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상해 서가인]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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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상해 서가인] 언니
  • 서가인
  • 승인 2019.10.0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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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마음이 심란 할 때에는 쥐루루(巨鹿路)에 가서 걷는다. 백 년이 넘은 길은 단행선이다. 길 양 옆의 오동나무는 겨울이면 뼈대만 앙상하고 여름이 오면 잎이 무성하여 아무리 더운 날씨여도 이 길에만 들어서면 다른 세상에 온 듯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겨울이면 앙상한 나무 가지 사이로 비쳐 드는 부드러운 햇빛은 걷는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이 길을 걸은 지도 십년이 퍽 넘었다. 양 옆의 인도는 두사람도 나란히 걸을 수 없게 좁다 혼자 걸으며 사색 하기에 딱 좋다.
 
상해에 와서 이것 저것에 손을 댔으나 모두 실패했다. 삼 년 전에 시작한 일을 지금까지 끌고 왔는데 이 일도 갈수록 태산이다.
 
일이 힘들수록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오애경이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오애경이를 알게 된 것은 4년전 연말 상해 조선족 송년회 때였다. 노래 춤 언변 등 모든 것에서 빠지지 않은 나는 꾀 인기가 있었다. 모두 나를 보더니 다가와서 반겨준다. 두둥실 뜬 기분이다.
 
앞쪽상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낯 모를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가까이 지내왔던 친구한테 물으니 그 유명한 오 애경도 모르냐, 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항상 남편이 행사에 참가하군 하였는데 오늘은 아내되는 분이 나왔다. 남편은 영화배우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키도 크고 잘 생겼는데 모임 때마다 같이 춤추고 노래하며 새벽까지 놀다 헤어지곤 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다가가서 인사를 하였다. 살짝 일어서서 악수를 하는데 카리스마가 넘쳤다.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대신 나왔다고 한다. 오애경은 회의가 끝난 후 언제 돌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전에 전화 번호를 알아 두어 다행이다.
 
그동안 오애경의 남편과 익숙해져서 회사의 정황을 다소나마 알고 있었다. 전국의 몇 백 개 큰 마트에다 일용품을 납품하는 데다 유럽 수출도 활발히 진행된다는 말도 들었다. 모든 업무는 오애경이 지휘 한다고 한다. 오 애경 남편은 기업하는 데는 흥취가 별로 없고 짧은 인생을 즐겁게 놀다가는 게 그의 인생 철학이었다.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노는 장소면 어디에나 얼굴이 보였다.
 
치치하르에서 해남도까지 전국 20여개 도시에 사무소와 분회사가 있다 보니 오애경은 항상 이 도시에서 저 도시의 공항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전화를 몇 번 하여서야 약속을 잡을 수가 있었다. 화샤중로에 있는 4층 건물에 사무실은 4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일층에 둥근 테이블이 놓인 큰 회의실이 보였다. 2층과 3층에는 분주히 오가는 직원들이 보였다.
 
4층에서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간이 창고가 보였다. 큰문이 양쪽으로 두개 있는데 한쪽문으로는 짐을 싣는 봉고차가 들어가고 한쪽문으로는 나오고 있었다. 차를 세워 놓은 뒷마당이 꽤 벏어 보였다. 슬쩍, 짐 나르는 차가 몇 대느냐고 물었더니 열 다섯대라고 하였다. 심장이 콩당콩당 뛰었다.
 
많은 자본금이 필요 하였을 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하던 일이 시원치 않아 접으려던 중 새 사업이면 이것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오 애경이 상해에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작정 찾아가서 그의 시간을 뺴앗곤 하였다.
 
몇달이 흐르면서 자주 찾아 갔으나 한번도 나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렇게 겸손 할까 하고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어떤 때는 한주일에 두 세번 간 적도 있었다. 오애경은 점점 출장을 적게 나갔다. 나한테는 너무 좋은 시간들이었다. 언제부터는 언니라고 불렀다. 그도 여 동생이 여럿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언니라고 부르니 미소를 지으며 받아 주었다.
 
지금 나의 남편은 나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좋은 남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등 소평의 남순강화(南巡讲话)후 나는 지금의 루자주이에 땅을 투자했다. 동북의 성 소재지 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내가 교원 생활을 그만두고 낯설고 땅 설은 곳에 간다니 하니 집안이 왈칵 뒤집힐 만도 했다.
 
남편은 반대 하다가 안 되니 장모를 내세웠다. 어머니는 울며 불며 그 먼 곳에 가려면 인연을 끓고 가라 하셨다.
 
결국 투자한 땅은 남에게 넘겨주고 한국에 갔다. 만약 그때 루자주이에서 건설 사업을 시작하였다면 나는 지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성정부에서 한자리 하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한국에 갔다가 서울의 유명 대학에서 1년 동안 중국 역사를 가르쳤다.
 
한국에서 몇 년 있었다. 그때 번 돈으로 루자주이에 있는 진마오타워(金茂大厦) 가 바라 보이는 아파트 두 채를 샀다. 우회전으로 상해로 왔다. 남편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다. 퇴직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상해로 모셔 왔다.
 
나는 언니처럼 멋있게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화려한 겉 모습과 달리 사업은 강단에서 하는 강의와는 천양 지차였다. 사업은 소리 없는 전쟁터인 걸 몰랐다.
 
출장을 자주 가지 않는 언니는 본사에 앉아서 전국의 분회사를 하나하나 씩 철거하고 있었다. 까르푸 대윤발(大润发) 이마트 등 11개선의 몇 백 개 매장(卖场)을 조금씩 줄이고 있었다.
 
마침 남편이 한국의 식품 회사를 소개해 주어서 중국 전역에 있는 마트에 납품하려고 나는 신이 나서 돌아 다녔다.
 
어느 날 언니가 같이 식사하자고 전화가 왔다. 진마오타워안에 있는 식당에서 만났다. 나는 너무 기뻤다. 내가 산다고 해도 오늘만은 자기가 살 테니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사라고 하였다. 밥을 먹 은 후 언니는 차 한모금을 마신 후 평시와 달리 엄숙한 기분으로 나에게 부탁하다 싶이 말했다.
 
아직 시작을 안 했기에 하는 말인데, 이 바닥에 뛰어들 지 말라고 하였다. 물이 너무 깊기에 잘못 뛰어 들었다가는  헤어 나오기 힘들 거라고 말하였다.
 
나의 귀에는 언니의 말이 조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웃기고 있네, 하고 생각했다. 언니가 내속을 들여다본 것 같다. 갑자기 언니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마트의 구매 담당자를 만나면 주의할 점 등을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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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후의 어느 날 ,곤경에 빠져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문뜩 언니가 생각났다. 언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비서한테 전화하니 산속에 들어가서 받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나의 지금 상황은 중국 사자성어에 나오는 초두난액 (焦头烂额, 대단히 낭패하고 곤경에 빠진 모양) 이 네  글자와 같다.

그때 언니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게 후회됐다. 이제는 호미난방이다. 범의 잔등에 올라 탔으니 갈 때 까지 가야 한다.
 
큰 마트에 납품 하려면 수선 자금이 충족 해야 한다. 60일에서 90일 결제인데 보통 90일로 보면 된다. 매장이 많을수록 마트에 깔린 제품도 많아지니 자금도 생각밖으로 많이 수요 된다. 물품을 납품하는 동시에 영수증을 동봉하기에 제품 값이 들어오기 전에 17%세를 먼저 내야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후 롯데와 사드의 영향으로 콘테이너에 실린 식품이 상해항에, 여름의 뙈약볕에 공공연히 묶여 있는 바람에 두 달 후 통과를 허가 받았으나 그때는 버려야 하는 물건이 되였다.
 
언니가 밥을 사주면서까지 말렸는데 나는 허영에 눈이 어두워 빛 좋은 개 살구가 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유동 자금이 모자라 아파트 한 채를 팔았다.
 
몇 년이 흘렀다. 언니는 그 큰 회사를 모두 정리하고 포동의 어느 고즈넉한 골목에서 조그마한 커피점을 한다고 한다.
 
언니가 정말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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