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우리 주변에는 1910년대 나아가 1920년대에 만주와 노령지역을 넘나들면서 반일 또는항일투쟁, 특히 무장투쟁에 헌신하면서 목숨도 아낌없이 바친 수많은 선열들이 역사의 기록도 남기지 못한채 사라지고있다. 혹시나 후손들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선조들의 투쟁흔적을 찾고 그들이 이룬 업적을 문자로 남기는작업을 하는 경우, 우리는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많은 경우 후손들은선조의 기록을 찾고저 하나 그 당시 특수한 역사적 원인과 악열한 투쟁,생활 환경을 감안할 때 우리는 자신의 묘소함을스스로 한탄할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불완전하고 엄청 부족한 사료라도 그 발굴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높이 평가하는것이다.

윤낙세尹乐世(1877-1929)

윤낙세尹乐世(1877-1929), 많은 이들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의 장손이 되는 윤운일 씨, 당시에는 연변주총공회에서 근무하였다. 선친으로부터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오래전부터 할아버지 관련 흔적이나 자료를 찾고 있었다. 그러하다가 윤낙세의 차손이 되는 윤운걸 씨, 당시에는 흑룡강조선문신문사 길림성특파기자로 있었고, 2015년초, 우연한 기회에 역사학부 전공인 우영란 산동연태대학 외국어학원 교수를 만나게 되면서 할아버지 윤낙세관련 자료 발굴작업을 의뢰하였다. 이러한 전문적 작업의 결과물로 윤낙세尹乐世 씨의 항일투쟁 면모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윤낙세는 1877년함경북도 회령 출생, 조선에서 동년시절을 보냈고, 청년시절 간도로 이주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10년대로 추정된다. 그때 간도지역에는 권업회라는 단체가 활동하였는데 각지에서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도 설립하면서 조선인을 모아 경제력 향상에 힘썼다. 곁으로는 순수한 경제단체로 보이지만 실은 국권회복을 위한 반일단체였다.

권업사는 1911년블라디부스토크 신한촌에서 설립, 초대회장은 당시 조선인 사회의 대부 최재형이고 부회장은 우리가 익숙한 홍범도이다. 주요한 도시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고, 훗날 조직기구를 개변하여 의장제를 실시하였는데 의장에는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운 이상설이 추대되었다. 회원은 21세이상, 3인 이상의 보증서가 있어야 가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권업사는 1914년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강제로 해산되었다. 윤낙세는 1912년권업회의 명의로 훈춘에서 동쪽 22리쯤 떨어져 있는 연길현 토문자土门子에 러시아 화페 1500원에 상당한 121경(耕)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설립하였다. 군자금을 위한 조치였다는 일견도 있다. 윤낙세는 1913년경 훈춘선인기독교우회에 가입한 것으로 보이며 1915년12월 15일까지과원课员으로 활동하였고 당시 직업이 "약업"으로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농장 외 여러가지 일에 종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18년 경, 윤낙세는 훈춘현 왕팔발자王八脖子에 거주하면서 흑룡강성 애훈현의 반일단체와의 연락 및 반일인사들의 규합에 힘썼으며 이르크츠크로부터 총기 수백정을 밀수하여 향후의 반일무장투쟁 준비를 착실히 해갔다.
1919년 3.1운동 후, 훈춘 일대에는 신민단이란 반일단체가 주되게 활동하였다. 대한신민단이라 불러지기도 했다. 1910년대 말,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였는데 대한기독교성리교계열의 신도들로 이루어졌다. 신민단의 주요 간부들은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한인사회당과 함께 활동하였다. 주요인물은 김규면 金圭冕이다.

김규면은 함북 경흥 출생,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출신이다. 1907년 훈춘으로 망명하여 대한성리교를 창설하였고 신민단을결성, 단장에 추대되었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대첩의 바탕이 되었다. 1924년 경, 상하이에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이동하여 빨지산위원회에서 항일하다가 훗날 소베트 연해주위원회 탄압 대상이 되어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1969년 사망하였다.

신민단은 간도에서 훈춘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윤낙세는 훈춘 동구东沟 초모정자 草帽顶子 춘화향春化乡 왕팔발자에서 신민단 연락부장, 총찰로 활동하였다. 그가 왕청현 및 러시아 경내로 왕래한 행적도 관련 사료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1920년 경신년토벌과 더불어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훈춘지역 신민단은 본부를 러시아 연해주로 옮겼다. 윤낙세 역시 러시아 수이푼秋丰으로 이동하였으며 러시아를무대로 한족공산당과 고려혁명군에서 활동하였다.

한족공산당은 1920년 8월 연해주 재러한인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로서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군대를 편성하는 것이 목적이였다. 당지 한인들은 솔밭관한족공산당이라 불렀고 러시아인들은 고려공산당 연해주위원회,일본인들은 송전관 松田关한족공산당으로 불렀다. 산하에 집행부, 선전부, 군사부, 위생부 등 11개 부서가 있었고 윤낙세는 위생부장으로 선임되었다.러시아에 간 후에도 훈춘현 마적달 지방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선전활동을 하였다.

윤낙세의 후손인 윤운걸씨(우, 세번째)가 한국에서 열린 '2015년 제2회 호국영령 합동 위패봉안식'에 참가했다.

1923년, 한경서가 훈춘지부장으로 지명되면서 선전서 배포및 연락 활동을 심화하였다. 윤낙세는 주병칠과 함께 훈춘을 내왕하면서 소총 수십자루와 탄약을 마차에 실어 국경을 넘어 수이푼 지역에 수송해주고 정보를 수집했으며 선전활동을 하였다.
1924년12월, 러시아 수이푼과스찬 부근의 반일단체는 고려혁명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혁명군은 공산주의 이념을 표방함과 동시에 항일독립전쟁을수행하는 무장부대였다. 윤낙세는 고려혁명군 외교부장에 선임되었다. 윤낙세는 한경서 등과 더불어 군자금을 모금하고 변경 및 기타 지역에서 금품을 모아 총기를 사들이였다.

한경서韩京瑞는 함북 종성 출신이며 당시 훈춘 초모정자에 거주하였다. 1921년  훈춘 한민회 군무부장직을 맡았으며 같은 해 연해주에서 한족공산당 연해주연합총회 조직결성에 가담하였으며 상무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4년 1월, 영안현 동경성에서 결성한 사회주의 단체 적기단赤旗团간부회의에 참석하고 훈춘지역 담당 통신부장직을 맡았다. 1927년에는 요하현에서 조선인을 모아 자위단을 조직, 총단장이 되었다.

일본측문서에는 1924년,윤낙세, 한경서 등 19명이 일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기록이 남아있다.

낙세는 1929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지만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후손들이 선천으로부터 전해들은 기억에 따르면 윤낙세는 어느 한번 훈춘에 있는 집에 들었는데 밀고를 받은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게 되어 뒷문으로 빠져 산속으로 도망, 숨었다고 한다. 그번 일로 몸에병을 얻게 되었는데 결국은 설사 등 여러가지 병으로 사망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2013년 윤낙세에게 건군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이미 퇴직한 윤낙서의 장손 윤운일의 자녀 3남매는 한국,미국,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차손 윤운걸은 용정3.13반일기념회 제1회 행사를 보도한 유일한 기자이며 그의 독자는 현재미국에 거주하고 있다.(육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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