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편집부는 신길우 교수가 보내온 글 '윤동주의 묘소와 묘비에 얽힌 이야기'를 받았다. 메일 문을 간추려 싣는다. 학계와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윤 시인에 대한 더 따뜻한 관심을 부탁 드린다. --- 편집자.       

이  국장님:

노고가 많으십니다. 덕분에 동북아신문을 잘 읽고 있습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시는 윤동주 여동생 부부께서 내년 2월에 윤동주 62주년 행사를 호주에서 여신답니다. 그 동안 윤동주에 대해 많은 활동과 관심을 가진 분들을 초청하는데 저를 초청자 5명에 들어 있다면서 시간을 비워놓으라는군요. 금년 84세의 노부부가 마지막 행사를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병원 출입을 하셨다는데 좀 나아진 모양입니다. 윤동주는 죽은 뒤에야 알려지고, 지금은 가장 인기있는 시인이 되었는데 여동생 부부가 오빠를 위해 평생을 애쓰는 모습에 눈물이 겹습니다.

삶 자체가 참 진실하신 분이시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서초동 문학관에서   신  길  우    드림

 

                                     申  吉  雨


        1. 윤동주 60주기 이야기

 

▲ 용정윤동주자료관앞시비와(2003[1].7.22.)
금년 2005년은 윤동주 시인의 60주기가 되는 해이다. 광복이 되기 꼭 6개월 전인 서기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하였으니 올해가 작고한 지 60년이 된 것이다.

  오늘날 윤동주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작품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문학지의 인기 문인 통계에서도,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시인 조사에서도, 윤동주는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원본에 증보판에 개정판과 자필원고판 등 그 종류만도 수십 가지이고, 일부는 판을 거듭하며 발간되고 있다. 1999년에는 『사진판 윤동주 자필시고전집』이 발행되고, 2004년에는 원본대조 『윤동주 전집』도 나왔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중국어․영어․불어․체코어 등으로도 번역 출간되어 외국에도 많이 알려졌다.

 

  그 동안 윤동주에 대한 연구와 논저들도 수백 편이 나왔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과 북한에서도 윤동주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작품 개개에 대한 세밀한 고찰과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는가 하면, 원작과 개작 및 그 경개와 상황 등에 대해서까지도 밀도 있게 살펴본 연구들도 발표되고 있다.

 

  이제 윤동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의 시들은 훌륭한 감동을 주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그래서 문학지들은 특집을 자주 싣고, 문학단체는 관련 행사를 자꾸 개최한다. 문학상 시상과 기념백일장도 여러 곳에서 실시되고, 해마다 추모회와 시화전과 낭송회, 유고․유품의 전시회까지도 열리고 있다. 곳곳에 시비가 세워지며 기념관․기념실도 개설되었다. 중국에 있는 묘소와 생가 등 유적지에는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금년은 을유년 광복 60주년과 함께, ‘독립운동’이란 죄목으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그의 60주기가 된다. 윤동주는 겨우 29세, 만 27년 1개월 16일이란 짧은 삶, 그것도 광복이 되기 꼭 6개월 전에 잔인하게 목숨을 빼앗긴 민족의 시인이기에, 더욱 그를 생각나게 하고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래서인지 을유년을 맞은 올해에는 더욱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가 국내외에서 여러 번 열렸다.

 

  추모행사가 가장 먼저 개최된 곳은 서울이다.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회장 김우종)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후원으로 남산 문학의 집에서 <윤동주 60주기 추모전야제>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는 <윤동주 유적사진전과 추모 시화전>이 2004년 12월 7일부터 12월 22일까지 열렸고, 12월 11일 오후 3시에는 같은 장소에서 <한일 추모문학제>가 류양선(카토릭대)의 “윤동주의 산문과 시의 관련 양상”, 신길우(문예춘추 주간)의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일본인 마나끼 미끼꼬(후쿠오카)의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의 활동”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행사기간 동안 주최측에서 제작한 추모사화집 『님을 그리며』와 홍보엽서가 배부되었다.

 

  2005년 2월 12일에는 일본 후쿠오카 클리오코트 호텔 세미나실에서 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 주최로 오후 7시부터 <윤동주 60주기 추모문학제>가 열렸다. 한국과 미국 동포문인 및 일본인 등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류양선(카토릭대) 교수가 “윤동주의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 이은애(덕성여대) 교수가 “「자화상」에서 「참회록」에 이르는 길”. 신길우(문예춘추) 교수가 “시인 윤동주의 유적들” 발표가 있었다. 이어서 마나끼 미끼꼬(후쿠오카)와 박영우(윤동주생가보존회장)의 활동내용 등이 소개되었다. 

13일 오전 10시에 이들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 구치소(옛 감옥) 뒷마당에 모여 <윤동주 60주기 추모제>를 열었다. 본관 건물이 개수 중이어서 공사장 울타리 밖 뒷뜰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김우종 박사가 대표로 헌작을 하고, 참석자 40여명 전원이 하얀 국화꽃 한 송이씩 헌화를 하였다. 윤동주 시의 낭송에 이어 몇몇 참석 시인들이 자작 추모시를 낭송하였다.

  이 뒷마당에서는 같은 날(13일) 오후 3시에 <윤동주 추모제>가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주최로 또 열렸다. 이들은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하여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는 일본인들로 구성된 단체로, 10여년 전부터 해마다 후쿠오카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들은 추모제에 이어서 송우혜(윤동주 평전 저자) 초청강연회도 개최하였다.

 

  윤동주가 옥사한 날인 2월 16일에는 <윤동주 60주기 추모문학제>가 호주 시드니 한인회관에서도 열렸다. 유일한 유가족인 윤혜원․오형범 여동생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에 호주한인문인협회와 시드니우리교회와 호주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개최한 이 행사는 약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제1부 추모제에서는 김창수 주시드니 총영사의 추모사에 이어 홍길복 목사의 인도로 추모예배가 있었고, 제2부 호주한인문인협회의 윤동주의 시 낭송회, 제3부 홍장학(정본 윤동주 전집 저자) 선생의 “윤동주와 기독교 신앙” 강연회가 있었다.

  2월 16일 오후 2시에는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회장 정창영 총장) 주최로 서울 연세대 교정의 윤동주시비 앞에서 조카 윤인석 교수(윤일주 교수의 아들)가 참석한 가운데에 <6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 처음으로 찾아간 윤동주묘 앞에서(1990[1].7.17.)

  중국 연변에서도 용정의 윤동주 묘소에서 <윤동주 서거 60주기 추모모임>이 열렸다.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개최한 이 행사는 조성일 회장의 추모사에 이어 윤동주 시 낭송 등이 눈이 내리는 가운데에 오전 11시부터 1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윤동주 추모행사>가 2월 11일 도쿄에서, 12일 교토에서, 13일 후쿠오카에서 연속 열렸다. 특히 교토행사에서는 민단과 조총련과 일본인이 사회를 나눠 맡아 진행하여 화합의 장이 되었다. 제1부는 김용주 도시야 코리아 동창회 부회장(민단계)이, 제2부 시낭송은 일본성공회의 이다 목사가 시 해석을 곁들여 진행하고, 제3부는 도시샤 코리아 동창회 박동무 총무(조총련계)가 맡았다.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도시샤대학에서도 동창회 중심으로 <윤동주 추모제>가 3일 동안 열렸다.

 

  금년 12월에는 호주 시드니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큰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 한다. 1986년에 시드니에 정착한 윤혜원․오형범 83세 여동생 노부부와 호주한인문인협회 등이 주선하고 있는 이 행사는 윤동주 60주기를 마무리하는 행사가 될 것이다.

 

  이들 부부는 윤동주와 관련하여 많은 활동을 해오고 있다. 1948년에 월남하면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윤동주의 시작노트와 사진들을 가져와 윤동주 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1988년 6월에는 미중한인우호협회(회장 현봉학)의 지원으로 윤동주 묘소를 수선하였고, 2003년 7월에는 다시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를 손수 개수해 놓았다. 또 미중한인우호협회와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와 협력하여 해마다 ‘중학생’ 잡지에 1년 동안 실린 학생작품 1000여 편을 심사하여 <윤동주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2000년 2월 16일 제1회 시상부터 수상자들은 연세대학교의 후원으로 매년 1주일 동안 연세대에서 교육 강연과 한국문화관광을 6회째 시행해주고 있다.

 

▲ 윤동주 60주기 추모 세미나를 마치고,한국 참가자들(2005[1].2.12.후쿠오까클로오코트호텔)

  윤동주의 매부 오형범 장로는 윤동주와 면식도 없었고 사후에 맞선으로 결혼을 했다. 윤동주가 시인인 것도 월남하여 그가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알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중국에서 북한을 거쳐 서울로 오는 그 어려움 속에서 윤동주의 자필 시작 노트와 여러 자료 등을 가지고 와서 펴냈고, 82세 고령의 지금까지도 이미 작고한 처남 윤동주와 그 정신의 선양을 위해 온갖 수고를 다하고 있다. 지금도 귀에다 보청기를 꽂고 노구를 지팡이로 의지하면서 윤동주의 60주기추모 마무리 행사 준비 등으로 바쁘게 애쓰는 것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윤혜원 여사가 “내 남편 오형범 장로에게 절하고 싶다”는 말이 참으로 가슴을 찡하게 한다.



        2. 윤동주의 本家와 生家 이야기


윤동주가 태어나서 자란 본가(本家)는 만주국 간도성(현재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 있다. 용정에서 삼합진으로 가는 지신향 큰길 오른쪽 길가이다. 이 집에서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32년 4월에 용정의 은진중학에 입학하여 용정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외가인 이 집에서 1917년 9월 28일에 태어났다.

 

  본가는 팔린 뒤 1981년에 무너져 1983년에 철거되었다. 10년이 지난 1993년 4월에 용정시에서 명동촌을 관광점으로 지정한 뒤, 지신향 인민정부와 용정시 문학예술계연합회와 연변대학의 주선으로 해외조선족연구소의 후원을 받아서 1994년 8월 29일에 복원하였다.

 

  2003년 6월 6일에 필자가 찾아갔을 때에는 본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한옥 2채를 사서 헐어다가 그 재목으로 새웠다는데, 전면 5칸, 측면 2칸의 겹식 10칸 기와집이다. 본채 왼쪽에 직각으로 거의 잇대어 헛간채가 따로 있는데, 안에는 디딜방아 한 틀이 놓여 있었다.

 

  본채는 동서로 긴 남향집인데, 나무 기둥에 하얀 회벽, 골이 진 기와를 얹은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칸마다 전면에는 중앙에 나무 문살의 문이 하나씩 달려 있는데, 부엌과 곳간인 오른쪽 두 문은 중간까지 나무판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복원된 본채의 구조가 좌우가 바뀌었다고 한다. 3004년 11월 21일 서울에서 만났을 때 오형범․윤혜원 여동생 부부가 설명해준 바로는 평면도를 좌우로 엎어놓고 건립한 모양이라 하였다. 원래는 지금과는 달리 우측에 굴뚝이 있고, 왼쪽에 부엌이 있었다고 한다. 맨 왼쪽에 앞뒤가 트인 소 외양간, 다음이 부엌이고, 이어서 부엌과 통한 터진 방, 다음에 앞뒤로 조부모와 부모방이 있고, 이어서 손님방과 아이들 방이 앞뒤로 있었다. 윤동주는 굴뚝이 있는 오른쪽 끝의 뒷방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물이 깊어 두레박을 사용했다는 우물은 본채의 오른쪽 마당에 있는데, 2003년 6월 6일에 방문했을 때에는 무너져내린 채 맨 위에 설치했던 井자형의 재목이 돌과 섞여 있을 뿐이었다. 대문은 본채의 오른쪽 우물 앞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나무 울타리에 이어 사립문이 있었다.

 

▲ 윤동주 60주기 추모제를 마치고(2005[1].2.13.후쿠오까감옥마당에서,발표자들)

  안채와 헛간채 사이의 굴뚝 앞에는 “윤동주생가옛터”라 새긴 복원비가 서 있는데, 용정시 지신향인민정부와 용정시 문학예술계연합회 공동 명의로 되어 있었다. 본래 이 집은 1900년경에 조부 윤하현이 세웠는데, 1994년 8월 29일에 복원한 것이라 적혀 있었다. 작은 뒷마당 울타리 너머로는 두어 길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제법 넓은 앞마당은 풀이 무성하였고, 앞 울타리 너머로는 밭이었다.

  1985년에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 있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명동촌 본가를 찾았을 때에는, 건물은 없어지고 집터는 담배밭이었다. 파헤쳐진 초석이 무더기로 쌓였고, 콘크리트로 된 부엌바닥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4년에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현봉학 회장이 찾아갔을 때에는 돌무더기에서 기왓장 하나를 발견하고 가져왔는데, 이것을 연세대학의 박창해 교수와 오형범과 윤일주 부인(정덕기) 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보여주었다. 그 기와는 처마 끝에 쓰는 수키와 막새였는데, 둥그런 테두리 안에 중앙에는 삼태극이, 위에는 십자가, 아래는 무궁화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 막새 기와는 현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후쿠오까 감옥 당시 전경

  대문 밖 서쪽은 밭이었다. 동쪽으로 낮은 벼랑 밑 좀 언덕진 자리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길쭉한 창고가 있다. 그 앞에 명동교회 건물이 창고와 90도를 이루며 따로 서 있는데, 출입문에는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교회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인데, 벽면에는 가로로 두 줄의 목재가 드러나게 하고 벽은 모두 백회(白灰)를 발라서 하얗다. 5칸 모두 상하 두 목재 사이 좌우 중앙에 각각 창을 설치하였다. 중앙의 두 나무 기둥 중 왼쪽에는 “明東敎會舊址”, 오른쪽에는 “明東歷史展示館”이라 쓴 세로로 된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주변은 얕은 뜰이 둘러져 있었다.

 

교회 건물은 큰길 아래로 낮은 벼랑이 있고, 그 밑 얕은 언덕바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원래의 자리에 지금까지 그대로 서 있는 것이라 한다. 지금은 <기독교교회당>이란 간판을 단 채 서 있다. 안에는 윤동주의 <사적도편전람>이 있다고 한다.

교회당 건물 오른쪽에 윤동주의 큰 외할아버지로 명동학교 설립자요 장로로 활동한 <김약연선생 기념비>가 있다. 그의 묘소는 장재촌에 있다. 교회 건물 옆에는 설립자인 김약연(金躍淵) 목사의 집이 있었고, 그 뒤에는 교회의 종을 매달았던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교회 밖에는 똘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작은 도로가 육도하(六道河)까지 나 있다.

 

명동학교는 명동교회에서 서남쪽으로 200~300m 거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잡초만 우거져 있다. 사진으로는 일자형으로, 왼쪽이 소학교이고 오른쪽이 중학교이며, 중앙에 문이 있는데 그 위에 횡서로 ‘명동학교’란 간판이 걸려 있다. 현재의 명동소학교는 개울 건너 다른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명동학교는 1901년 4월에 김약연 선생이 명동에 <규암재서당>으로 차렸고,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으로 개칭하고, 1909년 4월에 <사립명동학교>로 고쳤다. 1910년에 중학부를, 1911년에 여학부를 설치했는데, 1925년에 폐교되었다. 1973년에 대들보에서 ‘명동학교 건축기’가 발견되었다.

 

  윤동주가 용정으로 이사와 살았던 생가(生家)는 두 곳이 있다. 윤동주가 1932년에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자 명동촌에서 용정으로 이사를 하고, 한번 옮겨서 생가가 두 곳이 된 것이다. 지금은 둘 다 집터만 확인될 뿐이다.

첫 번째 생가는 두 번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얼마 살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집은 지금 용정현 기계수리공장의 정문과, 정문에서 공장에 이르는 길이 된 곳에 있었다고 한다. 원래 이곳은 영국덕(英國德) 지역으로 은진중학과 명신여중과 제창병원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집은 제창병원 맞은편에 있었다고 한다.  (5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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