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혹시 이 종이처럼 백색의 우아함을 나타내면서 때로는 가차 없이 냉정하게 베어버리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종이에 손가락 베이듯 나 자신의 실수로 마음에 상처를 남긴 적 있다.......인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연이 거기까지 인걸……"
- 본문 중에서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 부국장. 동북아신문 편집위원. 수필/수기 등 수 십편 발표, 동포문학 수필부문 최우수상 등 수상 다수.

[서울=동북아신문]칼이 빗나가면서 순식간에 손을 베었다. 갈비를 작업하다가 힘의 강약 조절 실패로 칼이 너무 깊게 들어갔는지 왼손 식지에서는 피가 투두둑 떨어지며 순식간에 피투성이다. 나는 베인 손가락을 꽉 조여 쥐며 지혈을 했지만 피가 멈추질 않았다. 동료가 밴드와 붕대를 챙겨왔으나 손을 떼면 피가 더 많이 흘러 결국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나의 작업대에는 여러 종류의 칼이 꽂혀있다. 뼈를 바르는 뾰족한 칼과 기름을 제거하는 고기 칼, 그리고 푸주 칼과 중국 식칼이 꽂혀있다. 야채를 썰 때는 중국 식칼을 쓰고 약간 냉동된 고기를 썰 때는 푸주 칼을, 갈비를 작업할 때는 뼈칼과 고기 칼을 쓴다. 이 고기 칼에 아차 하는 순간에 당한 것이다. 아주 조심스레 작업한다고는 했지만 얇실한 칼은 사정없이 나의 힘줄까지 베어 버렸다.

정형외과 병원에는 환자가 많아 리셉션에 접수하고 20분 넘게 기다려서야 의사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힘줄이 끊어져 상처 부위를 더 째서 힘줄을 이은 수술을 하고 깁스를 했다. 수술 중에 지혈하느라 꽁꽁 묶은 왼쪽 팔뚝은 피멍이 들기 시작했다. 사방에 흘린 피를 보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이 약하면 마음도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지면 누군가에 기대하고 싶은 마음인가보다. 외면적이나 내면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인해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을 보면 나란 참 나약한 존재구나 싶다. 착잡한 심정에 나는 회복실 침대에 잠간 몸을 맡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일들이 머리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첫 등교의 설렘, 첫사랑의 아련함,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특별하다. 내가 어릴 적 첫 기억은 상처인 것 같다. 8살 때쯤, 방과 후 같은 반 아이들과 공을 차기도 하고 맨손으로 주고받기도 하면서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상대방이 찬 공이 나의 키를 넘겨 나뭇가리 속에 박혔다. 나는 뛰어가 엎드려 공을 꺼내려고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뾰족하게 나온 나뭇가지를 보지 못하고 턱이 푹 찔렸다. 순식간에 피가 줄줄 흘렀다. 피를 보는 순간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까무러치게 울었던 생각이 난다. 어린 나이에도 빨간 피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하다는 걸 알았는지 나는 턱을 부여잡고 애처로운 도움의 눈길을 날렸다. 애들도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피가 뚝뚝 흐르는 턱을 부여잡고 마을 앞줄에 있는 위생소로 뛰어갔다. 애들이 나의 부모님에게 알렸는지 처치 중에 오셔서 부산을 떨며 나를 나무람 하던 생각이 난다. 그때의 흉터가 아직도 나의 턱밑에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도 친구들은 내가 밥 먹다가 흘리면 턱밑에 구멍이 나서 그런다고 장난을 친다.

그 후부터 나는 사고 없이 잘 커왔다. 그런데 아주 소소한 종이에 손을 베인 적 있다. 보던 책을 접고는 일어서서 책장에 꽂으려다가 옆의 책이 흘러내리는 것을 붙잡으려고 나간 손이 그만 책꽂이의 한 책장에 손을 베었다. 식지의 둘째 마디에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다. 얇은 종이가 이렇게 위험하리라고 왜 생각 못 했을까? 활자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자신의 날카로움을 숨기고 나를 안심시켰을까? 종이? 혹시 이 종이처럼 백색의 우아함을 나타내면서 때로는 가차 없이 냉정하게 베어버리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종이에 손가락 베이듯 나 자신의 실수로 마음에 상처를 남긴 적 있다. 그해 5.1, 목단강에는 참 많은 눈이 내렸다. 눈비 속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다시 오지 말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뒤돌아선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상처를 줬다고 생각했다. 손의 상처가 덧나듯이 쉽게 낫지가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상대방과의 의견 차이로 주고받은 대화 속에 오해와 불신이 쌓여 상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오해를 푸는데 시간이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인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연이 거기까지 인걸……

칼로 낸 상처는 한두 달이면 완치가 되지만, 잘못된 언행과 잘못된 글 한 줄이 상대방에 주는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한 작은 상처들이 쌓이면서 아주 커다란 상처 못지않게 가슴 한구석에,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쌓여간다. 그렇게 상처는 소리 없이 다가온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이 정도에 기분 나쁘겠어?”생각하지만, 서로 사랑한다는 맹신에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잃을 수 있다.

주방 생활 20년 넘게 해오면서 손도 많이 베어봤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상처에 아픔을 느꼈을 뿐, 마음의 동요는 느껴본 적은 없었다. 칼을 쥐기 전 나의 손에는 볼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글이 쓰면서 중지 첫마디에 굳은살 베기는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볼펜을 쥐고 있으면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마음의 안정제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 귀한 재산인 볼펜과 원고지가 글로 변해갈 때의 희열은 지금도 변함없다. 한국에 온 후부터는 볼펜 대신 생전 쥐어보지도 못했던 무거운 중국 칼을 쥐고는 주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능수능란하게 각종 칼을 다룬다. 왕초보인 나도 그들을 흉내 내다가 칼끝에 손을 살짝 베인 후부터 겁이 생겼다. 그렇다고 칼잡이가 나의 밥줄이어서 중도 포기할 수 없었다. 속도를 늦추며 볼펜을 다루듯 칼질을 연습했다. 펜의 단련에 중지에 굳은살 들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칼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전체의 손바닥에 굳은살이 쫙 퍼지면서 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깁스한 손이라 힘을 쓰거나 물건을 들어 올리는 일에는 왼손 자체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출근은 물 건너갔고 일상이 마비 상태와 다름없었다. 세수는 물론이고 집에서 밥해 먹는 것까지 고역이었다. 보름 넘게 깁스하고 다니다가 풀었다. 상처도 거의 아물었으나 손가락이 굳어져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봉합한 힘줄이 완치되지 않아 칼 놀림이 서먹해지며 예전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어설픈 칼 놀림에 조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수록 기름 제거에 살코기가 떨어져 나가는 실수 연발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니 다시 칼들을 과신하기 시작했다. 중국식칼로 야채를 썰 때는 칼 자체의 무게감에 반대로 힘이 덜 들어가고 몸의 율동과 함께 아주 정연하게 잘려나간다. 푸주 칼 손잡이를 잡고 약 냉동된 고기를 자를 때 사라락 소리 내며 잘려나가는 것을 볼 때도 칼은 언제나 상냥하게 온몸을 내게 맡기는 친근함을 느꼈다. 오늘도 나는 칼을 들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