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미란 약력 :
필명 백한, 흑룡강성 탕원 출생, 숭실사이버대 방송문예창작학과 졸업.
에세이집 "서른아홉 다시 봄" 출간.
소설 "로마로 가는 길", "이 밤은 아름다워", "먹골에는 겨울에도 비가 내린다" 발표.

단편소설 / 백한  

먹골에는 겨울에도 비가 내린다

 

[서울=동북아신문]  나는 내 안에 떠오르는 풍부한 가능성들 앞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채 저울대 위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문아래 한 줄기 빛이 아침을 알리게 되는 순간, 나 자신이 어느 쪽으론가 기울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으로 인해 내 마음은 이미 찢겨져 있다. ... 나는 황홀한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의 메커니즘 속으로 들어간다. 살아보려고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시도한다는 일,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장 그르니에, 《자유와 선용에 대하여》

    1

    “뭐라구요? 서연이가 학교폭력에 개입을 했다구요?”
    겨우내 쫄아 있던 내 가슴에서 폭탄이 쾅 터졌다. 새된 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점심나절의 사무실 공간을 찢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회사에 들어와 막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려던 참이였다. 화장을 고치고 있던 몇몇 동료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나는 핸드폰을 귓가에 바싹 갖다 대고 회의실로 향했다.
    “네, 어머님. 서연이랑 좀 전에 상담했는데 많이 놀란 것 같더라구요. 너무 야단치진 마시구요. 서연이랑 은재랑 몇몇 2학년생들이 1학년 후배를 혼내준다고 불러냈대요. 그런데 재훈이란 남학생이 그 애를 때렸고 누군가 현장에서 동영상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유포를 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요. 서연이도 동영상을 찍었다고 합니다......”
    “네? 서연이가 동영상을요?”

    내 가슴은 또 한 번 허망 폭탄의 세례를 받는다.
    “다행이도 서연인 찍기만 하고 바로 삭제했다고 합니다. 제가 서연이 핸드폰 받아서 확인했는데 삭제한 게 맞습니다. 서연이 말로는 유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건 어머님도 재확인 해보시구요. 지금 피해자의 부모님이 가해자 학생들과 학부모님들 다 불러서 이야기를나누고 어떻게 해결할지 결정을 짓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오후 세시까지 학교 상담실로 와 주시겠어요?”
    이거 실화 맞냐?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자신에게 묻고 있다. 서연이담임쌤이란 몇글자가 액정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치긴 했지만 기껏해야 덜렁대는 서연이가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을 삐었다든가 아니면 몰래 몰래 화장을 해서 벌점을 받았다든가 하는 정도의 가벼운 사고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사고와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어머님, 꼭 와주셔야 합니다. 어머님께서 오시지 않으면 서연이 혼자 오롯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합니다.”
    나는 회의실 테이블에 몸을 지탱하고 가까스로 서 있었다. 동영상, 페이스북, 일학년 후배, 피해자, 학교폭력... 이번에는 머릿속이 폭탄을 맞은 듯 뒤죽박죽이다. 서연이는 과연 폭력이 뭔지 알기나 하고 이런 사건에 개입을 한 걸까?
    한참 지나 정신이 들자 나는 서둘러 내 자리로 돌아와 핸드백과 머플러를 챙겨들고 회사 문을 나섰다. 목동에 있는 우리 회사에서 서연이네 학교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까지 가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지집애, 지 에미 똑 떼 닮아 가지고”

    갑자기 원망과 울화가 확 치밀어 올랐다. 서연이에 대한 울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이었다. 어디라 없이 캄캄한 어둠의 세계가 꽤 오래 지속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어둡던 세월에 조금씩 햇볕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하지만 올 겨울은 너무나 춥다. 사흘이 멀다하게 한파주의보가 울린다. 도저히 봄이 올 것 같지 않다. 초겨울부터 꺼내 입은 무릎까지 오는 오리털 점퍼를 나는 벗을 수가 없다. 모직코트로 멋을 낼 건 꿈도 꿀 수 없다. 내 인생에도 겨울이 왔는지 모든 것이 은행 자금 동결 당하듯이 홀딩 상태다. 밤을 패며 쓴 원고는 출판사에 보냈더니 한강에 돌 던진 격이고 몸뚱아리 곳곳에서 아프다고 적신호를 보내왔다. 거기다가 한국 전반 경제가 위기상태여서 회사는 초비상 상태에 걸려있다. 수시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칼바람처럼 나를 엄습했다.
    동생이 이 세상을 떠나던 그해 겨울도 모질게 추웠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애까지 가진 죄로 동생은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외면당했다. 남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집안 망신시킨다며,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겠다고 엄마와 아버지는 동생을 위협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아기를 낳은 동생은 피를 많이 흘린 데다 찬바람을 쐬고 나서 경련과 의식몽롱을 수반한 산후통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8세에 한 떨기 꽃으로 영원히 머물렀다.
    “이 도깨비야, 혼자서 감당도 못할 일을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너 혼자 끌어안고 있었니?”
    간호사의 손에서 핏덩이를 받아 안으며 나는 오열했다. 동생은 눈을 감을 때까지 끝끝내 서연이의 아빠가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그 핏덩이를 나는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내 손으로 키우리라 마음먹었다.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과 서연이의 출생은 엄마와 아버지를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빠트렸다.
    “안 돼, 남 줘버려. 앞길이 창창한 니가 왜 애를 떠안냐고. 니 인생까지 망치게 놔둘 순 없다.”
    엄마는 한사코 반대했다.
    “그럴 순 없어요. 영숙이를 잃은 것만 해도 억울한데 영숙이 분신같은 요 피붙이까지 버릴 순 없잖아요. 내 새끼처럼 키울 거에요.”

    그해 나는 스물 세 살이었다.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 생활은 서연이를 중심으로 고단하지만 빠르게 흘러갔다. 전직 일자리는 알바로 바뀌었고 사귀던 남자친구는 나를 떠났다. 알바와 육아를 병행하며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서연이가 세살이 되자 나는 서연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그때서야 비로소 정상적으로 회사에 근무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남자들을 몇 명 만나보았으나 그들은 서연이까지 받아 들일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가정을 이뤄 서연이에게 아빠를 찾아주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로망이었다. 인정은 메말랐고 세상은 각박했다.
    나와 서연이는 한쌍의 저가락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서연이 덕분에 나는 모성의 부드러움과 포용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을 줄 모르는 꼿꼿함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 엄마를 쏙 빼닮아 누가 봐도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에 평소엔 재잘대다가도 정작에 일이 있으면 마음속에 꽁꽁 감추어 두고 섣불리 입 밖에 내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었다. 중국말밖에 하지 못하는 서연이에게 어떻게든 우리말을 가르치자는 욕심에 상해에서 서울로 데려온 지 이제 2년이다. 왕따라도 당하면 어쩔가 했는데 서연이는 생각보다 잘 적응해서 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와서는 비밀도 많아지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다. 대신 나와의 대화는 현저하게 줄었지만 나는 사춘기를 요즘 애들이 으레 통과해야 할 의식의 한 부분쯤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서연이가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다니? 언어폭력이든 신체적 폭력이든 서연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여태 생각해오던 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급한 마음에 사람들이 채 내리기도 전에 발을 들여놓다가 누군가와 세차게 어깨를 부딪친다.
    “죄송합니다.”
    “영옥FP(금융설계사)님, 어딜 이리 급하게 가시는 거에요?”
    지점장이었다. 그제야 나는 오늘 오후에 고객을 만나 계약을 하기로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오늘이 1월 마감이라 이번 달에 계약을 꼭 넣어야 했다.
    “지점장님, 죄송합니다. 지금 딸애 학교에 급히 가봐야 해요.”
    “학교라니요? 고객 만나러 가시는게 아니고? 영옥FP님, 지금 제정신입니까? 오늘 계약 안 넣으면......”
    나는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지점장이 못다 한 말은 둔탁한 엘리베이터 문에 잘려나갔다.
    사실 오늘 오전 조회가 끝나자마자 나는 지점장 사무실에 불려 들어가 면담을 받았다.
    “영옥FP님, 벌써 두 달째 계약이 한 건도 없어요. 어찌된 일입니까? 하루에 두 세 명의 고객을 만나면 계약이 안 이루어질 리가 없는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니세요? 글을 쓰신다고 해도 그건 부업으로 하시고 보험 업무를 주업으로 하셔야죠. 매일 글 쓴다고 밤새고 아침 출근 늦어지면 출석률도 안 좋고, 출석률이 좋지 않으면 당연히 계약률도 떨어지게 돼 있어요. 이건 진리입니다. 듣자하니 혼자서 애를 키우신다면서요? 혹시 뭐 다른 데서 돈 버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말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지점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이내 어투를 바꾸어 말했다.
    “저야 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언제까지든 영옥님의 편리를 봐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요즘 전반적으로 경기가 너무 안 좋다보니 본사에서도 출석률 엄청 잡고 있는 상황이라구요. 전번 날 말씀하신 그 고객님, 오늘 연락하셔서 꼭 계약 한 건 넣어보세요. 두달씩이나 계약이 없으면 해촉 시키라고 본사에서 압력을 가하고 있어요.”
    이 지점장이 전근되어 온 지 2개월도 채 안되어 벌써 서너명의 동료들이 잘렸다. 자기가 관리하는 지점의 보험설계사들의 실적에 따라 월급을 받는 지점장의 입장에서는 계약 한 건 따내지 못하는 직원은 필요가 없다. 일 잘하는 알쭌한 직원들로만 구성해서 실적을 올리는게 백번 나은 일이다. 지점장 입장에선.

   2 

    “엄마,”
    겁에 잔뜩 질린 서연이의 목소리는 바람이 훅 불면 금세 꺼질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서연아, 방금 너희 담임쌤하고 통화를 했어.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줄래?”
   나는 목소리를 착 깔았다. 지하철 안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저 어린 것이 일이 터진 후엔 얼마나 두려웠을까 하는 걸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엄마, 1학년 애들이 2학년 애들 뒷담화를 깠어. 은재가 걔네 버릇 좀 고쳐주자고 해서, 난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갔어. 엄마, 내가 잘못했어, 유빈이한테 잘못했다고 빌게. 엄마, 진심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엄마 지금 학교로 가고 있는데 너 사실대로 엄마한테 말해줘야 돼. 그래야 엄마가 어떻게 해결을 할지 알 수가 있거든.”
    “응.”
    “유빈이? 유빈이를 혼내주려고 계획적으로 이 일을 만든 거니?”
    “아니야, 엄마. 전혀 아니야.”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선배라고 후배한테 그렇게 폭력적이여도 되니? 선배라면 후배를 아끼고 감싸줄 줄 알아야지. 선배가 무슨 벼슬인 줄 알아? 글고 동영상은 왜 찍었어?”
    “습관적으로 그냥 찍은 거야. 엄마도 알잖아, 내가 뭐든지 동영상 찍기 좋아하는 거.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찍은 거야. 바로 삭제했어.”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어? 확실해?”
    “응. 찍고 누구한테도 안 보여줬어.”
    “그런 걸 왜 찍니? 너 이제부터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함부로 찍지 마. 셀카 찍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은 찍지 마. 너보고 찍어달라고 부탁하기 전에는. 요즘 전철에서도 못 봤어? 다른 사람 동의 없이 몰카 찍는 건 위법행위라고. 니가 미성년자라고 책임을 안 져도 되는 줄 알지? 너 만 14세 지났기에 형사책임은 지지 않아도 처벌은 피할 수 없어. 알았니?”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엄마한테 젤 먼저 얘기해줘 돼. 내가 말했잖아, 엄마는 너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라고.”

    올 겨울 들어 딸애와 나눈 대화 중 가장 길게 나눈 대화인 셈이다. 키는 벌써 내 키를 따라잡았고 얼마 전에 생리도 시작했지만 신체발육의 속도와는 달리 대뇌발달은 아직도 미숙단계에 있는 서연이다. 독립적으로 시비를 가르는 능력이 결핍한 청소년시기이다. 증학교에 올라온 후 선후배 문화에 적응하느라고 어느 선배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자주 하더니 이제는 2학년이라고 선배 노릇 톡톡히 해보자는 건가. 하지만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이든 학교폭력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다. 발생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뉴스에서나 인터넷 매체에서 심심찮게 보도 되는게 학교폭력이다. 한국의 학교들에는 학부모들로 구성된 학교폭력위원회도 있다. 그만큼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얘기가 되겠다.
    서연이와 은재는 오케스트라 동아리 멤버였다. 서연이는 첼로를, 은재는 바이올린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친해졌던 모양이다. 그날 현장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셋 외에도 중2생들이 여럿 왔으며 다른 학교 애들까지도 모였다고 한다. 거기서 1학년 유빈이에게 무릎을 꿇리고 사과를 받아내다가 재훈이가 유빈이의 귀뺨을 두 대 때리는 폭행을 저질렀다. 둘러 서서 구경하던 애들 몇몇이 그 장면을 전부 동영상으로 찍었고 서연이도 동영상을 찍은 애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서연이가, 서연이가 어떻게 이런 일에 개입을 한 거지? 얼마나 착하고 배려심 많은 아이였던가? 서너살 됐을 때였던가? 독감에 걸린 서연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히는데 자기보다 둬살 큰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보더니 기어이 그 애 곁에 가서 감기 걸렸을 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안된다고 충고를 해주던 서연이, 길 가다가 쓰레기가 떨어진 걸 보면 꼭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다섯 살 때였던가? 두 번을 설명해줬는데도 산수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서연이에게 내가 버럭 화를 내고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으려니 자기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있더니 “엄마, 화 푸세요” 하고 하트모양의 그림을 그려서 내 앞에 내놓던 아이,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면 내 칫솔에 치약을 발라놓을 줄 아는 아이였다. 서연이만 생각하면 늘 빙그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엄마, 나한텐 왜 아빠가 없어?”

    유치원에 다닌 지 며칠 되지 않아 서연이가 처음으로 아빠에 대해 물었다. 너의 아빠는 아주 먼 곳에 있다고, 서연이를 아주 사랑하지만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꾸며댔다. 그것이 진짜라고 믿은 건지 아니면 무얼 깨달았는지 그 뒤로 서연이는 한 번도 아빠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빠가 없어서 그런지 서연이는 당차면서도 왠지 주눅이 들어있을 때가 많아서 나는 늘 안쓰러웠다.

  3

    “언니, 왜 또?”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짜증부터 냈다. 서연이 일만 해도 머리가 빠개지는데 하필이면 이 시간에 전활 하는 거지? 또 아버지 얘기겠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상해에서 대전에 있는 언니네 집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아버지는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듯 무서운 침묵을 지키더니 반년도 되지 않아 치매에 걸렸다. 가스불을 끄지 않는다든가 집 문을 열어놓고 외출을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고 언니가 사 온 감귤을 전부 꺼내서 열심히 껍질을 발라 놓고는 “영숙아, 귤 먹어라.” 하고 저 세상에 간 막내딸을 찾기도 했다. 내가 어쩌다 한 번씩 아버지를 보러 가면 매 번 “영숙이 왔구나. 아버지가 미안하다”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언니는 아버지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가끔씩 나에게 전화로 하소연을 하곤 했다.

    “휴, 아버지 말이야, 점점 심해져. 하지 말라고 해도 어린애처럼 말도 안 듣고, 나도 이젠 슬슬 지치기 시작하거든. 요양병원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오늘도 영숙이를 찾으며 한바탕 넉두리를 하시더니, 그러게 왜 영숙이가 서연이를 낳았을 때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고 이제 와서...”
    “언니, 아버지 일은 나중에 얘기하면 안될까?”
    “전엔 깜빡깜빡하기만 했는데 요즘은 좀 이상해. 이상한 행동들을 해, 딸인 내가 보기에도 구차하다고, 휴......”
    “언니, 알았어. 근데 나 지금 그런거 들어줄 상황이 아냐. 서연이가 사고를 쳐서 나 지금 학교 가는 길이거든. 어떻게 수습할지 나도 모르겠어.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언니까지 제발 이러지 좀 마.”
    나는 참았던 분풀이를 언니에게 쏟아냈다.
    “서연이가? 어디 다쳤어?”
    “나중에 얘기해.”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피해자 부모님께 어떻게 사죄를 할 지 생각에 잠겼다. 백번 내가 잘못했다고 빌자, 서연이를 잘못 교육했다고, 피해자 부모님께 손이 발이 되도록 빌자. 입장 바꿔서 내가 피해자의 엄마라고 생각만 해도 나는 너무 두려워서 부들부들 떨렸다. 그 어린 아이가 겪었을 정신적 신체적 고통이 얼마만큼 심했으며 그 아이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가슴이 미여졌을까......
    “언니, 언니 고객 중에 박금자님의 보험료가 지금 두 달 째 밀려있어요. 오늘까지 안 내면 해지돼요. 이거 오늘 중에 꼭 처리해주세요.”
    회사의 총무한테서 걸려온 전화다. 지난달에 통화 했을 때 가상계좌로 넣는다고 했는데 그럼 지난달도 안 냈다는 말이 되는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금자한테 전화를 걸었다.
    “금자야, 너 보험이 두 달치나 밀려있네. 오늘이 마감이라 오늘 안 내면 끊겨. 부활도 안되는데......”
    “그러게, 요즘 월급 받으면 늘 적자야. 보험 끝까지 갖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살려야지 않니? 혼자일수록 보험이 더 필요하지. 자기 요량을 해야잖아.”
    “영옥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는지 몰라.”
    “?”
    “나 지금 한국에 계속 있어야 할지 중국 들어가야 할 지 모르겠어. 지금까진 배우자동반 비자로 지내왔는데 이젠 남편이 없으니 이걸 연장하려면 그동안 남편과 쭈욱 살았다는 사실확인이 필요하거든. 근데 요즘 남편의 전처 자식들과 관계가 안 좋으니 걔들이 제대로 말해줄 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안되면?”
    “최악의 경우엔 중국 들어갔다가 다시 노무비자로 나와야지 뭐.”
    “중국 들어갈 때 들어가더라도 일단은 살려두자. 내가 먼저 낼게. 나중에 니가 정 힘들다면 감액처리를 하든지 그때 가서 다시 방법을 찾아보고.”
    나는 통화를 마치고 인터넷뱅킹으로 그녀 대신 보험료 20만원을 가상계좌로 이체했다.

    금자는 나의 고중동창이다. 그녀는 노래를 잘 불렀다. 고중을 졸업하고 그녀는 가수지망생의 꿈을 꾸고 있는 남자를 만나 급격하게 사랑에 빠졌다. 딸 넷 있는 가정의 셋째딸로 태어나 별로 부모님 사랑을 못 받았던 그는 이성의 자그마한 관심에도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하고 나서야 그녀는 남편이 매일 술만 마시고 여자 등이나 쳐 먹는 한심한 인간이란 걸 알게 되었다.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 살 난 아들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맡기고 한국으로 나왔다. 한국이라는 넓은 세상에서 그녀는 가수의 꿈을 이룰 수 있을 줄로 알았지만 그건 또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몇 번의 고배주를 마신 뒤에 그녀는 자신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서 그녀는 식당 홀 서빙이며 찜질방 청소하는 일이며 닥치는 대로 했다. 몇 년 후 그녀는 대구의 자그마한 회사에서 통역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자기보다 열 몇 살이나 많은 한국남자와 재혼을 했다. 그 남자 역시 재혼이었다. 랑만같은 건 전혀 모르는 남자였지만 일은 참 열심히 했다. 회사와 노예계약이라도 한 것 같았다.

    1년 전, 보험 청약서에 싸인을 받기 위해 내가 서울에서 대구에 있는 그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녀는 보기에는 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대출을 내서 산 아파트는 시내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불편하긴 했지만 널찍했다. 신축아파트라 아직 공사가 덜 끝난 아파트단지에는 여기저기에 모래더미며 시멘트더미가 쌓여 있었고 유리창에는 먼지가 뿌옇게 꼈다. 금방 옮겨 심은 듯한 나무들이 겨울바람 속에서 앙상한 몸을 드러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래도 실내는 따뜻했다. 거실에 놓여있는 전신마사지기계에 몸을 맡긴 채 담배연기를 쉼 없이 피워 올리고 있는 그녀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 남편이 매일 밤늦게 들어와서 심심하긴 하지만 대신에 편해. 중국에 있는 울 아들도 방학 때면 놀러 와서 나랑 같이 지내기도 하고. 난 큰 욕심 없다.”
    “지금 남편의 자식들은?”
    “걔들은 다 커서 시집 장가 갔어. 내가 신경 쓸 일은 없어.”
    “담배 너무 핀다. 좀 줄이지?”
    “안돼, 이젠 습관이 돼서. 피다가 안 피면 허전해서 못살거든. 이젠 목소리 싹 버려서 노래도 못 부른다.”
    그녀는 아련한 향수에 젖은 아쉬움인지 연민인지를 담배연기와 함께 토해냈다.
    두 달 전의 어느 날 나는 출장길에 금자의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니?”
    “잘 못 지내. 남편이 갔다.”
    “뭔 소리야?”
    “오늘 새벽에 저 세상으로 갔네. 그만,”
    “갑자기? 무슨 병으로?”
    “뇌출혈이래. 병원에 갔는데 이미 늦었네.”
    경황이 없어서 남편의 자식들에게만 연락을 하고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계좌로 조의금을 이체하고 동창들에게 문자를 보내 부고를 알렸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통화한 건 보름쯤이었다. 활달하던 그녀는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남들 다 드는, 그 흔한 보험 하나 안 들어놓고 이렇게 가니?  그 사람 죽고 나니 전처 자식들이 왁 쓸어 와서 돈이 될 만한 기물들은 싹 갖고 가버렸다. 나 이제 어쩜 좋냐?”
    “세상에,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그녀 대신 펄쩍 뛰었지만 낸들 뾰족한 수라곤 없었다.
    “힘들어도 요 고비 잘 참고 견뎌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4

    내가 사는 동네는 서울의 동북부, 경기도에 인접한 묵동(墨洞) 먹골이라는 곳이다. 먹골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순 우리말 표기이며 인근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은 품질이 좋아 궁중에 진상했다고 한다. 먹골 근방에는 연적과 벼루를 닮은 연못이 있어서 그곳 마을을 연촌 혹은 벼룻말이라고 했다. 또한 지금의 하계동은 필동 혹은 붓골이라고 불렀으니 이 두 지역과 묵동을 연결하면 문방사우 중 3개가 삼각형 모양을 이루게 되는데 이 안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이곳은 전에 대규모 배밭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라 지금도 먹골배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나는 시골같은 이 동네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녁만 되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봉화산에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멀긴 했지만 그래도 지하철역이 코앞이라 편리했고 서연이는 집 앞 대로에서 버스만 타면 학교에 갈 수 있었기에 사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먹골역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겨울날씨와 늙은이의 근력 좋은 건 모른다더니 이 추운 날에 웬 비가 다 내리는 건지.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야채가게 안으로 몸을 피했다.
    “어우, 날씨도 참 변덕 많지 예?  오늘은 일찍이 퇴근하심다?”

    오리털 점퍼에 앞치마를 두르고 팔 토시를 낀 야채가게의 여주인이 반겨준다. 조선족이 드문 동네라 그녀를 보면 늘 반갑다. 그녀는 고향이 연변이다. 언제 한국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지하철역 바로 옆에 야채가게를 차려 매일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싼 가격에 판매했다. 몇 시에 가게 문을 여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침 일찍 그 앞을 지날 때면 가게는 어김없이 영업을 시작했다. 추석과 설날만 빼고 야채가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장사를 했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우산 있으면 좀 빌려주시겠어요? 저 급히 다녀와야 할 때가 있어서요.”
    “잠시만 기다리쇼.”
    후두두둑, 빗방울이 우산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버스는 빗속을 가르며 나타났다.

  5

    “왜 또? 내가 전화한다고 했잖아.”
    “영옥아, 큰일 났다!”
    학교 정문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에 전화가 울렸다. 있는 대로 짜증을 쓰며 전화를 받은 나에게 언니는 다짜고짜로 큰일 났다고 무서운 소식을 전했다. 내 심장이 과연 오늘 밤까지 버텨낼 수 있을 지도 의심스럽다.
    “아버지가 한국아줌마를 덮쳐서 그 아줌마가 성추행으로 지금 신고하겠다고 난리야.”
    “뭐 뭐라고?”
    “내가 요즘 이상하다고 했잖아. 주책없이 나랑 너네 형부가 곁에 있는데도 슬그머니 손을 사타구니에 가져가곤 하더니, 내가 차마 부끄러워서 이 말을 입 밖에 못 냈는데, 오늘은 내가 잠깐 슈퍼 다녀오는 동안 가스 점검하는 아줌마가 왔는데 아버지가 바지를 벗고 그 아줌마를 뒤에서 끌어안았대.”
    “어머! 미친.”
    비명소리가 절로 나갔다.
    “한국아줌마가 아버지에게 미친 영감탱이라고 욕을 있는 대로 퍼붓고, 경찰 부르고 난리가 났어. 아버지는 아줌마 욕설에 놀라서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고, 나 지금 돌아버리겠네. 그 아줌마가 조선족들을 마구 욕하는 거 있지.”
    “뭐? 아버지가 잘못한 건 아버지 한사람으로 끝내면 되는 거지. 그리고 아버진 인지능력이 없잖아. 치매노인의 실수쯤으로 봐줘야지. 그랬다고 조선족들을 다 욕하다니 말이 돼?”
    “안 그래도 조선족들 흉을 못 봐서 혈안이 되어 있는 판에, 마침 잘 됐다고 하는 거지. 서러워도 참아야지, 여기서 살려면. 아버지가 실수한 건 사실이니까. 답답해 죽겠다. 아버지는 지금 자신이 아무것도 안 했다고 딱 잡아떼고 있어.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너네 형부한텐 뭐라고 하겠냐? 이웃 보기 부끄러워 죽겠다.”
    “언니, 내 오늘 서연이 일 해결하고 바로 내려갈게.”
    언니의 전화를 끊기 바쁘게 지점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문자가 들어온다.
    “영옥FP님, 지금 어디세요? 문자 확인하시면 바로 전화 주세요.”
    나는 문자를 일별하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6

    상담실에는 서연이외에 여자애처럼 곱살스럽게 생긴 남학생 한 명과 여학생 한 명 그리고 서연이네 담임선생님과 1학년 학년부장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훈이와 은재였다.
    은재의 아버지와 재훈의 어머니가 곧 이어서 도착을 했고 피해자인 유빈이네 부모님은 차가 밀려서 20분쯤 늦는다고 했다. 힘들었지? 하고 안아주고 싶었지만 분위기 상 나는 서연이의 옆에 앉아 서연이의 손을 꼭 잡고 손등을 둬번 다독거렸다. 서연이가 눈물을 글썽였다.
    어색한 공기가 테이블 위에서 불안하게 흘렀다. 1학년 학년부장선생님이 다시 한 번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 해주었다.
    “지난 주말에 얘들이 1학년 애들을 학교 뒤 공터로 불러냈구요...... 좀 있다가 유빈이 어머님이 도착하시면 아마 애들한테 다시 질문을 할 겁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세요. 얘들아, 들었니? 제가 유빈이 어머님과 통화하면서 많이 풀어드리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오늘 이 자리에서 얘네들의 태도입니다. 일이 더 불거지면 학교폭력위원회의 위원들을 불러서 회의를 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처벌이 중해져요. 예를 들면 퇴학처분 같은 것도 요구할 수 있는데 그건 저희 선생님들도 원치 않습니다.”

    유빈이는 어머니와 함께 도착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반시간이나 늦은 세시 반이었다.
    “일부러 늦게 오신게 아니고, 길이 너무 밀려서 미안하다고 저한테 계속 문자를 보내오셨어요.”
    학년부장선생님이 애써 자연스런 웃음을 지으며 해명을 했다. 유빈이네는 나와 서연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생님이 유빈이네 어머니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서연이보다 앉은키가 한 뼘 정도 작은 유빈이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고 서양인들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유빈이 어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까딱이더니 핸드백 속에서 A4용지 한 장을 꺼냈다.
    “그날 그 장소에 갔던 애들이 모두 열다섯 명인데, 여기엔 왜 세 명밖에 없죠?”
    “세 명은 부모님이랑 같이 만나기로 해서 이러게 따로 불렀구요, 거기 명단에 있는 나머지 학생들 중 다섯 명은 구경만 했기에 학부모님을 안 부르고 학생들만 불러서 대기시켜 놨습니다. 나머지 학생들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라 저희가 거기까진 어떻게 할 수가 없구요.”
    “그럼 제가 얘들한테 먼저 물어볼게요.”
    “네, 그러세요, 어머님!”
    아, 드디어 심판의 시각이 왔구나. 나는 머리를 푹 숙였다. 유빈이 어머니는 먼저 은재에게 물었다.
    “유빈이네가 2학년 선배들 흉을 본 건 잘못이 맞아. 그런데 사과를 했다면서? 그러면 말로 타이르면 될 걸 왜 굳이 불러내서 그렇게 사람을 못살게 굴고 때리기까지 한 거지? 선배가 뭔지 참 무섭긴 무서웠나봐. 나한테 말도 못하고 며칠이나 혼자 공포에 떨고 있었단다.”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동영상이 나돌아서야 알았어. 내가 따져 물었더니 유빈이가 할 수 없이 얘기 하더구나. 너희들이 유빈이를 불러낸 그 날이 얼마나 추웠는지 아니? 올 겨울 들어 젤 추운 그날, 밖에서 한 시간 넘게 시달리다가 집에 왔는데 발가락이 다 얼었더라. 그리고 그날 이후로 유빈이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만 올려도 깜짝깜짝 놀란다. 트라우마가 심해.”
    그녀의 목소리가 갈리고 있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가 선배로서 후배들을 잘 타이르지는 못할 망정 그냥 친한 후배들이 캡쳐한 화면을 보여주는데 제 욕을 한 것도 아닌데 그만 화가 나더라구요. 잘못했습니다. 유빈이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데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유빈아, 미안해.”
    몸집은 서연이보다 살짝 말라보였으나 은재는 조곤조곤 조리있게 말을 해나갔다. 알고 보니 이번 일의 시작부터 해서 결과까지 전부 은재가 진두지휘한 거였다. 이를테면 캡쳐한 화면을 재훈이에게 보여주고, 후배들을 불러내고, 다른 학교의 애들에게 언제 어디서 후배들을 손 볼 거라는 소식을 전부 은재가 전한 거였다.
    “은재야, 나도 니가 나쁜 마음을 품고 계획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는 생각 안 해.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느꼈겠지만 그렇게 말을 퍼 나르고 전달하면 일이 일파만파 커져. 후과가 엄중하다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사사로이 말을 퍼 나르지 마라.”
    2학년 담임선생님이 은재에게 말했다.
    “유빈이 어머니, 제 탓입니다. 제가 은재를 잘못 교육했습니다.”
    은재 아버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이번에는 재훈이에게 물어볼게. 넌 유빈이를 왜 때렸니?”
    “죄송합니다. 사실 후배들이 저의 흉을 본 건 사실이지만 그냥 불러서 말이나 해줄 생각이었지 때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빈이가 그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길래 저도 모르게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처벌이든 다 달갑게 받겠습니다.”

    “유빈이 어머님, 정말이지, 얘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게 전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지금껏 한 번도 누구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거든요. 전 첨에 1학년 학생을 때렸다고 하기에 남자애를 때린 줄 알았어요. 여자애에게 어떻게 손찌검을 했는지, 정말 충격적이고, 너무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재훈이 어머니가 고개 숙여 사죄했다.
    “알겠어요.”
    유빈이 어머니의 눈길이 나와 서연이에게 향했다. 나는 준비했던 말들을 입속에서 다시 한번 되뇌었다. 유빈이 부모님의 심정을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 고통을 알기에 너무 미안하고 나 역시 고통스럽다. 가해자가 되었건 피해자가 되었건 학교폭력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될 문제다.  하지만 상황은 돌연 극적으로 변했다.
    “니가 서연이구나. 니가 재훈이에게 유빈일 때리라고 추겼니?”

    서연이는 놀라서 나와 유빈이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만 저었다. 나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유빈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왜 그렇게 하겠어요? 전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은재가 일학년 후배들 만난다고 해서 따라간 것 뿐이에요.”
    “근데 너 동영상까지 찍었다며?”
    “찍긴 했지만 바로 삭제했습니다. 누구한테도 안 보여줬어요.”
    “동영상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 먼저 찍었다고 합니다. 유포한 것도 다른 학교 학생들이구요.”
    1학년 학년부장선생님이 거들었다.
    “유빈이가 그러는데요, 서연이 눈빛이 맘에 안 든대요. 그 일이 있은 후에 유빈이를 바라보는 서연이 눈빛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서연이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으면 하는데요. 전 이런 학생이 있는 학교에 우리 유빈이를 마음 놓고 보낼 수가 없습니다.”
    “유빈이 어머님, 그게 아니구요. 서연이가 원래 표정이 좀 굳어 있어서 그럴 거에요.”
    내 말은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았다. 그녀가 이내 눈을 치뜨면서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이 말했기 때문이다.
    “제가 듣기론 서연이 어머닌 미혼모라고 하시던데, 그래서 서연이가 이렇게 싸가지가 없나요?”
    “미혼모가 어때서요? 울 엄마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욕하려면 절 욕하세요. 울 엄마가 시킨 거 아니에요. 퇴학시키려면 퇴학 시키세요.”
    서연이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간신히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진짜 왕 싸가지네.”
    “서연아, 가만히 있어. 그러는 거 아니야. 너도 잘못했다고 그랬잖아.”
    “아니야, 엄마 잘못 없잖아. 엄마가 왜 이런 말 들어야 돼?”
    우리 모녀의 이런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유빈이 어머니 얼굴에 조롱의 빛이 그득했다.
    “왜요? 한국에 오면 여기 사람들이 미혼모인 걸 모를 줄 알았나요? 그리고 조선족이라면서요? 조선족들 원래 폭력을 일삼는다고 하더니, 더 나쁜 건 곁 사람을 부추겨서 남을 때리게 하는 거죠. 중국에서 곱다라니 지내지 왜 한국까지 와서 우리 유빈이 못살게 굴고 그래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더니......”
    “유빈이 어머님!”

    경련이 일듯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쩔수 없이 미혼모로 살아온 나날들, 그것은 내 가족, 내 피붙이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었다. 그것이 왜 누구에게 기시 당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이 곳에서 늘 범죄의 중심에 서야만 했던 조선족, 조선족이라고 차별하고 구별 짓는 그들에게 여태 참고 있었던 말들이 봇물처럼 내 입에서 터져나왔다.
    “누구는 미혼모가 되고 싶어서 됐나요? 조선족이 되고 싶어서 됐나요? 당신네들이 부실해서 나라를 잃은 거 아니에요? 나라 잃은 사람들이 어딜 가겠어요? 나라 잃고 나라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요? 이제 다시 한국으로 찾아온 핏줄을 당신네들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요? 범죄자 취급이나 하고. 우리가 죄인이에요? 그런 편협한 사고 방식, 핏줄도 보듬어 안을 줄 모르는 그런 소갈머리로 살아가니까 맨날 일본한테 휘둘리기나 하죠.”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오버에요. 이런 태도로 나오시면 더 곤란해진다는 걸 모르시나요? 저 학교폭력위원회에 신청해서 서연이 퇴학처벌 줄 수도 있어요.”
    “그래요. 퇴학처벌 주세요. 자꾸 우리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선배니 후배니 하는 거 중국엔 없어요. 저 여기 와서 이런 문화 있는 거 첨 알았다구요.”
    “그만해, 서연아.”
    “선생님, 더 이상 못 봐주겠어요. 서연이 퇴학처벌 주세요. 퇴학이에요, 퇴학!”
    그녀의 이성은 완전히 가출한 것 같았다.
    “좋아요. 그러면 법적으로 대응하죠! 가자, 서연아!”
    나는 서연이의 손을 잡고 무작정 상담실을 뛰쳐나왔다. 어머님, 어머님,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스라하니 복도에 메아리쳤다.

  7

    “엄마,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좀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서연이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퇴학이라도 당할까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이모네 집에나 가야지.”
    “거긴 왜?”
    서연이가 영문을 몰라서 올롱하니 쳐다본다.
    그래, 대전이다. 거기엔 나를 낳아 키워주신 아버지가 계신다. 사랑하는 언니가 있다. 가족이 있다. 이제 나는 어린애가 된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따져야 할 것이다. 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어디가 종점인지 모르지만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가다 보면 길이 나지겠지. 가시밭길도 걷다 보면 꽃을 만날 수 있는 것이 길이다. 인생이란 워낙 고단한 외길이고, 선택이다. 누구나 가 본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언제나 막다른 곳에 서있다.
    그때 울리는 내 휴대폰 소리, 보험 가입하겠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뻔뻔스러운 놈이었다. 나는 한심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를 내려다보다가 거절 버튼을 눌러버렸다. 버스정류장에 줄지어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무작정 다가갔다. 딱 한 번 뵌 적 있는 서연이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저 서연이 어머닌데요, 저랑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나요?”
    나는 사진을 그놈한테 날렸다.
    미친 새끼, 조선족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어? 꺼져! 꿈 깨!!
    그리곤 이렇게 문자를 넣었다.
    “담주에 결혼할 남친이에요. 지금 저랑 같이 딸애 데리러 왔어요.”

- <연변문학> 6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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