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책선

나, 산양이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름이, 인간으로 일컬어지는 당신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쯤은 익히 들었소. 오래전부터 어른들이 그렇게 알려주었다오. 오늘은 결국은 이 이름을 쓰기고 했소. 지금 나는 당신들에게 내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오.


이제부터 전달되는 것은 다 인간 언어요. 그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편하게 하기 때문이겠소. 방금도 철책선 쪽에서 서성이다 이렇게 오는 길이오. 남북방한계선이라고 이름 지어진 바로 그곳 말이오. 이미 깊은 밤이오.


사실 거기에 나의 추억 전부가 있소. 어쩌다 사랑하는 이를 그곳에서 마주치게 되었소. 겁 없는 소녀였소. 수줍어했지만 나를 피하지는 않았소. 그게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라오.


지금에 와서 단 한가지만은 명확하오. 거기서 내 사랑이 나타났고, 거기서 그렇게 서로 마주했으며, 거기서 내 지금까지의 가장 아름다운 세월을 그려볼 수 있었다는 것이오. 아마, 그 순간이 먼 훗날에 이르러서도, 기어이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될 듯한 예감이 드오. 슬프게도, 나의 예감을 맞을 것 같소.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나는 그녀와 나의 추억을 끝내는 묻고 말았소. 벌써 한동안 지난 일이오. 그녀는 사랑에 과감했지만, 역시 젊음의 낭만을 그대로 다 피워보지는 못했다오. 나는 지금, 내 슬픔을 전할 기력과 자격마저 없는 듯하오. 그녀를, 그녀를 지켜내지 못했소.


나는 소심한 편이라오. 우리 족속 모두가 사실은 그렇소. 나는 내가 태어난 골짜기와 그 주위의 새순에 그토록 만족하는 것으로 내 일생을 끝없이 사랑하기만 하면 될 것으로 굳게 믿었소. 그러나 내 인생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소. 많은 것들이 나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것이오.


바로 올해 봄이오. 봄날의 가벼운 빛깔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소. 내가 내 심장 고동소리에 감동되던 계절이었다오. 믿지 못할 나의 발걸음이 왜 철책선을 향했던지 모르겠소. 아마 봄을 탓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걸음에 미치도록 기뻐했다오. 그녀가 거기에 고스란히 서있었소. 그녀를 처음 보았소. 그윽했던, 수집었던, 약간은 항거하던 그 눈길, 그것으로 나는 이미 나의 용기를 초월한 나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오. 역시 사나이였소. 내가 다가섰소.


밤에도 무더위가 과도한 친절 같소. 지금이 버겁소. 이제는 마냥 흐느끼지는 않소. 그러기에 내 생이, 생활이 너무 질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계속 얘기해야겠소.


철책선은 밤과 낮이 따로 없소. 밤이면 네온사인이 그토록 빛나오. 낮보다 밤이 밝은 곳이오, 그녀의 보금자리가 그 근처인지를 후에서야 알았다오. 그녀의 선친께서 거기에 터를 잡은 탓이오. 가끔 나도 그녀의 청에 못 이겨, 새벽의 고요를 껴안고 거기를 거닐었소.


나는 사실 밤의 불빛을 좋아하지 않는다오. 많이 그렇소. 내뿐만 아니라 내 가족, 그리고 우리의 모든 족속은 밤의 불빛에 민감하오. 환한 밤은 밤답지 않다는 생각, 그리고 더욱이 밤의 위험이 우리를 그렇게 일깨워 준 것이라오. 대대토록 밤은 밤답게 보내면서 살아오는 것이 미덕임은 우리 족속 누구에게나 통하는 얘기요.


그녀의 말을 달랐다오. 불빛이 좋다오. 밤이라지만, 새순도 만족스럽게 볼 수 있다는 약간 유치한 근거까지 있었소. 그의 선친한테 들은 풍문인줄은 나도 추측했소. 그러나 그냥 미소했을 뿐이오. 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자체로 이미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오. 그리고 잠자코 듣기만 했소.


벌써 너무 오래전 일이라 누구도 잘 기억은 못하고 있는 일이긴 하오. 우리 족속이 거닐던 산과 들이 몇 년간이나 불바다가 되었다오. 처음 있던, 상상 못할 이변이라고들 하오. 천둥번개의 무서움은 나도 겪어서 아오. 그 이상의 몸서리치는 광경은 사실 보지 못했소. 그러나 옛 어른들의 말씀은 달랐다오. 떨며 말했고, 말하면서 떨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 얘기는 끊임없이 전해내려 오고 있소. 그러나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소. 그토록 처참하게 모든 것이 부서지는 세월이라는 것이오. 그러루한 얘기에 많이 웃었소.


우리 조상은 철책선을 싫어했소. 그런 것이 원래는 없었다고 하오. 대대로 그런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고 하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밤답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을 터요. 나도 그것이 싫소. 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지금은 상상도 하기 싫소. 내가 분노한다고 하지 말아주오. 그런 말에 나는 더 슬퍼할 것만 같소. 방금도 거기에 갔다 왔소. 그녀 흔적은 역시도, 역시도 없었소.


그녀와 거닐었소. 낮에도, 밤에도, 그 어디서도 거닐었소. 그녀는 하필이면 철책선 부근을 좋아했소. 탓할 일은 아니오. 나도 내가 있는 지금의 여기가 좋소. 이상하리만치 내가 처음 본 곳, 거닐던 곳에 애착이 가오. 나는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소.


몇 번이나 그런 낮밤이 지속되었던가, 우리는 사랑이라는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느꼈소. 말은 필요 없었다오. 말만큼 유치한 것도 사실 없소. 눈빛 하나에 울고, 눈빛 하나에 감동을 담았다오. 가벼운 숨소리, 날렵한 몸놀림으로 그녀와 나는 부끄럼 없이 어우러졌소.


철책선에서도 우리는 계속 거닐었소. 밤에도 거닐 수 있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오히려 철책선과 그 네온사인에 감사하기까지 하였다오. 감사, 감사, 내가 감사라는 정서마저 느낄 수 있었다니, 그건 아마 네온사인 때문일 것이오.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 같소. 내 억눌린 것도 무더위에 말려 내려간 것 같소. 한결 정신이 드오. 지금, 멀리서 네온사인이 보이오. 그 불빛이 왜 뭉개지고 흐릿한 것이오? 아아, 우는 것은 아니라오.


그녀와의 마지막 날, 그날 밤도 철책선이었소. 불빛은 그쪽과 그 반대편 꽤 먼 곳에 또 한줄 늘어서 있다오. 그쪽으로는 아직 가보지 못했소. 갈 이유도 또한 없소. 다정하게 마주보던 그 어리석음, 차마 그 낭만에 따가운 소리를 생각 키우기 싫소. 어리석음, 낭만의 어리석음, 그것은 그 소리 때문이었소. 그녀가 홀연 쓰러졌소. 천둥보다는 미약하지만, 그렇게 급촉한 소리가 몇 번이나 울렸소. 처음 듣던 그 소리,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오. 그녀가 쓰러진 자리에서 피가 흘렀소.


그 자리에 물러앉았고, 끝없이 떨었소. 그리고 차마 알기 싫은 두려움 속에서 부끄럽게도, 그렇게 부끄럽게도 어느 때보다도 무섭게 일어났소. 그리고는 뒤로 돌아 끊임없이 달렸소. 그녀의 가냘픈 소리가 허공을 헤칠 때, 내 심장 속에서 그 따가운 소리가 계속 튀여 나오고 있었소. 무작정 달렸소. 나는 달렸소. 그녀를 두고 달렸소.


멈칫했소. 무엇을 내가 하는지를 내가 알았는지, 아니면 알지 않으려 했는지, 아니면 알지도 모르지도 않았는지를 도저히 모르겠소. 그냥, 되돌아서야 할 것만 같았소. 내가 처음 그녀를 볼 때 옮기던 그 걸음처럼 나는 가야만 했소.


되돌아섰소. 그리고 그쪽으로 뛰었소. 따가운 소리가 나던 그곳으로 무작정 뛰었소. 내가 도착한 곳에는 그녀가 없었소. 흥건한 피자국과 거기에 적셔진 풀잎들, 나는 차가운 이슬 감촉을 알뿐이지 그 이상은 몰랐었소. 그 피는 흘러서도 뜨거웠소.


꺼이꺼이 울었소. 하늘을 향해 울었소. 그리고 내가 그렇게 뛰어가던 모습에 울었소. 아아, 이미 그녀는 없었소.


어른들이 말했소. 그 아득한 옛날에 그런 소리가 있었다오. 따가운 소리, 바로 그 소리라고 하오. 인간이라는 족속, 바로 당신들이 그런 소리를 낸다고 했소. 그 소리가 무엇인지 오늘 물어보려고 이러는 중이오. 겸허함으로 글을 띄우오.


말해주오. 내가 모르는, 당신들이 알법한 그 소리 말이오. 그리고 내 그녀가 쓰러졌던 이유도 말이오. 당신들이 말해줄 차례인 것 같소. 그래서 오늘 내가 인간 말을 하는 것이오.


밤이 더 깊어가오. 그녀 생각도 깊어가오. 낭만보다도 눈물이, 미소보다도 울음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오. 대답을 주오. 그녀와 못 다한 회포를 저며 오늘 저녁을 달래오.


그만 쓰겠소. 나, 산양이오.


21세기 한여름 깊은 밤, 철책선이 바라보이는 산 한 자락에서

 

 

 

 

전유재(全宥再, Quan YouZai)연변과학기술대학 생물화공학과 학사. 상명대 정보통신대학원-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협동과정 기술경영학과 석사졸업.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석사과정

메일: yzquan002@hanmail.net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