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미란 약력:
(필명: 백한) 흑룡강성 탕원 출생, 숭실사이버대 방송문예창작학과 졸업,
에세이집 "서른아홉 다시 봄"출간.
소설 "로마로 가는 길", "이 밤은 아름다워", "먹골에는 겨울에도 비가 내린다" 발표.
재한동포문인협회 소설분과 부분과장

곽미란 작가

[서울=동북아신문]나는 웨이터가 가져다 준 냉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던 머리가 땡해나며 식도를 지나 위장까지 서늘해졌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나보다 체구가 뚱뚱한 친구 장은 쉬임없이 땀을 흘리고 있었고 티셔츠는 등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장은 지치지 않고 여작가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장의 저력에 탄복했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이제 오늘밤이 지나면 게임은 끝난다.
나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 반 정도 남은 냉커피를 입안에 전부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나 묵묵히 앉아서 장과 여작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카메라 뚜껑을 열었다.
“잘 나왔어요?”
그녀가 예의 상투적인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제 핸드폰으로 받아서 작가님 핸드폰으로 전송해드리죠.”
잘 나왔다는 대답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더위는 사람의 진을 싹 빠지게  만든다.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 용도외에 나는 입을 사용하고 싶은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한 마디라도 아껴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축적하고 싶었다.
꼬박 이틀째다.
카메라 두 대씩이나 둘러메고 실외에서 사진촬영을 한다는 건, 8월의 상해에서는 잔인한 일이었다. 찜통이 따로 없다. 숨이 컥컥 막힌다. 얼굴은 진작에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카메라를 잡은 손에도 자꾸 땀이 배었다. 가끔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때문에 렌즈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여작가는 지칠 줄을 몰랐다. 영화의 한 장면을 찍듯 그녀는 미세한 표정의 차이를 집요하게 지적하며 수없이 다시 찍기를 요구했다.
나는 이번에 여자동창 경이의 부탁으로 여작가와 처음 만났다.
“이미 소설집을 두 권이나 냈고 이번에는 상해에 관한 에세이집을 낸다고 하더라. 같은 조선족이니 니가 좀 도와줘, 이혼녀야. 혼자서 애를 둘씩이나 키우면서 언제 글을 쓰는지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쉽지 않지.”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재혼이나 하라고 해.”
“돈이면 단 줄 알아? 야! 늬들이 여자를 알아?”
경이는 손에 쥔 책으로 내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가 내게 알려준 여작가의 신상은 이게 전부였다.
“아참, 그리고 이건 재능기부다, 알았지?”
  “야씨, 하필이면 이 더운 날씨에.”
  “무료로 다이어트도 되고 얼마나 좋니? 나중에 내가 술 살게.”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12년을 동창으로 지긋지긋하게 지낸 경이는 내가 무슨 음식을 먹고 무슨 방귀를 끼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내가 일을 다 빼고 에어컨 빵빵 털어놓은 시원한 집안에 들어박혀 어디로 피서를 갈 궁리만 한다는 걸 알기에 이 빈틈을 치고 들어온 것이다. 경이는 내게 소설집을 던져주었다.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정독해.”
“이게 무슨 성서라도 되냐?”
  ‘흔들리는 도시’, 시간을 죽이기에 알맞춤한 대중적 소설은 아니었다. 그녀의 소설은 아팠다. 어떤 글은 뺨을 맞은 듯 얼얼하게 아팠고 어떤 글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오래오래 아팠다. 그녀는 조곤조곤 사회의 부조리와 약자를 외면하는 세상과 인간의 무자비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작가정신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소설이란 것이 허구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가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체험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특히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는 대부분 글이 그녀가 이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체험에서 나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이 양파껍질 벗기듯이 인간의 내면을 낱낱이 파헤쳐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작가는 외면의 이미지를 통해 내면을 나타낼 수도 있고 숨길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사진은 한 인간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다.
  내가 이틀 동안 여작가와 작업할 일은 에세이집 챕터 별로 들어갈 상해를 배경으로 한 풍경사진과 앞표지 그리고 앞날개에 들어갈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녀의 에세이글은 예상외로 소박한 내용들이었다. 화려한 상해의 유명한 곳을 소개한 글이 아니라 길거리의 구두닦이공의 이야기라든가 마라탕 이야기, 길냥이 이야기 이런 서민들의 일상이나 상해의 뒷골목을 그린 글이었다.

그녀는 삼십대 후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애티나는 얼굴이었다. 귀티난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고생이라곤 해보지 못한 맑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글만 쓴다는 여자의 손은 생각밖으로 거칠었고 단정하게 깎은 손톱엔 매니큐어조차도 발라져 있지 않았다. 솔직히 난 그녀의 맑고 도도한 모습에 저으기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이혼녀들은 대개 자신이 이혼녀라는 걸 감추는 경우가 많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을 이혼녀라고 밝혔다. 대부분 이혼녀들이 치렁치렁한 악세서리로 외면을 치장함으로 내면의 우울을 위장하는 대신 그녀는 그 흔한 악세서리 하나 착용하지 않았다. 이혼녀들의 까칠함이나 소심성보다는 자신감이 더 돋보였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도움 받는 입장에서, 신세를 지는 쪽이면서도 너무 당당했고 쉽지 않은 주문을 해왔다.
  “어차피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제대로 된 작품 기대할게요. 세련적인 도시적 이미지를 풍기면서 그 내면은 소박한 시골 이미지로 찍어주세요. 제가 시골에서 자랐거든요.”
여작가의 요구대로 이틀 동안 나는 그녀의 내면을 포착하기 위해 무등 애를 썼으나 그녀는 쉬이 속내를 들어내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녀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하긴 매일 사진을 찍는 표지모델들도 찍다보면 표정이 경직되는 판에 모델이 아닌 그녀야 더 말해 뭣하랴. 그녀도 답답하겠지만 작업이 끝나고 뒤풀이를 즐기려 가는 이 순간까지도 나는 마치 변비에 걸린 듯이 찝찝한 심정이다.
“각 챕터 별 주제를 다 찍긴 했는데, 축제를 주제로 찍은 사진이 좀 별로네요.” 
그녀의 요구대로 상해의 상징인 와이탄 맞은 편 동방명주타워와 황포강을 흐릿한 배경으로 해서 찍은 사진이다. 드레스를 입고 선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고 도회지적인 분위기가 다분했다.
  “그냥 겉멋만 잔뜩 들어가고 진정성이 없어 보이잖아요.”
  그럼 진정성 있는 표정을 한번 지어보시던가요,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축제가 별거나요? 저녁에 우리 축제를 합시다. 교촌치킨 어떠세요?”
친구 장이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나는 그제서야 장이 교촌치킨 예찬론자라는 걸 떠올렸다.
“작가님, 교촌치킨이 왜 유명해졌는지 아시잖아요. ‘별그대’에서 전지현이 한 말 한마디 때문이 아닙니까? 여신도 치맥을 먹는데 작가님도 치맥을 드시면서 일상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 그게 축제인 겁니다. 이제 축제 챕터 하나만 찍으면 우리도 이번에 임무를 완성한거니까 축제가 아니고 뭡니까?”
친구 장이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자식 참, 교촌치킨 하나 먹기 위해 별 지랄을 다 뜨네. 진짜 의도는 따로 있으면서.
“좋아요, 저도 오랫동안 교촌치킨 못 먹었는데 저녁엔 마음껏 드세요. 이틀 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 저녁은 제가 쏩니다.”
이틀 동안 까탈스런 모습을 보이며 긴장을 풀지 않던 그녀도 이제는 한시름 놓이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드디어 도도함의 옷을 벗은 건가?
시내 중심에서 교촌치킨집이 있는 상해 외곽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아침 겸 점심으로 커피에다 샌드위치 하나로 대충 떼운 나는 더위에 시달리고 허기가 져서 말할 기운도 없었다. 촬영보조로 따라온 장은 운전을 하면서도 여전히 입이 쉴새없다.
“작가님 책은 무조건 대박 날겁니다. 이 친구가 이래봐도 사진기술이 대단해요. 저는 이 친구한테서 한창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뭐 가끔씩 운전도 해주면서 말이죠.”
짜아식, 저럴려고 기어이 따라오자고 한건가? 숨만 쉬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이 더운날 군소리 한마디 없이 세시간이나 차를 운전해서 만사 제쳐놓고 달려왔을 때 이미 알아봤어야 했다. 결혼을 하고나서도 장의 카사노바기질은 여전했다. 지금은 옛말이 되었지만 대학을 다닐 때 한국의 연예인 A씨를 닮은 장의 외모와 현란한 화술에  여자애들은 오금을 못 썼다. 행사에 참가하거나 교회에 가면 그는 한 시간 안에 처음 만난 여학생의 손을 잡고 나왔다. 물론 그 다음에는 모텔이나 하숙집으로 직행을 했고 그 후에 벌어질 일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는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인생사전에 여자를 꼬시는 일에서는 실패라는 단어는 없었다. 대학시절 그는 끼니를 굶으면 굶었지 주머니에 콘돔은 항상 열개 이상 챙기고 다니는 놈이었다. 가끔 나랑 탁구 치러 가자고 선약을 하고는 이유없이 약속을 펑크 내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럴 때면 십중팔구는 중도에 여자사냥을 나간 것이다. 
옛날일을 떠올리다 나는 피씩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전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작가를 처음 만난 장은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장은 여작가와 한국의 기성작가들에 대해 아줌마들 저리가라 할 수다 이상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한국 작가중에 공지영 있죠? 그 작가가 쓴 글이 참 많던데.”
“네, 저도 공지영 작가 좋아하는데요.”
여작가는 반색을 했다.
‘문학과는 담을 쌓고 살던 저 자식이 언제 저렇게 열심히 책을 봤지? 그것도 한국 여성작가들의 책을? 설마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을 하고 온건가?’
나는 낯선 사람을 쳐다보듯 놀란 눈으로 친구 장을 쳐다보았다. 장은 나의 따가운 눈총 따윈 느끼지도 못한 채 시선은 여작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봉순이 언니 쓰셨잖아요.”
“맞아요, 그 작품, 참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은 작품이죠.”
“그리고 또 뭐던가? ‘청어’!”
“호호호!”
‘청어’라는 말에 여작가는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고 장은 그제서야 머쓱해하며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청어가 아니고 고등어예요.”
여작가가 정정을 해주자 장은 금방 얼굴이 밝아졌다.
“거봐요, 맞죠. 중국말로 번역이 잘못 돼서 그래요. 제가 중국말로 읽었거든요.”
나는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젓가락만 놀렸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장은 나로부터 여작가가 이혼녀란 말을 듣자 고무풍선처럼 부풀었다.
“이혼녀가 가장 남자에게 잘 넘어온다는 거 알지?”
“사람 나름이지.” 
  “작가들은 지적허영심을 공격하면 바로 무너져.”
  “작업 걸 생각 하지 마.”
  “왜? 니가 벌써 찜해뒀냐?”
  “일하러 왔으면 일에나 신경 써. 경이가 특별히 부탁한 일이야.”
  그렇다고 쉬이 물러 설 녀석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장은 네이버를 뒤지며 한국작가들의 이름을 외웠을꺼란 생각이 들자 나는 또 한번 피씩 웃음이 나갔다. 지쳤던 몸은 찬 커피가 들어가자 기운이 나는가 싶더니 차에 앉으니 금세 노곤해졌다.

장장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야 치킨집에 도착했고 우리는 운 좋게도 넓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반 시간은 걸립니다.”
주문을 받은 웨이터는 이 말을 남기고는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다.
“저는 말이죠, 전에 닭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았어요. 닭다리는 좀 먹긴 했지만. 그런데 참 이상하더군요. 교촌치킨의 맛을 한 번 알자 멈출 수가 없는거예요.”
장은 입을 쩝쩝 다시며 이야기를 풀어놨다.
“결혼초에 저는 집에서 닭만 삶으면 닭다리를 아내에게 줬어요. 닭다리 고기가 제일 맛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야 알았는데 아내는 닭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요. 아내네 집이 양계장을 하는 집이었어요. 하하하......”
장이 하는 이야기의 진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치킨집에서 시간을 떼우는 동안에는 꽤나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나는 판단했다.
“이 친구 말입니다. 프로정신으로 일해요. 작가님한테 촬영 해준다고 어젯밤 내내 카메라 셋팅하고 부산을 피웠어요. 말은 안 해도 열심히 할 것 다합니다. 물론 작가님도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글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참, 요 이틀 우리도 이만하면 꽤 익숙해졌는데 이제 말을 까면 어떨까요? 동갑이잖아요.”
장은 차가운 생맥주를 꿀꺽꿀꺽 들이키며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나는 장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내공을 펼칠 거란걸 알 수 있었다. 여작가는 장의 말에 기분 좋게 리액션을 해주었지만 말을 놓자는 장의 제안에 그녀는 물을 마시며 외면했다.
혼이 나갈만큼 고소한 향이 나의 코를 자극했다. 웨이터가 치킨을 들고 나왔다. 우리 셋은 신들린 것처럼 사양없이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잠깐새에 치킨 뼈가 테이블에 수북하게 쌓였다.
“저는 말이죠. 우정을 치킨에 비유하고 싶어요, 특히 교촌치킨. 매일 먹을 수는 없지만 한동안 안 먹으면 생각나잖아요. 너무 맛있고. 우리들의 우정도 교촌치킨 같은 우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건배합시다. 교촌치킨 같은 우리들의 우정을 위하여!”
장은 교촌치킨 예찬론자답게 우정을 들먹이고 있었다. 여작가의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갑자기 말을 놓기는 어색한지 장은 여전히 존댓말을 썼다. 그는 어디까지나 여자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걸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다.
500cc 짜리 생맥주는 벌써 세 잔째다. 여작가는 취기가 올라서 얼굴은 물론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장에게 못지 않게 여작가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닭고기가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닭을 한 마리 사와서 닭곰을 했는데 남편과 아들이 닭다리 하나씩 들고 먹는거 있죠. 너무 기가 막혀서. 저는 그게 한이 맺혔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임신한 저보다 자기들 입만 생각하는 사람들......”
그녀는 완전히 감정이 몰입이 되어 그만 울기 시작했다. 치킨 하나가, 아니 고작 닭다리 하나가 그녀에게 이렇게 꺼억꺼억 울 정도로 깊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단 말인가? 아님 작가들은 원래 감수성이 풍부해서 술을 마시면 잘 우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벌써 장의 유도적 대화에 넘어가서 격하게 공감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스카라가 번지고 코를 풀은 휴지가 잠깐새에 닭뼈보다 더 높게 쌓였다. 이틀동안 도도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휴지로 손을 닦고 카메라를 잡았다. 촬영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할 사명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의식 못했는지 쿨쩍거리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게 말이죠. 여자들은 특히 임신 때 잘해줘야 한다고들 하던데, 거 참 안됐네요.”
장이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여기 참이슬 하나 주세요, 우리 소맥으로 가요”
그녀가 좀전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웨이터를 부르더니 우리를 보며 쌩긋 웃었다.
“괜찮으세요?”
내가 묻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장담했다.
“걱정 붙들어매라니깐요. 저 보기보다 술 잘 합니다.”
“그럼요, 작가들은 다 술이 세지요.”
장이 신나서 거들었다. 마스카라가 번진 그녀의 얼굴은 스모그화장을 한 것처럼 거무틱틱했다. 한낮의 태양보다 환한 치킨집의 등불 아래서 그녀의 눈가에 희미한 몇 가닥의 주름도 낱낱이 드러났다. 갑자기 대여섯살은 늙어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일상 속의 그녀의 진실한 모습일 것이다. 도도함 속에 감추어져있던 그녀의 본모습. 나는 그녀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클로즈업해서 셔터를 눌렀다.
“리얼하다. 그래, 이게 축제지.”
장이 제멋대로 해석했다. 분위기가 장의 예상대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 더 취하면 여작가는 장의 스킨십을 아무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터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로알드 달이라는 작가인데요, 그 작가의 소설은 정말 흥미진진해요.”
그녀는 살짝 흔들리기 시작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남자가 있어요. 천하의 난봉꾼이죠. 카사노바도 울고 갈 정도로요. 그는 한 여자와 열두시간 이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적 없었어요. 곧 또 다른 여자를 찾아가야 했으니깐요. 이집트의 피라미드 위에서 왕족의 연인을 훔쳐 혼을 쏙 빼놓은 뒤 그는 추적을 피해 사막으로 달아났어요.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차에 기름이 떨어진 거에요. 다행히도 주유소를 찾았지만 기름을 넣어준 사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비스로 자동차를 점검해 준다며 그에게 팬벨트가 끊어졌다고 보여줬어요. 난봉꾼은 주유소 사내가 일부러 끊은 것 같은 의심도 들었지만 어쩔수 없었죠. 주유소 사내는 지금 주문하면 하루 이틀은 걸릴거라고 했으니 난봉꾼은 오갈때 없이 사막에 고스란히 남겨지게 되었지요. 떙볕과 불안 속에서요. 그때 마침 롤스로이스를 타고 지나던 인근의 부자가 나타나 상황을 듣고는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초대했어요. 주유소 사내랑은 친구이니까 자동차 수리가 끝나면 연락을 줄거라고 했어요.”
과연 호기심이 동하는 이야기였다. 장은 맥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그녀한테 집중하고 있었다.
“세상에! 안데르센 동화 속에 나오는 성처럼 아름다운 저택이 그를 맞이하는게 아니겠어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쁜데, 게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여주인과 열여덟살난 딸까지 그를 반겨주었어요. 그는 저녁을 먹는 내내 궁리했죠. 누굴 먼저 유혹할까고요. 여주인 아니면 딸? 그리고 그날 밤, 그는 3층의 방에서 흥분으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어요. 자신이 식사때 그만큼 매력을 어필했으니 둘 중 누구든 자기 방으로 올 거라고 확신한 거죠. 과연 시간이 꽤 흐른 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자기 방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요. 그는 여주인일지 딸일지 알고 싶어서 몇 번이고 성냥불을 그으려 했으나 여자에 의해 제지당했죠. 그렇게 그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스릴과 쾌락을 만끽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밤이었죠. 다음날 아침 그는 시치미 뚝 떼는 두 여자 사이에서 지난밤 자기의 상대가 누구였을까 가려보려고 했지만 결국 알지 못한 채, 자동차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 저택을 떠납니다. 그는 떠나오면서 다음번에 또 초대 받으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그때 운전을 해서 그를 데려다주던 주인이 이렇게 말하죠. ‘저의 가족이 이렇게 화려한 곳에서 세상 사람들과 고립된 채 살아가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실은 제게 딸이 또 하나 있지요. 그 아이는 나병에 걸렸거든요. 나병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마비성 나병입니다.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죠. 못 보셨을 겁니다. 그 아이는 손님이 오면 3층의 자기 방에 들어가 있거든요. 하지만 놀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그 병은 전염력이 강한 병이 아니니까요. 아주 깊숙한 접촉을 하지 않는 한 그 병은 절대 전염되지 않습니다.”
난 여작가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게임은 이제야 정식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장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선수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만 잘 쓰시는 줄 알았더니 작가님은 이야기도 참 재미있게 하시네요. 자, 건배합시다!”
장은 여전히 제 기분에 들떠 잔을 높이 들었다.
“이렇게 끝내기는 너무 아쉬워요. 2차 갑시다. 2차는 제가 쏘겠습니다.”
“아니에요, 집에 가봐야 해요. 애들이 기다리는데. 그리고 저 이미 취했어요.”
“이렇게 좋은 날, 노래라도 한 곡 뽑아야죠.”
장은 끈덕지게 설득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작가는 많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7,8센티는 쉬이 넘을 하이힐을 신고 이리저리 당장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위태로웠다. 장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그 사이 나는 대리운전을 불렀다.
밖으로 나오니 문어발처럼 끈적끈적한 밤이 우리의 몸을 덮쳤다. 그녀는 장에게 기대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다니깐요.”
그녀는 이 말만 반복해서 내뱉고 있었다. 대리운전기사는 1분도 안되어 도착을 했고 나와 장은 그녀를 뒷좌석에 태웠다. 차가 시동을 걸자 “웩!” 차안의 정적을 깨는 불길한 소리에 이어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앗!”
장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피한다.
“휴지, 휴지!”
휴지를 정신없이 뽑아서 그녀에게 내밀었으나 가엾은 휴지는 그녀의 입에서 뿜겨져나오는 폭포같은 토사물의 세례를 막을 수가 없었다. 바닥과 의자, 그녀의 옷, 장의 손, 내가 앉은 의자에까지 이물질이 제멋대로 튕겨올랐다.
“웩”
그녀는 이번에는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또 한번 뿜어냈다. 축제를 알리는 불꽃처럼 토사물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차안에 불똥처럼 튕겨졌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에이, 빌어먹을. 이 동네는 무슨 놈의 대리기사가 이리 일찍 오냐......”
BMW 로고에 튕긴 토사물을 닦아내며 장은 죄없는 대리기사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했다.
  나는 여작가를 부축해서 차에서 내리게 했다.
  “저 택시 타고 집에 갈게요. 택시 좀 불러주실래요?”
   방금 구토를 해서 그런지 밤의 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은 더 할 나위 없이 창백해보였다. 이틀간 보아온 도도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길 없었다.
  “괜찮겠어요?”
  나는 정말로 걱정이 되었다.
  “다 토하고 나니 괜찮네요.”
  그녀가 게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택시를 불러 문을 열어주자 차에 오르던 여작가가 나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이혼녀는 술이 셉니다.”
  여작가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직도 차를 청소하고 있는 장을 바라보았다.
  “술이 세 지도록 이 도시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저 친구 술로는 절대 절 못 이겨요.”
나는 여작가의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날도 과연 괜찮을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잘 가요, 차문을 내려 내게 손을 흔드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그녀의‘흔들리는 도시’에서 본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 도시의 밤은 수천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당신은 어떤 얼굴을 가졌는가?”

-2019 송화강 4기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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