름지기 대단하다고 할만 했다. 워낙 마른 과장의 몸은 바람이 불면 훅 날려갈 듯이 더욱 삐쩍 말라갔다. 결국 직원 2명이 사표를 썼다. 왔다갔다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다가 기분이 더러워서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나머지 써브 직원들도 거지반 연말까지 하고 그만두겠다고 벼르게 되었다. 사표를 쓴 직원 2명은 유리의 입사 초기에 스크류 담당 선배언니와 더불어 유리한테 유별나게 갑질을 해대던 직원들이었다. 유리는 뜻하지 않게 그녀들을 향한 복수를 실현했다. 스크류 담당 선배언니는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되어버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어찌 보면 사족에 불과한 수미 언니에 관한 ‘작전’ 만 아니었어도 오늘의 사단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유리는 수미 언니에 관한 ‘작전’에도 동참했었다. 혜영 언니와 선화 언니가 수미 언니한테 접근하는 눈치가 보이기는 했지만, 마냥 그녀들만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미 언니한테 슬며시 다가가서 점점 더 예뻐지네요, 섹시해요. 이런 말들을 슬쩍 슬쩍 흘렸다. 수미 언니가 기뻐하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얼마 후에는 또 과장의 귀에 들릴만한 거리에서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사장님이랑 남자들이 언니를 보는 눈길에서 하트가 날리는 것 같아요……

반대방향으로 지나가는 경찰차들의 요란한 싸이렌 소리에 유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추억에서 깨었다. 과장이 쓰러지던 광경이 갑자기 눈앞에 떠오르면서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해댔다. 과장이 쓰러지던 날 아침, 유리는 또 승냥이 꿈을 꾸다가 깨었다. 그런데 그 꿈은 예전과 달랐다. 유리를 에워싼 승냥이 수도 많이 줄어들었고, 승냥이를 찌른 것도 유리가 아니었다. 유리 옆에서 어떤 여자가 튀어나오면서 승냥이를 찔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퇴근 시간이 되자, 유리는 오후에 두고 온 보온병을 챙기러 2층에 내려갔다. 작업장 안에서 악을 쓰면서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에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을 살며시 열고 작은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죽을래! 하는 소리와 함께 포장박스 위에 놓인 가위를 잡으려는 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가위를 잡자마자 뒤로 밀려서 넘어졌다. 과장을 민 사람은 수미였다. 과장이 넘어지면서 작업대 모서리에 뒷머리를 쿵 하고 박고는 튕겨나가면서 쓰러졌다. 깜짝 놀란 유리는 문을 닫고 돌아서서 걸음아 살려라 하고 냅다 뛰었다. 과장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어떻게 됐든 간에, 힘없는 교포가 끔찍한 사건에 말려들면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오늘처럼 제 시간에 퇴근하는 날에는 차가 너무 막힌다. 조금 가다가는 멈추고 또 조금 가다가 멈추고…… 유리는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워낙 차멀미를 좀 하지만 최근에 건강에 이상이 생겼는지 차멀미가 부쩍 심해졌다. 돌이켜보니 최근 몇 개월 동안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다.

회사의 성장세로 인해 2층에 작은 작업장이 개설되었다. C라인에서 자주 하던, B라인 삼성도어록 생산에 제공되는 일부 부품들의 생산과 가공이 2층 작업장에 넘겨졌다. C라인의 도어록 생산이 본격화되자 스크류 담당 선배언니는 B라인만 담당하고, 유리는 스크류 보조로부터 스크류 C라인 담당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스크류 담당 선배언니의 심술궂은 잔소리에서 해탈된 것은 좋은 점이었다. 한편, 담당인 만큼 책임감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선배언니나 다른 한국 직원들은 실수를 해도 그냥 야단맞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자기한테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리는 작은 실수라도 할세라 항상 조심했다. 덕분에 실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중국에 있을 때 회계사 일을 한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스크류가 딸리지 않을 때, 딸릴 때를 대비해서 미리 제품을 어느 정도 쌓아놓게 할 때는 좋았다. 스크류 포장은 역시 혼자 할 때 상대적으로 수량도 많이 나오고 컨트롤도 쉬웠다. 그런데 과장이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하면서부터 엉망이 되어버렸다. 일이 딸려서 여럿이 함께 할 때면, 워낙 정신이 없는데다가 툭하면 저울의 수치가 틀리게 나온다. 그래서 막 헤덤비다 보면 자칫 비슷한 종류의 스크류를 잘못 갖다가 포장하거나, 셈을 잘못 세거나, 저울질을 흘려버리는 등 사고를 내기 십상이다. 그래서 유리는 그럴 때면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들었다. 게다가 최근 1개월 동안에는 얼굴 화장과 옷차림에까지 신경 쓰느라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다. 항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가꾸는 과장의 의지력에 대해서는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사장의 정부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버텼는지도 모른다.

참,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만약 사장이 수미 언니한테 내가 2층에 내려간 사실을 이야기하고, 수미 언니가 자기 죄를 나한테 뒤집어씌우기라도 한다면…… 가슴이 답답해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숨막혀 죽을 것 같다. 누구한테라도 털어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이번 정류소에서 하차해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경희 언니한테 가야지. 경희 언니 남편은 중국에 있고, 국비로 서울의 명문대에 유학 온 아들은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래서 경희 언니는 혼자 원룸에서 지낸다고 했다.


경희 집에 들어서자, 유리는 경희를 부둥켜안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아니야, 나한테 그럴 담량은 없단 말이야, 생각뿐이고 입만 살았지. 경희는 유리의 잔등을 다독이며 그래 그래, 나도 잘 알아, 하고 위로하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아까 유리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을 때 경희는 깜짝 놀랐었다. 사실 어제 오후, 혜영과 선화와의 통화에서 과장의 죽음이 타살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경희가 배달시킨 잡채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식사 후, 경희가 준비한 커피와 과일을 먹으면서 비로소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유리와의 대화에서 경희는 과장이 죽기 전 1개월 사이의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고,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1개월 전의 그날 저녁, 경희는 탐탁지 않은 대책을 제안한데다가 그 이행조차 다른 사람들한테 다 떠맡긴 것 같아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었다. 그래서 사장한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우선 그렇게 불미스럽게 퇴사한 것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과장의 교포차별에 있다는 점을 밝히고, 유리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경희는 그 메일의 효과에 대해서 반신반의했다. 경희도 사장과 과장의 관계가 애매하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사장은 늘 과장의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과장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사장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개 직원의 시시콜콜한 일에까지 신경 써 줄만큼 한가한 사장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런 인간들은 다시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리의 상황이 좌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마당에 한번쯤 터놓고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꼈다. 유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장이 경희 메일을 무시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그냥 여기까지였더면 좋았을 것을. 경희도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흘렸고, 둘은 부둥켜 안고 한참이나 엉엉 울었다.


과장이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 가위를 쥐고 쫓아왔다. 삐쩍 마른 몸으로 어찌나 빨리 뛰는지 죽을 둥 살 둥 달렸지만 곧 붙잡히게 생겨먹었다. 갑자기 발에 뭔가 걸리면서 땅바닥에 푹 하고 대자로 엎어졌다. 앗! 사장은 식은땀을 쫙 흘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내는 부엌에 나간 모양이다.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엊저녁에 차장과 함께 술을 마신 생각은 나는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과장과는 정말 악연인 것 같다. 죽어서까지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다니. 그날 저녁, 2층에 쓰러진 것을 일찍 발견했더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과장은 최근 시어머니가 돌아간 후에 남편과 별거 중이라고 했었다. 자식들은 다 출가하고 집에 없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아내가 아이들 때문에 회사 일에 관여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애들도 다 자랐으니 이제부터라도 아내를 회사 관리에 참여하게 할까? 처음에는 인물이나 체격이나 빼어난 곳이 없는 과장에 대해서 사장은 별 흥미가 없었다.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화끈하게 연애를 걸어오는 과장한테 얼떨결에 넘어갔다. 현숙한 아내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라는 점도 플러스로 작용했었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한동안 열렬히 사랑했고, 회사 관리를 거의 통째로 과장한테 맡기다시피 했다. 어차피 사장의 눈과 귀가 되어줄 유력한 조력자가 필요한 마당이었다. 과장의 요구대로 월급도 직원들의 2배로 올려주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비밀에 부치기로 했었다. 그런데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과장이 어느새 발설해버렸다. 회사가 커지면서 관리자들도 늘어났다. 다른 관리자들이 과장과 비교하면서 성심을 다하지 않는 눈치였다. 빈둥거리는 과장보다 월급이 턱없이 적다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리자들이 그 모양이니 아래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분간 비밀에 붙여야 할 회사의 중대사들도 과장의 입을 통해서 거침없이 직원들한테 전해졌다. 그리고 소문이 소문을 낳으면서 엉뚱한 소문이 퍼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과장을 마음대로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과장은 사장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둘의 사랑 장면을 녹화한 동영상도 과장의 수중에 있었다. 과장의 입이 터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평화로운 집안이 풍비박산 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 당장 살인죄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판이다. 유리를 구슬려서라도 증언을 부탁해봐야지. 그래도 유리한테 잘해주느라 많이 애썼는데 설마 아주 외면하지야 않겠지? 당초, 회사 생활에 생 초보인데다가 허약해 보이는 유리를 써브의 스크류 보조로 보내주었다. 써브 일은 이 회사 내에서 제일 편한 직종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과장의 차별로부터 필사적으로 보호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에 대한 과장의 반응이 한동안 격심했던 것 같다. 과장만 아니었어도 유리와 어떻게 해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장이 눈치챌 가봐 그렇게 조심했는데 과장은 정말 귀신같이 알아채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과장과 일 때문에 다툴 때도 있었지만, 여자문제 때문에 더 많이 다퉜다. 그 동안 유혹을 느낄만한 여직원들이 꽤 있었지만, 번번이 과장의 훼방 때문에 때이르게 서리를 맞았다. 그렇다고 크게 아쉬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유의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이면서 이국적인 매력을 거침없이 발산하는 유리는 남달랐다. 돈 밖에 모르는 한국 여자들한테 염증을 느낀 점도 한몫 했을 터이다. 밖에서 두어 번 잠깐 사귄 한국 여자들도 악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숱한 돈을 날리면서 겨우 떼어버렸었다……. 그래, 어쩌면 유리와도 더 이상 엮이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속마음을 어찌 알 수 있으랴……


경희, 선화, 혜영, 유리는 오랜만에 회사 근처의 샤브샤브 전문점에서 회식을 가졌다. 유리와 혜영은 매콤한 것을 좋아하고, 선화와 경희는 담백한 것을 좋아해서 반반 냄비로 시켰다. 맥주도 시켰다. 고기와 야채가 어우러지면서 끓는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한결 입맛을 돋운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샤브샤브를 먹고 있으면 속이 금방 뻥 뚫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며칠 전에 있은 과장의 사건 때문에 다들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수미는 비록 정당방위로 풀려났지만, 과장 유족들의 반발로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된다고 했다. 한국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희와 유리는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들을 거지반 선화와 혜영을 통해서 들어왔다. 선화와 혜영은 자기들도 기분이 씁쓸했지만, 과장의 죽음이 꼭 우리 탓만은 아닐 거라면서 유리와 경희를 위로하느라 애썼다. 과장이 너무 지쳐서 절반은 스스로 넘어간 건지도 몰라.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다는 말 있잖아. 경희는 그래, 파리 목숨 같은, 어찌 보면 허망한 인생인 것을…… 하고 한탄하듯이 중얼거렸다.

경희는 국물을 홀짝홀짝 들이키는 유리를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투명한 유리의 미래가 안쓰러웠다. 유리는 중국에서 전문대에 다닐 때 같은 반의 한족 남자와 연애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가 부모들의 격렬한 반대도 뒷전으로 하고 결혼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적 습관과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한 시부모와 친정 부모의 갈등으로부터 생긴 틈새가, 3년 전에 양가 부모의 대판싸움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면서, 둘 사이의 결혼생활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어쩌다 마주앉은 술좌석에서 친정 아버지와 시아버지는 입씨름 끝에 서로 쌍놈이니 야만이니 하면서 욕을 남발하다가 술상을 엎어버리고 결별을 고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뒤에서 서로 자기 부모의 흉허물을 보면서 우스개를 곧잘 하던 유리와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신들린 것처럼 서로 자기 부모들을 두둔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하려 들지 않게 되자, 이혼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적수공권으로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유리한테는 줄줄이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힘이 딸리지 않으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곤 했었다. 나중에는 일이 편하다는 다방에까지 발을 들여놓았지만, 반나절도 되기 전에 뛰쳐나와버렸다. 추근대는 동네 최고의 부자라는 할아버지 때문에 기겁을 했던 것이다. 돈도 모으지 못하고 거의 1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취직한 곳이 이 디지털 도어록 회사였다. 이 일이라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꾼 유리는 선배직원들의 괄시를 이를 악물고 견뎌내었다. 일을 다 배운 다음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혜영이 기분전환으로 폭탄주를 제안했다. 탄탄한 몸매를 가진 혜영은 술을 엄청 잘 마신다. 그래, 폭탄주 좋지. 소주 1병을 시켰다. 선화가 팔을 걷고 각자의 맥주잔에 맥주를 고르게 채운 다음 소주 한잔씩 돌렸다. 폭탄주를 마실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지만, 경희는 대학원 지도모임에서 처음 폭탄주를 마시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소주가 아니라 양주를 맥주에 타서 마셨는데 한잔 마시자마자 제대로 취해버렸다. 머리가 해롱해롱해지고 교수님과 학생들의 말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래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었다. 교수님들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을 항상 잘 이해해주고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따라서 어울리기 힘든 한국학생들마저 외국인 학생들을 가능한 한 포용하고 이끌어주려고 애썼다. 중국어 강의나 번역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항상 존경을 받으면서 했었다. 그때, 가정 형편 때문에 중도에 공부를 포기하지만 않았어도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무슨 미련 같은 것이 남아있어서, 아들을 핑계로 다시 한국에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수미 언니가 스스로 자백해서 다행이지만, 유리는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 법정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면 사장이 유리한테 증언을 부탁할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한국인인 수미 언니를 위해서, 혹은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어서…… 사장은 그날 분명 유리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작업장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에 되돌아섰다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 수미는 몸을 돌리고 있어서 유리를 보지도 못했고, 혹시 보았을지 모르는 과장은 이미 죽고 없다. 어차피 회사를 그만둘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는 사장의 얼굴을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입사해서 한동안은 사장한테 푹 빠져서 지냈다. 고마운 마음 때문이었는지, 사장의 매력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름대로 사장의 정인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렇게 되면 이 회사에서 쭉 편하게 돈도 벌고, 사장의 도움도 좀 받아서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집 한 채 장만하고 중국에 있는 딸을 데려오는 것이 유리의 꿈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공포심이 들기도 했다. 주변의 한국직원들이 눈치라도 채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모님한테 일러바치면 머리털이 다 뜯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과장이 사장의 정부라는 소문이 유리의 귀에 들려왔다. 반신반의하던 저울추가 확신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갑자기 역겨운 느낌이 들었다. 사장에 대한 호감도 급감하였다. 불륜이 본인들한테는 낭만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남들한테는 한낱 추잡스러운 짓거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 유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다 같이 울었다. 유리는 중국에 있는 딸이 보고 싶어서 울었는데, 다들 과장의 죽음 때문에 운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유리는 울면서 계속 머리를 굴렸다. 싱글맘으로 애를 키우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 첫 번째 결혼의 실패 경험으로 보아서, 한국 남자와 재혼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한국인들과 직접 대면해서 부대껴보니 같은 민족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 교포 남자와 재혼하는 것이 어쩌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기왕이면 돈이 많은 교포 남자와 재혼해서 회사라도 함께 경영하는 거야. 그러면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분위기로 인한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나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래서 눈물을 거두고 이야기에 열중했다.

혜영이 전의 회사에서 교포 관리자한테 무시당하던 일을 이야기했다. 유리와 경희 언니는 상대방이 한국인이어서 거리낌없이 복수라도 할 수 있었지만, 혜영은 같은 교포여서 복수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 직원들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열등감을 만만한 교포들을 통해서 해소한 건 아닐까? 경희가 말했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혜영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선화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남자동창생이 얼마 전에 죽었다고 했다. 많은 교포 남자들이 위험한 건설현장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다고 했다. 선화와 혜영은 남편들이 다 지방의 건설현장에 근무하기 때문에 집에 자주 오지 못한다고 했다. 경희는 교포들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무능하고 볼품 없게 느껴졌다. 그들을 돕기는 고사하고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다. 소위 엘리트라고 자부해오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술이 두 순배 돌았을 때, 이번에는 경희가 흑흑 흐느꼈다. 그래서 또 다 같이 울었다.

선화와 혜영의 중학생 딸과 아들은 저녁 후에도 늦게까지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늘 늦게 귀가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울다가는 웃고 또 울다가 웃으면서 계속 술을 마셨다. 선화가 유리와 경희더러 고용센터에 가서 내일배움카드를 신청하라고 했다. 그러면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자기가 원하는 분야의 전문가 기술에 대해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선화와 혜영이도 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내일배움카드를 신청할 거라고 했다. 유리의 눈이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다시 어두워졌다……


경희는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다가도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위통 때문에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한 손으로는 비행기 안 의자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몸을 비틀었다. 생기 잃은 두 눈과 우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초췌한 얼굴, 얼마 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본 유리의 그 모습이 떠오를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통증이다. 과장의 사건이 재심에 들어가면서 경찰서에 불려 다니던 유리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그 상황을 전해들은 유리의 이혼한 남편이 한국으로 찾아와서 유리를 데려갔다. 유리를 떠나 보낸 날부터 경희는 위통을 앓았다. 신경성이어서 그런지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았다.

경희는 방금 전, 공항까지 바래러 나온 혜영과 선화한테 유리도 찾아보고 위통도 낫게 되면 다시 한국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언제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될지 스스로도 막연하기만 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던 경희의 두 눈에서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급기야 줄 끊어진 구슬처럼 굴러떨어졌다….. (끝)

2019년 2월 서울에서

주: 이 글은 한국어표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중국내 발표(연변문학 2019년 5월호)는 조선어규범에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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