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영시인 약력 : 문정영 시인은 전남 장흥에서 출생하였으며,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하고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낯선 금요일』,  『잉크』 , 『그만큼』 , 『꽃들의 이별법』이 등이 있다. . 문정영 시인의 시는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함께 삶의 원형질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보적인 시적 이론으로 한국문단에서 중추적 역량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현재 그는 계간 『시산맥』 발행인 및 '동주 서시 문학상' 대표 등을 맡아 한국 시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문정영시인

 

문정영시인 시선

아수라 

                    

  거위로 다시 왔다 
  가볍지 않은 흰 날개, 짧고 두꺼운 부리로 울던 나는,
  세 개의 무서운 얼굴은 가문 숲에 숨겨 두었고, 여섯 개의 팔은 은사시나무가 되었다

  나로 살려 할수록 뒤뚱거렸다

  어는 날부터 수면이 편안해졌나, 가라앉는 나를 향한 수없는 발짓 감추었는데

  늪에서 피는 꽃이 웃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아수라 부르지 않았고,
  더는 숨을 멈출 수 없을 때 저리 피는 꽃
  어떤 의문이 거위의 날개가 되었을까

  내 눈으로는 하루도 보지 못하고

  부르르 떨리는 이름은 누가 지은 것이 아니라, 가지고 태어난 것들

  뜨거워질 만큼 뜨거워지고

  무거워질 때까지 무거워진 후에 나를 부르면 소용없다

  저 숲의 이름들 다 깨워도 한 마리 거위보다 못하다

 


空의

 

풀잎에 놀란 눈이 있다,

변해야 한다고 잎들이 입의 고리를 물고 있는

처음 면면은 구르다 멈추는 성질이었다

돌의 옆얼굴 나뭇잎의 눈물 웃음의 발톱 그릇 속의 바퀴소리
달리다가 멈춘 계단 숨소리에서 풀려나온 다른 숨소리들

둥글어서 둥근 것이 아닌

공의, 속은 문자로 채워도 헛것이다

깎여서 만들어진 질문을 보고 알았다

잠든 지구를 돌리는 꿈에서

점점 내가 지워지고 있었다

공의, 중심을 보여줄 때

내 몸의 모서리가 닳아 가는 중이었다

그게 공의, 리듬이라는 것을

여직 네모였던 내가 알게 되는

 


비밀문장

 

  비밀문장을 쓰기 시작한 것은 몸이 바뀌고 난 후부터였지, 문장이 바뀌면 생각의 정원은 푸른빛,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내 몸에서 일어났고 목소리는 조심스러워졌지

  중년은 비밀을 문장으로 쓰기 어려운 나이, 어디다 감추어도 드러나는 실명제의 통장번호, 똑같은 눈빛 보여도 들키고 마는 거울을 가졌지
다른 몸의 습성 익히지 못하고 흉내만 낸 언변들은 언변이 되지 못하고

  새로 산 여행가방은 나를 감추기 좋은 공간, 내 몸은 완벽하게 그곳에 적응하였지, 몇 개의 목욕수건이 필요한 중년은 바뀐 몸의 비밀을 닦지 못하였지
  해독 어려운 문장이 가방 안에서 자랐지
  내가 슬픈 문장으로 바뀌기 시작했지

 

선글라스        

        

 너의 얼굴이 그늘 꽃처럼 바삭거린 적 있다

 아프지 않겠다고 몸 트는

 나를 보았을까, 캄캄해지기 전의 너를 닮은

 쓰다가 쓰지 않는 날의 눈동자

 나의 한 쪽 눈이 희미해져가고, 여전히 너는 나의 자율신경을 읽지 못한다

 햇살을 지켜내느라 종일 피는 것도 있다

 붉은 눈꺼풀이 수만 번 나를 닦고 있는지 모르고 너는 그냥 아득하다

 가장 먼저 감추는 것이 의문이라 했던가

 너를 가렸다는 생각이 이제 나를 가리고 있다

 


  마스크                  

               


  삼각형 마스크는 放心이 있지, 샛노랗거나 붉은

  눈동자는 자물쇠 같은 눈 속으로 떨어지지 

  마스크는 내일을 감추는 손바닥

  말의 눈을 가리면 지금이 실종된다는데

  입모양이 보이지 않아도 중심은 찾기가 쉽지

  굴레는 세 개의 뿔에서 오고

  고통은 점에서 이어지지

  지나칠 것도 없다, 저 나른한 은둔자, 얼굴을 벗는다

  아는 것 다 써버린 후

  마스크는 마스크밖에 남지 않았어

  동지에 잠들면 눈썹이 희어진다는데

  어제의 표정으로 오늘을 쓰는 붉거나 샛노란 세모들

 


 다발성 척추 협착증

 

   내 몸에서 물소리가 난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자란 편백나무가 자꾸 등 쪽으로 기운다

  남으로 돌려놓아도 눈에서 먼 곳부터 먼저 자랐다
  우듬지가 무성해지고 줄기가 굵어지면서 잎들의 간격은 촘촘해졌다

  백지 위에다 나무의 크기를 바르게 그었으나 나무뿌리들이 금 밖으로 나갔다
  어느 날부터 가시 벌레들이 편백나무 줄기에서 세로로 기어 다녔다 나무 향으로는 다스릴 수 없었다

  나무에 작은 구멍들이 몇 개 뚫렸다
  들여다보니 벌레들이 물길을 누르고 있다
  누군가 소곤거리는 말을 남겨놓았는지 나무들은 이명을 앓는다

  빨리 자란 것들은 잘려나가고 통증이 우거졌다
  옹이 하나에 신음 소리 몇 개가 걸렸다

  불경에서 구해온 편백나무 침목을 허리 아래에 두었다, 물소리 따라 통증도 이동했다, 자주 만져 맨질맨질해진 신음소리가 들렸다

 


수집가

 


한 잎의 생각을 윤독하는 그는 붉은 치마 수집가

아침마다 아픔주머니에서 젖은 얼굴 꺼내는 그녀는

방언으로 책을 쓰는 바람 집필가

달의 뒤편을 문신하고 있는 저녁에

그는 돌의 씨앗을 공중에 뿌리는 자

그때 이야기들이 집을 짓고 싹 틔우는데

공기를 모으는 자를 만나면 숨소리가 되고

사랑을 소리로 아는 자는 입술에서 빛이 나지

이른 새벽 골목 수집가와 바람 집필가가

서로에게 작열하지

어느 불꽃이 시간주머니를 태울 것인지

자정에 그를 낳으면 그녀의 하루가 소멸되지

그의 하루를 소지하는 그녀는 수첩 수집가

 


대의

 

공기를 열고 나오는 저 글자들의 전복

한낮의 표지에서 대의를 듣는다

땅속에서 견딜 만큼 견디고 나서야 우는 날개들

대꽃이 피는 나이가 있기는 하나,

오월의 잎만큼 견딜 수 있기는 하나,

공중에 뿌리를 둔 것처럼 아래로 자라는 사유들

누군가 멈추어 서서 첫발자국을 닦고 있다

던져 받은 시공간에 명분이 있기는 하나,

어린 대의 줄기도 바깥이 되기 위해 어둠을 겪었는데

바람 채우느라 말씀 한 마디가 저리 두런거리는데

세상의 얼굴은 펴지지 못하고, 대의 껍질처럼 단단하다

 


가시

 


백지에 그믐달이 걸려 있다

가장자리 그늘이 조금 찢겨지고

자작나무 표피에 쓰인 자글자글한 무늬마저 벗겨져 있다

덤불에 걸린 날개가 어느 하늘을 날았던 것인지

누군가에게는 제 몸을 뚫고 나온 꽃,

세상이 가시거나 그가 가시거나

생각이 오래 박혀 있는

날것 중 가장 큰 허공을 가졌던 그가 가시나무에 눌려 있다

하늘이 낭떠러지로 쏟아져 내린다

지상의 좁은 발자국은 그의 살아 있는 모자

12월은 얼음이 박힌 모자

 

줄     

   

나를 건너려고 너를 잡는 순간
하나는 여기 있고 또 하나는 멀리 있다
하나는 건너가고 하나는 건너온다

쓸쓸한 것 오래되어 멀리 있는 너를 한 손으로 잡으면 두려움이 출렁인다
그때 내가 잡고 있는 네가 생명인 줄 알았는데 그 길 건넌 후 나는 너를 돌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가는 줄을 잡고 건너가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오는 줄을 잡고 건너오고 있다
무어라 물으면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 말이 다르다

한때 건너려는 길이 같았고, 그 길 건너려 따뜻한 손 너에게 내민 적이 있었다
손을 놓으면 그 아래는 문신한 눈썹 같은 상처뿐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줄 알면서도 그 손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네가 줄이고 내가 길이었을 때, 가끔은 네가 길이고 내가 줄이었을 때
아무 것 묻지 않고 서로를 건너던 때가 있었다

 

 [단평1]


 21세기 시인들의 사회
  문정영(시인)


“오늘날 시인의 삶은 그 어떤 시대보다 힘겹다. 자기 자신마저 이방인이라 느끼는 세계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어야 하는 이중의 구속, 이중의 불안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 계간『시산맥』봄호, 신진숙 평론가의 권두시론에서

 

 자본주의 물신성에 길들여진, 21세기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의식 속에는 어떤 사고가 들어 있는 것일까. 경쟁과 갈등 그리고 불안이 내재된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사고에 물들어 가고 있다. 시인 또한 한 개인으로서 사회 안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갈등 구조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과 불확정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시인은 세계를 읽고 쓴다. 더불어 그 불안을 깨뜨리는 방법으로 학교에서 지식을 쌓고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는다. 그리하여 시가 지적이고 학문적인 요소를 가지게 되는 반면 이미지는 점점 사라지고 상징마저 약화되고 있다.

 시를 읽는 독자가 줄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공급자와 소비자가 공존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 공급자이면서 소비자인 시인이 줄지 않고 늘어난다는 것이다. 더불어 시의 수준이 평준화가 되었다는 것도 긍정적이기는 하나 시가 자기 복제처럼 많이 닮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이에 몇 가지 함께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소통의 문제이다. 21세기 시인들의 시는 다양해졌다. 그리고 시가 개인적인 내면의 통로가 되면서 어려워졌다. 독백이며 기호에 가깝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시를 해석해 줄 해설가가 필요한 시대에 와 있다. 그만큼 시인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복잡해졌고 머리가 아파졌다는 이야기다. 시적 대상과 시인이 하나인 서정의 시대를 지나 후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시인의 변모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뽕짝에서 랩으로 가고 있는 노래도 공존하고 있지 않는가.

  소비자가 다른 만큼 다양한 장르가 필요하다. 서정을 쓰는 시인도 필요하고 내면의 세계를 쓰는 젊은 감각도 필요하되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소통 부분도 이제 소통이 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으로 변모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선택하여 읽고,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갖는 시대에 와 있는 것이다. 그 대신 나와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할 이유가 없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

 두 번째는 시의 소재의 다양성이다. 시대의 변천과정을 거치며 시의 소재도 다양해졌다. 즉 소재 탐구에 대한 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 년 수천 편의 시가 쏟아지고 있다. 웬만한 것들은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한 대상, 사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소재에 대해서도 시인 자신만의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 재구성을 해야 한다. 이미 익숙해진 대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형식의 변화도 가져와야 할 것이다. 근래에 나는 내 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내 안의 여성성에 대해서 새롭게 접근해 보고 있다. 이제껏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소재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시기이다.

 세 번째는 신인 발굴과 지원이다. 현재 50-60개 정도의 중심 문예지와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한 신인이 일 년에 약 150여명이다. 보통 등단을 위하여 3-4년 이상은 시공부를 하고 개인적으로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등단을 하면 시인으로서 인정받고 주목해줄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빗겨간다. 절망하는 시인들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게 된다. 특히 젊은 시인들보다 나이 들어 등단한 시인들의 활동이 더 어렵고 지방에 거주하는 시인들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단에서는 새로운 신인들에 대한 기대도 크다. 기성 시인들과의 변별력을 바라고 있고, 자신만의 패기를 펼치고 있는가를 지켜보고 있다. 신인들이 그나만 가장 새로운 수혈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신인들의 활동은 중지되고 만다. 구태의연한 상상력에서의 탈피, 문장의 긴장감, 사변적인 진술에서 벗어난 객관화 작업, 뚜렷한 주제 의식, 진정성의 획득, 장식적인 수사의 배제, 감각의 생생함, 참신한 발상, 신인으로서의 개성 등은 신인상 심사에서 주로 보는 관점이다. 이는 기성 시인들에게도 필요한 사항이다. 신인으로 시단에 나온 후에도 꾸준하게 자각해야 할 부분이다. 문예지에서도 제대로 된 신인을 발굴하여 지원을 해야 한다. 많은 신인의 양산은 시인의 수준을 떨어뜨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시인으로서 시단에서의 활동이다. 시인들의 상당수는 소극적이며 내향적인 성격이다. 더불어 자존감이 강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몇 안 될 때에는 그 해 등단한 시인들을 대부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인공화국 시대이다. 알지 못하는 시인의 작품까지 읽을 여력이 없고, 주목하지 않는다. 이미 지명도가 있는 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이름은 알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 문우가 있는가를 물어보면 제대로 답하는 시인이 드물다. 그래서 작은 문예지를 발행하고 있는 나는, 소속 회원들에게 동아리와 지역 시동인을 결성해주고 있다. 시를 쓰는 외에 자주 만날 수 있는 문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함께 손잡고 시단에서 활동할 친구를 만들어 주려는 것이다. 좋은 시를 쓰는 기본적인 토양 위에 좋은 문우와 함께 해야만 오래도록 시단에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시를 쓰고 있다고 인정받는 시인들이 문학상 수상자가 되는 시대가 와야 한다. 시인 또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작품 수준이 미흡하고 인지도가 약한 이유가 많다. 21세기 시인으로 살아가는 방식 중의 하나가 생존경쟁이다. 그런 생존경쟁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강자와 공유할 필요는 없다.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시인들이 모여서 함께 한다면 시인 사회도 하나의 공동체가 될 것이라 본다.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작품의 수준을 높이고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시인 사회를 꿈꾸어 본다.

 

 [단평2]

불안한 마음에 수선화 한 송이를 피우듯

  문정영(시인)


  불안은 붉거나 노랗게 물들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불안을 세상의 길목에서 만나 불안의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찌들어가고 힘들어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우울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억지스럽게 나를 합리화시키며 살고 있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신경림의「갈대」부분)에서처럼 스스로 자성하지 못하는 까닭에 불안은 증폭하는 것이다.

  도시는 점점 거대해지지만 건물은 서 있는 자체가 불안하다. 그 안에서 생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 불안에 의해 쓰러지고 아파한다. 불안은 지상이 원하는 인위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에서 시작한다. 정서의 불안은 그래서 상대적이다. 상대가 더 먼저 오르고 더 많은 것을 가진 것이 불안의 시작이다. 또 하나는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이다. 나는 그것을 현대인만이 가진 병이라 부르고 싶다. 물질은 결코 정신을 치유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소통하고 또 단절하면 살아간다. 그래서 간혹 나는 많은 사람을 아는 것처럼, 외롭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떨기도 한다.

  그러나 나무나 꽃은 누군가를 위해 꽃을 피우고 열매 맺지 않는다. 나무라는 꽃이라는 이름으로 피고 지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누군가를 위한 나의 행동이나 말도 결국은 내가 위로받기 위한 몸짓에 불과하다. 고독사, 자살, 사고사 등의 시신을 거두고 유품을 정리하는 ‘유품정리인’이 현대인의 직업이다. 그런 세상에 나는 얼마나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잠시 고요해지기 위하여 노래를 부른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바위에 막히면 갈라져 흐르고 지대가 높으면 수위가 높아질 때까지 기다려 넘쳐흐른다. 노래의 리듬도 이와 같아서 나의 조막만한 생각들은 낮아졌다가 높아지고 다시 낮아져 세상의 이치를 조금은 깨닫곤 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여, 노래를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불러보라. 건물의 단단한 벽에 부딪쳐 헤매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이다. 무서울 때 잘 부르던 노래 한 가락 크게 소리 내어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노래 한 소절 부를 수 있는 여유마저 바람에 쓸려가는 것을 보면 하늘은 부르지 못한 노래로 가득해 보인다.

  불안은 유연성을 지운다. 물 흐르는 모습에서 나는 물의 유연성을 자연스럽게 느낀다. 유연성은 위선과는 다른 길을 간다. 스스로 유연해지면 겸손하고 소박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더 낮아져서 허리를 굽힐 수 있다. 그러나 위선은 나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본다. 그러므로 자신을 먼저 속이고 다음으로 상대방을 속인다. 속인다는 것은 캄캄해져야 하나 그것이 일상적이 될 때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다. 유연한 물의 길을 배운다면 잔잔해지는 수면이 생길 것이며, 그 위에 붉게 떠가는 단풍잎이 제 모양의 물결을 떠메고 가는 것을 조용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작년 봄에 나는 이런 시를 썼다.

나는 한때 물처럼 맑다고 생각했다.
물로 집 한 채 지었거나,
물의 집이라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그런 나를 비추자 물빛이 흐려졌다.
내가 지은 집은 지는 해로 지은 것이었다.
고인 물을 막은 것에 불과했다.
내가 흐르는 물자리였으면
새 몇 마리 새 자리를 놓았을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보면
눈물로 지은 집 한 채가 생각났고,
눈물도 거짓으로 흘릴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은 집이 모래집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깊다는 생각은 지우기로 했다.
물은 엎드려 흐르는 것인데
내가 지은 집은 굽이 높았다.

 - (「수곽 (水廓)」전문)


  이 시를 통해 내가 가지고자 했던 것은 반성이다.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는 것은 내가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흐려진 것과 같다. 물은 흐르는 존재이며 고여 있을 때 자신의 본분을 잊는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불안은 생각을 불완전하게 만든다. 내가 맑다는 생각은 나 스스로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으나 자칫 위선적인 나를 진정한 나로 알고 살게 한다.

  이 지상의 삶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끝까지 가볼 수 있을까. 메마르고 여유가 없는 삶에서 나의 기도는 늘 욕망의 한 끝에서 사라지고 없다. 아침에 기록해둔 하루의 일과는 시간에 쫓기듯 밀려서 해가 지고 나서도 멈추지 않는다. 한 편의 시 속에 나를 담고 나의 생을 기록하지만 더 깊어지기 위한 생각은 늘 생각에서 멈추어 버린다. 그리고 하루가 또 불안하게 흘러간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말의 기술은 늘어간다. 나를 속이는 것도 타인을 속이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말의 기름기는 매꼬롬하다. 물처럼 가슴으로 스며서 충분히 적셔줄 시간이 없다. 아직 익지 않은 풋감을 따서 먹고 배앓이를 하듯 익지 않은 말을 듣는 상대방은 배앓이를 하게 된다. 내가 한 말들이 불안의 비수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본다. 그 비수가 다시 내 가슴을 찌르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던진 것이다.

  말의 기술이 늘어날수록 역설적이게도 그 말의 알맹이는 모래투성이다. 바람 불면 그 모래알갱이들이 사람들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할 것이다. 물이 끌고 온 하구의 모래사장을 보면 모래들이 얼마나 정갈하게 쌓여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촉촉이 젖어서 내 손등을 충분히 다독거려준다. 그때의 촉감이 오래 나를 강변으로 이끈다. 살면서 느끼던 불안감도 거기 스며서 살며시 사라진다.

  나는 나에게 너무 관대하다. 욕망에 대해서도 고뇌에 대해서도 양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용서한다. 용서라는 면죄부를 산 것처럼 나의 행동은 터무니없다. 그리고 변명한다. 백두산 가장 높은 곳에서 자라는 사스레나무는 강한 바람 때문에 제대로 서서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 어디 변명이 낄 자리가 있는가. 나무는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는 이유로 바람을 견디며 산다. 살다가 죽으면서도 이깔나무 솔씨의 영양분이 된다. 
 
  내가 가진 것들에 비해 내가 잃어버린 것은 너무 많다. 반성은 메마른 땅 위에 가만히 몸 접는 물의 힘이다. 느슨했던 공중이 팽팽해지는 것은 긴장감 때문이다. 한 계절이 지나고 그 다음 계절에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은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긴장감이 있어서다. 이렇게 나를 살리는 긴장감은 불안의 반대쪽에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현재의 결핍성으로  인식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그래서 내려놓아야한다. 잃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생은 가치가 있다. 반성은 그래서 목마른 가슴을 다시 젖게 한다. 내가 상실해버린 것들에 대한 작은 반성은 한 번에 멀리 날지 못하는 새들의 울음을 듣는 일이다.  

  가치 있는 일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가다가 막히면 뒤돌아보고 아픈 것들의 상처도 어루만져본다.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물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면 언제 내가 불안하였는가 하는 마음도 살며시 가라앉는다. 상실의 시대에 사는 내가 그 상실의 열매를 따먹는다면 허무의 씨를 뱉을 수밖에 없다. 물의 정화처럼 작은 반성이 쌓이면 내가 흠집 내놓은 이 지상의 것들에게 작은 바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에 따뜻한 파문을 던져보라. 그 파문이 퍼져서 야위어가던 관계들이 조금은 회복되지 않을까. 가치 있는 일이란 커다란 업적이 아니다. 나로 인해 따뜻해지는 이웃이 생긴다면 그것 또한 이 사회의 불안을 녹이는 힘이 될 것이라 본다. 왜 삭막해졌는가를 이제는 묻지 말자. 따뜻하게 품었다가 내뱉는 말 한마디로 답하자. 불안은 유행성이라서 이 사회의 정서를 온통 불안하게 만든다. 더 따스하게 충분히 칭찬한다면 우리가 가진  불안한 마음에 수선화 한 송이가 피어나지 않을까. 서로에게 기대는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팽팽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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