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문학의강'으로 시 등단. 동포문학 시부문 우수상 수상. 현재 울산 거주

실망초

 
요즘
푸르지오  행복타운 브랜드 아파트는 씨알도 안 먹히지
넘볼데를 넘봐야지
감히 어디라고
옛날 집 허름한 틈새에
겨우 비벼 앉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칸방에서 먹고 자고 마누라까지 끼고
어느새 애새끼도 저렇게 커버렸지
지나가며 다들 입을 벌리지
이런데서도 사냐고
어떻게 살아 왔냐고
놀라는게 이상하지 않아
이런데가 아니면 어디라는거지
정처없다는 걸 아냐고
바로 그거야
정처없는 삶의 끈이 질기기도 하지
쉽게 놓을 수 없지
살아 갈 수만 있다면
잡초라도  꽃을 피울수만 있다면 실망할 일이 아니지

2019.8.21

 

또 바람 났다


반구 아구찜 집 안동 참기름 집 육장 참숯갈비 집 비단 떡 집 그리고 왕 족발 집을 마주하고 자목련나무가 기름을 다 디집어 쓰고 무섭게 우두커니 섰네
빼죽이 살 내밀고 자색을 뽐내는 저기 저 자목련 한송이가 빼딱하게 피었네
벌써 몇 번째 인가
5월부터 저렇게 시도 때 도 없이 참지 못하고
앞 바람 뒷 바람 아래 바람 윗 바람 바깥 바람 맞 바람 밤 바람 낮 바람에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피고 또 피고
누렇게 떡잎들이 흉측하게 매달려
그래 나 피었소
인생 뭐 별거 있소
흔들리다 가는거지
제딴엔 머리는 잔뜩 쳐들고 피고 진걸 감추지 못하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 지껄이는데
어찌 목련이라고
백목련처럼 절개를 지키리오
지조가 없어도 자목련도 목련이오

2019.8.20

 

능소화


병원 가는 길에 능소화가 피어 있습니다

능소화는 보름에 한 번 씩 아버님의 배경이 되어 줍니다
한 손을 들거나 두손으로 허리를 짚거나
능소화는 자신을 태우며 아버님을 비춰 줍니다
8월이 막 가고 능소화도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꽃이 지는 구나
아버님이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지는 꽃을 왜 찍냐
추억에 남기려구요
쉬였다 가자
추억이 담아 갑니다

꽃 진 자리에 능소화는 그냥 피어 있습니다

2019.8.16


마농


마농이 피었지
하얀 얼굴이 흔들릴때
심신의 절정을 이룰 때 었지
가슴 살 트던 봄과 습관처럼 작별하고
후끈 뜨겁던 여름마저 보내고
들썩이며 주체 못하는 가을을 만났지
그때 핀거야
마농이 피었어

자연스럽게 왔다고
웃기지 마

갑자기 들이닥쳤지
일식이나 월식처럼
무작정 덮친거지
어쩔수 없이
마농이 피었어

고백은 발설하는게 아니라니까

다시 피기 어려운 마농
녀석을 꺾었어
지난 날들을 다 잊어버리도록
꺾어 주었지
지금 마농이
내 곁에
빙그레 죽어 있어
하얗게 죽어 있어
동전 만하게
동전 만도 못하게

2019.9.6

 

연락할 곳이 없을 때가 있었다
 

17년전 어느 겨울
난 불법체류자
갈데가 없다
강남의 구룡마을
94세 할머니 집에 얹혀 산다
개포동 상가의 광주해장국집
고맙게 일을 시켜
출근할 때 짐을 싸고
퇴근할 때 보따리 싼다

화장실도 나무판자
땅값이 비싸 개발되지 못해
고향 산골짜기보다 더 째졌다
퇴근하고 들어서니
할머닌 싸늘히 누워 있다
후닥닥 달려가
뚫어져라 내려보니
멀건 두눈 번쩍 뜨고
오싹하게 노려본다

뜨거운 물은 사용금지라
양푼이에 찬물 붓고 대충 문댄다
다시 옷을 주어 입고
미군부대 탄자를 덮고
할머니 곁에 눕는다

바람소리 인가?
잠결에 깼다
시커먼 할아버지가 날 내려다본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후닥닥 일어나 쏘아보는데
할머니의 아들이라 한다
의정부 미군부대에 있다며
그냥 누우라며
내 옆에 눕는다

난 짐을 싼다
하루밤 자는데 큰 일이냐는
영감의 소리 뒤로하고
문을 차고 나온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떨린다

정거장의 차거운 의자 나를 반기고
사위는 내 눈치 보느라 고요하다
당금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찬 바람에 진정시키고
전화번호책을 꺼낸다
깨알같이 박힌 번호들
그날따라 어색하다

그날은
최고로 추운 겨울밤이었다


2016년 4월 1일

 

주걱


무엇보다 나는 뜨거운 밥을 위해
그대의 죄를 덮으리오
아멘

이 몸이 다슬어 사라질 때 까지
그대의 마음 속으로  뛰어 가리오
아멘

그대의 마음이 비어
싸늘히 식어 가더라도 영원히 지키리오
아멘

밥이 똥이 되는 것도 모르나이다

밥풀 몇알 붙이고 베드신을 찍으며
찬 물 끼얹는 불쌍한 년이

2019년 9월 9일

 


안면도의 시인
 


검은 바다에
파도가 사나운데
허름한 초가집이
지붕도 없이
기둥만 앙상하게 세우고
름름하게 바다가를 거닐고 있다네

안면도에 사는 시인이라고
구면도에  사는 형이 말하네

자기보다 8살 이상이라며
세상과 단절하고
고독을 즐긴다며
중국 연변에서 왔다 했네

멋져 보였네
친구로 사귀고 싶었네

언제 시간 되면
안면도에 가서
파도에 쓸려간 흔적들을
시름없이 거닐며 읊었던 시들을
횡포한 바다에 그물을 씌워
하나하나 건질거네


2019년 9월 9일

 

목탁소리
 


정각 새벽 4시
마른 공기 사이로 탁하게 울려 온다

절도 없고
스님도 없는데
죽은 시계 깨우려는 듯
시시 때때로 두드린다

찬장의 그릇들이 부르르 떨고
정원의 마농이 하얗게 질렸다

파랗게 열리는 골목길 따라
동천강을 따라
태화강을 만나
방어진 바다로
그리고
저 멀리 나진까지 울려간다

열심히 쌓아올린 팔십성상이
희미하게 풀리는 소리
늙은 괄약근처럼 풀리는 소리

크흐윽-푸!
크흐윽-푸!

깨어진 목탁소리 밟는 발자국 깊다


2019년 9월 10일Ⅰ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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