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 약력 : 본명 허창렬. 시인, 평론가. 기자/편집 역임. 재한동포문인협회 전부회장. 동포문학 시부문 대상 등 수상 다수.

[서울=동북아신문] 거위털같은 눈이 푸실푸실 쏟아진다. 첫눈이라서 그런지 분주하게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역시 그닥 싫어하는 눈치들이 아니다. 아까부터 골목길을 눈 여겨 주시해보고 있지만 아무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보이질 않자 성격이 급한 석철이가 경식이의 팔꿈치를 툭툭 건드려가며 다시 재촉한다.​

"배고픈데ㅡ, 어서 안에 들어가자. 들어가서 기다리자."

"그래, 그래야 겠구나! "

때시걱이 한창 지나서여서 그런지 넓다란 방안은 한적하다 못해 조금 휑뎅그레해까지 보인다. 밖이 잘 내다 보이는 창문쪽으로 자리를 찾아 앉기 바쁘게 삼계탕집 최사장의 애교 많은 얼굴에서는 금시 보름달이 배시시 떠 오른다.

"오랜간만입니다ㅡ손님, 무얼 주문하시겠어요? "

"녜. 삼계탕 두 그릇에 로우룽커우(老龙口) 한병만 주세요."
"녜. 잠깐만요."

새까만 머루같은 두눈은 언제봐도 새물새물 잘도 웃는다.

"참 저 녀자는 무엇이 저리 좋아 하루종일 싱글벙글하는건지?"

경식이가 건네준 담배에 불을 붙여 문 석철이는 애꿎은 담배를 한 모금 두 모금씩 뻑뻑 빨아댄다.

"손님 시키신 음식 올리겠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요ㅡ."

어쩌면 건성에 가까운 인사말일지라도 최사장의 입만 통하면 포장이 잘 되여서인지 제법 꿀맛이 자르르 흐른다.

"네. 수고하십시요!"

거의 십오년만에 고향을 다녀가는 걸음에 동창이자 고향친구인 자신을 찾아보려고 선뜻이 중간역에 내려준 석철이가 하도 고마워 눈물이 펑펑 쏟아 질 지경은 아니지만 속으로 내심 무척 반가워난 경식은 그늘따라 부산스레 500도가 넘는 근시안경알을 자주 벅벅 문질러 가면서 괜스레 말꼬리를 자꾸 흐린다.

"카아ㅡ."

   점잖게 술 한잔씩 배속에 털어넣자 경식이는 아까부터 하고싶었던 말들을 다시 꺼내놓는다.

"그래 고향에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야ㅡ, 너나 나나 불알 두쪽 달랑 차고 떠나버린 고향인데 이제 와서 고향얘기는 왜 자꾸 꺼내는거니?"

안주를 짚을대신 괜히 역정부터 발칵 내는 석철이의 두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살짝 피여 올라 공연히 축축하다.

"야 임마, 그래도 고향이잖니? 자꾸 알고싶고 궁금한것이 어디 한둘이여야 말이지? 그때 우리 과수원집 사과랑 체리를 훔쳐 먹던 시절이 방금 어저께같은데 참 우리 언제 벌써 오십고개를 바라보게 되였지? 휴ㅡ. "

"말도 말아ㅡ, 네가 살던 집에는 웬 양몰이꾼 한족령감이 살고 있고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이웃 한족동네 장가란 놈이 통채로 사서 정미소를 차렸더구나. 큰길에서 마주친 이라고는 90세도 넘는 우물집 장할머니와 경칠이뿐이였는데 오랜간만에 만나서서도 그저 헤헤 헤식게 웃고있는 그가 그나마 너무 반가워 500원씩 쥐여주고 왔다…"

대학입시에서 저 혼자 불행히 락방이 되여 한때 고향에서 민영교원, 단지부서기, 과학기술촌장을 지낸적이 있는 석철이는 현재 여라문명 되는 고향 친구들가운데서도 제일 잘 나가는 사업가이며 또한 자선가이기도 하다 .앞날은 알수조차 없다더니 아마도 그 말은 석철이를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개성도 없이 그냥 너부죽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인 석철이는 일솜씨가 맵짜기로 소문나 현재 북경 왕징거리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유지이며 기업가이기도 하다

"그래 ? 제미랄 ㅡ뿌리조차 버린 우리들이 어디로 간들 고향이 아니랴만 집시인도 아닌 우리들이 왜서 이제는 돌아갈 고향마저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거지? "

"그러게 말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모두 어데로 갔는지? 아픔이 무엇이고 그리움이 무엇인지는 아마도 우리 이 나이쯤 돼봐야 누구나 조금씩은 알것만도 같다."

혼자 궁시렁대는듯한 석철이의 응답에 멋적어진 경식이는 씨익 웃어버린다.

"자 한잔 더 들자. 오랜간만에 만났으니 너네 사돈에 팔촌들까지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 ㅡ"

"그래 건배 ㅡ"

"숙영와 은희도 심양에 살고 있는데 전화해놓았으니 아마 조금 있으면 곧 도착할게다."

"그래? 걔들은 모두 잘 있지? 보고싶다!"

"너 요즘 장사가 잘 되니? 소문에 너는 북경에다 집도 여러채 샀고 큰 회사에 려행사도 여러개 갖고 있다고 하던데ㅡ"

"그까짓거 뭐가 그리 중요하니? 밥이나 먹고 살면 그만이지ㅡ 죽으면 가져도 가지 못하는것을…"

"그래ㅡ그건 아마도 네 말이 맞는것 같다. 너 혹시 버블리사유모식(逆向思维模式)이라고 들어본적이 있니? 상세히 말하자면 볼컨법칙(博肯法则),가슥터법칙(贾斯特法则),위백법칙(韦伯法则)이라고 하는데 첫째 당신 스스로 제공할수 있는 모든 물건은 당신은 하나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둘째 차는 낡은것일수록 더욱 미친듯이 몰아댄다 셋째 마지막 몇분이 아니라면 결코 아무런 일도 성사시킬수가 없다 뭐 이런것들인데 넌 혹시 벌써 갱년기 지나 지금 무함모드의 꿈나라 아니니? 왜 다 살아 온 사람처럼 생각이 그렇게 고리타분하지?"

"야, 말도 되지 않는것에 아교를 잔뜩 붙여 생살을 달달 떨지 마라! 네가 뭐 페르(菲尔)박사의 인격심리건강테스트라라도 연구하고 있다 이거니?  "

"아니! 아니!난 너의 그 심드렁한 태도가 무척이나 존경스럽고 걱정이 돼서 하하하"

"야, 임마 ㅡ 너나 잘하세요. 미꾸라지 한마리 심양 개울물을 죄다 흐리우지 말고 ㅋㅋㅋ"

술은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는 속담이 조금도 틀리지 않은것 같다. 시원한 삼계탕국물에 쫄깃한 닭고기를 뜯어가며 어느새 술 몇잔씩 배속에 훌훌 털어 넣고나자 그동안 핼쓱했던 경식이와 석철이의 얼굴은 제법 홍조가 피여올라 윤기가 반지르르하다. 40고개를 지나 래일 모레면 어느덧 50고개를 바라보는 그들이지만 마음은 아직 젊음이 파릇파릇 싹이 트고 있는 그대로인것만 같았다.

"야ㅡ내 시 한수 지어볼가?"

"그래라 이 멍충아"

"시제는 '다음 세상에도 우리는 행복할가?'인데 어디 한번 잘 들어봐!"

"그래 알았다. 이 2류도 못 되는 3류 시인아"

지긋이 눈을 감고 푸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식이가 자작시를 읊기 시작한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
누구의 어린 자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게
왜 이다지도
슬플까?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할아버지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게
왜 이다지도
가슴이 미여질까?

또 래생에
누구의 할머니
누구의 삼촌
누구의 고모, 이모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게
왜 이다지도 자꾸
눈물이 나는걸까?

하루에 또 하루
오직 그 하루밖에 모르며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개미처럼 바삐 살아도
나는 이 하루가 목이 메이도록
슬프게 너무
행복하다

"어때 ㅡ 괜찮지ㅡ"

"그래 괜찮아 보이긴 한데 네가 쓴 시라서 그런지 조금은 별루인것 같다 ㅡ 꽤나 이름이 있고 저명한 시인이 썼더라면 아마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호평도 있을법 한데ㅡ 아직까지 시나 쓰며 나부랭이로 살고 있는 네가 왜서인지 너무 부렵다!"

"자식 그런 의미에서 내 술 한잔만 더 받아라."

"그래 그래! 이거 이러다 오늘 취하겠는데ㅡ"

"카악 카ㅡ."

"카ㅡ."

  경식이의 웅장한 체구가 어느새 조그마한 술병 앞에서 흐물흐물 무너진다. 너 한잔 나 한잔ㅡ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는지 아니면 술이 사람을 마시는지 그들에겐 그 자체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오직 오늘의 이 만남이 더욱 즐겁고 반가울 따름이였다.

"아이구 추워라! 돌대가리 석두ㅡ 아니ㅡ 북경에서 온 석철이 어디 있니? 누나들이 너 보고싶어 한 걸음에 달려 왔다…호호호ㅡ. "

   묵직하고 점잖던 바깥문이 벌컥 열리면서 숙영이와  은희가 가녀린 어깨에 수북히 쌓인 눈을 탁탁 털어내면서 떠들썩하니 음식점안으로 들어선다.

"아니 저 방아간 참새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바 없네 흐흐흐…"

"어이구 ㅡ우리 석두ㅡ돌대가리 많이 컸구나! 어디 한번 누나들이 안아볼가? 호호호 "

   서로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다가 덥썩 석철이를 끌어안은 숙영이와 은희는 반가와서 어쩔줄을 모른다.

"야 이게 몇년만이니? 그래 너네 마누라와 아이들은 모두 다 잘 지내구 있지?"

"그럼 다 잘 지내지고 있지! 너희들은?"

"우리들이야 뭐 그럭저럭ㅡ 그나 저나 석두야 너 촌놈이 북경에다 집도 여러채 사고 회사도 여러개 차렸다면서ㅡ 넌 아무래도 개천에서 룡이 난것이 아니라 미꾸라지 한마리 룡트림을 하고 있는것 같다. ㅡ자식 멋진데ㅡ 자 어서 노래방으로 가자ㅡ 2차는 누나들이 쏠게 호호호"

커다란 허우대에 걸맞게 씰룩거리는 큰 엉덩이를 쪽걸상에 채 붙이기도 전에 숙영이는 서둘러 일어서자고 독촉부터 들이대는데 그러는 숙영이를 슬며시 제 자리에 꾸욱 눌러 앉히며 볍씨같이 속이 통통 잘 여물었고 목소리까지 오동통한 은희가 신비롭게 말문을 뗀다.

"이자 금방 조선족백화상점근처에서 숙영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할아버지가 땅바닥에 쓰러져 있지 뭐니…"

"그래서?"

의아한 눈길을 한몸에 받으며 은희가 다시금 말문을 연다.

"80세쯤 돼 보이는 할아버지였는데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쩍어 내가 다가가 '할아버지 제가 부축해 드릴가요? 저의 한달 로임이 천오백원밖에 안되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하였더니 그 할아버지 하는 말씀이 '아니 조금 더 기다려 볼라우, 밍크코트라도 입은 아줌마라면 좋겠는데ㅡ' 하지 뭐니! 세상이 뭐가 될려고 이러는지 참 나 원ㅡ"

"아니 그게 정말이니?"

"정말이지 그럼! 내가 왜 없는 일을 제 멋대로 꾸며대겠어ㅡ"

"에잇 ㅡ 차마 그럴리가?"

도무지 믿기지 않을뿐만 아니라 도저히 믿을수조차 없다는 그런 눈길에 은희는 믿지 못하겠으면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재촉을 해댄다.

"그럼 우리 이 참에 노래방에 가서 오랫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한번 제대로 풀어보자."

"그래ㅡ 그렇게 하자!ㅡ"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우에 두터운 겨울옷을 주섬주섬 껴 입는 석철이와 경식이를 내버려두고 잽싸게 스탠드에 다가가 결산마저 끝마친 숙영이와 은희가 발을 통통 구르면서 먼저 출입문을 나선다.그 뒤를 경식이와 석철이가 온순한 새끼양들처럼 줄레줄레 따라 나선다. 만수 삼계탕집을 나와 도레미노래방쪽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 그 왼쪽켠에는 아직 한메터 남짓한 낮다란 담장이 허름하게 서 있다.그 담장너머에는 겨울 라목이 통뼈채로 기세당당하게 서 있고ㅡ 불쑥 찬 기운과 맞닥뜨려 취기를 느껴서였던지 비칠거리며 담장쪽으로 다가서던 석철이가 불쑥 지퍼를 까내리고 가무잡잡한것을 꺼내들더니 경식이를 향해 도전적으로 발씬 웃는다.

"그래 이늠아, 오늘 어디 한번 제대로 승부를 만들어보자."

"그래 이 자식아, 어디 한번 마음껏 덤벼봐라ㅡ."

두 다리를 쩌억 벌리고 사격자세를 마친 두 사나이는 누가 먼저라고 할것도 없이 아래배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드디여 건장한 두 사나이의 몸밖을 빠져 나온 거세찬 두줄기의 물줄기가 약속이나 한듯이 낮다란 담장을 씽씽 날아넘는다. 그것은 어쩌면 오래동안 억눌려 온 아슬아슬한 폭발이 아니라 사나이의 자신감과 그 어떤 한계를 한방에 겨냥한 정확하고도 당당한 폭격이였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아니 저것들이 아예 미친거 아니야, 아이구 챙피해라 ㅡ"

"참 수캐들이란 아무데서나 못 말리는 족속들이야 ㅡ 쯧쯧쯧 ㅡ"

그러건 말건 경식이와 석철이는 마치 개선장군이나 된듯이 서로가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새파랗던 동년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우리 지금 고향을 잃어버린거 맞지?"

"음 그렇구 말구"

"그럼 우리도 이제 중년이 되는거 맞지?"

"암 그렇구 말구"

"그럼 너 이걸루 시를 좀 써보라"

"짜아식, 이런걸로 어떻게 시를 써 ㅡ"

왜서인지 석철이의 석쉼한 바스톤이 바르르 바람에 떨린다. 거기에 박자 맞춰 멀리에서 숙영이와 은희가 까르르 쏟아내는 명쾌한 웃음소리가 참신한 밤공기를 마구 가르며 무수한 침방울처럼 탱글탱글 사방으로 흩어진다.

"잘 들어봐 ! 시제는 고향ㅡ 아니 '너와 나의 고향'으로 하자"

"그래 어서 읊어봐라ㅡ"

"씨발, 하늘에는 왜 여직 별 하나도 안 보이지? "

탄식이나 하듯이 경식이는 한 글자 두 글자 입 사이로 또박또박 내뱉는다

눈물도 없다
이제는 아무런 미련조차 없다
기억에 가물가물한 너와 나의 고향 그 먼저
스스로 잃어버린 나였기에
타향에 삶을 심고 삶을 아글타글 가꾸고 다듬다
뿌리 잃은 그리움들을
늦가을 찬바람에 하얗게 가루내여
젖은 해빛으로 다시금 말리운다
누가 또 알랴 이ㅡ
싱거운 오늘만큼 오늘하루를
억겁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이 긴 하루 또 그 하루가
이제는 더없이 친근한 슬픔도 아픔도 아닌
현란한 과거속의 저 찬란한 미래의 계속일지도
그렇게 끝없는 방황끝에 나는
다시금 터벅터벅 겨울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왠지 웃음마저 말랑말랑한 추억의 그 꿈 한자락엔
따스했던 어머님의 그 넓은 품이 아직 너무 시리다…

" 그래 고향이 좋지!타향이 아닌 우리들의 고향이 ㅡ "

울음이 섞인 석철이의 응답에는  왠지 비릿한 욕망이 이를 악물고 있다. 아까부터 노래방 입구에서는 숙영이와 은희가 빠알간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내 고향 동구밖에 활짝 피여난 한떨기 해당화와도 같이 발을 통통 굴러가면서 경식이와 석철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4년12월22일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