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편집부는 신길우 교수가 보내온 글 '윤동주의 묘소와 묘비에 얽힌 이야기'를 받았다. 메일 문을 간추려 싣는다. 학계와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윤 시인에 대한 더 따뜻한 관심을 부탁 드린다. --- 편집자.       

이  국장님:

노고가 많으십니다. 덕분에 동북아신문을 잘 읽고 있습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시는 윤동주 여동생 부부께서 내년 2월에 윤동주 62주년 행사를 호주에서 여신답니다. 그 동안 윤동주에 대해 많은 활동과 관심을 가진 분들을 초청하는데 저를 초청자 5명에 들어 있다면서 시간을 비워놓으라는군요. 금년 84세의 노부부가 마지막 행사를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병원 출입을 하셨다는데 좀 나아진 모양입니다. 윤동주는 죽은 뒤에야 알려지고, 지금은 가장 인기있는 시인이 되었는데 여동생 부부가 오빠를 위해 평생을 애쓰는 모습에 눈물이 겹습니다.

삶 자체가 참 진실하신 분이시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서초동 문학관에서   신  길  우    드림

 

                                               3. 윤동주의 묘소와 묘비에 얽힌 이야기

                                                申  吉  雨

<4에 이어> 윤동주 묘는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 용정시 동북쪽 합성리(合成里) 동산(東山)의 교회묘지에 자리하고 있다. 합성리 서쪽으로 긴 산등성이가 있는데, 마을 부근의 전답을 빼고는 거의가 다 공동묘지이다. 윤동주의 묘는 이 동산의 8부 능선쯤에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의 위치가 글과 책에 따라 ‘동산교회 묘지’ ‘중앙교회 묘지’ ‘동산 중앙교회묘지’ ‘교회공동묘지’ 등으로 나온다. 실제로 ‘동산교회’와 ‘중앙교회’가 각각 있었고, 지명으로 ‘동산’도 있었으며, 묘도 공동묘지에 있어서 혼란스럽다. 용정에서 살았던 윤동주의 여동생 부부(오형범․윤혜원)의 말에 의하면 “동산에 있는 교회묘지”가 맞다.

 

당시 용정에는 장로교회로 중앙(中央)교회와 동산(東山)교회와 토성포(土城浦)교회가 있고, 서부의 감리교회와 북부의 성결교회까지 합쳐서 모두 5개가 있었다. 1942년에 교단이 합쳐져 만주기독교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를 쓸 1945년 당시에는 동산의 묘지가 이들 5개 교회의 공동묘지였다. 그러므로, “동산에 있는 교회공동묘지”가 맞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설치된 이후 지금까지 용정시의 동북쪽인 합성리 마을 뒤 동산의 교회공동묘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가족들이 설치하였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봉분 앞에 세웠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서 있다.

 

▲ 윤동주-서시-연세대학

묘비는 화강암으로 크기는 가로 39.5㎝, 폭 17㎝, 높이 100㎝인데, 전면에서 보아 윗부분은 좌우로 둥글게 하여서 측면의 높이는 93㎝이다. 묘비의 앞쪽은 좌우 5분의 1 정도는 까맣게 칠하고, 중앙에 검정 글씨로 세로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겨놓았다. 비의 뒤쪽과 오른쪽 면에는 해사 김석관 선생이 짓고 쓴 한문으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뒷면은 22자 8행, 우측면은 22자 3행이 음각되어 있다. 글씨들은 모두 검정색이다. 비의 왼쪽 면에는 세로로 ‘一九四五年六月十四日’이라 새기고, 그 아래에 오른쪽부터 ‘海史 金錫觀 撰書’와 ‘弟 一柱 / 光柱 謹竪’라 두 줄로 새겨놓았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몇 가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담겨 있다.

  먼저 어째서 ‘시인’이라 새겼을까 하는 점이다.

묘비를 세운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다. 창작일자로 가장 빠른 시는 1934년 12월 24일자로 된 3편이 있다. 최초로 공개된 시는 1935년 10월에 숭실중학교 학생회에서 간행한『崇實活泉』제15호에 게재된「공상」이다. 동시는 1936년「병아리」가 연길의 <카토릭소년> 11월호에 발표되고, 이어서 「빗자루」(12월),「오줌싸개지도」(1937.1.),「무얼 먹고 사나」(37.3.), 「거짓부리」(37.10.)가 발표되었다.

  

  1939년 1월 23일에는 시「遺言」이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리고, 이어서 시「아우의 印象畵」와 산문「달을 쏘다」가 같은 난에 실리고, 동시「산울림」이 <少年>지에 발표되었다. 1941년에 연희전문 문과 발행의 <文友> 6월호에 시「새로운 길」이 실리고, 시「자화상」도 6월호에 발표되었다.

  사후에 최초로 발표된 시는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4면에 게재된「쉽게 씌어진 시」이다. 3월 13일에는「또 다른 고향」이, 7월 27일자옇소년」이 실렸다.

  

  이런 사실들로 볼 때, 1945년에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도 묘비에는 “시인윤동주지묘”라 한 것이다.

  이에 대해, 2003년 6월 28일 용정의 집으로 초대받은 자리에서, 윤혜원․오형범 여동생 부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1945년에 묘비 건립을 준비하면서, 조부와 부친이 “詩人”이라 붙이기로 하였다. 윤동주의 자선육필시집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19편을 묶어서 3벌을 만든 육필원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그러니까, 육필시집을 근거로 조부와 부친이 묘비에 “시인”이라고 새긴 것이었다.

  

   또 하나, 묘비에 어째서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서기(西紀)를 썼을까 하는 점이다.

  윤동주는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그런데, 윤동주의 묘비에는 연도가 모두 연호(年號)가 아닌 서기(西紀)로 되어 있다. 비문 속의 연도도 서기이고,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謹竪”라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은 특이한 것이다.

  같은 해 3월 7일에 작고한 송몽규(宋夢奎)의 묘비에는 서기가 아닌, 연호 “康德”으로 새겨져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현석칠(玄錫七) 목사의 묘비에도 “康德”으로 되어 있다. “강덕”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당시 연호였다.

  

  비문은 은사인 김석관 선생이 지어서 썼고, 묘비는 가족들이 세웠다. 그러므로, 연호 대신 서기를 쓴 것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하여 오형범 장로는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는 한국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잡혀가서 일본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만주국은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임) 연호를 쓰겠는가? 그래서 서양에서 두루 쓰고 있는 서기를 쓴 것이다.

  

   한창 나이의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도, 윤동주의 스승으로서도 그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만주국)의 연호는 쓰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윤동주의 가족은 일찍부터 모두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서기가 어렵지 않게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현봉학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에서 수선(修繕)하였다. 이때 봉분 밑을 20여㎝ 높이로 둥글게 시멘트로 두르고, 묘비는 그 테두리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새로 상석을 설치하였다.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이다. 상석의 전면에는 “龍井中學校修繕”, 그 오른쪽에 좀 작은 글씨로 “一九八八. 六月”이라 새겼다. 우측면 위쪽에 “龍井中學校同窓會”, 아래쪽에 “美國中國韓人友好協會捐贈”이라 새겨놓았다.

 

  첫 번째 개수는 43년만에 이루어진 것인데, 봉분 밑을 시멘트로 둥글게 테를 두른 것과 오석판을 이용하여 상석을 설치한 것이 새로운 점이었다. 봉분 밑을 테를 두른 이 모습은 한국인들이 왕래하기 시작한 무렵인 1988년에 이루어져서 중국 현지를 방문한 사람은 물론, 보도된 사진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 윤동주묘를 찾게 해준 친족사진

2차 개수는 2003년 7월 15일에 이루어졌다. 시드니에 거주하는 여동생 윤혜원․오형범 부부가 2달 정도 공사하여 완공하였다. 재개수를 하면서,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다 사각형으로 골을 파고 폭 60㎝의 대리석판을 세워 둘렀다.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어 봉분 모습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묘비는 봉분 앞에다 세우고, 대석에 이어서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오석 하나로 상석을 새로 설치하였다. 상석의 왼쪽에는 “龍井中學校修繕 1988. 6.”, 오른쪽에는 “美中韓人友好協會捐贈”이라 새겨서 1차 수선의 사실을 남겨놓았다. 2차 개수 사실은 대리석 테두리 왼쪽 앞 구석 위에 따로 세운 개수비에 새겨놓았다. 개수비는 가로 60㎝, 높이 40㎝로 아래쪽이 두껍게 만들었는데, 앞쪽에 다음과 같이 새겨놓았다.

    詩人의

祖父 尹夏鉉 1875. 2. 1. (음)~1948.  9. 4.(양)

祖母 南信弼 1886.         ~1955.

父   尹永錫 1895. 6. 11.(음)~1965.  4. 20.(양)

母   金  龍 1891. 8. 29.(음)~1948.  9. 26.(양)

  弟   光柱 1933. 5. 15.(양)~1962. 11. 30.(양)


     이 동산 어딘가에 잠들어 계시지만

   오늘날 묘소를 찾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누이 惠媛, 조카 仁石, 仁河, 卿 새김

                 2003. 7. 15.


상석 앞 4각의 대리석 테두리에 이어서 가로 300㎝, 세로 150㎝ 정도를 화강암으로 네모지게 테를 두르고 그 안에 잔디를 심어 참배하기에 좋게 계절(階節)을 만들어 놓았다. 이 계절의 테두리 화강암은 2004년 여름에 여동생 부부가 다시 대리석 판으로 바꾸어 둘렀다.

윤․오 노부부는 윤동주의 묘 옆 가까이에 자리한 송몽규의 묘도 2003년에 똑같은 모양으로 개수하였다. 이제 두 시인의 묘는 사방 4미터 간격으로 하얀 대리석을 세워 네모지게 테두리를 한 모습으로 찾아야 하게 되었다. 봉분 밑 둥근 테를 한 모습은 사진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



        4. 玄鳳學 선생과 오오무라 교수의 묘소 찾기

 

▲ 오무라마쓰오
 그런데, 윤동주의 묘는 잊혀졌다가 1985년에야 찾아냈다. 그때까지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남북한이 갈리고 중국과는 교류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도 1946년 윤일주에 이어, 1948년 윤혜원 부부가 월남하고, 조부와 모친은 1948년에, 조모는 1955년에, 윤광주는 1962년에, 부친도 1965년에 세상을 떠난 뒤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묘소를 찾으러 나선 사람은 미국에 사는 현봉학 선생이었다. 그는 1984년 봄에 신태민(전 경향신문 부사장) 씨 댁에서 본 윤동주의 초간본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1.30. 정음사)를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8월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 연변을 방문하여 여러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가서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며 그 묘소와 유적들을 찾아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윤동주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내년에 다시 방문할 때에는 꼭 묘소를 찾아볼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해 두었다.

 

  그 다음해 1985년 7월에 제2차로 방문을 하여, 용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이사장, 용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연변대학 농학원 김동식 교수 등으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안내를 해주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밤새 억수로 쏟아진 비 때문에 버스는 동산 묘지 언덕의 진흙땅에 묻히고, 걸어서도 올라갈 수가 없어서 단념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1985년 5월 14일에 일본의 오무라 교수가 찾아냈다. 남동생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에 동경에 가 있을 때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된 것을 알고 찾아가, 용정과 명동의 여러 지점을 지도로 그려주며 자기형의 묘소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 12일에 연길에 도착하여 공안국의 허가를 받아, 연변대학의 권철(權哲), 이산해(李海山) 교수와 용정중학교의 한생철(韓生哲) 선생들의 도움으로 동산에 있는 묘지를 찾아냈고, 묘비의 비문으로 확인하였다. 오무라 교수는 이 사실을 공표하였고, 그래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무라 교수가 윤동주의 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윤일주 교수가 주어 가지고 간,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왼쪽에 오형범과 윤광주, 오른쪽에 윤혜원․윤영선․윤갑주 5명이 들어 있는데, 묘비제 “詩人尹東柱之墓”가 중앙에 뚜렷하다. 이 묘비 사진이 아니었던들 공동묘지의 수천의 묘비들을 하나하나 살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내고 확인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자료는 이 가족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윤동주전집 Ⅰ』(1995, 문학사상사)에 실렸는데, 사진설명이 잘못되었다. 윤영선(당숙)과 오형범(매부)이 서로 바뀌어 설명되어 있다.

 

 현봉학 선생은 묘소를 먼저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뒤로도 연변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여러 유적들을 찾아 살펴보았고, 1988년에는 공사비를 협찬하여 묘소를 개수하였으며, 윤동주의 시정신을 계승할 학생 문인들을 해마다 10여명씩 발굴하여 시상하는 윤동주문학상을 후원하고 참여하는 등 여러 가지로 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의 현봉학 선생과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 교수, 이들은 윤동주를 널리 알리고 기리며, 새로운 문인들을 키워내는 초석을 놓았다. 존경의 마음이든 속죄의 심정이든 이들이 쏟는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고, 시인 윤동주의 60주기를 맞으며, 문학은 민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작품정신은 국가를 뛰어넘어 흐른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위대한 문인이나 작품은 결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또한 생각한다. ☺


<2005. 9. 30.『한국시문학』제16집, 한국시문학회>

<2006. 9. 20. 신길우 수필집『천국과 인간세계』도서출판 박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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