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사회자(징이단): 어제 "집중탐방"에서는 한 차례 "파룬궁" 분신자의 서술의 상집을 방송했는데, 왕진둥이 어떻게 한 명의 정상인으로부터 "파룬궁"중독자로 변했는지를 서술했다. 왕진둥의 "파룬궁"에 대한 열광이 그로 하여금 분신자살의 길에 오르게 했다.  
2000년 12월 20일, 왕진둥은 개봉으로 돌아온 후 류윈팡, 쉐훙쥔 등 "파룬궁" 중독자 등과 접촉이 더욱 빈번해졌다. 그들은 천안문 광장에 가서 분신하는 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천안문 분신 사건 참여자 왕진둥: 내 생각에 이 물건은, 네 몸에 있는 물건은 반드시 네 스스로 제거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생각의 깊이에 있어서, 나는 인간의 것이 많아서 자기 수련을 하는 것인데, 확실히 인간의 집착을 없애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런 형식은 마지막에 가장 큰 고통과 견디는 것인데, 제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인간의 것들도 제거해야 된다. 
리훙즈 정신의 통제 하에 왕진둥은 지금까지 스스로 수련해 왔다고 생각하여, 인간은 모든 것은 이미 거의 내려 놓았다고 여기는데 오로지 감정을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반드시 어떤 형식으로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여겼다. 
왕진둥: 그게 마지막 가는 형식인데 그러나 가는 것을 요구하는 수련을 하는 사람은 그는 절대적으로 깨끗하다. 나머지는 어떤가? 가려고 하는데, 스승님에게 방법이 있다. 그 순간 홍화(虹化)의 순간, 한 줄기 빛이 가더니, 마지막에 그의 번쩍하는 것은 실제로 인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휘황찬란하고 장관이고, 사실 그 자체로도 마지막으로 견디는 것이고, 그러면 원만을 이룬다.
류윈팡(남 57세 허난성 개봉시 무량묘거리 5호 주민, 河南省开封市无梁庙街5号居民) 이전에 이미 깨달은 바 있는데 천안문에 가서 분신은 원만을 이루는 최고 형식이다. 이들은 각각 리훙즈의 경문에서 이를 깨닫고 서로 교류했고, 호우후이쥔(郝惠君) 모녀와 류춘링(刘春玲) 모녀, 류보우룽(刘葆荣) 씨의 호응을 얻었다. 왕진둥 등은 천안문 광장에 가서 분신하는 형식으로 마지막의 원만을 이루기로 했다. 2001년 설을 앞두고, 당시 왕진둥의 처허하이화와 딸 왕쥐안은 천안문에 가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공안에 의해 구속되었다. 왕진둥은 그의 어머니와 작별을 고한 후 집을 떠났다. 
왕진둥: 나는 나의 어머님을 생각하니 나의 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년세를 하고 있는데, 내가 그를 두고 왔다. 하지만, 난 또 내가 이건 인간의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지금 이 일을 하는데 지금 인간의 감정이 이렇게 무겁지? 그 당시 나는 속으로도 모순적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 정을 도저히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집을 나선 후, 많은 생각을 했고, 나의 어머니,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애인, 아이, 남동생, 여동생, 나는 집에서 책임이 무겁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는 억지로 가버렸다. 걸을 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것들이 다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확실히 내려놓기 어려웠다. 나는 그런 견디기 힘든 맛을 정말 느꼈다. 
왕진둥은 마음 깊은 곳에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이 가득했는데, 이것은 본래 인간성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파룬궁"에 대한 중독은 그로 하여금 이 정은 반드시 없애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승과 함께 하늘나라 세계로 갈 수 없고, 분신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의 마지막 감정을 없애준다. 준비를 충분히 한 뒤 2001년 1월 23일 오후 류윈팡 등 7명과 함께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다.

왕진둥: 그때 저는 이 음료수 병을 스웨터 안에 숨겨두고 테이프로 묶었어요. 나는 스웨터를 사이에 두고 그것을 그었다. 끝났다, 이쪽에서 (면도날을) 가지고 다시 그것을 그었다. 잘 그은 다음 나는 라이터를 가지고 밑에다가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이 나를 삼켰고, 귓가에 "후후" 하는 소리만 들리고, 소리가 크게 나더니 마치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몇 초 동안 산소가 부족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화재 진압을 시작했는데, 경찰이 물건을 가지고 나를 넘어뜨렸다. 나는 당시에 매우 급해서 나의 불을 끄는 경찰을 발로 한켠으로 걷어찼고, 내가 다시 일어나 앉았을 때, 그는 두 번이나 달려들었고, 두 번 걷어찼다. 확실히 그 순간, 나는 더 생각하지 않았고, 살려고 하는 그런 사상이 없이 일어나 앉았다. 이때 소화기를 가져와서 나한테 한 번 뿜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차. 큰일이 났다. 
민경은 왕진둥의 몸에 붙은 불을 즉시 끄고 그를 베이징시 병원으로 보내 구조하였다. 당시 화상을 입은 왕진둥은 후회하지 않았다. 
당시(2001년 1월 26일) 왕진둥을 인터뷰 했다. 
왕진둥: 수련의 완성 여부는 아직 마지막의 시험에 있다. 
기자: 마지막 시련이 남았는데 누가 결정권이 있는가? 
왕진둥: 스승님. 
기자: 스승님에게 결정권이 있어요. 
기자는 다시 현재의 왕진둥을 취재했다. 
기자: 분신 이후 왜서 더 믿음이 강해졌어요? 
왕진둥: 그냥 불이 달린 이후 아프다고 할 수도 없고 뜨거운 느낌도 없어요. 이게 웬일이냐? 내 마음속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다. 확실히 그랬는데, 나중에 나의 생각엔, 스승님의 법신이 나를 보살피고 있는 것 같아요. 
기자: 리훙즈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왕진둥: 그렇다.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이 큰 불로 인해 마음속으로부터 그에게 더욱 심취한 것 같다. 
화상을 입은 후 통증을 느끼고 견디기 어려울 때, 그는 "파룬궁" 이론에서 해명을 찾았다. 
왕진둥: 그땐 이 아픔이 나를 죽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죽지 말았어야 했을 수도 있고, 가능하게 아직 견딜만 한 같기도 한데, 왜냐하면 네 몸의 업력이 너무 컸기 때문에 네가 죽으면, 가버리면 안 된다. 내 생각엔 그럴 것 같았다. 받는 대로 받자. 
왕진둥이 분신할 때 부인 허하이화 씨와 딸 왕쥐안 씨는 천안문 광장에 가서 소동을 일으켜 개봉 공안국에 의해 법에 따라 구속됐다. 이들을 유치장에서 취재하던 중 그제야 그들은 왕진둥이 분신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 

당시(2001년 1월 26일) 왕진둥의 아내 허하이화를 인터뷰 했는데, 허하이화는 최고의 경지가 원만이라고 했다. 
기자: 당신이 보건데 왕진둥이 원만에 이르렀는가? 그의 이번 행동을 통해서? 
허하이화: 응당 원만인 것 같다. 
당시 기자가 왕진둥의 딸 왕쥐안에게 물었다: 아버지의 생명을 걱정하지 않으세요? 예를 들어 그는 화상이 매우 심각하고 생명의 위험이 있는데요?
왕쥐안: 이건 걱정 안 한다. 
기자: 왜서인가? 
왕쥐안: 그는 대법제자다. 대법은 모든 것을 만들었고, 대법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기자는 현재의 왕쥐안을 취재했다. 
기자: 왜 그렇게 말하는가? 
왕쥐안: 그 때 보통 사람의 이치대로 이런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내가 수련인이었고, 우리 아빠도 수련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수련 중에서 수련을 하는 일은 매우 정상이었다. 그 자체는 대법제자로서 틀림없이 괜찮을 것이다. 그가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그건 틀림없이 원만이었을 것이다. 
2001년 2월 27일, 허하이화, 왕쥐안은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여 노동교화형을 받았다. 노동교화소에서 경찰들은 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도리로 사람을 복종시켜 그들로 하여금 끝내  "파룬궁"의 소의 말하는 "원만"은 사실상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하였다. 생각이 바뀌면서 그녀들은 왕진둥에 대해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한 기자가 이들을 인터뷰 할 때 왕쥐안은 기자에게 대신하여 아버지에게 말 한마디를 건넸다. 
왕쥐안: 사람의 감정으로 그를 따뜻하게 해주려한다. 사실 이 한마디는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는 아직도 그가 너무 그립고,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왕진둥은 당시 공안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하고 있었다. 딸의 이 말이 그를 깊이 감동시켰다. 
왕진둥: 그 며칠동안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내 애인, 내 딸이 보고 싶다. 2001년 4월 5일 이 날, 베이징에서는 비가 한 차례 내렸는데 빗소리만 들려왔다. 새해의 첫 빗소리였다. 나에겐 기분이 그때 뭐라고 말할까, 그녀들을 더욱 그리워하며, 하룻밤도 자지 않고 몇 마디 하였다. "복숭아꽃에는 비가 내리고,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이 수건을 적신다. 사랑하는 아내와 애지중지 자란 딸은 어디서 찾을 것이며, 황송한 노인네는 화살이 마음을 뚫는 것 같다." 
왕진둥은 자신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발견했다. 사람의 감정은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진둥: 다시말하자면 나의 이 집착 이 내려놓는 것은 사실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런 정, 이런 감회가 과거에 비해 더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왕진둥은 마음 깊은 곳에 눌려 있었던 감정이 되살아나고, 동시에, 있는 곳에서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왕진둥: 내가 입원에서부터 퇴원할 때까지 치료하고 정저우(郑州)교도소에 올 때까지 나의 내심으로는 정부가 나에게 너무 잘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친지처럼 대해주고 살뜰하게 보살펴줬다 . 
2001년 11월 왕진둥은 정저우교도소로 보내져 복역했다. 당시에 왕진둥은 여전히 리훙즈와 "파룬궁"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갖지 않았다. 정저우교도소는 왕진둥의 상황에 맞추어 전문적인 교정 교육팀을 구성했다. 먼저 죄를 인정하고 법을 따르는 차원에서 일을 진행하여, 그로 하여금 어떤 목적으로든 자신의 행동이 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바로 왕진둥이 줄곧 고수하던 "파룬궁 "식의 사고는 진전을 가져와서 2001년 12월 20일에 왕진둥은 "파룬궁"인원이 제조한 또 한차례의 살인 사건을 목격한 후에야 그는 리훙즈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왕진둥: 푸이빈(傅怡彬) 같은 사람은, 인터뷰 중에 시민 이웃들은 그가 과거에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왜 수련을 거쳐서 그런 모습이 되었을까?나는 그때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 깨닫지 못했고, 나는 아직도 그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누가 이 책임을 질 것인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렇게 많은 사례가 있고, 이렇게 많은 참사가 일어났는데, 스승님이 왜 상관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경문을 내리면, 당신은 이미 경문을 내린 목적이 수련을 지도하고, 수련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를 증거로 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왜 상관하지 않았는가? 누가 이것을 위해 책임을 질 것인가? 내 머릿속에서 스승님이 자비로운데, 이렇게 당신의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네가 자기 제자를 사랑하는 것이, 제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데, 네가 이렇게 네 제자를 사랑하는 것인가? 이 일련의 의문들은 결국 내가 그것을 써내려 가게 했고, 마지막까지 쓰고 나서, 나는 나 자신을 생각했고, 류춘링(刘春玲), 류스잉(刘思影), 호우후이쥔과 천궈(陈果)를 떠올렸는데 정말 큰 속임수였다. 이 시점에서 나는 내가 속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느낌은 확실히 마음속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2001년 12월 25일 왕진둥은 자신의 공책에 이런 말을 적었다—  
"스승님이여, 당신의 수련이 이런 식으로 원만하게 진행된다면 제자들은 기꺼이 당신의 이 원만함을 버리렵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게 도대체 왜 그런 건가?" 
왕진둥은 리훙즈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최후의 부인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다. 왜냐하면 리훙즈와 "파룬궁"을 부인하는 것은 이 몇년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인하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왕진둥: 처음엔 자기가 속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어요. 차츰차츰 점점 리훙즈와 처음엔 정이 있었고 멀어졌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됐다. 멀어졌다가 마지막에 한이 생겼다. 그래서 말인데 마지막에는 나는 나자신이 과거에는 여전히 똑똑하고, 자신을 미화했는데 사실은 큰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자: 왕진둥은 최근 감옥에서 자신의 분신 전후 경험을 수만 자에 걸쳐 적었는데 제목은 "우매·사망·신생"이다. 이 제목은 바로 그가 인생경험에 대한 진실한 묘사이다. 왕진둥은 "파룬궁"의 유혹으로 어느 일반인으로부터 "파룬궁" 중독자가 되었는데 사이비종교의 미혹 하에 최종으로 분신자살의 길로 나아갔다. 그의 생명경력은 증명한다.  사이비종교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파멸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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